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eb.humoruniv.com/main.html< 웃대 : 듀라라 님 > 그 일기에 적힌 그대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내가 있는 방은 일기와는 다르게 녹슨 철창이 아니라 침대뼈대로 부시거나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좋은 도구가 있다. 황산과 실톱이 부서진 뼈대보단 훨씬 쓸모있을거다. 일단 철창은 4개이니 맨 오른쪽에 있는 것만 내버려두고 다른 것들만 녹이기로 했다. 하나는 나중에 밧줄을 묶을 때 써야하니까. 세면대와 변기에 묶는 것도 괜찮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밧줄의 길이를 길게 하는 것이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 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일단 황산을 들고 조심스럽게 철창에 부었다. 살짝 부었을 뿐인데 엄청난 양의 연기와 지독한 쇠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마치 튀김이라도 튀기듯 큰 소음이 좁은 방에 울려 퍼졌다. 환기가 되는 창이라 망정이지 만약 방 안에서 저런 짓을 했다간 유독가스에 노출되어 어떻게 됐을지 생각조차 하기 싫다. 그 유독가스를 최대한 안 들이쉬기 위해 환자복을 입까지 올려 마스크처럼 사용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자 마치 녹다만 초콜릿처럼 변한 철창이 보였다. 얼마나 큰 고온이 철창을 괴롭혔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식히고 난 뒤에야 철창을 끊을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철창에 묻은 황산이 하나뿐인 실톱까지 녹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조금씩 힘을 주어 첫 번째 철 기둥을 썰었다. 다소 힘이 들었지만 조금 고생하니 어떻게든 끊어낼 수 있었다. 그 후 처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2개를 끊을 수 있었다. "후……." 일기장의 그처럼 나도 땀이 범벅이가 되었다. 철창을 자르는 일은 쉽지 않았고, 노가다라도 한 듯 어깨에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잠시 쉬고자 하는 마음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만히 앉으니 이번엔 밧줄이 떠올랐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불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방금 사용해서 따끈따끈해진 실톱으로 이불을 잘랐다. 너무 가느다랗게 자르면 끊어질 테니까 어느 정도 굵게 만들어야만 했다. 차라리 짧으면 짧았지 억지로 길게 만들어서 끊어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러다 문득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도 쓰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실톱으로 조심스럽게 시트에 붙은 천을 뜯어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천을 모우고 길게 묶으니 일기장에서 나왔던 것보다 훨씬 더 긴 밧줄이 만들어졌다. 대략 8m쯤은 되어보였다. 그 다음에는 곧바로 밧줄 강도를 확인했다. 밧줄을 철창에 단단히 묶어놓고 힘껏 당겨보았다. 낡기는 했어도 사람 한 명의 무게는 지탱할 수 있는 지 그럭저럭 괜찮아보였다. 일기장을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구석에 있는 일기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 노트의 내용 덕분에 쓸데없는 생각과 우유부단한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기대로라면 이상한 부분이 있다. 바로 그가 가진 물건과 내가 가진 물건의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나처럼 쓸모 있는 도구가 아닌 그저 시간 때우기 위한 도구만이 주어졌다. 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물건들을 그에게 준 것일까? 나처럼 탈출을 위한 도구도 아니지 않은가? 뭐, 어찌되었건 일기장의 그로 인해 내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그는 탈출이 아닌 일기장을 여기에 남기기 위한 일회용 도구가 아니었을까? "으차" 잡생각을 털어버렸다. 큰일을 치르기 위해선 다른 생각을 지워야만 했다. 어느 정도 쉬자 몸에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쇠뿔도 당긴 김에 빼라고 여기서 우유부단하게 있어봤자 좋을 것 하나없다. 일어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그것이 눈에 띄었다. 제대로 된 도구를 사용 못해서 그런지 철창에 철이 살짝 삐져나와 자칫 잘못하면 큰 상처가 날 것만 같았다. "천 조각으로 덮으면 되려나?" 바닥에 남은 천으로 그것을 덮었다. 어차피 한번만 빠져나가면 되니까 대충 천으로 묶어두었다. 자, 이제 완벽하다.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도움이 될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다가 문득 실톱과 노트가 보였다. 노트는 모르겠지만 실톱은 아마 또 사용할 일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 챙겨놓기로 했다. 실톱을 챙기는 김에 노트도 같이 챙기기로 했다. 실톱을 노트 사이에 끼워 넣은 뒤 바지춤에 넣어뒀다. 완벽하게 준비를 끝낸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처했고, 이렇게 배고픔에 시달리는 상태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련을 눈 돌리고 피할 순 없다. 시련은 뛰어넘으라고 있는 거다. 들고 있던 8m 가량의 긴 밧줄을 창 너머로 던졌다. 빗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천 밧줄을 있는 힘껏 때렸다. 심장이 뛴다. 내 삶에서 이렇게 두근거리는 순간이 있었던가? 상황에 맞지 않는 두근거림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이런 곳에 납치된 주제에 두근거림은 무슨. 힘껏 밧줄을 쥐었다. 혹시 풀릴 지도 모르니 천을 한 번 감아쥐었다. 그렇게 양손을 천을 감아쥐고 창에 발을 올렸다. 맨발이라 그런지 콘크리트가 한 없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빗줄기가 얼마나 거센 지 마치 나를 계속 방에 가두려는 파수꾼 같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끝없는 바다도 올가미처럼 발을 묶었다. 마치 강력접착제로 붙어놓은 듯 발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마음속에 두려움과 공포라는 악마가 날 붙잡고 있었다. '나가지마. 나가면 죽어. 죽는다고 킥킥킥. 내려가면 뭐라도 있을 것 같아? 아냐 아무것도 없어! 멍청아!! 킥킥킥' 공포가 날 겁주고 있었다. "신발!! 진짜 30살이나 처먹고 왜 이 지랄이냐고!!" 생각해보면 겁쟁이였다. 지금껏 도전과 무모한 행동은 절대한 적이 없었다. 일탈?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다. 어릴 적부터 누군가가 나의 길을 잡아주고, '좋은 대학가면 성공할거야' 라고 길을 만들어주었다. 사실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어릴 적 한 번도 글짓기 상을 놓친 적 없었고, 언제나 내 이름이 학교 현수막을 장식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시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글짓기 좋았고 나름 재능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길을 외면하고 아스팔트가 잘 깔린 편한 길.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길을 걷기로 시작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사실 아스팔트 바닥이 편하기는 했다. 아무 생각이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런 삶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침대에서 여자를 안고 있어도, 고생해서 승진해도, 맛있는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어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는 듯한 괴기감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으니까. 왜냐고?? 누군가가 이 길을 걸으라고 강요했으니까 내가 원했던 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틀에서 벗어나서 아무도 걷지 않은 곳. 잡초들이 허리까지 오는 그런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라고 하는 그런 답답하고 불쾌한 아스팔트가 아닌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산길. 고요하던 주위에 다시 시끄러운 빗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게 지껄이던 악마가 죽은 듯 조용해졌고, 발가락도 평소처럼 움직였다. 마른침을 삼킨 뒤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발을 창 너머로 뻗었다. 차가운 빗줄기들이 발을 인정사정없이 때렸다. "멋지다!! 나 완전 짱이다! 가자! 가자!" 아직 방 안에 남아있던 발을 창 너머로 뻗자 갑자기 몸이 슉 내려가는 아찔한 공포감이 온 몸에 찌릿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콘크리트 벽면의 날카로운 냉기가 양 발바닥에 스며 들어왔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고 젠장! 마치 10층짜리 건물 벽에 매달려있는 듯 했다. 용기를 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는 큰 파도가 치고 있는 바다가 심해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겨우 몇 초 동안 벽에 매달려있었을 뿐인데 온 몸에 힘이 쫙 빠져나가는 듯 했다. 비에 젖어 축 늘어진 환자복이 부담감을 더 늘려주었다.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숨소리는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얼음화살처럼 머리와 등을 때리는 빗줄기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1cm정도 내려갈 만큼 눈에 띄지 않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작은 한 발자국이 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 힘을 받아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지금 용기 있게 내려갈 수 있는 이유는 방금 아래를 보았을 때 또 다른 창이 어렴풋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기로 들어가면 살 수 있다. 분명 저기에는 음식도 있고, 편안한 침대도 있고, 날 구출하러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개소리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 나의 눈에는 저 곳이 낙원으로만 보였다. 그 때였다.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후려치는 듯 했다. 아찔해졌다.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다. 아래에 창에……. 철창이 채워져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리오네트의 끈을 끊어버리듯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쥐고 있던 천을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거의 1m 정도 미끄러지고서야 천을 다시금 꽉 질 수 있었다. "젠장!! 왜 갑자기 그 딴 개 같은 생각이!!"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다시 올라갈 힘 따위는 애초에 없었으니까. 이 순간에 목숨을 걸었다. 처음 창에 발을 올렸을 때 머뭇거렸던 것도 아마 내 마음 속 깊숙이 이런 상황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말 철창이 채워져 있으면 어떻게 하지? 지금 이 떨리는 손으로는 올라가는 커녕 내려가기조차 힘들다. 무섭다. 무서워. 무서워서 미칠 것 같다. 숨쉬기조차 지금 나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다. 이제 거의 5m 지점에 도착했지만 더 내려갈 힘이 없었다. 눈조차 뜰 수가 없다. 빗줄기가 눈을 너무 때려 피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손과 발은 차가운 콘크리트 때문에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학!! 하익!" 날카로운 바람과 화살 같은 빗줄기가 끊임없이 등짝을 때렸다. 거친 숨소리만이 내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겨우겨우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오기 전에 밧줄을 한 번 안 감아쥐었다면 진작 빗줄기들과 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로 추락했을 것이다. 그 때 잔뜩 찌푸린 눈살 사이로 그것이 보였다. 어두운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 동공이 커지고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근육이 아파왔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아아아아!!"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고, 곧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숨이 터질 정도로 뭔가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애타게 삶을 갈망한 적이 있던가? 매일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는데 정말 철없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누구보다도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신은 시련이라는 허들을 쉽게 넘게 해주지 않았다. "!!" 갑자기 강한 돌풍이 불어왔고, 그 바람에 체중이 왼손에 쏠리게 되어 나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천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끔찍하게 차가웠던 콘크리트에서 발이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슬아슬하게 오른손에 묶여있던 천으로 겨우 몸을 지탱했다. 거친 빗줄기와 강한 바람 때문에 나의 몸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발바닥이 벽과 붙어있을 땐 몰랐는데 벽과 멀어지니 균형을 유지할 수 없어서 비명이 터져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마치 소가 내 팔을 잡아당기듯 끊어질 것만 같았고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목을 조르듯 숨이 탁 막혀왔다. 천을 쥐고 있던 손아귀 힘이 조금씩 풀렸다. 갑작스러운 돌풍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그럴 힘과 여유조차 없었다. 콘크리트 벽면에 닿기 위해 소금을 뿌린 미꾸라지처럼 발버둥쳤다. 그럴수록 손가락이 하나씩 풀리는 게 느껴졌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껏 포기는 수 없이 많이 해왔다. 이젠 포기가 아니라 도전을 해야 할 때다! 더 거칠게 발버둥 쳤고, 그러자 오른손에 힘이 순식간에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바다에 추락하나 몇 초 후에 떨어지나 매 한 가지였다. "제발! 제발! 닿아라! 닿으라고!!" 그 순간 엄지발가락이 콘크리트 벽면에 닿았지만 붉은 핏물만 아래로 떨어질 뿐이었다. 그 뒤를 이어 엄지발톱이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아니, 통증을 느낄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다시금 발바닥을 벽에 닿게 하려고 마지막 힘을 다해 움직였다.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발을 뻗었다. 그 순간 다른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내 몸을 벽에 착 달라붙여 주었다. '아!! 해냈다!' 몸이 벽에 달라붙자 방금 전까지 끊어질 듯한 팔에 겨우 휴식을 줄 수 있었다. 왼손으로 방금 놓쳤던 천을 다시금 굳게 잡아 쥐었다. 고통이 반으로 줄었고, 나지막한 한숨이 떨리는 치아 사이로 새어나왔다. 하지만 이미 체력을 거의 소진한 탓에 더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멈춤 버튼을 누르고 쉬고 싶었다. “학학…….” 아프다. 오른쪽 팔뚝 인대가 늘어난 모양이다. 힘이 들어가지 않고 통증이 멈추지 않고 밀려왔다. 이제 3m 정도만 내려가면 아래층이었는데. 도저히 그 몇 걸음 뗄 수가 없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순식간에 내 몸을 사슬처럼 휘어 감았다. 그러자 지금껏 잊고 있었던 과거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 날 생전 처음으로 글짓기로 상을 받았다. 초등학교에서 하는 조잡한 장려상일 뿐이었지만 전교생 500명이 넘는 큰 학교였기에 나는 너무나도 큰 감동과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느꼈던 짜릿함을 다시 느끼기 위해 나는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었다. 장려상이 우수상이 되고 우수상이 전국적인 상으로 바뀌기까지 큰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국에서 개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은상을 얻어냈다. 그 때 학교 현수막엔 내 이름 김희수라는 이름이 바람에 펄럭거렸었다. 그리고 상을 받아갔을 때 웃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그 때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했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였던가? IMF이었던가?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직장을 잃고 우리 집은 순식간에 40평짜리 큰 집에서 10평 남짓한 원룸으로 옮기게 되었다. 사업실패. 사업부도. 이런 단어들이 낯설었던 15살의 겨울이었다. 난방이 잘 되지 않았던 원룸이 싫었던 나는 매번 도서관으로 갔었다. 그걸 알아차리신 어머니께서는 입버릇이 하나 생기셨다. ‘돈 못 버는 작가 같은 거 하지 말고 돈 되는 대기업에 들어가라고’ 그 때부터일까? 꿈을 부정하고 공부에만 매달리게 된 것이. “!!!” 사념을 깨기라도 하듯 또 다시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어왔고, 나의 몸뚱이는 갑작스러운 바람 때문에 아래로 주르륵 떨어지다시피 내려갔고, 이를 악물며 겨우겨우 버텨냈다. 그 때문에 손을 쥐고 있던 천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으아”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에서는 처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두 눈을 질끈 감아보았지만 통증이 완화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눈을 다시 떴을 때 작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설마 미끄러져서 아래층에 도달할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바로 내 발 밑에는 익숙한 사각형 구멍이 보였다.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졌고, 통증이 점차 완화되면서 쾌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아래 창에 철창이 있는 지를 확인했다. 만약 철창이 있다고 하더라도 천에 불안하게 매달려 있는 것보단 철창에 매달려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때였다. 철창이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해 발을 넣는 순간 균형이 깨지면서 내가 쥐고 있던 천들을 모조리 놓아버렸다. 미끄러졌던 것 때문에 근육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아래로 몸이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 순간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날 괴롭히던 빗줄기들이 천천히 허공에서 떠다니는 것이 보였고, 그 사이에 붉은 핏물들도 허공에 빙글빙글 회전하며 떨어졌다. 공포와 두려움보다는 너무나도 강한 아쉬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시간이 100분의 1로 쪼개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빗물 때문에 눈을 감은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니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모르겠다. “!!” 그 때 발에 무언가 걸린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느긋하게 떨어지던 빗줄기들이 다시 쏟아져 내렸고, 물구나무서기를 한 것처럼 배를 훤히 내 놓은 상태가 되었다. 매달려 있기 때문에 빗줄기들이 콧구멍으로 들어왔고, 그로인한 목구멍에 불쾌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슬아슬했구먼.” 목소리다. 사람의 목소리. 빗줄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아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창을 바라보았다. 발목을 꽉 쥐고 있던 온기. 사람의 손이었다. 저건 분명히 사람의 손이다! 발목을 쥐고 있던 손이 양손이 되더니 조금씩 끌어올렸다. 마치 함정에 걸린 짐승처럼 천천히 구멍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다. ( 물론 그 짐승들과의 심경은 반대이겠지만.) 콘크리트 벽면 탓에 등을 사포로 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몸에 힘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살아났다는 믿을 수 없는 상황 탓일까 아무 말 없이 통증을 견뎌냈다. 잠시 후 구릿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백열등의 빛을 보였다. 저 구려 보이던 황금빛이 너무나도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몰매 맞는 듯한 통증은 사라지고 눈을 찌르던 화살들도 어느 새 사라지고 없었다. 엄지발가락과 양손에 아련한 통증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누워있는 지저분한 이불조차 너무나도 포근했다. 모든 것이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도 어리석게 느껴졌다. 죽음의 문턱에 다녀와서 그런지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깨달음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그렇게 바닥에 누워 멍하니 누런빛을 쳐다보고 있자 갑자기 무언가가 빛을 차단했다. 날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제야 그에게 시선이 갔다. 아직도 정신이 몽롱해서 꿈을 꾸는 듯 했다.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곳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살았구먼.” “누구시죠……?”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둥이가 그것을 가장 먼저 뱉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네보다 ‘이 곳’에 일찍 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벽면에 잔뜩 쌓여있는 도구들에 눈이 갔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방 가운데에 있는 모닥불이었다. 그는 나의 시선을 읽은 것인지 아무 말 없이 나를 이끌고 모닥불 근처로 데려가 앉혔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여기저기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아련한 통증이 극심한 고통으로 변해 뇌를 자극해왔고, 몸이 크게 들썩였다. 인대가 늘어난 왼팔에는 끊임없이 미세한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날 구해준 그는 내 건너편에 앉았다. “일단은 묻고 싶은 게 많을 테지만 지금은 잠깐이나마 쉬게나. 배도 고플 테니 이것도 좀 먹고.” 그가 건넨 것은 손바닥만한 검붉은 덩어리였다. 여기저기 먼지가 묻어있고 곰팡이가 핀 그것을 보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본능은 나의 자존심 따위 간단히 무시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입 구멍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육포였다. 무슨 고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의 그 어떤 육포보다 달고 맛있었다. 먼지가 여기저기 묻어있었기에 털고 먹어야했지만 지금 상황에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고 나니 온 몸에 기운이 돌았다. 마치 연료가 없던 자동차에 기름을 넣듯 몸 여기저기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 후 겨우 그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흑인이었다. 온 몸에 근육이 적당히 붙어있는 그를 보는 순간 경계심이 들었지만 60대정도로 되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먹을 것도 주시고 절 살려주시고 감사합니다.” “오? 말을 할 수 있었군! 난 벙어리인 줄 알았다네. 허허허!” 그는 대장군 같은 외모답게 호탕하게 웃었다. 외국인과 대화를 해본 것은 처음이라 긴장했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의 한국어는 그만큼 유창했다. 그는 검은 피부에 하얀 머리털, 하얀 턱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옷으로는 무엇의 가죽인지 알 수 없는 가죽옷을 두르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방금 제가 먹은 것은 무엇인가요?” “아? 그거? 박쥐고기야.” 순간 역하고 더러운 무언가가 속에서 부글거렸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서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북한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박쥐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나라고 먹는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거기다가 불에 잘 익혔으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단결 지었다. 그렇게 암시를 해야지만 이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다. 작은 여유가 생긴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인디안 족장의 집처럼 여기저기 가죽이 걸려있고, 날카로운 돌칼이나 뼈로 만든 도구들이 눈에 보였다. 뼈를 보는 순간 스산한 기분이 들었지만 박쥐고기를 생각하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그 후 천천히 궁금하던 것을 조금씩 물어보기로 했다. 배도 부리고 어느 정도 쉬었더니 아프던 근육통들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핏물이 흘러나오는 부위는 빗물을 모아서 어느 정도 닦은 뒤 딱지가 앉기를 기다렸다. 지금 상황에 더러운 천이라든지 가죽으로 상처를 봉했다간 2차 감염까지 이뤄질 수 있으니까. “저기, 여기가 어디죠??” “음……. 시작부터 어려운 질문이로구나.” 그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을 보니 그도 여기가 어디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뭔가 있는 듯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자면……. 나도 여기가 어디인지 어느 나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네.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인가 생각했다가 곧 생각을 바꿨지.” 그는 일순간 침묵을 고수했다. 고요해지자 모닥불에 타고 있는 알 수 없는 덩어리에서 틱틱거리는 소리와 빗소리만이 그의 방을 가득 메웠다. 그의 입에서 말이 나온 것은 3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이 곳은 비가 단 하루도 그치지 않아.” “네?”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단 한번도 비가 그치지 않는다네.” “그, 그게 가능한 소리인가요?” “불가능하지.” “그, 그럼??”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겠지. 내 질문은 어째서 지구가 있고 우주가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저 노인도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을 텐데 속으로 아차 싶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네. 어쩌면 아직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지역일지도 모르지. 그곳에 왜 우리가 왔는지도 모르고……. 자네도 봤다시피 여긴 우박에 가까운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네. 그러니 여기에 건물을 짓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하지만 실제로 건물은 존재하고 있어. 그 건물에 우리가 있는 것이 그 증거지.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네.” “아…….” 깊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 건물 존재 자체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그저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케 했다. 가죽들이 가득한 집 안을 보면 그가 여기에 오랜 세월을 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나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오랜 시간동안 여기에 갇혀 지낸 셈이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건 또렷한 진실이다. “여기에 얼마 정도 계셨습니까?” “글쎄……. 거의 10년 정도 되었을 걸세” “시, 십년이요?!” 너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았는지 거의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흑인도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뭐, 10년 동안 지내다보니 여기도 그리 나쁜 곳은 아닐세. 먹을 만한 식량도 적당히 있고, 박쥐들도 있는 걸보면 분명히 어디에 먹을 것이 있다는 소리니까. 가끔 쥐도 있기도 하고.” “그럼 10년 동안 박쥐고기와 쥐고기만 먹었다는 소리인가요?” “뭐, 거의 그렇게 먹었지. 가끔 풀도 먹고” “풀이라고요? 햇빛도 없이 식물이 자라나나요?” “이끼도 식물이라네. 습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도 있지.” 그 순간 흑인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의 방 어디에도 풀도 박쥐도 없었으니까.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그는 작게 웃었다. “박쥐는 거의 한달에 한번 꼴로 창 너머에서 들어온다네. 그것들을 암컷 수컷으로 가려서 사육하는 거지.” 그는 박쥐 가죽을 여러 개 붙여서 만든 이불 같은걸 가리켰다. 큰 사각형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걸보니 작은 우리를 만들어 거기에 박쥐를 넣어두고 이불로 덮은 모양이다. 살짝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보기보다 많은 박쥐들을 사육하고 있는 모양이다. 박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쥐와 풀은 어디서 구해오는 것일까? “모든 것이 궁금한 모양이로구나. 조금씩 알아갈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게” 그는 옆집 할아버지 같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안도 반 두려움 반을 느꼈다. 그의 말을 바꿔서 말하면 여기서 이제 계속 지내게 될 테니까 호들갑 떨지 말라는 소리와 같았다. 그러면서도 안도한 것은 여기에 혼자 남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이렇게도 편안함을 주다니. 이래서 다들 사람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칭하는 모양이다. 문득 백소라 팀장님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서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내 눈 앞에 있는 일에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누군가와 있다는 안도감과 포만감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모닥불 옆이라 마음이 편안해졌고, 덮고 있던 가죽 덕에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흑인은 계속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의식이 옅어졌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는 것은 조금 위험했지만 그는 날 살려준 사람이다. 설마 무슨 짓을 하겠는가? 그 후 마치 향기로운 와인에 취한 듯 순식간에 의식의 심해로 빠져들었다. 속에서 뜨거운 용암이 부글거리듯 위장이 따끔거린다. 낯설지 않은 감각. 처음 이 곳을 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몸에 힘이 없고 입이 바짝 마르는 것까지 말이다. 그 순간 정신이 번개처럼 깨어났다. “!!” 묶여있었다. 양손은 등 뒤로 묶인 상태였고, 발목 역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고정해놓은 상태였다. 그제야 이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옆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모닥불이 틱틱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어, 어르신?” 대꾸할 리가 없는 사람을 찾아봤지만 불안감만 더 커질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상황에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속마음은 마치 폭풍우에 휘둘리는 종이배와 같았다.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위장이 더 아려왔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히기 시작했고, 숨이 가빠졌다. 주위에 걸려있던 가죽들과 뼛조각들이 새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인간의 뼈가 아닐까라는 끔찍한 상상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랐다. 옆을 보니 어제 잠들기 전에 보았던 쥐 우리였다. 순간 온 몸에 털이 바늘처럼 바짝 선 착각이 들었다. 걸쭉한 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고 덥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마에는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묶인 몸을 조금씩 뒤척이며 그 우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엉덩이로만 움직여서 그런지 쥐가 날 것만 같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 우리에 살짝 귀를 갔다댔다. 소리가 들렸다. 미세하지만 신음에 가까운 사람의 숨소리가. "!!" 뭔가 잘못되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고, 눈동자를 어디 둬야할지 누군가 안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심장은 마라톤을 하고 난 것처럼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속이 메스껍다. 지금 당장이라도 미친 듯 욕하고 발버둥치고 싶었지만 손발이 묶인 상태로 움직여봐야 찾아오는 것은 정체불명의 위험일 뿐이다. “지, 진정하자” 최대한 이 상황을 냉정히 바라보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날 묶어놓은 것도 나에게 ‘약’을 먹인 것도 그 노인일 것이다. 이런 곳에 약이 있다고 생각할 순 없지만 몸에 힘이 없고 기절하듯이 잔 것을 보면 분명 그와 비슷한 종류의 식품을 먹인 것이 분명하다. 이 곳에는 내가 모르는 상식들이 존재하는 것 같으니 단 하나라도 쉽게 넘길 수 없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쥐 우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제는 그저 쥐를 가둔 우리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앉은 상태에서 발가락만으로 그 가죽을 슬금슬금 끌어당겼다. 처음에 조금 힘들긴 했지만 곧 익숙해졌고, 이내 그 덮개를 모두 벗겨낼 수 있었다. “헉” 그 가죽을 다 벗겼을 때 믿기 힘든 사실과 직면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릴 뻔 했다.) 그 우리에 있던 것은 실호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내였다. 불행히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의 입에는 뼈와 가죽으로 이뤄진 재갈이 물려있었고, 한 쪽 팔과 한 쪽 다리가 없었다. 그냥 없는 게 아니라 잘려있었다. 절단면에 불로 지진 듯한 흔적이 있는 것이 그 증거. 그 팔과 다리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하려고 하자, 어제 먹은 고기가 떠올랐다. “우웩!!” 위액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기진 상태에서 먹은 음식이라 헛구역질만 할 뿐 그것이 도로 나오지는 않았다. 날 바라보는 두 쌍의 눈에서는 뺨을 흥건히 적실만큼의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가 서로 부딪치며 소음을 내기 시작했고, 그제야 날 속박하고 있던 끈을 끊기 위해 발버둥쳤다. 가죽으로 된 것으로 엄청 질겼고, 마치 쇠사슬을 묶어 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고, 뼈에 무리가 갈 정도로 팔을 잡아당겨도 끈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문득 어제 보았던 뼛조각들이 떠올랐고, 그것을 찾기 위해 눈을 빠르게 굴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숨쉬기 힘들어 자칫 호흡곤란 장애가 올 정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찾자 겨우 쓸만한 뼛조각을 찾았다. 뾰족하고 날카로워 칼로 쓰기에는 별 무리 없어보였다.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려 묶여있던 양손에 뼈를 쥐게 해주었다. 그리고 손이 자유롭지 못해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해 뼈를 움직였다. 온 감각이 민감하게 열려있었다. 마치 땀구멍이 콧구멍처럼 벌렁거리는 것처럼 감각이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 그리고 곧 그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소리였다. 누군가가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라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 나의 예민한 감각은 개미의 페로몬 뱉는 소리도 잡아낼 것이다. “에이! 오늘도 허탕이구만”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흘렀고, 맨 처음 누워있었던 상태로 재빨리 누웠다. 물론 뼛조각은 들키지 않기 위해 손아귀에 적당히 숨겼다. 누워있는 사람의 손을 펴보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살며시 실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제야 알아차렸다. 우리에 덮인 가죽을 그대로 뒀다는 사실을! 오만가지의 생각과 오만가지의 비극이 뇌혈관을 헤집고 다녔다. 그의 발자국소리가 거의 10m 정도로 다가왔다.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세워 다시 발가락을 이용해 가죽을 덮으려 했다. 하지만 사람을 가둔 우리라서 그런지 상당히 컸고 (만약 작더라도 그 상황에서는 미친 듯이 크게 느껴졌을 거다.), 겨우 덮는 일 뿐이지만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그럴수록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마음만 더 조급해져서 계속 실수를 연발했다. 그 때 날 바라보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두렵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의 눈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이 싹 잊어졌다. 그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쥐가 얼마 없구먼. 박쥐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장식용인 줄만 알았던 큰 가죽이 들썩이더니 그 밑에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가죽으로 덮어놓은 구멍에서 기어 나왔고, 음습한 목소리가 뇌리를 흔들었다. 흑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처럼 희번덕거렸다. 처음에 보았던 온화하던 노인의 눈이 아니었다. 살며시 뜨고 있던 눈을 완전히 감아버렸다. 그가 눈치 챘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으니까. “어라? 왜 덮개가 떨어져있지?” 흑인의 의아한 목소리가 목을 조아오는 듯 했다. 하느님을 수백 번 부르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안에 있던 사람은 마구 발버둥쳤다. 흑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숨소리가 거칠었다.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다. “신발, 또 지랄이야? 일부러 춥지 말라고 가죽까지 덮어뒀더니만……. 오냐, 오늘 저녁은 네가 좀 채워줘야겠다” 온 몸에 있던 두려움이 빨래를 짜듯 흘러나왔다. 자고 있는 척하긴 했지만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컸다. 만약 우리에 있던 사람이 가만히 있었다면 내가 진작 다음 타깃이 됐을지도 모른다. “어디보자……. 여기 있구먼.”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이 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감각이 예민해서 그런지 모든 것을 스크린으로 보듯 생생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지금 흑인은 갈아놓은 돌칼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고 있고, 저녁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고 있는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 갇혀있는 사내는 처절하다 못해 끔찍한 비명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비명소리는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고 오직 방 안에만 소리 없이 울릴 뿐이었다. “우우웁!! 우웁!! 웁웁!!!!!” 너무 무서웠다. 차라리 콘크리트 벽에 매달려 있을 때가 훨씬 나았다.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고, 심장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신경안정제를 주입하지 않으면 심장발작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우우우우우우웁!!!!!!” 단말마처럼 처절하게 울리는 그의 비명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돌칼이 바닥을 내려치는 소리까지. 의식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빌고 빌었던 하느님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 다른 이야기http://pann.nate.com/b315723228http://pann.nate.com/b315737692http://pann.nate.com/b315738286http://pann.nate.com/b315775792http://pann.nate.com/b315775938http://pann.nate.com/b315783901http://pann.nate.com/b315806213http://pann.nate.com/b315825660http://pann.nate.com/b315839806http://pann.nate.com/b315840325http://pann.nate.com/b315849447http://pann.nate.com/b315946845http://pann.nate.com/b316006853http://pann.nate.com/b316067176http://pann.nate.com/b316227123 http://pann.nate.com/b316330745 55
[장편]괴물의 탑(6~10)
출처 : http://web.humoruniv.com/main.html
< 웃대 : 듀라라 님 >
그 일기에 적힌 그대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내가 있는 방은 일기와는 다르게 녹슨 철창이 아니라 침대뼈대로 부시거나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좋은 도구가 있다.
황산과 실톱이 부서진 뼈대보단 훨씬 쓸모있을거다.
일단 철창은 4개이니 맨 오른쪽에 있는 것만 내버려두고 다른 것들만 녹이기로 했다.
하나는 나중에 밧줄을 묶을 때 써야하니까.
세면대와 변기에 묶는 것도 괜찮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밧줄의 길이를 길게 하는 것이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 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일단 황산을 들고 조심스럽게 철창에 부었다.
살짝 부었을 뿐인데 엄청난 양의 연기와 지독한 쇠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마치 튀김이라도 튀기듯 큰 소음이 좁은 방에 울려 퍼졌다.
환기가 되는 창이라 망정이지 만약 방 안에서 저런 짓을 했다간 유독가스에 노출되어
어떻게 됐을지 생각조차 하기 싫다.
그 유독가스를 최대한 안 들이쉬기 위해 환자복을 입까지 올려 마스크처럼 사용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자 마치 녹다만 초콜릿처럼 변한 철창이 보였다.
얼마나 큰 고온이 철창을 괴롭혔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식히고 난 뒤에야 철창을 끊을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철창에 묻은 황산이 하나뿐인 실톱까지 녹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조금씩 힘을 주어 첫 번째 철 기둥을 썰었다.
다소 힘이 들었지만 조금 고생하니 어떻게든 끊어낼 수 있었다.
그 후 처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2개를 끊을 수 있었다.
"후……."
일기장의 그처럼 나도 땀이 범벅이가 되었다.
철창을 자르는 일은 쉽지 않았고, 노가다라도 한 듯 어깨에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잠시 쉬고자 하는 마음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만히 앉으니 이번엔 밧줄이 떠올랐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불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방금 사용해서 따끈따끈해진 실톱으로 이불을 잘랐다.
너무 가느다랗게 자르면 끊어질 테니까 어느 정도 굵게 만들어야만 했다.
차라리 짧으면 짧았지 억지로 길게 만들어서 끊어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러다 문득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도 쓰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실톱으로 조심스럽게 시트에 붙은 천을 뜯어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천을 모우고 길게 묶으니 일기장에서 나왔던 것보다 훨씬 더 긴 밧줄이
만들어졌다. 대략 8m쯤은 되어보였다.
그 다음에는 곧바로 밧줄 강도를 확인했다.
밧줄을 철창에 단단히 묶어놓고 힘껏 당겨보았다.
낡기는 했어도 사람 한 명의 무게는 지탱할 수 있는 지 그럭저럭 괜찮아보였다.
일기장을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구석에 있는 일기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 노트의 내용 덕분에 쓸데없는 생각과 우유부단한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기대로라면 이상한 부분이 있다.
바로 그가 가진 물건과 내가 가진 물건의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나처럼 쓸모 있는 도구가 아닌 그저 시간 때우기 위한 도구만이 주어졌다.
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물건들을 그에게 준 것일까?
나처럼 탈출을 위한 도구도 아니지 않은가?
뭐, 어찌되었건 일기장의 그로 인해 내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그는 탈출이 아닌 일기장을 여기에 남기기 위한 일회용 도구가 아니었을까?
"으차"
잡생각을 털어버렸다. 큰일을 치르기 위해선 다른 생각을 지워야만 했다.
어느 정도 쉬자 몸에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쇠뿔도 당긴 김에 빼라고 여기서 우유부단하게 있어봤자 좋을 것 하나없다.
일어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그것이 눈에 띄었다.
제대로 된 도구를 사용 못해서 그런지 철창에 철이 살짝 삐져나와 자칫 잘못하면 큰 상처가
날 것만 같았다.
"천 조각으로 덮으면 되려나?"
바닥에 남은 천으로 그것을 덮었다.
어차피 한번만 빠져나가면 되니까 대충 천으로 묶어두었다.
자, 이제 완벽하다.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도움이 될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다가 문득 실톱과 노트가 보였다.
노트는 모르겠지만 실톱은 아마 또 사용할 일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 챙겨놓기로 했다.
실톱을 챙기는 김에 노트도 같이 챙기기로 했다.
실톱을 노트 사이에 끼워 넣은 뒤 바지춤에 넣어뒀다.
완벽하게 준비를 끝낸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처했고, 이렇게 배고픔에 시달리는 상태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련을 눈 돌리고 피할 순 없다. 시련은 뛰어넘으라고 있는 거다.
들고 있던 8m 가량의 긴 밧줄을 창 너머로 던졌다.
빗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천 밧줄을 있는 힘껏 때렸다.
심장이 뛴다.
내 삶에서 이렇게 두근거리는 순간이 있었던가?
상황에 맞지 않는 두근거림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이런 곳에 납치된 주제에 두근거림은 무슨.
힘껏 밧줄을 쥐었다.
혹시 풀릴 지도 모르니 천을 한 번 감아쥐었다.
그렇게 양손을 천을 감아쥐고 창에 발을 올렸다.
맨발이라 그런지 콘크리트가 한 없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빗줄기가 얼마나 거센 지 마치 나를 계속 방에 가두려는 파수꾼 같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끝없는 바다도 올가미처럼 발을 묶었다.
마치 강력접착제로 붙어놓은 듯 발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마음속에 두려움과 공포라는 악마가 날 붙잡고 있었다.
'나가지마. 나가면 죽어. 죽는다고 킥킥킥. 내려가면 뭐라도 있을 것 같아?
아냐 아무것도 없어! 멍청아!! 킥킥킥'
공포가 날 겁주고 있었다.
"신발!! 진짜 30살이나 처먹고 왜 이 지랄이냐고!!"
생각해보면 겁쟁이였다.
지금껏 도전과 무모한 행동은 절대한 적이 없었다.
일탈?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다.
어릴 적부터 누군가가 나의 길을 잡아주고, '좋은 대학가면 성공할거야' 라고 길을
만들어주었다.
사실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어릴 적 한 번도 글짓기 상을 놓친 적 없었고, 언제나 내 이름이 학교 현수막을 장식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시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글짓기 좋았고 나름 재능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길을 외면하고 아스팔트가 잘 깔린 편한 길.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길을 걷기로 시작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사실 아스팔트 바닥이 편하기는 했다.
아무 생각이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런 삶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침대에서 여자를 안고 있어도, 고생해서 승진해도, 맛있는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어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는 듯한 괴기감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으니까.
왜냐고?? 누군가가 이 길을 걸으라고 강요했으니까 내가 원했던 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틀에서 벗어나서 아무도 걷지 않은 곳.
잡초들이 허리까지 오는 그런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라고 하는 그런 답답하고 불쾌한 아스팔트가 아닌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산길.
고요하던 주위에 다시 시끄러운 빗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게 지껄이던 악마가 죽은 듯 조용해졌고, 발가락도 평소처럼 움직였다.
마른침을 삼킨 뒤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발을 창 너머로 뻗었다.
차가운 빗줄기들이 발을 인정사정없이 때렸다.
"멋지다!! 나 완전 짱이다! 가자! 가자!"
아직 방 안에 남아있던 발을 창 너머로 뻗자 갑자기 몸이 슉 내려가는 아찔한 공포감이
온 몸에 찌릿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콘크리트 벽면의 날카로운 냉기가 양 발바닥에 스며 들어왔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고 젠장!
마치 10층짜리 건물 벽에 매달려있는 듯 했다.
용기를 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는 큰 파도가 치고 있는 바다가 심해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겨우 몇 초 동안 벽에 매달려있었을 뿐인데 온 몸에 힘이 쫙 빠져나가는 듯 했다.
비에 젖어 축 늘어진 환자복이 부담감을 더 늘려주었다.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숨소리는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얼음화살처럼 머리와 등을 때리는 빗줄기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1cm정도 내려갈 만큼 눈에 띄지 않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작은 한 발자국이
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 힘을 받아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지금 용기 있게 내려갈 수 있는 이유는 방금 아래를 보았을 때 또 다른 창이 어렴풋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기로 들어가면 살 수 있다.
분명 저기에는 음식도 있고, 편안한 침대도 있고, 날 구출하러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개소리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 나의 눈에는 저 곳이 낙원으로만 보였다.
그 때였다.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후려치는 듯 했다.
아찔해졌다.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다. 아래에 창에…….
철창이 채워져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리오네트의 끈을 끊어버리듯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쥐고 있던 천을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거의 1m 정도 미끄러지고서야 천을 다시금 꽉 질 수 있었다.
"젠장!! 왜 갑자기 그 딴 개 같은 생각이!!"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다시 올라갈 힘 따위는 애초에 없었으니까.
이 순간에 목숨을 걸었다.
처음 창에 발을 올렸을 때 머뭇거렸던 것도 아마 내 마음 속 깊숙이 이런 상황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말 철창이 채워져 있으면 어떻게 하지?
지금 이 떨리는 손으로는 올라가는 커녕 내려가기조차 힘들다.
무섭다. 무서워. 무서워서 미칠 것 같다.
숨쉬기조차 지금 나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다.
이제 거의 5m 지점에 도착했지만 더 내려갈 힘이 없었다.
눈조차 뜰 수가 없다.
빗줄기가 눈을 너무 때려 피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손과 발은 차가운 콘크리트 때문에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학!! 하익!"
날카로운 바람과 화살 같은 빗줄기가 끊임없이 등짝을 때렸다.
거친 숨소리만이 내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겨우겨우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오기 전에 밧줄을 한 번 안 감아쥐었다면 진작 빗줄기들과 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로 추락했을 것이다.
그 때 잔뜩 찌푸린 눈살 사이로 그것이 보였다.
어두운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 동공이 커지고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근육이 아파왔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아아아아!!"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고, 곧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숨이 터질 정도로 뭔가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애타게 삶을 갈망한 적이 있던가?
매일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는데 정말 철없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누구보다도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신은 시련이라는 허들을 쉽게 넘게 해주지 않았다.
"!!"
갑자기 강한 돌풍이 불어왔고, 그 바람에 체중이 왼손에 쏠리게 되어 나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천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끔찍하게 차가웠던 콘크리트에서 발이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슬아슬하게 오른손에 묶여있던 천으로 겨우 몸을 지탱했다.
거친 빗줄기와 강한 바람 때문에 나의 몸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발바닥이 벽과 붙어있을 땐 몰랐는데 벽과 멀어지니 균형을 유지할 수 없어서
비명이 터져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마치 소가 내 팔을 잡아당기듯 끊어질 것만 같았고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목을 조르듯 숨이 탁 막혀왔다.
천을 쥐고 있던 손아귀 힘이 조금씩 풀렸다.
갑작스러운 돌풍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그럴 힘과 여유조차 없었다.
콘크리트 벽면에 닿기 위해 소금을 뿌린 미꾸라지처럼 발버둥쳤다.
그럴수록 손가락이 하나씩 풀리는 게 느껴졌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껏 포기는 수 없이 많이 해왔다.
이젠 포기가 아니라 도전을 해야 할 때다!
더 거칠게 발버둥 쳤고, 그러자 오른손에 힘이 순식간에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바다에 추락하나 몇 초 후에 떨어지나 매 한 가지였다.
"제발! 제발! 닿아라! 닿으라고!!"
그 순간 엄지발가락이 콘크리트 벽면에 닿았지만 붉은 핏물만 아래로 떨어질 뿐이었다.
그 뒤를 이어 엄지발톱이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아니, 통증을 느낄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다시금 발바닥을 벽에 닿게 하려고 마지막 힘을 다해 움직였다.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발을 뻗었다.
그 순간 다른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내 몸을 벽에 착 달라붙여 주었다.
'아!! 해냈다!'
몸이 벽에 달라붙자 방금 전까지 끊어질 듯한 팔에 겨우 휴식을 줄 수 있었다.
왼손으로 방금 놓쳤던 천을 다시금 굳게 잡아 쥐었다.
고통이 반으로 줄었고, 나지막한 한숨이 떨리는 치아 사이로 새어나왔다.
하지만 이미 체력을 거의 소진한 탓에 더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멈춤 버튼을 누르고 쉬고 싶었다.
“학학…….”
아프다.
오른쪽 팔뚝 인대가 늘어난 모양이다.
힘이 들어가지 않고 통증이 멈추지 않고 밀려왔다.
이제 3m 정도만 내려가면 아래층이었는데.
도저히 그 몇 걸음 뗄 수가 없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순식간에 내 몸을 사슬처럼 휘어 감았다.
그러자 지금껏 잊고 있었던 과거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 날 생전 처음으로 글짓기로 상을 받았다.
초등학교에서 하는 조잡한 장려상일 뿐이었지만 전교생 500명이 넘는 큰 학교였기에
나는 너무나도 큰 감동과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느꼈던 짜릿함을 다시 느끼기 위해 나는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었다.
장려상이 우수상이 되고 우수상이 전국적인 상으로 바뀌기까지 큰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국에서 개최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은상을 얻어냈다.
그 때 학교 현수막엔 내 이름 김희수라는 이름이 바람에 펄럭거렸었다.
그리고 상을 받아갔을 때 웃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그 때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했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였던가? IMF이었던가?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직장을 잃고 우리 집은 순식간에 40평짜리 큰 집에서 10평 남짓한
원룸으로 옮기게 되었다.
사업실패. 사업부도. 이런 단어들이 낯설었던 15살의 겨울이었다.
난방이 잘 되지 않았던 원룸이 싫었던 나는 매번 도서관으로 갔었다.
그걸 알아차리신 어머니께서는 입버릇이 하나 생기셨다.
‘돈 못 버는 작가 같은 거 하지 말고 돈 되는 대기업에 들어가라고’
그 때부터일까? 꿈을 부정하고 공부에만 매달리게 된 것이.
“!!!”
사념을 깨기라도 하듯 또 다시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어왔고,
나의 몸뚱이는 갑작스러운 바람 때문에 아래로 주르륵 떨어지다시피 내려갔고,
이를 악물며 겨우겨우 버텨냈다.
그 때문에 손을 쥐고 있던 천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으아”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에서는 처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두 눈을 질끈 감아보았지만 통증이 완화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눈을 다시 떴을 때 작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설마 미끄러져서 아래층에 도달할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바로 내 발 밑에는 익숙한 사각형 구멍이 보였다.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졌고, 통증이 점차 완화되면서 쾌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아래 창에 철창이 있는 지를 확인했다.
만약 철창이 있다고 하더라도 천에 불안하게 매달려 있는 것보단 철창에 매달려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때였다.
철창이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해 발을 넣는 순간 균형이 깨지면서 내가 쥐고 있던 천들을
모조리 놓아버렸다.
미끄러졌던 것 때문에 근육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아래로 몸이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 순간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날 괴롭히던 빗줄기들이 천천히 허공에서 떠다니는 것이 보였고,
그 사이에 붉은 핏물들도 허공에 빙글빙글 회전하며 떨어졌다.
공포와 두려움보다는 너무나도 강한 아쉬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시간이 100분의 1로 쪼개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빗물 때문에 눈을 감은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니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모르겠다.
“!!”
그 때 발에 무언가 걸린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느긋하게 떨어지던 빗줄기들이 다시 쏟아져 내렸고,
물구나무서기를 한 것처럼 배를 훤히 내 놓은 상태가 되었다.
매달려 있기 때문에 빗줄기들이 콧구멍으로 들어왔고,
그로인한 목구멍에 불쾌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슬아슬했구먼.”
목소리다. 사람의 목소리.
빗줄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아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창을 바라보았다.
발목을 꽉 쥐고 있던 온기. 사람의 손이었다. 저건 분명히 사람의 손이다!
발목을 쥐고 있던 손이 양손이 되더니 조금씩 끌어올렸다.
마치 함정에 걸린 짐승처럼 천천히 구멍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다.
( 물론 그 짐승들과의 심경은 반대이겠지만.)
콘크리트 벽면 탓에 등을 사포로 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몸에 힘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살아났다는 믿을 수 없는 상황 탓일까 아무 말 없이 통증을 견뎌냈다.
잠시 후 구릿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백열등의 빛을 보였다.
저 구려 보이던 황금빛이 너무나도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몰매 맞는 듯한 통증은 사라지고 눈을 찌르던 화살들도 어느 새 사라지고 없었다.
엄지발가락과 양손에 아련한 통증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누워있는 지저분한 이불조차 너무나도 포근했다.
모든 것이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도 어리석게 느껴졌다.
죽음의 문턱에 다녀와서 그런지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깨달음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그렇게 바닥에 누워 멍하니 누런빛을 쳐다보고 있자 갑자기 무언가가 빛을 차단했다.
날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제야 그에게 시선이 갔다.
아직도 정신이 몽롱해서 꿈을 꾸는 듯 했다.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곳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살았구먼.”
“누구시죠……?”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둥이가 그것을 가장 먼저 뱉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네보다 ‘이 곳’에 일찍 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벽면에 잔뜩 쌓여있는 도구들에 눈이 갔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방 가운데에 있는 모닥불이었다.
그는 나의 시선을 읽은 것인지 아무 말 없이 나를 이끌고 모닥불 근처로 데려가 앉혔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여기저기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아련한 통증이 극심한 고통으로 변해 뇌를 자극해왔고, 몸이 크게 들썩였다.
인대가 늘어난 왼팔에는 끊임없이 미세한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날 구해준 그는 내 건너편에 앉았다.
“일단은 묻고 싶은 게 많을 테지만 지금은 잠깐이나마 쉬게나. 배도 고플 테니 이것도 좀 먹고.”
그가 건넨 것은 손바닥만한 검붉은 덩어리였다.
여기저기 먼지가 묻어있고 곰팡이가 핀 그것을 보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본능은
나의 자존심 따위 간단히 무시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입 구멍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육포였다.
무슨 고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의 그 어떤 육포보다 달고 맛있었다.
먼지가 여기저기 묻어있었기에 털고 먹어야했지만 지금 상황에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고 나니 온 몸에 기운이 돌았다.
마치 연료가 없던 자동차에 기름을 넣듯 몸 여기저기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 후 겨우 그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흑인이었다.
온 몸에 근육이 적당히 붙어있는 그를 보는 순간 경계심이 들었지만 60대정도로 되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먹을 것도 주시고 절 살려주시고 감사합니다.”
“오? 말을 할 수 있었군! 난 벙어리인 줄 알았다네. 허허허!”
그는 대장군 같은 외모답게 호탕하게 웃었다.
외국인과 대화를 해본 것은 처음이라 긴장했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의 한국어는 그만큼 유창했다.
그는 검은 피부에 하얀 머리털, 하얀 턱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옷으로는 무엇의 가죽인지
알 수 없는 가죽옷을 두르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방금 제가 먹은 것은 무엇인가요?”
“아? 그거? 박쥐고기야.”
순간 역하고 더러운 무언가가 속에서 부글거렸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서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북한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박쥐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나라고 먹는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거기다가 불에 잘 익혔으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단결 지었다.
그렇게 암시를 해야지만 이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다.
작은 여유가 생긴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인디안 족장의 집처럼 여기저기 가죽이 걸려있고, 날카로운 돌칼이나 뼈로 만든
도구들이 눈에 보였다.
뼈를 보는 순간 스산한 기분이 들었지만 박쥐고기를 생각하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그 후 천천히 궁금하던 것을 조금씩 물어보기로 했다.
배도 부리고 어느 정도 쉬었더니 아프던 근육통들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핏물이 흘러나오는 부위는 빗물을 모아서 어느 정도 닦은 뒤 딱지가 앉기를 기다렸다.
지금 상황에 더러운 천이라든지 가죽으로 상처를 봉했다간 2차 감염까지 이뤄질 수 있으니까.
“저기, 여기가 어디죠??”
“음……. 시작부터 어려운 질문이로구나.”
그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을 보니 그도 여기가 어디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뭔가 있는 듯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자면……. 나도 여기가 어디인지 어느 나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네.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인가 생각했다가 곧 생각을 바꿨지.”
그는 일순간 침묵을 고수했다.
고요해지자 모닥불에 타고 있는 알 수 없는 덩어리에서 틱틱거리는 소리와 빗소리만이
그의 방을 가득 메웠다.
그의 입에서 말이 나온 것은 3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이 곳은 비가 단 하루도 그치지 않아.”
“네?”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단 한번도 비가 그치지 않는다네.”
“그, 그게 가능한 소리인가요?”
“불가능하지.”
“그, 그럼??”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겠지.
내 질문은 어째서 지구가 있고 우주가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저 노인도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을 텐데 속으로 아차 싶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네. 어쩌면 아직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지역일지도 모르지.
그곳에 왜 우리가 왔는지도 모르고……. 자네도 봤다시피 여긴 우박에 가까운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네. 그러니 여기에 건물을 짓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하지만 실제로 건물은
존재하고 있어. 그 건물에 우리가 있는 것이 그 증거지.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네.”
“아…….”
깊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 건물 존재 자체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그저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케 했다.
가죽들이 가득한 집 안을 보면 그가 여기에 오랜 세월을 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그는 나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오랜 시간동안 여기에 갇혀 지낸 셈이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건 또렷한 진실이다.
“여기에 얼마 정도 계셨습니까?”
“글쎄……. 거의 10년 정도 되었을 걸세”
“시, 십년이요?!”
너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았는지 거의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흑인도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뭐, 10년 동안 지내다보니 여기도 그리 나쁜 곳은 아닐세. 먹을 만한 식량도 적당히 있고,
박쥐들도 있는 걸보면 분명히 어디에 먹을 것이 있다는 소리니까. 가끔 쥐도 있기도 하고.”
“그럼 10년 동안 박쥐고기와 쥐고기만 먹었다는 소리인가요?”
“뭐, 거의 그렇게 먹었지. 가끔 풀도 먹고”
“풀이라고요? 햇빛도 없이 식물이 자라나나요?”
“이끼도 식물이라네. 습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도 있지.”
그 순간 흑인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의 방 어디에도 풀도 박쥐도 없었으니까.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그는 작게 웃었다.
“박쥐는 거의 한달에 한번 꼴로 창 너머에서 들어온다네. 그것들을 암컷 수컷으로 가려서
사육하는 거지.”
그는 박쥐 가죽을 여러 개 붙여서 만든 이불 같은걸 가리켰다.
큰 사각형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걸보니 작은 우리를 만들어 거기에 박쥐를 넣어두고
이불로 덮은 모양이다.
살짝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보기보다 많은 박쥐들을 사육하고 있는 모양이다.
박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쥐와 풀은 어디서 구해오는 것일까?
“모든 것이 궁금한 모양이로구나. 조금씩 알아갈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게”
그는 옆집 할아버지 같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안도 반 두려움 반을 느꼈다.
그의 말을 바꿔서 말하면 여기서 이제 계속 지내게 될 테니까 호들갑 떨지 말라는
소리와 같았다.
그러면서도 안도한 것은 여기에 혼자 남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이렇게도 편안함을 주다니.
이래서 다들 사람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칭하는 모양이다.
문득 백소라 팀장님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서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내 눈 앞에 있는 일에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누군가와 있다는 안도감과 포만감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모닥불 옆이라 마음이 편안해졌고, 덮고 있던 가죽 덕에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흑인은 계속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의식이 옅어졌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는 것은 조금 위험했지만 그는 날 살려준 사람이다.
설마 무슨 짓을 하겠는가?
그 후 마치 향기로운 와인에 취한 듯 순식간에 의식의 심해로 빠져들었다.
속에서 뜨거운 용암이 부글거리듯 위장이 따끔거린다.
낯설지 않은 감각. 처음 이 곳을 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몸에 힘이 없고 입이 바짝 마르는 것까지 말이다.
그 순간 정신이 번개처럼 깨어났다.
“!!”
묶여있었다.
양손은 등 뒤로 묶인 상태였고, 발목 역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고정해놓은 상태였다.
그제야 이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옆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모닥불이 틱틱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어, 어르신?”
대꾸할 리가 없는 사람을 찾아봤지만 불안감만 더 커질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상황에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속마음은 마치 폭풍우에 휘둘리는 종이배와 같았다.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위장이 더 아려왔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히기 시작했고, 숨이 가빠졌다.
주위에 걸려있던 가죽들과 뼛조각들이 새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인간의 뼈가 아닐까라는 끔찍한 상상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랐다.
옆을 보니 어제 잠들기 전에 보았던 쥐 우리였다.
순간 온 몸에 털이 바늘처럼 바짝 선 착각이 들었다.
걸쭉한 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고 덥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마에는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묶인 몸을 조금씩 뒤척이며 그 우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엉덩이로만 움직여서 그런지 쥐가 날 것만 같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 우리에 살짝 귀를 갔다댔다.
소리가 들렸다. 미세하지만 신음에 가까운 사람의 숨소리가.
"!!"
뭔가 잘못되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고, 눈동자를 어디 둬야할지 누군가 안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심장은 마라톤을 하고 난 것처럼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속이 메스껍다.
지금 당장이라도 미친 듯 욕하고 발버둥치고 싶었지만 손발이 묶인 상태로 움직여봐야
찾아오는 것은 정체불명의 위험일 뿐이다.
“지, 진정하자”
최대한 이 상황을 냉정히 바라보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날 묶어놓은 것도 나에게 ‘약’을 먹인 것도 그 노인일 것이다.
이런 곳에 약이 있다고 생각할 순 없지만 몸에 힘이 없고 기절하듯이 잔 것을 보면
분명 그와 비슷한 종류의 식품을 먹인 것이 분명하다.
이 곳에는 내가 모르는 상식들이 존재하는 것 같으니 단 하나라도 쉽게 넘길 수 없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쥐 우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제는 그저 쥐를 가둔 우리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앉은 상태에서 발가락만으로 그 가죽을 슬금슬금 끌어당겼다.
처음에 조금 힘들긴 했지만 곧 익숙해졌고, 이내 그 덮개를 모두 벗겨낼 수 있었다.
“헉”
그 가죽을 다 벗겼을 때 믿기 힘든 사실과 직면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릴 뻔 했다.)
그 우리에 있던 것은 실호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내였다.
불행히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의 입에는 뼈와 가죽으로 이뤄진 재갈이 물려있었고, 한 쪽 팔과 한 쪽 다리가 없었다.
그냥 없는 게 아니라 잘려있었다.
절단면에 불로 지진 듯한 흔적이 있는 것이 그 증거.
그 팔과 다리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하려고 하자, 어제 먹은 고기가 떠올랐다.
“우웩!!”
위액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기진 상태에서 먹은 음식이라 헛구역질만 할 뿐 그것이 도로 나오지는 않았다.
날 바라보는 두 쌍의 눈에서는 뺨을 흥건히 적실만큼의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가 서로 부딪치며 소음을 내기 시작했고,
그제야 날 속박하고 있던 끈을 끊기 위해 발버둥쳤다.
가죽으로 된 것으로 엄청 질겼고, 마치 쇠사슬을 묶어 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욱 마음이 조급해졌고, 뼈에 무리가 갈 정도로 팔을 잡아당겨도 끈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문득 어제 보았던 뼛조각들이 떠올랐고, 그것을 찾기 위해 눈을 빠르게 굴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숨쉬기 힘들어 자칫 호흡곤란 장애가 올 정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찾자 겨우 쓸만한 뼛조각을 찾았다.
뾰족하고 날카로워 칼로 쓰기에는 별 무리 없어보였다.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려 묶여있던 양손에 뼈를 쥐게 해주었다.
그리고 손이 자유롭지 못해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해 뼈를 움직였다.
온 감각이 민감하게 열려있었다.
마치 땀구멍이 콧구멍처럼 벌렁거리는 것처럼 감각이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
그리고 곧 그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소리였다. 누군가가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라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 나의 예민한 감각은 개미의 페로몬
뱉는 소리도 잡아낼 것이다.
“에이! 오늘도 허탕이구만”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흘렀고, 맨 처음 누워있었던 상태로 재빨리 누웠다.
물론 뼛조각은 들키지 않기 위해 손아귀에 적당히 숨겼다.
누워있는 사람의 손을 펴보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살며시 실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제야 알아차렸다.
우리에 덮인 가죽을 그대로 뒀다는 사실을! 오만가지의 생각과 오만가지의 비극이 뇌혈관을
헤집고 다녔다.
그의 발자국소리가 거의 10m 정도로 다가왔다.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세워 다시 발가락을 이용해 가죽을 덮으려 했다.
하지만 사람을 가둔 우리라서 그런지 상당히 컸고
(만약 작더라도 그 상황에서는 미친 듯이 크게 느껴졌을 거다.),
겨우 덮는 일 뿐이지만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그럴수록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마음만 더 조급해져서 계속 실수를 연발했다.
그 때 날 바라보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두렵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의 눈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이 싹 잊어졌다.
그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쥐가 얼마 없구먼. 박쥐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장식용인 줄만 알았던 큰 가죽이 들썩이더니 그 밑에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가죽으로 덮어놓은 구멍에서 기어 나왔고, 음습한 목소리가 뇌리를 흔들었다.
흑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처럼 희번덕거렸다.
처음에 보았던 온화하던 노인의 눈이 아니었다.
살며시 뜨고 있던 눈을 완전히 감아버렸다.
그가 눈치 챘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으니까.
“어라? 왜 덮개가 떨어져있지?”
흑인의 의아한 목소리가 목을 조아오는 듯 했다.
하느님을 수백 번 부르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 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안에 있던 사람은 마구 발버둥쳤다.
흑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숨소리가 거칠었다.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다.
“신발, 또 지랄이야? 일부러 춥지 말라고 가죽까지 덮어뒀더니만……. 오냐, 오늘 저녁은
네가 좀 채워줘야겠다”
온 몸에 있던 두려움이 빨래를 짜듯 흘러나왔다.
자고 있는 척하긴 했지만 심장소리가 북소리처럼 컸다.
만약 우리에 있던 사람이 가만히 있었다면 내가 진작 다음 타깃이 됐을지도 모른다.
“어디보자……. 여기 있구먼.”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이 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감각이 예민해서 그런지 모든 것을 스크린으로 보듯 생생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지금 흑인은 갈아놓은 돌칼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고 있고,
저녁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고 있는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 갇혀있는 사내는 처절하다 못해 끔찍한 비명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비명소리는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고 오직 방 안에만 소리 없이 울릴 뿐이었다.
“우우웁!! 우웁!! 웁웁!!!!!”
너무 무서웠다.
차라리 콘크리트 벽에 매달려 있을 때가 훨씬 나았다.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고, 심장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신경안정제를 주입하지 않으면 심장발작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우우우우우우웁!!!!!!”
단말마처럼 처절하게 울리는 그의 비명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돌칼이 바닥을 내려치는 소리까지.
의식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빌고 빌었던 하느님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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