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라는 직장의 실상

연금이200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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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어제구나. 근무를 마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술 한잔 했다. 적당한 술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한 잔의 술에 세파에 찌든 가식을 벗어버리기도 하고 내면의 외침이 들리기도 한다.

 

예전, 능력도 안 되면서 고시생이랍시고 학교 도서관을 누비며 폼 잡고 있을 때였다. 멀쩡히 취업해서 직장 잘 다닐 거라 여겼던 동문후배 녀석들이 하나 둘씩 도서관에 보이는 것이다. 승진시험이라도 있는가 하여 물어보면 하나같이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고등고시나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연을 들어보면 정말이지 가관이다. 자본주의하에서 기업의 본질이 이익추구라고 인정하더라도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물론 직원에게는 당연히 그만한 가치창조(이윤창출)를 요구하며 소위 돈을 준 만큼 혹은 그 이상 부려먹는다는 것이 원리인데 들려준 이야기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싶을 정도로 가혹하기까지 했다. 내가 가입한 인터넷 ○○○도 후배를 통해서였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허덕이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 가입해준 것이다.

 

2004년 유여곡절 끝에 국민연금공단에 입사하고 나서 만인의 부러움을 산 것을 나는 기억한다. 고용이 보장된 안정적인 직장에 빠짐 없이 지급되는 월급, 실적이나 기여도와는 상관 없이 그저 수동적인 업무만으로도 충분한 직장, 여유롭게 취미활동도 하면서 직장은 그저 경제적인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일 따름인 곳, 그리고 지시나 통제에 의한 스트레스가 없는 천혜의 보직..

 

그러나 실상은 참으로 달랐다. 끽연이력 20년, 하루 담배 반 갑씩 피우던 내가 담배 피울 시간이 없어 담배를 끊게 될 정도로 하루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실적으로부터 자유로워서 수동적인 업무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지만 실적경쟁이 매일매일 일어나는 곳이 국민연금공단이다. 직원 각자가 하는 업무 하나 하나는 모두 전산으로 관리되고 90여개 지사가 각각의 업무에 대해 매일 서열 지워지고 있다.

 

게다가 공단은 너무나 많은 것을 구성원에게 요구한다. 공단은 월급 주는 곳 즉 내 경제적인 수요를 충족시켜 주는 곳에 불과하므로 나는 다른 곳에서 자아를 실현하며 의미를 찾고자 했다면 아마도 나처럼 견디지 못할 것이다.

 

기존의 관행들. 마치 동사무소에 등본발급을 신청하면 그때서야 일거리가 생긴다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 고객인 국민이 해달라고 요구하면 그때서야 해주는 공적서비스의 시대는 이미 떠났으며 해드릴까요, 혹은 필요한 것이 없으십니까 하는 시대가 이미 도래한 것이다. 찾아가는 서비스가 아니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시대에 공단은 이것을 직원에게 요구한다. 그래서 직원 각자가 고객만족이라는 핵심가치를 머릿속에 각인시키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는 직장이 국민연금이다. 이런 세뇌가 나는 내키지 않아 오늘도 폭음을 하였다.

 

나는 편하게, 쉽게 돈 벌고 싶다. 명예도 지위도 쉽게 얻고 싶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국민연금이 싫어진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는 가중된 업무량과 스트레스로 더욱 자신이 없다. 그래서 가끔은 예전에 후배들이 그랬듯이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시련을 겪어야 할까? 네 식구의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철없던 시절의 전철을 다시 밟아야 할까?

 

나란 인간은 이기적이고 가증스러운 존재인가 보다. 입사할 때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겠다는 맹세는 어디가고 어떻게 제때 나오는 월급에만 정신을 팔아버린 것일까?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 못한다고 구조조정되기 전에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술자리에서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나 혼자만 분위기파악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여기에 적응을 못한다면 나는 도태될 수 밖에 없다. 돌아오는 길에, 국민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자세가 되지 않는다면 일찌감치 도서관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나는 싸늘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