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생모가 나타났습니다.

김지우201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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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사는 서른살의 평범한 여자입니다. 저는 재작년 11월에 결혼을 했습니다. 제가 제 이야기를 글로 써 본적이 없는지라, 어떻게 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꽤 긴 글이 될 것 같지만 부디 끝까지 읽어주세요.

 

  남편은 올 해 서른 네 살로 미국의 한인 가정에 입양된 아들입니다. 남편이 7살이었나 6살이었나 되던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과 남편의 생모는 남편의 외조부와 외조모와 함께 살았다고 하더군요. 워낙에 오래 전 일이라 남편의 기억이 분명치가 않은데요- 남편의 말로는 어느 순간부터 남편은 외조부모와만 살고 있었을 뿐 어머니 즉, 생모의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외조부모와 살다가 국민학교(남편은 국민학교로 기억하고 있더군요) 2,3학년에 연달아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아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고아원에서 1년이 조금 넘게 지내다가 국민학교 4학년 때 미국의 한 독지가와 연이 닿게 되었고 남편은 그 독지가의 후원을 받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후원해주신 독지가는 양부모님의 아버지이구요, 처음에는 입양이 아니라 그냥 후원으로 정식 입양절차를 밟은 것은 남편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던 해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정식 입양이 되기 전에도 남편은 양부모님을 아버지, 어머니로 불렀고 이 양부모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양부모의 친아들하고도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친형제보다도 더 애틋하고 돈독한 사이입니다.

 

  원래는 양부모님이라고 하지 않지만, 지금은 생모와 구분하기 위해 양부모님이라고 하겠습니다. 암튼, 남편 양부모님의 집은 뉴욕이고 남편이 대학을 졸업하고 MBA를 딴 학교는 필라델피아에 있었습니다. 남편은 학업 때문에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따로 집을 얻었고, 저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필라델피아로 유학을 가서 남편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결혼까지 해서 같이 살고 있지만, 남편과 저는 처음에 사이가 매우 안좋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인이면서 국적도 미국인이고 한국말도 서툰 남편이 자신의 뿌리도 잊고 산다는 생각에 좀 한심해 보여, 바나나 족이라며 대놓고 무시했었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저에게 열등감이 있었고 또, 질투도 했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태어날 때 몸이 좀 약했고 또 집안 어른들(친가, 외가 할 것없이)과 식구들이 키도 크고 뼈대도 굵은대 저만 혼자 키도 작고 몸도 마른 편입니다.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하나 어릴 때 잔병치레도 심해서 어른들 생각에 제가 좀 약했나 봅니다. 그래서 솔직히, 살아오면서 지나칠 정도로 과보호 받고 살아왔는데 남편이 보기에도 제가 너무 온실속의 화초처럼 보여서 자신의 처지와는 달라 저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암튼 이렇게 만나서 처음에는 박터지게 싸우다가 미운정들어 어울리지 않게 연애도 하고, 또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해서 처음 반년은 뉴욕에서 신혼살림을 하다가 작년 여름 한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지 얼마지나지 않아서 남편이 좀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잘 먹지고 못하고 잘 자지도 못하는 듯 싶었는데 무심한 아내는 그저, 한국생활이 적응하기 힘들어서 방황하는가보다 했네요.

 

  올해 설에, 한국말도 서툴로 한국 역사는 아예 모르는 남편을 데리고 제 친정 아버지랑 남동생이 경주에 놀러갔습니다. 남자들끼리 친해지라고 보내놓고는 제 한국 신혼집에서 저희 친정 엄마랑 있는데 경비실에서 인터폰이 왔습니다. 받아보니 누가 남편을 찾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의아한 마음을 품고 로비로 내려가 봤는데......그냥......뭐랄까.....딱 봐도 남편의 생모였습니다. 아.......하는 생각만 드는 것이, 남편과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평소 둔한 편이라 여우보다는 곰에 가까운 저였는데, 죽었다고 알았던 생모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을 보니 이것이 여자의 육감이라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설에는......저도 당황하여 우왕좌왕하였고 생모도 저 못지 않게 당황하신 듯 하고......그래서 서로 아......만 연발하다 어찌저찌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경주에서 돌아와 정말 결혼한 이래로 가장 심하게 부부싸움을 했네요. 저로서는 남편이 생모가 나타난 걸 저에게 숨기고 있었던 것이 너무 서운하고, 생모가 남편이 결혼한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그것도 서운했습니다. 거기다가 생모가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살아있었다는 것도 엄청난 충격이었구요. 남편말을 들어보니 너가 이 세상에 자식 버리는 부모가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했다, 너 만큼은 그냥 이 세상 모든 부모가 너희 부모처럼 훌륭하기만 한 줄 알고 있었으면 했다고 하는데......처음 들었을 땐 또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가, 나중에 돌이켜 생각하니 아무리 그래도 남편 혼자 힘들고 방황하는데 아내가 철없이 그저 한국 적응이 힘들어서 그러나보다고 생각하고 넘기게 하나 싶어서 또 서운하고.....

 

  암튼, 그렇게 설을 쉬고 25일 수요일에 출근을 했는데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런데 남편은 오죽하겠나 싶어 반차를 내고 남편 회사로 갔습니다. 설 내내 싸우기만 한것도 마음에 걸렸고, 회사에서 진정하고 생각해보니 내가 이렇게 어리고 못되게 굴어서 남편이 차마 힘든일이 있어도 말하지 못한 것인가 싶어서 무슨일이 있어도 나는 남편 편이라는 말을 꼭 해주어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남편 회사로 달려갔는데 남편이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의아한 마음에 회사 로비에서 경비실을 통해 사무실로 연락을 해보니 사무실 직원 하는 말이 남편이 오전에 손님이 찾아와서 나간 뒤로 아직 안 돌아왔다는 겁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지금 남편이 생모를 만나고 있겠구나 싶어서 회사 근처 까페며 식당이며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남편회사에서 네 다섯 블록 떨어진 까페에서 남편과 남편의 생모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은 등을 보이고 있었고 생모가 정면을 보이고 있었는데 잠깐 동안 남편의 생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간적으로 제가 낄 자리가 아니구나 싶어서 그대로 뒤돌아서 저는 제 직장으로 돌라왔습니다.

 

  그리고 6시가 되어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받아보니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의 생모였고 저를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망설이는데 생모 하시는 말씀이 아직 아까 그 까페에 앉아있다고 하더군요. 순간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혼자 앉아있었을 모습 떠올리니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러겠노라 말하고 그 까페로 나갔습니다.

 

 까페에 나가니 막상 할 말은 없고 서로 어색하고 불편한데, 남편 생모께서 어떤 사진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보니까 어떤 여자분 사진인데 남편의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올 해 고3이 되는 남동생도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 들어보니 여자 팔자가 기구하여 몇 년 전에, 재가해서 결혼한 남편도 죽고 혼자서 자식들 키우려고 아둥바둥 하다가 빛이 늘어 결국에는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고 했습니다. 사채업자가 보통 고약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쫓겨다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 남편을 수소문해서 찾은 거라고 하더이다. 남편도, 생모도 말은 안치만 제가 혼자 짐작하기에 남편 또한 생모에게 지독하게 굴었을 것이고 또, 한국말이 서툰 남편에게 사채업자 얘기를 쉽게 꺼내지는 못했을 듯 합니다. 눈치를 보아선, 남편은 생모가 돈 때문에 자신을 찾은 것 까지는 모르고 있는 듯 했습니다. 생모 말이, 5억이면 빛 정리하고 자그마한 가게를 얻어 자식들 키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갚겠노라고 하셨구요.

 

  제 입장은, 일단은 남편이 가장 중요합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생모가 돈 때문에 자신을 찾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남편 모르게 5억이라는 돈을 마련할 능력이 없습니다. 수요일, 남편의 생모를 만나고 돌아와서 제가 융통할 수 있는 돈을 계산해 보았습니다.

 

  미국 유학 마치고,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잠깐 했는데 이 때 모아놓은 돈이 5천이 조금 안되게 있습니다. 그 땐 결혼할려고 모은 돈인데, 결혼할 때 결혼 비용을 부모님이 대 주셔서 그 돈이 고스란히 수중에 있구요,  저 결혼할 때 저 예뻐해 주셨던 큰 아버지께서 결혼 후 혹시 무슨 일 생기거든 쓰라며 주신 돈이 삼천만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적금이랑 펀드, 보험 해약하면 현금으로 천만원 정도 마련하고, 친정 남동생에게 빌려서 어찌저찌 1억은 현금으로 융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1억원은 받을 생각 없이 고스란히 남편의 생모에게 줄 의향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남편의 생모가 이 돈을 받고 돈을 더 요구할 것이 걱정입니다. 이 돈은 남편 모르게 줄 수 있는 돈이지만 더 이상 돈을 요구하면 남편 모르게 돈을 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생모가 돈 때문에 자신을 찾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은 제 입장으로선 난처해 집니다. 그렇다고 돈을 안주면 남편에게 기필코 돈 얘기를 꺼낼 것 같고......

 

  저는 지혜가 부족하여 어찌해야 남편이 상처를 덜 받을 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제발, 저보다 현명하고 경험이 많으신 분께서 이 글을 읽고 제가 지금 무엇을 어찌하면 좋을 지 연륜있는 답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대로 1억을 남편 모르게, 남편의 생모에게 주어도 괜찮은 것일까요?

  남편과 생모는 어찌되었든 끊을 수 없는 천륜으로 맺어진 인연인데, 기왕이면 남편이 상처받지 않는 쪽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찌해야 좋을까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 제가 남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