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소설] 낭만의 꿈.

윤정덕201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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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소설입니다. 모방한 점이나 카피한 것은 없구요. 비난하는 사람보다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실존 인물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꿈이 보인다.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그 곳에서 희끄무레하게 커다란 회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 건물로 날아 낮익은 숫자의 201호의 방에 들어선다.

하지만 자신은 모르는 방...

그러나 방 안에는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이 책장 부분마다 나뉘어져 보관이 되어 있었다.

손에 닿는 익숙한 느낌의 앨범을 열지만 안개가 들어오는 듯 하얗게만 보일 뿐이다.

갑자기 발 밑에 출렁이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쳐다보니 알 수 없는 하얀 액체가 방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매번...'

점점 그 액체는 차올라 서있던 사람의 목까지 채우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고요한 소리.

재희가 잠에서 깬 것이다.

'매번 똑같이 알 수 없는 꿈을 꾸다니...그것도 개강이 다가오면 말이야...'

방문을 열고 나와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시다 그 꿈이 시작된 계기가 생각났다.

아마 고등학교 막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진로를 할 것인가, 취업을 할 것인가, 군대를 갈 것인가...

기로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같은 동아리의 후배였다.

조용한 음악실 방 한켠에 있는 피아노에 앉아서 멍하니 생각을 하고 있다가 눈을 떠보면 어느새 보미가 와서 옆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 또 멍때리고 있었지, 오빠?"

재희는 내심 놀라면서도 매번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않게 대답을 하였다.

"알잖아..."

"오빠,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오빠는 꿈이 뭐야?"

갑작스러운 질문을 한 보미에게 재희는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사실 재희는 꿈에 대해 한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을 해봤다면 미래에 관한 꿈이 아닌 자고 일어났을 때 생각나는 꿈을 생각한 것, 그 외에는 딱히 없었다.

"정해둔 게 없는데...?"

"치... 그게 모야, 난 열심히 해서 간호사가 되고 싶어."

간호사...? 간호사라... 아마 보미라면 간호사도 어울릴 것 같았다.

아직 1학년이지만 성품도 바르고 행동도 빠릿빠릿해서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곤 했으니까...

"음... 그럼 나는 예술을 해보고 싶어."

"예술?!"

보미는 재희의 대답이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그저 고개를 기웃거렸다.

"응, 예술가."

"그렇게 포괄적인거 말고... 딱 대답해봐."

하지만 재희는 예술가가 되고싶단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우연히 학교 옥상에서 찍은 사진, 풍경을 본 뒤로 그 사진을 매개로 여러가지를 해낼 수 있었던 재희는 사람들 몰래 예술품을 찾아 돌아다니곤 했었다.

갑자기 딩동댕동 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앗, 다시 야간자율학습 시작이다. 오빠 여기 있다가 걸려서 혼나지말구 내려가~ 나 먼저 간다~"

보미는 그렇게 명랑하게 자기 반으로 돌아갔지만 재희는 음악실의 불을 모두 끄고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얇은 실을 넓찍한 천에 그 실을 이으고 이어서 작은 나비를 만들고, 흙을 빚고 빚어서 만들어진 자기에 섬세한 손길로 도형을 새기고, 하얀 도화지 위에 여러가지 물감을 흩날려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자그마한 손 안의 눈에 담기는 세상을 다루어 사진 한 장 만들고...

재희는 그저 그런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스러웠으면서도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마음 속에 남기기도 했다.

그렇기에 재희는 구체적으로 화가, 음악가, 시인이 아니라 예술가라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보미에게 내 꿈을 얘기한 뒤로 그 꿈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새벽에 물을 마시다 멍하니 멈춰서서 있는 모습을 보고 셋째누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냉장고 문을 열어두고 멍하니 서서 뭐하는거야?"

재희는 문을 닫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윙.

컴퓨터를 켜서 작년에 있었던, 보았었던 사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뱉었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작품에 비하면 재희가 만든 작품은 초라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을 한번 둘러본 재희는 다시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 달콤하지도 않지만 싫지도 않은 그 하얀 꿈을 꾸기 위해서...

방학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집에서 그저 빈둥거리며 지냈던 재희에겐 아마도 더 빠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오늘이 바로 대학으로 돌아가는 날.

우연히도 재희는 기대하지 않고 넣었던 대학에서 합격통보를 받았기에 그 학교를 다니고 있다.

간단히 수업관련 내용을 듣고 일찍 끝나는 이 일주일.

난 오랫만에 친구녀석들이 보고싶어 둘러봤지만 애들은 나보다도 더 빠르게 사라져있었다.

'에휴... 전화나 해볼까'

재희는 핸드폰을 열어 우리 과는 아니였지만 친했던 재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재희야 왜 전화했어?"

"그냥 심심해서 전화했지, 오늘은 근섭이 형이랑 안놀아? 일찍 끝났잖아."

"아... 안그래도 형이 저녁에 놀자고 했는데 너한테도 연락하라고 했었어."

"아 그래? 그럼 어디로 가면 되는거야?"

"근섭이형한테 네가 전화해봐, 바뀔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알았어 김초코. 확인하고 연락줄게."

"응"

전화를 끊자마자 흥얼거리며 핸드폰 주소록을 찾아 근섭이형한테 전화를 걸었다.

"근섭이형"

"어, 재희야."

"오늘은 초기인데 안노세요?"

"근데 오늘은 좀... 이라고 할 줄 알았어? 놀자. 저녁 7시쯤에 너희 방으로 갈게. 강호도 같이 있어?"

"아뇨, 전 밖에 나와있거든요."

"알았어, 그럼 있다가 보자."

"네."

전화를 끊고 길 위에 서 있는 모습이 무안해서 서둘러 집으로 항하는 재희.

집에 돌아오자 강호가 있었다.

"어? 빨리왔네?"

"응 나 오늘 시간표 비었어."

"부러운데?"

"근데 하필 오늘이 개강이라...에휴..."

"그래도 안나가는 게 좋지 뭐..."

그렇게 길지만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재희는 자기 침대로 향해 누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재희 주변에서 났다.

"햐... 이제 일어나네. 잘잤어?"

"그저 그렇지 뭐..."

역시 오지랖이 넓은 용수 때문에 재희는 피로가 풀렸다가 다시 쌓이는 느낌이었다.

"오랫만에 노는데 다 불러야지?"

"근섭이형 그러면 우리 그 6명 모이는건가요?"

"그렇지, 개강날인데 신나게 놀아야하지 않겠어?"

그렇게 일단 5명이 모인 방에서 모두 나와 밖에서 지은이를 기다렸다.

"금방 방으로 온다더니 아직도 안내려왔네."

"지은이 누나가 매번 그러잖아요."

재희가 그 말을 하는 찰나에 지은이가 나왔다.

재희는 순간 당황했지만 지은이는 그런 말 못들었었던 듯 평소처럼 유쾌하게 "가요"라고 말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은 가까운 술집으로 향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하다가 술을 가져와 게임을 시작했다.

처음엔 그럭저럭 넘어가다가 갑자기 다들 강호만 먹이기로 작정한 듯 강호가 못하는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재희는 그 잠시동안이라도 뭔가를 잊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아차... 강호랑 지은이누나랑 나랑 집이 같은 방향인데 둘 다 챙겨야하잖아...'

그 생각이 미치자 재희는 연합(?)의 무리에서 빠져 다른 사람들을 이리저리 공격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술집에서 나와 근섭이형은 윗쪽길로 가야 집이어서 먼저 갔고 재영과 용수는 일단은 같은 방향이라 아랫길로 나왔지만 갈라졌다.

재희는 자꾸 차도쪽으로 걷는 두명을 인도쪽으로 몰아 넣으면서 걸어가느랴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길고도 짧았던 하루가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차가운 큰 건물 하나가 서있다.

어떤 문에도 어떠한 표시따윈 없었기에 계단을 걸어 한칸을 올라갔다.

뚜렷히 적혀있는 201이라는 숫자.

그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침이었다.

아무래도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인해서 꿈이 끊어진 것 같다.

재희는 꿈이 끊어진 것이 처음이라 약간 불안한 감정을 지닌 채 아침 수업이 있어 강호가 깨지 않게 조심히 빠져 나왔다.

그렇게 평화로운 하루 이틀이 지나다 과에서 MT를 추진하게 되어 같이 떠나게 되었다.

다행히 1학년 때 친했었던 선배인 민기선배와 같은 조가 되어 다행이긴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있는 것이 불편한 재희는 버스 안에서 내내 멍하게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분주하게 버스에서 짐을 내리고 다시 방으로 나르고를 반복했다.

1시간즈음 지나자 모든 정리가 어느정도 마친 것 같았다.

어느덧 조별 대항전 식으로 게임을 시작하였지만 재희는 그러거나 말거나 멀건 하늘과 왼쪽에 보이는 설악산만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그렇게 재희는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그냥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나와 친했었던 형들이 재희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재희야, 너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야? 작년과는 다르게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있어."

그래도 친한 형들이 묻자 재희는 웃는 얼굴로 "아무 일도 아니에요."라고 웃어보였다.

여전히 걱정되는 얼굴로 바라보며 주변에 앉아 가만히 같은 자세로 하늘만 쳐다보다가 간혹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하였다.

그러기도 잠시 이제는 술판이다.

뭔가가 바뀔 것이라는 것은 재희의 착각이었을까? 작년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는 듯한 분위기에 재희는 은근슬쩍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술자리에 빠졌다.

그렇다고 선배들이 뭐라하지도 않았다.

첫째로는 원래는 이런 자리라면 빠지지않고 참석하던 재희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버스에서부터 보여진 재희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방을 나와 건물을 나와 앞터에 앉아 별들을 바라보던 재희는 문득 고등학교 때 사귀게 되었었던 별이의 안부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재희는 별이랑 연락을 하면 오히려 아예 볼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 생각은 걱정으로만 남겨두고 지금 곁에 있는 지현이에 대한 걱정을 더 크게 안고 천천히 감겨오는 눈을 감았다.

그 꿈이 또 반복이 되고 눈을 뜨자 어느 따스한 품 안에 재희는 있었다.

선배님들이 말해주기로는 나간지 3시간이 넘었는데도 들어오지 않는 재희가 걱정되어 찾아서 업어다가 방에 놓은거라고 했고 지현이가 왜 남자방에 있냐고 묻자 지현이가 떼를 쓰면서 기어코 재희 옆에서 있어주겠다고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해주었다.

'선배님들이랑 지현이에게 많은 걱정을 내가 안겼구나...'

이런 생각이 문득 지나치자 꿈속의 안개는 재희를 집어삼키려는 것만 같이 뇌리에 생생하면서도 흐릿하게 남았다.

재희는 창가쪽을 바라보며 앉아 가만히 생각을 했다.

대학생활을 무난하게 해나아갈 수 있게 해준건 아마 지현이와 예술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재희에게 들었다.

예술제에서 단연 기억에 남는 것을 꼽는다면 아마도 재희는 천 위에 여러가지 색상의 실로 만들어진 나비, 작은 구슬 하나하나 단결되어 단조롭게 만들어진 하트모양, 커다란 원통 자기에 흑룡해를 기념해서 세심하게 파넣은 용, 어느 저녁날의 가을 하늘일 것이다.

가장 처음 재희에게 예술가라는 것을 짚어준 것은 '어느 저녁날의 가을하늘'이었고, 제일 처음으로 자신이 예술가라 느끼게 해준 것은 '하트모양 핸드폰고리'이었으며, 저런 예술을 나도 하고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해 준 것은'나비'와 '용'이다.

하지만 지현이에게 남은 것은...?

지현이의 감정과 나의 감정, 그 외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

뒤에서 누군가가 재희를 안아주자 재희는 흠칫 놀랐으나 익숙한 느낌에 누군지 금방 낌새를 챌 수 있었다.

"또 왜그래, 바보야"

(*바보는 지현이가 재희를 부르는 애칭 중 하나였다.)

"또 뭐가~ 떼쟁아"

"치... 내가 언제 떼를 썼다고 그래...힝..."

"남자방에 잔다고 악쓴건 떼 아니야?"

"그건 술김에..."

서로 장난기 많은 말투로 말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바보야, 너 표정이 왜그리 죽을상이야... 웃어도 웃는 것 같지가 않아."

"내가?... 그래보여?"

"웅, 선배들도 다 걱정하고 얼마나 고생했다고..."

"그랬구나..."

지현이는 밤 사이 무척 걱정한 듯 깨었다 잤다 한 흔적이 머리에 남아있었다.

"너 머리카락..."

"응? 자꾸 부스럭거렸더니 머리가 다 떠버렸네...헤헤..."

그 둘이 벌이는 애정행각 사이 생각해보니 많은 시선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아차...'

"지현아, 떨어져서 얘기하자."

"왜~? 난 이대로가 좋은데...."

지현이도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 시선들 중 하나와 마주쳤다.

그 순간 "오~"하는 소리가 났으며 키득키득 거리면서 하나 둘 집합하는 곳으로 내려갔다.

지현이는 당황한 듯 "헐"이라는 짧은 말과 함께 수줍게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듯 재희가 있던 남자방에서 헐레벌떡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재희는 순간 '바보는 자기면서...'라고 생각하며 피식하고 웃었다.

그렇게 유별난 MT는 지나가고 매일 같은 꿈을 꾸며 재희는 무난하게 생활을 해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엔 예고가 없어 사람들은 피해가지 못하는 일들 중 하나가 재희에게 들이닥쳤다.

이유없는 불안... 재희는 방안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느랴 강의도 나가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린다. 지현이다.

왠만한 강의는 지현이와 듣고 있었기에 일주일 내내 빠지자 왠만해선 먼저 연락 안하는 지현이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이 바보야, 강의를 일주일동안 빠지면 어떡해."

"아무 상관하지마."

재희는 따뜻하게 대해주고 싶었겠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 불안이 지현이에게 커다란 걱정이 되버릴까봐 차갑고 냉정하게 말했다.

"너 왜그러는건데..."

"아냐, 아무런 일도 없어."

"일부러 오빠 강의 빠지지않게 하기 위해서 조교선생님들과도 다투면서도 그렇게 짠거 알잖아, 무슨 일인데 오빠가 나한테 해줄 수 없는 말은 없다는거 알잖아."

지현이가 화가 났는지 더욱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로 물었지만 재희는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내가 싫은거야...?"

그 말을 들은 재희는 '아니라고, 그런 일 없다고.'말하곤 싶었지만 마음 속과 머릿속에서만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됐어, 끊어."

지현이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짧막한 말을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지금 재희에겐 가장 큰 일이 될수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이유없는 불안이 가장 큰 일이었다.

하고싶은 일을 하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이 느낌은 뭐지...'

오늘따라 전화벨이 많이 울린다.

"여보세요?"

"재희야, 나 민기형인데 무슨 일 있는거야?"

"아뇨, 아무런 일 없어요..."

"일단 과사로 와라, 지현이 지금 울고불고 난리났어."

그 말을 듣자 재희는 '갈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몰골을 본다면 다시 걱정만 끼칠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재희는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로 "그냥 두세요."라고 했고 전화기에선 "재희야, 재희야!"하는 민기형의 목소리가 들리다 끊어져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버리자 재희에게 가장 차갑게 변해버린건 지현이었다.

'몇 일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하며 재희는 지현이와 마주치지않게 조심히 강의를 다녔다.

뜨거운 것은 언젠간 식어버린다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재희와 지현이의 사이는 점점 더 차가워져만 갔고 그렇게 지속될수록 예전의 그 꿈이, 반복되는 그 꿈이 바뀌었다.

이젠 하얀 안개같은 것이 아니라 검은 장막으로 바뀌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재희는 그 꿈에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매일 아침 식은 땀을 흘리며 일어나는 재희가 걱정이라도 되는지 강호가 쳐다보고 있었다.

"야, 재희야 일어나봐, 지현이 왔어."

재희는 지현이란 소리에 움찔하며 안색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그러자 강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난 나갔다온다."하고 나가버렸다.

컴퓨터의 팬이나 파워가 돌아가는 소리도 없이 적막한 공간에 재희와 지현이만 남겨져버린 것이다.

지현이는 잠시 멍하니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지현이는 목소리를 억누르는 억양으로 "우리 그냥 헤어지자."라는 말과 함께 뒤돌아 섰다.

재희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지현이가 저러는 모습을 처음 본 재희는 그저 멍해져버렸기 때문이다.

간신히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왜..."라고 되물었지만 떨어지고 있는 눈물처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 갈게...안녕."

재희가 들은 마지막 지현이의 목소리...

재희는 그 말을 듣게되자마자 아무것도 하기 싫었기에 떨리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감정을 추수리려고만 노력했다.

무기력하게 붕 떠있는 몸... 분명 침대위에서 잠들었는데 마약에 취한듯이 몸에 감각이 없었다.

분명 꿈이겠지 했지만 눈을 껌벅여도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갑자기 밖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강호가 돌아왔다.

"불끄고 혼자 뭐하고 있는거냐?"

재희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그런 모습을 본 강호는 지현이와 무슨 일이 있는거라 생각이 됐는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또 다시 주말이 지나 강의를 들으러 가야할 때가 되었지만 가는 길이 낯설었다.

가는 길에 매일 갑자기 달려와 팔짱을 껴주던 지현이가 옆에 없어서일까?

그 어떤 생각을 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강의실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일찍 나온 탓이었겠지만 재희는 가만히 서있다 10분이 지나고 나와버렸다.

지현이와 얼굴을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에 재희가, 내가 비켜줘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같이 강의을 받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지현이가 강의실에 왔었냐고 묻자 "걔가 빠지는 거 봤냐? 오늘도 너 핑계 대주고 갔어."라는 말을 듣고 뭔가 가슴을 흔드는 것 같았다.

"미안...했다고,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하는...데... 못난 나라서..."

"뭐라는거야, 야 아무튼 이번주까진 봐준다고 하셨으니까 너도 얼른 강의 나와라. 그럼 끊는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했는데 재희는 실수로 입으로 더듬거렸나보다.

지현이가 헤어졌는데도 내 걱정을 해주는 것을 보고 마음을 다시 고쳐잡고 내일부터 강의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을 하는 재희였다.

시간은 돌아보면 빠르게 흘렀듯이 2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우리 과끼리 듣는 강의가 많았기에 우린 강의 쫑파티를 하기로 했지만 재희는 지현이의 얼굴이 떠올라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밤이 되고 강의 쫑파티에 가기 위해 간단한 옷을 차려입고 나갔다.

지현이가 없었다.

"어? 지현이는 어디갔어?"

"좀 늦을지도 모른다고 걱정말라고 하더라, 어떻게 저런 여자를 만났냐? 부럽다."

친구의 말에 재희는 뜨끔했지만 살짝 미소를 보이며 무마시켜버렸다.

얼마 지나지않아 지현이가 나타났고 사람들 등쌀에 지현이는 내 옆에 앉았다.

앉자마자 지현이는 재희 왼손에 쪽지를 건네주었고 재희는 그 쪽지를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지현이는 조용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무한테도 보여주지말고 혼자 방에서 봐, 강호오빠도 보여주지 말고."라는 말을 덧붙였다.

강의 쫑파티라곤 했지만 아무래도 과 파티 같았다.

기분좋은 흥얼거림이 조금 길어졌다 싶었을 무렵에 같은 강의를 받는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고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민기형과 재희, 지현이, 예은이는 자리를 정리한 뒤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재희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외투에 넣어두었던 쪽지를 찾았다.

작은 종이인줄 알았는데 펴보니 A4용지정도 되는 종이에 빼곡히 적혀있는 글이 있었다.

'재희 오빠에게..

재희오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빠가 나한테도 숨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아무래도 내가 오빠 옆에 있으면서 부족한 점도 많이 있었고, 있겠지만 오빠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잖아. 걱정이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아프면 나한테 나지막히 귀띔이라도 해주면 안될까? 그리고 그럴때면 오빠의 꿈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어때? 그러면 오빠가 말못했던 일들도, 힘들었었던 일들도 다 지워질 거 아니야... 이렇게 편지로나마라도 쓰지만 난 아직 오빠랑 헤어졌다고 생각하지 않고있어. 진짜 오빠가 헤어지고 싶은거라면 내게 직접 와서 얘기해줘, 전화나 문자로 간단하게 할 얘기가 아니니까... 나 아직도 매일 밤 오빠 생각하고 기도하고 걱정하고 있어. 그러니 확실하게 얘기를 해줬으면 하는거야. 그러면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뭐 그래도 다 하겠지만 말이야. 그러니 오빠의 생각도 조금 밝혀줬으면 좋겠어. 내가 싫은건지 아니면 다른 일 때문에 신경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든지...'

이런식으로 전개되던 편지를 다 읽은 재희는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며 갤러리를 살펴보았다.

많은 예술품들의 모습이 보이는 사진첩...

그 사진첩 속에는 자신이 직접 만들고, 찍고, 그렸던 사진들도 꽤 있었다.

불안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지현이에게 내일 당장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눈을 감자 다시 어둠은 안개로 바뀌었고 재희에게는 싫지않은, 좋은 낭만적인 꿈이 되어버렸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랑의 편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