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그 아픔 속에 숨겨진 진실

박지웅201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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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었다. 1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김일성 한 사람의 죽음 때문에 북한 인민 모두가 살인적인 고통을 겪었고 아직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 북한을 통치했던 김일성은 1992년 신년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기와집에서 고깃국에 쌀밥을 먹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일생의 염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염원이 그의 죽음으로 끝나버리자, 북한의 인민들은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북한 경제는 김일성의 사망 전부터 심각한 상황이었으며, 1994년 5월에 인도에 긴급 식량을 요청할 만큼 식량사정도 최악이었다. 1990년 이후 소련과 동유럽이 해체되면서 북한의 대외 교역체제가 붕괴되었고, 그 결과 경제활동이 위축되면서 북한은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어 식량배급도 중단되었다. 김일성의 사망 애도 기간으로 정해졌던 1995년 ~ 1998년까지 4년 동안의 기간은 북한 주민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가장 참혹한 시기였다.

 

국가에서 식량을 공급받지 못한 사람들은 칡뿌리와 논밭의 벼 뿌리를 캐어먹고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먹는 등, 토끼풀까지 뜯어먹는 사람들이 많아서 북한 전역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 기간 동안 평양시와 황해도의 일부를 제외한 함흥과 청진 등 전국 각지의 역전과 장마당에는 매일 같이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수십 구씩 널려 있었다.

 

우리 동네에도 굶에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는데, 죽은 사람들 절반 이상이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이었다. 소화기관이 약한 노인들과 어린이들도 칡뿌리와 벼 뿌리를 먹어야만 했는데, 깔깔한 것이 대장을 통과하지 못해서 항문이 막혀 죽었다. 게다가 파라티브스라는 전염병이 북한의 전역에 퍼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먹지 못해서 면역력이 약해져 병에 쉽게 걸리는데, 한 알의 약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죽어나간 시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가족 중에 파라티브스를 앓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북한의 김정일은 굶어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김일성의 시체를 영구 보존하는데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김일성의 시체를 레닌이나 모택동처럼 처리하기 위하여 러시아에서 기술자를 불러왔고 금수산 기념궁전을 호화찬란하게 다시 꾸미는 짓을 했다. 북한전역에서 강냉이 몇 알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김정일은 8억 9천만 불의 돈을 소비하여 김일성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는데 사용했다. 북한의 식량이 매해 2백만 톤씩 모자라는 것으로 볼 때 8억 9천만 불은 북한주민들이 3년 동안 주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을 추모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굶겨 죽였다.

 

그것도 모자라 김정일은 굶어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죽은 김일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도록 강요했다. 김일성의 애도기간 동안에는 날짜를 잡아둔 사람들도 결혼식을 할 수 없었고 집안에 기쁘고 슬픈 일을 당해도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술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집집마다 서로 감시하게 하였고 추모 기간 동안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기념탑에 꽃다발을 갖다 놓게 했다.

 

무조건 생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해서 이른 아침부터 피어있는 꽃을 찾아서 산과 들로 헤매고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생들도 집단으로 동원되었고, 참가여부를 검사하여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조사를 받았다. 삼복더위 속에서 하루 한 끼도 못 먹은 사람들은 열사병으로 그 자리에서 사망했지만 김일성을 추모하는 애도 기간에는 다른 사람의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하여 3일 장도 지내지 못했다.

 

하루에 한 번도 아니고 하루 3번씩 김일성을 위해 울라고 사람들을 강요하는 것도 모자라 애도 기간을 10일 더 연장하였다. 김일성의 3년 상을 지내는 동안 북한당국의 분위기는 매우 살벌하고 험악했다. 소위 ‘지키면 승리요. 버리면 죽음’이라는 죽음의 포고령을 내걸고 북한은 1995년부터 1997년 3월까지 북한전역에서 공개 총살을 감행했다. 평성, 순천, 회창, 성천, 무산 등 북한의 전 지역에서 공개 총살이 집행되었는데, 총살된 사람들의 죄명은 모두 ‘민족반역자’였다.

 

김일성을 애도한다는 명목 하에 사람들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감시하여 쿠데타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처형당한 이유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공장의 부속이나 동선 같은 것을 훔쳐서 중국에 팔았다는 것과 농작물을 훔쳐 먹었다는 것이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서 강냉이 한 이삭이라도 훔치는 자에게는 그 자리에서 총을 쏘아도 무방하다는 김정일의 식량포고령이 하달되었고, 더 이상 굶어 죽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가까운 중국으로 탈북하게 되었다.

 

김정일은 탈북자들 때문에 자신의 독재가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되자 ‘내 나라 사람들은 내가 먹여 살린다’며 탈북자들을 악착스럽게 붙잡아왔다. 중국공안과 북조선 특무들에 의하여 북한으로 붙잡혀간 탈북자들의 수가 1998년 겨울에만 해도 무려 3천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엄동설한에 신발과 양말이 벗겨진 채 ‘사회주의를 버린 민족 반역자’란 팻말을 들고 이리 저리로 끌려 다니며 매를 맞았다고 한다. 또한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하여 흑룡강성과 동북3성 일대에서 짐승처럼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팔려 다니면서 받은 고통과 수치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다.

 

김정일은 붙잡혀 온 탈북 여성들이 중국남자의 씨를 받아온 것은 나라망신이라며 임신한 여성들을 강제로 낙태시키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서슴지 않고 감행했다. 또한 중국에서 남한사람이나 미국사람 혹은 기독교인을 만난 사람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어 다시는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만난 사람들의 일부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심한 경우에는 사형을 당했다. 탈북을 감행했던 동기가 단지 굶주림 때문이었지만 북한 당국자들은 정치적 범죄로 엄하게 처벌했기 때문에 한번 탈북한 사람들은 북한 땅에 다시 잡혀서 북송되는 것을 죽음이상으로 두려워한다.

 

탈북자들은 왜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가족을 등지고 냉혹한 이국땅으로 피난의 발길을 돌려야만 했을까? 국가에서 최소한 식량만이라도 보장했더라면 우리는 결코 정든 고향 땅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희망 없는 탈북의 길을 떠남으로 탈북자들은 가족과 생이별해야 했으며, 탈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지금도 탈북자들은 마음 편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혼자 살겠다고 정든 가족을 버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할 짓이 아니다. 탈북자 누구도 스스로 원해서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북한에서 도망 나온 것은 아니다. 사실은 ‘김정일과 그 일당만이 밥을 먹고 대다수의 인민들은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이 그들을 북한 땅에서 쫓아낸 것이다. 그런데 그 현실을 만든 사람들에게 잡혀서 처형당하고 있는 것이 또한 탈북자들이 처한 참담한 현실이다. 바로 이것이 정의와 사랑을 입에 달고 다니는 남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외면해서는 안되는 진실이다.

 

ps. 이 글은 북한고향이 평안남도인 분이 쓴 글 ‘김일성의 사망과 고난의 행군’을 제가 편집한 것입니다. 사랑의교회 북한사랑의선교부 소식지인 북사랑에 올릴 글인데, 최종본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중국에 억류되어 있는 탈북자들이 강제북송의 위기에 처해 있고, 이들이 북한에 잡혀가면 극형을 면하기 어려운 지라. 강제북송을 반대하는 시위가 ‘경북궁역 2번 출구에서 10분 거리인 중국대사관’ 앞에서 매일 오후 2시와 7시에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탈북자들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글이라 판단되어 올리는 글이오니, 탈북자들의 강제북송을 중국당국이 그만둘 때까지 북송반대시위에 많은 서명과 관심, 그리고 참여를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