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을 모욕하는 허접 찌라시

진정현201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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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MARGIN-TOP: 2px; MARGIN-BOTTOM: 2px}‘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해체’ 강령으로 내건 통합진보당
중앙일보 =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기회주의세력으로 널리 알려졌죠?중앙일보 = 현금봉투와 1+1 무가지 내걸고 사람 꼬셔서 부수 부풀린걸로 정치적 영향력 행사할려고 발악하는 찌라시
당명 진보당으로 바꾸기로

통합진보당이 24일 당명을 ‘진보당’으로 바꾸기로 했다. 통합진보당은 당명 개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당헌 및 강령 개정안을 이날 발표했다.

죽산(竹山) 조봉암이 창당한 ‘진보당’이란 이름의 정당이 1958년 정당사에서 자취를 감춘 지 54년 만에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당헌 및 강령 개정안은 다음 달 13일 열리는 중앙위원회에서 확정된다.

 통합진보당은 창당 초부터 약칭으로 ‘진보당’을 쓰길 희망했으나 진보신당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같은 이름을 약칭으로 등록해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통진당’이란 약칭을 써야 했다. 하지만 진보신당이 4·11 총선에서 정당투표 지지율 2%를 넘지 못해 정당 등록이 취소되면서 발 빠르게 당명 개정에 나선 것이다.

 진보당은 이승만 정권 당시인 56년 조봉암에 의해 창당된 혁신계열 정당이었다. 그러나 조봉암이 58년 간첩죄 등으로 기소되면서 같은 해 2월 정당 등록도 취소됐다. 죽산도 59년 7월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다.

 통합진보당은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종속적 한·미 동맹 해체’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새 강령도 내놨다. 전신인 민주노동당 시절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한 셈이다. 또 ‘기존에 맺은 모든 불평등조약과 협정에 대한 개정 폐기’도 명시해 한·미 자유무역협정 폐기에 대한 입장을 재확인했다.

 당권·대권의 분리조항을 없애 당 대표가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갈 수 있는 길을 터줬다.

6월 3일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경기동부연합 등 당권파 측이 대표직을 다시 접수하면 대선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커지게 된 셈이다. 우위영 대변인은 “거대 양당의 틈바구니에서 대선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지 않는) 정치적 판단을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양원보 기자



양원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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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인천 강화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자 진보적 정치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 공산대학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중국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1]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여 성사시켰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북조선의 정치자금을 건네 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