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내내 동남아시아 일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돈을 갈취하고, 여자를 만나고,여행자들에게 마약을 팔고 , 살인을 저지렀던 인물 (국제적 신용사기꾼, 밀수업자, 도박꾼, 살인자)
찰스 소브라즈(Charles Sobhraj) '뱀'(the serpent)라는 별명을 가진 찰스 소브라즈는 아시아 최고의 연쇄 살인마이다.
찰스 소브라즈는 1944년 4월 6일 사이공에서 인도인 아버지와 베트남 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우 부자였지만 바로 가족들을 버렸고, 결국 어머니는 프랑스군의 중위와 결혼하였다. 그 후 그에게는 밑으로 동생들이 많이 태어났는데, 상대적으로 소브라즈는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새로운 부부 간에 태어나 아이들만 사랑한 부모들 때문에, 소브라즈는 애정이라는 감정을 모른다는 연속 살인범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가족 일가가 파리로 이주한 것은 샤를르가 9살 때였다. 피부색이 검은 그는 당연 차별을 받았으며, 카톨릭 기숙사도 주위의 프랑스 사람들도 모두 싫어졌다. 그의 비행은 점점 눈에 띄기 시작했고, 경찰서 또한 반복해서 들락날락 했다. 그는 수없이 고향 베트남으로 밀항할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하여 결국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1970년 위조 수표로 3만 프랑을 손에 넣은 샤를르는 봄베이로 건너 가, 본격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바로 밀매 등 암거래를 시작하여, 나름 그 업계에서는 성공을 하여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72년 크게 벌인 보석 사기가 경찰에 결려,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도망을 갔는데, 그 곳에서도 호텔 숙박비를 안 내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하지만 생명력이 끈질긴 그는 간수를 매수하여 다시 한번 도망을 간다.
1972년 그는 헤로인을 밀매하던 중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것은 버릇으로 굳어져 사업에 방해가 되는 자들은 모두 제거하고 다니게 된다.
1973년 터키에 입국한 소브라즈는 이스탄불에서 동생 기와 만나게 된다. 그리곤 두 형제가 관광객 상대로 약을 먹여서는 금품을 빼았는 일을 주로 삼다가 체포되었지만, 역시 대담한 소브라즈는 동생을 데리고 탈옥을 한다.
젊은 소브라즈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위조수표는 그 자리에서 만들 수 있었고, 남을 믿게끔 만드는 화술도 몸에 익히고 있었다. 단지 그는 그 재능을 사업이 아닌 범죄에 썼을 뿐이었다.
델리로 돌아온 소브라즈는 마리 안드레 레클레르 라는 캐나다 출신 여성에게 반하여, 같이 타이로 건너간 후 고급 맨션에서 헤로인을 거래하는 일을 시작한다. 소브라즈는 그 일을 하면서 약물을 먹여 인맥 등 네트워크 정보를 빼낸 후에 목욕탕에 익사시켰다.
방콕에서 헤로인 장사는 대박을 터뜨렸다. 당시 공개된 영화 "엠마뉴엘 부인"의 영향으로, 1975년 당시 동양의 이국적 모습을 보겠다는 서양인들이 물밀듯이 방콕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소브라즈의 맨션은 그런 서양인들로 가득했다. 소브라즈는 먼저 상대에게 독이 든 삼페인 등을 먹여죽이고 돈과 귀중품을 털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이미 그의 손에 의해 죽은 서양인들은 8명이 되어 있었다.
1972년부터 82년까지 그는 인도,태국,아프가니스탄,터키,네팔,이란,홍콩에서 12~20건 이상의 살인을 저질렀다.
그런 가운데 방콕 교외 한 마을에서, 네덜란드인 커플 코넬리아 햄커와 헨릭스 비타냐가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알려졌다. 네덜란드 대사관의 요청을 받아 소브라즈(당시 알랑 고체라는 가명을 씀)의 맨션이 수색 대상이 되었고, 경찰은 수 많은 증거품을 압수 하였다. 마약, 위조 여권 등등이 나왔지만, 막상 당사자인 샤를르는 겨우 국외 추방이라는 벌만 받았다. 바로 그의 특기인 경찰 매수가 효과를 본 것이다.
1976년엔 결국 인도에서 60여명의 프랑스 대학생들을 중독 시켜 체포되었고 이번에는 탈출하진 못했다. 인도에서 가장 엄중한 감옥으로 이송된 그는 뇌물을 주며 편한 감옥생할을했고 특권적인 대접을 받았다.
감옥내에 tv도 있었고 그는 감옥내에서 음식, 담배, 휴대폰, 여자 등을 마음대로 살수 있었다.
1986년 3월 16일 그의 석방일자가 다가오자 그는 감옥에서 죄수 간수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생일파티를 성대하게 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와 그의 부하 4명을 제외하고 모두 뻗어버렸는데 음식에 약이 섞여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정문으로 나가 뉴델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으려 다녔다고 한다. 곧 다시 잡힌 그는 그대로 석방된다면 태국으로 추방되어 사형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형을 더 살기위해 일부러 탈옥을 한것이였다.
1997년 2월 5일 인도의 형법이 정한 최고한도까지 형을 산 소브라즈는 태국에서 저지른 살인사건이 공소시효가 지나게 되서 결국 사형을 면하고 자국인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다.
프랑스에서 유명인사가 된 그는 책과 영화까지 만들어져 인터뷰 한건에 5천프랑씩 받아 챙기는 등 연쇄살인마 치곤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각국에서 온갖 범죄를 저지렸지만 법으로 공소시효가 지나 효력이 없었다. 소브라즈를 20년동안 쫓았던 태국의 한 형사는 쓸쓸한 퇴직할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소브라즈는 석방 6년후 2003년 네팔로 휴가삼아 여행을 오게 된다.
그리고 도착한 공항안에서 그는 네팔경찰관들에게 체포를 당한다. 그동안 모든 법망을 빠져나가고 의기양양했던 그는 네팔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1970년대 동남아를 떠돌며 20여명을 살해했던 희대의 살인마 찰스 소브라즈 30년동안 온갖 수법으로 법망을 빠져나가며 각국의 경찰들을 희롱했으나
◆◇◆아시아 희대의 연쇄살인마◆◇◆
돈을 갈취하고, 여자를 만나고,여행자들에게 마약을 팔고 ,
살인을 저지렀던 인물 (국제적 신용사기꾼, 밀수업자, 도박꾼, 살인자)
찰스 소브라즈(Charles Sobhraj)
'뱀'(the serpent)라는 별명을 가진 찰스 소브라즈는 아시아 최고의 연쇄 살인마이다.
찰스 소브라즈는 1944년 4월 6일 사이공에서 인도인 아버지와 베트남 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우 부자였지만 바로 가족들을 버렸고, 결국 어머니는 프랑스군의 중위와 결혼하였다.
그 후 그에게는 밑으로 동생들이 많이 태어났는데, 상대적으로 소브라즈는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새로운 부부 간에 태어나 아이들만 사랑한 부모들 때문에, 소브라즈는 애정이라는 감정을 모른다는 연속 살인범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가족 일가가 파리로 이주한 것은 샤를르가 9살 때였다.
피부색이 검은 그는 당연 차별을 받았으며, 카톨릭 기숙사도 주위의 프랑스 사람들도 모두 싫어졌다.
그의 비행은 점점 눈에 띄기 시작했고, 경찰서 또한 반복해서 들락날락 했다.
그는 수없이 고향 베트남으로 밀항할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하여 결국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1970년 위조 수표로 3만 프랑을 손에 넣은 샤를르는 봄베이로 건너 가, 본격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바로 밀매 등 암거래를 시작하여, 나름 그 업계에서는 성공을 하여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72년 크게 벌인 보석 사기가 경찰에 결려,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도망을 갔는데, 그 곳에서도 호텔 숙박비를 안 내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하지만 생명력이 끈질긴 그는 간수를 매수하여 다시 한번 도망을 간다.
1972년 그는 헤로인을 밀매하던 중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것은 버릇으로 굳어져 사업에 방해가 되는 자들은 모두 제거하고 다니게 된다.
1973년 터키에 입국한 소브라즈는 이스탄불에서 동생 기와 만나게 된다.
그리곤 두 형제가 관광객 상대로 약을 먹여서는 금품을 빼았는 일을 주로 삼다가 체포되었지만, 역시 대담한 소브라즈는 동생을 데리고 탈옥을 한다.
젊은 소브라즈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위조수표는 그 자리에서 만들 수 있었고, 남을 믿게끔 만드는 화술도 몸에 익히고 있었다. 단지 그는 그 재능을 사업이 아닌 범죄에 썼을 뿐이었다.
델리로 돌아온 소브라즈는 마리 안드레 레클레르 라는 캐나다 출신 여성에게 반하여, 같이 타이로 건너간 후 고급 맨션에서 헤로인을 거래하는 일을 시작한다. 소브라즈는 그 일을 하면서 약물을 먹여 인맥 등 네트워크 정보를 빼낸 후에 목욕탕에 익사시켰다.
방콕에서 헤로인 장사는 대박을 터뜨렸다.
당시 공개된 영화 "엠마뉴엘 부인"의 영향으로, 1975년 당시 동양의 이국적 모습을 보겠다는 서양인들이 물밀듯이 방콕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소브라즈의 맨션은 그런 서양인들로 가득했다.
소브라즈는 먼저 상대에게 독이 든 삼페인 등을 먹여죽이고 돈과 귀중품을 털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이미 그의 손에 의해 죽은 서양인들은 8명이 되어 있었다.
1972년부터 82년까지 그는 인도,태국,아프가니스탄,터키,네팔,이란,홍콩에서 12~20건 이상의 살인을 저질렀다.
그런 가운데 방콕 교외 한 마을에서, 네덜란드인 커플 코넬리아 햄커와 헨릭스 비타냐가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알려졌다. 네덜란드 대사관의 요청을 받아 소브라즈(당시 알랑 고체라는 가명을 씀)의 맨션이 수색 대상이 되었고, 경찰은 수 많은 증거품을 압수 하였다. 마약, 위조 여권 등등이 나왔지만, 막상 당사자인 샤를르는 겨우 국외 추방이라는 벌만 받았다. 바로 그의 특기인 경찰 매수가 효과를 본 것이다.
1976년엔 결국 인도에서 60여명의 프랑스 대학생들을 중독 시켜 체포되었고
이번에는 탈출하진 못했다. 인도에서 가장 엄중한 감옥으로 이송된 그는 뇌물을 주며 편한 감옥생할을했고 특권적인 대접을 받았다.
감옥내에 tv도 있었고 그는 감옥내에서 음식, 담배, 휴대폰, 여자 등을 마음대로 살수 있었다.
1986년 3월 16일 그의 석방일자가 다가오자 그는 감옥에서 죄수 간수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생일파티를 성대하게 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와 그의 부하 4명을 제외하고
모두 뻗어버렸는데 음식에 약이 섞여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정문으로 나가 뉴델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으려 다녔다고 한다. 곧 다시 잡힌 그는 그대로 석방된다면 태국으로 추방되어 사형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형을 더 살기위해 일부러 탈옥을 한것이였다.
1997년 2월 5일 인도의 형법이 정한 최고한도까지 형을 산 소브라즈는 태국에서 저지른 살인사건이 공소시효가 지나게 되서 결국 사형을 면하고 자국인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다.
프랑스에서 유명인사가 된 그는 책과 영화까지 만들어져 인터뷰 한건에
5천프랑씩 받아 챙기는 등 연쇄살인마 치곤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각국에서 온갖 범죄를 저지렸지만 법으로 공소시효가 지나 효력이 없었다.
소브라즈를 20년동안 쫓았던 태국의 한 형사는 쓸쓸한 퇴직할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소브라즈는 석방 6년후 2003년 네팔로 휴가삼아 여행을 오게 된다.
그리고 도착한 공항안에서 그는 네팔경찰관들에게 체포를 당한다.
그동안 모든 법망을 빠져나가고 의기양양했던 그는 네팔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1970년대 동남아를 떠돌며 20여명을 살해했던 희대의 살인마 찰스 소브라즈
30년동안 온갖 수법으로 법망을 빠져나가며 각국의 경찰들을 희롱했으나
30년동안 그를 쫓았던 한 형사의 집념아래 무릎을 꿇었다.
<소브라즈를 체포한 네팔경찰국 부국장>
소브라즈 에필로그 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