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통상부 호주총영사관 천범룡 총경님께 감사드립니다.

정신영201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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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마포에 거주하는 42세의 정신영이라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전 저의 집안에 갑작스런 상이 닥쳤는데 내일같이 도와주고 보살펴 준 공무원이 계셔서 이를 널리 알리고저 글을 씁니다. 사실 지금도 글을 쓸만한 온전한 정신상태는 아닙니다만 지금 이렇게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못하게 될 것 같아 조금 더 힘을 내어 봅니다.

 

저의 사랑하는 동생이 머나먼 타국인 호주에서 갑작스런 사망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건 며칠전인 1월 22일 일요일 오전 9시였습니다. 마치 예리한 곡괭이로 가슴을 후려치는 듯한 이 소식은 저를 마냥 멍하게 만들었고 어머니를 비롯한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다음날인 월요일이 설명절이었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황당했을지는 말안해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생의 죽음도 죽음이었지만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더 큰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 나이 먹도록 해외 한번 나가본 적 없고 인천공항조차 가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어떻게 그 머나먼 호주까지 가서 동생의 유골을 수습해야 하나 고민이 안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호주 총영사관의 천범룡 총경님께서 여권조차 없다는 저의 사정을 들으시곤 곧바로 외교통상부에 연락을 하셔서 긴급여권을 만들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알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곧 11시정도에 다시 전화가 왔고 오후 2시까지 여권사진을 마련해서 종로에 있는 외교부 여권과로 가라고 하시더군요. 부랴부랴 지하철역에서 사진을 찍고 여권과로 갔더니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저때문에 한 여직원께서 두 아이를 대동하고 사무실로 나오셨는데 어찌나 미안하던지,,, 하여튼 그렇게 여권은 만들었지만 명절날 갑작스런 소식에 친척들끼리 모여서 저 혼자 가느냐 아니면 누가 동행하느냐의 문제로 시간이 조금 지연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주의 화요일까지 공휴일이었고 게다가 비행기표는 아시아나는 올매진, 대한항공만 조금 좌석이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 가족측에서 만발의 준비가 끝나 소식을 들은 즉각 호주로 출발하려 했었다면 호주영사관측은 거기에 아무런 하자없이 조치를 취해준 셈입니다.

 

결국 상의 끝에 호주는 저 혼자 가기로 결정이 되었고 여비를 포함해 모든 출국의 준비가 끝났을 때가 수요일이었습니다. 예약한 비행기표 시간은 목요일 밤 9시 비행기였습니다. 그동안의 2박 3일은 정말로 지옥같은 시간이었고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도 차디찬 냉동고에 동생의 시신이 누워 있다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천총경께서는 시기가 시기인지라 여러가지 사정으로 곧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유가족들의 심정을 잘 헤아려서 매일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화로,

"지금 도착하시게 되면 스케줄은 이렇습니다. / 지금 동생분의 시신이 현지에서 뉴캐슬의 존헌터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 목요일 날은 그곳의 공휴일이라 오실려면 화요일에 출발하셔서 수요일에 도착하시던가 아니면 목요일날 출발하셔서 금요일에 도착하시던가 하시는게 좋습니다. / 오시게 되면 머무르실 숙박업소를 잡아놓았는데 가격은 대략 얼마얼마 라고 합니다."

라고 저의 스케줄에 대해서 상세히 브리핑을 해주시는 바람에 제가 호주일정을 침착하게 치뤄낼수가 있었습니다.

 

겉으론 멀쩡해보였지만 속으론 완전히 망가진 정신으로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였고 공항에는 천총경님과 다른 직원 한분께서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그때가 아침 7시쯤이라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후 곧바로 동생의 시신이 있는 뉴캐슬로 출발했습니다. 뭐 그때부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평생을 안고 가야 할 그 비극의 시간, 저의 가슴에 대못으로 박혀 있는 그 잔인한 시신확인의 절차가 끝난 후 장례를 상의하는 절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턴 유가족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지요. 간신히 서 있긴 했지만 좀 어디 누울 수 없나? 하는 심정으로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장례절차의 기간이었습니다. 제가 예약한 비행기표의 귀국시간은 화요일날 아침 9시 비행기였는데 호주의 모든 행정절차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자기네들의 편리에 맞춰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시스템이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네의 빨리빨리하고는 전혀 비교가 안되는,,, 그래서 시신인도와 화장절차가 다 끝나는 시점이 아무리 빨리 한다 해도 다음주 수요일안으론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비행기표야 연기하면 된다고 해도 금요일부터 시작해 토, 일, 월, 화, 수요일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저의 가족들에겐 크나큰 고통의 시간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연고도 없는 그 먼 타국에서 저 홀로 장례를 치르고 싶지는 않았으며 동생이 총각으로 사망했으니만큼 일단 현지에서 화장을 한 후 고향으로 유골을 데리고 와 사찰에서 정식으로 49제와 장례식을 치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고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동생의 유골만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심정도 심정이지만 저로서도 채널 2개만 나오는 TV와 달랑 철제 침대 2개밖에 없는 그 황량한 유스호스텔에 2박 3일이 아닌 무려 6박 7일을 있어야 한다는 것도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었음을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천총경님께서 이런 저의 사정을 들으시곤 애초 병원측에 미리 이야기를 하여 모든 절차를 초고속으로 빨리 처리할 수 있게끔 도와주셨으며 장례식장에도 페이를 조금 더 내서 주말에도 화장을 하여 모든 일정을 월요일 정오에 끝마치고 정해진 귀국일인 화요일 아침에 출국할 수 있게끔 도와주셨습니다. 

 

동생의 시신을 확인한 후부터는 제가 거의 제 정신이 아니어서 하나에서부터 백가지를 도와주셨던 천총경님의 친절을 제가 일일히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런 식이었습니다. 동생의 시신을 확인하기전 유가족이 받을 충격을 완화하려는 의도에서 병원측에서 시신의 상태에 대해 잠시 브리핑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지금 이 순간이 동생의 육신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므로 고향의 어머니에게도 보여드릴겸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근데 그때까지도 그렇게 친절하던 병원관계자가 갑자기 "노우"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천총경님께서,

"(영어로) 아니, 이봐요, 지금 저 분 말씀은 동생의 마지막 사진을 찍어서 지금 이 자리에 오지 못하고 계신 고향의 어머님에게 보여드릴 의도에서 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안됩니까?

(한국말로) 그렇죠 신영씨?"

저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고 천총경님의 그런 강력한 항의에 병원관계자는 아무말 못하더군요. 덕분에 동생의 마지막 모습은 저의 홈피에 영원히 기록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시신을 확인하기 전부터 제가 시신을 보고 나오면 담배를 한대 필 수 있게끔 미리 관계자에게 양해를 구해주셔서 제가 그 황망한 심정으로 문밖을 나왔을 때 그래도 하늘을 쳐다보며 담배 한 모금에 시름을 달랠 수가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곳 병원은 모든 구역이 다 금연구역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장의사측과 계약을 하는 과정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어찌그리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다 서류에 기재를 해야 하는지,,, 물론 동생의 인적사항이므로 웬만한건 다 제가 답할 수 있었지만 동생이 죽은 시점에 머무르고 있던 거주지의 주소를 대라! 라는 질문엔 저도 황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로 유스호스텔에 머무르고 있던 동생의 주소를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근데 천총경님께서 당시 사건기록에 남아 있는 동생의 일행에게 연락하여 주소지를 알아낼수가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 황당했던 것은 한국의 주소를 대라는 것이었는데 물론 제가 잘 답변했습니다. 근데 우편번호를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이것은 당연히 제가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긴 합니다만은 보통은 우편번호를 모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관계자는 이거 모르면 안된다고 하고 있고 저는 우왕좌앙하고 있을 때 천총경님께서 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지금 인터넷에 들어가서 충남 서산시 우편번호 좀 쳐봐!" 

해서 금방 해결할수가 있었습니다. ㅎㅎ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장례식측에서 마지막으로 동생에게 입혀주고 싶은 옷이 있느냐? 라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입히고 싶은 옷은 없지만 넣어주고 싶은 물건은 있다 그래도 되느냐 하자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마지막 동생의 가는 길에 부처님의 가피를 입히고 싶어 지장경을 넣어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근데 그 책이 주차장에 있는 차 트렁크속의 제 가방안에 있었습니다. 그때 또 총경님께서 같이 온 직원에게,

"지금 바로 주차장에 가서,,, 아예 차를 후진해서 이곳 문앞에 대 놔!"

하자 3분도 채 안되어 제 손에 지장경을 쥘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마음에 위안이 되던지 말로 다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동생을 위한 기도는 열심히 하겠지만 마지막 시신을 화장할 때 이 부처님의 가피력을 같이 보낸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질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불자분들은 이런 저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은 그렇게 무사히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서 숙소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제 등뒤에서 누가 제 엉덩이를 꼬집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등뒤에는 가구라든가 하는 일체의 물건도 없었으며 꼬집는 느낌도 분명하게 사람이 힘주어 꼬집는 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동생녀석이 형이 그래도 이 먼 타국까지 와서 무사히 모든 절차를 끝마치니 좋와서 저에게 표시를 준 거라고,,, 

 

저는 솔직히 그동안 대한민국 공무원들을 신뢰하지 않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외교부 공무원들은 해외에서 자국민의 편리보다는 타국의 눈치를 더 봄으로서 국민들의 원성을 샀던 뉴스들을 종종 보아왔던 터라 출국할 때도 만약 영사관 직원분들이,

"우리들의 책임은 여기까지니 지금부터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라는 마인드로 절 대한다면 영어도 제대로 안되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내심 고민이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니 맨처음 전화로 비보를 전해 듣는 순간에서부터 유골함을 들고 시드니공항을 나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저는 그저 선택사양에 선택만 하면 되었고 서류에 싸인할 일이 있으면 싸인만 하면 되었습니다. 장례의 절차나 숙박같은 일체의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의 해외공관 공무원들은 자국민이 상을 당하였을 때 이러이러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라는 기본 매뉴얼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낸 피같은 세금으로 자기가 맡은 곳에서 이렇듯 묵묵하게 그 의무를 다하고 또한 그것을 넘어서서 인간적으로 존경심마저 들게 하는 천총경님의 배려에는 참으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만약 정부 관계자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포상해주셔서 차후 대한민국 국민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갑작스런 상을 당했을 때 제가 받았던 혜택을 그대로 입을 수 있게끔 하나의 선례를 남겨주셨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천총경님과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의 모든 공무원분들에게 진심으로 고개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