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테니스가 내 일상을 잠식했다. 스쳐 지나가던 케이블 TV의 테니스 중계를 멍하니 바라보며 세삼스럽게 그들의 폼을 따라해본다. 역시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는 것만큼 가슴 뛰게 하는 건 없다. 테니스 말고도 요새 내가 새롭게 시작한 일들이 몇 가지 있다. 신문 전면 정독을 위해 인터넷으로 깨작거리던 한겨레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신문을 쫙 펼처보며 아침을 시작하는 기분은 왠지모르게 근사하다. 그뿐만 아니라 수영, 당구, 골프, 포커와 같이 나와 멀게만 느껴졌던 취미들에 친숙해지려 노력하고 있다. 내게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의 까닭은 나라는 사람의 소주제에 더 다양한 분야의 것들이 추가되길 바랐다. 사무실에서 문득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는데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건 영화를 보는 것뿐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영화밖에 볼 줄 몰라서 그러는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커피 한 잔 들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고르고, 평온하게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본다는 건 내게 행복 그 자체인데, 그 행복의 순수함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무실 창밖으로 테니스 체를 들고 웃으며 걸어가는 무리들을 본 건 그때였다. 나도 다른 걸 좀 하고 싶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영화만 봐왔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영화만을 통해 난 행복해 질 수 있었다. 다양한 취미를 갖는다는 것이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보다는 사회적으로 더 유용한 사람이 되자는 도구적인 입장이 더 큰 것 같다. 테니스를 칠 줄 아는 나 자신이 테니스를 하는 기쁨 그 자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그저 난 일상의 변화를 꿈꾸고 있을 뿐이었다.
테니스를 채를 쥐는 그 자체만으로 꽤 근사하는 느낌을 주는 스포츠다.
난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느끼는 압박을 견딜 수 없다. 더 멋지고 유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하면서 무조건 변화해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저 남들이 하는 것이니 나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어버린다. 난 직업선택에서도 이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난 최대한 빠르게 돈을 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돈을 버는 사회인이 주는 안정감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직업은 모험이 적고, 자유시간이 많은 안정적인 직업이 되길 갈망했다. 난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빠른 속도로 그것을 찾았고, 그곳에 안착했다. 난 사회인으로서 지위를 획득하자 직업을 행하는 그 기쁨보다는 사회인이 되었다는 결과에 더 안심하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직업이 안정이 되자 다양한 취미를 원했고, 취미가 정해지자 그럴싸한 차를 가지고 싶었다. 아니 차를 가진 남자가 되고 싶었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일상이 반복되면 권태가 찾아온다. 그 친구는 이름처럼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날 초라하게 만들어 미칠 것 같이 느껴진다. 어떤 물건, 음식, 삶의 패턴, 사람까지도 반복되면 지루해지고 더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 처음엔 욕심 없이 접근했던 그 무언가가 좀 더 커지고,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무언가로 바뀌길 원하는 뻔뻔함은 권태라는 친구를 더욱 무섭게 만든다. 난 권태씨가 내 집 문을 두드리면 어김없이 무언가를 찾아낸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내 삶은 더욱 행복하고, 재밌을 거야. 커피를 처음 마실 땐 그 씁쓸한 맛에 거부감이 들지만, 한 잔 한 잔 마시다보면 커피가 주는 그 씁쓸한 맛이 어느새 싱겁게 느껴진다. 그러다보면 에스프레소를 찾게 되고, 커피 한잔으로는 양에 차지 않아 몇 잔을 마셔도 부족함을 느낀다. 인생이란 그런 익숙함과의 싸움일 것이다. 옷 장 속에 한 벌 한 벌 늘어나는 입지 않은 옷들이 그런 나를 대변해준다.
하이데거씨는 나치당에 입당한 일로 평생 그의 사상을 의심받았다.
하지만 그의 철학이 후대에 미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일생을 오직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만 사유하는 데 보냈던 독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1888~1976)의 저서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 ‘삶의 무의미성’과 그것의 극복을 ‘권태’의 문제와 연관하여 다루고 있다. 권태란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염려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다. 그것은 삶이란 그저 공허한 시간 속에서 삶을 견뎌내는 자의 초조한 마음과 같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앞에 두고, 한없는 기다림으로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존재가 아닌지 그는 평생 그 죽음을 앞둔 자의 권태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 자신 역시 죽음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세계에 내던져진 자다. 이는 어떠한 운명도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짐(권태)을 덜어내는 것과 같다.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만 맡겨져 있음에 대해서 언제나 불안해하며, 그것 때문에 항상 자신의 삶을 염려한다. 이런 불안은 시간 죽이기를 통해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시간은 더디 가고, 목적지에 도착할 시간을 체크하며 우리는 또 다른 시간 죽이기에 최선을 다한다.
샘 멘더스 감독은 <아메리칸 뷰티>에 버금가는 중산층의 몰락을 심도있게 다루는 영화를 만들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무척 볼만하다. 그녀는 한번도 불만족스러운 연기를 한 적이 없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이런 ‘권태’가 찾아온 부부에 관한 이야기다. 첫눈에 반한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뉴욕 맨하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교외 지역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에 보금자리를 꾸리게 된 두 사람. 모두가 안정되고 행복해 보이는 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그들의 사랑과 가정도 평안해 보이지만, 잔잔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탈출을 원하는 에이프릴과 프랭크는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의 이민을 꿈꾼다. 새로운 삶을 찾게 되는 것에 들뜨고 행복하기만 한 두 사람.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려는 찰나 프랭크는 승진 권유를 받게 된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파리로 가고자 하는 에이프릴, 그리고 현실에서 좀 더 안정된 삶을 살고자 하는 프랭크. 서로를 너무 사랑하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표면적 권태’와 ‘깊은 권태’로 분류했다. 표면적 권태는 자기 자신이나 혹은 내 앞에 있는 상대 때문에 생기는 어떠한 상황에 잡혀 공허해지는 것을 말한다. 이는 비본래적 권태라는 말과 같이 쓰는데, 원래는 권태롭지 아니한데, 외부적 영향에 의해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권태는 어떤 식이든지 간에 그것에 대항하는 시간 때우기가 가능하다.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 몰두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해서 권태를 잊어버리는 최면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권태는 혼자놀기를 잘하거나 삶의 일시적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여 여러 가지 취미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진실 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종의 긍정이라는 혹은 재미라는 최면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때울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긍정의 힘’이란 바로 긍정할 수 없는 것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즐겁다 말하는 것을 취함으로서 얻는 환각작용인 것이다. 그저 호기심 가는 대로 인터넷, 쇼핑, 관광, 패션, 레저, 관음증, 욕설, 매체, 컨텐츠 등을 마구 섭취하고, 뒤로는 상대의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사회문제와 같은 자기 밖의 문제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문제마저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신 잡담이나 호기심에 의존하여 ‘원래 사람은 다 그런거야.’라고 세상 다 아는 표정으로 거만하게 말하며 대충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간 죽이기’는 그 대가로 퇴락과 전락을 반드시 치르게 된다. 무서운 말이다.
요즘 신문을 연일 장식하는 월가의 시위를 보면, 일상의 무기력함과 지루함 그 넘어 자신의 인생을 자각하려는 젊은이들의 축제와 같이 보인다. 기득권을 조롱하고, 힐난하며 자신들이 언제나 고개숙이던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그들의 시도가 조금은 슬프게 느껴진다. 왜냐면 변할 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내 삶은 지금 이 상태로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죽어있다고 믿는 무조건 적인 권태가 있다. 이는 깊은 권태 혹은 본래적 권태라고 말하는데, 이 권태는 시간을 때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일사의 신변잡기에 몰입하려고 해도 깊은 권태는 언제나 뾰족한 가시처럼 당신의 일상을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린다. 이에 하이데거는 이 무조건적인 깊은 권태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존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실존이란 개별자로서 자기의 존재를 자각적으로 물으면서 존재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상태를 말하는데, 자기 스스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끝까지 탐구하여 본래의 자기를 완전히 찾아내는 삶인 것이다. 한국의 헤비메탈 그룹 크래쉬의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곡이 유행한 적이 있다. 내가 목숨을 걸고 싶고, 이거 아니면 죽음인 그 무언가를 찾아 내 몸에 아로새기는 그 자체로서 자신의 본질은 세상에 의미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러한 삶의 개혁욕구는 깊은 권태에서 출발하고, 신변잡기와 호기심의 충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깊은 슬픔이 바로 내가 진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본래의 삶이다.
프랭크의 모습은 마치 나와 당신의 모습일 것이다. 일정한 쾌락과 일정한 자극을 통해 일상을 연명하는 이 시대의 셀러리맨.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남편인 프랭크는 전형적인 표면적 권태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일상에 권태를 느끼지만, 그는 외부적 요인으로 자신의 권태를 잠시 늦춘다. 영화에서 그는 동료들과 상사와 회사 험담을 하며 잠시나마 권태를 잊어본다. 또 다시 찾아온 권태는 외갖 여자와의 불륜을 통해 잊으려 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권태는 다시 그를 찾아와 초조케 한다. 영화에서는 파리로 가 새 인생을 시작하자는 부인의 청에 그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파리로 가는 것을 거부한다. 승진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그를 자극하자 그는 자신의 삶이 다시 풍요로워졌다고 믿어버린다. 그래서 그는 에이프릴이 임신하자 그것을 빌미로 현실적 무게를 강조하며 파리로 가는 계획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다. 하지만 에이프릴은 그와는 다르게 지독한 깊은 권태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개혁하길 원했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과 같은 깊은 권태를 느끼고 있으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동반자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오인에서 시작된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실존을 찾아내길 원해 그를 설득했지만, 자신이 임신한 아이 때문에 그 계획이 망가졌다고 생각하자 아이를 일부러 유산시킨다. 이 영화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삶의 지루함에 미쳐버린 남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프랭크를 비웃는다. 언젠가는 자신처럼 전락할 것이 분명한 이 남자를 보며 그는 동정심을 갖는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비본래적 삶의 최후를.
인생이 시간 때우기라고 말하는 하이데거의 이론에 반론을 할 수 없다니. 그것은 어쩌면 당신의 자각을 위한 충고일지 모른다. 귀 기울여 생각해보라.
이 영화에서 프랭크의 모습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을 자극하는 외부적 요인을 끊임없이 찾으며 삶의 지루함에서 벗어나려는 표면적 권태를 가진 인물.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보다는 삶의 호기심을 통해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권태라는 병에 진통제를 투여한다. 테니스를 하고, 골프를 치고, 좋아하는 글을 쓰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일상의 고약한 악취는 계속해서 날 권태롭게 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종착지는 정해져 있고, 이대로 살다가는 난 전락하여 헤어나올 수 없는 지루함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항상 나는 내 삶을 가엾게 여긴다. 오늘도 신문을 펼쳐 꼼꼼히 기사를 살핀다. 날 바꿔줄 혁명의 길이 언제나 우리 집 앞 도로에 펼처질 수 도 있는 법이니까.
권태로운 삶에 대한 글
철학자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샘 멘더스 감독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통해 본 권태로운 삶의 진실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테니스가 내 일상을 잠식했다. 스쳐 지나가던 케이블 TV의 테니스 중계를 멍하니 바라보며 세삼스럽게 그들의 폼을 따라해본다. 역시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는 것만큼 가슴 뛰게 하는 건 없다. 테니스 말고도 요새 내가 새롭게 시작한 일들이 몇 가지 있다. 신문 전면 정독을 위해 인터넷으로 깨작거리던 한겨레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신문을 쫙 펼처보며 아침을 시작하는 기분은 왠지모르게 근사하다. 그뿐만 아니라 수영, 당구, 골프, 포커와 같이 나와 멀게만 느껴졌던 취미들에 친숙해지려 노력하고 있다. 내게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의 까닭은 나라는 사람의 소주제에 더 다양한 분야의 것들이 추가되길 바랐다. 사무실에서 문득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는데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건 영화를 보는 것뿐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영화밖에 볼 줄 몰라서 그러는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커피 한 잔 들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고르고, 평온하게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본다는 건 내게 행복 그 자체인데, 그 행복의 순수함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무실 창밖으로 테니스 체를 들고 웃으며 걸어가는 무리들을 본 건 그때였다. 나도 다른 걸 좀 하고 싶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영화만 봐왔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영화만을 통해 난 행복해 질 수 있었다. 다양한 취미를 갖는다는 것이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보다는 사회적으로 더 유용한 사람이 되자는 도구적인 입장이 더 큰 것 같다. 테니스를 칠 줄 아는 나 자신이 테니스를 하는 기쁨 그 자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그저 난 일상의 변화를 꿈꾸고 있을 뿐이었다.
테니스를 채를 쥐는 그 자체만으로 꽤 근사하는 느낌을 주는 스포츠다.
난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고 느끼는 압박을 견딜 수 없다. 더 멋지고 유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하면서 무조건 변화해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저 남들이 하는 것이니 나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어버린다. 난 직업선택에서도 이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난 최대한 빠르게 돈을 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돈을 버는 사회인이 주는 안정감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직업은 모험이 적고, 자유시간이 많은 안정적인 직업이 되길 갈망했다. 난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빠른 속도로 그것을 찾았고, 그곳에 안착했다. 난 사회인으로서 지위를 획득하자 직업을 행하는 그 기쁨보다는 사회인이 되었다는 결과에 더 안심하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직업이 안정이 되자 다양한 취미를 원했고, 취미가 정해지자 그럴싸한 차를 가지고 싶었다. 아니 차를 가진 남자가 되고 싶었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일상이 반복되면 권태가 찾아온다. 그 친구는 이름처럼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날 초라하게 만들어 미칠 것 같이 느껴진다. 어떤 물건, 음식, 삶의 패턴, 사람까지도 반복되면 지루해지고 더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 처음엔 욕심 없이 접근했던 그 무언가가 좀 더 커지고,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무언가로 바뀌길 원하는 뻔뻔함은 권태라는 친구를 더욱 무섭게 만든다. 난 권태씨가 내 집 문을 두드리면 어김없이 무언가를 찾아낸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내 삶은 더욱 행복하고, 재밌을 거야. 커피를 처음 마실 땐 그 씁쓸한 맛에 거부감이 들지만, 한 잔 한 잔 마시다보면 커피가 주는 그 씁쓸한 맛이 어느새 싱겁게 느껴진다. 그러다보면 에스프레소를 찾게 되고, 커피 한잔으로는 양에 차지 않아 몇 잔을 마셔도 부족함을 느낀다. 인생이란 그런 익숙함과의 싸움일 것이다. 옷 장 속에 한 벌 한 벌 늘어나는 입지 않은 옷들이 그런 나를 대변해준다.
하이데거씨는 나치당에 입당한 일로 평생 그의 사상을 의심받았다.
하지만 그의 철학이 후대에 미친 지대한 영향에 대해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일생을 오직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만 사유하는 데 보냈던 독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1888~1976)의 저서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 ‘삶의 무의미성’과 그것의 극복을 ‘권태’의 문제와 연관하여 다루고 있다. 권태란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염려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다. 그것은 삶이란 그저 공허한 시간 속에서 삶을 견뎌내는 자의 초조한 마음과 같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앞에 두고, 한없는 기다림으로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존재가 아닌지 그는 평생 그 죽음을 앞둔 자의 권태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 자신 역시 죽음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세계에 내던져진 자다. 이는 어떠한 운명도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짐(권태)을 덜어내는 것과 같다.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만 맡겨져 있음에 대해서 언제나 불안해하며, 그것 때문에 항상 자신의 삶을 염려한다. 이런 불안은 시간 죽이기를 통해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시간은 더디 가고, 목적지에 도착할 시간을 체크하며 우리는 또 다른 시간 죽이기에 최선을 다한다.
샘 멘더스 감독은 <아메리칸 뷰티>에 버금가는 중산층의 몰락을 심도있게 다루는 영화를 만들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무척 볼만하다. 그녀는 한번도 불만족스러운 연기를 한 적이 없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이런 ‘권태’가 찾아온 부부에 관한 이야기다. 첫눈에 반한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뉴욕 맨하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교외 지역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에 보금자리를 꾸리게 된 두 사람. 모두가 안정되고 행복해 보이는 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그들의 사랑과 가정도 평안해 보이지만, 잔잔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탈출을 원하는 에이프릴과 프랭크는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의 이민을 꿈꾼다. 새로운 삶을 찾게 되는 것에 들뜨고 행복하기만 한 두 사람.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려는 찰나 프랭크는 승진 권유를 받게 된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파리로 가고자 하는 에이프릴, 그리고 현실에서 좀 더 안정된 삶을 살고자 하는 프랭크. 서로를 너무 사랑하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표면적 권태’와 ‘깊은 권태’로 분류했다. 표면적 권태는 자기 자신이나 혹은 내 앞에 있는 상대 때문에 생기는 어떠한 상황에 잡혀 공허해지는 것을 말한다. 이는 비본래적 권태라는 말과 같이 쓰는데, 원래는 권태롭지 아니한데, 외부적 영향에 의해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권태는 어떤 식이든지 간에 그것에 대항하는 시간 때우기가 가능하다.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 몰두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해서 권태를 잊어버리는 최면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권태는 혼자놀기를 잘하거나 삶의 일시적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여 여러 가지 취미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진실 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종의 긍정이라는 혹은 재미라는 최면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때울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긍정의 힘’이란 바로 긍정할 수 없는 것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즐겁다 말하는 것을 취함으로서 얻는 환각작용인 것이다. 그저 호기심 가는 대로 인터넷, 쇼핑, 관광, 패션, 레저, 관음증, 욕설, 매체, 컨텐츠 등을 마구 섭취하고, 뒤로는 상대의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사회문제와 같은 자기 밖의 문제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문제마저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신 잡담이나 호기심에 의존하여 ‘원래 사람은 다 그런거야.’라고 세상 다 아는 표정으로 거만하게 말하며 대충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간 죽이기’는 그 대가로 퇴락과 전락을 반드시 치르게 된다. 무서운 말이다.
요즘 신문을 연일 장식하는 월가의 시위를 보면, 일상의 무기력함과 지루함 그 넘어 자신의 인생을 자각하려는 젊은이들의 축제와 같이 보인다. 기득권을 조롱하고, 힐난하며 자신들이 언제나 고개숙이던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그들의 시도가 조금은 슬프게 느껴진다. 왜냐면 변할 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내 삶은 지금 이 상태로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죽어있다고 믿는 무조건 적인 권태가 있다. 이는 깊은 권태 혹은 본래적 권태라고 말하는데, 이 권태는 시간을 때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일사의 신변잡기에 몰입하려고 해도 깊은 권태는 언제나 뾰족한 가시처럼 당신의 일상을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린다. 이에 하이데거는 이 무조건적인 깊은 권태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존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실존이란 개별자로서 자기의 존재를 자각적으로 물으면서 존재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상태를 말하는데, 자기 스스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끝까지 탐구하여 본래의 자기를 완전히 찾아내는 삶인 것이다. 한국의 헤비메탈 그룹 크래쉬의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곡이 유행한 적이 있다. 내가 목숨을 걸고 싶고, 이거 아니면 죽음인 그 무언가를 찾아 내 몸에 아로새기는 그 자체로서 자신의 본질은 세상에 의미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러한 삶의 개혁욕구는 깊은 권태에서 출발하고, 신변잡기와 호기심의 충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깊은 슬픔이 바로 내가 진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본래의 삶이다.
프랭크의 모습은 마치 나와 당신의 모습일 것이다. 일정한 쾌락과 일정한 자극을 통해 일상을 연명하는 이 시대의 셀러리맨.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남편인 프랭크는 전형적인 표면적 권태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일상에 권태를 느끼지만, 그는 외부적 요인으로 자신의 권태를 잠시 늦춘다. 영화에서 그는 동료들과 상사와 회사 험담을 하며 잠시나마 권태를 잊어본다. 또 다시 찾아온 권태는 외갖 여자와의 불륜을 통해 잊으려 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권태는 다시 그를 찾아와 초조케 한다. 영화에서는 파리로 가 새 인생을 시작하자는 부인의 청에 그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파리로 가는 것을 거부한다. 승진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그를 자극하자 그는 자신의 삶이 다시 풍요로워졌다고 믿어버린다. 그래서 그는 에이프릴이 임신하자 그것을 빌미로 현실적 무게를 강조하며 파리로 가는 계획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다. 하지만 에이프릴은 그와는 다르게 지독한 깊은 권태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개혁하길 원했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과 같은 깊은 권태를 느끼고 있으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동반자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오인에서 시작된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실존을 찾아내길 원해 그를 설득했지만, 자신이 임신한 아이 때문에 그 계획이 망가졌다고 생각하자 아이를 일부러 유산시킨다. 이 영화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삶의 지루함에 미쳐버린 남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프랭크를 비웃는다. 언젠가는 자신처럼 전락할 것이 분명한 이 남자를 보며 그는 동정심을 갖는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비본래적 삶의 최후를.
인생이 시간 때우기라고 말하는 하이데거의 이론에 반론을 할 수 없다니. 그것은 어쩌면 당신의 자각을 위한 충고일지 모른다. 귀 기울여 생각해보라.
이 영화에서 프랭크의 모습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을 자극하는 외부적 요인을 끊임없이 찾으며 삶의 지루함에서 벗어나려는 표면적 권태를 가진 인물.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보다는 삶의 호기심을 통해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권태라는 병에 진통제를 투여한다. 테니스를 하고, 골프를 치고, 좋아하는 글을 쓰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일상의 고약한 악취는 계속해서 날 권태롭게 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종착지는 정해져 있고, 이대로 살다가는 난 전락하여 헤어나올 수 없는 지루함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항상 나는 내 삶을 가엾게 여긴다. 오늘도 신문을 펼쳐 꼼꼼히 기사를 살핀다. 날 바꿔줄 혁명의 길이 언제나 우리 집 앞 도로에 펼처질 수 도 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