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일까, 그 역사와 문화 속에 들어가 함께 느끼기를 소망하며, 나아가 그 속에 담겨 있는 신의 섭리까지라도 발견하기를 소원해 본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유구하며 찬란하다.
그러면서도 그저 역사이고 문화이기를 거부한다.
그 속엔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숨결이 있었으며, 영원을 갈망해 온 우리 선조들의 영원성 곧 종교성이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넉넉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있어지는 게 바로 종교요 더 나아가 종교와 함께한 삶이었다.
다시 말해 면면이 이어온 역사와 문화는 곧 종교성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 온 힘의 원천은 바로 토속신앙을 포함한 종교였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깨달아야 할 것은 각 종교의 모습과 방식은 제각각 달랐다 할지라도 부패와 타락으로 신앙의 목적이 변질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 추구하는 목적은 같았다는 사실이다.
어찌됐던 그많은 종교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우리의 생각과 정신과 생활에 가장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바로 토속신앙이며, 나아가 불교와 유교문화일 것이다.
물론 카톨릭과 개신교와 함께 근대 서구문화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문화적 충돌을 야기했고, 이는 오늘날 우리의 의식과 가치관의 혼란으로 이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충돌이 빚어지게 된 데는 우리의 삶을 지베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무지로 인함이 아닌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무지라 함은 모든 종교는 하나의 염원을 향해 수도자와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오히려 종교의 본래 목적과는 상관없이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신념에 가득찬 이기적인 의식과 가치관을 낳았고, 오히려 이 사회와 나라와 인류를 혼돈케 하는 데 한몫을 차지했다.
여기서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 가장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불교문화의 일부분에 대해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는 것은 사찰이다.
그런데 이 사찰 내를 보면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천왕문(天王門)이 있다.
그리고 이 문들은 대게 일자로 연결돼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문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상징성은 과연 뭘까.
먼저 하나니의 기둥이란 뜻을 가진 일주문부터 알아보자.
이 일주문은 사찰의 초입에 세워져 있으며, 중생들의 속세와의 분리와 경계를 의미한다.
즉, 중생들에게 세속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오로지 진리를구하는 한마음으로 들어올 것을 일깨우는 문이다.
다음으로 천왕문이 이싿.
이 천왕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사천왕사을 만나야 한다.
불법을 수호하는 네 명의 수호신이다.
천왕상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줄 정도로 무섭게 표현돼 있다.
무서운 얼굴에 손에는 큼직한 칼을 들고 있고, 발로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천왕상의 모습이다.
천왕상의 발밑에 깔린 마귀들은 분명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니다.
이는 이미 일주문을 통해 불가에 입문한 불도들은 극락에 이르기 위해 몸가짐과 언행을 더욱 신중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으며, 그러지 못할 경우는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도 함께 암시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불이문이 있다.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인 셈이다.
불이의 경지가 곧 해탈(解脫)이므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이 불이문은 통상 2층의 누각으로 돼 있으며, 이는 중생이 득도함으로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니 곧 신인(神人)이 하나가 됐음을 의미하며, 이같이신의 경지에 도달하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부처가 있는 법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말하고자 함은 일반적으로 이 땅에 지어진 사찰의 형태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결론을 단지 공간적으로 묘사해 놓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불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문이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12문이 있는데, 그 문들을 설명하길,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고 했으니 12제자가 곧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 수 있다.
또 이천 년 전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 하면서 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고 하셨다.
그렇다.
어떠한 종교든 그 목적은 바로 구원에 있는 것이며, 그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선 분명 문들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그 문이 과연 저 세상의 문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차원의 '참 문'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각기 다른 종교의 길을 걷게 함은 참 신앙인의 참 신앙을 통해 참 신(神)을 찾게 하고자 하는 절대자의 절대적인 모략은 아닐까...
[신천지 칼럼]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내재된 종교성
[신천지 칼럼]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내재된 종교성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그 역사와 문화 속에 들어가 함께 느끼기를 소망하며, 나아가 그 속에 담겨 있는 신의 섭리까지라도 발견하기를 소원해 본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유구하며 찬란하다.
그러면서도 그저 역사이고 문화이기를 거부한다.
그 속엔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숨결이 있었으며, 영원을 갈망해 온 우리 선조들의 영원성 곧 종교성이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넉넉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있어지는 게 바로 종교요 더 나아가 종교와 함께한 삶이었다.
다시 말해 면면이 이어온 역사와 문화는 곧 종교성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 온 힘의 원천은 바로 토속신앙을 포함한 종교였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깨달아야 할 것은 각 종교의 모습과 방식은 제각각 달랐다 할지라도 부패와 타락으로 신앙의 목적이 변질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 추구하는 목적은 같았다는 사실이다.
어찌됐던 그많은 종교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우리의 생각과 정신과 생활에 가장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바로 토속신앙이며, 나아가 불교와 유교문화일 것이다.
물론 카톨릭과 개신교와 함께 근대 서구문화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문화적 충돌을 야기했고, 이는 오늘날 우리의 의식과 가치관의 혼란으로 이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충돌이 빚어지게 된 데는 우리의 삶을 지베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무지로 인함이 아닌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무지라 함은 모든 종교는 하나의 염원을 향해 수도자와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오히려 종교의 본래 목적과는 상관없이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신념에 가득찬 이기적인 의식과 가치관을 낳았고, 오히려 이 사회와 나라와 인류를 혼돈케 하는 데 한몫을 차지했다.
여기서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 가장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불교문화의 일부분에 대해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는 것은 사찰이다.
그런데 이 사찰 내를 보면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천왕문(天王門)이 있다.
그리고 이 문들은 대게 일자로 연결돼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문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상징성은 과연 뭘까.
먼저 하나니의 기둥이란 뜻을 가진 일주문부터 알아보자.
이 일주문은 사찰의 초입에 세워져 있으며, 중생들의 속세와의 분리와 경계를 의미한다.
즉, 중생들에게 세속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오로지 진리를구하는 한마음으로 들어올 것을 일깨우는 문이다.
다음으로 천왕문이 이싿.
이 천왕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사천왕사을 만나야 한다.
불법을 수호하는 네 명의 수호신이다.
천왕상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줄 정도로 무섭게 표현돼 있다.
무서운 얼굴에 손에는 큼직한 칼을 들고 있고, 발로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천왕상의 모습이다.
천왕상의 발밑에 깔린 마귀들은 분명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니다.
이는 이미 일주문을 통해 불가에 입문한 불도들은 극락에 이르기 위해 몸가짐과 언행을 더욱 신중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으며, 그러지 못할 경우는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도 함께 암시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불이문이 있다.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인 셈이다.
불이의 경지가 곧 해탈(解脫)이므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이 불이문은 통상 2층의 누각으로 돼 있으며, 이는 중생이 득도함으로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니 곧 신인(神人)이 하나가 됐음을 의미하며, 이같이신의 경지에 도달하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부처가 있는 법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말하고자 함은 일반적으로 이 땅에 지어진 사찰의 형태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결론을 단지 공간적으로 묘사해 놓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불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문이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12문이 있는데, 그 문들을 설명하길,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고 했으니 12제자가 곧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 수 있다.
또 이천 년 전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 하면서 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고 하셨다.
그렇다.
어떠한 종교든 그 목적은 바로 구원에 있는 것이며, 그 구원에 도달하기 위해선 분명 문들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그 문이 과연 저 세상의 문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차원의 '참 문'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각기 다른 종교의 길을 걷게 함은 참 신앙인의 참 신앙을 통해 참 신(神)을 찾게 하고자 하는 절대자의 절대적인 모략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