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김형석201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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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여행]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 두고
맛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백제의 숨은 꽃 익산.

무왕의 도시를 여행했다.

익산은 사랑의 노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4구체 향가 ‘서동요’가 있다.

작전명 서동요...로 미녀를 얻고싶은

사내들의 로망, 비기(秘技)의 고향^^

 

전북 익산은...

백제왕도로서 궁성, 사찰, 산성, 능을 다 한눈에 볼 수 있는 고도(古都)이다.

마룡지, 서동생가터, 미륵사지, 제석사지, 왕궁리유적, 익산쌍릉 등

제30대 무왕 '서동'의 탄생과 사랑, 황금기가 있는 곳이다.

익산시는 이러한 익산역사유적지구에 대한 세계유산 지정을 위해

같은 백제문화권이 공주, 부여와 함께 노력하고 있다.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彌勒寺)는 백제 무왕 때 왕비의 발원으로 지어진 사찰이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사적 제150호 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는 현재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과 복원된 동탑이 있고, 목탑이 있었던 터가 있으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236호) 외에 무왕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가 깃든 유물과 유적 등이 1966년에 발굴되었다. 미륵사는 용화산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좌우 능선 사이에 평지에 남향을 향하여 건립되었다. 현재 서탑이 붕괴 위험 등으로 인하여 해체 복원 진행중에 있다.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재위: 600년 ~ 641년)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廊廡)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922년에 혜거국사가 미륵사탑을 개탑했다는 기록이 혜거국사 비문에 나타나있고, 출토된 기와의 명문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조선시대인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양곡집에 미륵사지석탑이 나타나고 있는데, 석탑의 규모가 '동방최대'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 이전에 미륵사지석탑이 벼락을 맞고 무너졌다는 기록이 와유록에 있다. 그러나, 해체하여 구조를 살펴본 결과 1층부분에서 발생한 구조의 변화로 상층부가 붕괴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현재는 반쯤 파손되어 있는 서탑과 당간지주 등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미륵사지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일제강점기 때 이미 조사되기 시작했으며, 그 뒤 198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각 탑의 북쪽편에 금당을 1개씩 둔 가람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한 쌍의 금당과 석탑에는 각기 회랑이 둘러져 있어 탑과 금당을 1개의 절로 생각할 때 마치 3개의 절이 모여 있는 듯한 3원식(三院式)의 구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3개의 금당에 모두 지하공간이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다. 이 절터에서는 막새기와·토기·불상 등을 비롯하여 1만여 점의 각종 유물이 나왔으며, 특히 '미륵사'라든가 '국 5년 경진'(國五年庚辰)·'요봉원'(姚奉院)·'지원 4년'(至元四年)·'천력 3년'(天歷三年) 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미륵사지는 미륵삼존불의 출현으로 절을 짓게 된 창건동기나 미륵이 이 세상에 와서 3번의 설법을 하기 위한 3군데의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 점, 그리고 미륵이 머무를 장소로 금당에 지하공간을 설치했다는 점 등에서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내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2009년 1월 미륵사지 서탑 안에서 사리병과 금판 모양의 봉안 기록이 발견되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 선화 공주의 발원에 의해 용화산 아래 건립됐다'고 전해졌는데, 봉안 기록에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 출신인 백제인 왕비가 건립을 발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리병에는 연꽃, 당초, 인동초 무늬가 정교한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 있다. 주경미 부경대 연구교수는 “항아리나 무늬 양식 등에서 6세기 중엽의 부여 왕흥사지 사리병을 계승하면서도, 당시 중국 수나라에서 유행했던 사리함 문양 제작 기술까지 독창적으로 응용했다”며 “백제 금동대향로에 필적하는 백제 공예품의 걸작”이라고 말했다.

 

은제 사리병의 발굴로 무왕과 선화공주가 미륵신앙에 따라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기존설에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선화공주가 무왕의 후비였을 가능성과 미륵사의 동원, 서원, 중원이 순차적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계속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발굴의 성과를 존중하여 미륵사의 창건에 대한 기원을 수정해야하며 창건 당시 삼원 체제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는 주장이 발표되었다. [백과사전]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복원된 동탑...

청량한 풍경소리로

타향의 여행자를 무채색으로 맞는다.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백제 무왕이 된 서동과

황후가 된 선화공주가 걸었을 미륵사지를 걷다...

 

1,400여년전 무왕의 사랑...그 진실한 사랑의 결실,

마음은 언제까지 설레었을까?

 

백제와 신라...견원지간처럼 싸우던

나라간의 정략결혼을 미화한 것은 아닐까?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무왕(武王, 580년 ~ 641년 음력 3월, 재위: 600년 ~ 641년 음력 3월)은 백제의 제30대 국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장(璋), 아명은 서동이다. 법왕(法王)의 아들이며, 위덕왕의 서자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고 나오지만, 삼국유사의 무왕열전에서는 강가에 사는 여인의 자식이라고 나온다. 무왕의 어머니는 강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강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기가 있었는데 그가 백제의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전라북도 익산에는 무왕이 연못에서 사는 용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남북조 시대 때 북조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에서는 '백제 위덕왕의 아들 무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북사》만 백제 위덕왕의 아들로 되어 있고 나머지 중국사서는 법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 무왕은 641년 음력 3월에 사망하였다. 사후 당 태종이 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재위기간 중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 가잠성(椵岑城), 모산성(母山城), 늑노현(勒弩縣), 주제성과 신라 북서쪽의 두 성과 서곡성(西谷城) ·독산성(獨山城) 등을 공격하였다.

한편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 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 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629년 미륵사를 완공하였다.

무왕 3년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曆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다. 630년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 634년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궁남지를 건설하였으며, 미륵사를 건설하는 등 토목공사를 자주 벌이고 신라와의 전쟁이 잦아 국력을 소모하는 등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탁월한 정치역량을 바탕으로 한 외교력으로 국가의 위상을 높였고 군사력을 크게 신장시킨 치적을 남긴 무왕은 무령왕, 성왕과 함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전성기 이후로 무너져가는 백제를 되살린 왕으로 평가받는다.[백과사전]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당시에는 웅장했을 미륵사지 터...

그 흔적 속을 소요유하다.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지가 세워진 곳은 무왕과 무왕비인 선화공주가

미륵산(용화산)에 사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도중 만난

미륵삼존불이 연못에서 출현한 자리를 메워 세웠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이 연못에서 껴앉고 죽은

젊은 남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미륵세상에서

불멸을 꿈꾼

사내와 계집의 '초월적 사랑'이었을까?

 

직업의식은 창조적 상상력을 동원하고 싶다.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남여가

서동요의 신화가 있는 미륵사에서의 죽음???

 

소설을 쓰게 하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오페라나 뮤지컬로 만들어도 멋진 스토리텔링이 될 것 같다...

 

퍼득 좋아하는 화가 백진스키 그림이 스친다!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백진스키 작품 '무제'

 

폴란드 출신의 화가 즈지스와프 백진스키(Zdzislaw Beksinski, 1929년~)

영화 ‘에일리언’의 캐릭터 설정을 맡은 일러스트레이터 H.R.기거가 가장 큰 영감을 받은 작가이다.

 

백진스키 그림은...

 

종말적 사랑일까요?

초월적 사랑일까요?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혹한으로 움추린 몸이지만

유유자적 걷던 사내의 입가

 서동요 읊조린다...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 공주니믄(선화공주님은)

남 그즈지 얼어 두고(남 몰래 시집가 두고)

맛둥방을(맛둥 서방을)

바매 몰 안고 가다.(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요(薯童謠)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대(599년 이전)에 이루어진 동요, 혹은 참요이다.

백제 무왕(武王)이 소년 시절에 지어 아이들에게 널리 부르게 했다고 한다.

서동이라는 개인의 창작으로 당시 아동들에게 불린 동요이기는 하나,

전대에 그러한 형식의 민요가 널리 불려 이것이 4구체의 향가로 정착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서동요는 향가 중의 가장 오랜 형태로 그 형식은 4구체이다.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서동 설화: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 일찍이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서라벌)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맺어 그를 낳았다. 아명(兒名)은 서동(薯童). 그 도량이 비상하고 항상 서여(마)를 캐어 팔아서 생계로 삼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명을 그리 부른 것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더벅머리를 깎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자신을 따르게 했다. 드디어 노래 하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이 동요는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스며들어 갔고, 백관(百官)들이 크게 간(諫)하여 공주를 멀리 귀양보내게 되었다. 떠날 때 왕후(王后)는 그 딸에게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길에 오를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侍衛)해 가겠노라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도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그 후에야 서동이란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이때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했다. 공주는 "이것이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을 넉넉히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서동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땅엔 이런 것이 흙과 같이 쌓였다." 하니 공주는 크게 놀라며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이니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궁궐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 서동이 좋다 하며 금덩이를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 신력(神力)으로 옮기리라." 하니, 공주가 편지와 함께 금덩이를 절간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놓았다.

신라의 진평왕은 그 신이(神異)함에 더욱 존경하고, 항상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물었다. 서동은 이런 일로써 민심을 얻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

하지만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의 기록에 따르면

무왕의 왕비는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이며

그녀가 미륵사를 창건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 역사적 사실로서의 진위는 논란이 되고 있다.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지의 중심에는 목탑이 있었고,

동·서에는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목탑도 복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 중인

서탑 속으로...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탑 네 귀퉁이에 있던 부처님은

와불로 유명한 전남 화순 운주사 미륵을 닮았다^^

 

 

소나무 그늘 밑

바위벽에 등 기대고 있는 머슴부처들

하나하나 껴안아보았다

 

꺼칠꺼칠, 까끌까끌, 등

가려우면 웃통 벗고 등짝을 비빌 언덕이구나

얼굴 지워졌어도 온몸이

효자손인 미륵 덩어리들,

 

뒤돌아서다 보니, 서늘한 감촉이

천 년 숨어서 발기해 있는 돌 좆이 아닌가

너무 오래 발기해 있어서 그렇지

그예 고구려 백제 신라 때는 귀두에 부처 얼굴 새겨놓고 당당히 뻗쳤고

고려시대엔 낭자하게 발기했고 조선시대에도 담담히 섰고

일제시대에도  의연히 발기했다 이승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하야 발표를 할 때도 세우고 있었고 빛고을 광주에 동포 진압군을 보낸

신군부가 날뛸 때도 고요히 얼굴 돌아앉아 온몸으로 발기해 있었다

 

저 크게 발기하기만을 손이 닳도록 빌었던 아낙과 친정어미와 시어머니는

발기한 부처의 콧등을 새 모이처럼 쪼아다 갈아 마셨다 아, 그래도

발기는 발기다 비아그라가 따로 없이 비바람 눈비에 그칠 줄 모르는

발기의 가피(加被)일까 석녀가 늦둥이를 낳고 산벚꽃나무 그늘이

얼굴 지워진 돌부처를 하나하나 귀두불(龜頭佛)로 돌려 세운 채

일주문 밖 세상이 방사(房事)의 정담으로 꽃피길

아, 이제 초로(草露)에 돌 좆이 삭아들도록

빌고 비는 그 애무의 맘들이 성그니,

부처는 무슨 부처, 좆도 아니다!

 

세월은 화냥년 같고 나뒹구는 돌부처를 깨워

한 물건 다시 씀직한 때가 왔는가 가장

여린 살빛을 가진 맘이

그림자 옷 입고 나오는 봄날까지는


- 운주사에 가서 4 / 유종인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복원중인 서쪽 탑을 보고...이동,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으로^^

 이 곳에는 무왕의 꿈이 담겨있는

19,000여점의 유물 중 4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 빈집의 약속 / 문태준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익산 미륵사지

 

사랑하는 연인이나

자녀와 함께 가족과 함께

교과서 속 여행지를 찾아보자.

‘백문이 불여일견’

사랑만들기와 역사공부가 저절로 된다.

                                                                            

                                                                              자세한 내용은 익산시 ‘문화관광’ 사이트(http://iksan.gojb.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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