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을 앞둔 일제는 1939년 7월 국민징용령을 내렸다. 일제는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조선노동자 내지(일본)이주’를 조선총독부에 지시했다. 조선총독부는 ‘모집’을 빙자한 강제연행으로 2백만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한국인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탄광 60만명,군수공장 40만명, 토목공사 30만명, 금속광산 15만명, 항만공사 5만명, 군인 또는 군속자 15만명, 종군위안부 13만명(박경식 ‘제일조선인운동사’ p312)이 동원됐다. 이중 1940년 4월부터 11월까지 초세이(장생.長生) 탄광에 모집된 조선인은 480여명에 이른다. 당시 992명의 인부가 15만톤의 석탄을 생산하는 일본에서 가장 큰 해저탄광이었다. 1942년 2월 3일 이른 아침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시 니시키와 해변의 바다 밑 초세이탄광에서 채광작업을 하다 해저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로 180여명이 산채로 갱도에 수장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희생자 136명 대부분은 한반도에서 강제연행 되어 온 남자들로 “탄 한 상자 더 캐고 죽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하루 14시간 노동에 일당 2원을 받으며 일했다.당시 조선인의 목숨은 탄 한 상자보다 가치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사고가 나기 한 달 전 탄광에 바닷물이 새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인만 강제로 비번까지 밀어 강제 작업시켰다. 사고는 해안에서 1km남짓한 바다 밑에서 암반이 무너지면서 해저갱도에 충격이 가해져 물이 스며 들어 갱도가 무너지면서 발생했다. 물 위로 간신히 살아 올라온 생존자들을 일본인들이 다시 강제로 물속으로 밀어 넣어 많은 참사가 발생했다. ”바다위에 있는 피야(송풍관.숨구멍)에도 물이 들이치자 탄광의 공기가 빠지면서 거품이 하얗게 일면서 3일 동안 하늘을 향해 물기둥은 멈추지 않고 솟아올랐고, 니시키와 해변은 가족들의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당시 추순덕(2006년 사망) 씨는 말했다. 이 사고로 모두 180여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한국인은 136명이었다. 희생자중 한 사람은 기자의 조부이기도 하다. 69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나이 5세였던 기자의 부친은 탄광촌 인부 숙소(아리랑마을)에서 할머니와 4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지난 2001년 참혹한 현장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부모님을 모시고 초세이 탄광을 다녀왔다. 부친은 해저탄광의 송풍구 역할을 하는 피야를 바라보며 해변을 거닐다 어릴 적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모래사장 위에 띄엄띄엄 있는 석탄을 매만지다 눈물 범벅된 얼굴로 “아버지~”를 목청 높여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운 파도소리 뿐이었다. 강제연행된 한국인 숙소인 아리랑마을과 당시 탄광에서 사용했던 채광장비인 렌턴과 삽, 마스크,수통, 대형 쇠솥 등이 창고에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우베시와 탄광회사 측에서 숙소와 창고를 일부 철거해버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추순덕씨는 2001년 2월 기자를 만나 “이 사고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차가운 바다 밑에는 69년의 모진 비바람 속에 우뚝 서 있는 피야 밑으로 138명 탄광의 남자들이 소리 없이 잠들어 있다. 해저 탄광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 한국인 희생자들을 한국정부는 하루 빨리 수습하여 고국으로 모셔 오길 희생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군청에 징집돼 부산 부두로 가는 조선인들.
해저탄광에서 탄을 실어나르는 철로와 선박이 보이는 초세이탄광 현장
탄광 수중갱도 송풍구인 피야만이 바다 위에 그대로 떠 있다.
초세이탄광 현장에서 기자의 조부는 광복 66주년이 되었지만 해저 탄광에 아직 그대로 수장되어 있다. 기자의 부모님이 꽃을 던지며 고인이 명복을 빌고 있다.
일본 야마구치 현 우베 시에 있는 해저탄광. 1942년 2월 침수사고로 이 해저갱도에서 강제징용 조선인 134명을 포함해 183명이 산 채로 수장됐다. 사건 직후 보도 통제로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탄광은 폐광됐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유해 발굴 허가가 나오지 않아 유해는 아직도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있다. 살림 제공(위), 강제징용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오키나와의 ‘한(恨)의 비’.(아래 왼쪽), 단바 망간기념관에 있는 망간 채취 모형.(아래 오른쪽)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것은 70년 가까이 되는 세월동안에도 아직도 우리 선조들이
일본의 바다속 해저탄광에 수장되어 있는것입니다.
혐일)우베 탄광을 아시나요??
태평양 전쟁을 앞둔 일제는 1939년 7월 국민징용령을 내렸다. 일제는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조선노동자 내지(일본)이주’를 조선총독부에 지시했다.
조선총독부는 ‘모집’을 빙자한 강제연행으로 2백만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한국인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탄광 60만명,군수공장 40만명, 토목공사 30만명, 금속광산 15만명, 항만공사 5만명, 군인 또는 군속자 15만명, 종군위안부 13만명(박경식 ‘제일조선인운동사’ p312)이 동원됐다.
이중 1940년 4월부터 11월까지 초세이(장생.長生) 탄광에 모집된 조선인은 480여명에 이른다. 당시 992명의 인부가 15만톤의 석탄을 생산하는 일본에서 가장 큰 해저탄광이었다.
1942년 2월 3일 이른 아침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시 니시키와 해변의 바다 밑 초세이탄광에서 채광작업을 하다 해저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로 180여명이 산채로 갱도에 수장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희생자 136명 대부분은 한반도에서 강제연행 되어 온 남자들로 “탄 한 상자 더 캐고 죽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하루 14시간 노동에 일당 2원을 받으며 일했다.당시 조선인의 목숨은 탄 한 상자보다 가치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사고가 나기 한 달 전 탄광에 바닷물이 새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인만 강제로 비번까지 밀어 강제 작업시켰다.
사고는 해안에서 1km남짓한 바다 밑에서 암반이 무너지면서 해저갱도에 충격이 가해져 물이 스며 들어 갱도가 무너지면서 발생했다.
물 위로 간신히 살아 올라온 생존자들을 일본인들이 다시 강제로 물속으로 밀어 넣어 많은 참사가 발생했다.
”바다위에 있는 피야(송풍관.숨구멍)에도 물이 들이치자 탄광의 공기가 빠지면서 거품이 하얗게 일면서 3일 동안 하늘을 향해 물기둥은 멈추지 않고 솟아올랐고, 니시키와 해변은 가족들의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당시 추순덕(2006년 사망) 씨는 말했다.
이 사고로 모두 180여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한국인은 136명이었다. 희생자중 한 사람은 기자의 조부이기도 하다.
69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나이 5세였던 기자의 부친은 탄광촌 인부 숙소(아리랑마을)에서 할머니와 4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지난 2001년 참혹한 현장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부모님을 모시고 초세이 탄광을 다녀왔다.
부친은 해저탄광의 송풍구 역할을 하는 피야를 바라보며 해변을 거닐다 어릴 적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모래사장 위에 띄엄띄엄 있는 석탄을 매만지다 눈물 범벅된 얼굴로 “아버지~”를 목청 높여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운 파도소리 뿐이었다.
강제연행된 한국인 숙소인 아리랑마을과 당시 탄광에서 사용했던 채광장비인 렌턴과 삽, 마스크,수통, 대형 쇠솥 등이 창고에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우베시와 탄광회사 측에서 숙소와 창고를 일부 철거해버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추순덕씨는 2001년 2월 기자를 만나 “이 사고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차가운 바다 밑에는 69년의 모진 비바람 속에 우뚝 서 있는 피야 밑으로 138명 탄광의 남자들이 소리 없이 잠들어 있다.
해저 탄광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 한국인 희생자들을 한국정부는 하루 빨리 수습하여 고국으로 모셔 오길 희생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군청에 징집돼 부산 부두로 가는 조선인들.
해저탄광에서 탄을 실어나르는 철로와 선박이 보이는 초세이탄광 현장
탄광 수중갱도 송풍구인 피야만이 바다 위에 그대로 떠 있다.
초세이탄광 현장에서 기자의 조부는 광복 66주년이 되었지만 해저 탄광에 아직 그대로 수장되어 있다. 기자의 부모님이 꽃을 던지며 고인이 명복을 빌고 있다.
일본 야마구치 현 우베 시에 있는 해저탄광. 1942년 2월 침수사고로 이 해저갱도에서 강제징용 조선인 134명을 포함해 183명이 산 채로 수장됐다. 사건 직후 보도 통제로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탄광은 폐광됐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유해 발굴 허가가 나오지 않아 유해는 아직도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있다. 살림 제공(위), 강제징용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오키나와의 ‘한(恨)의 비’.(아래 왼쪽), 단바 망간기념관에 있는 망간 채취 모형.(아래 오른쪽)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것은 70년 가까이 되는 세월동안에도 아직도 우리 선조들이 일본의 바다속 해저탄광에 수장되어 있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