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악의 전투 -반박글-

발가락2012.05.03
조회2,077

유용원의 군사세계에서 스크랩했던 글임을 밝힙니다. 

어떤분이 작성했는지는 스크랩하면서 따로 남겨놓지 않아 밝혀지는대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원글 작성하신 분 그리고 원글에 추천하신 분들

끝까지 읽어주세요. 사람말은 들어보고 욕을 하든말든 해야죠.

악마 에쿠스, 악마 비스토 전후사실관계 안 따지고 욕부터 하던 사람들이 만든거 아닙니까?

선동은 한줄이면 족하지만 해명은 천페이지로도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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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저는 유재흥 장군이 불세출의 전쟁영웅이라고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그가 현리전투의 패전에 있어 책임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분명 군단장으로서 군단이 해체되고 군단 병력의 거의 30%에 이르는 장병의 손실과 거의 70%에 가까운 중장비 손실, 그리고 전선의 후퇴에 대한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이 현리전투의 패인에 대한 책임자이며, 적전도망을 했다던지, 후방에서 열린 작전회의에 참가조차 하지 않았다던지, 전장 상황 판단을 잘못 했었다던지, 병력이 40%도 안남기고 전멸했다던지 하는 괴담을 넘어선 인간 자체에 대한 비난을 받을 사람은 아니라는 게 요지입니다.

 

현리전투의 본질 - 근본적인 후방차단과 포위의 책임은 누구에게?
  우선, 현리 전투 자체에 대해 본질을 보세요. 우선 현리 철수는 3군단 자체의 실책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좌인접인 국군 7사단이 하룻밤만에 예비 연대만 남기고 실종되어 버리면서 측면이 노출되고 보급로가 차단되어 실시한 철수가 일순간에 예하 지휘관들의 미숙과 장병들의 공포로 인해서 건제가 붕괴되면서 발생한 겁니다. 7사단은 1시간 반에 걸친 중공군의 사전준비 포격에 통신선이 마비되면서 지휘통제 체계가 마비되고, 순식간에 전선이 붕괴되면서 상급부대인 미제 10군단에 전선 돌파조차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중공군은 이른바 ‘일점집중(一點集中)’ 전법을 사용했습니다. 7사단 전면에만 중공군 6개 사단이 덮쳤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은 그저 무기 없이 사람 머릿수로만 밀고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한곳에 집중적으로 소나기처럼 병력과 화력을 퍼붓는 것입니다. 당하는 아군 입장에서 보면 중공군은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나서는 군대로 보이는 거죠. 유령 같기도 하고, 마치 허깨비를 보는 듯한 착각에도 빠져들면서, 7사단의 국군들은 밀리기 시작한 겁니다. 이후에 중공군은 단 하룻밤만에 험난한 산악지대를 25km를 돌파해서 오마치 고개까지 치고 내려왔습니다. 통신망이 마비되고 건제가 무너진 7사단은 사단 사령부가 전투가 시작된 지 5시간이 지나도록 전선이 뚫린 지도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3군단에서는 정상적인 적의 진군속도라면 공격을 개시한 다음 날인 5월 17일 오후쯤 돼야 적이 오마치 고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봤지만, 중공군 제60사단 178연대는 17일 아침 일찍 이미 고개를 점령한 것입니다. 기동성을 최대한 발휘해 뒤로 처지는 국군을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빠른 속도로 내려옴으로써 아군의 판단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것입니다.(물론 이것은 3군단장의 뼈아픈 적정판단 실수입니다.) 작전요도를 보셔서도 아시겠지만, 중공군이 돌파해서 내려온 경로나, 오마치 고개나 모두 미제10군단의 관할 구역이었습니다.

 

상황 파악의 곤란
상급부대도 모르는 상황을 인접부대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당시 3군단은 지휘관들이 무능해서 안당해도 될 패배를 당한 게 전혀 아닙니다. 2개 사단으로 구성된 3군단은 단일 보급로에 의존하면서, 주저항선에서만도 4개 사단의 중공군을 맞아 싸우고 있었고, 좌인접 국군 7사단이 실종되면서 노출된 측면으로도 중공군 2개 사단이 쏟아져 들어와 도합 6개 사단의 중공군에게 2면 포위가 되고 주보급로가 차단되어 있던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휘관이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사실 5월 16일 저녁 유재흥 장군은 7사단이 붕괴된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 육군전방지휘소에 군단의 철수 의사를 타진했으나, “계속 현진지를 고수하라”는 답변을 들었고, 미제10군단에 전황을 질의하였을 때도, “한국군 5사단과 7사단은 건재하다”라는 잘못된 답변을 받고는 계속 방어를 명령했던 겁니다.(한국전쟁전투사 현리전투 1988) 이후 동일 밤 10시경에는 9사단 이용문 부사단장의 상황보고를 받고는 일단 전선 방어를 위해 포병은 빼지말고, 공병중장비를 빼라고 3사단과 9사단에 지시하여, 공병 중장비는 빼었으나, 당시 오마치고개를 선점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못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당시에만 중대병력정도만 있었어도 오마치 고개는 차단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일찍이 클라우제비츠가 정의한 “전장의 안개” 즉, 불확실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적의 공격과 규모 공격방향에서 실시되었지만, 그렇게 쉽게 7사단이 붕괴될지, 10군단에서 그렇게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을 줄 누가 짐작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10군단장과 8군이 전투지경선을 완강하게 항의하는 10군단 예하의 오마치 고개를 무단으로 3군단이 확보한다는 것도 무리가 있었지 않을까요?

 

  군단장만 잘못한 것인가?
그 과정에서 오마치고개 탈환이 시도조차 되지도 못하고 실패하고, 철수 과정에서 건제가 붕괴되면서 많은 인명피해를 입기는 했는데 이는 예하 지휘관 및 밑으로는 사병들에게까지 모두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작전의 핵심이었던 9사단의 최석 준장입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최석 장군은 일선 지휘 경험이 거의 없던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유재흥 군단장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행정을 주로 맡다가 ‘하루아침에 실전 지휘관 자리에 오른’ 경우라고 합니다. 유일한 퇴로가 적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그렇게 실전 경험이 없던 지휘관이 작전을 지휘한다는 것은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후의 작전 전개과정에서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납니다. 당시 대령으로 9사단의 참모장을 맡고 있었던, 박전희 대통령은 나중에 유재흥 군단장을 만나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현리 철수 때 9사단장 최석 장군은 기백이 있었으나 실전 경험이 없어서인지 허점이 드러나 보였다. 7사단장 김형일 장군은 적의 공세 때마다 뚫려 인접 부대를 곤란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적이 공격하자마자 돌파돼 우리 사단의 통신을 거쳐야 지휘할 수 있었다.”라고요.
 또다른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둠이 깔릴 무렵 9사단장은 18연대 지휘소에 찾아 와 이번 작전에 자신 있는가하고 물었고 연대장은 9사단장이 돌파작전에 회의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9사단장은 용포 주변의 교전 상황으로 보아 야간 공격으로 10 Km의 목표지대를 탈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방태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단장을 수행하던 군수참모 김재춘 중령은 후일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리니까 사단장이 부대 지휘를 포기하고 방태산으로 올라갔다며 그 때 최석 준장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증언하였다. 
9사단 30연대의 공격을 기다리던 3사단 18연대는 공격 기미가 없고 30연대가 매화동 골짜기에서 방태산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단장에게 보고하였다.
3사단장은 방태산, 용포, 상남리 북방고지를 연결하는 삼각지형에서 우군 반격시까지 全面방어를 실시하자는 고문관 에머리치 대령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18일 03:30에 방태산 경유 창촌으로의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많은 부대가 임의로 철수를 개시하고 있었고 차량을 포함한 주요 장비는 각급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파괴되고 있었다. 장교들은 계급장을 떼어내고 사병들은 화기나 무전기를 내버리기도 하였다. 사병들은 누구의 지휘도 받으려 하지 않았고 장교들 또한 이러한 병사들을 지휘하려 하지 않았다. 상하부대의 통신은 완전히 두절되고 지휘체계마저 완전히 무너져 오합지졸로 전락하였으며 탈주로인 방태산, 창촌, 광원리, 을수재에서 굶주림과 중공군, 북괴군의 매복 추격 등으로 너무나도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이당시 최석 장군의 졸전과 비겁함에 대해서는 “금성천의 한국전쟁사 : 현리 패전의 한 요인 - 인사의 난맥” 금성천의 http://parizal.egloos.com/3523169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는 초전의 방어전과 1.4후퇴를 거치면서 초급장교단이 대규모로 희생된 다음이었습니다. 따라서, 동래의 종합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먹물이 들어있으면 속성으로 임관시키는 속성 소위들이 기본적인 소양마저도 못갖추고 배치되던 당시였습니다. 또한 중견장교들조차도 그들의 지휘관인 군단장이나 사단장과 나이차이가 안나는 사람들이 마구 진급하여 대대/연대/사단을 지휘하던 실정이었습니다. 사병들 또한, 기본적인 사격훈련도 제대로 못받고 전방으로 배속되던 사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사단장/군단장의 실책과 지휘 잘못, 중간 간부들의 허위보고와 판단 잘못, 포위망 속의 저하된 사기와 군기가 일시에 건재하던 군단을 붕괴시킨 것은 아닐까요?

 

 유재흥 장군은 제대로 된 지시도 못했는가?
당시 유재흥장군은 오마치 고개를 탈환한 후 개통된 병참선을 통해 철수한다는 상식적인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겠지요. 다만 육군대학의 논평에서는 당시 유재흥 장군이 2개 사단에서 1개 연대씩을 차출해서 공격한다는 3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기계획 방안을 승인한 것에 대하여, 그보다는 한개 사단의 연대들이 반격을 맡는 것이 지휘통제를 위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합니다. 하지만, 반격의 선봉에 서기로 했던 9사단 예하 대대들이 공격 명령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1개 대대는 아예 실종, 1개 대대는 무단 철수하다가 3사단장에게 발각됨) 선임 사단장인 3사단장인 김종오 장군이 산악 경로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심하고 그 와중에 중장비는 상실 및 파괴, 부대 건제가 붕괴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니 오마치 고개 개통에 실패했다는 조건 하에서는 건제 붕괴를 군단장이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대안으로서 현리를 중심으로 한 사주 방어 방안이 있고 실제 미 군사고문관이 김종오 장군한테 이를 건의하기도 하였으나 현리 분지를 둘러싼 고지군이 이미 중공군에게 피탈되기 시작하였고 또 그를 위해 병력도 충분하지 않았고 포위 섬멸될 가능성을 염려하여 김종오 장군이 그 방안을 거부했다고 하네요. 사후 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면야 그 방안이 더 나아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정확한 정보가 결여되었던 지휘관의 판단을 후대에서 뭐라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또한, 사주방어 시에 건제 붕괴가 발생하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었을 것이고 말입니다. 당시, 유재흥 장군에게는 군단장으로서 마땅히 더 나은 다른 지휘조치 옵션이 없었던 셈 입니다. 오마치 고개 탈환 작전 지휘통제와 관련해서 군단장이 포위망 내에 남아있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육군대학 쪽에서는 포위망 안에 남더라도 실익이 없었을 것이고 군단장이 사령부에서 지원 역할을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실제로 그 역할을 했음)이라는 이유 때문에 부정적으로 논평하고 있습니다.

 

아몬드 장군의 책임은 없는가?
체계적으로 훈련된 미군마저도 인디언 태형과 발지 전투에서 보듯이, 공포와 혼돈으로 인해 건제과 붕괴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저는 전반적인 정황을 따져보면 그보다는 사령관으로서 10군단장인 아몬드장군에게 결과 책임을 물어야 할 사건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인 「전쟁과 휴전」에 잘 나와 있습니다.(P315~321, 전쟁과 휴전-6.25비록, 정일권, 1986. 1. 10, 동아일보사)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유재흥 장군은 이미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있기 몇일 전에 중공군 포로 2명을 비밀리에 육본의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보내서 5월 공세가 현리로 집중된다는 것을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미 중공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죠. 또한,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의 취약점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유재흥 장군은 1949년 5월부터 8개월 동안 6사단장으로 있으면서 현리에 주둔한 예하 중대를 두세번 방문하면서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 그래서, 오마치 고개와 부근 대암산에 군단예비인 9사단 29연대를 배치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에도 적었지만, 알몬드 10군단장이 전화를 걸어와서 오마치 고개와 대암산이 미군 작전구역이며, 작전구역 침해라며 빼라고 했다고 합니다. 5일간에 걸쳐 아무리 설명해도, 철수를 계속 요구해 어쩔 수 없이 유재흥 장군은 배치 병력을 철수시키면서도 29연대 2대대는 고개 정상에 그대로 남겨 놓았지만, 이번에는 미제8군에서 군단 고문관을 통해 오마치고개에 배치한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압력이 내려와 5월 11일, 공세 3일전에 철수시켰습니다. 그리고는 5월 공세의 시작과 함께, 오마치 고개가 피탈되었던 겁니다.(알몬드 장군은 자신의 전투관할지역에 다른 부대가 들어와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면서 상급부대인 8군사령부에 항의, 9사단 병력을 철수시켰다고 합니다.). 유재흥 장군이 아니라 누가 군단장이었더라도 장거리 철수와 인명 및 장비 피해라는 큰 흐름은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인명 및 장비 피해와 이후 작전에 끼친 영향이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한국군 중에서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조건하에서 성공적인 농성전을 벌일 수 있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3사단장 김종오 장군마저도, 예하 부대와 통신이 두절되고, 건제가 붕괴되자, 계급장 떼고 후퇴하지 않았습니까?

 

유재흥 장군 관련 주장은 다 사실인가?
 1. 3군단의 전멸
  많은 현리전투 괴담에서 병력이 40%만 수습되고 나머지는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유기된 장비는 전부 중공군이 고스란히 가져서 아군을 죽이는데 쓰였다 등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를 은근슬쩍 집어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열흘 후에 병력을 70%까지 수습했으며, 대부분의 유기된 장비는 스스로 파괴했거나 유엔공군이 공습으로 파괴했고, 30%는 철수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2. 백전백패의 패장?
병가지상사라는 말을 한 것은 유재흥 장군이 군단 말아먹은 게 2번이라고 하는데 군단장 직책으로서 군단급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적이 3번 가량 있습니다. 태극무공훈장과 미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레종 오브 메리트 수훈 사유인 영천 전투 승리도 그 중 하나입니다. 춘계공세 직전의 아군 반격시에는 예하의 9사단 30연대가 매봉/한봉산에서 세운 전공으로 대대장병들이 1계급씩 특진하기도 했었습니다. 유재흥 장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영천전투 승리와 수도고지 전투에서의 공로조차도 “유재흥장군의 전술, 지휘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UN군에 패퇴한 북한군의 전술적 퇴각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인 것으로 인용되고 있다.”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갖다붙일 것 같으면 유재흥 장군이 비난받는 덕천 패전과 현리 패전도 중공군의 전략적 공격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일 뿐 군단장의 전술, 지휘 능력의 결과가 아니죠. 당시 작전 지도를 보면 덕천 전투와 현리 전투는 군단장에 나폴레옹을 갖다놔도 군단들이 궤멸될 수밖에 없는 전황 아닐까요? 50년말의 덕천 전투에서도 전황이 급박한데 군단 예비인 6사단을 투입 안하고 놀다가 망했다고 일부에서는 주장하는데 당시 6사단은 이미 한 번 포위궤멸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실상 1개 연대 정도의 전투력 밖에 없는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상황조치를 위해 6사단을 투입했었습니다. 다만 중공군의 전략적 주공을 막기에 중과부적이었을 뿐이죠. 당시 6사단장은 장도영 준장이었습니다. 이때, 패전을 했던 장도영준장은 용문산에서는 빛나는 수훈을 세웠습니다. 패전을 했다고 해서 다 처벌한다고 하면 용문산 전투는 누가 승리로 이끌었겠습니까?

 

3. 유재흥장군은 적전도망을 하였는가?
또 다른 괴담 중 하나가 유재흥 군단장이 보급로가 차단되자 아무 지휘조치도 하지 않고 비행기 타고 혼자 도망쳤다고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이미 포위망이 완성된 17일 오후 1시 포위망 밖인 하진부리에 있는 사령부에서 일부러 포위망 내인 현리로 비행기 타고 들어가서 예하 사단장들과 대책을 수립한 후 군단 사령부로 복귀해서 철수 작전에 필요한 후방 지원 조치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유재흥 장군이 비행기 타고 가는걸 보고 병사들이 따라서 도주한 것도 아니고 철수작전 실행 과정에서 조직이 와해된 것이므로 철수간 부대 와해는 사단장 이하 일선 지휘관들의 책임과 그의 책임이 같이 있는 것이지, 누구 한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또한,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에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공세 당시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되자, 오마치에서 유재흥은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도주하였다.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의 136페이지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엉터리 입니다. 유재흥 장군은 51년 5월 17일에 현리로 경비행기로 도착해서 작전회의를 주재하고 하진부리로 돌아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급간부들이나 사병들의 관점에서는 “비행기타고 도망갔다”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일 뿐이었습니다.  일단 위키의 내용중 오류는 당시 백선엽 장군은 참모총장이 아닌 1군단장이었고, 유재흥 장군이 현리에서 현장 지휘관들과 회의를 한 것은 5월 17일. 위키에 언급된 작전회의는 5월 21일에 백선엽 장군과 로저스 대령이 비행기편으로 대관령 서쪽 용평 국군 3군단 간이 활주로에서 열린 작전회의에 미 8군에 호출받아 간 것입니다.(전사편찬연구소의 현리전투에서는 5월 20일이라고 나옵니다.). 17일에 현리를 떠난 유재흥 장군이 5월 20일까지 어디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유장군은 하진부리에서 후퇴하는 군단 예하 병력들을 수습하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17일 포위망속으로 날아가서도 현장 사단장들과 고문관들의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저녁 무렵에는 현리로 미군수송기 4대를 이용 105미리 포탄과 보급물자들을 공중투하토록 조치하였고, 18일부터는 군단 전방지휘소를 삼거리 남쪽으로 이동하고 부군단장 강영훈 준장과 함께 교대로 각사단의 병력을 수습하는 한편, 경비행기를 이용, 낙오병들에 대해 집결지 안내 방송을 실시했습니다.
 5월 21일의 작전회의에 대해, 또다른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군과 나에서는 밴플리트 장군과 미제3사단장 유진 라이딩스 장군만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약 10여 분 만에 작전회의는 끝이 났으며, 밴플리트 장군은 돌아갔고, 백선엽장군도 대관령을 넘어오는 비행기 속에서 작전을 짜는 데 골몰했다고만 언급이 될 뿐, 유재흥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관계도 없는 얘기를 시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붙여넣기 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군단장과 사단장의 근본적인 임무 구분에 대한 몰이해도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단장은 최소 규모의 제병과 합동부대인 사단을 지휘하여 상급부대인 야전군의 작전지휘를 받아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지만, 행정 지휘관에 가까운 군단장은 예하 부대들의 원할한 작전 수행을 위해 후방에서 지원부대들을 지휘하고 전방에 대한 지원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유사한 사례로는 장진호에서 미제 1해병사단이 철수할 때도 배속 군단장이었던 10군단의 알몬드 장군은 사단장에게 철수를 지시한 후 필요한 권한을 위힘하고,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여 군단에서 공중지원, 군수지원 등의 조치를 취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대대나 연대급 작전 목표인 고개 하나를 놓고 사단장 두명 군단장 1명이 달라붙어 감내라 대추내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4. 밴플리트 앞에서 유재흥은 바보짓을 했는가?
또다른 괴담(august님께서 출처를 알려주셨기에 괴담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도 괴담으로 묶여 있던 것이기에 여기서는 괴담이라는 표현은 지속적으로 유지하겠습니다.)으로는 August님의 블로그에 게시된 현리전투 관련 내용 중에 《전선 붕괴에 놀라 헬기를 타고 현지까지 급거 날아 온 밴플리트가 유재흥 3군단장을 면담하면서 하였던 대화가 전사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라고 질문하자, 이에 유재흥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신의 예하 2개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 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라고 다그쳤다. 이에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라고 답변하고 밴 플리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밴플리트 장군이 3군단을 해체한 것은 유재흥 장군을 만난 자리가 아니라 5월 26일이었습니다. 또한 이 일화는 당시 9사단 30연대장이었던 손희선 소장이 2001년 6월 1일 육군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에도 포함이 되어있습니다.(http://www.army.mil.kr/history/51전반기/반격/현리.htm
 하지만, 당시 손희선 연대장은 방대산을 통해 후퇴하기에 바빴었고, 밴플리트가 유재흥 장군을 만나던 당시에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화가 나온 책들이 어디인가 찾아보았지만, “금성천의 한국전쟁”과 위에 있는 홈페이지들 이외의 공간전사들에서는 찾을 수가 없더군요. (원 출처 : Paul F. Braim, The Will to Win: The Life of General James A. Van Fleet, US Naval Institute Press, 2001 재 인용 출처 : '육군 교육 참고 CD' http://www.army.mil.kr/history/51전반기/반격/현강의9.htm, august님 제공 : 감사합니다.)

  솔직히, 위의 일화가 공간전사에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 august님에 의해 밝혀졌지만, 7사단장 김형일 장군은 전투 개시 후 5시간이 지나도록 예하 부대들의 건재 붕괴 사실도 인지 못하고 있어서 인접한 3군단 예하 부대들에 중공군의 위치를 물어볼 정도였고, 17일 자정 무렵이 되어서는 전방 사단들과의 통신자체가 두절되어 버렸으며, 9사단장 최석 장군은 사단기도 내팽겨치고 계급장도 떼어 버린 채 소수의 병력만 대동하고 방대산을 통해 후퇴 중이었고, 3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지휘부가 붕괴된 채 산속을 통해 후퇴 중이었는데, 후방의 하진부리 지휘소에 있는 군단장이 어떻게 예하 사단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밴플리트 장군의 직속 부하인 알몬드 장군의 10군단 참모부조차 16일과 17일 예하의 한국군 7사단의 위치와 상태도 모르고 인접 군단에 허위 통보를 할 정도였는데, 그에게만 비난이 몰아닥친다는 것은 그가 잘못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사실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와 운두령이 차단된 상태에서 이미 중장비들의 파괴와 유기를 명령한 상태에서 거의 모든 포와 수송 장비를 상실한 것이 명백해 보이는데 허위보고를 하겠습니까? 사실대로 이야기한 것도 비난의 대상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상황이 저런데 허위 보고를 했어야 한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5. 유재흥 장군이 후에 전사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조작?
  유재흥 장군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장기판 훈수는 누구나 고수이지만, 실제 게임은 다르듯, 부정확한 사후 지식 가지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는 거 아닐까요? 육본 한국전쟁사 웹의 현리 전투 부분(그래도 팩트가 가장 잘 정리된 소스이기 때문)과 웹상에 많은 육군대학에서 한 논평을 한번 일독하시기를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육군대학 논평은 개인을 인신공격하는게 목적이 아니고 작전 지휘 실무 측면에서 교훈을 도출하기 위한 겁니다. 공간전사와 그에 관련된 저술과, 당시 인사들의 회고록을 교차 비교해야지요. 회고록은 팩트와 주관이 섞인 것이니 걸러서 봐야겠지요. 이러한 공간 전사들은 어느 누구가 압력을 가한다고 해서 조작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현리 전투만 하더라도, 패전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3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까지 역임했습니다. 이분도 학병출신으로 일본군 초급장교로 복무했던 분입니다. 9사단장 최석 장군도(제가 보기에 건재 붕괴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학병 출신으로 일본군 소위로 복무했으며, 태극무공훈장(!)까지 받고, 육군중장으로 전역했습니다. 유재흥 장군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했던 국방부 장관은 1971년에 재직했습니다. 하지만, 현리전투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된 것은 초판이 1988년, 두번째가 1991년입니다. 1991년에 그가 성우회 회장이 되었으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요? 그 또한 넌센스입니다. 성우회 회장이 전사편찬위원회 연구원들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나, 연구원들이 그런 것에 굴복해서 曲學阿世를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친목단체에 불과한 성우회 회장이, 그것도 이미 1971년에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여 이미 20년이나 지나 군내에 자신의 휘하는 아무도 안남은 끈떨어진 성우회장 말을 누가 듣는단 말입니까?
 또한, 분명한 것은, 유재흥=원균 이런 식으로 비하하는 인터넷에 떠도는 현리전투 관련 글들은 왜곡 날조된 부분들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어떤 견해나 평가의 기초로 쓰여서는 안되는 잡문들입니다. 일단 구체적인 팩트를 파악하는게 먼저고, 그리고 나서 뒤에 유재흥이 친일파던, 무능한 소위 똥별이던 하는 생각이 들어야 순서가 아닐까 합니다.

 

6. 유재흥은 두고두고 승승장구?
그리고 하나 더, 여러분에게야 흡족하지 않으시겠지만, 유재흥 장군이 군단을 말아먹으면서 아무 처벌도 안받고 일선 군단장직을 계속 유지한 것은 아닙니다. 두고두고 승승장구한 것도 사실입니다. 입맛 쓸쓸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최석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재흥 장군의 경우, 덕천 전투와 현리 전투 이후에 지휘권 박탈당하고 육본으로 불려 들어갔습니다. 즉 패전 책임에 대해 징계를 받은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이나 다시 군단장 직으로 나간건 잘한다고 불려간 것이나 빽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돌려막기로 보임한 것입니다.
  당시 국군의 장군들의 나이를 보십시요. 김홍일 장군이나 이종찬 장군 정도를 빼면 다들 30의 약관이고 그나마 제대로 된 군사교육을 받고 지휘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홍일 장군의 경우, 영어 실력이 일천했고, 미군사고문단에서도 그의 중국국부군 경력을 그다지 좋게 쳐주지 않았습니다. 2차대전과 이후의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그들이 본 중국국부군은 그야말로 당나라 군대였으니까요. 그 자신도 새파랗게 젊은 미군사고문이 감내라 대추내라 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51년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표를 내고 전역을 했습니다. 그래도 미군사고문들이 높게 쳐주었던 것은 자신들과 2차대전에서 대등하게 맞싸웠던 일본군 출신들이었습니다. 그중 돋보이는 사람이 이종찬 장군이었으나 이분 또한 부산 정치파동당시 친위쿠데타를 거절하여 한직으로 떠돌다가 예편하였으니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패전지장은 국립묘지에 안장불가?
 사령관으로서 패전했으니까 총살했어야 한다고 하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지만 그거야말로 일본 황군식 사고방식일 뿐이고, 아마 그랬다면 6.25 개전 당시 대한민국 국군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 중 총살 안 당했을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겁니다. 
또한, 그가 패전지장이라고 해서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이 안된다하면, 모든 패전 군인은 국립묘지에 안장되면 안되는 것입니까?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호국영령들도 그들이 패전지장이면 마찬가지로 국립묘지에 안장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국립묘지에 호국영령들을 모시는 이유는 그들이 적에게 맞서 승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국가를 위해 국난의 시기에 위국헌신했고, 그들이 그들의 청춘과 열정을 바쳐 국가에 충성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군인이라도 패전을 한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고, 국립묘지에 안장이 거부된다면 누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치겠습니까? 
패전한 군인은 군법과 국법에 따라 평가되고 심판됩니다. 그가 범죄행위를 저질렀거나 명백한 직무유기 또는 적국과의 내통의 혐의가 있다면 군법에 의해 다루어집니다.
일반 국민도 다른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했을 때, 과실이나 고의냐 혹은 정당바위냐의 여부에 따라 그 죄의 유무와 값이 달라집니다. 
유재흥이 패전지장으로서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마땅하지만, 그가 국가에 바친 헌신까지 매도되서는 곤란할 것이며, 그가 행하지 않았던 사실까지 덧붙여져서 비난받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함이지, 누구 하나를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 삼아 모든 죄의 원인을 그에게 씌우거나, 자신의 정파적 이익에 맞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글을 올립니다.

 

 

참고자료로 target 주소 올립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korean_war&no=2768&page=1&search_pos=-2937&k_type=1000&keyword=Skidrow
http://mirror.enha.kr/wiki/%ED%98%84%EB%A6%AC%20%EC%A0%84%ED%88%AC
(엔하위키 미러 - 현리전투)
http://parizal.egloos.com/3523169 금성천의 한국전쟁사
http://www.army.mil.kr/history/51전반기/반격/현리.htm 육군대학 지휘학처
http://www.imhc.mil.kr/imhcroot/data/pdf_design.jsp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정보자료실-원문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