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 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작은 이름 하나라도 / 이기철
여행은 나의 큰 스승...
불로동 고분군을 걸으며...나는 겸허해 진다.
주검은 사랑도, 야망도, 명예도 부(富)도 묻어버린다.
대구시 불로동과 입석동 구릉 서남면에 있는 수십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
이 무덤들은 대개 4∼5세기경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무덤으로 추측한다.
불로동 무덤들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
무덤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깬돌로 지은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가늘고 긴 점에서 낙동강 중류 지역 계통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질이 신라와 유사하여 이 지역 세력의 복잡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단다.
불로동 고분공원: 금호강이 흘러가는 동구 불로동 일대 야산에 200여기의 고분군이 있다.이 고분들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262호로 지정되었다. 이미 일제 강점기 때 이 고분들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경북 달성군 해안면에 속하여 해안면 고분군이라 불렀다. 이곳 불로동 고분들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옛날 이 지역을 다스렸던 토착지배세력의 집단묘지로 추정된다. 불로동 고분군은 불로동과 입석동의 구릉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1938년 11월 입석동 쪽 고분 2기를 조사하여 해안면 고분으로 불려졌다. 그 뒤 1963년 12월과 이듬해 1월 두 차례에 걸쳐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불로동 고분 2기를 조사한 뒤 입석동 고분을 포함하여 대구 불로동 고분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봉토의 지름은 1∼28m 내외이고 높이는 4∼7m정도이다. 전체적으로 불로동 고분군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과 봉토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할석으로 축조된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세장(細長)한 점 등이 구암동과 내당동 고분군과 유사하여, 같은 계열임을 짐작케 한다. 전체 고분군의 축조시기는 대략 5∼6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불로동 고분군은 사적 제262호로 규모는 94,095평이다. 이 고분군은 다른 고분군보다 외형적인 형태를 잘 갖추고 있어 이를 통해 겉모양이나 고대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대구분지의 옛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며 경부고속도로 상에서 볼 수 있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불로동고분공원은 이 고분 주위에 조성된 시민들의 휴식공간이다.[자료 발췌]
너와 나는/조병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 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 버린 카렌다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샨데리아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폐허가 되는 사랑.
존재가 되는 허무.
족보가 되는 이별.
무덤이 되는 인연.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곳...
북망산은 안내도도 없다는데
참 도식적인 죽음처럼 찍힌 푸른 낙관.
무덤 사이에서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청춘의 불빛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건지러 자주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우물의 얼음 속으로 내려갈수록 피는 뜨거워졌다.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얼음 속의 피는 신성함의 꽃다발을 엮을 정신의 꽃씨들로 실핏줄과 같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떠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 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 상 차려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고 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詩/박형준
백의와 함께
황토 속으로 돌아간 조상들도
왕항문상의 꿈을 꾸었겠지?
두루뭉술하다.
범박한 허한고와(虛閑高臥).
주검의 역사?
무슨 의마가 있는가?
자연으로의 귀환일 뿐인데!
구부정한 소나무가 지키는 풍경 속에서
저 잡초의 생명력이
봉분을 감싸며...
생을 찬미한다.
이렇게 불경스런운 공존을 신(神)은 왜?
소요유하다...
일제시대,
현해탄에서 한 사내와 자연으로 돌아간
여가수를 생각했다.
그 충동적 죽음을 동경했던
사춘기 소년이 읊조리던 청승을 떠올렸다...
사의 찬미- 윤심덕조로 /천양희
죽고 싶다 하면서 살고 싶은 날
친구에게 전화걸어
인생이 뭐길래 이렇게 힘드냐고 하면
그것도 모르냐며
인생이란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것이라고
「사(死)의 찬미」한 소절 불러젖힌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무얼 찾으려고 찾아내려고
바닥없는 바다에 뛰어내렸을까
자살도 요절도 못한 내가 시인이냐 하면
죽어도 같이 죽는 것이 부럽다고 하면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아니냐고 친구는 또 그런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고
내가 한 소절 끝내면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좋은 것이라고
친구는 또 그런다
죽음을 찬미하며 죽어간
윤심덕의 「사의 찬미」
내가 찬미하는 나의 십팔번
종생기(終生記) / 조용미
장명등(長明燈) 불빛을 오래 밝혀다오 자줏빛 남빛 깃을 단 소렴금 대렴금으로 나를 꽁꽁 묶어다오 고복(皐復)* 일랑 하지 말아다오
살아도 살아도 고통은 새록새록 새로웠다 나뭇잎 말라비틀어져도 치욕은 파릇파릇 잎을 틔웠다 이제 이른 봄에 돋아나는 새싹 같은 그것들을 데리고 간다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도록 마음이 타올랐다 꺼지고 또 타오르고 그렇게 쌓인 재들이 수북하게 가슴을 메웠던 내 사랑은
살아서 단 한 번도 나의 것이지 않았던 죽음은, 기억하지 말아다오 살아서 단 한 번도 나의 것일 수 없었던 모든 그리운 것들의 거처를
皐復* 고복 : 초혼하고 발상하는 의식 . 사람이 죽은 5-6시간 뒤 그가 입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거나, 마당에 서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 손으로 허리를 잡은 후 , 북족을 바라보고 [누구가 몇 월 며칟 날 몇 시에 별세(別世) ]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을 시체 위에 덮는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문학과지성사, 2004]
[대구여행]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 불로동 고분군을 걸으며...
[대구여행]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 불로동 고분군을 걸으며...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 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작은 이름 하나라도 / 이기철
여행은 나의 큰 스승...
불로동 고분군을 걸으며...나는 겸허해 진다.
주검은 사랑도, 야망도, 명예도 부(富)도 묻어버린다.
대구시 불로동과 입석동 구릉 서남면에 있는 수십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
이 무덤들은 대개 4∼5세기경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무덤으로 추측한다.
불로동 무덤들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
무덤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깬돌로 지은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가늘고 긴 점에서 낙동강 중류 지역 계통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질이 신라와 유사하여 이 지역 세력의 복잡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단다.
불로동 고분공원: 금호강이 흘러가는 동구 불로동 일대 야산에 200여기의 고분군이 있다.이 고분들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262호로 지정되었다. 이미 일제 강점기 때 이 고분들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경북 달성군 해안면에 속하여 해안면 고분군이라 불렀다. 이곳 불로동 고분들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옛날 이 지역을 다스렸던 토착지배세력의 집단묘지로 추정된다. 불로동 고분군은 불로동과 입석동의 구릉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1938년 11월 입석동 쪽 고분 2기를 조사하여 해안면 고분으로 불려졌다. 그 뒤 1963년 12월과 이듬해 1월 두 차례에 걸쳐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불로동 고분 2기를 조사한 뒤 입석동 고분을 포함하여 대구 불로동 고분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봉토의 지름은 1∼28m 내외이고 높이는 4∼7m정도이다. 전체적으로 불로동 고분군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과 봉토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할석으로 축조된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세장(細長)한 점 등이 구암동과 내당동 고분군과 유사하여, 같은 계열임을 짐작케 한다. 전체 고분군의 축조시기는 대략 5∼6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불로동 고분군은 사적 제262호로 규모는 94,095평이다. 이 고분군은 다른 고분군보다 외형적인 형태를 잘 갖추고 있어 이를 통해 겉모양이나 고대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대구분지의 옛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며 경부고속도로 상에서 볼 수 있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불로동고분공원은 이 고분 주위에 조성된 시민들의 휴식공간이다.[자료 발췌]
너와 나는/조병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 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 버린 카렌다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샨데리아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폐허가 되는 사랑.
존재가 되는 허무.
족보가 되는 이별.
무덤이 되는 인연.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곳...
북망산은 안내도도 없다는데
참 도식적인 죽음처럼 찍힌 푸른 낙관.
무덤 사이에서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청춘의 불빛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건지러
자주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우물의 얼음 속으로 내려갈수록 피는 뜨거워졌다.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얼음 속의 피는
신성함의 꽃다발을 엮을 정신의 꽃씨들로 실핏줄과 같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떠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 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 상 차려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고 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詩/박형준
백의와 함께
황토 속으로 돌아간 조상들도
왕항문상의 꿈을 꾸었겠지?
두루뭉술하다.
범박한 허한고와(虛閑高臥).
주검의 역사?
무슨 의마가 있는가?
자연으로의 귀환일 뿐인데!
구부정한 소나무가 지키는 풍경 속에서
저 잡초의 생명력이
봉분을 감싸며...
생을 찬미한다.
이렇게 불경스런운 공존을 신(神)은 왜?
소요유하다...
일제시대,
현해탄에서 한 사내와 자연으로 돌아간
여가수를 생각했다.
그 충동적 죽음을 동경했던
사춘기 소년이 읊조리던 청승을 떠올렸다...
사의 찬미- 윤심덕조로 /천양희
죽고 싶다 하면서 살고 싶은 날
친구에게 전화걸어
인생이 뭐길래 이렇게 힘드냐고 하면
그것도 모르냐며
인생이란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것이라고
「사(死)의 찬미」한 소절 불러젖힌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무얼 찾으려고 찾아내려고
바닥없는 바다에 뛰어내렸을까
자살도 요절도 못한 내가 시인이냐 하면
죽어도 같이 죽는 것이 부럽다고 하면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아니냐고 친구는 또 그런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고
내가 한 소절 끝내면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좋은 것이라고
친구는 또 그런다
죽음을 찬미하며 죽어간
윤심덕의 「사의 찬미」
내가 찬미하는 나의 십팔번
종생기(終生記) / 조용미
장명등(長明燈) 불빛을 오래 밝혀다오
자줏빛 남빛 깃을 단 소렴금 대렴금으로
나를 꽁꽁 묶어다오
고복(皐復)* 일랑 하지 말아다오
살아도 살아도 고통은 새록새록 새로웠다
나뭇잎 말라비틀어져도
치욕은 파릇파릇 잎을 틔웠다
이제
이른 봄에 돋아나는 새싹 같은 그것들을
데리고 간다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도록
마음이 타올랐다 꺼지고 또 타오르고
그렇게 쌓인 재들이 수북하게
가슴을 메웠던
내 사랑은
살아서 단 한 번도 나의 것이지 않았던 죽음은,
기억하지 말아다오
살아서 단 한 번도 나의 것일 수 없었던
모든 그리운 것들의 거처를
皐復* 고복 : 초혼하고 발상하는 의식 . 사람이 죽은 5-6시간 뒤 그가 입던 웃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거나, 마당에 서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 손으로 허리를 잡은 후 , 북족을 바라보고 [누구가 몇 월 며칟 날 몇 시에 별세(別世) ]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을 시체 위에 덮는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문학과지성사, 2004]
아~ 인간은 힘들게 올라갔던 길을...
하산해야 하는 운명!
그러나,
서러워하지 말자.
이번 생엔
그대에게 다가갈 수 없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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