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오매 가며 봐 오기만 했는데, 저의 작은 일상중에 약간 겨울 처럼 춥지만 손난로처럼 따뜻한 삶을 적어 봅니다. 전 서울 상경한지 10년차 된 30대 직장인입니다. 22살에 3수 끝에 학교 들어와서 상경하여, 28살에 부푼 꿈을 안고 졸업했지만, 29살에 어렵게 지금의 직장을 들어왔습니다. 전 고향이 대구인데 서울과는 무척 거리가 있어서, 고향이 그립고, 부모님 형재가 그립습니다. 뭐 나이가 들수록 결혼을 앞둘수록 더 그렇네요. TV 보면 나이 들수록 맘이 약해지고 눈물도 많아 진다고 하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저 어릴적 100일 부터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까지 절 금이야 옥이야 키워 주시건 외할머니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외할머니는 대구 저희 집 근처 역전 시장 골목 켠에 항상 같은 집에 계셨어요. 병을 얻으셔서 요양차 다른곳을 가시기 전까지죠. 제기억엔 할머니는 항상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언제나 온화안 옷음과 먹을걸 가져 오시는 친근한 모습이죠. 전 어릴적에 장난을 좋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밖으로 일하러 가시거나, 외할머니댁에 갈적에는 항상 할머니집에 있기 싫다고 하고, 그렇다고 막상 집에 가면 또 할머니 보고 싶다고 졸르는 엄청난 '청개구리 띠'였죠. 덕분에 할머니 고생 많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습니다. 안계신 지금은 더 그렇고요. 전 인생의 쉼표가 자주 있었습니다. 대구 근처 대학에 진학 한 후 미술 한답시고 3수를 했죠. 취업 한답시고 1년 가까이를 취업 재수를 했으니깐요. 제가 생각해도 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사연 없는 사람 없지만요. 그때마다 할머니는 묵묵히 등을 토닥토닥 해주셨습니다. 당신의 주름에는 제 걱정이 그득하게 전 보였습니다. 죄송하기도 하고 내 자신이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기나긴 1여년를 지나 어렵게 지금의 회사를 다니게 되었고, 취업후 첫 월급을 타자마자, 월급에서 작게나마 5만원을 봉투에 담아 할머니께 달려갔습니다. 어찌나 맘이 들뜨던지 세상을 다가진 기분이였습니다. 돈봉투를 드리며 부모님이 돌아가신것 처럼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내 녀석이 창피함 없이 원없이 울었네요. 그후로 서울 올라와서는 못 뵈었습니다. 언제나 그자리에 계실줄 알았는데, 작년쯤에 위암 말기라고 판정을 받으셨어요. 나이가 너무 드셨는지 우연히 위내시경을 받았는데 발견 되었다고 하네요. 너무 슬프면 말도 없고 말로 표현도 안되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뭐 할머니 건강에 도움 드린건 눈꼽만큼도 없지만, 그이후 할머니가 안 계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저도 어머니도 할머니이야기는 의도적으로 안했습니다. 이유는 굳히 다 아는걸 말할것도 없고,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죠. 작년 추석때 할머니 외삼촌 들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모두 겉으로는 웃으면서 맛난 밥이며 반찬을 먹었지만, 할머니는 미음만 조금 입에 축이 셨습니다. 그때도 의학적으로 기대 수명을 넘으셨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더 아프셨죠. 그리고 6개월 뒤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근무중에 받았습니다. 그 순간 할머니와 같이 보냈던 시간이 눈앞에 슬라이더처럼 지나갔습니다. 할머니 이제 못 부르고 못 보겠구나 라고 생각하면서요. 문자를 받은 후에 40여 시간이 지난후 할머님 영정사진을 들고 납골당에 들어갔습니다. 첫 월급날 할머니께 5만원을 드렸던 날처럼 염치 없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안 울면 후회할것 같았고, 할머니한테 때쓰고 싶었습니다. " 왜 지금 가시냐고...... 보고 싶다고..... 돌아오시라고요..."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일상에 돌아왔고, 저희 집에 늙은 개 '혜미'가 그 옆에 있습니다. 외할머니 만큼 저희 어머니도 나이가 드셨네요. 10살 혜미를 보면 외할머니가 생각납니다. 혜미가 1살때 매일 오후시간에 외할머니가 돌봐줬습니다. 어릴적 저처럼요. 할머니는 외손주처럼 반가워하시고 돌봐줬어요. 어린녀석이 방에서 실례도 안한다고 기특하가고 하던 일까지 생각 납니다. 이번주에 대구에 집에 가면 할머니가 돌봐주시던 10살 혜미가 있습니다. 꼬리를 흔들며 반겨 줄텐데, 혜미를 보면 외할머니가 생각 날겁니다. 건강도 못챙겨드리고 평생 용돈만 주시다가 못난 외손주 용돈이라고는 5만원 밖에 못드리고 가시전에 얼굴 한번밖에 못 뵈었지만, 못난 손주가 낮선 서울에서 외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고,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사랑합니다. 할머니. p.s : 결혼을 앞두고 나서 제 일생을 자연스럽게 돌아 보고 있는데, 그 생각중에 많은 부분을 외할머니가 차지하고 있네요. 이 기억을 남기고 싶고 공유하고 싶어. 글을 남깁니다. ^^
30대의 나 , 어릴적 나를 보살펴 주시던 외할머니, 그리고 우리집 늙은 개
주로 오매 가며 봐 오기만 했는데, 저의 작은 일상중에 약간
겨울 처럼 춥지만 손난로처럼 따뜻한 삶을 적어 봅니다.
전 서울 상경한지 10년차 된 30대 직장인입니다.
22살에 3수 끝에 학교 들어와서 상경하여,
28살에 부푼 꿈을 안고 졸업했지만, 29살에 어렵게 지금의 직장을 들어왔습니다.
전 고향이 대구인데 서울과는 무척 거리가 있어서, 고향이 그립고,
부모님 형재가 그립습니다.
뭐 나이가 들수록 결혼을 앞둘수록 더 그렇네요.
TV 보면 나이 들수록 맘이 약해지고 눈물도 많아 진다고 하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저 어릴적 100일 부터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까지
절 금이야 옥이야 키워 주시건 외할머니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외할머니는 대구 저희 집 근처 역전 시장 골목 켠에 항상 같은 집에 계셨어요.
병을 얻으셔서 요양차 다른곳을 가시기 전까지죠. 제기억엔 할머니는 항상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언제나 온화안 옷음과 먹을걸 가져 오시는 친근한 모습이죠.
전 어릴적에 장난을 좋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밖으로 일하러 가시거나, 외할머니댁에
갈적에는 항상 할머니집에 있기 싫다고 하고, 그렇다고 막상 집에 가면 또 할머니 보고 싶다고
졸르는 엄청난 '청개구리 띠'였죠.
덕분에 할머니 고생 많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습니다. 안계신 지금은 더 그렇고요.
전 인생의 쉼표가 자주 있었습니다. 대구 근처 대학에 진학 한 후 미술 한답시고 3수를 했죠.
취업 한답시고 1년 가까이를 취업 재수를 했으니깐요.
제가 생각해도 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사연 없는 사람 없지만요.
그때마다 할머니는 묵묵히 등을 토닥토닥 해주셨습니다. 당신의 주름에는 제 걱정이
그득하게 전 보였습니다. 죄송하기도 하고 내 자신이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기나긴 1여년를 지나 어렵게 지금의 회사를 다니게 되었고, 취업후 첫 월급을 타자마자,
월급에서 작게나마 5만원을 봉투에 담아 할머니께 달려갔습니다. 어찌나 맘이 들뜨던지
세상을 다가진 기분이였습니다. 돈봉투를 드리며 부모님이 돌아가신것 처럼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내 녀석이 창피함 없이 원없이 울었네요. 그후로 서울 올라와서는
못 뵈었습니다.
언제나 그자리에 계실줄 알았는데, 작년쯤에 위암 말기라고 판정을 받으셨어요.
나이가 너무 드셨는지 우연히 위내시경을 받았는데 발견 되었다고 하네요.
너무 슬프면 말도 없고 말로 표현도 안되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뭐 할머니 건강에
도움 드린건 눈꼽만큼도 없지만, 그이후 할머니가 안 계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저도 어머니도 할머니이야기는 의도적으로 안했습니다. 이유는 굳히 다 아는걸 말할것도
없고,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죠.
작년 추석때 할머니 외삼촌 들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모두 겉으로는
웃으면서 맛난 밥이며 반찬을 먹었지만, 할머니는 미음만 조금 입에 축이 셨습니다.
그때도 의학적으로 기대 수명을 넘으셨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더 아프셨죠.
그리고 6개월 뒤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근무중에 받았습니다.
그 순간 할머니와 같이 보냈던 시간이 눈앞에 슬라이더처럼 지나갔습니다.
할머니 이제 못 부르고 못 보겠구나 라고 생각하면서요.
문자를 받은 후에 40여 시간이 지난후 할머님 영정사진을 들고 납골당에
들어갔습니다.
첫 월급날 할머니께 5만원을 드렸던 날처럼 염치 없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안 울면 후회할것 같았고, 할머니한테 때쓰고 싶었습니다.
" 왜 지금 가시냐고...... 보고 싶다고..... 돌아오시라고요..."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일상에 돌아왔고,
저희 집에 늙은 개 '혜미'가 그 옆에 있습니다.
외할머니 만큼 저희 어머니도 나이가 드셨네요.
10살 혜미를 보면 외할머니가 생각납니다.
혜미가 1살때 매일 오후시간에 외할머니가 돌봐줬습니다. 어릴적 저처럼요.
할머니는 외손주처럼 반가워하시고 돌봐줬어요.
어린녀석이 방에서 실례도 안한다고 기특하가고 하던 일까지 생각 납니다.
이번주에 대구에 집에 가면 할머니가 돌봐주시던 10살 혜미가 있습니다.
꼬리를 흔들며 반겨 줄텐데, 혜미를 보면 외할머니가 생각 날겁니다.
건강도 못챙겨드리고 평생 용돈만 주시다가 못난 외손주 용돈이라고는
5만원 밖에 못드리고 가시전에 얼굴 한번밖에 못 뵈었지만,
못난 손주가 낮선 서울에서 외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고,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사랑합니다. 할머니.
p.s : 결혼을 앞두고 나서 제 일생을 자연스럽게 돌아 보고 있는데,
그 생각중에 많은 부분을 외할머니가 차지하고 있네요. 이 기억을 남기고 싶고 공유하고 싶어.
글을 남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