"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사랑해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 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 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창세기19장 30~38절]
두 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인 뒤 사랑해(性交)를 해서 자손을 보았다니,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엽기적인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기독교인에게 말해주면 그런 근친상간 때문에, 그들의 후손인 모압과 암몬 족이 여호와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롯에 대해서 의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것도 신약성경에서 말이다.
"무법한 자의 사랑해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베드로 후서 2장 7절]
위의 신약 속의 구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롯이 의로운 자라고 적혀있지 않는가? 또한 롯은 멸망해버린 소돔성에서 여호와에게 유일하게 선택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어디 성경 속의 근친상간이 그 구절뿐인가? 근친상간은 구약의 율법 속에 엄연히 구정 되어 있다. 여러 형제가 장가를 갔는데 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형수는 과부로 살아야 할까? 아니면 재혼을 할까? 구약성경의 율법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실행해야 한다.
"시동생이 그(=형수)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난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 [신명기 25장 5~6절]
즉,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을 경우엔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여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지 않으려 할 경우 어떻게 하라고 했을까? 그럴 때는 형수가 성내 장로들에게 찾아가 시동생이 의무를 하려 하지 않는다고 호소하라고 했다. 그러면 장로들이 그를 불러 타이르고, 그래도 끝까지 아내로 맞고 싶지 않다고 하면 신명기 25장 9절에 따르면 형수가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욕을 해 주라고 하였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 학자들은 이런 근친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즉,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 과부는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여자의 인권을 보호하려고 제정된 것이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시동생이 형수의 생계만 책임지면 될 일이지, 형수와 동침해서 자식까지 낳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래 언급할 창세기의 오난의 경우에는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형수를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체외사정(體外射精)을 했다가 여호와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형이 자식을 남기고 죽었을 경우의 과부는 어떻게 되는지 언급이 없다. 자식이 있을 경우에 오히려 생계가 곤란한 게 아닌가?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근친혼(近親婚)은 과부가 생겼을 때만 행했던 것이 아니다.
오나니즘(onanism)이란 말은 사랑해 중절(사랑해를 중간에 그만 둔다는 것)이나 수음(手淫)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의 속된 말로는 흔히들 '오나니'라고도 한다. 창세기38장에는 '유대인'이란 말의 기원이 되었던,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유다와 그의 아들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다의 큰 아들이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자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onan)에게 형수에게 장가들어 큰 아들의 씨를 남기게 한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창세기 38장 9~10절]
위의 '개역한글판'은 완전히 엉터리 번역이다. '공동번역판'의 동구 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오난은 형수와 한자리에 들었을 때 정액을 바닥에 흘려 형에게 후손을 남겨주지 않으려 하였다. 그가 한 이런 짓은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이었으므로 야훼께서는 그도 죽이셨다." [창세기 38장 9~10절 / 공동번역판]
개신교인들이 보는 개역한글판은 정말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왜곡이 심하다. 특히 "정액을 땅에 흘렸다"는 말을 "땅에 설정하다"라는 극악의 번역에는 정말 할말을 잃게 만든다. '설정'이라는 단어는 도대체 무엇인지 필자가 갖고 있는 국어사전을 살펴봐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설명밖에 안 나온다. 설정이라는 말이 泄情을 뜻하는 단어인가? 국어사전에도 없는 희한한 단어만 골라서 낯 뜨거운 장면을 무마한 개역한글판 성경의 필진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어쨌든 이야기가 좀 빗나가기는 했지만, 형수가 아이를 낳아봤자 자기 아들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오난은 정액을 밖에 흘려버렸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오나니즘'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또, 위에서 언급한 창세기 38장에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간의 사랑해도 나타난다. '유대인'이라는 말이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유다는 유대인의 족보에서는 중요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예수의 조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유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장가 들어 아들도 낳지 못하고 죽고, 둘째 아들도 형수에게 장가들었다가 여호와의 눈밖에 나 죽자, 이제는 셋째 아들을 맏며느리에게 장가 보내려고 했는데 셋째는 아직 장가들 만큼 나이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유다는 셋째 아들이 크면 결혼시켜주기로 약속하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 보냈다. 세월이 흘러 셋째가 장가들 만큼 컸는데도 결혼을 시켜주지 않자 며느리는 한 꾀를 생각했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지나갈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 사랑해로 분장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함께 했다. 그리고 화대로는 나중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받기로 하고 우선 담보로 그의 도장과 지팡이를 받아 놓았다. 그 후 유다가 친구를 통해 담보를 찾으러 보내자 숨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유다는 도장과 지팡이를 찾지 못했고 그 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몇 달 후, 친정에 가 있는 자신의 며느리가 사랑해 짓을 하다 임신했다는 말을 듣게 된 유다는 며느리를 끌어내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며느리는 유다로부터 담보로 받은 도장과 지팡이를 내 보이며 이 물건의 임자가 배 속에 든 아이의 아버지라고 고백했다. 그렇게 해서 그 며느리는 죽음에서 벗어나 아이를 낳았다. 시아버지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이 통정해서 낳은 아이가 곧 다윗의 조상이요, 예수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인 '베레스'이다.
이 외에도 아브라함은 사래와 결혼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창세기 20장에는 그녀가 아브라함의 이복누이동생으로 나와있다. 또, 창세기 11장 26~29절을 보면 나홀(아브라함과 형제)은 조카와 결혼했고, 창세기 24장에서는 이삭과 결혼할 그의 아내 리브가는 사촌지간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참으로 훌륭한 조상들을 둔 셈이다.
물론,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이 여호와가 이른다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 찌니라" [레위기 18장 6절~7절]
이 글 뒤에 계속 이어지는 레위기 18장 6절~23절까지 근친상간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친족끼리 결혼하는 근친결혼이나 형수를 물려받는 풍습은 예외였다. 물론, 근친상간은 자손번영이 큰 과제였던 고대인들에게는 허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이 언제까지나 이런 케케묵은 책을 거룩하다고 할 것인가?
구약성경중의 아가서는 권위주의적인 종교경전의 모습이 아니라 대중적인 연애서적(戀愛書籍)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아가서는 목사들이 설교할 때 거의 손도 대지 않는 부분으로도 유명하다. 혹자는 아가서의 관능적 표현이 심오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있는데, 이는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궤변(詭辯)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약성서새번역4권에 실린 아가서에 대한 설명을 옮겨보겠다.
"여덟 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책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들 중의 하나를 안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아가가 구약성서 안에서 갖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이 사랑의 시(또는 연애시집)는 도대체 구약성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무슨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아가는 매우 관능적인 표현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느님이나 어떤 신앙 조목, 또는 사랑의 윤리적 의미라든가 사랑의 결과로서의 출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오로지 육체적인 아름다움에만 전념한다. 그 안에는 타민족들의 연애시에 가까운 내용과 형태뿐만이 아니라, 이교(異敎)와 신화의 잔재들도 들어 있다. 게다가 해석을 위한 명백한 열쇠는 하나도 제공되지 않는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임승필번역/구약성서새번역4-룻기,아가,코헬렛<전도서>,애가,에스델(축제오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아가서에 대한 입문 中]
그렇다면 8장으로 구성된 아가서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살펴보면 알겠지만 아가서에서는 사랑해, 허벅지, 배꼽, 입술,머리카락 등의 여성의 신체에 대한 찬가로 가득하다. 지면관계상 아주 선정적인 부분만을 추려보겠다.
"네 두 사랑해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아가 4장 5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아가 5장 3절]
윗 구절은 공동번역판을 보면 뜻이 더욱 확실해 진다.
"나는 속옷까지 벗었는데, 옷을 다시 입어야 할까요?"
정말 선정적이지 않은가!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사랑해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아가 7장 1~3절]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사랑해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사랑해은 포도 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아가 7장 7~8절]
놀랍게도 아가서에서는 여성의 육체에 대해 탐미적인 표현이 가득하다.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아가 7장 13절]
7장 13절에는 합환채라는 식물이 등장하는데, 공동번역판에는 자귀나무, 새번역성서에는 만드라고라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식물에 대해 구약성서새번역4권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놓았다.
"22. 학명은 Mandragora officinarum(영어로는 mandrake). 지중해변에서 자라는 이 풀은 줄기가 없고 넓은 잎에서는 냄새가 나며 누런 열매를 맺는다. 그 뿌리가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통속적으로는 임신 촉진제로 쓰여졌다(창세 30,14-16). 그러나 히브리 낱말이 가리키는 것이 이 식물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마약제와 사랑해의 집합명사일 수도 있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임승필번역/ 구약성서새번역4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아가서에 대한 주석 中]
놀랍게도 그 식물이 임신촉매제, 혹은 마약이나 사랑해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아가 8장 1절]
윗 구절의 공동번역판 동 구절에는 "아, 임이여, 우리가 한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누이라면, 밖에서 만나 거리낌없이 입을 맞추어 드리련만" 이라고 번역 되어 있다. 친남매 사이간에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키스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한국의 독자들에게 다소 충격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사랑해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아가 8장 8절]
"나는 성벽이요 나의 사랑해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아가 8장 10절]
이상으로 아가서에 대한 분석을 마친다. 이처럼 목사들이 펼치기를 두려워하는 구약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권위주의에 빠진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겐 충격이겠지만 말이다.
루돌프 불트만(Rudoph Bultmann)의 양식비평에 따르면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 추종자들에 의해 기록된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이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가 아니라는 것이다.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란 복음서가 형성되기 이전에 여러 구전(oral traditions)들이 전해졌다고 보고, 그 구전들을 여러 양식(forms)으로 분류하여 원래의 상황(Sitz)들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을 통해 불트만은 지금의 복음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대 교회 당시 예수에 관한 많은 구전들과 이야기들이 존재했었고, 교회라는 공동체가 이러한 것들을 그들 의도대로 편집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 나오는 "다음날". "즉시", "길 가실 때에" 등의 말들은 여러 다른 구전 자료들을 서로 잇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서 안에 있는 문서, 시간, 장소 등의 표시는 비역사적이며 믿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러한 것들은 다 떼어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초대 교회의 인위적인 편집을 해체하여 이 기록에 들어있는 구전의 원 형태를 찾아 최초의 전승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아무리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할지라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이교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은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다소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계에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신화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종교사학파'를 비롯하여, '탈신화화'를 주창한 불트만과 미국의 '예수 세미나' 학파에게 이르기까지 예수의 일대기에서 신화를 걷어내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시도 되었다. 충격적이겠지만,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기독교계를 강타한 '예수는 신화다' [티모스 프리크 & 피터 갠디/ 예수는 신화다 / 승영조 역/ 동아일보/ 2002 - 원제: Timothy Freke & Peter Gandy / The Jesus Mysteries /Harmony Books. New York - 한국판이 출판된 적이 있으나 한기총의 협박으로 현재 출판정지! ]에서는 동정녀 탄생과 부활은 물론, 예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이교도 신화와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티모스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예수에게서 이교도 신화와 헬라철학을 걷어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필자는 대체적으로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다음 장에서는 예수에게 씌워진 신화의 장막을 걷어낼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이교도 신화와 헬라철학을 걷어내면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필자는 약간의 의구심이 남는다.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이교도 신화와 헬라철학을 걷어내고 남겨지는 것은 전혀 낯선 모습의 이상한 예수이다!
(1)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혁명가?
가롯 유다는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먹은 배신자로 모든 기독교인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한 구체적 기록을 더듬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예컨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가 실망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베다니에 있을 때 마리아라는 여성이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다. 당시 향유는 일반인은 만지지도 못할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다. 그러자 가롯 유다가 "어째서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고 꾸중하자, 예수는 그 여자의 행위를 옹호한다. [요한복음 12장 3~8절, 마가복음 14장 3~9절, 마태복음 26장 6~13절]. 가롯 유다는 이러한 예수에게 실망을 느낀 것이 아닐까? (반면에 누가복음 22장과 요한복음 13장에는 '악마' 가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다소 엇갈리는 설명이 나와 있다.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한국목사들은 예수에게 아낌없이 바치는 이 구절을 악용하여 신도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데 심심하면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
유다 이름의 가롯(Iscariot: 이스가리옷)은 당시 열심당(Zealots)을 지칭하는 단어인 '자객'(sicarri)과 라틴어 '시카리우스'(sicarius) 발음상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자객'(sicarri)은 열심당 계열의 엘리트로 직업적인 암살자를 칭하는 말이었다. 슐테스(Schulthess)와 벨하우젠(Wellhausen)은 '가롯'(이스카리옷)은 아람어로 암살자를 뜻하는 이스카르야아('isqarya"a)에서 파생된 말로 보고 있다. [정인찬 / 성서대백과사전 / 서울: 기독지혜사, 1992 / P.67] 그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로마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 이길 바라는 열심당원이었기 때문에 실망해서 배반했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가롯 유다뿐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이름 역시 열심당원임을 시사해준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는 시몬 베드로를 가르켜 '무법자'라는 뜻으로써 열심당원들에게 흔하게 따라붙는 이름이었던 'baryona'에서 파생된 '바르요나'(Bar-jona)로 부른다. 예수는 마가복음 3장 17절에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과 요한을 가르켜 '보아너게'(Boanerges) 즉 '천둥의 아들'(sons of thunder)이라 불렀다. 누가복음 9장 51~55절에서 야고보는 그런 별명을 얻기에 합당한 발언을 하는데, 예수를 환대하지 않는 사마리아 전역을 불로 태워버리자고 주장한다! 히브리어로 '천둥의 아들들'(benei ra'ash)역시 당시에 열심당을 부르는 또 다른 말이었다.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누가복음 6장 15절]
- 공동번역판에는 "혁명당원 시몬"
또 한 명의 제자인 시몬은 열심당(Zealots)이었다고 한다(시몬 베드로와는 또 다른 사람이다). 누가복음에서 등장한 '열심당원 시몬'이 마태복음 10장 4절에는 '가나안 사람 시몬'으로 등장하는데 원래 희랍어 원문의 '카나나이오스 시몬'의 오역이라고 한다. '카나나이오스'는 '열광적'을 의미하는 열심당에 대한 아람어 이다.
또한 예수와 함께 못박힌 두 강도는 열심당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유대인의 무장투쟁으로 인해 로마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종종 십자가형을 사용했다고 한다.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자면 "십자가형은 사망의 모든 방법 중에서 가장 파멸적인 것" 이라고 했는데, 당시에 무장투쟁을 일으킨 수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십자가 처형은 일반적인 범죄자보다는 반역죄인에게 주로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열심당원들은 당시에 강도라고도 불렸다.
앞서 필자가 '시대상황과 무관한 복음서'라는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전해지는 복음서 속에서는 당시 피 바람이 몰아치던 당시 유대사회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 제자들의 이름 속에서 열심당의 흔적이 무수히 발견되는 것은 무엇일까?
(2) 칼을 뽑아 든 예수!
예수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사랑과 평화의 예수'이다. 그러나 4복음서를 살펴보면 숨겨진 예수의 또 다른 단면을 살펴보고 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또 다른 예수의 단면은 우리가 보아온 예수 영화 속에 표현된 그런 성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또 다른 예수의 모습은 다분히 독단적이고 위협적이며 권력자를 연상케 하는 언행을 거침없이 사용하여 인자하거나 후덕해 보이지 않는다. 안티 기독교 운동가들은 납득하기 힘든 이러한 예수의 언행을 지적한바 있다. 마찬가지로 필자도 안티 기독교 활동을 하던 예전에는 예수의 납득하기 힘든 언행을 지적한 바 있으나, 곰곰이 따져본 결과 무엇인가 감이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납득하기 힘든 이러한 예수의 언행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서 분석을 시도 해보고자 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사랑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태복음 10장 34~39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장 51장~53절]
일반인들이 예수에 대해 갖고 있는 평화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대비되는 구절이다. 위의 구절을 음미해보면, 예수는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려고 왔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위와 같은 예수의 말은 오늘날의 사이비종교 교주가 지껄일 법한 말이지만, 당시의 시대상황과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상당히 다른 의미가 될 수가 있다!
4복음서 모두 검을 숨기고 있는 제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예수의 체포 당시 제자들이 저항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田土)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복음 1장 29절]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마태복음 10장 21절]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말하면서, 부모도 형제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 배를 상속받고 또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서 모든 예수의 추종자들은 부모 형제도 재산도 모두 버려야 한다. 예수는 뻔뻔하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한 예는 또 있다. "부친의 죽음에 대하여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하여 주소서"라고 제자가 간청하자,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누가복음 9장 59~60절]라고 예수는 대답한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예수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사이비교주가 신도들에게 집도, 가족도 버리고,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예수는 자기 스스로 분쟁을 일으키고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당시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며 유대민족을 선동한 사람이 있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테우다스(Theudas)라는 자는 사막에서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며 추종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무리들을 모아 서쪽 예루살렘으로 진군을 시도했지만, 로마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C. Cuspius Fadus)에 의해 무참히 살육되었다고 한다.
물론, 테우다스(Theudas)와 예수를 동일시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선동했던 지도자들이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던 것을 고려해 보면 예수의 납득하기 힘든 말도 이해가 될 수 있다. 당시의 유대사회의 집권층이었던 사두개파들이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반면에, 무장독립투쟁을 선동했던 사람들은 '제4의철학'과 같은 영혼불멸과 부활의 사상을 설파하면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것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 성경은 근친상간을 조장하는가? ◆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사랑해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 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 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창세기19장 30~38절]
두 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인 뒤 사랑해(性交)를 해서 자손을 보았다니,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엽기적인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기독교인에게 말해주면 그런 근친상간 때문에, 그들의 후손인 모압과 암몬 족이 여호와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롯에 대해서 의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것도 신약성경에서 말이다.
"무법한 자의 사랑해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베드로 후서 2장 7절]
위의 신약 속의 구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롯이 의로운 자라고 적혀있지 않는가? 또한 롯은 멸망해버린 소돔성에서 여호와에게 유일하게 선택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어디 성경 속의 근친상간이 그 구절뿐인가? 근친상간은 구약의 율법 속에 엄연히 구정 되어 있다. 여러 형제가 장가를 갔는데 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형수는 과부로 살아야 할까? 아니면 재혼을 할까? 구약성경의 율법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실행해야 한다.
"시동생이 그(=형수)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난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 [신명기 25장 5~6절]
즉,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을 경우엔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여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지 않으려 할 경우 어떻게 하라고 했을까? 그럴 때는 형수가 성내 장로들에게 찾아가 시동생이 의무를 하려 하지 않는다고 호소하라고 했다. 그러면 장로들이 그를 불러 타이르고, 그래도 끝까지 아내로 맞고 싶지 않다고 하면 신명기 25장 9절에 따르면 형수가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욕을 해 주라고 하였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 학자들은 이런 근친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즉,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 과부는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여자의 인권을 보호하려고 제정된 것이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시동생이 형수의 생계만 책임지면 될 일이지, 형수와 동침해서 자식까지 낳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래 언급할 창세기의 오난의 경우에는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형수를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체외사정(體外射精)을 했다가 여호와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형이 자식을 남기고 죽었을 경우의 과부는 어떻게 되는지 언급이 없다. 자식이 있을 경우에 오히려 생계가 곤란한 게 아닌가?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근친혼(近親婚)은 과부가 생겼을 때만 행했던 것이 아니다.
오나니즘(onanism)이란 말은 사랑해 중절(사랑해를 중간에 그만 둔다는 것)이나 수음(手淫)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의 속된 말로는 흔히들 '오나니'라고도 한다. 창세기38장에는 '유대인'이란 말의 기원이 되었던,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유다와 그의 아들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다의 큰 아들이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자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onan)에게 형수에게 장가들어 큰 아들의 씨를 남기게 한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창세기 38장 9~10절]
위의 '개역한글판'은 완전히 엉터리 번역이다. '공동번역판'의 동구 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오난은 형수와 한자리에 들었을 때 정액을 바닥에 흘려 형에게 후손을 남겨주지 않으려 하였다. 그가 한 이런 짓은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이었으므로 야훼께서는 그도 죽이셨다." [창세기 38장 9~10절 / 공동번역판]
개신교인들이 보는 개역한글판은 정말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왜곡이 심하다. 특히 "정액을 땅에 흘렸다"는 말을 "땅에 설정하다"라는 극악의 번역에는 정말 할말을 잃게 만든다. '설정'이라는 단어는 도대체 무엇인지 필자가 갖고 있는 국어사전을 살펴봐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설명밖에 안 나온다. 설정이라는 말이 泄情을 뜻하는 단어인가? 국어사전에도 없는 희한한 단어만 골라서 낯 뜨거운 장면을 무마한 개역한글판 성경의 필진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어쨌든 이야기가 좀 빗나가기는 했지만, 형수가 아이를 낳아봤자 자기 아들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오난은 정액을 밖에 흘려버렸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오나니즘'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또, 위에서 언급한 창세기 38장에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간의 사랑해도 나타난다. '유대인'이라는 말이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유다는 유대인의 족보에서는 중요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예수의 조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유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장가 들어 아들도 낳지 못하고 죽고, 둘째 아들도 형수에게 장가들었다가 여호와의 눈밖에 나 죽자, 이제는 셋째 아들을 맏며느리에게 장가 보내려고 했는데 셋째는 아직 장가들 만큼 나이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유다는 셋째 아들이 크면 결혼시켜주기로 약속하고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 보냈다. 세월이 흘러 셋째가 장가들 만큼 컸는데도 결혼을 시켜주지 않자 며느리는 한 꾀를 생각했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지나갈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 사랑해로 분장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함께 했다. 그리고 화대로는 나중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받기로 하고 우선 담보로 그의 도장과 지팡이를 받아 놓았다. 그 후 유다가 친구를 통해 담보를 찾으러 보내자 숨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유다는 도장과 지팡이를 찾지 못했고 그 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몇 달 후, 친정에 가 있는 자신의 며느리가 사랑해 짓을 하다 임신했다는 말을 듣게 된 유다는 며느리를 끌어내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며느리는 유다로부터 담보로 받은 도장과 지팡이를 내 보이며 이 물건의 임자가 배 속에 든 아이의 아버지라고 고백했다. 그렇게 해서 그 며느리는 죽음에서 벗어나 아이를 낳았다. 시아버지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이 통정해서 낳은 아이가 곧 다윗의 조상이요, 예수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인 '베레스'이다.
이 외에도 아브라함은 사래와 결혼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창세기 20장에는 그녀가 아브라함의 이복누이동생으로 나와있다. 또, 창세기 11장 26~29절을 보면 나홀(아브라함과 형제)은 조카와 결혼했고, 창세기 24장에서는 이삭과 결혼할 그의 아내 리브가는 사촌지간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참으로 훌륭한 조상들을 둔 셈이다.
물론,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이 여호와가 이른다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 찌니라" [레위기 18장 6절~7절]
이 글 뒤에 계속 이어지는 레위기 18장 6절~23절까지 근친상간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친족끼리 결혼하는 근친결혼이나 형수를 물려받는 풍습은 예외였다. 물론, 근친상간은 자손번영이 큰 과제였던 고대인들에게는 허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이 언제까지나 이런 케케묵은 책을 거룩하다고 할 것인가?
구약성경중의 아가서는 권위주의적인 종교경전의 모습이 아니라 대중적인 연애서적(戀愛書籍)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아가서는 목사들이 설교할 때 거의 손도 대지 않는 부분으로도 유명하다. 혹자는 아가서의 관능적 표현이 심오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있는데, 이는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궤변(詭辯)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구약성서새번역4권에 실린 아가서에 대한 설명을 옮겨보겠다.
"여덟 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책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들 중의 하나를 안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아가가 구약성서 안에서 갖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이 사랑의 시(또는 연애시집)는 도대체 구약성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무슨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아가는 매우 관능적인 표현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느님이나 어떤 신앙 조목, 또는 사랑의 윤리적 의미라든가 사랑의 결과로서의 출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오로지 육체적인 아름다움에만 전념한다. 그 안에는 타민족들의 연애시에 가까운 내용과 형태뿐만이 아니라, 이교(異敎)와 신화의 잔재들도 들어 있다. 게다가 해석을 위한 명백한 열쇠는 하나도 제공되지 않는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임승필번역/구약성서새번역4-룻기,아가,코헬렛<전도서>,애가,에스델(축제오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아가서에 대한 입문 中]
그렇다면 8장으로 구성된 아가서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살펴보면 알겠지만 아가서에서는 사랑해, 허벅지, 배꼽, 입술,머리카락 등의 여성의 신체에 대한 찬가로 가득하다. 지면관계상 아주 선정적인 부분만을 추려보겠다.
"네 두 사랑해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아가 4장 5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아가 5장 3절]
윗 구절은 공동번역판을 보면 뜻이 더욱 확실해 진다.
"나는 속옷까지 벗었는데, 옷을 다시 입어야 할까요?"
정말 선정적이지 않은가!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사랑해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아가 7장 1~3절]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사랑해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사랑해은 포도 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아가 7장 7~8절]
놀랍게도 아가서에서는 여성의 육체에 대해 탐미적인 표현이 가득하다.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아가 7장 13절]
7장 13절에는 합환채라는 식물이 등장하는데, 공동번역판에는 자귀나무, 새번역성서에는 만드라고라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식물에 대해 구약성서새번역4권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놓았다.
"22. 학명은 Mandragora officinarum(영어로는 mandrake). 지중해변에서 자라는 이 풀은 줄기가 없고 넓은 잎에서는 냄새가 나며 누런 열매를 맺는다. 그 뿌리가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통속적으로는 임신 촉진제로 쓰여졌다(창세 30,14-16). 그러나 히브리 낱말이 가리키는 것이 이 식물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마약제와 사랑해의 집합명사일 수도 있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임승필번역/ 구약성서새번역4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아가서에 대한 주석 中]
놀랍게도 그 식물이 임신촉매제, 혹은 마약이나 사랑해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아가 8장 1절]
윗 구절의 공동번역판 동 구절에는 "아, 임이여, 우리가 한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누이라면, 밖에서 만나 거리낌없이 입을 맞추어 드리련만" 이라고 번역 되어 있다. 친남매 사이간에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키스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한국의 독자들에게 다소 충격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사랑해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아가 8장 8절]
"나는 성벽이요 나의 사랑해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아가 8장 10절]
이상으로 아가서에 대한 분석을 마친다. 이처럼 목사들이 펼치기를 두려워하는 구약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권위주의에 빠진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겐 충격이겠지만 말이다.
루돌프 불트만(Rudoph Bultmann)의 양식비평에 따르면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 추종자들에 의해 기록된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이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가 아니라는 것이다.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란 복음서가 형성되기 이전에 여러 구전(oral traditions)들이 전해졌다고 보고, 그 구전들을 여러 양식(forms)으로 분류하여 원래의 상황(Sitz)들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을 통해 불트만은 지금의 복음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대 교회 당시 예수에 관한 많은 구전들과 이야기들이 존재했었고, 교회라는 공동체가 이러한 것들을 그들 의도대로 편집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 나오는 "다음날". "즉시", "길 가실 때에" 등의 말들은 여러 다른 구전 자료들을 서로 잇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서 안에 있는 문서, 시간, 장소 등의 표시는 비역사적이며 믿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러한 것들은 다 떼어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초대 교회의 인위적인 편집을 해체하여 이 기록에 들어있는 구전의 원 형태를 찾아 최초의 전승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아무리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할지라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이교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은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다소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계에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신화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독일의 '종교사학파'를 비롯하여, '탈신화화'를 주창한 불트만과 미국의 '예수 세미나' 학파에게 이르기까지 예수의 일대기에서 신화를 걷어내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시도 되었다. 충격적이겠지만,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기독교계를 강타한 '예수는 신화다' [티모스 프리크 & 피터 갠디/ 예수는 신화다 / 승영조 역/ 동아일보/ 2002 - 원제: Timothy Freke & Peter Gandy / The Jesus Mysteries /Harmony Books. New York - 한국판이 출판된 적이 있으나 한기총의 협박으로 현재 출판정지! ]에서는 동정녀 탄생과 부활은 물론, 예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이교도 신화와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티모스 프리크와 피터 갠디는 예수에게서 이교도 신화와 헬라철학을 걷어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필자는 대체적으로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다음 장에서는 예수에게 씌워진 신화의 장막을 걷어낼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이교도 신화와 헬라철학을 걷어내면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필자는 약간의 의구심이 남는다.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이교도 신화와 헬라철학을 걷어내고 남겨지는 것은 전혀 낯선 모습의 이상한 예수이다!
(1)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혁명가?
가롯 유다는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먹은 배신자로 모든 기독교인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한 구체적 기록을 더듬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예컨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가 실망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베다니에 있을 때 마리아라는 여성이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다. 당시 향유는 일반인은 만지지도 못할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다. 그러자 가롯 유다가 "어째서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고 꾸중하자, 예수는 그 여자의 행위를 옹호한다. [요한복음 12장 3~8절, 마가복음 14장 3~9절, 마태복음 26장 6~13절]. 가롯 유다는 이러한 예수에게 실망을 느낀 것이 아닐까? (반면에 누가복음 22장과 요한복음 13장에는 '악마' 가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다소 엇갈리는 설명이 나와 있다.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한국목사들은 예수에게 아낌없이 바치는 이 구절을 악용하여 신도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데 심심하면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
유다 이름의 가롯(Iscariot: 이스가리옷)은 당시 열심당(Zealots)을 지칭하는 단어인 '자객'(sicarri)과 라틴어 '시카리우스'(sicarius) 발음상 매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자객'(sicarri)은 열심당 계열의 엘리트로 직업적인 암살자를 칭하는 말이었다. 슐테스(Schulthess)와 벨하우젠(Wellhausen)은 '가롯'(이스카리옷)은 아람어로 암살자를 뜻하는 이스카르야아('isqarya"a)에서 파생된 말로 보고 있다. [정인찬 / 성서대백과사전 / 서울: 기독지혜사, 1992 / P.67] 그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로마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 이길 바라는 열심당원이었기 때문에 실망해서 배반했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가롯 유다뿐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이름 역시 열심당원임을 시사해준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는 시몬 베드로를 가르켜 '무법자'라는 뜻으로써 열심당원들에게 흔하게 따라붙는 이름이었던 'baryona'에서 파생된 '바르요나'(Bar-jona)로 부른다. 예수는 마가복음 3장 17절에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과 요한을 가르켜 '보아너게'(Boanerges) 즉 '천둥의 아들'(sons of thunder)이라 불렀다. 누가복음 9장 51~55절에서 야고보는 그런 별명을 얻기에 합당한 발언을 하는데, 예수를 환대하지 않는 사마리아 전역을 불로 태워버리자고 주장한다! 히브리어로 '천둥의 아들들'(benei ra'ash)역시 당시에 열심당을 부르는 또 다른 말이었다.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누가복음 6장 15절]
- 공동번역판에는 "혁명당원 시몬"
또 한 명의 제자인 시몬은 열심당(Zealots)이었다고 한다(시몬 베드로와는 또 다른 사람이다). 누가복음에서 등장한 '열심당원 시몬'이 마태복음 10장 4절에는 '가나안 사람 시몬'으로 등장하는데 원래 희랍어 원문의 '카나나이오스 시몬'의 오역이라고 한다. '카나나이오스'는 '열광적'을 의미하는 열심당에 대한 아람어 이다.
또한 예수와 함께 못박힌 두 강도는 열심당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유대인의 무장투쟁으로 인해 로마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종종 십자가형을 사용했다고 한다.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자면 "십자가형은 사망의 모든 방법 중에서 가장 파멸적인 것" 이라고 했는데, 당시에 무장투쟁을 일으킨 수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십자가 처형은 일반적인 범죄자보다는 반역죄인에게 주로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열심당원들은 당시에 강도라고도 불렸다.
앞서 필자가 '시대상황과 무관한 복음서'라는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전해지는 복음서 속에서는 당시 피 바람이 몰아치던 당시 유대사회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 제자들의 이름 속에서 열심당의 흔적이 무수히 발견되는 것은 무엇일까?
(2) 칼을 뽑아 든 예수!
예수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사랑과 평화의 예수'이다. 그러나 4복음서를 살펴보면 숨겨진 예수의 또 다른 단면을 살펴보고 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또 다른 예수의 단면은 우리가 보아온 예수 영화 속에 표현된 그런 성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또 다른 예수의 모습은 다분히 독단적이고 위협적이며 권력자를 연상케 하는 언행을 거침없이 사용하여 인자하거나 후덕해 보이지 않는다. 안티 기독교 운동가들은 납득하기 힘든 이러한 예수의 언행을 지적한바 있다. 마찬가지로 필자도 안티 기독교 활동을 하던 예전에는 예수의 납득하기 힘든 언행을 지적한 바 있으나, 곰곰이 따져본 결과 무엇인가 감이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납득하기 힘든 이러한 예수의 언행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서 분석을 시도 해보고자 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사랑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태복음 10장 34~39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장 51장~53절]
일반인들이 예수에 대해 갖고 있는 평화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대비되는 구절이다. 위의 구절을 음미해보면, 예수는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려고 왔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위와 같은 예수의 말은 오늘날의 사이비종교 교주가 지껄일 법한 말이지만, 당시의 시대상황과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상당히 다른 의미가 될 수가 있다!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 [누가복음 22장 36절]
예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검을 소유하고 사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제자들은 재빨리 품에서 검 두 자루를 내어 보인다.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22장 38절]
예수는 제자들이 품속에 지녔던 검을 꺼내 보이자 만족해 한다.
4복음서 모두 검을 숨기고 있는 제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예수의 체포 당시 제자들이 저항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田土)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복음 1장 29절]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마태복음 10장 21절]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말하면서, 부모도 형제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 배를 상속받고 또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서 모든 예수의 추종자들은 부모 형제도 재산도 모두 버려야 한다. 예수는 뻔뻔하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한 예는 또 있다. "부친의 죽음에 대하여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하여 주소서"라고 제자가 간청하자,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누가복음 9장 59~60절]라고 예수는 대답한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예수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사이비교주가 신도들에게 집도, 가족도 버리고,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예수는 자기 스스로 분쟁을 일으키고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당시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며 유대민족을 선동한 사람이 있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테우다스(Theudas)라는 자는 사막에서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하며 추종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무리들을 모아 서쪽 예루살렘으로 진군을 시도했지만, 로마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C. Cuspius Fadus)에 의해 무참히 살육되었다고 한다.
물론, 테우다스(Theudas)와 예수를 동일시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선동했던 지도자들이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던 것을 고려해 보면 예수의 납득하기 힘든 말도 이해가 될 수 있다. 당시의 유대사회의 집권층이었던 사두개파들이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반면에, 무장독립투쟁을 선동했던 사람들은 '제4의철학'과 같은 영혼불멸과 부활의 사상을 설파하면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것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