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물음에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넋을 잃은 채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던 젊은 여자가 나를 천천히 올려다 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느낌으로 보아 사망자의 아내가 틀림없어 보였다.
헝클어진 퍼머머리와 흘러내린 눈물의 경로를 그려내고 있는 아이라인 줄기가 그녀의 심적 충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충격이 크시겠습니다.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녀는 나에게 응시했던 시선을 풀더니 이내 멍하니 어딘가를 또다시 주시했다.
"힘드시겠지만 수사에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40세의 한 남자가 죽었다.
안방에서 장롱에 몸을 등지고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죽었다.
방바닥에는 무려 17개의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고, 두어병은 채 비우지 못한 상태로 투명한 내용물을 밖에 쏟아내고 있었다.
현장조사가 한창이라 좁은 방안이 요란하고 시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사망자의 아내를 부축하고 집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주변 공원의 한적한 벤치로 인도하여 그녀가 깊은 숨을 몰아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불편하시면 오늘 말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모든 사건이 그렇듯이? 초동수사가 가장 중요한거라서...."
"네, 뭐든 물어보세요."
여자는 의외로 담담하게 나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수사관의 본능처럼 펜과 수첩을 꺼내 바로 심문에 들어갔다.
"남편의 사망 당시 같이 계셨습니까?"
"아니오."
"그럼 어디 계셨습니까?"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어요."
"그럼 마트에 가기 전에 남편을 보셨겠군요."
"아뇨. 그 때까진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발견 당시 남편 혼자 있었나요?"
"네."
"죽은 줄 어떻게 알았나요?"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고, 남편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장롱에 기대 앉아 있더라구요. 죽은 것 같았는데...혹시나 해서 팔과 얼굴에 손을 갖다대었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거예요. 입술은 이미 파랗게 변해있구요.."
바로 몇 십분 전의 기억이 생생한지 그녀는 잠시 양손으로 두 어깨를 쓸어내렸다.
"그런데 119가 아닌 경찰에 바로 신고하셨더군요."
"그냥 무서웠어요. 널부러져 있는 그 많은 소주병을 보니까 더 무서웠어요. 평소의 남편 같지가 않았어요."
두려움이 몰려오는지 그녀의 음성이 다소 높아졌다.
"인기척이나 낯선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던가요?"
"없었어요."
"혹시...원한을 살 만한 주변 사람들이 있나요?"
"그건 잘 몰라요. 워낙 바깥일 때문에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편이라...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지 몰라요"
질답이 오가는 동안 그녀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럼 마트에 얼마 동안 계셨나요?"
"네 시간 정도 있었어요."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옆집 새댁이 마트에서 내내 같이 있었어요. 물어보면 알겁니다."
"음...네시간이라.....네시간 동안 소주 17병을 마신다는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묻는거죠?"
"아..아닙니다. 그냥 의문이 드는 것들은 통상적인 수사관례상 물어보는게 저희들의 규칙입니다."
알리바이에 대한 추궁은 계속되었지만 나의 직감은 이미 그녀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남편 분의 직업이 뭡니까?"
"포크레인 기삽니다."
"외근이 잦겠네요."
"네."
"남편분 주량이 어느 정도입니까?"
"그건 잘 몰라요. 제가 술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연애 때도 같이 술을 한 적이 거의 없어요."
"최근에 남편분을 본게 언젭니까?"
"그저께였어요."
"혹시 이상한 점 못 느끼셨습니까?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다던가..아니면 이상한 말을 한다던가..."
나의 물음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녀가 갑자기 시선을 돌려 나를 무섭게 노려 보았다.
"생각나요!!"
그녀의 급박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순간 긴장감이 몰려왔다.
"어떤 것 말입니까?"
"들어오자마자 뭔가 홀린 사람처럼 넋이 나간 채 피곤하다며 잠이 드는 겁니다."
"......."
"평소엔 집에만 들어오면 이곳 저곳 친구들 전화해서 불러내기 바쁜 사람이예요. 당구가 되었든, 술이 되었든 친구들 불러내서 노는 것 좋아아는 사람인데 그 날은 그냥 그렇게 잠이 드는 거예요."
"그리고 언제 다시 나갔나요?"
"잠이 든지 서너시간이 지나자 야간작업이 있다며 다시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나가면서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무슨 말 말입니까?"
"주연이를 봤다는거예요."
"주연이요?"
"5년 전 사고로 죽은 저희 딸이예요."
예전의 악몽같은 기억까지 떠오르는지 그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흐흐흑!!"
나는 잠시 심문을 멈추고 그녀가 안정을 되찾을 시간을 주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대답은 무슨 대답이요? 전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 사람을 쳐다 봤고, 그 사람은 그렇게 더 이상의 아무 말없이 집을 나섰어요."
"그리고나서 오늘 사건현장에서 보신 겁니까?"
"네....흐흑흑..."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간략히 메모한 후 수첩을 접었다.
사건 현장으로 돌아오자 조금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현장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왜 다들 죽은 사람을 그렇게 보고싶어하는지 사람의 심리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김형사님."
현장 조사 중이던 박형사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과학 수사대 감식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외부 침입흔적도 없고, 독살흔적도 보이지 않고, 외상 흔적도 없고, 저항한 흔적도 없고....... 그냥 알콜수치가 치사량을 넘어서 죽은 것 같은데요?"
나는 잠시 사건현장의 출입문을 응시한고는 입을 열었다.
"박형사 너는 사람이 17병의 소주를 먹는다는게 가능하다고 보냐?"
"왜 불가능합니까? 어떤 연예인들은 소주를 궤짝으로 갖다놓고 마신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게 혼자서 가능하다고 보냐고? 그것도 단 서너시간만에...."
"그건 그렇지만.....다른 사인이 없잖습니까?"
"그리고 지나치게 소주냄새가 많이 나..."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박형사 너도 들어갈 때 느꼈잖아. 소주 냄새가 문밖까지 나던거.....먹은 것보다 쏟은게 많을 수도 있어."
"그럼 누가 강제로 먹였단 말씀이십니까?"
"주변에 토사물도 없고, 너무 깨끗하잖아. 그리고 어떻게 장롱에 기대어 바로 앉은 채 죽을 수가 있지? 너도 취해봐서 알잖아. 조금이라도 정신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사람은 눕게 되어있어."
"그렇긴 한데....일단 과학수사대 감식결과를 지켜봐야겠군요."
"박형사 너는 일단 유족들 만나서 시신을 부검 의뢰할 건지 알아보고, 발인 전까지 주변에 피해자와 금전관계가 있었거나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봐"
"네. 알겠습니다."
박형사가 멀어지는 모습을 본 나는 뒤돌아서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막 불을 붙이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건 담당 형사님이시죠?"
나는 대답 대신에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자세를 유지한 채 눈을 치켜 뜨고는 그를 쳐다봤다.
"저기.....죽은 친구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엄청난 용기를 내어 말을 하는 사람처럼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망설이며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사람이 사건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걸 직감했다.
나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손으로 천천히 걷어내듯이 움켜쥐고는 입을 열었다.
"네...그런데요?"
그는 계속해서 두 손바닥을 쥐어짜듯 비벼대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친구.........말입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계속 나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리고 정면으로 내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아...아닙니다."
"뭐가요?"
"아녜요."
"뭐가 아니란 말입니까? 무슨 말 하려고 했잖아요?"
나는 그에게 추궁을 하며 천천히 그의 어깨에 손을 가까이 했다.
나의 손이 가까이 다가옴을 느낀 그는 갑자기 몸을 움찔하더니 미친 듯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야! 거기 서!!"
갑작스런 나의 외침에 주변의 경찰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뭐해 임마!! 당장 저 자식 잡아!!"
그에 못지 않게 나도 이미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수명의 형사와 의경들이 그의 뒤를 좇았지만 다세대 주택단지의 좁은 골목길은
우리의 추격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재래시장으로 이어지는 골목은 인파로 넘쳐나 그 속으로 묻혀버린다면 사실상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몇 분간을 이리저리 내달리던 나는 추격을 멈추고 허리를 굽인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헉헉...아...그 자식 무지하게 빠르네..헉헉..담배를 끊든가 해야지.."
"헉헉...김형사님! 무슨 일입니까? 헉헉!!"
내 목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박형사가 내 뒤에 따라 붙어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용의자입니까?"
"헉헉...됐어. 얼굴도 기억해 뒀고, 피해자와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어..헉헉..당장 거기로 가자. 헉헉... 이거 뭔가 있어..."
-계속-
박형사와 내가 피해자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쯤 이미 너울너울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퇴근 준비가 한창일 것 같은 일반 회사와는 달리 두 개의 콘테이너를 붙여서 만든 조립식 사무실은 아직도
네다섯명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죠?"
운동모자를 성의없게 눌러 쓴 건장한 체격의 30대 중반의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경찰입니다."
나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분주했던 동시에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서로의 얼굴을 잠시 확인했다.
"여기 대표자가 누굽니까?"
나의 물음에 모두가 누군가로 모든 시선을 모았다.
콘테이터 깊숙한 곳에 놓여있는 소파에서 반쯤 머리가 벗겨진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일어섰다.
그는 수차례 돋보기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우리의 얼굴을 확인하는 듯 보였다.
"죽은 황승균이란 친구 때문에 오셨는가보네. 내가 여기 사장이오."
그는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예. 뭐 좀 조사할게 있어서요."
나는 열심히 주변을 살피며, 한 시간 전에 보았던 그 낯선 남자를 찾았다.
"그 친구 뭐 때문에 죽은 겁니까?"
경상도 억양이 약간 섞인, 지나치게 침착한 그의 말투가 잠시 귀에 거슬렸다.
"직원이 죽었는데 회사는 바삐 돌아가네요."
"중장비 다루다보면 다치는 사람,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여긴 또 지입차들이 많아서 소속감도 덜하고...."
"여기 직원 명부 좀 볼 수 있을까요? 사진있는 걸로."
"직원 명부요? 그러시죠."
나는 남자가 꺼내온 묵직한 서류철에서 사진만 확인한 채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누구 찾는 사람 있습니까?"
"죽은 황승균씨.. 요 근래에 이상한 점 없었습니까?"
나는 서류철을 훑어보는 와중에도 관련자 심문을 잊지 않았다.
"그 친구야 뭐...일 잘하겠다. 노는 것 좋아하겠다. 이상하게 여길 틈이 없어요."
"그 사람 술 좋아합니까?"
"좋아하지요.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싫어한다는게 말이 됩니까?"
"주량이 얼마나 됩니까?"
"뭐더라....전에 보니까....한......세병 정도?"
나는 잠시 서류를 훑어보는 것을 멈추고 사장이란 남자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렇게 마시면 얼마나 취합니까?"
"그냥 곤드레 만드레 해가지고는 쓰러져 잠만 잡디다."
나와 박형사의 의심스런 눈빛을 눈치 챘는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와요? 뭐 잘못 됐습니까? 도대체 그 친구 뭐 때문에 죽은 겁니까?"
"술 먹고 죽었어요."
나 대신 박형사가 답을 했다.
"뭐요? 술?"
어색하게 놀라는 표정의 사장보다는 그의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다른 이들이 눈에 거슬렸다.
뭔가 서로 간에 대화를 주고 받고 싶은데 극도로 말을 아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피해자에게 요 근래 이상한 점이 전혀 없었습니까?"
"없었다니깐 참 내...."
나는 다시 한번 사장의 등 뒤에서 조심스런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을 잠시 살핀 후 다시 서류철을 훑어보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내가 원하던 얼굴이 서류철 중간 쯤에서 나왔다.
"이 사람 어딨어요?"
내가 사진을 손가락으로 지목하자 사장은 안경을 잠시 매만지며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입을 열었다.
"노영주씨네. 이 친구 오늘 출근 안했는데..."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게차 차주인데, 지입차량이라 일거리가 없으면 안나와요. 지금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모르지요. 그냥 거기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해보시던가....."
"사장님 핸드폰 좀 빌려주겠어요?"
"내...내것 말이요? 왜요?"
나의 요청에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타살일지도 모르는? 사건 수사중입니다. 협조해 주시죠."
"타...타살이요? 그런데 핸드폰은 왜요?"
미적대며 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나는 잽싸게 그것을 낚아챘다.
어색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우리에게 향한 시선을 쫓아냈다.
"뭣들 하십니까? 신경쓰지 말고 일들 하세요.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은 나중에 부를 테니까요."
그 곱지 않던 시선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그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십여차례 벨소리가 울리고 난 다음에야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침묵으로 그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네..사장님...딸꾹..."
전화 속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이미 흥건히 술에 젖어 있었다.
"사장님....딸꾹..이젠 무서워서 못살겠슴더..."
다소 충격적인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통화내용이 사장에게 들리지 않도록 자리를 떴다.
"듣고 있슴니껴."
나는 혹시나 그가 눈치 챌까봐 작은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응."
"황승균이...그 놈아가 미친 것 맞지예?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거지예?"
"으...응"
그런데 그의 귀는 아직 술에 절은 것 같지가 않았다. 갑자기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목소리가 와그럽니까? 누....누꼬? 사장님 아닝교?"
"............."
"너..누구야!!"
어쩔 수 없이 나는 신분을 밝혔다.
"경찰입니다."
나의 한마디에 그가 대화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덜그럭거리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신호가 끊어졌다.
나는 조용히 휴대폰을 사장에게 건내고는 입을 열었다.
"사장님. 우리하고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사장의 눈빛이 매우 공격적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아챘다.
게다가 각자 일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부들이 박형사와 나를 둘러싼 채 어떤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처럼 서 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눈빛을 보내던 사장이 조심스럽게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형사님들이 범인 잡는다니 도와드려야지요."
"지금 하실 얘기 없습니까?"
"없소이다."
"이곳엔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끼시오? 그럼 찾아 보구랴"
"나중에 다시 찾아뵙지요. 그 때는 오늘보다 좀 오래 머물러 있을 것 같습니다."
"훗....얼마든지 그러시지요. 형사님"
그들의 기분 나쁜 시선을 뒤로한 채 우리는 발걸음을 차량으로 옮겼다.
안달이 났는지 박형사가 걸음을 재촉하는 내 옆에 붙어 나를 닦달했다.
"김형사님. 저 콘테이너 뒤져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사람들 좀 수상해요"
"수색영장도 없이 뭐하게? 저래뵈도 엄연한 하나의 회사인데."
"지금 어디 가시게요?"
"그 노영주라는 사람 집으로 가는거야."
"그 사이에 서류철에서 주소지 외우셨어요?"
"날 뭘로 보는거야?"
"하여튼 대단하십니다."
우리가 두번째 사건을 접한 건 노영주라는 사람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가던 중이었다. 박형사의 휴대폰이 다급하게 울렸다.
"뭐라고? 사람이 죽었다고?"
나의 눈빛을 확인한 박형사는 급히 차를 돌렸다.
시체는 콘크리트로 만든 2미터 정도의 너비의 농업용 수로 가운에 엎어져 있었다.
물은 거의 매말라 발목 정도만 차올랐고, 다소 어둠이 몰려와 어둑어둑했지만 대략 보이것만으로도
시체는 매우 개끗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둠이 몰려오는 이 시간에 인적이 드믄 농업용 수로에 사람이 빠져 죽는 경우는 대부분 사체유기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감식반을 불렀다.
"신고자가 누구야?"
"논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농부였습니다."
"사인은?"
"익사 같습니다."
"뭐? 익사? 아니 물도 없는데 뭔 익사?"
"그게 참....재수가 없으려면 접싯물에 코박고도 죽는다는 말이 딱 지금 상황입니다."
"그럼..뭐야? 저 친구가 지금 발목도 안차는 물에 코박고 죽었단 말야?"
"수로 벽에 약간의 혈흔이 있는 걸로 봐서 수로에 빠지면서 수로벽에 머리를 부딫힌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다음 얼굴을 옆으로 하고 엎어졌는데 한쪽 코에 계속해서 물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정확한 사인은 내일이나 나올 것 같은데, 현재로서 직접적인 사인은 익사로 보입니다."
"다른 데서 죽고 유기된 건 아니고?"
"술냄새가 많이 나고, 머리에 작은 타박상이 있는 것 외에 특별한 외상이 없습니다."
나는 엎어져 죽어있는 시체에 다가가 쪼그려 앉은 자세로 조심스레 얼굴을 확인했다.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이게 누구야?"
나의 놀라는 목소리에 박형사가 다가왔다.
"아는 사람입니까?"
나는 박형사에게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노영주란 사람 만나러 갈 일이 없을 것 같다."
나의 말뜻을 알아챈 박형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 무지하게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계속-
"내일 오전에 그 회사에 다시 가봐야 겠다."
"경찰서로 불러내죠."
"경찰서로 불러낸다고 주눅들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들 구역에 있어야 이말 저말 다 꺼내 놓는다."
나는 다시 한번 죽은 노영주를 쳐다보았다.
"망자는 말이 없다 했는데.... 도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지?"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 나는 경찰서로 나섰다.
여기에 온 지 1년 간은 이런 강력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바빠진 듯 했다.
"김형사님...."
형사계로 들어서자 나보다 먼저 나온 박형사가 말을 걸었다.
"일찍 나와 있었네."
"어제 밤 감식반에서 넘어온 황승균씨 유품 중에 놀라운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
"보세요."
박형사는 나에게 4분의 1로 접어진 A4용지를 하나 들이밀었다.
그 용지를 펼쳐보았을 때 박형사 말대로 이것이 아주 놀라운 유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굿잡~~~~"
나의 탄성과 함께 요란하게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박형사가 받아들었다.
"네. OO서 강력반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잠시 통화를 하던 박형사가 이내 수화기를 나에게 넘겼다.
"황승균씨 와이프라는데요?"
"그래?"
나는 급하게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예. 사모님. 전화 바꿨습니다."
"밤 사이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예? 도둑이요?"
"네. 장례식장에 밤새 있다가 아침에 들어왔는데...집이 어지럽혀져 있어요"
"없어진 물품이 있나요?"
"거의 다 그대로 있는데, 남편 옷장 주변이 난장판이 되어 있어요."
"흠....그래요? 범인이 누군지 알겠군요."
"예? 범인을 아신다구요?"
"확실하진 않지만....일단 사건접수는 해 놓겠습니다. 당분간 몸조심하시구요. 되도록 집에 혼자 있지 마세요."
"네...알겠습니다. 형사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입술에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외로 사건이 빨리 풀리겠는걸? 야..박형사 지금 당장 이 자식 잡아 와!!"
"네."
"김태섭씨....나 본 적 있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 중장비 사무실에 들렀을 때 나를 처음으로 맞이했던 성의없이 모자를 눌러 쓴 그 친구였다.
취조실이란 곳을 처음 왔는지 건장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네...."
나는 그의 신상명세서를 한 장씩 넘기며 말을 이었다.
"보기보다 젊네. 이제 서른 둘이네."
"..........."
"너 어제..밤 황승균씨 집에 왜 갔어?"
"예? 무..무슨 말입니까?"
그의 놀라는 모습은 전혀 진실성이 없었다.
나는 탁자를 손으로 치며 그를 다그쳤다.
"다 알고 있어!! 너 어제 이거 찾으러 간 것 아냐?"
난 그 앞에 접힌 자국이 선명한 A4용지를 꺼내 들었다.
그 용지를 보는 순간 그는 모자를 눌러 쓴 머리를 감싸쥐며 탄식을 내뱉았다.
"아....신발...미치겠네.."
나는 잠시 그가 진정을 되찾기를 기다렸다.
"노영주 죽은 거 알지?"
"예? 그 사람이 죽었어요?"
"어젯밤 농업용 수로에 빠져 죽었어."
"누...누가 죽였어요?"
"나도 모르니까...지금 심문하고 있는 것 아냐?"
"그...그럼 제가 죽였다고 생각하시는거예요 지금?"
"그럼 이 상황에 너 말고 누가 있냐?"
"아...진짜.. 난 아니라니까"
나는 잠시 그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미소를 보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번 이 용지에 있는 내용을 읽어주지... 차용증...본인 깁태섭은 6월 16일자로 일금 천만원을 황승균으로부터 차용한다. 상환일자는 10월 16일이며, 매월 이자는 원금의 5부로 하며 원금 상환시 납부한다. 차용인 김태섭, 보증인 노영주.....도장 쾅. 지문 쾅!!"
내용을 읽는 동안 그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나는 노래를 부르듯 말을 내뱉으며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제 너는 성기된거라네~~~~ 지금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너라네~~~ 황승균이는 그렇다치고, 니 보증 서준 노영주는 왜 죽인거야?"
"아...신발 진짜!! 노영주는 안 죽였다니까요."
"그럼, 황승균이만 죽인거야?"
"둘 다 안죽였다니까요!!!"
그의 말과 표정에서 왠지 모를 진실성이 묻어 나왔다.
황승균이는 타살 가능성이 있어보였지만 노영주는 사고사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유도심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대로 물러서면 황승균 사건이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다.
"너, 이 사건에 더 엮이기 전에 니가 알고 있는 것 다 불어. 안 그러면 너만 피보게 된다."
그는 잠시 머리를 숙인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신발....그 때 그 걸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가 뭔가를 말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나는 그에게 담배 하나를 내밀며 물었다.
"담배 피우냐?"
그는 말없이 조용히 받아들었다. 그리고 길게 연기 한모금을 빨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달전이었어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죠. 비가 오니까 모든 야근 계획이 취소가 된 겁니다. 우린 밤에 사무실에 모여 여섯명이서 포커판을 벌였죠. 나, 승균이 형님, 영주 형님, 그리고 다른 기사 세 명하구요. 보통 일주일에 한번은 포커를 했는데, 그 날은 월급날을 며칠 앞 둔 날이라 금액이 조금 컸어요. 시작한 시간이 9시 정도였죠. 그런데 11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승균이 형님이 먼저 돈이 떨어진 거예요. 보통의 경우 돈이 떨어지면 집에 가는데 그 날은 그 형님이 너무 일찍 돈이 바닥난 겁니다. 형님이 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노름판에서 무슨 소리냐고 했죠. 그랬더니 그 형님이 이 차용증을 내밀며 호통을 치는 거예요. 사실 그 차용증에 적힌 금액은 한 번에 빌린게 아니라 세 차례 빌렸다가 제가 자꾸 갚는 걸 미루니까 쓰게 된 거예요. 친구처럼 지내는 영주 형님이 보증을 서 준거구요."
"그 돈... 노름돈으로 빌린거지?
"빌린 건 빌린거고, 판돈은 판돈인데...차용증을 내밀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윽박을 지르는까 엄청 기분이 언짢더라구요. 평소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서로 형동생 하며 지냈었는데 안면 몰수하고 갑자기 형님이 그러니까 너무 서운하기도 하고. 그 때 갑자기 형님을 놀려주고 싶었어요."
그는 잠시 담배를 한모금 길게 빨았다.
"사무실에서 약 200미터 정도 떨어진 산 중턱에 폐가가 하나 있어요. 한 때 잘 나가던 식당이라고 하던데, 20년 전에 그 집 주인이 죽고나서 다 떠나고 방치된 집이래요. 게다가 고가도로가 마을 앞에 들어서면서 그 자리엔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더군요. 그거 있잖아요. 작은 도로만 있을 때는 지나가는 도시 사람들이 들러서 밥도 먹고 가고 작물도 사주고 하는데, 큰 도로가.. 그것도 고가도로가 나니까 사람들이 들리지 않는거 말이예요. 지금 그 집은 흉가로 유명해요.
귀신이 나타난데요. 야근 중에 그 곳을 지나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몇몇 작업자들도 텅 빈 그 집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목격했다고 합니다. 저 또한 사람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한 두번 목격했었구요. 우리 작업자들 사이에서는 공포의 장소였어요.
낮에 지나가면 멀리서 모두 깨진 창문 사이로 그 집 거실이 보입니다. 그 거실에는 누군지 모르는 영정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게 보이거든요?
불현 듯 포커판이 벌어졌던 그날 밤...... 그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전 형님한테 제안했죠.
지금..그 폐가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면 이 자리에서 100만원을 빌려주는게 아니라 그냥 주겠다고......
시간이 밤 1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 날은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전 형님이 갈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단지.. 가지 않으면 겁쟁이라고 놀려줄 생각이었죠. 그 때 그 형님이 술이 약간 취해 있었어요. 원래 술이 좀 약하거든요.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형님이 가겠다는거예요."
"그래서 황승균이가 갔어?"
"형님이 우비를 뒤집어 쓰더니 터벅터벅 걸어나가는거예요. 우리는 사무실 창으로 형님이 흉가쪽으로 걸어가는 걸 계속 지켜봤죠.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모습에 우린 아무도 말리지 않았죠. 형님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죠. 10분...20분...30분.... 벌써 왕복 두 번은 했을 시간인데 안오는 겁니다. 우리는 형님이 흉가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을거라고 확신했죠. 그리고 미친 듯이 도망나올거라고 했죠.
그런데....우리의 예상은 하나도 적중하지 못했습니다."
-계속-
"포커를 치면서 기다렸지만, 시간이 40분을 넘기자 슬슬 걱정이 되었죠. 어떤 사람은 집에 도망쳤을거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 흉가 앞에서 기절해 있을거라 하고, 아니면 근처에 숨어서 덜덜 떨고 있을거라 하고....
그런데 저희를 더 걱정스럽게 만든 건 형님이 전화를 놓고 갔다는 것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장대비도 거기에 한 몫했죠. 혹시나 발을 헛디뎌 어디선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 흉가에 가보자는 사람은 없었어요.
솔직히 무서웠죠. 다 들 무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혹시나 누가 가보자는 말을 할까봐 두려워하며 눈치만 보기에 급급했죠.
그런데 그 때... 사무실 문이 갑자기 덜커덕 열리는 겁니다. 형님이 문 앞에 서 있는 겁니다. 우와..........그 땐 정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죠."
그는 잠시 떨리는 손으로 담뱃재를 털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무섭던지....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쫘악 돋습니다. 그거 있잖아요. 스릴러영화 보면 범인이 빗속에서 사람 파묻고 돌아올 때 그 모습.....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우비 속으로 형님의 얼굴이 반쯤 보이는 겁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 입이 떡 벌어진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형님을 바라보았죠.
바로 그 때 형님이 우비 속에 감춰진 뭔가를 우리 앞에 탁 던져 놓는 겁니다. 그 영정사진이었죠.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아니 그것보다는 승균이 형님이 미친 것 같았어요. 미치지 않고서는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영주 형님은 비명까지 질렀다니까요. 놀랄만도 했죠. 우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앉은 자세를 유지한 채 사진으로부터 재빨리 물러났습니다. 영정사진의 얼굴은 확인할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우비를 벗을 생각도 안하고 형님이 사무실 안으로 발을 옮기는 겁니다. 그리곤 저에게 다가와 약속한 돈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줬어?"
"형사님이라면 안주고 배기겠어요? 저는 얼만지도 모르는 제 앞에 놓인 만원권을 쓸어담아 형님한테 냉큼 건넸죠. 형님은 여기저기 돈을 우겨넣더니 다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거예요. 더 웃긴건 뭔지 아세요? 형님이 그 영정사진을 다시 들고 나가는 겁니다. 그 형님이 어디로 가려는지 아무도 묻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어요. 단지 그 사무실에서 빨리 나가주기만을 바랬던 거죠.
형님이 나가자 저희는 그제서야 숨을 고르기 시작했어요. 포커판은 이미 끝난거나 마찬가지였구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승균이 형님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수근거렸죠."
"양승균......딴 사진으로 사기친 것 아냐?"
"그 생각도 해 봤죠. 그런데 그 다음 날 그 폐가를 지나가는데 그 사진이 안보이는거예요. 형님이 가져온 게 분명했어요. 사기를 쳤다 하더라도 그 때 그 형님 얼굴빛을 본 사람은 저와 똑같이 했을 겁니다."
"그래서 황승균이 죽은 것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거야?"
나는 애써 그의 얘기를 무시하려 했지만 나도 이미 그 것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형님이 조금씩 이상해졌어요. 며칠동안은 모든 작업이나 회사일은 정상적으로 잘 돌아갔어요. 그런데 날이 갈 수록 형님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게 조금씩 보이더라구요. 일단 술이 늘었어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두 세병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느 날부터인가 일곱여덟병을 나발 분다고 생각해 보세요. 더 이상한건 그러고도 정신이 멀쩡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있는 시간이 조금씩 줄었어요. 자꾸 어딘가로 사라지는 겁니다.
어떤 작업자는 승균이 형님이 한 밤중에 그 폐가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하더라구요. 뭔가를 잔뜩 싸들고 말이죠. 심지어 그 폐가에서 승균이 형님이 한 밤중에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죠.
모두들 형님을 조금씩 멀리하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눈 마주치는 것도 두려워했죠.
그 즈음에 사람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승균이 형님이 귀신을 불러낸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의 이 상황을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살인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형사가 귀신 얘기나 듣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얘기를 중지시킬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형님이 죽은 딸내미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나는 순간 피해자의 아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주연이라는 딸 애?"
"예. 딸내미를 만났다는 거예요. 모두들 승균이 형님이 이젠 정상상태가 아님을 직감했죠. 다들 그 형님이 미쳤을거라 얘기했지만, 속으로 혹시나 진짜로 귀신을 불러내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하고 있었죠. 생각해 보세요. 그 폐가를 들락거리면서 사무실에 들어올텐데... 그것도 순간의 실수만으로도 큰 사고로 이어지는 중장비를 다루는 회사인데, 귀신이 몸에 붙어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죠.
그런데 그 때 영주 형님이 뭔가 제안을 하나 했죠."
"...?"
"그 집....폐가를 부수자는거예요. 벽돌집이라 부수는건 눈깜짝할 사이예요. 그런 구조의 집은 포크레인으로 슬쩍 밀기만 해도 넘어가거든요. 처음엔 불태우자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 주변의 눈도 있고... 아무리 버려져 있다해도, 소유자가 누구인지만 모르는 엄연한 사유재산인데....."
"그래서 부셨어?"
"부수자는데는 모두 동의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있었어요. 그걸 누가 하냐였죠. 눈치만 살피던 저희들은 제비뽑기를 했죠. 그 때 영주 형님이 걸린겁니다."
"노영주는 지게차 기사 아냐?"
"면허증 없으면 운전 못하나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자기분야가 아니어도 중장비의 간단한 조작은 다 할 줄 알거든요.
승균이 형님이 비번인 날을 골라서 영주 형님이 회사 포크레인을 몰고 그 폐가로 갔죠. 모두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마냥 포크레인 뒤로 졸졸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수십여미터 근처에 다다르자 영주형님만 빼놓고 모두 제자리에 멈춰 섰어요. 영주 형님은 그 때까지도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어요. 조심스럽게 영주 형님이 포크레인을 몰고 그 폐가에 다가갔죠. 그리고 삽을 들어 굉음을 내며 옆의 창고를 막 부수고 있는데........"
"놀란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갑자기 형님이 호통을 치는거예요. 내 집에서 썩 물러가라며... 그런데 그 목소리가 형님 것이 아니었어요. 너무나도 낯선 생소한 목소리였어요. 그나마 멀리서 바라 본 저희들이 그럴 정도였는데, 바로 앞에 있던 영주 형님은 어땠겠어요? 비명을 지르며 영주 형님이 운전석에서 뛰쳐나왔죠."
"포크레인을 놓고 도망쳤단 말이야? 황승균이 그 걸로 무슨 짓 할 줄 알고?"
"다행히도 영주 형님이 키를 뽑아들고 도망을 쳤던거죠. 저희는 사무실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 때 저희를 수상히 여긴 사장님이 무슨 일인지 물었죠. 그제서야 저희들은 그간의 일을 사장님께 모두 털어놓았죠. 얘기를 모두 듣고 난 사장님은 같이 그 폐가로 가자는거예요. 사장의 명령이니 안 따를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저희들은 그 곳으로 다시 갔습니다."
"황승균이 있었어?"
"예. 경비원처럼 어디서 몽둥이 하나를 들고 와 거기서 지키고 있더라구요."
"가서 뭐했어?"
"사장님이 형님한테 가서 말을 걸었죠. 나머지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봤구요. 그런데 웃긴 건 승균이 형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우리 직원들이 큰 실수를 한 것 같다면서 연신 죄송하다고 사죄를 하더군요. 포크레인만 가지고 갈테니 화를 푸시라고 말을 하더라니까요.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승균이 형님이 몽둥이를 내려놓더니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거예요. 귀신이 빠져나간 것처럼 말예요."
태섭은 잠시 양 팔을 쓸어내렸다.
"그 날이 언제야?"
"형님이 죽기 이틀 전이었어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지?"
"어떻게 되긴요? 승균이 형님을 업고 사무실로 내려갔죠. 정신이 돌아온 형님이 집엘 가겠다며 사무실을 나선거예요. 그리고 이틀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시체로 발견이 된거죠. 연락이 없음에도 우리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승균이 형님이 우리에게 연락을 할까봐 두려웠죠. 차라리 나오지 않았으면 했어요."
나는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너...황승균이 죽은 걸 어떻게 알았어?"
"예?"
내 예상대로 그는 놀라는 눈치였다.
"신고 접수 후 경찰이 도착한게 대략 4시 반이야. 10분도 안되서 도착했지. 내가 도착한 건 20분 후고.... 그 사이에 죽은 황승균 와이프가 회사에 연락을 취할만큼 여유롭진 않았겠지. 회사 사람들은 마치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다느냥 여유로웠어. 아무리 소속감이 적다해도 무리가 있지. 게다가 현장에서 도망을 쳤던 노영주는 이미 황승균이 죽을 걸 알고 있던 사람 같더라구..."
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누가 그 전에 다녀갔어.....그렇지?"
-계속-
태섭은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사람이 노영주일 수도 있고, 바로 너 일수도 있지. 노영주가 어제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하고자 했던 그 말이 지금 니가 하고 있는 말보다 더 깊은 내용일 것 같아. 형사들은 직감이라는게 있거든. 내가 볼 때 노영주는 황승균 집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주변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어. 그러지 않고서야 비번인 날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사람 주변에 나타난다는 것은 쉽지가 않거든."
태섭은 나를 노려보던 시선을 접더니 오히려 나의 시선을 회피하기 바빴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들을 족치면 되거든. 그러면 누가 거짓말 하는지 자연스럽게 나오게 돼. 오늘 니가 한 얘기의 대부분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취조실을 빠져 나갔다. 문 밖을 나서자 박형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형사님, 죽은 황승균씨가 3억짜리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던데요?"
"뭐? 그래?"
"그런데...가입자는 황승균으로 되어있고, 수혜자는 황승균씨 와이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뭐야...황승균 본인이 가입하고 보험료를 냈단 말야."
"예. 보험회사 알아보니까 본인이 직접 싸인했다하더라구요. 보험료도 본인 통장에서 자동이체 되도록 했구요. 가입일도 20여일 전이예요."
"뭐야...자기가 죽을 줄 알고 있었단 말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그리고 김홍선씨하고 몇 차례 큰 돈거래가 있었는데요?"
"김홍선?"
"아...그 중장비 업체 사장이요."
"무슨 돈거래?"
"월급 같지는 않고 수백만원 몇 차례 계속 왔다갔어요. 그런데 정리는 깨끗이 한 것 같아요. 더하기 빼기 하니까 빵이 되더라구요."
"노름돈 빌렸나 보지. 아참...박형사... 김태섭 취조장면 봤어?"
"예."
"어떻게 생각하냐?"
"믿기도 그렇고 안믿기도 그렇고...."
"그 폐가에 대한 등기부 등본 좀 뽑아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예."
"참...황승균씨 내일이 발인인데, 유족들 부검할지 물어봤어?"
"별로 탐탁치 않아 하던데요."
"음...그럼 우리가 빨리 알아보는게 나을 것 같군. 나 급히 어디 좀 다녀올테니까 뒷 일 좀 부탁해"
"어디 가시게요?"
"그 마을에 가장 최근까지 살고 이사갔던 사람을 알아보고 만나야겠어."
나는 군청을 들러 가장 최근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 비교적 고령자를 찾았다. 가장 적합한 사람이 선정되었는데 10년 전에 이사를 했고, 그 때까지 마을의 이장을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비교적 멀지 않은 곳에 이사를 해서 차를 몰고 40여분 정도만 가면 만날 수가 있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이 아닌 비교적 도심의 한 가운데 자리잡은 아파트 단지에 그는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는지 반백발의 노부부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내는 거동이 불편해 보였지만 남편은 매우 정정해 보였다.
"그 집...참 안타깝지... 그 고가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장사가 잘 되던 가겟집이었어. 이름이...대흥상회였나? 이봐 할멈..맞지? 최씨가 하던 가게.."
"맞아요. 그 집 모르면 간첩이지."
"그 시골에서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거라곤 없었는데, 그 집은 어디서 그렇게 음식 기술을 배웠는지, 식당 일을 같이 하면서 지나가는 외지인들을 상대로 맛난 음식을 팔더라고. 알다시피 그 집이 얼마나 외진 곳에 있나? 마을 자체가 촌구석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그것도 산 중턱에 있지 않은가? 그런 곳에서 장사를 해 먹고 살다니 참 신통했지. 돈도 많이 벌어들이고 말야. 그 사람이 마을 노인정까지 지어줬다니깐. 모든 시골인심이 그렇듯이 우리는 서로 정도 많이 나누고, 음식도 나눠 먹고 그렇게 살았지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낯선 도시 사람들이 마을에 나타났어. 그리고 이장인 나를 찾아오더니 여기 저기 토지들을 매입하고 싶다고 그러더라구.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사람들이 왜 갑자기 우리 마을에 나타나 저러는지 몰랐지. 알고 보니까 1년안에 우리 마을에 고가도로가 들어선다는거야.
그 고가도로가 들어온다는 얘기가 돌면서 마을에 분란이 생기기 시작했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고가도로가 들어서는 걸 반대했지. 돈 보다는 우리 삶의 터전인 논과 밭이 먼저 아닌가?
그 사이에 낀 이장인 나는 어땠겠나? 그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 설득해 주면 한 명당 얼마식 주겠다 하면서 나를 계속 돈으로 매수하려고 했지. 에이..난 싫었어. 난 논과 밭이 있고, 자식새끼들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는데 그 깟 돈 몇푼에 마을 사람들을 팔 순 없진 않은가?
그런데 그 도시 사람들과 업자들이 우리를 설득 못하니까 도시에 살던 자식새끼들을 꼬드긴거야. 아주 난리가 났지. 생판 얼굴 한번 비치지 않던 놈들이 부모라고 여기저기서 찾아 오더군. 결국 자식들 성화에 못 이겨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개발동의서에 도장을 찍었지. 특히 업자들에게 돈으로 매수가 되었는지 마을 청년회 회장이란 친구가 여기저기 설득하며 도장 받으러 다녔어."
"청년회 회장이오?"
"늙어서 그런지 그 친구 이름이 가물가물하네..... 월남전까지 다녀와서 국가에서 나오는 돈으로 조금씩 연명하던 친구야. 거기 가기 전에는 참 착하고 순진했는데 다녀와서 성격이 많이 망가졌어.
업자들 앞잡이가 되어서 마을 사람들 선동하고 다니는 게 영 꼴불견이었지. 사실 청년회도 도시 사람들 들락거리기 시작하면서 급조된 모임이야. 그 넘의 시골에 젊은 사람들이 없는데 무슨 청년회란 말인가? 그렇게 토지보상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문제가 발생했어.
고가도로 교각 하나가 대흥상회 주인 최씨 밭을 지나가는데 마지막까지 최씨가 동의를 안해주는거야. 솔직히 보상금도 쏠쏠해서 그 때까지 반대하던 사람들도 그냥 도장 찍어줬어. 업자들이 구슬려보기도 하고, 협박도 해보기도 했지만 꿈쩍도 안하더라니까 특히 청년회 회장이라는 그 친구가 최씨를 많이 닥달했지. 아마 그 때 그 친구 눈빛 봤으면 도장 안찍고는 못배겼을 거야. 그런데도 최씨는 장사를 그만 둘 수 없었던 거야. 고가도로가 나면 망한거나 마찬가지거든.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구.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 날 밤 최씨가 집 근처 개천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어."
"예? 누가 죽인건가요?"
"아냐. 그 친구가 원래 엄청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는데, 그 날도 술 한잔 하고 읍내에서 집에 돌아오다가 쓰러진 것 같더라구. 그 개천길이 굵직굵직한 돌길이라 발을 헛딛기 쉽상이야. 넘어지면 머리를 부딪힌것 같애. 결국 남은 가족들이 그 동의서에 도장을 찍었지. 그리고 소리소문없이 그 집이 제일 먼저 마을을 떴어.
그런데 최씨가 죽은 뒤로 이상한 소문이 나돌더라구. 최씨가 죽은 날, 마지막까지 술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이 청년회 회장이라더군. 터무니없어 보였지만 그 친구가 최씨를 죽인 것 같다는 소문이 나도는거야. 청년회 회장이란 친구는 어떤 놈이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냐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녔지. 아니 대낮에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들고 다니더라니까. 그 땐 진짜로 누굴 죽일 것 같았다니깐. 마을 사람들 모두 입을 다물었지. 그 정이 넘치던 우리 마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누굴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
최씨 가게는 개발구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은 그대로 남았어. 물론 그런데 있는 집을 사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지. 그대로 폐가가 되어 버린거야. 동네 아그들 놀이터가 되어버린거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그 집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는거야"
노인은 목이 마르는지 주전자의 물을 한 컵 따라 들이켰다.
"그 집에서 놀던 어린 아그들이 최씨 아저씨를 봤다는거야. 한 둘이 아니었어. 어떤 아그는 최씨 아저씨가 줬다면서 장판 밑에 오랫동안 묵혀둔 듯한 천원자리 지폐를 보여주더라구. 그 집이 식당하면서 생선요리 많이 해.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비린내가 좀 나. 그런데 그 천원짜리에서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거야. 어휴...그 애 부모들은 사색이 되서 애를 야단치더라구. 다시는 그 집에 가지 말라고.
어느 날 밤에는 그 집에서 최씨 목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다더군. 그 친구가 술에 취하면 항상 부르는 노래가 있었지. 비가 오는 밤이면 그 노랫소리가 들린다는거야. 혹시나 귀신이라도 옮겨 붙을까봐 모두들 최씨집을 멀리했지.
게다가 더 이상한 건 그 청년회 회장이란 친구의 모습이었어."
"뭐가 말입니까?"
"어디서 피를 빨려서 온 사람처럼 갈수록 몰골이 상하더라구. 눈은 휑하니 꺼져 있고, 눈 밑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더라구. 며칠 동안 굶은 사람처럼 볼이 함몰되어 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고,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는 것 같더라니까. 죽은 최씨한테 시달린다는 괴담이 떠돌기 시작했지. 혹시나 그 친구한테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모두들 그렇게 믿고 있었어.
그 날밤.... 최씨가 죽었던 그날 밤....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게야.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친구가 보이질 않더라구. 어차피 먹여 살릴 처자식이 없어서 언제든 어디서 빌어먹고 살겠지만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는게 너무 이상했다네.
마을이 극도로 흉흉해졌지. 그 뒤로 하나 둘씩 사람들이 이사를 떠났어. 그나마 내가 가장 늦게 떠난거지. 나야 뭐, 가까운 읍내에 아들 내외가 살아서 언제든 이사갈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어르신, 혹시 예전 마을 사람들 사진같은거 가지고 계시나요?"
"꺼림칙해서 몇 년간 꺼내보지도 않았는데...잠깐 기다려보게"
잠시 후 노인은 두꺼운 앨범 하나를 들고와 그 위의 먼지를 닦아내며 나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바래진 앨범 표지를 보니 오랜 전 지워진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받아 든 앨범을 한장씩 넘기자 주로 노부부의 사진들이 먼저 펼쳐졌다. 몇 장을 넘기자 노인이 손가락으로 어떤 사진을 가리켰다.
"이 사람이 최씨라우...그 대흥상회 주인.... 어휴...술을 엄청 잘 마셨지. 상상도 못할걸?"
건장하다고 해야 할지, 풍만하다고 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지만 매우 풍체가 좋은 선한 얼굴의 40대 얼굴의 모습이었다. 페이지를 계속 넘기자 전형적인 시골 촌부의 모습들이 여기저기 펼쳐졌다. 그 순간 내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이런...."
"아는 사람인가?"
"예."
"이 친구가 바로 그 청년회 회장이었다네."
"뭐라구요?"
나는 노인의 말을 듣자 마자 휴대폰을 꺼내 박형사를 찾았다.
"응. 박형사 나야. 지금 당장 김홍선 사장 행적 파악해!! 지금 당장!!"
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형사 양반... 맞아!! 그 친구 이름이 김홍선이었지."
나는 순간 일이 복잡하게 꼬여감을 느꼈다.
"형사 양반...그 친구 봤나? 지금 어디 있나?"
"어르신 살던 마을에서 작은 중장비 회사를 하나 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이쿠...세상에나 이젠 정신 차렸나 보네."
"어르신..김홍선씨...아니 그 청년회 회장 얘기 좀 더 해주실래요?"
노인은 앉은 자세를 잠시 옆으로 틀더니 입을 열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정말 착하고 순진한 친구였지. 그 때는 홍선이..홍선이 하면서 이름도 잘 불렀는데 조금 전엔 왜 기억이 안 났는지 몰라. 사람이라는게 안 좋은 기억은 본능적으로 자꾸 잊버리려고 하나봐.
월남전 갔다왔다며 마을에 돌아왔는데...어이쿠...사람이 좀 이상해 보이더라구. 얼굴은 전보다 더 시커멓게 그을려 있고, 체구는 더 왜소해 진 것 같앴어. 거기에다 눈빛에 살기가 돌더라구.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네. 최전선에 있었다는데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겠나? 동네 사람들 모두 그 친구를 반가히 맞았지만, 얼굴빛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
술만 마시면 전쟁 얘기를 하는거야. 자기 손으로 월남군 수십명의 목을 땄다면서 목을 따는 시늉을 앞에서 막 보여주는거야. 미친 사람처럼 눈을 부릅뜨고 킥킥대면서 말야...... 게다가 마치 그 전장에라도 있는 것처럼 혼자 총질하는 자세를 취하다가, 엎드려서 포복하는 자세도 취하다가, 혼자 고함을 지르며 돌격 앞으로 하면서 전쟁 놀이를 하더라니까 그 순진한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겠나. 그리고 알아 듣지도 못하는 월남노래를 혼자 군가처럼 막 부르고 다녔지.
동네 사람들은 그 친구가 월남귀신에 쓰인 거라며 서로 수근댔지.
그런데 이상한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계속-
"뭐 말입니까?"
"그게 말야... 밤이 되면 이상한 주문을 읊으며 돌아다니더라구. 그 괴상한 노래까지는 들어주겠는데 말야...그 주문 소리는 정말 못 들어주겠더라구. 들으면 엄청 기분 나쁘고, 뭔가에 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소름이 끼쳤다네. 한국말인지, 월남말인지, 중국말인지 당최 알 수 없는 이상한 주문이야. 지금 뭐라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네. 흉내도 못내겠고...
그런 행동을 십년 넘게 하고 다녔으니 사람들 심정이 오죽했겠나. 그것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그 친구 마주칠까봐 밤에 돌아댕기질 못했다니까. 동네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죽을 맛이었다네. 잘못 보였다가는 그런 상태의 친구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당할지 모르니 입을 다물 수 밖에. 최씨가 죽은 뒤로는 그 주문 소리가 더 커졌어. 미친 사람이 따로 없었다니까. 시간이 갈수록 그 친구는 점점 피골이 상접하면서 사람의 몰골이 아니게 바뀌어가더라구.
그러더니 어느 날 동네가 그 주문 소리로부터 해방됐어. 그 친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거야. 살던 집도 버리고... 어차피 그 친구는 보상금을 받았으니까 떠나도 할 말이 없지만, 우째 이상하잖아."
나는 차를 몰면서 박형사와 통화를 나누었다.
"김형사님, 김홍선 사장이 어디갔는지 보이질 않습니다."
"직원들은 뭐래?"
"어디 좀 들렀다 온다고 했는데 행선지는 밝히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있어?"
"뭐...비번인 사람 빼 놓고는 회사는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태섭이 오늘 조퇴를 했다는데요?"
"어디 있는지 파악했어?"
"아뇨. 그건 아직..."
"그 폐가 등본 좀 뽑아 봤어?"
"예. oo리 산 447번지로 되어 있어요. 20년 전에 집이 빈 뒤로는 그 주소지로 이사 온 세대가 없어요. 그냥 그렇게 쭉 비어 있었어요. 그런데 재밌는게 있어요. 10년 전에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는데요."
"누구한테?"
"김홍선씨요."
"뭐?"
"그리고 그 폐가를 매입한 시점과 회사 사업자 등록 한 시점이 비슷합니다."
"회사를 거기에 차리면서 매입했다는 거네."
"예."
도대체 김홍선이란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박형사 그 회사 사무실로 가 있어. 나도 거기로 갈테니까."
"알겠습니다."
차창 앞에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사장님, 어디 갔어요?"
"아까 말씀드렸는데요. 오늘 어디 가신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여직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나는 사장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있다는 멘트만이 돌아왔다. 조퇴한 김태섭도 마찬가지였다.
"아따.. 우리 사장님 좀 그만 괴롭히쇼."
직원 중의 누군가가 나에게 명령하듯이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까칠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사장님이 얼매나 좋은 사람인디...뭐 털어봤자 아무 것도 안 나온당께요. 전에도 누가 이 건물 무허가라고 신고했다가 군청에서 나온 직원 면박만 당하고 돌아갔당께. 그만 하소."
"지금 이게 무허가 건물 조사하는 것하고 같습니까? 사람이 둘이나 그것도 이 회사 직원이 죽었어요. 댁이 경찰이라면 가만히 있겠소?"
"영주는 사고라고 들었고, 승균이 그 친구는?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장님과는 아무 상관 없을겁니다."
"사장과 무관한지 당신이 그 걸 어떻게 알아요?"
"승균이 그 놈이 노름빚에 허덕일 때 사장님이 다 뒷치닥거리 해줬당께요. 승균이가 딸내미 잃은 후 일도 안하고 넋이 나가 있었을 때도, 사장님이 다 뒷치닥거리 해주고 기다려줬당께요. 그런 분이 뭣땜시 승균이에게 해를 가하겄소? 안그렇소? 우리 직원들한테는 친삼촌같은 분인디."
"혹시 김태섭씨가 황승균씨한테 노름빚 진 것 알고 있어요?"
"승균이, 태섭이, 영주 그 자식들 끼리끼리 노름질 하는 것 땜에 사장님이 엄청 속상해 하셨습니다. 태섭이 이놈은 승균이한테도 빚지고, 영주한테도 빚지고...흐미...장난 아니었당께요. 승균이한테는 무슨 차용증까지 썼다합디다."
나는 그에게 뭔가 정보를 더 얻어낼 것 같았다.
"한달 전쯤 사무실에서 노름하다가 큰 소동이 벌어졌다는데.... 알아요?"
"무슨 소동인지는 모르겄는디...그 자식들 월급날만 가까워지면 맨 포커질이나 한당께요 그 세 놈이 똘똘 뭉쳐가지고는......월급 받기도 전에 그 날 돈 다 날리고 싸우고 지럴염병을 합디다. 한 두번도 아니고.."
"그 친구들 사이가 별로 안 좋았나 보네요?"
"처음엔 좋았지라.... 근디 그 넘의 노름질이 다 망쳐놨당께라. 딴 놈은 몰라도 승균이 그 놈은 사장님 얼굴 봐서라도 그러면 안되는디..."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디..그 놈들은 뭔 재미로 허구헌 날 셋이서 포커를 친다냐? 포커는 세명이서 하면 패가 안 떠서 재미가 없는디...다섯이 딱 좋은디..."
"뭐라구요? 세 명이요?"
순간 나의 미간이 찌푸려짐을 보자, 옆에 있던 박형사가 입을 열었다.
"어? 김형사님. 취조실에서 김태섭이 말로는 여섯명이서 포커를 했다는데..."
이에 그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여섯이오? 고것이 무슨 말이라요? 이 사무실엔 포커 칠 줄 아는 사람이 그 놈들 딱 셋하고 나 뿐인디.... 게다가 지는 그런 지저분한 아그들 판에는 안낀당께요"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김태섭...이 새끼....어디서부터 거짓말인거야?"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콘테이너 사무실의 천장에 쌀알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고...오늘 야근은 다 날아가부렀네..야근을 해야 돈이 좀 되는디..."
남자는 천장을 한번 쳐다보더니 푸념을 늘어 놓았다.
"저 산 중턱의 폐가에 대해서 알아요?"
나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그가 경기를 일으키며 손을 가로 저었다.
"오메...형사님. 그런 흉가 얘기는 꺼내질 말랑께요. 못들었소? 거긴 귀신 나타난다믄서... 여기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얼씬도 안 한단 말이오. 그랑께 왜 사장님은 이런 곳에 사무실을 차려가지고는....."
"황승균씨가 한 달 전에 저 폐가에 갔다던데 알고 있어요?"
"뭐시라? 그 폐가에 갔다고라?"
"몰랐어요? 김태섭이 그러던데...."
"워메...그랑께 승균이가 좀 이상하게 보였구만.. 언제서 부턴가 말도 잘 안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 했는디..."
나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물고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그들은 한 달전 여기서 포커를 쳤을 것이다. 김태섭의 얘기가 상당히 구체적인 걸로 봐서 어느 부분까지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지금 이 남자의 얘기도 어느 정도 김태섭의 말이 신빙성이 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문제는 그 날 이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냐는거다. 정말로 황승균이 그 폐가에 갔을까? 사람들이 모두 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곳인데.... 혹시나 황승균이 거길 갔다 하더라도 제 발로 걸어갔을까? 나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확실한 건 그곳에 갔다면 분명히 뭔가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내일이면 죽은 황승균의 발인날이다. 오늘 무언가를 밝히지 않으면 이대로 황승균은 사고사로 처리되고, 사건은 종료된다. 지금 뭔가를 해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박형사에게 말했다.
"박형사...지금 그 폐가로 가봐야겠다."
나에 말에 박형사보다 오히려 그 까칠한 수염의 남자가 더 놀래는 것 같았다. 여직원은 떡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오메... 형사님... 미쳤는갑네. 뭔 짓이라요. 그 집은 귀신 나타나는 흉가랑께요."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멀뚱거리고 서 있는 박형사를 다그쳤다.
"뭐해? 차에서 후레쉬랑 우산 챙기고 출발하자구."
"예?...정....정말로 가시게요?"
"그럼..내가 지금 장난치는 것 같애? 설마 박형사..진짜로 귀신 나타난다고 믿는건 아니겠지?"
이제 막 해가 기울었을 시간인데도 주위는 이미 먹구름과 쏟아지는 빗줄기가 만든 어둠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우산과 손전등을 꺼내 든 나는 잠시 먼 저편을 응시했다. 사무실 뒷편의 산 중턱을 돌아가면 그 곳이 있다. 간간히 번쩍이는 번갯불이 그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듯 조명을 밝혀주고 있었다. 여전히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형사에게 나는 말을 건넸다.
"정신 차려. 우리는 귀신을 만나러 가는게 아니라 증거물을 찾으러 가는거야."
-계속-
빗줄기와 바람이 제법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고 있음에도 무릎까지 빗물이 젖어드는 듯 했다. 조금씩 콘테이너 사무실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박형사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개 끌려오듯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시멘트로 다져진 콘크리트 길이 서서히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20여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으니 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로 신기할 뿐이었다. 서서히 그 길은 곧 맨 진흙밭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산중턱을 옆으로 돌아 사무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면에 그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번갯불이 번쩍일 때마다 그 심상치 않은 위용이 눈에 꽂혔다. 비닐 조각인지 천 조각인지 모를 기다란 그 무엇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 듯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아....김형사님. 왜 하필 지금 가야 합니까?"
빗줄기 속에서 박형사의 외침은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았다.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나!! 지금 밖에는 시간이 없어!!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와!!
어느새 땅바닥이 질퍽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우산을 쓴건지 안쓴건지 온 몸이 속부터 젖어가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 폐가 수미터 앞에 도착하였다. 현관 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를 집어 삼킬 듯이 그 집을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어둠이 굉장히 짙어졌음을 느낀 나는 손전등의 불을 밝혔다. 손전등이 밝히는 조명의 공간 속으로 시선이 모아지자 그 폐가는 더욱 더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것 같았다.
"들어가자."
나는 폐가의 현관통로로 발을 디뎠다. 그 집을 관통하는 세찬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와 박형사는 우산을 접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짜그르...."
작은 유리조각 밟히는 소리가 제일 먼저 우릴 반겼다.
"짜그르...짜그르..."
나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박형사를 여기까지 끌고왔지만, 지금은 박형사만큼이나 떨리고 긴장이 되었다. 나와 박형사는 손전등으로 이곳 저곳을 비추었다.
순간 손전등의 동그란 불빛에 거실에 걸린 영정사진이 비추어졌다. 백발의 할머니인데 그다지 평화로운 모습의 사진은 아니었다. 김태섭의 말이 맞다면 황승균이 가져온 사진이 바로 저것일 것이다.
"짜그르...짜그르..."
유리조각 밟히는 소리는 여전히 멈추질 않았다. 이 집안의 모든 유리제품이 다 박살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에 유리조각 천지였다.
가전제품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거미줄로 뒤덮힌 나무탁자, 철제 선반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김...김형사님 여기 좀 보세요."
나는 박형사가 말한 곳을 바라보았다. 먼지로 뒤덮혀 무슨 색인지 알아볼 수 없는 소파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먼지 위에 사람의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누가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더 나를 놀라게 한건 따로 있었다. 그 먼지 위에 난 자국이 너무나도 선명하다는 것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처럼.....
"누구지?"
싸늘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안방쪽으로 발걸음을 조금씩 옮겼다.
번쩍이는 번갯불과 함께 잠시 후 천둥소리가 멀리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계속 옮기려는 순간... 다시 한번 큰 번갯불이 집 안으로 파란색 섬광을 내뿜었다. 나는 제자리 서서 나무처럼 굳어버렸다. 박형사는 봤는지 모르지만, 지금 내 왼쪽 편에 누군가 서있는 모습이 그 찰나의 섬광과 함께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왼쪽빰이 얼음물에 젖는 듯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나는 잠시 몇 초간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시간이 끝나자 즉각적으로 그 곳에 손전등을 비추었다. 사각진 벽의 구석만 보일 뿐 그 형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오른손은 이미 권총의 손잡이에 가 있었다.
"김형사님...왜 그래요?"
"아...아냐...뭘 잘못 봤나봐."
내가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 동안 박형사가 뭔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김형사님, 창고 쪽에 뭐가 있는데요?"
나와 박형사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것을 살폈다. 녹이 슬어 두꺼운 갑옷을 입은 듯한 쇠기둥에 수십차례 무엇을 둘둘 감은 듯한 청테이프였다. 바닥에는 알 수 없는 영수증 같은 것들이 나뒹굴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뭐야..이거....신용카드 영수증이네. 이건 현금 영수증....액수도 몇천원짜리네..."
"누구건가요?"
"서명을 봐....황씨가 맞는것 같지?"
"예.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이런게 왜 여기에 떨어져 있죠?"
"주머니를 뒤진거야. 황승균을 여기에 묶어놓고... 바닥에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쓸려나간 걸로 보아 여기에 묶여있는 상태로 발버둥을 친 것 같애."
갑자기 으스스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아들....."
나는 순간 박형사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응? 방금 뭐라 그랬어?"
박형사는 뜬끔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예?"
"방금 뭐라 그랬냐구?"
"아..아무 말도 안했어요."
나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박형사는 모르는 듯 했지만 나에겐 정말 들린다. 지금도 그렇다.
"아들....."
"뭐..뭐라고?"
박형사는 정말 아무 것도 안들리는 걸까? 나의 독백에 박형사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나는 갑자기 알 수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김..김형사님..왜 그래요?"
"아들...."
중년 남자의 그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들...."
나는 쏜살같이 권총을 빼내 들어 보이지도 않는 그 누군가를 향해 겨누었다.
"누구야? 새꺄!!"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박형사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김형사님!! 미쳤어요? 총 내려요!!"
나는 빠른 속도로 사방을 손전등으로 비춰보며 그 소리 정체를 찾았다.
이유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졌다.
"김..김형사님 정신 차려요!!!"
박형사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박형사!! 정말 못 들었어? 장난치는거지?"
나는 박형사의 대답을 듣기 위해 그의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었다.
나보다도 박형사가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발 정신차리세요. 여기 오기 전에는 저더러 정신차리라고 하셨잖아요!!"
박형사는 장난을 치는게 아니었다.
순간 번개의 섬광이 내부에 쏟아졌다.
박형사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
그리고 섬광의 잔상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왜 가슴이 설레고 눈물이 멈추질 않는걸까?
나는 손전등을 들고 재빨리 집 안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비와 와서 그런지 여기저기 쾨쾨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누구야...어떤 새끼가 장난치는거야!!!"
나의 행동이 기이해 보였는지 박형사가 내 뒤를 좇았다.
집 안 구석구석을 미친 듯이 살폈지만 그 정체모를 형상과 소리는 어느 곳에도 있지 않았다.
나의 뒤를 급하게 좇던 박형사가 저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김형사님....귀신한테 홀린거예요? 귀신 없다면서요? 총 주세요."
"왜?"
"사고날 것 같아요. 주세요."
박형사 말대로 사고날 것 같았다.
그런데 손에 든 권총을 박형사에게 건내려는 순간 거실창 너머로 누군가의 어두운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번갯불이 그 곳을 밝히고 나서야 그것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미친듯이 그를 향해 뛰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질퍽거리는 땅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의 모습을 확인했는지 그 검은 형상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까이 근접해서야 나는 그가 우비를 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새꺄!!!"
마음 같아서는 권총의 방아쇠라도 당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형사 말대로 사고가 날지 몰랐다. 나는 들고 있던 권총을 주머니 깊이 박아 넣었다. 손이 가벼워지자 나의 뜀박질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야!! 이 강아지야!!? 거기 안서!!!"
천둥같은 나의 외침에 놀랐는지 그가 힐끔 뒤를 쳐다보는 시늉을 하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발을 헛딛은 것 같았다.
넘어진 그는 발목을 잡고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강아지..너 누구야!!!"
나는 넘어져 잇는 그의 가슴을 제압하고 머리를 덮고있는 우의를 벗겨냈다. 김태섭이었다.
"너...이 새끼....이럴 줄 알았어."
그가 저항을 하려하자 나는 그의 팔을 비틀었다.
"아아아악!!!!"
그의 비명소리에 고막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니가 황승균이 죽였지!!!"
쏟아지는 빗줄기가 화살처럼 얼굴을 때리자 태섭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헐떡거리며 벌리고 있는 입 속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말해 새꺄!!! 니가 죽였지? 뒤가 켕기니까 여기까지 감시하러 온 것 아냐!!!"
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어느새 주머니 깊숙히 박혀있던 권총이 그의 이마를 겨누고 있었다.
"김형사님!! 뭐하시는거예요!! 당장 총 치워요!!!"
뒤늦게 따라 온 박형사가 나를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박형사의 말을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안죽였어요....정말이예요!!"
"그럼 누가 죽였어? 왜 나한테 거짓말 했어? 새꺄!!!"
"거짓말 안했어요!! 정말이예요!!! 켁켁...."
"이 강아지 또 거짓말 하네... 좋아...너와 노영주가 황승균를 묶어놨던 곳으로 가면 떠오를거다. 일어나 새꺄!!"
나는 그의 목을 틀어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는 발을 접질렀는지 제대로 땅에 발을 딛지 못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를 죽은 개 끌고 가듯이 끌고 갔다. 그 폐가를 향해서.... 박형사는 어찌해야 될 지를 모르며 내 주변을 서성거렸다. 박형사에게 도움이라도 요청하는지 태섭은 더 크게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제발 그만 해요!!! "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차렸군. 저 집에 들어가면 뭔가 떠오르겠지. 안 그래?"
"제..제발 살려주세요. 부탁이예요. 아아악!! 형사님. 저 집에 들어가면 안 돼요!!"
"그러니까 말해 새꺄!! 누가 황승균이 죽였어?"
나는 그의 목덜미를 더 세게 틀어 쥐었다.
"아아악!!! 사장님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단 말예요!!"
그제서야 나는 내 손에 끌려오던 태섭에게 시선을 보냈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사...사장님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해서....으허헝헝"
갑자기 그는 하염없이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쥐고 있던 그의 목덜미를 놓았다. 나는 누운 자세로 한참 동안 통곡을 멈추지 않고 있던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리고 자세를 낮춘 후 그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장은 다 알고 있었군."
"흑흑흑......"
"포커를 치던 그날 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계속-
"콜록.. 콜록.."
숨을 돌리는지 아니면 목구멍으로 빗물이 들어가서인지 모르게 태섭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박형사가 우산을 펴고 조용히 다가와 태섭과 나에게 쏟아지는 빗물을 막아 주었다.
"그날 다툼이 있었어요. 전에 말했듯이 승균이 형님이 돈을 제일 먼저 잃었어요. 콜록... 남은 둘이 치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판을 접으려고 했죠. 그런데 승균이 형님이 계속 돈을 꿔달라는 겁니다. 노름판에서 돈을 꿔주면 그냥 돌고 도는 거잖아요. 우리가 전문 타짜도 아니고... 안된다고 했죠.
그러자 갑자기 형님이 내 멱살을 잡더니 마구 윽박을 지르는 거예요. 지금 당장 내가 꿔준 천만원을 갚으라는 거예요. 옆에 있던 영주 형님이 말릴려고 했는데 소용없었어요. 어린 놈의 새끼가 도박에만 맛을 들여 돈 귀한 줄 모른다며 타박을 하는 거예요. 우리 셋 다 술에 취해 있었는데...무시하는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분노가 치밀더라구요. 한 대 치고 싶었죠. 그러나 꾹 참았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형님을 놀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한 겁니다. 그 폐가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면 100만원을 빌려주는게 아니라 그냥 주겠다고...... 그 날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어요. 오늘처럼요. 약속이나 지키라면서 승균이 형님이 빗속을 뚫고 비틀거리며 그 폐가로 가는 겁니다.
저와 영주형님은 뒤를 좇았어요. 그 집 현관에 다다르자 승균이 형님이 정신이 들었는지 한 참을 머뭇거리는거예요. 역시나 예상했던대로였죠. 뒤따라 온 저희는 거기서 승균이 형님을 놀려댔죠. 그러자 승균이 형님이 열이 뻗치는지 갑자기 저의 멱살을 잡고 그 집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제가 반항하며 발버둥쳤는데 그 형님이 자꾸 제뺨을 때리고 욕을 하면서 그 집으로 저를 밀어 넣는 겁니다. 그리곤 그 영정 사진 앞에 저를 세우더니, 내가 가져가는 걸 똑바로 보라며 윽박을 질렀죠. 화가 났죠. 저는 100만원어치 값어치를 하려면 혼자 와야지 왜 끌고 왔냐면서 승균이 형님의 밀쳐냈습니다. 벽에 잠시 머리를 부딫힌 형님은 죽겠다는 엄살을 부리는거예요. 그리고는 저를 고소해서 콩밥을 먹이겠다는 겁니다. 이건 뭐..사람가지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 날 술을 먹지 말았어야 했어요. 저는 분에 못이겨 그 집 창고 쪽에 있는 쇠기둥에 형을 묶어놨죠. 묶어놓고 보니까 그 차용증이 생각나더라구요. 그래서 형님의 주머니와 지갑을 뒤졌는데 종이 쪼가리만 있고, 그 차용증은 없는 겁니다. 귀신하고 노름이나 하고 있으라며 형님을 버려놓고 그 집을 빠져나왔어오. 영주 형님이 말리긴 했지만, 영주 형님을 강제로 이끌고 저는 그 집을 내려왔어요. 그 땐 정말 겁만 주려고 했던 겁니다.
사무실에 있다보니가 조금씩 술이 깨더라구요. 그 때 승균이 형님이 조금 걱정되는 겁니다. 1시간 쯤 지나서 저와 영주 형님은 다시 그 집으로 올라갔어요. 혹시나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도 되더라구요.
현관에 다다르자 저희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승균이 형님이 나무토막처럼 거실에 떡하고 서 있는 겁니다. 창고 쪽에는 청테이프 같은 것부터 낫이나 호미같은 녹슨 연장이나 도구들이 가득했는데... 형님이 한 손에 낫 같은 걸 들고 서 있는 겁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아요. 우린 그 형님한테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그런데 형님이 조금 이상했어요. 후레쉬로 비친 얼굴은 웃고 있는거예요. 그러면서 저희에게 그러는 거예요.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왔냐고.... 그러면서 등 뒤에 감쳐 둔 영정사진을 저희에게 건네는 겁니다. 소름이 쫘악 돋았어요. 다리가 후덜덜 떨리고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어요. 사진을 내밀며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사진을 받아들지 않으면 죽일 것 같았어요. 우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들었죠.
그런데 갑자기 형님이..... 저희에게 자기 딸을 소개시켜 주겠대요. 그러면서 안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승균이 형님 딸은 5년 전에 죽었거든요.
우린 본능적으로 형님이 귀신 들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린 형님이 안방으로 들어간 틈을 타서 미친 듯이 그 폐가를 도망쳐 나왔습니다. 정말 미친 듯이요."
태섭의 눈빛에는 거짓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 뒤로 형님이 조금 이상해졌어요. 생각보다 무척 밝아진 겁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술담배도 잘 안하고....특히 노름을 갑자기 끊었어요. 그런데 그건 잠시였어요. 시간이 지나자 형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한 동안 끊었던 술을 다시 했는데, 정말 깜작 놀랐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소주 대여섯병을 그 자리에서 나발 부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와 같이 있는 시간이 조금씩 줄었어요. 자꾸 어딘가로 사라지는 겁니다.
어떤 작업자는 승균이 형님이 한 밤 중에 그 폐가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하더라구요. 뭔가를 잔뜩 싸들고 말이죠. 심지어 그 폐가에서 승균이 형님이 한 밤중에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죠. 그 집을 부수기로 했어요.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 형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저희는 도망을 쳤고, 사장님과 다시 그 자리에 돌아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저희는 이상한 말을 듣게 됐어요."
"무슨 말?"
"사장님이 형님을 달래려고 가까이 가는데........... 형님이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며 사장님한테 말하는 거예요.
'이봐....홍선이 오랜만이네'이러면서요.
순간 사장님이 우리만큼이나 무척 당황해 하셨어요. 형님은 말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 때 자네 왜 그랬나? 왜 나를 죽도록 내버려 두었나' 이러잖아요.
더 놀랄 줄 알았는데 사장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해지더라구요. 오히려 미소까지 짓더라니까요. 그러더니 '형님, 그 땐 미안했소이다' 이러면서 화를 풀고 승균이 좀 돌려달라고 하더군요.
저와 영주 형님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 했습니다. 승균이 형님한테 승균이를 돌려달라고 하다니요. 사장님이 저 폐가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어떤 사람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사장님이 무서워졌어요."
"사장이 니들 입막음을 했겠군. 그렇지?"
"사장님이 우릴 협박하거나 윽박지르지는 않았어요. 단지 돈을 몇 푼 쥐어주면서 오늘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래서 그 뒤로 황승균이는 어떻게 된거야?"
"사장님이 저와 영주 형님에게 번갈아가면서 승균이 형님을 감시하라고 했어요. 특히 저 폐가에는 절대 가지 말도록 명령하셨죠. 그 날 일당을 톡톡히 챙겨 주시니까 저희들이야 아쉬울게 없었죠. 폐가로 가려는 승균이 형님과 몇 번의 몸싸움이 있기도 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어느 날 감시를 하고 있던 영주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승균이 형님이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계속 소주를 사가지고 온다는 겁니다. 사장님은 무엇을 눈치 챘는지 급하게 승균이 형님 집으로 달려갔어요. 저 또한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죠. 저희 셋이 승균이 형님 집에 들어섰을 때 이미 형님은 죽어 있었어요. 엄청나게 많은 양의 소주를 입에 들이부은 것 같더라구요."
"지금 하는 말 진짜야?"
"뭐든 조사해 보세요. 지문이 되었든, 족적이 되었든, CCTV가 되었든... 우리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형님은 이미 숨이 멎어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그 때 넋두리를 하시더라구요. 승균이를 최씨 형님이 데려갔다는 거예요. 밖으로 나온 저희는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했죠.
그런데 영주 형님이 승균이는 우리가 죽인거라며 탄식을 하는 거예요. 경찰이 오면 얘기하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요. 승균이 형님 차용증을 경찰이 보면 분명히 저를 의심할텐데, 거기다가 그 폐가에서 있었던 일까지 말해 버리면 용의자 1순위로 몰릴 것 같았어요. 놀란 저는 입막음을 하려고 했지만, 사장님은 오히려 담담해 하셨습니다. 신고해 봤자 바뀌는게 아무 것도 없을거라고...... 살아있는 이승의 사람이 명을 끊은 게 아니니, 경찰이 믿어주지도 않을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영주 형님은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불안 했어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황승균이 집을 털었군."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허허허.."
태섭은 기가 차는지 눈물섞인 웃음을 쏟아냈다.
"그런데 그 영정 사진은 황승균이가 다시 갖다 논거야?"
"뭔 소리예요? 우린 그 사진을 어디다 집어 던졌는지도 기억도 안 날뿐더러, 그 뒤로 그 거실의 영정사진은 보이지도 않았어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훗...이 새끼 봐라...."
나는 상의 주머니를 뒤져 촉촉히 젖어가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인 후 길게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나는 태섭을 노려보며 아무 말없이 연신 담배를 빨았다. 빨고 내뱉고...다시 한번 빨고 내뱉고....
두려웠다. 뭔지 모를 두려움이 몰려왔다. 손이 떨려왔고, 정신이 혼미했다. 나의 이러한 소름끼치는 감정도 모른 채 박형사가 거들었다.
"김형사님, 폐가에서 영정사진 봤어요?"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쉬지 않고 담배만 빨았다. 간혹 터지는 푸른색 섬광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계속-
태섭을 멍하니 응시한 채 담배의 필터가 타들어갈 때까지 빨아댔다.
연기가 쓴 맛을 내자 나는 그제서야 흡입을 멈추었다.
"형..형사님..왜 그래요?"
태섭은 나를 보면서 두려움에 떠는 것 같았다.
"무섭게 왜 그래요? 형사님....."
나는 미동도 없이 담배 꽁초를 바닥에 떨구고는 주머니에 넣었던 총을 다시 꺼내 들었다.
순간 태섭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미..미쳤어요? 형사님!!!"
태섭은 내가 자기자신을 죽일거라 착각했나보다.
나는 꺼낸 총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뒤에 서 있는 박형사에게 내밀었다.
"박형사, 받아라."
"왜요? 아까 달라고 할때는 안 주고...."
"아무래도 니 말대로 사고가 날 것다."
나는 긴 한숨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녀석...박형사 니가 좀 데리고 내려와라."
돌아서 내려가려는 순간 나는 박형사에게 다시 한번 그것을 확인했다.
"박형사, 정말 거실에 걸려 있던 사진 못 봤어?"
"예. 사진 같은 건 없었잖아요."
"정말?"
"김형사님은 보셨어요?"
".............사람 소리도 못 듣고?"
"정말, 왜 그러세요?"
갑자기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너털웃음이 삐져나왔다.
"허허허..신발 미치겠네."
박형사와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섭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형...형사님. 그 영정사진 본 거죠? 그렇죠? 거기에 걸려 있지도 않았는데 본거죠? 그리고 사람 소리도 듣구요? 에이 신발...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당신도 귀신 들린거야!!"
"닥쳐!!? 새끼야!!"
나의 호통에 태섭이 찔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김형사님...정말이예요?"
박형사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며 산 중턱을 터벅터벅 걸어내려 갔다.
"김형사님, 우산 안 써요?"
박형사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그냥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걸었다.
그냥 뭔가 묻은 때를 씻고자 했다.
내 몸에 뭐가 붙었는지, 뭐가 묻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다 씻고 싶었다.
갑자기 온 몸에 밀려오는 이 무력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잡으러 여기까지 온 것일까?
그리고 그 폐가에서 나는 왜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
머리가 복잡하다.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오고 다리에 힘이 없다.
근래에 그다지 힘든 일도 없었는데....오늘따라 왜 이리 피곤한걸까?
눈 앞에 펼쳐진 화면이 시계방향으로 돌더니 이내 어둠 저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여보....이제 정신이 들어요?"
눈의 초점이 맞추어지자 아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여기가 어디야?"
"병원이예요."
"우리 딸은?"
"안 알렸어.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이야."
"내가 여기 왜 있는거지?"
"박형사님이 그러는데 어젯밤 당신이 근무 나갔다가 산에서 쓰러졌대요."
"아...그래?"
"병원에선 다행히 별 다른 이상은 없고 그냥 피로가 누적되서 그런거래."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지금 오후 2시야."
환자라고 생각하기엔 내 몸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정말로 달고 긴 잠을 잔 듯한 기분이었다.
"당신 일어나면 퇴원해도 된다던데..."
"그래? 그럼 지금 나가자구."
"참...그리고 밖에서 어떤 아저씨 분이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몇 시간째 기다려요."
"누군데?"
"중장비 사장이라고 하면 안다고 그러던데.."
"응..알았어. 그 양반 지금 어디있지?"
"병원 밖의 야외 휴게실에 있어요."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옷을 갈아 입었다.
퇴원수속을 밟은 후 나는 사장을 찾아 나섰다.
야외 휴게실에 나서자, 멀리서 벤치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뭔가를 음미하고 있는 듯한 남자가 보였다.
김홍선이었다.
내가 그의 앞까지 걸어오고 있음을 그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틀 간 어디 계셨습니까?"
나의 물음에 그가 조용히 눈을 떴다.
"오..퇴원하셨구랴. 한참을 기다렸는데..."
"제 발로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뭐 잘못한 것 있으신가요?"
"어이쿠...형사 양반. 퇴원 하자마자 업무 시작하는구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네. 그리고 형사 양반도 나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많지 않나?"
나는 그의 맞은 편 벤치에 조용히 앉았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직원이 둘이나 죽었는데, 그다지 슬프지 않으신가 봅니다."
"왜 슬프지 않겠나. 그냥 그 감정을 누르고 사는거지."
"이틀 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두 친구 장례식장 좀 들르고, 예전 아는 형님 산소에도 좀 들렀다네."
"20년 전에 죽은 최씨라는 사람 산소요?"
"어떻게 알고 있었네. 역시 형사들 무섭구만. 그래서 죄 짓고는 못사는건가봐."
"그 사람.....사장님이 죽였죠?"
나의 직설적인 물음에 그가 잠시 온화한 표정을 풀고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대답 대신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형사님..나이가 어떻게 되지?"
"마흔 둘이요."
"사람 죽여 봤나?"
오히려 그의 물음에 내가 긴장이 되었다.
그가 나의 내면을 뚫고 그 속을 파헤치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뇨."
"누가 당신에게 살인면허를 줄테니까 죽이고 다니라면 죽이겠나?"
"나하고 원수 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지요."
"그렇지. 보통은 다 그렇다네. 자네 눈빛을 보니 아주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겠구만. 나도 자네만큼이나, 아니 자네보다 더 착하고 순진했다네. 닭새끼 한 마리 모가지 치는 것도 힘들어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내가 군대에 갔어. 게다가 거기에 있을 때 월남전에 파병을 나갔다네.
돈도 많이 받고, 제대하면 국가유공자로 대우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 참전병들이 부산항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렇게 베트남으로 향했지. 나는 원래 군수지원병으로 들어갔는데 소총수들이 부족하니까 정글에 투입됐었어.
정글에 있는 기분은 그야말로 두려움의 연속이었어. 정말로 말벌 만한 모기도 있고, 주변엔 독사들이 득실댔지. 혹시나 베트콩들이 설치해 놓은 부비트랩이라도 건드릴까봐 몇 미터 전진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건 깊은 정글 어디선가 갑자기 쏟아져 나올듯한 베트콩들의 총알 세례였지. 그건 항상 아군의 공통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어.
첫교전이 있던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네. 적이 누군지 보지도 못했어. 쏘라니까 그냥 쏘는거야. 나는 참호에 숨어서 총을 난사했지.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밀지도 못하겠더라구. 나는 머리는 숙인 채 총만 밖에 내 놓고 그냥 갈긴거야. 총알 날아가는 소리...아니 총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 들어봤나? 예리하게 날이 선 장검을 휘두르는 소리와 비슷하다네. 참호 밖으로 목을 내밀면 누가 목을 베어갈 것 같은 생각이 드는거야. 나같은 소심쟁이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지.
적이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었어. 그냥 정글을 향해 갈기는거야. 월남전 때 총알 2만발에 한명이 죽었다는 말이 실감이 가더군. 어느 정도 소리에 적응이 되면 그제서야 머리를 조금씩 밖으로 내밀지. 조준을 하고 쏘는거야. 그러면 그 때부터 상대에게 희생자가 생기는거야.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참호 밖으로 본 장면은 다시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네.
정글의 수풀 사이로 베트콩들이 힐끔힐끔 보이는데, 베트콩들의 열에 서넛은 여자나 어린 아이들인거야. 난 그들을 향해 쏘고 있었고, 그들은 우리를 향해 쏘고 있었지. 차마 그들의 눈을 보고 쏠 수가 없었다네.
그런데 머뭇거림은 잠시야. 여기저기서 소대원들이 총탄을 맞고 피를 뿜으며 절규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눈이 돌아간다네. 그 땐 여자고 아이고 다 필요없지. 보이는대로 죽이는거야. 그냥 죽였어. 그들이 누가 되었든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한 번 피맛을 보니까 두려움이 사라지더라구.
한 번은 어느 마을을 점령했는데, 젊은 남자들은 없고 아이들과 여자들만 있는거야. 모두 전장에 끌려나갔다는거지. 그들은 우리에게 음식도 가져다 주고 호의를 베풀더라구. 그런데 그건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거였어. 우리 소대원들이 지나가는 틈을 타서 주변의 베트공들이 총알세례를 퍼붓는거야. 심지어 그 마을에 있던 여자들과 아이들이 모두 베트공이더라구.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겼는지 나는 총탄을 피해가며, 내 손으로 십수명의 베트공을 죽였지. 결과는 우리의 승리였어. 그런데 상처도 만만치 않았지. 부대원의 3분의 1이 전사했던거야."
내가 지금 왜 이얘기를 들어야 하는지 이유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의 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비통하고 원통했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부모얘기, 애인얘기, 아이들 얘기를 나누며 서로 울고 웃던 전우들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거야. 그 날 전투가 마지막 임무인 친구도 있었지. 곧 집에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는데..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 올랐지만, 그것보다는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칠 듯이 두려웠다네. 또다시 내 소심한 성격이 되살아난거야. 전쟁은 놀이가 아냐. 요즘 애들 게임처럼 지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모든 것이...."
그는 잠시 회심에 잠기는지 먼 산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나는 일생에 큰 변화를 가져올 만한 일을 겪게 되었지. 어느 날 사이공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한 노인을 만났어.
그 날 그 노인을 만난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몰고오게 될지 그땐 상상도 하지 못했지."
-계속-
"그 노인을 만나기 얼마전 나는 대규모 전투에 투입되었지. 우린 베트콩들에게 복수를 하기로 한거야.
베트콩의 본거지로 알려진 텅지앙을 공격하기로 한거지. 보병이 투입되기도 전에 그 곳에 수 백발의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네. 복수심에 불탄 우리는 그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자며, 거의 광기에 가까운 학살을 저질렀지. 부대원의 3분의 1이 민간인처럼 보이는 베트콩들에 살해당했는데 눈에 보이는게 있었겠나?
그 전투의 구호가 뭐였냐면...'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 였다네. 구호만 들어도 얼마나 잔인한 살육이 벌어질 것인지 알 수가 있었지. 1969년 말이었을 거야. 나는 거기서 정말로 악마가 되었다네."
그는 과거의 암울했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텅지앙에 도착했을 때, 이미 포탄 세례로 많은 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되어 있었지. 그 곳이 베트콩의 본거지라고 생각이 들자 살아 남아있는 건 모조리 죽였어. 하나도 남김없이. 어른, 아이, 남자, 여자, 젊은이, 노인....심지어 거기있는 가축들까지.... 그 때는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냥 우리 동네를 위협하는 지저분하고 사나운 야생동물을 소탕하는 것처럼 느껴졌었지.
어렸을 적 이유없이 곤충같은 걸 죽여본 적 있지 않나? 꼬리도 잘라보고, 날개도 떼어보고, 불에 태워보기도 하고, 터뜨려보기도 하고.... 뭐가 그렇게 궁금했는지 모르지만 그러면서 뭔가 쾌감을 느끼지 않았나?
그 날 텅지앙에서 우리도 별 반 다르지 않았다네.
총을 쏘아 죽이면 확인한다고 목을 잘라냈어. 총에 맞아 신음하는 사람의 복부에 대검을 꽂았지.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절룩거리며 도망가는 여자를 산 채로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어. 어떤 아이는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워 죽였어"
그의 서로 꽉 잡은 그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들 미쳤어. 왜 죽이는지 이유도 모르는 것 같았지. 오로지 죽이는게 목표였어. 머리는 광기로 사로 잡혀 있었고, 눈은 살기로 가득했지.
그 피비린내나는 학살이 무려 일주일 넘게 지속되었다네. 마을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 몇 그룹으로 나눈 뒤 기관총으로 몰살시키기도 했고, 한 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우기도 했다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서 불에 던져넣기도 하고,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네.
천명이 넘게 죽었다네. 그 날 전투가 끝나면 옷이 땀에 젖어야 했지만, 우리는 온통 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었지.? 너무 많이 죽였어. 너무나도 많이...그것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만큼 잔혹하게... 지옥은 멀리 있는게 아니었어. 그 당시 텅지앙은 지옥이었고, 우리는 지옥에 내려온 악마였지."
그의 눈이 촉촉히 젖어오는 듯 보였다.
"부대에 복귀했을 대 상부에선 우리의 용맹함을 칭찬하고 훈장을 수여했지. 그러나 그 때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던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었어. 우리의 행동은 용맹함과는 거리가 멀었지.
그러던 어느 날........ 그 지역을 남김없이 쓸어버린 후 며칠 지나 부대 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 거야. 실제론 그 지역에 실제 베트콩이라 부르는 베트남민족해방전선 대원들은 별로 없었다는거야. 게다가 괴기한 소문까지 나돌았는데, 집으로 돌아온 대원들이 죽은 가족들의 피를 모아 나누어 마셨다더군. 죽어서까지 우리를 좇아가 죽일 것을 다짐했다는거야. 퍼뜨리면 처벌을 할것이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소문은 부대 전체에 삽시간에 퍼져 버렸어. 부대에 미묘한 기운이 흘렀지. 우리보다 더 한 광기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피의 보복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두려웠던거야.
사실 미군들도 국내여론 때문에 서서히 베트남에서 발을 빼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거든. 토사구팽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네. 전쟁은 그들이 일으켜 놓고 우릴 부려먹은 다음, 뒤치닥거리는 우리가 하게 된 꼴이지. 다시 한번 우리의 용맹함을 보여주자고 모두들 자신있게 외쳤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었지. 자신들이 죽인 것은 무장한 베트콩이 아닌 베트콩 지역의 양민들이었다고.
정신질환을 앓는 병사들도 생겼어. 한 밤중에 자살소동을 벌이는 친구도 있었고, 실제로 자살한 친구도 있었다네. 그들의 핏물이 빠지지 않는다면서 피부가 벗겨져 나가도록 수세미로 맨살을 미는 병사도 있었지. 서로 입을 다물고는 있었지만 이미 부대원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네.
그 때 부대에서 생각해 낸 것이 연예인 위문 공연이었다네. 사이공에서 열렸었는데, 많은 군인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했지. 어쩌면 그 중의 어떤 이에겐 최후의 만찬이 될 수도 있는 축제였지.
공연은 끝났어. 많은 이들이 여자 가수의 잘 빠진 몸매와 풍만한 가슴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걱정부터 앞섰지. 곧 텅지앙에 인접한 퀴년시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거든.
해가 너울너울 기울 쯤 부대로 복귀하는 때였어. 부대 차량이 늦어져서 우린 잠시 시내를 둘러보고 있었다네. 그 때 어느 허름한 판자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온갖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을 내놓고 파는 가게였어. 산더미 같은 물건 속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백발을 어깨까지 내린 노인이 하얀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라구.
나도 그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같이 길을 걷던 부대원들 틈에서 이탈하여 이끌리 듯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네. 가까이 가서야 나는 그가 백내장 환자임을 알게 되었지. 하얀 눈동자의 초점을 나에게 맞추더니 그가 묻더군. 따이한이냐고. 북적거리는 그 사람들 틈에서 그가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나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이해할 수가 없더라구. 내가 맞다고 했더니, 그 노인은 몇 개 남지도 않은 이빨을 드러내 미소를 보내며 무슨 부적 같은 것을 내게 건네더라구.
자신은 사람의 목숨을 움직이는 흑마술을 알고 있다는거야. 그러면서 이 부적과 자신이 가르쳐주는 주문을 외우면 죽음을 피해갈 수 있다고 했지. 그것을 나에게 사라고 권유하는거야. 나는 손을 가로 저으면서 그런게 어딨냐고 거절했지. 그런데 내가 돌아서려는 순간 그 노인에 내게 충격적인 말을 하는거야.
내가 퀴년시에서 죽을 운명이라는거야. 난 심장이 멎는 듯 했네. 우리의 극비사항을 알고 있다는 건 둘째치고, 그의 음성이 너무나도 다부지고 매서웠지. 나는 다시 노인을 향해 돌아서서 물었지. 왜 그것을 하필 나에게 파냐고.
그랬더니 그 노인은 자신의 흑마술이 가장 잘 통할 것 같은 사람을 찾았다고 하더군. 두려움과 공포가 몸에 배어있으며,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사람이라는거야. 자신은 느낄 수 있다는거야.
노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지. 난 사겠다고 했어. 악마의 힘처럼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어. 나는 노인을 따라 들어가 좁은 오두막 같은 집으로 안내되었다네.
오두막에는 무슨 알 수없는 연기 같은 걸로 가득했지. 비릿한 무슨 냄새 같은 것도 나는 것 같았고. 나를 자리엔 앉힌 노인은 나뭇가지 같은 걸로 만든 채를 들고 나를 이리저리 쓸더라구. 나는 그 노인에게 여러가지 주술의식을 받았지. 주술의식이 끝날 쯤 노인이 나에게 어떤 주문을 반복해서 알려 주었지. 그러면서 위험이 닥쳤을 때 이 부적을 꺼내 주문을 외우라고 하더군. 내가 그 오두막을 나가려고 하자, 노인이 다시 나를 불렀어.
'이보게 따이한...세상엔 공짜가 없다네.'이러더라구.
나는 그 말이 돈을 달라는 뜻인 줄 알고 주머니에 있던 돈 몇 푼을 그에게 내밀었지. 그러자 그 노인은 돈을 거절하며, 그 몇 개 안 남은 이빨을 다시 드러내더니...... 앞으로 빚은 천천히 갚게 될거라는 말을 하더군.
돌아오는 길에 정신을 차리고 그 노인을 생각해보니 너무 묘한 기분이 들더군, 내가 무슨 짓을 했나하는 생각도 들고...
그 후 한 달 뒤 우리는 다시 가까운 퀴년시 외곽 전투에 참가했지.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네. 그 날 따라 우리는 의외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앞으로 전진했지. 이상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전의 우리의 명성 때문에 그들이 우리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려 한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그 건 오산이었어. 함정이었어. 베트공들의 게릴라 전술이었던거야. 그들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 나를 포함한 중대원들이 고립되어 버렸다네. 장대비가 쏟아지는 정글 속에서 전진을 한게 큰 실수였어.
총탄은 거의 떨어져 가는데 사방에 수백이 될지, 수천이 될지 모르는 베트공이 깔려 있었다네. 통신은 두절되었고, 지원군은 없었다네. 어두운 정글 속에서 원숭이 울음소리처럼 끽끽대며 조금씩 다가오는 그들에게 우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 그러나 하나둘씩 죽어갔어. 온몸에 총탄구멍이 난 채 사지가 너덜거리며 죽어가는 동료를 보면서 나는 광기에 가까운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지. 3개 소대는 이미 전멸되어 시체는 이미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우리 소대는 본대와 연락이 두절된 채 그들에게 완전 포위 당해 버렸지. 채 십분이 지나기도 전에 나는 수많은 시체더미에서 오직 홀로 살아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네.
짙은 먹구름 아래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하는거야. 몇 시간 동안 전투를 했는지도 모르게 벌써 밤으로 접어드는거야. 나는 죽은 동료의 시체로 몸을 덮었지. 시체에서 쏟아지는 피가 빗물과 섞여 내 얼굴 뒤덮었다네. 그것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문제가 될 상황이 아니었어.
여기저기서 가까이 접근하는? 베트공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거든.... 확인 사살을 하는지 중간중간 총소리가 끊이질 않았지. 목숨을 구걸하고 싶었다네. 어떡해서든... 베트콩들은 나의 구걸을 받아주지 않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때 나는 그 노인이 준 그 부적을 꺼내고는 주문을 읊었다네. 미친 듯이....숨을 죽여가며 최대한 작은 소리로..."
그들이 다가왔어. 여기저기서 칼로 찌르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지.
내 배 위에 얹어진 시체를 밟고 지나가는 베트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소리라도 낼 까봐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다네. 혹시나 탄로 날까봐 숨쉬는 것조차 멈추려 했지. 그 순간만큼은 차라리 고통없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어. 베트남 말이 아니었어. 괴물 소리처럼 꾸엑구엑 대는거야. 나는 그들의 불쾌한 소리가 너무나도 소름끼쳤지. 그래서 나는 내 몸 위에 올려진 시체들 틈 사이로 그들을 올려다 봤지. 그런데 어둑어둑한 배경 사이로, 부릅 뜬 내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목격되었다네. 시체를 밟고 지나가는 그들은 베트공이 아니었어."
"예?"
"아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네. 그렇다고 아군도 아니었어. 천천히 걸으면서 여기저기를 대검 같은 것으로 쑤셔보더라구.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어. 대검으로 쑤시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긴 손가락에 자라난 맹수의 발톱같은 손톱이었던거야. 꾸엑꾸엑거리며 계속 여지저기를 훑고 다니는거야. 그런데 그 순간 내 위를 지나던 그 정체 모를 병사와 눈이 마주친거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 병사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한번 입을 틀어막았지. 붉은색 눈을 하고, 송곳니가 턱까지 내려와 있었네. 얼굴에 수십차례 칼질을 해 놓은 것처럼 피부는 너덜거렸고, 입에서는 핏물이 토하듯이 쏟아져 나왔지.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병사가 나의 존재를 확인했는지..... 갑자기 괴물같은 그 손을 들어올리더니 나를 향해 꽂았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도 안났다네. 여기 저기서 한국말이 들리고 나서야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걸 알 수 있었다네. 노인의 말대로 나는 그 부적과 주문으로 죽음을 피해갔지.
지옥의 전장에서 살아나온 병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만큼 긴 잠을 자고 난 기분처럼 왠지 모를 기운이 몸에서 솟아나더라구. 지난 모든 일들이 한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네.
얼마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네. 한국으로 가기 전에 꼭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지. 그 노인의 가게 말야. 사이공에 가서 다시 그 집을 찾아 나섰다네 그런데 노인은 없었어. 가게 주인에게 수차례 노인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그런 사람은 여기에 없다는거야. 나는 가게 뒤로 돌아가 그 오두막을 찾았지. 생선이나 고깃국을 끓이는 야외 취사 장소였어. 오두막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 그 노인은 망령이었어."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죽은 자에게 목숨을 구걸한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 노인의 소름끼치는 말이 떠오르더군. 빚을 천천히 갚게 될거라는 그말....."
-계속-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네. 마을 사람은 나를 반기는 듯 했지만 경계의 눈빛이 역력했지. 매일같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처절하게 생존 투쟁을 벌이다 온 나에겐 논밭일이나 하며 그렇게 늙어가는 마을 사람들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보였지. 서로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깔깔대며 울고 웃고 하는 것들이 너무나 혐오스럽게 보였다네. 다들 바보같아 보였어. 놀려주고 싶었어. 나는 겁을 주었지. 전장에 있었던 얘기를 하며, 공포감을 심어주고 두려움을 불어 넣었지. 그럴 때마다 그들이 표정이 굳어졌어. 그들의 그런 모습에 나는 너무나도 짜릿하고 기분이 좋았다네.
매일 같이 사람 죽인 손으로 논밭의 소일거리를 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네. 국가에서 나온 돈으로 연명한다지만 진이 빠지도록 뭔가에 미쳐보고 싶었다네. 미칠 것 같았지. 밤마다 괴물같은 공허함이 나를 괴롭혔다네. 온갖 잡 생각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지. 미친 사람처럼 컴컴한 방안에서 전쟁놀이를 했지. 사람 목을 다는 시늉도 하고, 총에 맞에 고통스러워하는 시늉도 하고.... 꿈만 꾸면 나는 그 전장에 서있는거야. 어느 날 미국이 패전하여 베트남에서 철수한다는 뉴스가 뜨더군. 실로 그 공허함은 이루 말할수도 없었다네. 도대체 그 수많은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은 살아남은 자를 황폐화시켜...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가 마를 정도로 나를 괴롭히는 것이 나타났다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퀴년시 전투에서 보았던 그 악마의 병사들이 꿈속에 나타나는거야.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삭신이 저려왔다네. 잊혀졌던 공포가 다시 몰려왔어. 괴성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났지. 그런데 그 꿈을 꾸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거야. 나중엔 삼일에 한번 꼴로 가위에 눌렸어.
그 때 그 날처럼 나는 죽은 동료의 시체를 뒤덮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지. 그 때마다 그들은 어김없이 나를 나타나 내 가슴에 그 기다란 쇠꼬챙이 같은 손톱을 내 가슴에 박았다네. 제대로 잠을 이뤄본 적이 없었다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노인 준 부적을 보며 주문을 외웠지. 효과는 없었어.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어.
어떤 날은 밤길을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못보는 형상들이 돌아다니는거야. 누구였겠나?"
"그 악마의 형상 말입니까?"
"그래. 그 전장에 나타났던 그 모습 그대로 그 형상이 꾸엑꾸엑거리며 나를 찾고 있는 듯 보였어. 나도 모르게 주문을 웅얼거리며 읊었지. 그러기를 십년이 넘었다네. 고통이 끊이질 않았어. 그제서야 그 노인이 바라던게 뭔지 알 것 같았지. 내 목숨을 가져가려 한거야. 그 부적과 주문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거야. 나는 그 전장에서 시체들에 쌓여 기절했을 뿐이고, 나는 그렇게 살아남에 구조된거였지. 그 전장에서 애초부터 죽을 운명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나는 그날 그 노인에게 남은 목숨을 빼앗겼는지도 몰라. 부적을 찢어버렸다네.
어느 날 도시 사람들이 찾아오더라구. 개발 문제로 이장을 설득하지 못하니까 가장 건달같이 보이는 나에게 찾아왔지. 한 명당 20만원씩 챙겨주겠다며, 사람들의 동의서를 받아오라는거야. 나는 흔쾌히 승락했지. 깡패처럼 돌아다니면서 협박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았어. 그래서 마음이 맞는 몇 녀석과 청년회를 만들었지. 청년회 회의가 있다, 청년회에서 어르신들을 위해 대접을 한다, 이러면서 온갖 구실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동의서를 요구했지. 물론 일일이 찾아다니기도 했고...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해보고... 그런데 최씨 형님이 끝까지 거부를 하는거야."
"그래서 죽이셨나요?"
나의 물음에 그는 갑자기 껄껄 웃었다.
"이보게 형사 양반. 나도 사람이라네. 아무리 내 이 두손에 수십명의 피를 묻혔다고는 하나,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겠나?"
"사람 하나쯤은 죽이는건 일도 아니었을텐데요."
"그렇지. 사람 하나 죽이는건 눈 하나 깜빡할 내가 아니었지. 그러나 이 곳은 전장이 아니지 않나? 나의 협박에 최씨 형님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네. 그런데도 도장을 찍는 건 끝까지 거부를 하더라구.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날 밤, 형님과 술 한잔을 했지. 물론 술안주는 그 동의서 얘기였다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끝났지.
사실 마을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건 아냐. 그러나 나는 죽이지 않았다네. 술에 흠뻑 취해 마을로 돌아오는 길이었지. 나는 앞서 걸었고, 형님은 나를 뒤따르고 있었어. 개천을 하나 건너는데, 갑자기 형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거야.
나는 아무 생각없이 뒤돌아 보았는데 너무나도 무서운 광경이 벌어졌다네.
형님이 개천에 엎어져 있고,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엎어져 있는 형님의 뒷머리를 손으로 잡고는 연신 개천 사이에 박혀있는 바위덩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거야. 그 악마의 병사였다네.
형님이 손을 뻗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네. 그들이 한둘이 아니었어. 도망을 쳤지. 벗어나기 위해서. 그러나 그건 곧 또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네. 이젠 형님을 죽은 개 끌고 다니듯이 돌아다니는 그들을 보게 됬다네. 부적을 찢었을 때 그 용기는 온데간데 없고, 바보처럼 나는 다시 그 주문을 미친듯이 외웠지. 날이 밝을 때까지 미친 듯이.... 어느 날인가 문득 생의 끄트머리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빚을 갚기로 했어. 난 노인이 원하는 것을 해주기로 결심했지."
"뭘 말입니까?"
"내 목숨 말일세. 방안에 줄을 묶고 자살을 하기고 결심했지. 천장에 줄을 매달았네. 지난 십수년 간의 굴곡진 삶을 이젠 마감하고 싶었지. 그런데 의자 위에 올라서 줄을 목에 감고 막 몸을 던지려는 순간.... 그 노인이 내 앞에 나타나더군. 거의 다 잊어먹은 월남 말인데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네. 그가 나에게 말했지. 빚을 언제 갚을거냐고.... 나는 조용히 말했다네. 지금 갚겠다고... 그러자 그가 다시 나에게 말했어. 빚을 갚지도 않은 채 떠나지 말라고... 이해할 수가 없었어. 도대체 그 빚이라는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네.
그에게 물었지. 도대체 당신 누구냐고.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하더군. 자신은 텅지앙의 망령이라고.....
그는 잠시 합장을 하듯 두손을 모으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텅지앙의 망령... 텅지앙의 망령... 텅지앙의 망령...
수십번을 머리에 되뇌고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네.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이 무엇인지...."
나는 눈빛으로 그에게 답을 요구했다.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네."
"용서요?"
"그래...용서. 그들에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지. 그는 많은 것을 바랬던 것이 아니었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마을을 떠나 십여년 전의 당시 부대원들을 찾아다녔지. 우리 중대는 전멸했기 때문에 다른 중대 부대원들을 찾아다녔다네. 몇몇은 나와 거의 비슷하게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더군. 나는 생각을 같이하는 그들에게 나의 얘기를 하고, 나의 계획을 말했지. 그들도 흔쾌히 승락하더군. 모두가 동의한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돈을 모아 베트남으로 향했다네. 당시 미수교국이었기 때문에 입국은 쉽지가 않았지. 그런데 당시 큰 사업을 하고 있던 친구가 있었는데, 태국을 통해 베트남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주더군. 우리는 십여년만에 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인 텅지앙에 발을 디뎠다네.
우리 손에 죽었던 수 많이 원혼들이 당장이라도 무덤을 박차고 일어날 것 만 같았지. 거기서 우리는 위령제를 지냈다네. 그리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지. 위령제를 지내는 동안 너나나나 할 것 없이 눈물을 쏟아냈지. 십년 넘게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맺혀있는 응어리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네.
모든 것은 마음 속에 있었어. 증오, 분노, 고통, 죄책감, 그리고 악령들....그 노인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그 위령제가 끝난 이후로 그 악마같은 병사들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네. 그제서야 그 악마같은 병사들이 누구였지는 나는 알게 되었지. 왜 그들이 아군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도...."
나는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텅지앙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한국군이었군요."
"그렇다네. 그들에 눈에 비친 우리는 악마였지. 그 노인은 나에게 그들의 고통을 보여주려고 했었던거야. 그리고 나에게 바란 건 나의 피와 목숨이 아니었지. 용서를 바라는 나의 진실된 마음이었던거야."
그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중장비 일을 시작했어. 몇 년간 알뜰하게 돈을 모아 내 사업을 하려고 계획했다네. 돈이 좀 모아지면서 자리를 알아보고 다녔지. 그 때 나의 옛 고향이 떠오르더군.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난 돌아가고 싶었다네. 마을에 들어서자 육중하게 들어선 고가도로와 폐가가 되버린 형님 집이 눈에 들어왔지. 남들은 흉가라고 말했지만, 나에겐 나의 무책임으로 죽어간 형님의 집이었다네. 나는 사업터와 그 형님 집을 사들였지. 그리고 사업을 시작했다네. 그런데 얼마 전 황승균이 이 친구가 그 집에서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이 있었지."
"노영주와 김태섭이 그 집을 부수려던 때 말이죠?"
"승균이를 찾으러 그 집에 갔을 때 난 정말 깜짝 놀랐다네. 승균이 이 친구 입에서 최씨 형님 목소리가 흘러 나오는게 아닌가? 본래 흉가라고 불리는데는 가지 않는게 좋아. 나 같이 생사의 경계를 들락거렸던 사람은 별로 상관이 없겠지만 귀신은 그 사람의 나약한 곳을 건드려 기를 빼앗아 가거든. 승균이 이 친구가 5년 전에 딸 애를 잃고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네. 얼마나 보고 싶었겠나. 정말로 승균이에게 빙의된 그것이 최씨 형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혼령은 승균이의 그 점을 이용한 거라네. 귀신은 살아있는 자의 나약한 점을 알고 있거든. 내가 텅지앙의 망령에 시달렸던 것도 그들이 나의 가슴 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죄책감을 이용했기 때문이지.
그 친구가 그 집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얘기를 듣고 불길한 생각이 들더라구. 딸애를 보기 위해 목숨도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거야. 나는 영주와 태섭이 이 친구들을 시켜서 그 집에 들락거리는 걸 막았다네. 수시로 감시도 하게 만들고.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지.
왜 그렇게 엄청난 술을 마시고 죽었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네. 최씨 형님이 죽은 딸내미를 보여주는 댓가로 술을 바랬는지도 몰라."
나는 조용히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물었다.
"사장님. 정말로 그게 귀신의 짓이라고 생각하시는겁니까?"
"아니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두 세병의 술도 힘들어하는 친구가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는게 가능하다고 보나?"
"훗...사장님. 그렇게 따지면 제가 형사질하면서 본 죽은 사람들의 반은 다 귀신 짓이겠수다. 사람이 죽은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겁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그렇게 설명하려고 해도 안되는게 있지 않나? 입원한 태섭이한테 물어보니 자네도 최씨 형님 집에 들어갔다더군."
나는 잠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그가 보기에 거만하다고 느낄만한 자세로 다리를 꼰 채 담배를 피워댔다.
"소동이 좀 있었다고 하더만...."
"그건 착시일 수도 있고, 환청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는 잠시 내 눈빛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예? 그 건 갑자기 왜 묻는 겁니까?"
"그냥 대답해 보게."
"그야..제가 제일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제 딸이죠."
"아니...말고...자네 깊은 곳에 있는 다른 무언가 말일세.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질 않나? 사무치게 그리운 누군가 말일세."
"무슨 말씀이예요?"
"자네는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난 걸세..."
사장의 말에 나는 갑자기 손이 떨려 왔다.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조차 내뱉지 못했다. 숨이 막혀왔다.
"그게 누구인가?"
"......"
내가 왜 그 집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내가 들었던 그 정체 모를 소리는 어렸을 적 마지막으로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항상 내 이름보다는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셨다.
"누구인지 떠올랐구만."
"아버지요..."
"그게 자네의 그리움의 흔적이었군. 사고로 돌아가셨나?"
"......"
기를 쓰고 애를 썻지만 나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주 힘든 어린 시기를 보냈었겠구만. 이를 악물고 살아가게. 그 목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라네. 자네 아버지가 자네를 보고 싶어해서 부른 것이 아니야. 진정 자네 아버지였다면 자네를 거기서 찾았겠는가? 귀신의 장난이지. 나약한 자는 빙의에 잘 걸린다고 하지 않나? 나약한 자가 무엇인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자가 내세를 바라는 거라네. 자네의 귀여운 딸에게 똑같은 아픔을 주고 싶진 않지 않은가?"
삶이 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다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지. 아버지를 보기 위해 다시 그 곳으로 가서는 안되네. 견뎌야 되네.
승균이 그 친구는 그것을 견뎌내지 못했어. 미안하지만 나는 늙어 죽는 그 순간까지 최씨 형님 집을 간직하고 있을거라네.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형님이 그 곳에서 계속 장사하는 걸 지켜봐 줘야 하지 않은가?"
눈물 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아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런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가?어깨를 토닥거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어린 아이였다.
내가 사장을 다시 만난 건 인천공항이었다. 그는 옛 부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출구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호라....자네가 여기까지 왠 일인가?"
"베트남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매년 우리 회원들이 위령제를 지내는데 모레가 그 날이라네."
"네. 직원들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말씀 감사했습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허허...그 말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나?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은 걸. 잊지 말게. 형사 양반 모든 것은 항상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는 걸..... 그리고 열심히 살게나."
가벼운 손짓으로 인사를 마친 그는 출국장을 빠져 나갔다. 얼마 후 굉음과 함께 그가 탄 비행기가 공항을 빠져 나갔다.
멀리 시야에서 그 비행기가 멀어져 가고 있을 쯤 박형사에게 전화가 왔다.
"김형사님. 부탁하신 대로 20년 전 최씨 사건 조사해 봤는데요. 당시 부검의 소견으로는 타살의 흔적이 좀 보인다라고 기록돼 있던데요? 증거가 부족해서 결국 미결처리되었구요."
"그래?"
"아무래도 그 김사장이란 사람이...."
"수고했어. 어차피 공소시효도 끝난 사건이야."
"그런데 왜 그걸 조사하라고 시키셨어요? 바빠 죽겠는데.."
"이봐, 박형사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지. 진정 죄책감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용서를 구하고 죄를 씻고자 노력해야 하겠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냐...아무 것도.....참...박형사 오늘 저녁에 술 한잔 할까?"
"갑자기 왜요?"
"그 폐가 갔다온 뒤로 갑자기 술이 엄청 땡기네. 오늘 죽도록 한번 마셔볼까?"
"예? 김형사님, 진짜 왜 그래요? 정말 귀신 들린 거예요?"
"하하하...농담이야 농담. 그냥 간단히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휴....사람 좀 놀래키지 말아요. 그럼 이따 경찰서에서 뵙죠."
간만에 맑은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습도가 높긴 했지만 차창으로 스며 들어오는 공기가 여간 상쾌하지 않았다.
447번지의비밀(부제 텅지앙의망령)
출처 : http://cafe.daum.net/hardron-story
< 웃대 : 하드론 님 >
이 이야기는 현직 경찰인 지인으로부터 들은 일화를 소설식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신고한 사람이 누굽니까?"
나의 물음에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넋을 잃은 채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던 젊은 여자가 나를 천천히 올려다 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느낌으로 보아 사망자의 아내가 틀림없어 보였다.
헝클어진 퍼머머리와 흘러내린 눈물의 경로를 그려내고 있는 아이라인 줄기가 그녀의 심적 충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충격이 크시겠습니다.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녀는 나에게 응시했던 시선을 풀더니 이내 멍하니 어딘가를 또다시 주시했다.
"힘드시겠지만 수사에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40세의 한 남자가 죽었다.
안방에서 장롱에 몸을 등지고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죽었다.
방바닥에는 무려 17개의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고, 두어병은 채 비우지 못한 상태로 투명한 내용물을 밖에 쏟아내고 있었다.
현장조사가 한창이라 좁은 방안이 요란하고 시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사망자의 아내를 부축하고 집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주변 공원의 한적한 벤치로 인도하여 그녀가 깊은 숨을 몰아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불편하시면 오늘 말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모든 사건이 그렇듯이? 초동수사가 가장 중요한거라서...."
"네, 뭐든 물어보세요."
여자는 의외로 담담하게 나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수사관의 본능처럼 펜과 수첩을 꺼내 바로 심문에 들어갔다.
"남편의 사망 당시 같이 계셨습니까?"
"아니오."
"그럼 어디 계셨습니까?"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어요."
"그럼 마트에 가기 전에 남편을 보셨겠군요."
"아뇨. 그 때까진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발견 당시 남편 혼자 있었나요?"
"네."
"죽은 줄 어떻게 알았나요?"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고, 남편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장롱에 기대 앉아 있더라구요.
죽은 것 같았는데...혹시나 해서 팔과 얼굴에 손을 갖다대었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거예요.
입술은 이미 파랗게 변해있구요.."
바로 몇 십분 전의 기억이 생생한지 그녀는 잠시 양손으로 두 어깨를 쓸어내렸다.
"그런데 119가 아닌 경찰에 바로 신고하셨더군요."
"그냥 무서웠어요. 널부러져 있는 그 많은 소주병을 보니까 더 무서웠어요.
평소의 남편 같지가 않았어요."
두려움이 몰려오는지 그녀의 음성이 다소 높아졌다.
"인기척이나 낯선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던가요?"
"없었어요."
"혹시...원한을 살 만한 주변 사람들이 있나요?"
"그건 잘 몰라요. 워낙 바깥일 때문에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편이라...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지 몰라요"
질답이 오가는 동안 그녀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럼 마트에 얼마 동안 계셨나요?"
"네 시간 정도 있었어요."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옆집 새댁이 마트에서 내내 같이 있었어요. 물어보면 알겁니다."
"음...네시간이라.....네시간 동안 소주 17병을 마신다는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묻는거죠?"
"아..아닙니다. 그냥 의문이 드는 것들은 통상적인 수사관례상 물어보는게 저희들의 규칙입니다."
알리바이에 대한 추궁은 계속되었지만 나의 직감은 이미 그녀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남편 분의 직업이 뭡니까?"
"포크레인 기삽니다."
"외근이 잦겠네요."
"네."
"남편분 주량이 어느 정도입니까?"
"그건 잘 몰라요. 제가 술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연애 때도 같이 술을 한 적이 거의 없어요."
"최근에 남편분을 본게 언젭니까?"
"그저께였어요."
"혹시 이상한 점 못 느끼셨습니까?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다던가..아니면 이상한 말을 한다던가..."
나의 물음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녀가 갑자기 시선을 돌려 나를 무섭게 노려 보았다.
"생각나요!!"
그녀의 급박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순간 긴장감이 몰려왔다.
"어떤 것 말입니까?"
"들어오자마자 뭔가 홀린 사람처럼 넋이 나간 채 피곤하다며 잠이 드는 겁니다."
"......."
"평소엔 집에만 들어오면 이곳 저곳 친구들 전화해서 불러내기 바쁜 사람이예요.
당구가 되었든, 술이 되었든 친구들 불러내서 노는 것 좋아아는 사람인데 그 날은 그냥 그렇게 잠이 드는 거예요."
"그리고 언제 다시 나갔나요?"
"잠이 든지 서너시간이 지나자 야간작업이 있다며 다시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나가면서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무슨 말 말입니까?"
"주연이를 봤다는거예요."
"주연이요?"
"5년 전 사고로 죽은 저희 딸이예요."
예전의 악몽같은 기억까지 떠오르는지 그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흐흐흑!!"
나는 잠시 심문을 멈추고 그녀가 안정을 되찾을 시간을 주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대답은 무슨 대답이요? 전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 사람을 쳐다 봤고,
그 사람은 그렇게 더 이상의 아무 말없이 집을 나섰어요."
"그리고나서 오늘 사건현장에서 보신 겁니까?"
"네....흐흑흑..."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간략히 메모한 후 수첩을 접었다.
사건 현장으로 돌아오자 조금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현장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왜 다들 죽은 사람을 그렇게 보고싶어하는지 사람의 심리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김형사님."
현장 조사 중이던 박형사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과학 수사대 감식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외부 침입흔적도 없고, 독살흔적도 보이지 않고,
외상 흔적도 없고, 저항한 흔적도 없고.......
그냥 알콜수치가 치사량을 넘어서 죽은 것 같은데요?"
나는 잠시 사건현장의 출입문을 응시한고는 입을 열었다.
"박형사 너는 사람이 17병의 소주를 먹는다는게 가능하다고 보냐?"
"왜 불가능합니까? 어떤 연예인들은 소주를 궤짝으로 갖다놓고 마신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게 혼자서 가능하다고 보냐고? 그것도 단 서너시간만에...."
"그건 그렇지만.....다른 사인이 없잖습니까?"
"그리고 지나치게 소주냄새가 많이 나..."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박형사 너도 들어갈 때 느꼈잖아. 소주 냄새가 문밖까지 나던거.....먹은 것보다 쏟은게 많을 수도 있어."
"그럼 누가 강제로 먹였단 말씀이십니까?"
"주변에 토사물도 없고, 너무 깨끗하잖아. 그리고 어떻게 장롱에 기대어 바로 앉은 채 죽을 수가 있지?
너도 취해봐서 알잖아. 조금이라도 정신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사람은 눕게 되어있어."
"그렇긴 한데....일단 과학수사대 감식결과를 지켜봐야겠군요."
"박형사 너는 일단 유족들 만나서 시신을 부검 의뢰할 건지 알아보고, 발인 전까지 주변에 피해자와 금전관계가
있었거나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봐"
"네. 알겠습니다."
박형사가 멀어지는 모습을 본 나는 뒤돌아서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막 불을 붙이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건 담당 형사님이시죠?"
나는 대답 대신에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자세를 유지한 채 눈을 치켜 뜨고는 그를 쳐다봤다.
"저기.....죽은 친구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엄청난 용기를 내어 말을 하는 사람처럼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망설이며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사람이 사건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걸 직감했다.
나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손으로 천천히 걷어내듯이 움켜쥐고는 입을 열었다.
"네...그런데요?"
그는 계속해서 두 손바닥을 쥐어짜듯 비벼대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친구.........말입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계속 나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리고 정면으로 내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아...아닙니다."
"뭐가요?"
"아녜요."
"뭐가 아니란 말입니까? 무슨 말 하려고 했잖아요?"
나는 그에게 추궁을 하며 천천히 그의 어깨에 손을 가까이 했다.
나의 손이 가까이 다가옴을 느낀 그는 갑자기 몸을 움찔하더니 미친 듯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야! 거기 서!!"
갑작스런 나의 외침에 주변의 경찰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뭐해 임마!! 당장 저 자식 잡아!!"
그에 못지 않게 나도 이미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수명의 형사와 의경들이 그의 뒤를 좇았지만 다세대 주택단지의 좁은 골목길은
우리의 추격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재래시장으로 이어지는 골목은 인파로 넘쳐나 그 속으로 묻혀버린다면 사실상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몇 분간을 이리저리 내달리던 나는 추격을 멈추고 허리를 굽인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헉헉...아...그 자식 무지하게 빠르네..헉헉..담배를 끊든가 해야지.."
"헉헉...김형사님! 무슨 일입니까? 헉헉!!"
내 목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박형사가 내 뒤에 따라 붙어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용의자입니까?"
"헉헉...됐어. 얼굴도 기억해 뒀고, 피해자와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어..헉헉..당장 거기로 가자. 헉헉...
이거 뭔가 있어..."
-계속-
박형사와 내가 피해자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쯤 이미 너울너울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퇴근 준비가 한창일 것 같은 일반 회사와는 달리 두 개의 콘테이너를 붙여서 만든 조립식 사무실은 아직도
네다섯명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죠?"
운동모자를 성의없게 눌러 쓴 건장한 체격의 30대 중반의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경찰입니다."
나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분주했던 동시에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서로의 얼굴을 잠시 확인했다.
"여기 대표자가 누굽니까?"
나의 물음에 모두가 누군가로 모든 시선을 모았다.
콘테이터 깊숙한 곳에 놓여있는 소파에서 반쯤 머리가 벗겨진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일어섰다.
그는 수차례 돋보기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우리의 얼굴을 확인하는 듯 보였다.
"죽은 황승균이란 친구 때문에 오셨는가보네. 내가 여기 사장이오."
그는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예. 뭐 좀 조사할게 있어서요."
나는 열심히 주변을 살피며, 한 시간 전에 보았던 그 낯선 남자를 찾았다.
"그 친구 뭐 때문에 죽은 겁니까?"
경상도 억양이 약간 섞인, 지나치게 침착한 그의 말투가 잠시 귀에 거슬렸다.
"직원이 죽었는데 회사는 바삐 돌아가네요."
"중장비 다루다보면 다치는 사람,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여긴 또 지입차들이 많아서 소속감도 덜하고...."
"여기 직원 명부 좀 볼 수 있을까요? 사진있는 걸로."
"직원 명부요? 그러시죠."
나는 남자가 꺼내온 묵직한 서류철에서 사진만 확인한 채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누구 찾는 사람 있습니까?"
"죽은 황승균씨.. 요 근래에 이상한 점 없었습니까?"
나는 서류철을 훑어보는 와중에도 관련자 심문을 잊지 않았다.
"그 친구야 뭐...일 잘하겠다. 노는 것 좋아하겠다. 이상하게 여길 틈이 없어요."
"그 사람 술 좋아합니까?"
"좋아하지요.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싫어한다는게 말이 됩니까?"
"주량이 얼마나 됩니까?"
"뭐더라....전에 보니까....한......세병 정도?"
나는 잠시 서류를 훑어보는 것을 멈추고 사장이란 남자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렇게 마시면 얼마나 취합니까?"
"그냥 곤드레 만드레 해가지고는 쓰러져 잠만 잡디다."
나와 박형사의 의심스런 눈빛을 눈치 챘는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와요? 뭐 잘못 됐습니까? 도대체 그 친구 뭐 때문에 죽은 겁니까?"
"술 먹고 죽었어요."
나 대신 박형사가 답을 했다.
"뭐요? 술?"
어색하게 놀라는 표정의 사장보다는 그의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다른 이들이 눈에 거슬렸다.
뭔가 서로 간에 대화를 주고 받고 싶은데 극도로 말을 아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피해자에게 요 근래 이상한 점이 전혀 없었습니까?"
"없었다니깐 참 내...."
나는 다시 한번 사장의 등 뒤에서 조심스런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을 잠시 살핀 후 다시 서류철을 훑어보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내가 원하던 얼굴이 서류철 중간 쯤에서 나왔다.
"이 사람 어딨어요?"
내가 사진을 손가락으로 지목하자 사장은 안경을 잠시 매만지며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입을 열었다.
"노영주씨네. 이 친구 오늘 출근 안했는데..."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게차 차주인데, 지입차량이라 일거리가 없으면 안나와요. 지금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모르지요.
그냥 거기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해보시던가....."
"사장님 핸드폰 좀 빌려주겠어요?"
"내...내것 말이요? 왜요?"
나의 요청에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타살일지도 모르는? 사건 수사중입니다. 협조해 주시죠."
"타...타살이요? 그런데 핸드폰은 왜요?"
미적대며 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나는 잽싸게 그것을 낚아챘다.
어색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우리에게 향한 시선을 쫓아냈다.
"뭣들 하십니까? 신경쓰지 말고 일들 하세요.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은 나중에 부를 테니까요."
그 곱지 않던 시선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그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십여차례 벨소리가 울리고 난 다음에야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침묵으로 그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네..사장님...딸꾹..."
전화 속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이미 흥건히 술에 젖어 있었다.
"사장님....딸꾹..이젠 무서워서 못살겠슴더..."
다소 충격적인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통화내용이 사장에게 들리지 않도록 자리를 떴다.
"듣고 있슴니껴."
나는 혹시나 그가 눈치 챌까봐 작은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응."
"황승균이...그 놈아가 미친 것 맞지예?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거지예?"
"으...응"
그런데 그의 귀는 아직 술에 절은 것 같지가 않았다.
갑자기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목소리가 와그럽니까? 누....누꼬? 사장님 아닝교?"
"............."
"너..누구야!!"
어쩔 수 없이 나는 신분을 밝혔다.
"경찰입니다."
나의 한마디에 그가 대화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덜그럭거리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신호가 끊어졌다.
나는 조용히 휴대폰을 사장에게 건내고는 입을 열었다.
"사장님. 우리하고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사장의 눈빛이 매우 공격적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아챘다.
게다가 각자 일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부들이 박형사와 나를 둘러싼 채 어떤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처럼 서 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눈빛을 보내던 사장이 조심스럽게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형사님들이 범인 잡는다니 도와드려야지요."
"지금 하실 얘기 없습니까?"
"없소이다."
"이곳엔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끼시오? 그럼 찾아 보구랴"
"나중에 다시 찾아뵙지요. 그 때는 오늘보다 좀 오래 머물러 있을 것 같습니다."
"훗....얼마든지 그러시지요. 형사님"
그들의 기분 나쁜 시선을 뒤로한 채 우리는 발걸음을 차량으로 옮겼다.
안달이 났는지 박형사가 걸음을 재촉하는 내 옆에 붙어 나를 닦달했다.
"김형사님. 저 콘테이너 뒤져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사람들 좀 수상해요"
"수색영장도 없이 뭐하게? 저래뵈도 엄연한 하나의 회사인데."
"지금 어디 가시게요?"
"그 노영주라는 사람 집으로 가는거야."
"그 사이에 서류철에서 주소지 외우셨어요?"
"날 뭘로 보는거야?"
"하여튼 대단하십니다."
우리가 두번째 사건을 접한 건 노영주라는 사람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가던 중이었다.
박형사의 휴대폰이 다급하게 울렸다.
"뭐라고? 사람이 죽었다고?"
나의 눈빛을 확인한 박형사는 급히 차를 돌렸다.
시체는 콘크리트로 만든 2미터 정도의 너비의 농업용 수로 가운에 엎어져 있었다.
물은 거의 매말라 발목 정도만 차올랐고, 다소 어둠이 몰려와 어둑어둑했지만 대략 보이것만으로도
시체는 매우 개끗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둠이 몰려오는 이 시간에 인적이 드믄 농업용 수로에 사람이 빠져 죽는 경우는 대부분 사체유기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감식반을 불렀다.
"신고자가 누구야?"
"논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농부였습니다."
"사인은?"
"익사 같습니다."
"뭐? 익사? 아니 물도 없는데 뭔 익사?"
"그게 참....재수가 없으려면 접싯물에 코박고도 죽는다는 말이 딱 지금 상황입니다."
"그럼..뭐야? 저 친구가 지금 발목도 안차는 물에 코박고 죽었단 말야?"
"수로 벽에 약간의 혈흔이 있는 걸로 봐서 수로에 빠지면서 수로벽에 머리를 부딫힌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다음 얼굴을 옆으로 하고 엎어졌는데 한쪽 코에 계속해서 물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정확한 사인은 내일이나 나올 것 같은데, 현재로서 직접적인 사인은 익사로 보입니다."
"다른 데서 죽고 유기된 건 아니고?"
"술냄새가 많이 나고, 머리에 작은 타박상이 있는 것 외에 특별한 외상이 없습니다."
나는 엎어져 죽어있는 시체에 다가가 쪼그려 앉은 자세로 조심스레 얼굴을 확인했다.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이게 누구야?"
나의 놀라는 목소리에 박형사가 다가왔다.
"아는 사람입니까?"
나는 박형사에게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노영주란 사람 만나러 갈 일이 없을 것 같다."
나의 말뜻을 알아챈 박형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 무지하게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계속-
"내일 오전에 그 회사에 다시 가봐야 겠다."
"경찰서로 불러내죠."
"경찰서로 불러낸다고 주눅들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들 구역에 있어야 이말 저말 다 꺼내 놓는다."
나는 다시 한번 죽은 노영주를 쳐다보았다.
"망자는 말이 없다 했는데.... 도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지?"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 나는 경찰서로 나섰다.
여기에 온 지 1년 간은 이런 강력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바빠진 듯 했다.
"김형사님...."
형사계로 들어서자 나보다 먼저 나온 박형사가 말을 걸었다.
"일찍 나와 있었네."
"어제 밤 감식반에서 넘어온 황승균씨 유품 중에 놀라운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
"보세요."
박형사는 나에게 4분의 1로 접어진 A4용지를 하나 들이밀었다.
그 용지를 펼쳐보았을 때 박형사 말대로 이것이 아주 놀라운 유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굿잡~~~~"
나의 탄성과 함께 요란하게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박형사가 받아들었다.
"네. OO서 강력반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잠시 통화를 하던 박형사가 이내 수화기를 나에게 넘겼다.
"황승균씨 와이프라는데요?"
"그래?"
나는 급하게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예. 사모님. 전화 바꿨습니다."
"밤 사이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예? 도둑이요?"
"네. 장례식장에 밤새 있다가 아침에 들어왔는데...집이 어지럽혀져 있어요"
"없어진 물품이 있나요?"
"거의 다 그대로 있는데, 남편 옷장 주변이 난장판이 되어 있어요."
"흠....그래요? 범인이 누군지 알겠군요."
"예? 범인을 아신다구요?"
"확실하진 않지만....일단 사건접수는 해 놓겠습니다. 당분간 몸조심하시구요.
되도록 집에 혼자 있지 마세요."
"네...알겠습니다. 형사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입술에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외로 사건이 빨리 풀리겠는걸? 야..박형사 지금 당장 이 자식 잡아 와!!"
"네."
"김태섭씨....나 본 적 있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 중장비 사무실에 들렀을 때 나를 처음으로 맞이했던 성의없이 모자를 눌러 쓴 그 친구였다.
취조실이란 곳을 처음 왔는지 건장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네...."
나는 그의 신상명세서를 한 장씩 넘기며 말을 이었다.
"보기보다 젊네. 이제 서른 둘이네."
"..........."
"너 어제..밤 황승균씨 집에 왜 갔어?"
"예? 무..무슨 말입니까?"
그의 놀라는 모습은 전혀 진실성이 없었다.
나는 탁자를 손으로 치며 그를 다그쳤다.
"다 알고 있어!! 너 어제 이거 찾으러 간 것 아냐?"
난 그 앞에 접힌 자국이 선명한 A4용지를 꺼내 들었다.
그 용지를 보는 순간 그는 모자를 눌러 쓴 머리를 감싸쥐며 탄식을 내뱉았다.
"아....신발...미치겠네.."
나는 잠시 그가 진정을 되찾기를 기다렸다.
"노영주 죽은 거 알지?"
"예? 그 사람이 죽었어요?"
"어젯밤 농업용 수로에 빠져 죽었어."
"누...누가 죽였어요?"
"나도 모르니까...지금 심문하고 있는 것 아냐?"
"그...그럼 제가 죽였다고 생각하시는거예요 지금?"
"그럼 이 상황에 너 말고 누가 있냐?"
"아...진짜.. 난 아니라니까"
나는 잠시 그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미소를 보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번 이 용지에 있는 내용을 읽어주지...
차용증...본인 깁태섭은 6월 16일자로 일금 천만원을 황승균으로부터 차용한다.
상환일자는 10월 16일이며, 매월 이자는 원금의 5부로 하며 원금 상환시 납부한다.
차용인 김태섭, 보증인 노영주.....도장 쾅. 지문 쾅!!"
내용을 읽는 동안 그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나는 노래를 부르듯 말을 내뱉으며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제 너는 성기된거라네~~~~
지금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너라네~~~
황승균이는 그렇다치고, 니 보증 서준 노영주는 왜 죽인거야?"
"아...신발 진짜!! 노영주는 안 죽였다니까요."
"그럼, 황승균이만 죽인거야?"
"둘 다 안죽였다니까요!!!"
그의 말과 표정에서 왠지 모를 진실성이 묻어 나왔다.
황승균이는 타살 가능성이 있어보였지만 노영주는 사고사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유도심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대로 물러서면 황승균 사건이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다.
"너, 이 사건에 더 엮이기 전에 니가 알고 있는 것 다 불어. 안 그러면 너만 피보게 된다."
그는 잠시 머리를 숙인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신발....그 때 그 걸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가 뭔가를 말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나는 그에게 담배 하나를 내밀며 물었다.
"담배 피우냐?"
그는 말없이 조용히 받아들었다.
그리고 길게 연기 한모금을 빨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달전이었어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죠.
비가 오니까 모든 야근 계획이 취소가 된 겁니다.
우린 밤에 사무실에 모여 여섯명이서 포커판을 벌였죠.
나, 승균이 형님, 영주 형님, 그리고 다른 기사 세 명하구요.
보통 일주일에 한번은 포커를 했는데, 그 날은 월급날을 며칠 앞 둔 날이라 금액이 조금 컸어요.
시작한 시간이 9시 정도였죠.
그런데 11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승균이 형님이 먼저 돈이 떨어진 거예요.
보통의 경우 돈이 떨어지면 집에 가는데 그 날은 그 형님이 너무 일찍 돈이 바닥난 겁니다.
형님이 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노름판에서 무슨 소리냐고 했죠.
그랬더니 그 형님이 이 차용증을 내밀며 호통을 치는 거예요.
사실 그 차용증에 적힌 금액은 한 번에 빌린게 아니라 세 차례 빌렸다가 제가 자꾸 갚는 걸 미루니까
쓰게 된 거예요. 친구처럼 지내는 영주 형님이 보증을 서 준거구요."
"그 돈... 노름돈으로 빌린거지?
"빌린 건 빌린거고, 판돈은 판돈인데...차용증을 내밀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윽박을 지르는까
엄청 기분이 언짢더라구요.
평소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서로 형동생 하며 지냈었는데 안면 몰수하고 갑자기 형님이 그러니까 너무 서운하기도 하고.
그 때 갑자기 형님을 놀려주고 싶었어요."
그는 잠시 담배를 한모금 길게 빨았다.
"사무실에서 약 200미터 정도 떨어진 산 중턱에 폐가가 하나 있어요.
한 때 잘 나가던 식당이라고 하던데, 20년 전에 그 집 주인이 죽고나서 다 떠나고 방치된 집이래요.
게다가 고가도로가 마을 앞에 들어서면서 그 자리엔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더군요.
그거 있잖아요. 작은 도로만 있을 때는 지나가는 도시 사람들이 들러서 밥도 먹고 가고
작물도 사주고 하는데, 큰 도로가.. 그것도 고가도로가 나니까 사람들이 들리지 않는거 말이예요.
지금 그 집은 흉가로 유명해요.
귀신이 나타난데요.
야근 중에 그 곳을 지나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몇몇 작업자들도 텅 빈 그 집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목격했다고 합니다.
저 또한 사람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한 두번 목격했었구요.
우리 작업자들 사이에서는 공포의 장소였어요.
낮에 지나가면 멀리서 모두 깨진 창문 사이로 그 집 거실이 보입니다.
그 거실에는 누군지 모르는 영정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게 보이거든요?
불현 듯 포커판이 벌어졌던 그날 밤...... 그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전 형님한테 제안했죠.
지금..그 폐가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면 이 자리에서 100만원을 빌려주는게 아니라 그냥 주겠다고......
시간이 밤 1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 날은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전 형님이 갈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단지.. 가지 않으면 겁쟁이라고 놀려줄 생각이었죠.
그 때 그 형님이 술이 약간 취해 있었어요. 원래 술이 좀 약하거든요.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형님이 가겠다는거예요."
"그래서 황승균이가 갔어?"
"형님이 우비를 뒤집어 쓰더니 터벅터벅 걸어나가는거예요.
우리는 사무실 창으로 형님이 흉가쪽으로 걸어가는 걸 계속 지켜봤죠.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모습에 우린 아무도 말리지 않았죠.
형님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죠.
10분...20분...30분....
벌써 왕복 두 번은 했을 시간인데 안오는 겁니다.
우리는 형님이 흉가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을거라고 확신했죠.
그리고 미친 듯이 도망나올거라고 했죠.
그런데....우리의 예상은 하나도 적중하지 못했습니다."
-계속-
"포커를 치면서 기다렸지만, 시간이 40분을 넘기자 슬슬 걱정이 되었죠.
어떤 사람은 집에 도망쳤을거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 흉가 앞에서 기절해 있을거라 하고,
아니면 근처에 숨어서 덜덜 떨고 있을거라 하고....
그런데 저희를 더 걱정스럽게 만든 건 형님이 전화를 놓고 갔다는 것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장대비도 거기에 한 몫했죠.
혹시나 발을 헛디뎌 어디선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 흉가에 가보자는 사람은 없었어요.
솔직히 무서웠죠.
다 들 무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혹시나 누가 가보자는 말을 할까봐 두려워하며 눈치만 보기에 급급했죠.
그런데 그 때...
사무실 문이 갑자기 덜커덕 열리는 겁니다.
형님이 문 앞에 서 있는 겁니다.
우와..........그 땐 정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죠."
그는 잠시 떨리는 손으로 담뱃재를 털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무섭던지....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쫘악 돋습니다.
그거 있잖아요.
스릴러영화 보면 범인이 빗속에서 사람 파묻고 돌아올 때 그 모습.....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우비 속으로 형님의 얼굴이 반쯤 보이는 겁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 입이 떡 벌어진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형님을 바라보았죠.
바로 그 때 형님이 우비 속에 감춰진 뭔가를 우리 앞에 탁 던져 놓는 겁니다.
그 영정사진이었죠.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아니 그것보다는 승균이 형님이 미친 것 같았어요.
미치지 않고서는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영주 형님은 비명까지 질렀다니까요.
놀랄만도 했죠.
우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앉은 자세를 유지한 채 사진으로부터 재빨리 물러났습니다.
영정사진의 얼굴은 확인할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우비를 벗을 생각도 안하고 형님이 사무실 안으로 발을 옮기는 겁니다.
그리곤 저에게 다가와 약속한 돈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줬어?"
"형사님이라면 안주고 배기겠어요?
저는 얼만지도 모르는 제 앞에 놓인 만원권을 쓸어담아 형님한테 냉큼 건넸죠.
형님은 여기저기 돈을 우겨넣더니 다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거예요.
더 웃긴건 뭔지 아세요?
형님이 그 영정사진을 다시 들고 나가는 겁니다.
그 형님이 어디로 가려는지 아무도 묻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어요.
단지 그 사무실에서 빨리 나가주기만을 바랬던 거죠.
형님이 나가자 저희는 그제서야 숨을 고르기 시작했어요.
포커판은 이미 끝난거나 마찬가지였구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승균이 형님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수근거렸죠."
"양승균......딴 사진으로 사기친 것 아냐?"
"그 생각도 해 봤죠.
그런데 그 다음 날 그 폐가를 지나가는데 그 사진이 안보이는거예요.
형님이 가져온 게 분명했어요.
사기를 쳤다 하더라도 그 때 그 형님 얼굴빛을 본 사람은 저와 똑같이 했을 겁니다."
"그래서 황승균이 죽은 것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거야?"
나는 애써 그의 얘기를 무시하려 했지만 나도 이미 그 것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형님이 조금씩 이상해졌어요.
며칠동안은 모든 작업이나 회사일은 정상적으로 잘 돌아갔어요.
그런데 날이 갈 수록 형님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게 조금씩 보이더라구요.
일단 술이 늘었어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두 세병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느 날부터인가 일곱여덟병을 나발 분다고 생각해 보세요.
더 이상한건 그러고도 정신이 멀쩡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있는 시간이 조금씩 줄었어요.
자꾸 어딘가로 사라지는 겁니다.
어떤 작업자는 승균이 형님이 한 밤중에 그 폐가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하더라구요.
뭔가를 잔뜩 싸들고 말이죠.
심지어 그 폐가에서 승균이 형님이 한 밤중에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죠.
모두들 형님을 조금씩 멀리하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눈 마주치는 것도 두려워했죠.
그 즈음에 사람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승균이 형님이 귀신을 불러낸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의 이 상황을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살인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형사가 귀신 얘기나 듣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얘기를 중지시킬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형님이 죽은 딸내미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나는 순간 피해자의 아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주연이라는 딸 애?"
"예. 딸내미를 만났다는 거예요.
모두들 승균이 형님이 이젠 정상상태가 아님을 직감했죠.
다들 그 형님이 미쳤을거라 얘기했지만, 속으로 혹시나 진짜로 귀신을 불러내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하고 있었죠.
생각해 보세요.
그 폐가를 들락거리면서 사무실에 들어올텐데...
그것도 순간의 실수만으로도 큰 사고로 이어지는 중장비를 다루는 회사인데, 귀신이 몸에 붙어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죠.
그런데 그 때 영주 형님이 뭔가 제안을 하나 했죠."
"...?"
"그 집....폐가를 부수자는거예요.
벽돌집이라 부수는건 눈깜짝할 사이예요.
그런 구조의 집은 포크레인으로 슬쩍 밀기만 해도 넘어가거든요.
처음엔 불태우자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
주변의 눈도 있고...
아무리 버려져 있다해도, 소유자가 누구인지만 모르는 엄연한 사유재산인데....."
"그래서 부셨어?"
"부수자는데는 모두 동의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있었어요.
그걸 누가 하냐였죠.
눈치만 살피던 저희들은 제비뽑기를 했죠.
그 때 영주 형님이 걸린겁니다."
"노영주는 지게차 기사 아냐?"
"면허증 없으면 운전 못하나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자기분야가 아니어도 중장비의 간단한 조작은 다 할 줄 알거든요.
승균이 형님이 비번인 날을 골라서 영주 형님이 회사 포크레인을 몰고 그 폐가로 갔죠.
모두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마냥 포크레인 뒤로 졸졸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수십여미터 근처에 다다르자 영주형님만 빼놓고 모두 제자리에 멈춰 섰어요.
영주 형님은 그 때까지도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어요.
조심스럽게 영주 형님이 포크레인을 몰고 그 폐가에 다가갔죠.
그리고 삽을 들어 굉음을 내며 옆의 창고를 막 부수고 있는데........"
태섭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짓이겼다.
"그 비오는 날 승균이 형님이 사무실에 나타났을 때만큼 놀랐어요.
거실에서 형님이 뛰쳐 나오는겁니다."
"뭐?"
"놀란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갑자기 형님이 호통을 치는거예요.
내 집에서 썩 물러가라며...
그런데 그 목소리가 형님 것이 아니었어요.
너무나도 낯선 생소한 목소리였어요.
그나마 멀리서 바라 본 저희들이 그럴 정도였는데, 바로 앞에 있던 영주 형님은 어땠겠어요?
비명을 지르며 영주 형님이 운전석에서 뛰쳐나왔죠."
"포크레인을 놓고 도망쳤단 말이야?
황승균이 그 걸로 무슨 짓 할 줄 알고?"
"다행히도 영주 형님이 키를 뽑아들고 도망을 쳤던거죠.
저희는 사무실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 때 저희를 수상히 여긴 사장님이 무슨 일인지 물었죠.
그제서야 저희들은 그간의 일을 사장님께 모두 털어놓았죠.
얘기를 모두 듣고 난 사장님은 같이 그 폐가로 가자는거예요.
사장의 명령이니 안 따를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저희들은 그 곳으로 다시 갔습니다."
"황승균이 있었어?"
"예. 경비원처럼 어디서 몽둥이 하나를 들고 와 거기서 지키고 있더라구요."
"가서 뭐했어?"
"사장님이 형님한테 가서 말을 걸었죠.
나머지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봤구요.
그런데 웃긴 건 승균이 형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우리 직원들이 큰 실수를 한 것 같다면서 연신 죄송하다고 사죄를 하더군요.
포크레인만 가지고 갈테니 화를 푸시라고 말을 하더라니까요.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승균이 형님이 몽둥이를 내려놓더니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거예요.
귀신이 빠져나간 것처럼 말예요."
태섭은 잠시 양 팔을 쓸어내렸다.
"그 날이 언제야?"
"형님이 죽기 이틀 전이었어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지?"
"어떻게 되긴요? 승균이 형님을 업고 사무실로 내려갔죠.
정신이 돌아온 형님이 집엘 가겠다며 사무실을 나선거예요.
그리고 이틀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시체로 발견이 된거죠.
연락이 없음에도 우리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승균이 형님이 우리에게 연락을 할까봐 두려웠죠.
차라리 나오지 않았으면 했어요."
나는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너...황승균이 죽은 걸 어떻게 알았어?"
"예?"
내 예상대로 그는 놀라는 눈치였다.
"신고 접수 후 경찰이 도착한게 대략 4시 반이야.
10분도 안되서 도착했지.
내가 도착한 건 20분 후고....
그 사이에 죽은 황승균 와이프가 회사에 연락을 취할만큼 여유롭진 않았겠지.
회사 사람들은 마치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다느냥 여유로웠어.
아무리 소속감이 적다해도 무리가 있지.
게다가 현장에서 도망을 쳤던 노영주는 이미 황승균이 죽을 걸 알고 있던 사람 같더라구..."
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누가 그 전에 다녀갔어.....그렇지?"
-계속-
태섭은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사람이 노영주일 수도 있고, 바로 너 일수도 있지.
노영주가 어제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하고자 했던 그 말이 지금 니가 하고 있는 말보다 더 깊은 내용일 것 같아.
형사들은 직감이라는게 있거든.
내가 볼 때 노영주는 황승균 집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주변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어.
그러지 않고서야 비번인 날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사람 주변에 나타난다는 것은 쉽지가 않거든."
태섭은 나를 노려보던 시선을 접더니 오히려 나의 시선을 회피하기 바빴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들을 족치면 되거든.
그러면 누가 거짓말 하는지 자연스럽게 나오게 돼.
오늘 니가 한 얘기의 대부분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취조실을 빠져 나갔다.
문 밖을 나서자 박형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형사님, 죽은 황승균씨가 3억짜리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던데요?"
"뭐? 그래?"
"그런데...가입자는 황승균으로 되어있고, 수혜자는 황승균씨 와이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뭐야...황승균 본인이 가입하고 보험료를 냈단 말야."
"예. 보험회사 알아보니까 본인이 직접 싸인했다하더라구요.
보험료도 본인 통장에서 자동이체 되도록 했구요.
가입일도 20여일 전이예요."
"뭐야...자기가 죽을 줄 알고 있었단 말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그리고 김홍선씨하고 몇 차례 큰 돈거래가 있었는데요?"
"김홍선?"
"아...그 중장비 업체 사장이요."
"무슨 돈거래?"
"월급 같지는 않고 수백만원 몇 차례 계속 왔다갔어요.
그런데 정리는 깨끗이 한 것 같아요.
더하기 빼기 하니까 빵이 되더라구요."
"노름돈 빌렸나 보지. 아참...박형사... 김태섭 취조장면 봤어?"
"예."
"어떻게 생각하냐?"
"믿기도 그렇고 안믿기도 그렇고...."
"그 폐가에 대한 등기부 등본 좀 뽑아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예."
"참...황승균씨 내일이 발인인데, 유족들 부검할지 물어봤어?"
"별로 탐탁치 않아 하던데요."
"음...그럼 우리가 빨리 알아보는게 나을 것 같군.
나 급히 어디 좀 다녀올테니까 뒷 일 좀 부탁해"
"어디 가시게요?"
"그 마을에 가장 최근까지 살고 이사갔던 사람을 알아보고 만나야겠어."
나는 군청을 들러 가장 최근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 비교적 고령자를 찾았다.
가장 적합한 사람이 선정되었는데 10년 전에 이사를 했고, 그 때까지 마을의 이장을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비교적 멀지 않은 곳에 이사를 해서 차를 몰고 40여분 정도만 가면 만날 수가 있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이 아닌 비교적 도심의 한 가운데 자리잡은 아파트 단지에 그는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는지 반백발의 노부부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내는 거동이 불편해 보였지만 남편은 매우 정정해 보였다.
"그 집...참 안타깝지...
그 고가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장사가 잘 되던 가겟집이었어.
이름이...대흥상회였나? 이봐 할멈..맞지? 최씨가 하던 가게.."
"맞아요. 그 집 모르면 간첩이지."
"그 시골에서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거라곤 없었는데,
그 집은 어디서 그렇게 음식 기술을 배웠는지, 식당 일을 같이 하면서 지나가는 외지인들을 상대로
맛난 음식을 팔더라고.
알다시피 그 집이 얼마나 외진 곳에 있나?
마을 자체가 촌구석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그것도 산 중턱에 있지 않은가?
그런 곳에서 장사를 해 먹고 살다니 참 신통했지.
돈도 많이 벌어들이고 말야.
그 사람이 마을 노인정까지 지어줬다니깐.
모든 시골인심이 그렇듯이 우리는 서로 정도 많이 나누고, 음식도 나눠 먹고 그렇게 살았지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낯선 도시 사람들이 마을에 나타났어.
그리고 이장인 나를 찾아오더니 여기 저기 토지들을 매입하고 싶다고 그러더라구.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사람들이 왜 갑자기 우리 마을에 나타나 저러는지 몰랐지.
알고 보니까 1년안에 우리 마을에 고가도로가 들어선다는거야.
그 고가도로가 들어온다는 얘기가 돌면서 마을에 분란이 생기기 시작했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고가도로가 들어서는 걸 반대했지.
돈 보다는 우리 삶의 터전인 논과 밭이 먼저 아닌가?
그 사이에 낀 이장인 나는 어땠겠나?
그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 설득해 주면 한 명당 얼마식 주겠다 하면서 나를 계속 돈으로 매수하려고 했지.
에이..난 싫었어.
난 논과 밭이 있고, 자식새끼들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는데 그 깟 돈 몇푼에 마을 사람들을 팔 순 없진 않은가?
그런데 그 도시 사람들과 업자들이 우리를 설득 못하니까 도시에 살던 자식새끼들을 꼬드긴거야.
아주 난리가 났지.
생판 얼굴 한번 비치지 않던 놈들이 부모라고 여기저기서 찾아 오더군.
결국 자식들 성화에 못 이겨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개발동의서에 도장을 찍었지.
특히 업자들에게 돈으로 매수가 되었는지 마을 청년회 회장이란 친구가 여기저기 설득하며 도장 받으러 다녔어."
"청년회 회장이오?"
"늙어서 그런지 그 친구 이름이 가물가물하네.....
월남전까지 다녀와서 국가에서 나오는 돈으로 조금씩 연명하던 친구야.
거기 가기 전에는 참 착하고 순진했는데 다녀와서 성격이 많이 망가졌어.
업자들 앞잡이가 되어서 마을 사람들 선동하고 다니는 게 영 꼴불견이었지.
사실 청년회도 도시 사람들 들락거리기 시작하면서 급조된 모임이야.
그 넘의 시골에 젊은 사람들이 없는데 무슨 청년회란 말인가?
그렇게 토지보상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문제가 발생했어.
고가도로 교각 하나가 대흥상회 주인 최씨 밭을 지나가는데 마지막까지 최씨가 동의를 안해주는거야.
솔직히 보상금도 쏠쏠해서 그 때까지 반대하던 사람들도 그냥 도장 찍어줬어.
업자들이 구슬려보기도 하고, 협박도 해보기도 했지만 꿈쩍도 안하더라니까
특히 청년회 회장이라는 그 친구가 최씨를 많이 닥달했지.
아마 그 때 그 친구 눈빛 봤으면 도장 안찍고는 못배겼을 거야.
그런데도 최씨는 장사를 그만 둘 수 없었던 거야.
고가도로가 나면 망한거나 마찬가지거든.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구.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 날 밤 최씨가 집 근처 개천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어."
"예? 누가 죽인건가요?"
"아냐. 그 친구가 원래 엄청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는데, 그 날도 술 한잔 하고 읍내에서 집에 돌아오다가 쓰러진 것 같더라구.
그 개천길이 굵직굵직한 돌길이라 발을 헛딛기 쉽상이야.
넘어지면 머리를 부딪힌것 같애.
결국 남은 가족들이 그 동의서에 도장을 찍었지.
그리고 소리소문없이 그 집이 제일 먼저 마을을 떴어.
그런데 최씨가 죽은 뒤로 이상한 소문이 나돌더라구.
최씨가 죽은 날, 마지막까지 술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이 청년회 회장이라더군.
터무니없어 보였지만 그 친구가 최씨를 죽인 것 같다는 소문이 나도는거야.
청년회 회장이란 친구는 어떤 놈이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냐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녔지.
아니 대낮에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들고 다니더라니까.
그 땐 진짜로 누굴 죽일 것 같았다니깐.
마을 사람들 모두 입을 다물었지.
그 정이 넘치던 우리 마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누굴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
최씨 가게는 개발구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은 그대로 남았어.
물론 그런데 있는 집을 사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지.
그대로 폐가가 되어 버린거야.
동네 아그들 놀이터가 되어버린거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그 집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는거야"
노인은 목이 마르는지 주전자의 물을 한 컵 따라 들이켰다.
"그 집에서 놀던 어린 아그들이 최씨 아저씨를 봤다는거야.
한 둘이 아니었어.
어떤 아그는 최씨 아저씨가 줬다면서 장판 밑에 오랫동안 묵혀둔 듯한 천원자리 지폐를 보여주더라구.
그 집이 식당하면서 생선요리 많이 해.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비린내가 좀 나.
그런데 그 천원짜리에서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거야.
어휴...그 애 부모들은 사색이 되서 애를 야단치더라구. 다시는 그 집에 가지 말라고.
어느 날 밤에는 그 집에서 최씨 목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다더군.
그 친구가 술에 취하면 항상 부르는 노래가 있었지.
비가 오는 밤이면 그 노랫소리가 들린다는거야.
혹시나 귀신이라도 옮겨 붙을까봐 모두들 최씨집을 멀리했지.
게다가 더 이상한 건 그 청년회 회장이란 친구의 모습이었어."
"뭐가 말입니까?"
"어디서 피를 빨려서 온 사람처럼 갈수록 몰골이 상하더라구.
눈은 휑하니 꺼져 있고, 눈 밑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더라구.
며칠 동안 굶은 사람처럼 볼이 함몰되어 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고,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는 것 같더라니까.
죽은 최씨한테 시달린다는 괴담이 떠돌기 시작했지.
혹시나 그 친구한테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모두들 그렇게 믿고 있었어.
그 날밤.... 최씨가 죽었던 그날 밤....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게야.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친구가 보이질 않더라구.
어차피 먹여 살릴 처자식이 없어서 언제든 어디서 빌어먹고 살겠지만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는게 너무 이상했다네.
마을이 극도로 흉흉해졌지.
그 뒤로 하나 둘씩 사람들이 이사를 떠났어.
그나마 내가 가장 늦게 떠난거지.
나야 뭐, 가까운 읍내에 아들 내외가 살아서 언제든 이사갈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어르신, 혹시 예전 마을 사람들 사진같은거 가지고 계시나요?"
"꺼림칙해서 몇 년간 꺼내보지도 않았는데...잠깐 기다려보게"
잠시 후 노인은 두꺼운 앨범 하나를 들고와 그 위의 먼지를 닦아내며 나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바래진 앨범 표지를 보니 오랜 전 지워진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받아 든 앨범을 한장씩 넘기자 주로 노부부의 사진들이 먼저 펼쳐졌다.
몇 장을 넘기자 노인이 손가락으로 어떤 사진을 가리켰다.
"이 사람이 최씨라우...그 대흥상회 주인....
어휴...술을 엄청 잘 마셨지. 상상도 못할걸?"
건장하다고 해야 할지, 풍만하다고 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지만 매우 풍체가 좋은 선한 얼굴의 40대 얼굴의 모습이었다.
페이지를 계속 넘기자 전형적인 시골 촌부의 모습들이 여기저기 펼쳐졌다.
그 순간 내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이런...."
"아는 사람인가?"
"예."
"이 친구가 바로 그 청년회 회장이었다네."
"뭐라구요?"
나는 노인의 말을 듣자 마자 휴대폰을 꺼내 박형사를 찾았다.
"응. 박형사 나야.
지금 당장 김홍선 사장 행적 파악해!! 지금 당장!!"
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형사 양반... 맞아!! 그 친구 이름이 김홍선이었지."
나는 순간 일이 복잡하게 꼬여감을 느꼈다.
"형사 양반...그 친구 봤나? 지금 어디 있나?"
"어르신 살던 마을에서 작은 중장비 회사를 하나 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이쿠...세상에나 이젠 정신 차렸나 보네."
"어르신..김홍선씨...아니 그 청년회 회장 얘기 좀 더 해주실래요?"
노인은 앉은 자세를 잠시 옆으로 틀더니 입을 열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정말 착하고 순진한 친구였지.
그 때는 홍선이..홍선이 하면서 이름도 잘 불렀는데 조금 전엔 왜 기억이 안 났는지 몰라.
사람이라는게 안 좋은 기억은 본능적으로 자꾸 잊버리려고 하나봐.
월남전 갔다왔다며 마을에 돌아왔는데...어이쿠...사람이 좀 이상해 보이더라구.
얼굴은 전보다 더 시커멓게 그을려 있고, 체구는 더 왜소해 진 것 같앴어.
거기에다 눈빛에 살기가 돌더라구.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네.
최전선에 있었다는데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겠나?
동네 사람들 모두 그 친구를 반가히 맞았지만, 얼굴빛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
술만 마시면 전쟁 얘기를 하는거야.
자기 손으로 월남군 수십명의 목을 땄다면서 목을 따는 시늉을 앞에서 막 보여주는거야.
미친 사람처럼 눈을 부릅뜨고 킥킥대면서 말야......
게다가 마치 그 전장에라도 있는 것처럼 혼자 총질하는 자세를 취하다가, 엎드려서 포복하는 자세도 취하다가,
혼자 고함을 지르며 돌격 앞으로 하면서 전쟁 놀이를 하더라니까
그 순진한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겠나.
그리고 알아 듣지도 못하는 월남노래를 혼자 군가처럼 막 부르고 다녔지.
동네 사람들은 그 친구가 월남귀신에 쓰인 거라며 서로 수근댔지.
그런데 이상한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계속-
"뭐 말입니까?"
"그게 말야...
밤이 되면 이상한 주문을 읊으며 돌아다니더라구.
그 괴상한 노래까지는 들어주겠는데 말야...그 주문 소리는 정말 못 들어주겠더라구.
들으면 엄청 기분 나쁘고, 뭔가에 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소름이 끼쳤다네.
한국말인지, 월남말인지, 중국말인지 당최 알 수 없는 이상한 주문이야.
지금 뭐라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네.
흉내도 못내겠고...
그런 행동을 십년 넘게 하고 다녔으니 사람들 심정이 오죽했겠나.
그것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그 친구 마주칠까봐 밤에 돌아댕기질 못했다니까.
동네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죽을 맛이었다네.
잘못 보였다가는 그런 상태의 친구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당할지 모르니 입을 다물 수 밖에.
최씨가 죽은 뒤로는 그 주문 소리가 더 커졌어.
미친 사람이 따로 없었다니까.
시간이 갈수록 그 친구는 점점 피골이 상접하면서 사람의 몰골이 아니게 바뀌어가더라구.
그러더니 어느 날 동네가 그 주문 소리로부터 해방됐어.
그 친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거야.
살던 집도 버리고...
어차피 그 친구는 보상금을 받았으니까 떠나도 할 말이 없지만, 우째 이상하잖아."
나는 차를 몰면서 박형사와 통화를 나누었다.
"김형사님, 김홍선 사장이 어디갔는지 보이질 않습니다."
"직원들은 뭐래?"
"어디 좀 들렀다 온다고 했는데 행선지는 밝히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있어?"
"뭐...비번인 사람 빼 놓고는 회사는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태섭이 오늘 조퇴를 했다는데요?"
"어디 있는지 파악했어?"
"아뇨. 그건 아직..."
"그 폐가 등본 좀 뽑아 봤어?"
"예. oo리 산 447번지로 되어 있어요.
20년 전에 집이 빈 뒤로는 그 주소지로 이사 온 세대가 없어요.
그냥 그렇게 쭉 비어 있었어요.
그런데 재밌는게 있어요.
10년 전에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는데요."
"누구한테?"
"김홍선씨요."
"뭐?"
"그리고 그 폐가를 매입한 시점과 회사 사업자 등록 한 시점이 비슷합니다."
"회사를 거기에 차리면서 매입했다는 거네."
"예."
도대체 김홍선이란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박형사 그 회사 사무실로 가 있어. 나도 거기로 갈테니까."
"알겠습니다."
차창 앞에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사장님, 어디 갔어요?"
"아까 말씀드렸는데요. 오늘 어디 가신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여직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나는 사장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있다는 멘트만이 돌아왔다.
조퇴한 김태섭도 마찬가지였다.
"아따.. 우리 사장님 좀 그만 괴롭히쇼."
직원 중의 누군가가 나에게 명령하듯이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까칠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사장님이 얼매나 좋은 사람인디...뭐 털어봤자 아무 것도 안 나온당께요.
전에도 누가 이 건물 무허가라고 신고했다가 군청에서 나온 직원 면박만 당하고 돌아갔당께.
그만 하소."
"지금 이게 무허가 건물 조사하는 것하고 같습니까?
사람이 둘이나 그것도 이 회사 직원이 죽었어요. 댁이 경찰이라면 가만히 있겠소?"
"영주는 사고라고 들었고, 승균이 그 친구는?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장님과는 아무 상관 없을겁니다."
"사장과 무관한지 당신이 그 걸 어떻게 알아요?"
"승균이 그 놈이 노름빚에 허덕일 때 사장님이 다 뒷치닥거리 해줬당께요.
승균이가 딸내미 잃은 후 일도 안하고 넋이 나가 있었을 때도, 사장님이 다 뒷치닥거리 해주고 기다려줬당께요.
그런 분이 뭣땜시 승균이에게 해를 가하겄소? 안그렇소?
우리 직원들한테는 친삼촌같은 분인디."
"혹시 김태섭씨가 황승균씨한테 노름빚 진 것 알고 있어요?"
"승균이, 태섭이, 영주 그 자식들 끼리끼리 노름질 하는 것 땜에 사장님이 엄청 속상해 하셨습니다.
태섭이 이놈은 승균이한테도 빚지고, 영주한테도 빚지고...흐미...장난 아니었당께요.
승균이한테는 무슨 차용증까지 썼다합디다."
나는 그에게 뭔가 정보를 더 얻어낼 것 같았다.
"한달 전쯤 사무실에서 노름하다가 큰 소동이 벌어졌다는데.... 알아요?"
"무슨 소동인지는 모르겄는디...그 자식들 월급날만 가까워지면 맨 포커질이나 한당께요
그 세 놈이 똘똘 뭉쳐가지고는......월급 받기도 전에 그 날 돈 다 날리고 싸우고 지럴염병을 합디다.
한 두번도 아니고.."
"그 친구들 사이가 별로 안 좋았나 보네요?"
"처음엔 좋았지라....
근디 그 넘의 노름질이 다 망쳐놨당께라.
딴 놈은 몰라도 승균이 그 놈은 사장님 얼굴 봐서라도 그러면 안되는디..."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디..그 놈들은 뭔 재미로 허구헌 날 셋이서 포커를 친다냐?
포커는 세명이서 하면 패가 안 떠서 재미가 없는디...다섯이 딱 좋은디..."
"뭐라구요? 세 명이요?"
순간 나의 미간이 찌푸려짐을 보자, 옆에 있던 박형사가 입을 열었다.
"어? 김형사님. 취조실에서 김태섭이 말로는 여섯명이서 포커를 했다는데..."
이에 그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여섯이오? 고것이 무슨 말이라요? 이 사무실엔 포커 칠 줄 아는 사람이 그 놈들 딱 셋하고 나 뿐인디....
게다가 지는 그런 지저분한 아그들 판에는 안낀당께요"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김태섭...이 새끼....어디서부터 거짓말인거야?"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콘테이너 사무실의 천장에 쌀알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고...오늘 야근은 다 날아가부렀네..야근을 해야 돈이 좀 되는디..."
남자는 천장을 한번 쳐다보더니 푸념을 늘어 놓았다.
"저 산 중턱의 폐가에 대해서 알아요?"
나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그가 경기를 일으키며 손을 가로 저었다.
"오메...형사님. 그런 흉가 얘기는 꺼내질 말랑께요.
못들었소? 거긴 귀신 나타난다믄서...
여기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얼씬도 안 한단 말이오.
그랑께 왜 사장님은 이런 곳에 사무실을 차려가지고는....."
"황승균씨가 한 달 전에 저 폐가에 갔다던데 알고 있어요?"
"뭐시라? 그 폐가에 갔다고라?"
"몰랐어요? 김태섭이 그러던데...."
"워메...그랑께 승균이가 좀 이상하게 보였구만..
언제서 부턴가 말도 잘 안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 했는디..."
나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물고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그들은 한 달전 여기서 포커를 쳤을 것이다.
김태섭의 얘기가 상당히 구체적인 걸로 봐서 어느 부분까지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지금 이 남자의 얘기도 어느 정도 김태섭의 말이 신빙성이 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문제는 그 날 이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냐는거다.
정말로 황승균이 그 폐가에 갔을까?
사람들이 모두 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곳인데....
혹시나 황승균이 거길 갔다 하더라도 제 발로 걸어갔을까?
나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확실한 건 그곳에 갔다면 분명히 뭔가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내일이면 죽은 황승균의 발인날이다.
오늘 무언가를 밝히지 않으면 이대로 황승균은 사고사로 처리되고, 사건은 종료된다.
지금 뭔가를 해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박형사에게 말했다.
"박형사...지금 그 폐가로 가봐야겠다."
나에 말에 박형사보다 오히려 그 까칠한 수염의 남자가 더 놀래는 것 같았다.
여직원은 떡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오메... 형사님... 미쳤는갑네. 뭔 짓이라요.
그 집은 귀신 나타나는 흉가랑께요."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멀뚱거리고 서 있는 박형사를 다그쳤다.
"뭐해? 차에서 후레쉬랑 우산 챙기고 출발하자구."
"예?...정....정말로 가시게요?"
"그럼..내가 지금 장난치는 것 같애?
설마 박형사..진짜로 귀신 나타난다고 믿는건 아니겠지?"
"그..그게 아니라..."
"오메...참말로...형사님. 뭔 귀신 잡으러 가요?
그러지 말랑께요. 귀신이라도 들려오면 어쩔라고 그런다요?"
남자는 여전히 나의 행동을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사무실 밖으로 나서 차로 향했다.
내 등 뒤에서 여전히 그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메...형사질에 무당질까지 할랑갑네.
김양아...빨리 퇴근해 버려야 쓰겄다. 형사가 귀신들려 오면 뭔 험한 꼴 당할지 모르겄다."
이제 막 해가 기울었을 시간인데도 주위는 이미 먹구름과 쏟아지는 빗줄기가 만든 어둠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우산과 손전등을 꺼내 든 나는 잠시 먼 저편을 응시했다.
사무실 뒷편의 산 중턱을 돌아가면 그 곳이 있다.
간간히 번쩍이는 번갯불이 그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듯 조명을 밝혀주고 있었다.
여전히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형사에게 나는 말을 건넸다.
"정신 차려. 우리는 귀신을 만나러 가는게 아니라 증거물을 찾으러 가는거야."
-계속-
빗줄기와 바람이 제법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고 있음에도 무릎까지 빗물이 젖어드는 듯 했다.
조금씩 콘테이너 사무실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박형사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개 끌려오듯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시멘트로 다져진 콘크리트 길이 서서히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20여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으니 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로 신기할 뿐이었다.
서서히 그 길은 곧 맨 진흙밭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산중턱을 옆으로 돌아 사무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면에 그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번갯불이 번쩍일 때마다 그 심상치 않은 위용이 눈에 꽂혔다.
비닐 조각인지 천 조각인지 모를 기다란 그 무엇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 듯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아....김형사님. 왜 하필 지금 가야 합니까?"
빗줄기 속에서 박형사의 외침은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았다.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나!! 지금 밖에는 시간이 없어!!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와!!
어느새 땅바닥이 질퍽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우산을 쓴건지 안쓴건지 온 몸이 속부터 젖어가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 폐가 수미터 앞에 도착하였다.
현관 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를 집어 삼킬 듯이 그 집을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어둠이 굉장히 짙어졌음을 느낀 나는 손전등의 불을 밝혔다.
손전등이 밝히는 조명의 공간 속으로 시선이 모아지자 그 폐가는 더욱 더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것 같았다.
"들어가자."
나는 폐가의 현관통로로 발을 디뎠다.
그 집을 관통하는 세찬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와 박형사는 우산을 접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짜그르...."
작은 유리조각 밟히는 소리가 제일 먼저 우릴 반겼다.
"짜그르...짜그르..."
나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박형사를 여기까지 끌고왔지만, 지금은 박형사만큼이나 떨리고 긴장이 되었다.
나와 박형사는 손전등으로 이곳 저곳을 비추었다.
순간 손전등의 동그란 불빛에 거실에 걸린 영정사진이 비추어졌다.
백발의 할머니인데 그다지 평화로운 모습의 사진은 아니었다.
김태섭의 말이 맞다면 황승균이 가져온 사진이 바로 저것일 것이다.
"짜그르...짜그르..."
유리조각 밟히는 소리는 여전히 멈추질 않았다.
이 집안의 모든 유리제품이 다 박살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에 유리조각 천지였다.
가전제품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거미줄로 뒤덮힌 나무탁자, 철제 선반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김...김형사님 여기 좀 보세요."
나는 박형사가 말한 곳을 바라보았다.
먼지로 뒤덮혀 무슨 색인지 알아볼 수 없는 소파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먼지 위에 사람의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누가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더 나를 놀라게 한건 따로 있었다.
그 먼지 위에 난 자국이 너무나도 선명하다는 것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처럼.....
"누구지?"
싸늘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안방쪽으로 발걸음을 조금씩 옮겼다.
번쩍이는 번갯불과 함께 잠시 후 천둥소리가 멀리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계속 옮기려는 순간...
다시 한번 큰 번갯불이 집 안으로 파란색 섬광을 내뿜었다.
나는 제자리 서서 나무처럼 굳어버렸다.
박형사는 봤는지 모르지만, 지금 내 왼쪽 편에 누군가 서있는 모습이 그 찰나의 섬광과 함께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왼쪽빰이 얼음물에 젖는 듯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나는 잠시 몇 초간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시간이 끝나자 즉각적으로 그 곳에 손전등을 비추었다.
사각진 벽의 구석만 보일 뿐 그 형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오른손은 이미 권총의 손잡이에 가 있었다.
"김형사님...왜 그래요?"
"아...아냐...뭘 잘못 봤나봐."
내가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 동안 박형사가 뭔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김형사님, 창고 쪽에 뭐가 있는데요?"
나와 박형사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것을 살폈다.
녹이 슬어 두꺼운 갑옷을 입은 듯한 쇠기둥에 수십차례 무엇을 둘둘 감은 듯한 청테이프였다.
바닥에는 알 수 없는 영수증 같은 것들이 나뒹굴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뭐야..이거....신용카드 영수증이네. 이건 현금 영수증....액수도 몇천원짜리네..."
"누구건가요?"
"서명을 봐....황씨가 맞는것 같지?"
"예.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이런게 왜 여기에 떨어져 있죠?"
"주머니를 뒤진거야. 황승균을 여기에 묶어놓고...
바닥에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쓸려나간 걸로 보아 여기에 묶여있는 상태로 발버둥을 친 것 같애."
갑자기 으스스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아들....."
나는 순간 박형사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응? 방금 뭐라 그랬어?"
박형사는 뜬끔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예?"
"방금 뭐라 그랬냐구?"
"아..아무 말도 안했어요."
나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박형사는 모르는 듯 했지만 나에겐 정말 들린다.
지금도 그렇다.
"아들....."
"뭐..뭐라고?"
박형사는 정말 아무 것도 안들리는 걸까?
나의 독백에 박형사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나는 갑자기 알 수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김..김형사님..왜 그래요?"
"아들...."
중년 남자의 그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들...."
나는 쏜살같이 권총을 빼내 들어 보이지도 않는 그 누군가를 향해 겨누었다.
"누구야? 새꺄!!"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박형사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김형사님!! 미쳤어요? 총 내려요!!"
나는 빠른 속도로 사방을 손전등으로 비춰보며 그 소리 정체를 찾았다.
이유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졌다.
"김..김형사님 정신 차려요!!!"
박형사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박형사!! 정말 못 들었어? 장난치는거지?"
나는 박형사의 대답을 듣기 위해 그의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었다.
나보다도 박형사가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발 정신차리세요. 여기 오기 전에는 저더러 정신차리라고 하셨잖아요!!"
박형사는 장난을 치는게 아니었다.
순간 번개의 섬광이 내부에 쏟아졌다.
박형사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
그리고 섬광의 잔상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왜 가슴이 설레고 눈물이 멈추질 않는걸까?
나는 손전등을 들고 재빨리 집 안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비와 와서 그런지 여기저기 쾨쾨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누구야...어떤 새끼가 장난치는거야!!!"
나의 행동이 기이해 보였는지 박형사가 내 뒤를 좇았다.
집 안 구석구석을 미친 듯이 살폈지만 그 정체모를 형상과 소리는 어느 곳에도 있지 않았다.
나의 뒤를 급하게 좇던 박형사가 저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김형사님....귀신한테 홀린거예요? 귀신 없다면서요? 총 주세요."
"왜?"
"사고날 것 같아요. 주세요."
박형사 말대로 사고날 것 같았다.
그런데 손에 든 권총을 박형사에게 건내려는 순간 거실창 너머로 누군가의 어두운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번갯불이 그 곳을 밝히고 나서야 그것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미친듯이 그를 향해 뛰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질퍽거리는 땅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의 모습을 확인했는지 그 검은 형상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까이 근접해서야 나는 그가 우비를 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새꺄!!!"
마음 같아서는 권총의 방아쇠라도 당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형사 말대로 사고가 날지 몰랐다.
나는 들고 있던 권총을 주머니 깊이 박아 넣었다.
손이 가벼워지자 나의 뜀박질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야!! 이 강아지야!!? 거기 안서!!!"
천둥같은 나의 외침에 놀랐는지 그가 힐끔 뒤를 쳐다보는 시늉을 하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발을 헛딛은 것 같았다.
넘어진 그는 발목을 잡고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강아지..너 누구야!!!"
나는 넘어져 잇는 그의 가슴을 제압하고 머리를 덮고있는 우의를 벗겨냈다.
김태섭이었다.
"너...이 새끼....이럴 줄 알았어."
그가 저항을 하려하자 나는 그의 팔을 비틀었다.
"아아아악!!!!"
그의 비명소리에 고막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니가 황승균이 죽였지!!!"
쏟아지는 빗줄기가 화살처럼 얼굴을 때리자 태섭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헐떡거리며 벌리고 있는 입 속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말해 새꺄!!! 니가 죽였지? 뒤가 켕기니까 여기까지 감시하러 온 것 아냐!!!"
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어느새 주머니 깊숙히 박혀있던 권총이 그의 이마를 겨누고 있었다.
"김형사님!! 뭐하시는거예요!! 당장 총 치워요!!!"
뒤늦게 따라 온 박형사가 나를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박형사의 말을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안죽였어요....정말이예요!!"
"그럼 누가 죽였어? 왜 나한테 거짓말 했어? 새꺄!!!"
"거짓말 안했어요!! 정말이예요!!! 켁켁...."
"이 강아지 또 거짓말 하네...
좋아...너와 노영주가 황승균를 묶어놨던 곳으로 가면 떠오를거다.
일어나 새꺄!!"
나는 그의 목을 틀어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는 발을 접질렀는지 제대로 땅에 발을 딛지 못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를 죽은 개 끌고 가듯이 끌고 갔다.
그 폐가를 향해서....
박형사는 어찌해야 될 지를 모르며 내 주변을 서성거렸다.
박형사에게 도움이라도 요청하는지 태섭은 더 크게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제발 그만 해요!!! "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차렸군. 저 집에 들어가면 뭔가 떠오르겠지. 안 그래?"
"제..제발 살려주세요. 부탁이예요. 아아악!! 형사님. 저 집에 들어가면 안 돼요!!"
"그러니까 말해 새꺄!! 누가 황승균이 죽였어?"
나는 그의 목덜미를 더 세게 틀어 쥐었다.
"아아악!!! 사장님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단 말예요!!"
그제서야 나는 내 손에 끌려오던 태섭에게 시선을 보냈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사...사장님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해서....으허헝헝"
갑자기 그는 하염없이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쥐고 있던 그의 목덜미를 놓았다.
나는 누운 자세로 한참 동안 통곡을 멈추지 않고 있던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리고 자세를 낮춘 후 그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장은 다 알고 있었군."
"흑흑흑......"
"포커를 치던 그날 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계속-
"콜록.. 콜록.."
숨을 돌리는지 아니면 목구멍으로 빗물이 들어가서인지 모르게 태섭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박형사가 우산을 펴고 조용히 다가와 태섭과 나에게 쏟아지는 빗물을 막아 주었다.
"그날 다툼이 있었어요.
전에 말했듯이 승균이 형님이 돈을 제일 먼저 잃었어요. 콜록...
남은 둘이 치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판을 접으려고 했죠.
그런데 승균이 형님이 계속 돈을 꿔달라는 겁니다.
노름판에서 돈을 꿔주면 그냥 돌고 도는 거잖아요.
우리가 전문 타짜도 아니고...
안된다고 했죠.
그러자 갑자기 형님이 내 멱살을 잡더니 마구 윽박을 지르는 거예요.
지금 당장 내가 꿔준 천만원을 갚으라는 거예요.
옆에 있던 영주 형님이 말릴려고 했는데 소용없었어요.
어린 놈의 새끼가 도박에만 맛을 들여 돈 귀한 줄 모른다며 타박을 하는 거예요.
우리 셋 다 술에 취해 있었는데...무시하는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분노가 치밀더라구요.
한 대 치고 싶었죠. 그러나 꾹 참았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형님을 놀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한 겁니다.
그 폐가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면 100만원을 빌려주는게 아니라 그냥 주겠다고......
그 날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어요.
오늘처럼요.
약속이나 지키라면서 승균이 형님이 빗속을 뚫고 비틀거리며 그 폐가로 가는 겁니다.
저와 영주형님은 뒤를 좇았어요.
그 집 현관에 다다르자 승균이 형님이 정신이 들었는지 한 참을 머뭇거리는거예요.
역시나 예상했던대로였죠.
뒤따라 온 저희는 거기서 승균이 형님을 놀려댔죠.
그러자 승균이 형님이 열이 뻗치는지 갑자기 저의 멱살을 잡고 그 집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제가 반항하며 발버둥쳤는데 그 형님이 자꾸 제뺨을 때리고 욕을 하면서 그 집으로 저를 밀어 넣는 겁니다.
그리곤 그 영정 사진 앞에 저를 세우더니, 내가 가져가는 걸 똑바로 보라며 윽박을 질렀죠.
화가 났죠.
저는 100만원어치 값어치를 하려면 혼자 와야지 왜 끌고 왔냐면서 승균이 형님의 밀쳐냈습니다.
벽에 잠시 머리를 부딫힌 형님은 죽겠다는 엄살을 부리는거예요.
그리고는 저를 고소해서 콩밥을 먹이겠다는 겁니다.
이건 뭐..사람가지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 날 술을 먹지 말았어야 했어요.
저는 분에 못이겨 그 집 창고 쪽에 있는 쇠기둥에 형을 묶어놨죠.
묶어놓고 보니까 그 차용증이 생각나더라구요.
그래서 형님의 주머니와 지갑을 뒤졌는데 종이 쪼가리만 있고, 그 차용증은 없는 겁니다.
귀신하고 노름이나 하고 있으라며 형님을 버려놓고 그 집을 빠져나왔어오.
영주 형님이 말리긴 했지만, 영주 형님을 강제로 이끌고 저는 그 집을 내려왔어요.
그 땐 정말 겁만 주려고 했던 겁니다.
사무실에 있다보니가 조금씩 술이 깨더라구요.
그 때 승균이 형님이 조금 걱정되는 겁니다.
1시간 쯤 지나서 저와 영주 형님은 다시 그 집으로 올라갔어요.
혹시나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도 되더라구요.
현관에 다다르자 저희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승균이 형님이 나무토막처럼 거실에 떡하고 서 있는 겁니다.
창고 쪽에는 청테이프 같은 것부터 낫이나 호미같은 녹슨 연장이나 도구들이 가득했는데...
형님이 한 손에 낫 같은 걸 들고 서 있는 겁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아요.
우린 그 형님한테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그런데 형님이 조금 이상했어요.
후레쉬로 비친 얼굴은 웃고 있는거예요.
그러면서 저희에게 그러는 거예요.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왔냐고....
그러면서 등 뒤에 감쳐 둔 영정사진을 저희에게 건네는 겁니다.
소름이 쫘악 돋았어요.
다리가 후덜덜 떨리고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어요.
사진을 내밀며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사진을 받아들지 않으면 죽일 것 같았어요.
우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들었죠.
그런데 갑자기 형님이.....
저희에게 자기 딸을 소개시켜 주겠대요.
그러면서 안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승균이 형님 딸은 5년 전에 죽었거든요.
우린 본능적으로 형님이 귀신 들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린 형님이 안방으로 들어간 틈을 타서 미친 듯이 그 폐가를 도망쳐 나왔습니다.
정말 미친 듯이요."
태섭의 눈빛에는 거짓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 뒤로 형님이 조금 이상해졌어요.
생각보다 무척 밝아진 겁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술담배도 잘 안하고....특히 노름을 갑자기 끊었어요.
그런데 그건 잠시였어요.
시간이 지나자 형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한 동안 끊었던 술을 다시 했는데, 정말 깜작 놀랐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소주 대여섯병을 그 자리에서 나발 부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와 같이 있는 시간이 조금씩 줄었어요.
자꾸 어딘가로 사라지는 겁니다.
어떤 작업자는 승균이 형님이 한 밤 중에 그 폐가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하더라구요.
뭔가를 잔뜩 싸들고 말이죠.
심지어 그 폐가에서 승균이 형님이 한 밤중에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죠.
그 집을 부수기로 했어요.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 형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저희는 도망을 쳤고, 사장님과 다시 그 자리에 돌아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저희는 이상한 말을 듣게 됐어요."
"무슨 말?"
"사장님이 형님을 달래려고 가까이 가는데...........
형님이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며 사장님한테 말하는 거예요.
'이봐....홍선이 오랜만이네'이러면서요.
순간 사장님이 우리만큼이나 무척 당황해 하셨어요.
형님은 말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 때 자네 왜 그랬나? 왜 나를 죽도록 내버려 두었나' 이러잖아요.
더 놀랄 줄 알았는데 사장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해지더라구요.
오히려 미소까지 짓더라니까요.
그러더니 '형님, 그 땐 미안했소이다' 이러면서 화를 풀고 승균이 좀 돌려달라고 하더군요.
저와 영주 형님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 했습니다.
승균이 형님한테 승균이를 돌려달라고 하다니요.
사장님이 저 폐가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어떤 사람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사장님이 무서워졌어요."
"사장이 니들 입막음을 했겠군. 그렇지?"
"사장님이 우릴 협박하거나 윽박지르지는 않았어요.
단지 돈을 몇 푼 쥐어주면서 오늘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래서 그 뒤로 황승균이는 어떻게 된거야?"
"사장님이 저와 영주 형님에게 번갈아가면서 승균이 형님을 감시하라고 했어요.
특히 저 폐가에는 절대 가지 말도록 명령하셨죠.
그 날 일당을 톡톡히 챙겨 주시니까 저희들이야 아쉬울게 없었죠.
폐가로 가려는 승균이 형님과 몇 번의 몸싸움이 있기도 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어느 날 감시를 하고 있던 영주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승균이 형님이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계속 소주를 사가지고 온다는 겁니다.
사장님은 무엇을 눈치 챘는지 급하게 승균이 형님 집으로 달려갔어요.
저 또한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죠.
저희 셋이 승균이 형님 집에 들어섰을 때 이미 형님은 죽어 있었어요.
엄청나게 많은 양의 소주를 입에 들이부은 것 같더라구요."
"지금 하는 말 진짜야?"
"뭐든 조사해 보세요.
지문이 되었든, 족적이 되었든, CCTV가 되었든...
우리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형님은 이미 숨이 멎어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그 때 넋두리를 하시더라구요.
승균이를 최씨 형님이 데려갔다는 거예요.
밖으로 나온 저희는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했죠.
그런데 영주 형님이 승균이는 우리가 죽인거라며 탄식을 하는 거예요.
경찰이 오면 얘기하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요.
승균이 형님 차용증을 경찰이 보면 분명히 저를 의심할텐데, 거기다가 그 폐가에서 있었던 일까지 말해 버리면
용의자 1순위로 몰릴 것 같았어요.
놀란 저는 입막음을 하려고 했지만, 사장님은 오히려 담담해 하셨습니다.
신고해 봤자 바뀌는게 아무 것도 없을거라고......
살아있는 이승의 사람이 명을 끊은 게 아니니, 경찰이 믿어주지도 않을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영주 형님은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불안 했어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황승균이 집을 털었군."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허허허.."
태섭은 기가 차는지 눈물섞인 웃음을 쏟아냈다.
"그런데 그 영정 사진은 황승균이가 다시 갖다 논거야?"
"뭔 소리예요?
우린 그 사진을 어디다 집어 던졌는지도 기억도 안 날뿐더러,
그 뒤로 그 거실의 영정사진은 보이지도 않았어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훗...이 새끼 봐라...."
나는 상의 주머니를 뒤져 촉촉히 젖어가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인 후 길게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나는 태섭을 노려보며 아무 말없이 연신 담배를 빨았다.
빨고 내뱉고...다시 한번 빨고 내뱉고....
두려웠다.
뭔지 모를 두려움이 몰려왔다.
손이 떨려왔고, 정신이 혼미했다.
나의 이러한 소름끼치는 감정도 모른 채 박형사가 거들었다.
"김형사님, 폐가에서 영정사진 봤어요?"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쉬지 않고 담배만 빨았다.
간혹 터지는 푸른색 섬광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계속-
태섭을 멍하니 응시한 채 담배의 필터가 타들어갈 때까지 빨아댔다.
연기가 쓴 맛을 내자 나는 그제서야 흡입을 멈추었다.
"형..형사님..왜 그래요?"
태섭은 나를 보면서 두려움에 떠는 것 같았다.
"무섭게 왜 그래요? 형사님....."
나는 미동도 없이 담배 꽁초를 바닥에 떨구고는 주머니에 넣었던 총을 다시 꺼내 들었다.
순간 태섭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미..미쳤어요? 형사님!!!"
태섭은 내가 자기자신을 죽일거라 착각했나보다.
나는 꺼낸 총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뒤에 서 있는 박형사에게 내밀었다.
"박형사, 받아라."
"왜요? 아까 달라고 할때는 안 주고...."
"아무래도 니 말대로 사고가 날 것다."
나는 긴 한숨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녀석...박형사 니가 좀 데리고 내려와라."
돌아서 내려가려는 순간 나는 박형사에게 다시 한번 그것을 확인했다.
"박형사, 정말 거실에 걸려 있던 사진 못 봤어?"
"예. 사진 같은 건 없었잖아요."
"정말?"
"김형사님은 보셨어요?"
".............사람 소리도 못 듣고?"
"정말, 왜 그러세요?"
갑자기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너털웃음이 삐져나왔다.
"허허허..신발 미치겠네."
박형사와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섭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형...형사님. 그 영정사진 본 거죠? 그렇죠?
거기에 걸려 있지도 않았는데 본거죠?
그리고 사람 소리도 듣구요?
에이 신발...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당신도 귀신 들린거야!!"
"닥쳐!!? 새끼야!!"
나의 호통에 태섭이 찔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김형사님...정말이예요?"
박형사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며 산 중턱을 터벅터벅 걸어내려 갔다.
"김형사님, 우산 안 써요?"
박형사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그냥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걸었다.
그냥 뭔가 묻은 때를 씻고자 했다.
내 몸에 뭐가 붙었는지, 뭐가 묻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다 씻고 싶었다.
갑자기 온 몸에 밀려오는 이 무력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잡으러 여기까지 온 것일까?
그리고 그 폐가에서 나는 왜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
머리가 복잡하다.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오고 다리에 힘이 없다.
근래에 그다지 힘든 일도 없었는데....오늘따라 왜 이리 피곤한걸까?
눈 앞에 펼쳐진 화면이 시계방향으로 돌더니 이내 어둠 저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여보....이제 정신이 들어요?"
눈의 초점이 맞추어지자 아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여기가 어디야?"
"병원이예요."
"우리 딸은?"
"안 알렸어.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이야."
"내가 여기 왜 있는거지?"
"박형사님이 그러는데 어젯밤 당신이 근무 나갔다가 산에서 쓰러졌대요."
"아...그래?"
"병원에선 다행히 별 다른 이상은 없고 그냥 피로가 누적되서 그런거래."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지금 오후 2시야."
환자라고 생각하기엔 내 몸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정말로 달고 긴 잠을 잔 듯한 기분이었다.
"당신 일어나면 퇴원해도 된다던데..."
"그래? 그럼 지금 나가자구."
"참...그리고 밖에서 어떤 아저씨 분이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몇 시간째 기다려요."
"누군데?"
"중장비 사장이라고 하면 안다고 그러던데.."
"응..알았어. 그 양반 지금 어디있지?"
"병원 밖의 야외 휴게실에 있어요."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옷을 갈아 입었다.
퇴원수속을 밟은 후 나는 사장을 찾아 나섰다.
야외 휴게실에 나서자, 멀리서 벤치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뭔가를 음미하고 있는 듯한 남자가 보였다.
김홍선이었다.
내가 그의 앞까지 걸어오고 있음을 그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틀 간 어디 계셨습니까?"
나의 물음에 그가 조용히 눈을 떴다.
"오..퇴원하셨구랴. 한참을 기다렸는데..."
"제 발로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뭐 잘못한 것 있으신가요?"
"어이쿠...형사 양반. 퇴원 하자마자 업무 시작하는구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네.
그리고 형사 양반도 나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많지 않나?"
나는 그의 맞은 편 벤치에 조용히 앉았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직원이 둘이나 죽었는데, 그다지 슬프지 않으신가 봅니다."
"왜 슬프지 않겠나. 그냥 그 감정을 누르고 사는거지."
"이틀 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두 친구 장례식장 좀 들르고, 예전 아는 형님 산소에도 좀 들렀다네."
"20년 전에 죽은 최씨라는 사람 산소요?"
"어떻게 알고 있었네. 역시 형사들 무섭구만. 그래서 죄 짓고는 못사는건가봐."
"그 사람.....사장님이 죽였죠?"
나의 직설적인 물음에 그가 잠시 온화한 표정을 풀고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대답 대신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형사님..나이가 어떻게 되지?"
"마흔 둘이요."
"사람 죽여 봤나?"
오히려 그의 물음에 내가 긴장이 되었다.
그가 나의 내면을 뚫고 그 속을 파헤치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뇨."
"누가 당신에게 살인면허를 줄테니까 죽이고 다니라면 죽이겠나?"
"나하고 원수 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지요."
"그렇지. 보통은 다 그렇다네.
자네 눈빛을 보니 아주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겠구만.
나도 자네만큼이나, 아니 자네보다 더 착하고 순진했다네.
닭새끼 한 마리 모가지 치는 것도 힘들어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내가 군대에 갔어.
게다가 거기에 있을 때 월남전에 파병을 나갔다네.
돈도 많이 받고, 제대하면 국가유공자로 대우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
참전병들이 부산항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렇게 베트남으로 향했지.
나는 원래 군수지원병으로 들어갔는데 소총수들이 부족하니까 정글에 투입됐었어.
정글에 있는 기분은 그야말로 두려움의 연속이었어.
정말로 말벌 만한 모기도 있고, 주변엔 독사들이 득실댔지.
혹시나 베트콩들이 설치해 놓은 부비트랩이라도 건드릴까봐 몇 미터 전진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건 깊은 정글 어디선가 갑자기 쏟아져 나올듯한 베트콩들의 총알 세례였지.
그건 항상 아군의 공통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어.
첫교전이 있던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네.
적이 누군지 보지도 못했어.
쏘라니까 그냥 쏘는거야.
나는 참호에 숨어서 총을 난사했지.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밀지도 못하겠더라구.
나는 머리는 숙인 채 총만 밖에 내 놓고 그냥 갈긴거야.
총알 날아가는 소리...아니 총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 들어봤나?
예리하게 날이 선 장검을 휘두르는 소리와 비슷하다네.
참호 밖으로 목을 내밀면 누가 목을 베어갈 것 같은 생각이 드는거야.
나같은 소심쟁이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지.
적이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었어.
그냥 정글을 향해 갈기는거야.
월남전 때 총알 2만발에 한명이 죽었다는 말이 실감이 가더군.
어느 정도 소리에 적응이 되면 그제서야 머리를 조금씩 밖으로 내밀지.
조준을 하고 쏘는거야.
그러면 그 때부터 상대에게 희생자가 생기는거야.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참호 밖으로 본 장면은 다시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네.
정글의 수풀 사이로 베트콩들이 힐끔힐끔 보이는데, 베트콩들의 열에 서넛은 여자나 어린 아이들인거야.
난 그들을 향해 쏘고 있었고, 그들은 우리를 향해 쏘고 있었지.
차마 그들의 눈을 보고 쏠 수가 없었다네.
그런데 머뭇거림은 잠시야.
여기저기서 소대원들이 총탄을 맞고 피를 뿜으며 절규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눈이 돌아간다네.
그 땐 여자고 아이고 다 필요없지. 보이는대로 죽이는거야.
그냥 죽였어. 그들이 누가 되었든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한 번 피맛을 보니까 두려움이 사라지더라구.
한 번은 어느 마을을 점령했는데, 젊은 남자들은 없고 아이들과 여자들만 있는거야.
모두 전장에 끌려나갔다는거지.
그들은 우리에게 음식도 가져다 주고 호의를 베풀더라구.
그런데 그건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거였어.
우리 소대원들이 지나가는 틈을 타서 주변의 베트공들이 총알세례를 퍼붓는거야.
심지어 그 마을에 있던 여자들과 아이들이 모두 베트공이더라구.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겼는지 나는 총탄을 피해가며, 내 손으로 십수명의 베트공을 죽였지.
결과는 우리의 승리였어.
그런데 상처도 만만치 않았지.
부대원의 3분의 1이 전사했던거야."
내가 지금 왜 이얘기를 들어야 하는지 이유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의 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비통하고 원통했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부모얘기, 애인얘기, 아이들 얘기를 나누며 서로 울고 웃던 전우들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거야.
그 날 전투가 마지막 임무인 친구도 있었지. 곧 집에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는데..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 올랐지만, 그것보다는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칠 듯이 두려웠다네.
또다시 내 소심한 성격이 되살아난거야.
전쟁은 놀이가 아냐.
요즘 애들 게임처럼 지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모든 것이...."
그는 잠시 회심에 잠기는지 먼 산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나는 일생에 큰 변화를 가져올 만한 일을 겪게 되었지.
어느 날 사이공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한 노인을 만났어.
그 날 그 노인을 만난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몰고오게 될지 그땐 상상도 하지 못했지."
-계속-
"그 노인을 만나기 얼마전 나는 대규모 전투에 투입되었지.
우린 베트콩들에게 복수를 하기로 한거야.
베트콩의 본거지로 알려진 텅지앙을 공격하기로 한거지.
보병이 투입되기도 전에 그 곳에 수 백발의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네.
복수심에 불탄 우리는 그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자며, 거의 광기에 가까운 학살을 저질렀지.
부대원의 3분의 1이 민간인처럼 보이는 베트콩들에 살해당했는데 눈에 보이는게 있었겠나?
그 전투의 구호가 뭐였냐면...'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 였다네.
구호만 들어도 얼마나 잔인한 살육이 벌어질 것인지 알 수가 있었지.
1969년 말이었을 거야.
나는 거기서 정말로 악마가 되었다네."
그는 과거의 암울했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텅지앙에 도착했을 때, 이미 포탄 세례로 많은 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되어 있었지.
그 곳이 베트콩의 본거지라고 생각이 들자 살아 남아있는 건 모조리 죽였어.
하나도 남김없이.
어른, 아이, 남자, 여자, 젊은이, 노인....심지어 거기있는 가축들까지....
그 때는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냥 우리 동네를 위협하는 지저분하고 사나운 야생동물을 소탕하는 것처럼 느껴졌었지.
어렸을 적 이유없이 곤충같은 걸 죽여본 적 있지 않나?
꼬리도 잘라보고, 날개도 떼어보고, 불에 태워보기도 하고, 터뜨려보기도 하고....
뭐가 그렇게 궁금했는지 모르지만 그러면서 뭔가 쾌감을 느끼지 않았나?
그 날 텅지앙에서 우리도 별 반 다르지 않았다네.
총을 쏘아 죽이면 확인한다고 목을 잘라냈어.
총에 맞아 신음하는 사람의 복부에 대검을 꽂았지.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절룩거리며 도망가는 여자를 산 채로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어.
어떤 아이는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워 죽였어"
그의 서로 꽉 잡은 그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들 미쳤어.
왜 죽이는지 이유도 모르는 것 같았지.
오로지 죽이는게 목표였어.
머리는 광기로 사로 잡혀 있었고, 눈은 살기로 가득했지.
그 피비린내나는 학살이 무려 일주일 넘게 지속되었다네.
마을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 몇 그룹으로 나눈 뒤 기관총으로 몰살시키기도 했고,
한 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우기도 했다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서 불에 던져넣기도 하고,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네.
천명이 넘게 죽었다네.
그 날 전투가 끝나면 옷이 땀에 젖어야 했지만, 우리는 온통 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었지.?
너무 많이 죽였어.
너무나도 많이...그것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만큼 잔혹하게...
지옥은 멀리 있는게 아니었어.
그 당시 텅지앙은 지옥이었고, 우리는 지옥에 내려온 악마였지."
그의 눈이 촉촉히 젖어오는 듯 보였다.
"부대에 복귀했을 대 상부에선 우리의 용맹함을 칭찬하고 훈장을 수여했지.
그러나 그 때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던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었어.
우리의 행동은 용맹함과는 거리가 멀었지.
그러던 어느 날........
그 지역을 남김없이 쓸어버린 후 며칠 지나 부대 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 거야.
실제론 그 지역에 실제 베트콩이라 부르는 베트남민족해방전선 대원들은 별로 없었다는거야.
게다가 괴기한 소문까지 나돌았는데, 집으로 돌아온 대원들이 죽은 가족들의 피를 모아 나누어 마셨다더군.
죽어서까지 우리를 좇아가 죽일 것을 다짐했다는거야.
퍼뜨리면 처벌을 할것이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소문은 부대 전체에 삽시간에 퍼져 버렸어.
부대에 미묘한 기운이 흘렀지.
우리보다 더 한 광기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피의 보복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두려웠던거야.
사실 미군들도 국내여론 때문에 서서히 베트남에서 발을 빼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거든.
토사구팽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네.
전쟁은 그들이 일으켜 놓고 우릴 부려먹은 다음, 뒤치닥거리는 우리가 하게 된 꼴이지.
다시 한번 우리의 용맹함을 보여주자고 모두들 자신있게 외쳤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었지.
자신들이 죽인 것은 무장한 베트콩이 아닌 베트콩 지역의 양민들이었다고.
정신질환을 앓는 병사들도 생겼어.
한 밤중에 자살소동을 벌이는 친구도 있었고, 실제로 자살한 친구도 있었다네.
그들의 핏물이 빠지지 않는다면서 피부가 벗겨져 나가도록 수세미로 맨살을 미는 병사도 있었지.
서로 입을 다물고는 있었지만 이미 부대원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네.
그 때 부대에서 생각해 낸 것이 연예인 위문 공연이었다네.
사이공에서 열렸었는데, 많은 군인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했지.
어쩌면 그 중의 어떤 이에겐 최후의 만찬이 될 수도 있는 축제였지.
공연은 끝났어.
많은 이들이 여자 가수의 잘 빠진 몸매와 풍만한 가슴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걱정부터 앞섰지.
곧 텅지앙에 인접한 퀴년시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거든.
해가 너울너울 기울 쯤 부대로 복귀하는 때였어.
부대 차량이 늦어져서 우린 잠시 시내를 둘러보고 있었다네.
그 때 어느 허름한 판자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온갖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을 내놓고 파는 가게였어.
산더미 같은 물건 속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백발을 어깨까지 내린 노인이 하얀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라구.
나도 그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같이 길을 걷던 부대원들 틈에서 이탈하여 이끌리 듯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네.
가까이 가서야 나는 그가 백내장 환자임을 알게 되었지.
하얀 눈동자의 초점을 나에게 맞추더니 그가 묻더군.
따이한이냐고.
북적거리는 그 사람들 틈에서 그가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나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이해할 수가 없더라구.
내가 맞다고 했더니, 그 노인은 몇 개 남지도 않은 이빨을 드러내 미소를 보내며 무슨 부적 같은 것을 내게 건네더라구.
자신은 사람의 목숨을 움직이는 흑마술을 알고 있다는거야.
그러면서 이 부적과 자신이 가르쳐주는 주문을 외우면 죽음을 피해갈 수 있다고 했지.
그것을 나에게 사라고 권유하는거야.
나는 손을 가로 저으면서 그런게 어딨냐고 거절했지.
그런데 내가 돌아서려는 순간 그 노인에 내게 충격적인 말을 하는거야.
내가 퀴년시에서 죽을 운명이라는거야.
난 심장이 멎는 듯 했네.
우리의 극비사항을 알고 있다는 건 둘째치고, 그의 음성이 너무나도 다부지고 매서웠지.
나는 다시 노인을 향해 돌아서서 물었지.
왜 그것을 하필 나에게 파냐고.
그랬더니 그 노인은 자신의 흑마술이 가장 잘 통할 것 같은 사람을 찾았다고 하더군.
두려움과 공포가 몸에 배어있으며,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사람이라는거야.
자신은 느낄 수 있다는거야.
노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지.
난 사겠다고 했어.
악마의 힘처럼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어.
나는 노인을 따라 들어가 좁은 오두막 같은 집으로 안내되었다네.
오두막에는 무슨 알 수없는 연기 같은 걸로 가득했지.
비릿한 무슨 냄새 같은 것도 나는 것 같았고.
나를 자리엔 앉힌 노인은 나뭇가지 같은 걸로 만든 채를 들고 나를 이리저리 쓸더라구.
나는 그 노인에게 여러가지 주술의식을 받았지.
주술의식이 끝날 쯤 노인이 나에게 어떤 주문을 반복해서 알려 주었지.
그러면서 위험이 닥쳤을 때 이 부적을 꺼내 주문을 외우라고 하더군.
내가 그 오두막을 나가려고 하자, 노인이 다시 나를 불렀어.
'이보게 따이한...세상엔 공짜가 없다네.'이러더라구.
나는 그 말이 돈을 달라는 뜻인 줄 알고 주머니에 있던 돈 몇 푼을 그에게 내밀었지.
그러자 그 노인은 돈을 거절하며, 그 몇 개 안 남은 이빨을 다시 드러내더니......
앞으로 빚은 천천히 갚게 될거라는 말을 하더군.
돌아오는 길에 정신을 차리고 그 노인을 생각해보니 너무 묘한 기분이 들더군,
내가 무슨 짓을 했나하는 생각도 들고...
그 후 한 달 뒤 우리는 다시 가까운 퀴년시 외곽 전투에 참가했지.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네.
그 날 따라 우리는 의외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앞으로 전진했지.
이상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전의 우리의 명성 때문에 그들이 우리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려 한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그 건 오산이었어. 함정이었어.
베트공들의 게릴라 전술이었던거야.
그들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 나를 포함한 중대원들이 고립되어 버렸다네.
장대비가 쏟아지는 정글 속에서 전진을 한게 큰 실수였어.
총탄은 거의 떨어져 가는데 사방에 수백이 될지, 수천이 될지 모르는 베트공이 깔려 있었다네.
통신은 두절되었고, 지원군은 없었다네.
어두운 정글 속에서 원숭이 울음소리처럼 끽끽대며 조금씩 다가오는 그들에게 우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
그러나 하나둘씩 죽어갔어.
온몸에 총탄구멍이 난 채 사지가 너덜거리며 죽어가는 동료를 보면서 나는 광기에 가까운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지.
3개 소대는 이미 전멸되어 시체는 이미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우리 소대는 본대와 연락이 두절된 채
그들에게 완전 포위 당해 버렸지.
채 십분이 지나기도 전에 나는 수많은 시체더미에서 오직 홀로 살아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네.
짙은 먹구름 아래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하는거야.
몇 시간 동안 전투를 했는지도 모르게 벌써 밤으로 접어드는거야.
나는 죽은 동료의 시체로 몸을 덮었지.
시체에서 쏟아지는 피가 빗물과 섞여 내 얼굴 뒤덮었다네.
그것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문제가 될 상황이 아니었어.
여기저기서 가까이 접근하는? 베트공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거든....
확인 사살을 하는지 중간중간 총소리가 끊이질 않았지.
목숨을 구걸하고 싶었다네.
어떡해서든...
베트콩들은 나의 구걸을 받아주지 않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때 나는 그 노인이 준 그 부적을 꺼내고는 주문을 읊었다네.
미친 듯이....숨을 죽여가며 최대한 작은 소리로..."
그들이 다가왔어.
여기저기서 칼로 찌르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지.
내 배 위에 얹어진 시체를 밟고 지나가는 베트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소리라도 낼 까봐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다네.
혹시나 탄로 날까봐 숨쉬는 것조차 멈추려 했지.
그 순간만큼은 차라리 고통없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어.
베트남 말이 아니었어.
괴물 소리처럼 꾸엑구엑 대는거야.
나는 그들의 불쾌한 소리가 너무나도 소름끼쳤지.
그래서 나는 내 몸 위에 올려진 시체들 틈 사이로 그들을 올려다 봤지.
그런데 어둑어둑한 배경 사이로, 부릅 뜬 내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목격되었다네.
시체를 밟고 지나가는 그들은 베트공이 아니었어."
"예?"
"아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네.
그렇다고 아군도 아니었어.
천천히 걸으면서 여기저기를 대검 같은 것으로 쑤셔보더라구.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어.
대검으로 쑤시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긴 손가락에 자라난 맹수의 발톱같은 손톱이었던거야.
꾸엑꾸엑거리며 계속 여지저기를 훑고 다니는거야.
그런데 그 순간 내 위를 지나던 그 정체 모를 병사와 눈이 마주친거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 병사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한번 입을 틀어막았지.
붉은색 눈을 하고, 송곳니가 턱까지 내려와 있었네.
얼굴에 수십차례 칼질을 해 놓은 것처럼 피부는 너덜거렸고, 입에서는 핏물이 토하듯이 쏟아져 나왔지.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병사가 나의 존재를 확인했는지.....
갑자기 괴물같은 그 손을 들어올리더니 나를 향해 꽂았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도 안났다네.
여기 저기서 한국말이 들리고 나서야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걸 알 수 있었다네.
노인의 말대로 나는 그 부적과 주문으로 죽음을 피해갔지.
지옥의 전장에서 살아나온 병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만큼 긴 잠을 자고 난 기분처럼 왠지 모를 기운이 몸에서 솟아나더라구.
지난 모든 일들이 한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네.
얼마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네.
한국으로 가기 전에 꼭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지.
그 노인의 가게 말야.
사이공에 가서 다시 그 집을 찾아 나섰다네
그런데 노인은 없었어.
가게 주인에게 수차례 노인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그런 사람은 여기에 없다는거야.
나는 가게 뒤로 돌아가 그 오두막을 찾았지.
생선이나 고깃국을 끓이는 야외 취사 장소였어.
오두막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
그 노인은 망령이었어."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죽은 자에게 목숨을 구걸한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 노인의 소름끼치는 말이 떠오르더군.
빚을 천천히 갚게 될거라는 그말....."
-계속-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네.
마을 사람은 나를 반기는 듯 했지만 경계의 눈빛이 역력했지.
매일같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처절하게 생존 투쟁을 벌이다 온 나에겐 논밭일이나 하며 그렇게 늙어가는
마을 사람들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보였지.
서로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깔깔대며 울고 웃고 하는 것들이 너무나 혐오스럽게 보였다네.
다들 바보같아 보였어.
놀려주고 싶었어.
나는 겁을 주었지.
전장에 있었던 얘기를 하며, 공포감을 심어주고 두려움을 불어 넣었지.
그럴 때마다 그들이 표정이 굳어졌어.
그들의 그런 모습에 나는 너무나도 짜릿하고 기분이 좋았다네.
매일 같이 사람 죽인 손으로 논밭의 소일거리를 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네.
국가에서 나온 돈으로 연명한다지만 진이 빠지도록 뭔가에 미쳐보고 싶었다네.
미칠 것 같았지.
밤마다 괴물같은 공허함이 나를 괴롭혔다네.
온갖 잡 생각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지.
미친 사람처럼 컴컴한 방안에서 전쟁놀이를 했지.
사람 목을 다는 시늉도 하고, 총에 맞에 고통스러워하는 시늉도 하고....
꿈만 꾸면 나는 그 전장에 서있는거야.
어느 날 미국이 패전하여 베트남에서 철수한다는 뉴스가 뜨더군.
실로 그 공허함은 이루 말할수도 없었다네.
도대체 그 수많은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은 살아남은 자를 황폐화시켜...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가 마를 정도로 나를 괴롭히는 것이 나타났다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퀴년시 전투에서 보았던 그 악마의 병사들이 꿈속에 나타나는거야.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삭신이 저려왔다네.
잊혀졌던 공포가 다시 몰려왔어.
괴성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났지.
그런데 그 꿈을 꾸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거야.
나중엔 삼일에 한번 꼴로 가위에 눌렸어.
그 때 그 날처럼 나는 죽은 동료의 시체를 뒤덮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지.
그 때마다 그들은 어김없이 나를 나타나 내 가슴에 그 기다란 쇠꼬챙이 같은 손톱을 내 가슴에 박았다네.
제대로 잠을 이뤄본 적이 없었다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노인 준 부적을 보며 주문을 외웠지.
효과는 없었어.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어.
어떤 날은 밤길을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못보는 형상들이 돌아다니는거야.
누구였겠나?"
"그 악마의 형상 말입니까?"
"그래. 그 전장에 나타났던 그 모습 그대로 그 형상이 꾸엑꾸엑거리며 나를 찾고 있는 듯 보였어.
나도 모르게 주문을 웅얼거리며 읊었지.
그러기를 십년이 넘었다네.
고통이 끊이질 않았어.
그제서야 그 노인이 바라던게 뭔지 알 것 같았지.
내 목숨을 가져가려 한거야.
그 부적과 주문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거야.
나는 그 전장에서 시체들에 쌓여 기절했을 뿐이고, 나는 그렇게 살아남에 구조된거였지.
그 전장에서 애초부터 죽을 운명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나는 그날 그 노인에게 남은 목숨을 빼앗겼는지도 몰라.
부적을 찢어버렸다네.
어느 날 도시 사람들이 찾아오더라구.
개발 문제로 이장을 설득하지 못하니까 가장 건달같이 보이는 나에게 찾아왔지.
한 명당 20만원씩 챙겨주겠다며, 사람들의 동의서를 받아오라는거야.
나는 흔쾌히 승락했지.
깡패처럼 돌아다니면서 협박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았어.
그래서 마음이 맞는 몇 녀석과 청년회를 만들었지.
청년회 회의가 있다, 청년회에서 어르신들을 위해 대접을 한다, 이러면서 온갖 구실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동의서를 요구했지.
물론 일일이 찾아다니기도 했고...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해보고...
그런데 최씨 형님이 끝까지 거부를 하는거야."
"그래서 죽이셨나요?"
나의 물음에 그는 갑자기 껄껄 웃었다.
"이보게 형사 양반. 나도 사람이라네.
아무리 내 이 두손에 수십명의 피를 묻혔다고는 하나,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겠나?"
"사람 하나쯤은 죽이는건 일도 아니었을텐데요."
"그렇지. 사람 하나 죽이는건 눈 하나 깜빡할 내가 아니었지.
그러나 이 곳은 전장이 아니지 않나?
나의 협박에 최씨 형님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네.
그런데도 도장을 찍는 건 끝까지 거부를 하더라구.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날 밤, 형님과 술 한잔을 했지.
물론 술안주는 그 동의서 얘기였다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끝났지.
사실 마을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건 아냐.
그러나 나는 죽이지 않았다네.
술에 흠뻑 취해 마을로 돌아오는 길이었지.
나는 앞서 걸었고, 형님은 나를 뒤따르고 있었어.
개천을 하나 건너는데, 갑자기 형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거야.
나는 아무 생각없이 뒤돌아 보았는데 너무나도 무서운 광경이 벌어졌다네.
형님이 개천에 엎어져 있고,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엎어져 있는 형님의 뒷머리를 손으로 잡고는
연신 개천 사이에 박혀있는 바위덩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거야.
그 악마의 병사였다네.
형님이 손을 뻗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네.
그들이 한둘이 아니었어.
도망을 쳤지.
벗어나기 위해서.
그러나 그건 곧 또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네.
이젠 형님을 죽은 개 끌고 다니듯이 돌아다니는 그들을 보게 됬다네.
부적을 찢었을 때 그 용기는 온데간데 없고, 바보처럼 나는 다시 그 주문을 미친듯이 외웠지.
날이 밝을 때까지 미친 듯이....
어느 날인가 문득 생의 끄트머리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빚을 갚기로 했어.
난 노인이 원하는 것을 해주기로 결심했지."
"뭘 말입니까?"
"내 목숨 말일세.
방안에 줄을 묶고 자살을 하기고 결심했지.
천장에 줄을 매달았네.
지난 십수년 간의 굴곡진 삶을 이젠 마감하고 싶었지.
그런데 의자 위에 올라서 줄을 목에 감고 막 몸을 던지려는 순간....
그 노인이 내 앞에 나타나더군.
거의 다 잊어먹은 월남 말인데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네.
그가 나에게 말했지.
빚을 언제 갚을거냐고....
나는 조용히 말했다네.
지금 갚겠다고...
그러자 그가 다시 나에게 말했어.
빚을 갚지도 않은 채 떠나지 말라고...
이해할 수가 없었어.
도대체 그 빚이라는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네.
그에게 물었지.
도대체 당신 누구냐고.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하더군.
자신은 텅지앙의 망령이라고.....
그는 잠시 합장을 하듯 두손을 모으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텅지앙의 망령...
텅지앙의 망령...
텅지앙의 망령...
수십번을 머리에 되뇌고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네.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이 무엇인지...."
나는 눈빛으로 그에게 답을 요구했다.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네."
"용서요?"
"그래...용서.
그들에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지.
그는 많은 것을 바랬던 것이 아니었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마을을 떠나 십여년 전의 당시 부대원들을 찾아다녔지.
우리 중대는 전멸했기 때문에 다른 중대 부대원들을 찾아다녔다네.
몇몇은 나와 거의 비슷하게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더군.
나는 생각을 같이하는 그들에게 나의 얘기를 하고, 나의 계획을 말했지.
그들도 흔쾌히 승락하더군.
모두가 동의한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돈을 모아 베트남으로 향했다네.
당시 미수교국이었기 때문에 입국은 쉽지가 않았지.
그런데 당시 큰 사업을 하고 있던 친구가 있었는데, 태국을 통해 베트남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주더군.
우리는 십여년만에 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인 텅지앙에 발을 디뎠다네.
우리 손에 죽었던 수 많이 원혼들이 당장이라도 무덤을 박차고 일어날 것 만 같았지.
거기서 우리는 위령제를 지냈다네.
그리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지.
위령제를 지내는 동안 너나나나 할 것 없이 눈물을 쏟아냈지.
십년 넘게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맺혀있는 응어리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네.
모든 것은 마음 속에 있었어.
증오, 분노, 고통, 죄책감, 그리고 악령들....그 노인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그 위령제가 끝난 이후로 그 악마같은 병사들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네.
그제서야 그 악마같은 병사들이 누구였지는 나는 알게 되었지.
왜 그들이 아군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도...."
나는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텅지앙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한국군이었군요."
"그렇다네.
그들에 눈에 비친 우리는 악마였지.
그 노인은 나에게 그들의 고통을 보여주려고 했었던거야.
그리고 나에게 바란 건 나의 피와 목숨이 아니었지.
용서를 바라는 나의 진실된 마음이었던거야."
그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중장비 일을 시작했어.
몇 년간 알뜰하게 돈을 모아 내 사업을 하려고 계획했다네.
돈이 좀 모아지면서 자리를 알아보고 다녔지.
그 때 나의 옛 고향이 떠오르더군.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난 돌아가고 싶었다네.
마을에 들어서자 육중하게 들어선 고가도로와 폐가가 되버린 형님 집이 눈에 들어왔지.
남들은 흉가라고 말했지만, 나에겐 나의 무책임으로 죽어간 형님의 집이었다네.
나는 사업터와 그 형님 집을 사들였지.
그리고 사업을 시작했다네.
그런데 얼마 전 황승균이 이 친구가 그 집에서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이 있었지."
"노영주와 김태섭이 그 집을 부수려던 때 말이죠?"
"승균이를 찾으러 그 집에 갔을 때 난 정말 깜짝 놀랐다네.
승균이 이 친구 입에서 최씨 형님 목소리가 흘러 나오는게 아닌가?
본래 흉가라고 불리는데는 가지 않는게 좋아.
나 같이 생사의 경계를 들락거렸던 사람은 별로 상관이 없겠지만 귀신은 그 사람의 나약한 곳을 건드려 기를 빼앗아 가거든.
승균이 이 친구가 5년 전에 딸 애를 잃고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네.
얼마나 보고 싶었겠나.
정말로 승균이에게 빙의된 그것이 최씨 형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혼령은 승균이의 그 점을 이용한 거라네.
귀신은 살아있는 자의 나약한 점을 알고 있거든.
내가 텅지앙의 망령에 시달렸던 것도 그들이 나의 가슴 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죄책감을 이용했기 때문이지.
그 친구가 그 집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얘기를 듣고 불길한 생각이 들더라구.
딸애를 보기 위해 목숨도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거야.
나는 영주와 태섭이 이 친구들을 시켜서 그 집에 들락거리는 걸 막았다네.
수시로 감시도 하게 만들고.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지.
왜 그렇게 엄청난 술을 마시고 죽었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네.
최씨 형님이 죽은 딸내미를 보여주는 댓가로 술을 바랬는지도 몰라."
나는 조용히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물었다.
"사장님. 정말로 그게 귀신의 짓이라고 생각하시는겁니까?"
"아니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두 세병의 술도 힘들어하는 친구가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는게 가능하다고 보나?"
"훗...사장님. 그렇게 따지면 제가 형사질하면서 본 죽은 사람들의 반은 다 귀신 짓이겠수다.
사람이 죽은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겁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그렇게 설명하려고 해도 안되는게 있지 않나?
입원한 태섭이한테 물어보니 자네도 최씨 형님 집에 들어갔다더군."
나는 잠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그가 보기에 거만하다고 느낄만한 자세로 다리를 꼰 채 담배를 피워댔다.
"소동이 좀 있었다고 하더만...."
"그건 착시일 수도 있고, 환청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는 잠시 내 눈빛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예? 그 건 갑자기 왜 묻는 겁니까?"
"그냥 대답해 보게."
"그야..제가 제일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제 딸이죠."
"아니...말고...자네 깊은 곳에 있는 다른 무언가 말일세.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질 않나?
사무치게 그리운 누군가 말일세."
"무슨 말씀이예요?"
"자네는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난 걸세..."
사장의 말에 나는 갑자기 손이 떨려 왔다.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조차 내뱉지 못했다.
숨이 막혀왔다.
"그게 누구인가?"
"......"
내가 왜 그 집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내가 들었던 그 정체 모를 소리는 어렸을 적 마지막으로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항상 내 이름보다는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셨다.
"누구인지 떠올랐구만."
"아버지요..."
"그게 자네의 그리움의 흔적이었군. 사고로 돌아가셨나?"
"......"
기를 쓰고 애를 썻지만 나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주 힘든 어린 시기를 보냈었겠구만.
이를 악물고 살아가게.
그 목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라네.
자네 아버지가 자네를 보고 싶어해서 부른 것이 아니야.
진정 자네 아버지였다면 자네를 거기서 찾았겠는가?
귀신의 장난이지.
나약한 자는 빙의에 잘 걸린다고 하지 않나?
나약한 자가 무엇인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자가 내세를 바라는 거라네.
자네의 귀여운 딸에게 똑같은 아픔을 주고 싶진 않지 않은가?"
삶이 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다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지.
아버지를 보기 위해 다시 그 곳으로 가서는 안되네. 견뎌야 되네.
승균이 그 친구는 그것을 견뎌내지 못했어.
미안하지만 나는 늙어 죽는 그 순간까지 최씨 형님 집을 간직하고 있을거라네.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형님이 그 곳에서 계속 장사하는 걸 지켜봐 줘야 하지 않은가?"
눈물 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아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런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가?어깨를 토닥거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어린 아이였다.
내가 사장을 다시 만난 건 인천공항이었다.
그는 옛 부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출구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호라....자네가 여기까지 왠 일인가?"
"베트남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매년 우리 회원들이 위령제를 지내는데 모레가 그 날이라네."
"네. 직원들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말씀 감사했습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허허...그 말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나?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은 걸.
잊지 말게. 형사 양반
모든 것은 항상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는 걸.....
그리고 열심히 살게나."
가벼운 손짓으로 인사를 마친 그는 출국장을 빠져 나갔다.
얼마 후 굉음과 함께 그가 탄 비행기가 공항을 빠져 나갔다.
멀리 시야에서 그 비행기가 멀어져 가고 있을 쯤 박형사에게 전화가 왔다.
"김형사님. 부탁하신 대로 20년 전 최씨 사건 조사해 봤는데요.
당시 부검의 소견으로는 타살의 흔적이 좀 보인다라고 기록돼 있던데요?
증거가 부족해서 결국 미결처리되었구요."
"그래?"
"아무래도 그 김사장이란 사람이...."
"수고했어. 어차피 공소시효도 끝난 사건이야."
"그런데 왜 그걸 조사하라고 시키셨어요? 바빠 죽겠는데.."
"이봐, 박형사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지.
진정 죄책감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용서를 구하고 죄를 씻고자 노력해야 하겠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냐...아무 것도.....참...박형사 오늘 저녁에 술 한잔 할까?"
"갑자기 왜요?"
"그 폐가 갔다온 뒤로 갑자기 술이 엄청 땡기네. 오늘 죽도록 한번 마셔볼까?"
"예? 김형사님, 진짜 왜 그래요? 정말 귀신 들린 거예요?"
"하하하...농담이야 농담. 그냥 간단히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휴....사람 좀 놀래키지 말아요. 그럼 이따 경찰서에서 뵙죠."
간만에 맑은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습도가 높긴 했지만 차창으로 스며 들어오는 공기가 여간 상쾌하지 않았다.
-끝-
** 시즌2에서 '447번지의 비밀'의 진정한 공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지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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