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쓰는 편지.

...201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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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발이 점점 차가워지고

그 눈은 이미 수 일전에 빛을 잃었지요.

당당하던 당신의 몸에는 기저귀가 채워지고

감각은 여전하되 이미 자신의 손 끝하나 움직일 수 없는

안타까운 육신으로 남으셨습니다.

 

내가 떠올릴 당신의 첫 기억은

좁은 단칸방.

구석에 누워있는 우리 남매.

그 가운데 동네 양아치들과 앉아

담배를 물고 더러운 욕으로 떠들며

카드패를 주고받는 모습입니다.

 

내가 아직 세상을 모를적부터

당신은 내게 세상의 더럽고 어두운 면모를 보여줬지요.

도박을 할때의 당신은 유쾌하고 시원하게 웃었지만

그러나 당신의 가족에게는 거칠고 사나웠습니다.

 

당신의 버릇을 고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던 어머니의 뒷모습과

남겨진 우리에게 밥은 커녕 학교조차 보내지 않았던 당신과

결국 우리가 안타까워 돌아오신 어머니도 생각납니다.

가끔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신 모습도 기억납니다.

울고있는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그렇게 평생 고칠수 없는 도박병을 앓고 살아온 당신을

그래도 나는 잘 따랐습니다.

남자답고 호쾌하고 허풍일지라도 기죽지 않는 모습에

나는 그래도 당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사실 당신의 도박판이 열리면 그 와중에 주어지는 몇 푼의 용돈때문에

나는 당신이 다시 우리의 단칸방에서 그래주기를 바랐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울 것 없이 하고싶은 것만을 하며 살던 당신의 큰 목소리는

우리 남매가 자라감에따라 조금씩 힘을 잃게되었습니다.

더 이상 당신의 호통이 무섭지 않게 되었던 그 때에도

어머니가 피땀을 흘려가며 드디어 우리가족의 집을 마련한 그 후에도

당신의 그 병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약속하고 다짐했지만 당신은 그야말로 작심삼일이었지요.

하루가 멀다하고 어머니의 눈물을 보아야했던 우리는

점점 당신과 멀어졌습니다.

그만큼 당신도 외로웠겠지요.

누구의 잘못이든.

 

평생을 당신의 뒷바라지만 해오면서도

당신을 버리지 않았던 어머니는

결국 당신의 외도에는 모든 끈을 놓아야했습니다.

23살에 시집와 30년이 넘는 세월을

당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여인을

당신은 다른 여자때문에

그 여자가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예쁘다는 이유로

그렇게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당신은 우리 남매도 버렸습니다.

 

아직도 당신에게 울부짖었던 이야기들이 기억납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건 당신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라고,

내가 당신이라면 이렇게 사느니 어디든 가서 혼자 죽어버리겠다고,

당신같은 인간은 없어지는게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길이라고...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그렇게 당신이 우리와 연을 끊고 떠난 후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내 평생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당신뿐이었는데

당신에게는 내가 단 하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때

나는 내 존재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떠나고

남겨진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행복한척 아무일도 없었던 척 하며

당신의 그림자를 벗어나고 싶어

어항밖으로 내던져진 금붕어처럼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습니다.

 

내게 있어 당신은 이미 죽어 없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천륜인가요?

여전히 당신은 내 아버지인가요?

 

그렇게 우리를 떠나갔던 당신이

병들고 야윈 몸으로 다시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전신에 퍼진 암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늙고 병든 그 몸으로 다시 우리를 가족이라고 부르기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가엾다 했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사랑이 아닌

당신을 향한 용서와 자비가 아닌

그저 한 인간의 방탕한 인생과 그 쓸쓸한 마지막모습이

너무 가엾고 애달퍼 당신을 모른척 할 수 없다 했습니다.

 

누나는 그래도 당신이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생업을 놓을 수 없는 어머니와 번갈아 가며

당신을 간호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찾아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수없이 봐왔던 당신의 뉘우침과 사죄를,

또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는것이 싫었습니다.

그렇게 떠난 사람이 이제와서 가족을 찾고

어머니에게 기대는것이 괘씸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싫었습니다.

 

당신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릴때에도

항암때문에 전신에 통증이 찾아와

고통속에서 몸부림칠때에도

나는 그런 당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용서는 무엇일까요

사죄는 무엇일까요

나는 당신에게 무엇일까요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랍니다.

당신의 빈소에 찾아줄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야하고

당신의 몸을 한줌 재로 만들어 안치시킬 곳을 찾으랍니다.

양복을 맞추고 당신을 보낼 준비를 하랍니다.

 

아버지.

나는 오늘 울고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아들이 아닐지라도

당신은 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절대 하지 못할 한마디가 가슴속에서, 머릿속에서, 혀 끝에서 맴돕니다.

 

사랑합니다. 용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