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정은의 자필비준이 노동신문을 통해 공개됐다. 일인지배를 부각시키는 차원에서 김정일의 비준정치를 그대로 답습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비준정치란 어떤 것일까? 북한에서 유일 비준제도가 생긴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이다. 김일성 주석권한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제한시키고 사실상 당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한 김정일은 유일비준을 통해 일인지배 체제를 시작했다.
초기 비준제도 명목은 김일성의 업무 과부담을 덜기 위해 당조직부가 선별하여 김정일 당조직비서가 비준한 다음 당총비서에게 보낸다는 것이었다. 하여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의 내각, 군, 정부의 모든 문건들은 해당 중앙당 상급부서들을 통해 당 조직부로 집중되도록 법제화됐다. 예컨대 외무성은 당 국제부, 문화성은 당 선전선동부를 거쳐 당 조직부로 문건을 발송하도록 했다.
이런 관계로 제의서 작성과 준비, 마감에 이르기까지 중앙당 각 부서들은 관리 단위들에 대한 지도와 개입을 구체화 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 과정에 북한의 내각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됐고, 반면 당은 절대권력으로 급부상하게 됐다. 여기서 당 조직부는 주요 간부들의 인사권은 물론, 당 지도권한으로 각 부서들에서 모여진 문건들을 종합하여 보고하고, 그 결과를 추궁하는 역할을 했다.
이렇듯 문건의 집중화는 곧 김정일의 당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를 완성시켰다. 때문에 김일성은 1980년대 중반부터 당조직부의 제의서, 비준제도 장벽에 꽉 막혀 나라실정을 전혀 알 수 없는 눈먼 지도자로 전락됐다. 김일성이 그러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김정일이 모든 권력과 기능을 빠짐없이 장악한 뒤였다. 아래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여러 경로를 거쳐야 했고, 경호부대인 1호호위총국마저 당 조직부에 소속돼 근접경호가 아니라 근접감시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이 배급제가 붕괴됐다는 사실을 알고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한 것은 소식의 충격보다 그동안의 또 다른 심리적 원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김일성의 주석권한을 무력화시킨 김정일의 비준은 크게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가장 상위등급은 ‘친필비준’이었다. ‘친필비준’이란 김정일이 제의서 내용을 자필로 일부 수정하거나 추가, 또는 강조한 다음 날짜와 이름을 적어 넣는 방식의 비준이다. 이 ‘친필비준’은 지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라는 뜻으로서 강제성을 띠며 다른 제의서들에 비해 최우선 실행권한이 부여됐다. 때문에 이 비준을 받은 제의서일 경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 결과를 다시 보고해야 했다. 만약 지연되거나, 김정일이 결과에 불만족할 경우, 당 조직부는 당지도권한으로 관련 간부들을 색출하여 엄벌했다.
(김정일의 비준 중 가장 최상위 "친필비준")
김정일의 두 번째 비준등급은 ‘존함비준’이었다. 김정일의 자필 내용이 없이 날짜와 이름을 새겨 넣는 형식의 비준이다. 이런 비준의 사안들은 김정일이 ‘친필비준’처럼 관심을 가졌다기 보다 그냥 허락했다는 의미가 더 컸다. 그래서 이런 비준 문건들은 강제성보다 시간제한에 관계없이 무조건성을 가지며, 그 결과는 김정일이 아니라 당 조직부에 보고하도록 돼 있었다.
마지막으로 날짜비준이 있다. 이 비준은 김정일의 자필이나, 이름은 없이 그냥 비준 당일 날짜만 표기돼 있었다. 한마디로 김정일이 보았다는 수준의 비준이다. 그러나 이 날짜 비준 문건이 내려올 경우 당 고위 간부들은 김정일이 보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김정일 서기실의 보고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똘아이짓들
초기 비준제도 명목은 김일성의 업무 과부담을 덜기 위해 당조직부가 선별하여 김정일 당조직비서가 비준한 다음 당총비서에게 보낸다는 것이었다. 하여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의 내각, 군, 정부의 모든 문건들은 해당 중앙당 상급부서들을 통해 당 조직부로 집중되도록 법제화됐다. 예컨대 외무성은 당 국제부, 문화성은 당 선전선동부를 거쳐 당 조직부로 문건을 발송하도록 했다.
이런 관계로 제의서 작성과 준비, 마감에 이르기까지 중앙당 각 부서들은 관리 단위들에 대한 지도와 개입을 구체화 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 과정에 북한의 내각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됐고, 반면 당은 절대권력으로 급부상하게 됐다. 여기서 당 조직부는 주요 간부들의 인사권은 물론, 당 지도권한으로 각 부서들에서 모여진 문건들을 종합하여 보고하고, 그 결과를 추궁하는 역할을 했다.
이렇듯 문건의 집중화는 곧 김정일의 당조직비서 유일지도체제를 완성시켰다. 때문에 김일성은 1980년대 중반부터 당조직부의 제의서, 비준제도 장벽에 꽉 막혀 나라실정을 전혀 알 수 없는 눈먼 지도자로 전락됐다. 김일성이 그러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김정일이 모든 권력과 기능을 빠짐없이 장악한 뒤였다. 아래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여러 경로를 거쳐야 했고, 경호부대인 1호호위총국마저 당 조직부에 소속돼 근접경호가 아니라 근접감시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이 배급제가 붕괴됐다는 사실을 알고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한 것은 소식의 충격보다 그동안의 또 다른 심리적 원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김일성의 주석권한을 무력화시킨 김정일의 비준은 크게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가장 상위등급은 ‘친필비준’이었다. ‘친필비준’이란 김정일이 제의서 내용을 자필로 일부 수정하거나 추가, 또는 강조한 다음 날짜와 이름을 적어 넣는 방식의 비준이다. 이 ‘친필비준’은 지도자가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라는 뜻으로서 강제성을 띠며 다른 제의서들에 비해 최우선 실행권한이 부여됐다. 때문에 이 비준을 받은 제의서일 경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 결과를 다시 보고해야 했다. 만약 지연되거나, 김정일이 결과에 불만족할 경우, 당 조직부는 당지도권한으로 관련 간부들을 색출하여 엄벌했다.
(김정일의 비준 중 가장 최상위 "친필비준")
김정일의 두 번째 비준등급은 ‘존함비준’이었다. 김정일의 자필 내용이 없이 날짜와 이름을 새겨 넣는 형식의 비준이다. 이런 비준의 사안들은 김정일이 ‘친필비준’처럼 관심을 가졌다기 보다 그냥 허락했다는 의미가 더 컸다. 그래서 이런 비준 문건들은 강제성보다 시간제한에 관계없이 무조건성을 가지며, 그 결과는 김정일이 아니라 당 조직부에 보고하도록 돼 있었다.
마지막으로 날짜비준이 있다. 이 비준은 김정일의 자필이나, 이름은 없이 그냥 비준 당일 날짜만 표기돼 있었다. 한마디로 김정일이 보았다는 수준의 비준이다. 그러나 이 날짜 비준 문건이 내려올 경우 당 고위 간부들은 김정일이 보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김정일 서기실의 보고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