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앞에서

설산200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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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꽃을 피우더니

가슴에 연한 주단을 깔더니

바람은 변했다

터질까 말까 망설이는 꽃순에게 다가가

수만의 금가루를 뿌리듯 숨결을 불어넣더니

대지의 여인은 이제,

검은 외투를 휘날리며 사람의 마을을 점령하고

죄없는 도시의 골목골목에 내려와 단죄의 채찍을 두른다


너를 향한 따스한 눈길도

만남을 위한 애틋하게 펄럭이는 손짓도

이웃을 향하여 주머니를 뒤적이는 몸짓도

바람 앞엔 숨을 죽이는 법

종종걸음의 뒷덜미를 따라가서 한 웅큼 얼음을 집어넣고는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도끼눈으로 노려보다 휭하니

떨고 있는 전깃줄에 달려가 소리 지르는 바람은

그러나,

산골에선 이웃집 돌이가 된다

심술궂지만 속이 없는 남자, 그가

긴 팔을 펄럭이며 그대로 가슴에 돌진하여

도시의 삶을 확 씻는다, 순간

우린 한 모금 증류수가 되는 셈이다


쨍하니 은색 쟁반달이 뜬 스키장

승강기를 타고 오를 때

바람은 고향의 속없는 남자를 불러 온다

다 주고 큰 가슴 하나만 남긴 진짜 남자

그가 태산처럼 내 몸을 비집고 나와서

승강기의 기계음을 집어삼키며 버티고 앉는다

신생대 말기의 포효하는

우린 원시인이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