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eb.humoruniv.com/main.html< 웃대 : 듀라라 님 > 그리고 그 몇 초 후 고요해졌다. 그 기분 나쁜 침묵 탓에 가슴이 살얼음에 끼는 것만 같았다. “에이……. 죽은 건가? 비상식량이었는데 젠장……. 조금만 참을 껄 그랬나?” 그의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만큼 잔혹하지만 너무나도 평온한 말투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제야 흑인의 관심이 나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북소리와 맞먹을 정도의 심장소리. 그의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눈꺼풀 위를 비추고 있던 불빛이 가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고 있었다. “응? 그리고 보니 자세가 조금 변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쭈그려 앉아서 나에게 다가왔다. 더러운 온기가 느껴지면서 뒤통수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소름이 돋았다. 코로 숨을 쉬면 큰 소리가 들릴까봐 일부러 입으로 숨을 쉬면서 소음을 없앴다. “착각인가?” 그렇게 말한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향했다. 아마 다시 우리의 사내 상태를 확인하려는 모양이다. 그의 그림자가 없어지자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지금 당장 이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역시 깨어있었구먼?” 누런 이를 가진 검은 면상이 내 바로 눈앞에 있었고, 참아왔던 비명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으아아아악!!” 그러면서 몸을 최대한으로 일으켜 세워 벽 쪽으로 물러났다. 그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는 귀가 아픈 지 눈살을 찌푸렸다. “면상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 귀가 아프지 않은가? 허허허……. 이래 뵈도 나이가 61살이란 말일세.” 자연스럽게 생각하기 싫었던 우리의 사내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거기엔 너무나도 끔찍해서 생각하기 싫은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도축장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온 세상이 피로 적신 듯 붉게 보였다. “우웩!!” 목구멍 너머에서 누런 액체가 터져 나왔고, 그것이 환자복을 흥건히 적셨다. 아래에서는 바지를 적시는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며칠 동안 먹은 것이 물이라 그런지 웅덩이를 만들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이 댐 터지듯 흘러나왔다. 숨쉬기 힘들어 헐떡거리기 시작했고, 생존본능으로 억지로 숨을 들이쉰다. 온 몸이 더러운 것들로 뒤덮여 있었지만 나의 눈동자는 오직 노인의 다음 행동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케첩일 리가 없는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돌칼이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이 놈이 죽었으니 자네가 비상식량이니까. 쉽게 죽이거나 하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나를 지나쳐 우리의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는 그를 내려다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같이 살아온 세월이 반년이나 되는데 조금 아쉽구먼. 그래도 내가 살아야 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방금 잘라놓은 팔뚝 하나를 모닥불 근처로 가져갔다. 나는 도저히 보기 싫은 삼류 고어물을 바라보면서 제 정신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사내는 정말 고통스럽게 죽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영화나 미술작품보다 잔혹해 보이는 장면이었다. 영화는 한 편의 연기일 뿐이고 예술작품은 그저 상상하는 것뿐이지 않은가?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을 본다면 그런 그림을 당장 팔아버리거나 태워버릴 것이다. 그 순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노인의 손목에는 전자손목시계가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그럼 내가 있던 방의 주인이 저 노인이란 말인가? 아니다. 혹시 저기 죽어있는 사내에게서 빼앗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더 이상 머리를 쓸 수 없었다. 도저히 냉정하게 생각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구석에 챙겨둔 뼛조각 중 하나를 들었다. 딱 봐도 꼬챙이였다. 사용 용도는 안 봐도 뻔했기에 눈을 질끈 감고 다른 곳에 고개를 돌렸다. 또 다시 위가 들썩이긴 했지만 누런 액체가 바닥난 것인지 방금 전처럼 쏟아내지는 않았다. 그저 너무 힘들었다. 이 상황이. “궁금하다고 했었지? 여기가 어디냐고” 지금 와서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여기가 어디인지 몰라 여기에 온 것도 확실히 10년 정도 된 것 같고…….” 고기 익는 냄새가 방 안 가득히 퍼져간다. 속이 메스꺼웠고, 가뭄이 든 논처럼 정신이 피폐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전혀 대꾸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나갈 일은 없겠지만 저기 구멍을 통해 나갈 생각은 말게나. 정말로 괴물이 숨어있으니까” “괴……물?” 처음으로 그의 말에 대꾸를 했다. 그의 말이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네놈이 진짜 괴물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희망을 없애려고 헛소리하는 게 아니라 정말이라네. 믿든 안 믿던 자네 마음이지만. 그리고 탈출할 생각은 안하는 게 좋아. 자네가 탈출해서 개죽음 당하면 식량이 없어져서 곤란하단 말일세.” 그의 말의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가죽으로 덮여있는 구멍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걱정 말게. 금방 익숙해질 걸세.” 이런 곳이 익숙해질 리가 없다. 사람이 사람을 먹고, 괴물이 존재한다고 하고 비가 멈추지 않는 곳.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곳. 여길 만든 놈은 어떤 놈일까. 신일까? 악마일까? 눈물이 쏟아질 만큼 역겨운 소리가 청각을 두드리고, 온 몸의 감각들을 자극했다. 그 노인은 다 구워진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먹고 있었다. 중간 중간에 힘줄이 있어서 그런지 살결 뜯기는 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히 귓구멍을 파고 들어왔다. “너도 한 입 할 테냐?”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미 거의 혼이 나간 상태였으니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이것이 꿈일 것이 분명하다는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있었다. “계속 안 먹으면 굶어죽을텐디. 어제 고기는 잘만 먹더니만” “어제 먹인 건 뭐냐? 설마 사람고기냐?” “허허허! 이놈 보게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이냐? 반말하는 거 보게!” “어차피 나도 똑같이 할 생각이잖아? 예의범절을 따지라고 하지마” “뭐!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심기를 거슬려서 좋을 것 없을 텐데” 그러면서 그는 먹다 남은 고기를 잠시 옆에 세워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보니 확실히 근육이 탄탄한 노인이었다. 만약 정상적인 상태로 싸운다고 하더라도 질 것이 분명했다. 말했다시피 난 술에 쩔어서 사는 30대 회사원. 운동을 하고 싶더라도, 누군가의 생일이라도, 여자친구와 여행을 약속했었더라도. 상사가 부르면 달려가야 한다. 그것이 사회생활이다. 그 흑인이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왔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물론 묶인 상태였기에 얼마 가지는 못 했다. “식욕을 어느 정도 채웠으니 이제 다른 욕구를 풀어야하지 않겠어?” “!!!”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 근육이 떨리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상이 머리를 찌르고 지나갔다. 그제야 내 손아귀에 쥐고 있던 뼈를 다시금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수로 손목을 계속 찔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지금 보니 곱상하게 생겼구먼!” 그러면서 그는 허리춤에 묶어놓았던 가죽 끈을 풀기 시작했다. 나의 손목의 스냅이 더욱 빨라졌고, 방금 전과는 다른 공포가 물 밀 듯이 밀려왔다. “까불어서 죄, 죄송합니다. 요, 용서하세요!” 그러자 그 흑인이 나를 보면서 누런 이를 보였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노인의 얼굴을 보니 당장 창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허허! 걱정 말게나 말했지만 죽이진 않을 걸세!” “제, 제발 부탁입니다.” “뭐라는 건가? 자네 목숨은 이미 내 손에 있다네. 자네가 이러쿵저러쿵 할 자격은 없다네.” “오, 오면 혀 깨물고 죽어버릴 겁니다!!” 그러자 그 흑인은 박장대소로 웃음을 터트렸다. “프하하하하!! 자네가 날 몇 년 만에 웃게 하는구먼! 죽어보게나! 혀를 불로 지져서 피를 멎게 하면 되니까!” 그에게는 이미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 곳의 규칙만이 가득 차 있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인간이 아닌 짐승의 사고방식을 말이다. 그의 손길이 마치 더러운 쥐새끼처럼 느껴졌고, 그 손에서 나오는 온기는 마치 불에 달궈진 인두라도 되는 듯 인상이 마구 돌아갔다. “야이! 강아지야! 또라이 새끼야! 이거 놓으라고!!” 묶인 상태로 발버둥쳤지만 그 노인은 생각 외로 힘이 강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내 발목을 부여잡았고, 다른 손으론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역겨워서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고, 살인 충동이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저 흑인의 눈을 파버리고 싶고, 돌칼로 대가리를 찍어 터트리고 싶었다. 정말 원했다. 살인을! 저 더러운 인간의 목숨을!! “으아아아악!! 그만두라고 강아지야!” 이내 그의 손이 나의 사타구니 쪽으로 향하자 이성의 끈은 끊어졌다. 있는 힘껏 고개를 앞으로 들이밀어 흑인의 귀를 물었다. 그러자 처음 들어보는 노인의 비명소리가 좁은 방에 울려 퍼졌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있는 힘껏 고개를 뒤로 젖혔고, 검붉은 액체가 허공을 수놓았다. 흑인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무방비상태로 당했고,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통에 미친 듯이 발버둥쳤다. 입에 물고 있던 더러운 고깃덩어리를 뱉었다. 다음에는 저 놈의 코를 노려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미 이성이라는 감각은 1%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이미 악마라는 놈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어린노무 새끼가!!” 그는 갑작스러운 공격 때문에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묶여있는 놈에게 당해서 자존심이 상했던 것인지 표정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엄청 흥분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끔찍하게 커져있었다. 커진 동공은 친절하게도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흑인은 바닥에 있는 돌칼을 쥐기 위해 허리를 숙였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쭈그려 앉은 상태로 그에게 몸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공격 탓에 흑인은 또 다시 바닥을 뒹굴었고,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바닥에 쓰러졌다. 몸을 지탱할 것이 없었던 탓에 상체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복부에 가해지는 강한 충격 탓에 숨이 콱 막혀왔다. 산소가 차단되는 불쾌한 감각을 느껴졌지만 이내 참아내고 돌칼을 저 멀리 걷어찼다. “으아아아악!! 식량이고 나발이고 죽여 버릴 테다!!” 흑인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주위에 무기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다 무기를 찾다말고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다. 바닥에 무기를 줍다가 다시 공격당할 바에는 묶여있는 상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달려들었고, 묶인 상태라 무방비하게 그의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는 내 위에 올라타서 파운딩(누워있는 상대 위에 올라타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주먹으로 마구 때리는 자세)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곧장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면상을 내리쳤다. 30년 살면서 이렇게 아픈 통증은 생전 처음이었다.(고통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어릴 적에도 싸움이 났을 때면 비굴하게 잘못했다고 용서하라고 빌던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렇게 심하게 터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흑인은 이미 이성이 끊어졌는지 샌드백을 때리듯 나의 얼굴을 마구 후려쳤고, 그 무식한 공격을 그대로 맞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의식과는 다르게 내 속의 악마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끊어질 듯한 의식을 겨우겨우 붙잡으며 저 자식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5대쯤 맞고 나니 의식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식식거리면서 갑자기 나의 바지를 내렸다. 너무 맞은 탓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었지만 반항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성욕을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 싸이코 새끼다. “이런 강아지! 신발! 사지를 다 잘라버리고 몸뚱이만 남겨서 평생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아주마!!” 평생! 평생!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떠졌다. 흐릿해지던 의식이 번개처럼 돌아왔고, 자유로워진 양손을 이용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를 향해 뼛조각을 내찔렀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계속 맞던 중에도 뼛조각을 놓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뼛조각으로 가죽을 끊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마지막에는 뼈를 놓칠 뻔 했지만 끝까지 의식을 놓치지 않은 나의 승리였다. 흑인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양손이 자유로워지자 새로운 공격을 할 수 있었다. 다리가 너무 꽁꽁 묶여 있으니 강한 공격은 무리였다. 문득 방금 구석으로 차버린 돌칼을 생각났다. 몸을 눕혀 조금 더듬더듬 거리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디져라! 십새끼야!!”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그 돌칼을 있는 힘껏 그 노인을 향해 던졌다. 앉아 있던 상태였기에 강하게 던질 수 없었지만 돌칼의 무게 자체가 살인도구였다. 돌칼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한쪽 눈에 뼛조각이 박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노인은 그대로 그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곧 수박이 터지듯 통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흑인의 고함소리가 스피커 코드를 뽑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머리가 터지지는 않았지만 두개골이 완전히 부서졌는지 코, 입, 귀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그 근육질로 가득 찬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혹시 그가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재빨리 묶여있던 가죽을 풀었다. 얼마나 새게 묶었는지 푸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직도 어안 벙벙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참을 있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자 자신에게 화가 났다. 강간하고 죽이려는 강아지를 죽였을 뿐이다! 대체 왜 내가 죄책감 같은 감정을 느껴야하는 거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다! 아니, 이런 변명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저런 인간은 정당방위가 아니더라도 죽어도 싸다. 그는 그저 자신의 욕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잡아먹은 놈이다. 저런 강아지는 죽어야 돼! 다시 잊었던 공포감이 떠오르자 살기가 들끓어 올랐다. 자기합리화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고, 곧 영영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발에 찌릿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몸 전체에 혈액이 다시 돌기 시작했고, 등골까지 짜릿한 감각이 몸 전체에 느껴졌다. “하…….” 바닥에 등을 기댄 체 천장을 쳐다보자 거기에는 익숙한 백열등이 불길한 불빛을 뽐내고 있었다. 그 백열등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깜박거렸다. 당장 여길 나가라고 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애초에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시체 2명이나 있는 곳에 계속 있다가는 마지막 남은 정신의 끈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윽” 시큰한 통증이 느껴져서 손목을 바라보니 거기엔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금 밧줄을 끊을 때 손목까지 살짝 베어버린 모양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잊고 있던 시체들이 시야에 들어왔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들에게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흑인은 여기서 10년 정도 생활했다고 했으니 아마도 주위에 쓸만한 물건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몇 분간 탐색하자 예상대로 금방 쓸만한 물건들을 찾을 수 있었다. 20cm 가량의 뼈칼과 5m 가량의 밧줄. 물론 이 밧줄도 가죽들을 여러 겹 땋아서 만든 것이다. 그 때 정신이 아찔해졌다. 팔뚝을 보니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빈혈이 올 정도로 피를 흘렸던 건가? 시간이 지나면 멎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입고 있던 환자복을 벗었다. 그리고 뼈칼을 이용해 환자복 소매부분을 잘라냈다. 칼은 얼마나 갈았는지 진짜 커터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렇게 얻은 천 조각을 빗물에 씻어서 어느 정도 세균감염을 예방했다. 물을 쫙 짜낸 뒤 기다릴 것 없이 상처에 강하게 묶어두었고,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또 쓸만한 게 없을까 찾아보니 흑인의 손목에 걸려있는 시계가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 손목시계에 손을 뻗었다. 혹시 흑인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뼈칼을 오른손에 꽉 쥐고 검은 시신에서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겨우 시계를 풀어내고는 급히 시체에서 떨어졌다. 그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강렬했다. 왼손에는 천을 묶어둔 터라 오른손목에 그 시계를 찼다. 시계의 초침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는 걸보니 예상대로 흑인의 물건이 아니었다. 흑인은 여기서 10년 간 생활했다고 했으니 처음에 여기에 왔을 때 받은 물건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의 사내 물건임이 분명했다. 즉, 내가 온 방에 있었던 사람이 저 우리의 사내였단 소리다.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일기장. 만약 힘이 없던 상태로 여기로 들어왔었다면 나도 분명 우리에 갇힌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묵념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곧 탐색을 재개했다. “또 이 고기인가?” 다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고기에게 시선이 멈췄다. 하지만 이내 고기를 좌우로 저었다. 그 흑인은 인육을 좋아한다. 즉, 그 인육은 굽자말자 먹었으면 먹었지 육포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판단이었지만 지금 이런 곳에서 여유부릴 시간은 없으니 그냥 챙기기로 했다. “휴” 그렇게 계속 탐색을 하자 몇 가지 물품을 구할 수 있었다. 방금 본 육포 3개와 그것을 담을 만한 작은 가죽주머니, 가죽 물주머니를 챙겼다. 물주머니는 가죽 중에서 그나마 깨끗한 것에 빗물을 담았다. 가죽이라 그런지 물이 새거나하는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얻은 커터처럼 날카로운 작은 뼈칼. 뼈칼의 날카로움은 방금 사용해보았기에 충분했다. 베이지 않기 위해 방금 얻었던 5m 밧줄로 감아두었다. “이제, 다 된 건가?” 비릿한 피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시체가 옆에 있다고 생각해선지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육포와 가죽주머니를 더 챙기고 싶었지만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흑인이 들어왔었던 가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박쥐 외의 식량들은 저 너머에서 구해온 것 같으니 분명 저 곳에 무언가 있을 것이다. 흑인 말했던 괴물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 샌가 머릿속에서 잊혀진 지 오래였다. “윽” 가죽을 들어올리자 생전 처음 맡아보는 지독한 냄새가 콧구멍을 찔렀다. 고작 냄새 때문에 다시 물러설 수는 없었기에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또 두 구의 시체가 있는 방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죽 너머의 풍경은 예상대로 어두컴컴하고 작은 굴이었다. 높이는 1m 가량이었고, 폭은 50cm가량으로 작은 어린 아이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넓이였다. 며칠 굶은 덕에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었고, 허리를 굽히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지독한 냄새가 후각을 마구 자극했고, 그럴 때마다 입으로 호흡했다. 정말 지독한 비린내였다. “헉, 헉…….”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서 그런지 금방 허리가 아파왔고, 숨도 가빠왔다. 어느 순간부터 가죽 너머로 들어오던 빛줄기도 사라져서 눈 뜬 장님이 되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어둠. 모닥불을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서둘렀더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버렸다. 그렇게 미칠 것 같은 정신을 겨우 부여잡으며 계속 걸어 나갔다. 그 공간에는 오직 내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중간 중간에 괜히 목이 타서 물주머니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쥐의 악취가 미세하게 느껴져서 역겨웠기에 순식간에 들이켰다.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 흑인은 매번 이런 길을 걸었던 것일까? 보기보다 대단한 노인네였구나. 그 때였다. 갑자기 뒷목에 있던 털들이 바늘처럼 날카롭게 서는 것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육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 감각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후 좁았던 통로가 순식간에 넓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가 펴지면서 계속 짚고 오던 벽도 사라졌다.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눅눅하고 기분 나쁜 온기뿐이었다. “!”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 곳에는 나 말고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입 속에 들어온 듯 식은땀이 나고 괜히 몸이 떨렸다. 어두컴컴한 곳을 노려보며 그 온기가 어디서 오는 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 때였다. 갑자기 기분 나쁜 푸른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은 바로 앞에 있는 통로 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들고 오는지 불빛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제야 기어 나온 작은 통로 밖이 긴 복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 있는 기준으로 양쪽으로 복도가 길게 이어져있다. 불빛의 반이 잘려 보이는 것으로 봐서 저 불빛은 코너를 틀어서 오는 것이 분명했다. 점점 다가오는 불안감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또 육감이라는 놈이 위기경보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진정되어가던 심장이 다시 펌프질을 시작했고, 온 몸에 식은땀이 마구 흘러내렸다. 곧장 들어왔던 구멍으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혹시 몰라 최대한 몸을 벽에 밀착시킨 뒤 그 불빛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불빛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고, 거의 5분 정도 지난 뒤에서야 그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축축한 생선 비늘을 덮고 있고, 인간처럼 직립보행을 하는 ‘괴물’이었다. 정말 물고기가 살아서 걸어 다니는 듯 끔찍하기가 그지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진한 비린내가 코를 찔러댔다. 발걸음 옮길 때마다 물에 젖은 듯한 차박차박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푸른 불빛을 받은 탓에 그 모습이 훨씬 괴이하게 보였다. 그 불빛이 점차 멀어졌고, 난 곧장 통로를 기어 나와 그 물고기의 모습을 마저 확인하려고 했다. 벽에 몸을 기댄 채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뒤에서 보니 어두워서 실루엣만 겨우 볼 수 있었다. 괴물은 큰 꼬리를 지니고 있었고, 양손에 다 무언가 들고 있었다. 한 손에는 푸른 등불이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간식인지 계속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기분 나쁘면서 익숙한 소리. 귀에 익는 소리 탓에 목덜미가 닭의 살결처럼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일렁이는 푸른빛 사이로 그 음식이 보였고, 터져 나오는 헛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물고기는 순식간에 뒤로 돌아 나에게로 뛰어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으, 으악!” 비명을 지르며 굴을 빠져나와 그 물고기가 지나왔던 코너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 물고기가 먹고 있었던 것은 도넛이나 닭고기 같은 평범한 음식이 아니었다. 바로 사람의 머리였다. 두 눈 중에 하나는 벌써 먹혔는지 눈 구슬이 있어야할 곳에는 처절한 암흑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남은 눈동자에는 그 순간이 짐작이 되는 공포만이 있었다. 이 곳은 미친 곳이다. 바로 방금 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이 부서진 댐에서 나온 물처럼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주위가 점차 어두워졌고, 억지로 공포심을 이겨내며 고개를 뒤로 돌려보았다. 곧 왜 주위가 점차 어두워지는 지 알 수 있었다. 그 물고기는 어느 순간부터 손과 발 모두를 이용해 사족보행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 지 금방 따라잡힐 것만 같았다. 그 물고기는 등불을 들던 손으로 바닥을 박차며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심장이 터지기 직전의 원자로처럼 마구 쿵쾅거렸다. “젠장! 젠장! 젠장!”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여유조차 없이 죽기 살기로 뛰었다. 흑인에게서 벗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번에는 괴물이라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정말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최고의 악몽이었다. 이제 녀석의 발자국소리가 생생히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고, 부랴부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뼈칼을 부여잡았다. 이제 곧 저 녀석에게 따라잡힌다! 만약 싸우게 되더라도 개죽음으로 당할 순 없다! “고개 숙여!” 그 때였다. 익숙한 언어가 귀가로 빨려 들어왔고, 그 말대로 급히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머리 위를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펑 소리와 함께 뜨거운 불길이 느껴졌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비명 같은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누군가가 강하게 팔목을 잡아당겼고, 갑작스러운 당김에 의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 힘이 이끌려갔다. 너무 어두워서 1m 앞도 보이지 않았기에 날 잡아당기고 있는 상대를 볼 수 없었다. “누, 누구…….” “쉿!” 물어보려고 했지만 곧바로 조용하라는 주의를 받았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남자보다 여자일 가능성이 컸다. 손이 부드럽다는 것도 내 근거를 뒷받침해주었다. 몇 년 동안 여자 손 한번 못 잡아본 나에게 이런 감각은 한 없이 낯설었다. (창녀촌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제외하면.) 비록 서로 손을 못 맞잡고 팔목에 닿은 감촉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감각들은 말하고 있었다. 이 앞에 있는 사람이 남자는 아닐 거라고. 그렇게 한참을 뛰었다. 말했다시피 운동과는 거리가 멀던 나였기에 금방 숨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거기에 비해 내 앞의 그녀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리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 한번도 어디에 부딪치지 않았다. “좀 조용히 뛰어요!” 여자가 맞았구나.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래도……. 학학……. 마음대로 안 되는걸……. 헉헉” 여자는 짧게 혀를 차고 다시 입 다물고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500m쯤 더 뛰었다. 쉬지 않고 뛰었던 터라 너무 고통스러웠다. 산소는 더 이상 나에게 안락함을 제공하지 않았고, 심장은 너무 부려먹어서 그런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 아직 멀…… 었나요? 헉헉!” 그녀는 그 앙칼진 말 대신 뛰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일순간 침묵을 유지했다. 그 순간 흑인이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오른손을 뼈칼로 옮긴 뒤 새롭게 물었다. 아직도 숨이 골라지지 않아서 힘들었다. “다, 당신 누구야! 헤, 헥…….” “구해줬더니 성질은……. 곧 알게 될 거에요.” 그 때 갑자기 어두컴컴한 곳에서 다른 음성이 들렸고,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사용하지 않고 있던 후각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흑인의 방 안에서 맡았던 냄새와 같은 냄새라는 것을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고기’ “잘 굽자” 그녀는 어느 선가 들려오는 ‘고기’라는 단어를 ‘잘 굽자’로 받아쳤다. 뭐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큰 소음과 함께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어두운 곳에 너무 오래있던 탓일까 눈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때 또 다시 그녀가 나의 팔목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 직후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그녀가 들어오자 말자 무언가를 닫혔다. 아직 시력이 돌아오지 않아 눈을 부여잡고 있자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몰라, 생선한테 쫓기고 있길래 일단 데려왔어.” “누군지도 모르고 데려왔단 말이야?” “그럼 어떡해! 죽게 내버려둬?” “어머! 네가 뭘 잘했다고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 “어허~ 그만해라. 일단 사람이잖아. 오랜만에 온 사람인데 말이나 들어보자고.” 점차 타오르는 듯한 통증에 익숙해져갔고, 어렴풋이 앞에 있는 그들의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긴 금발을 지닌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맨 처음 입을 연 사람이 저 여자인 모양이다. 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 증거. 그리고 그 옆에는 두 여자의 싸움을 말렸던 사내가 서있었다.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고, 안타깝게도 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그는 어디로 보나 한국인이었다. 갈색 눈과 저 툭 튀어나온 똥배가 그 증거였다. 그들을 본 뒤에야 나를 끌고 온 여성에게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녀를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었지만 딱 느낌이 일본인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뽀얀 피부에 매혹적인 눈매를 지닌……. 말 그대로 굉장한 미인이었다. 이런 여성이 내 팔목을 잡고 여기까지 뛰어왔다고 생각하자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고,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에 대한 내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큰 콘크리트 감옥 같은 느낌이었다. 바닥은 차가운 콘크리트였고, 주변 배경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거대한 직사각형 감옥이었다. 그래, 마치 처음에 시작했었던 방이 거대해진 느낌이랄까? 아무튼 기분 나쁜 곳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고 한다면 여기저기 밝게 켜져 있는 가로등. 처음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밝은 빛은 아마 저것인 모양이다. “아!” 잠시 까먹고 있었던 물고기의 존재가 번뜩 떠올랐다. 혹시 따라오지 않을까란 생각에 고개를 급히 뒤로 돌리자 거기엔 성인남자만한 큰 바위가 있었다. “혹시 그 괴물들 때문이라면 걱정 말게. 밖에 그들이 싫어하는 풀들을 잔뜩 깔아놨으니 안심해도 된다네. 생긴 대로 머리도 나쁜 녀석들이라 싫은 곳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네. 그리고 저 큰 바위로 막아뒀으니 걱정 없을 걸세.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했을 텐데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군.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도록 하지.” 그의 친절한 말투에 긴장이 누그러졌고,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는데 그의 옆에 있던 금발의 여성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우리 마을에 들이시겠다고요? 지금 노망났다고 티내는겁니까!?!” 일본인 여자보다 훨씬 앙칼진 말투에 눈썹이 삐쭉 올라갔다. 중년사내와 정반대 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나도 이런 친절에 심하게 데인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마음을 적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라.” 마음속으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몸은 생각과 달랐던 모양이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그만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레이나……. 저렇게 풀썩 주저앉을 정도로 피로한 사람을 설마 다시 밖으로 내보내려는 건가?” “잔인한 년” “무, 뭐야?!” 일본인이 나지막하게 말하자 레이나라고 불리는 금발의 여성은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딱 봐도 둘은 맞지 않았다. 이 사람다운 환경에 살짝 어색하게 느껴졌다. 흑인에게 강간당할 뻔 하고 처음 보는 괴물에게 쫓기기까지 했으니까. 오히려 지금이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붕 뜨고,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몸은 땀범벅이라서 찝찝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놓이자 차가운 돌바닥도 마치 시몬X 침대처럼 편안했다. 앞에 있는 세 남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그러다 문득 일본인에게 눈이 갔다. 왠지 백팀장님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아름다운 외모 탓일까 아니면 괴물에게서 벗어날 때 보았던 그 당찬 모습 때문일까……. 일순간 텔레비전 코드를 뽑듯이 의식이 한순간에 끊어졌다. - 다른 이야기http://pann.nate.com/b315723228http://pann.nate.com/b315737692http://pann.nate.com/b315738286http://pann.nate.com/b315775792http://pann.nate.com/b315775938http://pann.nate.com/b315783901http://pann.nate.com/b315806213http://pann.nate.com/b315825660http://pann.nate.com/b315839806http://pann.nate.com/b315840325http://pann.nate.com/b315849447http://pann.nate.com/b315946845http://pann.nate.com/b316006853http://pann.nate.com/b316067176http://pann.nate.com/b316227123 http://pann.nate.com/b316330745 45
[장편]괴물의 탑(11~15)
출처 : http://web.humoruniv.com/main.html
< 웃대 : 듀라라 님 >
그리고 그 몇 초 후 고요해졌다.
그 기분 나쁜 침묵 탓에 가슴이 살얼음에 끼는 것만 같았다.
“에이……. 죽은 건가? 비상식량이었는데 젠장……. 조금만 참을 껄 그랬나?”
그의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만큼 잔혹하지만 너무나도 평온한 말투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제야 흑인의 관심이 나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북소리와 맞먹을 정도의 심장소리. 그의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눈꺼풀 위를 비추고 있던 불빛이 가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고 있었다.
“응? 그리고 보니 자세가 조금 변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쭈그려 앉아서 나에게 다가왔다.
더러운 온기가 느껴지면서 뒤통수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소름이 돋았다.
코로 숨을 쉬면 큰 소리가 들릴까봐 일부러 입으로 숨을 쉬면서 소음을 없앴다.
“착각인가?”
그렇게 말한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향했다.
아마 다시 우리의 사내 상태를 확인하려는 모양이다.
그의 그림자가 없어지자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지금 당장 이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역시 깨어있었구먼?”
누런 이를 가진 검은 면상이 내 바로 눈앞에 있었고, 참아왔던 비명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으아아아악!!”
그러면서 몸을 최대한으로 일으켜 세워 벽 쪽으로 물러났다.
그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는 귀가 아픈 지 눈살을 찌푸렸다.
“면상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 귀가 아프지 않은가? 허허허……. 이래 뵈도 나이가 61살이란
말일세.”
자연스럽게 생각하기 싫었던 우리의 사내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거기엔 너무나도 끔찍해서 생각하기 싫은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도축장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온 세상이 피로 적신 듯 붉게 보였다.
“우웩!!”
목구멍 너머에서 누런 액체가 터져 나왔고, 그것이 환자복을 흥건히 적셨다.
아래에서는 바지를 적시는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며칠 동안 먹은 것이 물이라 그런지 웅덩이를 만들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이 댐 터지듯
흘러나왔다.
숨쉬기 힘들어 헐떡거리기 시작했고, 생존본능으로 억지로 숨을 들이쉰다.
온 몸이 더러운 것들로 뒤덮여 있었지만 나의 눈동자는 오직 노인의 다음 행동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케첩일 리가 없는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돌칼이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이 놈이 죽었으니 자네가 비상식량이니까. 쉽게 죽이거나 하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나를 지나쳐 우리의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는 그를 내려다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같이 살아온 세월이 반년이나 되는데 조금 아쉽구먼. 그래도 내가 살아야 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방금 잘라놓은 팔뚝 하나를 모닥불 근처로 가져갔다.
나는 도저히 보기 싫은 삼류 고어물을 바라보면서 제 정신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애를 썼다.
사내는 정말 고통스럽게 죽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영화나 미술작품보다 잔혹해 보이는 장면이었다.
영화는 한 편의 연기일 뿐이고 예술작품은 그저 상상하는 것뿐이지 않은가?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을 본다면 그런 그림을 당장 팔아버리거나 태워버릴 것이다.
그 순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노인의 손목에는 전자손목시계가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그럼 내가 있던 방의 주인이 저 노인이란 말인가?
아니다. 혹시 저기 죽어있는 사내에게서 빼앗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더 이상 머리를 쓸 수 없었다.
도저히 냉정하게 생각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구석에 챙겨둔 뼛조각 중 하나를 들었다. 딱 봐도 꼬챙이였다.
사용 용도는 안 봐도 뻔했기에 눈을 질끈 감고 다른 곳에 고개를 돌렸다.
또 다시 위가 들썩이긴 했지만 누런 액체가 바닥난 것인지 방금 전처럼 쏟아내지는 않았다.
그저 너무 힘들었다. 이 상황이.
“궁금하다고 했었지? 여기가 어디냐고”
지금 와서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여기가 어디인지 몰라 여기에 온 것도 확실히 10년 정도 된 것 같고…….”
고기 익는 냄새가 방 안 가득히 퍼져간다.
속이 메스꺼웠고, 가뭄이 든 논처럼 정신이 피폐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전혀 대꾸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나갈 일은 없겠지만 저기 구멍을 통해 나갈 생각은 말게나. 정말로 괴물이
숨어있으니까”
“괴……물?”
처음으로 그의 말에 대꾸를 했다. 그의 말이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네놈이 진짜 괴물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희망을 없애려고 헛소리하는 게 아니라 정말이라네. 믿든 안 믿던 자네 마음이지만. 그리고
탈출할 생각은 안하는 게 좋아. 자네가 탈출해서 개죽음 당하면 식량이 없어져서 곤란하단
말일세.”
그의 말의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가죽으로 덮여있는 구멍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걱정 말게. 금방 익숙해질 걸세.”
이런 곳이 익숙해질 리가 없다.
사람이 사람을 먹고, 괴물이 존재한다고 하고 비가 멈추지 않는 곳.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곳.
여길 만든 놈은 어떤 놈일까. 신일까? 악마일까?
눈물이 쏟아질 만큼 역겨운 소리가 청각을 두드리고, 온 몸의 감각들을 자극했다.
그 노인은 다 구워진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먹고 있었다.
중간 중간에 힘줄이 있어서 그런지 살결 뜯기는 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히 귓구멍을 파고
들어왔다.
“너도 한 입 할 테냐?”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미 거의 혼이 나간 상태였으니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이것이 꿈일 것이 분명하다는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있었다.
“계속 안 먹으면 굶어죽을텐디. 어제 고기는 잘만 먹더니만”
“어제 먹인 건 뭐냐? 설마 사람고기냐?”
“허허허! 이놈 보게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이냐? 반말하는 거 보게!”
“어차피 나도 똑같이 할 생각이잖아? 예의범절을 따지라고 하지마”
“뭐!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심기를 거슬려서 좋을 것 없을 텐데”
그러면서 그는 먹다 남은 고기를 잠시 옆에 세워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보니 확실히 근육이 탄탄한 노인이었다.
만약 정상적인 상태로 싸운다고 하더라도 질 것이 분명했다.
말했다시피 난 술에 쩔어서 사는 30대 회사원.
운동을 하고 싶더라도, 누군가의 생일이라도, 여자친구와 여행을 약속했었더라도.
상사가 부르면 달려가야 한다. 그것이 사회생활이다.
그 흑인이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왔고,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물론 묶인 상태였기에 얼마 가지는 못 했다.
“식욕을 어느 정도 채웠으니 이제 다른 욕구를 풀어야하지 않겠어?”
“!!!”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 근육이 떨리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상이
머리를 찌르고 지나갔다.
그제야 내 손아귀에 쥐고 있던 뼈를 다시금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수로 손목을 계속 찔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지금 보니 곱상하게 생겼구먼!”
그러면서 그는 허리춤에 묶어놓았던 가죽 끈을 풀기 시작했다.
나의 손목의 스냅이 더욱 빨라졌고, 방금 전과는 다른 공포가 물 밀 듯이 밀려왔다.
“까불어서 죄, 죄송합니다. 요, 용서하세요!”
그러자 그 흑인이 나를 보면서 누런 이를 보였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노인의 얼굴을 보니 당장 창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허허! 걱정 말게나 말했지만 죽이진 않을 걸세!”
“제, 제발 부탁입니다.”
“뭐라는 건가? 자네 목숨은 이미 내 손에 있다네. 자네가 이러쿵저러쿵 할 자격은 없다네.”
“오, 오면 혀 깨물고 죽어버릴 겁니다!!”
그러자 그 흑인은 박장대소로 웃음을 터트렸다.
“프하하하하!! 자네가 날 몇 년 만에 웃게 하는구먼! 죽어보게나! 혀를 불로 지져서 피를 멎게
하면 되니까!”
그에게는 이미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 곳의 규칙만이 가득 차 있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인간이 아닌 짐승의 사고방식을 말이다.
그의 손길이 마치 더러운 쥐새끼처럼 느껴졌고, 그 손에서 나오는 온기는 마치 불에 달궈진
인두라도 되는 듯 인상이 마구 돌아갔다.
“야이! 강아지야! 또라이 새끼야! 이거 놓으라고!!”
묶인 상태로 발버둥쳤지만 그 노인은 생각 외로 힘이 강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내 발목을 부여잡았고, 다른 손으론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역겨워서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고, 살인 충동이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저 흑인의 눈을 파버리고 싶고, 돌칼로 대가리를 찍어 터트리고 싶었다.
정말 원했다. 살인을! 저 더러운 인간의 목숨을!!
“으아아아악!! 그만두라고 강아지야!”
이내 그의 손이 나의 사타구니 쪽으로 향하자 이성의 끈은 끊어졌다.
있는 힘껏 고개를 앞으로 들이밀어 흑인의 귀를 물었다.
그러자 처음 들어보는 노인의 비명소리가 좁은 방에 울려 퍼졌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있는 힘껏 고개를 뒤로 젖혔고, 검붉은 액체가 허공을 수놓았다.
흑인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무방비상태로 당했고,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통에 미친 듯이 발버둥쳤다.
입에 물고 있던 더러운 고깃덩어리를 뱉었다.
다음에는 저 놈의 코를 노려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미 이성이라는 감각은 1%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이미 악마라는 놈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어린노무 새끼가!!”
그는 갑작스러운 공격 때문에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묶여있는 놈에게 당해서
자존심이 상했던 것인지 표정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엄청 흥분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끔찍하게 커져있었다. 커진 동공은 친절하게도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흑인은 바닥에 있는 돌칼을 쥐기 위해 허리를 숙였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쭈그려 앉은 상태로 그에게 몸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공격 탓에 흑인은 또 다시 바닥을 뒹굴었고,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바닥에 쓰러졌다.
몸을 지탱할 것이 없었던 탓에 상체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복부에 가해지는 강한 충격 탓에 숨이 콱 막혀왔다.
산소가 차단되는 불쾌한 감각을 느껴졌지만 이내 참아내고 돌칼을 저 멀리 걷어찼다.
“으아아아악!! 식량이고 나발이고 죽여 버릴 테다!!”
흑인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주위에 무기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다 무기를 찾다말고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다.
바닥에 무기를 줍다가 다시 공격당할 바에는 묶여있는 상대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달려들었고, 묶인 상태라 무방비하게 그의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는 내 위에 올라타서 파운딩(누워있는 상대 위에 올라타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주먹으로
마구 때리는 자세)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곧장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면상을 내리쳤다.
30년 살면서 이렇게 아픈 통증은 생전 처음이었다.(고통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어릴 적에도 싸움이 났을 때면 비굴하게 잘못했다고 용서하라고 빌던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렇게 심하게 터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흑인은 이미 이성이 끊어졌는지 샌드백을 때리듯 나의 얼굴을 마구 후려쳤고,
그 무식한 공격을 그대로 맞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의식과는 다르게 내 속의 악마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끊어질 듯한 의식을 겨우겨우 붙잡으며 저 자식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5대쯤 맞고 나니 의식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식식거리면서 갑자기 나의 바지를 내렸다.
너무 맞은 탓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었지만 반항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성욕을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 싸이코 새끼다.
“이런 강아지! 신발! 사지를 다 잘라버리고 몸뚱이만 남겨서 평생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아주마!!”
평생! 평생!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떠졌다.
흐릿해지던 의식이 번개처럼 돌아왔고, 자유로워진 양손을 이용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를 향해 뼛조각을 내찔렀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계속 맞던 중에도 뼛조각을 놓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뼛조각으로 가죽을 끊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마지막에는 뼈를 놓칠 뻔 했지만 끝까지 의식을 놓치지 않은 나의 승리였다.
흑인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양손이 자유로워지자 새로운 공격을 할 수 있었다.
다리가 너무 꽁꽁 묶여 있으니 강한 공격은 무리였다.
문득 방금 구석으로 차버린 돌칼을 생각났다.
몸을 눕혀 조금 더듬더듬 거리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디져라! 십새끼야!!”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그 돌칼을 있는 힘껏 그 노인을 향해 던졌다.
앉아 있던 상태였기에 강하게 던질 수 없었지만 돌칼의 무게 자체가 살인도구였다.
돌칼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한쪽 눈에 뼛조각이 박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노인은
그대로 그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곧 수박이 터지듯 통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흑인의 고함소리가 스피커 코드를 뽑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머리가 터지지는 않았지만 두개골이 완전히 부서졌는지 코, 입, 귀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그 근육질로 가득 찬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혹시 그가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재빨리 묶여있던 가죽을 풀었다.
얼마나 새게 묶었는지 푸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직도 어안 벙벙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참을 있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자 자신에게 화가 났다.
강간하고 죽이려는 강아지를 죽였을 뿐이다!
대체 왜 내가 죄책감 같은 감정을 느껴야하는 거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다!
아니, 이런 변명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저런 인간은 정당방위가 아니더라도 죽어도 싸다.
그는 그저 자신의 욕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잡아먹은 놈이다.
저런 강아지는 죽어야 돼! 다시 잊었던 공포감이 떠오르자 살기가 들끓어 올랐다.
자기합리화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고,
곧 영영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발에 찌릿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몸 전체에 혈액이 다시 돌기 시작했고,
등골까지 짜릿한 감각이 몸 전체에 느껴졌다.
“하…….”
바닥에 등을 기댄 체 천장을 쳐다보자 거기에는 익숙한 백열등이
불길한 불빛을 뽐내고 있었다.
그 백열등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깜박거렸다.
당장 여길 나가라고 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애초에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시체 2명이나 있는 곳에 계속 있다가는 마지막 남은 정신의 끈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윽”
시큰한 통증이 느껴져서 손목을 바라보니 거기엔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금 밧줄을 끊을 때 손목까지 살짝 베어버린 모양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잊고 있던 시체들이 시야에 들어왔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들에게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흑인은 여기서 10년 정도 생활했다고 했으니 아마도 주위에 쓸만한 물건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몇 분간 탐색하자 예상대로 금방 쓸만한 물건들을 찾을 수 있었다.
20cm 가량의 뼈칼과 5m 가량의 밧줄.
물론 이 밧줄도 가죽들을 여러 겹 땋아서 만든 것이다.
그 때 정신이 아찔해졌다. 팔뚝을 보니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빈혈이 올 정도로 피를 흘렸던 건가?
시간이 지나면 멎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입고 있던 환자복을 벗었다.
그리고 뼈칼을 이용해 환자복 소매부분을 잘라냈다.
칼은 얼마나 갈았는지 진짜 커터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렇게 얻은 천 조각을 빗물에 씻어서 어느 정도 세균감염을 예방했다.
물을 쫙 짜낸 뒤 기다릴 것 없이 상처에 강하게 묶어두었고,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또 쓸만한 게 없을까 찾아보니 흑인의 손목에 걸려있는 시계가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그 손목시계에 손을 뻗었다.
혹시 흑인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뼈칼을 오른손에 꽉 쥐고 검은 시신에서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겨우 시계를 풀어내고는 급히 시체에서 떨어졌다.
그에 대한 공포가 그만큼 강렬했다.
왼손에는 천을 묶어둔 터라 오른손목에 그 시계를 찼다.
시계의 초침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는 걸보니 예상대로 흑인의 물건이 아니었다.
흑인은 여기서 10년 간 생활했다고 했으니 처음에 여기에 왔을 때 받은 물건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의 사내 물건임이 분명했다.
즉, 내가 온 방에 있었던 사람이 저 우리의 사내였단 소리다.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일기장.
만약 힘이 없던 상태로 여기로 들어왔었다면 나도 분명 우리에 갇힌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묵념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곧 탐색을 재개했다.
“또 이 고기인가?”
다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고기에게 시선이 멈췄다.
하지만 이내 고기를 좌우로 저었다.
그 흑인은 인육을 좋아한다.
즉, 그 인육은 굽자말자 먹었으면 먹었지 육포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판단이었지만 지금 이런 곳에서 여유부릴 시간은 없으니
그냥 챙기기로 했다.
“휴”
그렇게 계속 탐색을 하자 몇 가지 물품을 구할 수 있었다.
방금 본 육포 3개와 그것을 담을 만한 작은 가죽주머니, 가죽 물주머니를 챙겼다.
물주머니는 가죽 중에서 그나마 깨끗한 것에 빗물을 담았다.
가죽이라 그런지 물이 새거나하는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얻은 커터처럼 날카로운 작은 뼈칼.
뼈칼의 날카로움은 방금 사용해보았기에 충분했다.
베이지 않기 위해 방금 얻었던 5m 밧줄로 감아두었다.
“이제, 다 된 건가?”
비릿한 피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시체가 옆에 있다고 생각해선지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육포와 가죽주머니를 더 챙기고 싶었지만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흑인이 들어왔었던 가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박쥐 외의 식량들은 저 너머에서 구해온 것 같으니 분명 저 곳에 무언가 있을 것이다.
흑인 말했던 괴물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 샌가 머릿속에서 잊혀진 지 오래였다.
“윽”
가죽을 들어올리자 생전 처음 맡아보는 지독한 냄새가 콧구멍을 찔렀다.
고작 냄새 때문에 다시 물러설 수는 없었기에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또 두 구의 시체가 있는 방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죽 너머의 풍경은 예상대로 어두컴컴하고 작은 굴이었다.
높이는 1m 가량이었고, 폭은 50cm가량으로 작은 어린 아이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넓이였다.
며칠 굶은 덕에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었고, 허리를 굽히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지독한 냄새가 후각을 마구 자극했고, 그럴 때마다 입으로 호흡했다.
정말 지독한 비린내였다.
“헉, 헉…….”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서 그런지 금방 허리가 아파왔고, 숨도 가빠왔다.
어느 순간부터 가죽 너머로 들어오던 빛줄기도 사라져서 눈 뜬 장님이 되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어둠. 모닥불을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서둘렀더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버렸다.
그렇게 미칠 것 같은 정신을 겨우 부여잡으며 계속 걸어 나갔다.
그 공간에는 오직 내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중간 중간에 괜히 목이 타서 물주머니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쥐의 악취가 미세하게 느껴져서 역겨웠기에 순식간에 들이켰다.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 흑인은 매번 이런 길을 걸었던 것일까? 보기보다 대단한 노인네였구나.
그 때였다. 갑자기 뒷목에 있던 털들이 바늘처럼 날카롭게 서는 것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육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 감각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후 좁았던 통로가 순식간에 넓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가 펴지면서 계속 짚고 오던 벽도 사라졌다.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눅눅하고 기분 나쁜 온기뿐이었다.
“!”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 곳에는 나 말고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입 속에 들어온 듯 식은땀이 나고 괜히 몸이 떨렸다.
어두컴컴한 곳을 노려보며 그 온기가 어디서 오는 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 때였다. 갑자기 기분 나쁜 푸른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은 바로 앞에 있는 통로 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들고 오는지 불빛은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제야 기어 나온 작은 통로 밖이 긴 복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 있는 기준으로 양쪽으로 복도가 길게 이어져있다.
불빛의 반이 잘려 보이는 것으로 봐서 저 불빛은 코너를 틀어서 오는 것이 분명했다.
점점 다가오는 불안감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또 육감이라는 놈이 위기경보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진정되어가던 심장이 다시 펌프질을 시작했고, 온 몸에 식은땀이 마구 흘러내렸다.
곧장 들어왔던 구멍으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혹시 몰라 최대한 몸을 벽에 밀착시킨 뒤 그 불빛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불빛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고, 거의 5분 정도 지난 뒤에서야 그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축축한 생선 비늘을 덮고 있고, 인간처럼 직립보행을 하는 ‘괴물’이었다.
정말 물고기가 살아서 걸어 다니는 듯 끔찍하기가 그지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진한 비린내가 코를 찔러댔다.
발걸음 옮길 때마다 물에 젖은 듯한 차박차박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푸른 불빛을 받은 탓에 그 모습이 훨씬 괴이하게 보였다.
그 불빛이 점차 멀어졌고, 난 곧장 통로를 기어 나와 그 물고기의 모습을 마저 확인하려고 했다.
벽에 몸을 기댄 채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뒤에서 보니 어두워서 실루엣만 겨우 볼 수 있었다.
괴물은 큰 꼬리를 지니고 있었고, 양손에 다 무언가 들고 있었다.
한 손에는 푸른 등불이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간식인지 계속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기분 나쁘면서 익숙한 소리. 귀에 익는 소리 탓에 목덜미가 닭의 살결처럼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일렁이는 푸른빛 사이로 그 음식이 보였고,
터져 나오는 헛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물고기는 순식간에 뒤로 돌아 나에게로 뛰어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으, 으악!”
비명을 지르며 굴을 빠져나와 그 물고기가 지나왔던 코너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 물고기가 먹고 있었던 것은 도넛이나 닭고기 같은 평범한 음식이 아니었다.
바로 사람의 머리였다.
두 눈 중에 하나는 벌써 먹혔는지 눈 구슬이 있어야할 곳에는
처절한 암흑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남은 눈동자에는 그 순간이 짐작이 되는 공포만이 있었다.
이 곳은 미친 곳이다.
바로 방금 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이 부서진 댐에서 나온 물처럼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주위가 점차 어두워졌고, 억지로 공포심을 이겨내며 고개를 뒤로 돌려보았다.
곧 왜 주위가 점차 어두워지는 지 알 수 있었다.
그 물고기는 어느 순간부터 손과 발 모두를 이용해 사족보행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 지 금방 따라잡힐 것만 같았다.
그 물고기는 등불을 들던 손으로 바닥을 박차며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심장이 터지기 직전의 원자로처럼 마구 쿵쾅거렸다.
“젠장! 젠장! 젠장!”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여유조차 없이 죽기 살기로 뛰었다.
흑인에게서 벗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번에는 괴물이라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정말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최고의 악몽이었다.
이제 녀석의 발자국소리가 생생히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고,
부랴부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뼈칼을 부여잡았다.
이제 곧 저 녀석에게 따라잡힌다! 만약 싸우게 되더라도 개죽음으로 당할 순 없다!
“고개 숙여!”
그 때였다.
익숙한 언어가 귀가로 빨려 들어왔고, 그 말대로 급히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머리 위를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펑 소리와 함께 뜨거운 불길이 느껴졌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비명 같은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누군가가 강하게 팔목을 잡아당겼고,
갑작스러운 당김에 의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 힘이 이끌려갔다.
너무 어두워서 1m 앞도 보이지 않았기에 날 잡아당기고 있는 상대를 볼 수 없었다.
“누, 누구…….”
“쉿!”
물어보려고 했지만 곧바로 조용하라는 주의를 받았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남자보다 여자일 가능성이 컸다.
손이 부드럽다는 것도 내 근거를 뒷받침해주었다.
몇 년 동안 여자 손 한번 못 잡아본 나에게 이런 감각은 한 없이 낯설었다.
(창녀촌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제외하면.)
비록 서로 손을 못 맞잡고 팔목에 닿은 감촉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감각들은 말하고 있었다.
이 앞에 있는 사람이 남자는 아닐 거라고.
그렇게 한참을 뛰었다.
말했다시피 운동과는 거리가 멀던 나였기에 금방 숨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거기에 비해 내 앞의 그녀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리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 한번도 어디에 부딪치지 않았다.
“좀 조용히 뛰어요!”
여자가 맞았구나.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래도……. 학학……. 마음대로 안 되는걸……. 헉헉”
여자는 짧게 혀를 차고 다시 입 다물고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500m쯤 더 뛰었다. 쉬지 않고 뛰었던 터라 너무 고통스러웠다.
산소는 더 이상 나에게 안락함을 제공하지 않았고,
심장은 너무 부려먹어서 그런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 아직 멀…… 었나요? 헉헉!”
그녀는 그 앙칼진 말 대신 뛰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일순간 침묵을 유지했다.
그 순간 흑인이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오른손을 뼈칼로 옮긴 뒤 새롭게 물었다.
아직도 숨이 골라지지 않아서 힘들었다.
“다, 당신 누구야! 헤, 헥…….”
“구해줬더니 성질은……. 곧 알게 될 거에요.”
그 때 갑자기 어두컴컴한 곳에서 다른 음성이 들렸고,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사용하지 않고 있던 후각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흑인의 방 안에서 맡았던 냄새와 같은 냄새라는 것을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고기’
“잘 굽자”
그녀는 어느 선가 들려오는 ‘고기’라는 단어를 ‘잘 굽자’로 받아쳤다.
뭐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큰 소음과 함께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어두운 곳에 너무 오래있던 탓일까 눈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 때 또 다시 그녀가 나의 팔목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 직후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그녀가 들어오자 말자 무언가를 닫혔다.
아직 시력이 돌아오지 않아 눈을 부여잡고 있자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몰라, 생선한테 쫓기고 있길래 일단 데려왔어.”
“누군지도 모르고 데려왔단 말이야?”
“그럼 어떡해! 죽게 내버려둬?”
“어머! 네가 뭘 잘했다고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야?”
“어허~ 그만해라. 일단 사람이잖아. 오랜만에 온 사람인데 말이나 들어보자고.”
점차 타오르는 듯한 통증에 익숙해져갔고, 어렴풋이 앞에 있는 그들의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긴 금발을 지닌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맨 처음 입을 연 사람이 저 여자인 모양이다.
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 증거.
그리고 그 옆에는 두 여자의 싸움을 말렸던 사내가 서있었다.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고, 안타깝게도 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그는 어디로 보나 한국인이었다.
갈색 눈과 저 툭 튀어나온 똥배가 그 증거였다.
그들을 본 뒤에야 나를 끌고 온 여성에게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녀를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었지만 딱 느낌이 일본인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뽀얀 피부에 매혹적인 눈매를 지닌……. 말 그대로 굉장한 미인이었다.
이런 여성이 내 팔목을 잡고 여기까지 뛰어왔다고 생각하자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고,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에 대한 내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큰 콘크리트 감옥 같은 느낌이었다.
바닥은 차가운 콘크리트였고, 주변 배경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거대한 직사각형 감옥이었다.
그래, 마치 처음에 시작했었던 방이 거대해진 느낌이랄까? 아무튼 기분 나쁜 곳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고 한다면 여기저기 밝게 켜져 있는 가로등.
처음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밝은 빛은 아마 저것인 모양이다.
“아!”
잠시 까먹고 있었던 물고기의 존재가 번뜩 떠올랐다.
혹시 따라오지 않을까란 생각에 고개를 급히 뒤로 돌리자 거기엔 성인남자만한
큰 바위가 있었다.
“혹시 그 괴물들 때문이라면 걱정 말게. 밖에 그들이 싫어하는 풀들을 잔뜩 깔아놨으니
안심해도 된다네. 생긴 대로 머리도 나쁜 녀석들이라 싫은 곳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네. 그리고
저 큰 바위로 막아뒀으니 걱정 없을 걸세.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했을 텐데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군.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도록 하지.”
그의 친절한 말투에 긴장이 누그러졌고,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는데 그의 옆에 있던 금발의 여성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우리 마을에 들이시겠다고요? 지금 노망났다고
티내는겁니까!?!”
일본인 여자보다 훨씬 앙칼진 말투에 눈썹이 삐쭉 올라갔다.
중년사내와 정반대 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나도 이런 친절에 심하게 데인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마음을 적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라.”
마음속으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몸은 생각과 달랐던 모양이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그만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레이나……. 저렇게 풀썩 주저앉을 정도로 피로한 사람을 설마 다시 밖으로 내보내려는 건가?”
“잔인한 년”
“무, 뭐야?!”
일본인이 나지막하게 말하자 레이나라고 불리는 금발의 여성은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딱 봐도 둘은 맞지 않았다.
이 사람다운 환경에 살짝 어색하게 느껴졌다.
흑인에게 강간당할 뻔 하고 처음 보는 괴물에게 쫓기기까지 했으니까.
오히려 지금이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붕 뜨고,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몸은 땀범벅이라서 찝찝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놓이자 차가운 돌바닥도 마치 시몬X 침대처럼 편안했다.
앞에 있는 세 남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그러다 문득 일본인에게 눈이 갔다.
왠지 백팀장님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아름다운 외모 탓일까 아니면 괴물에게서 벗어날 때 보았던 그 당찬 모습 때문일까…….
일순간 텔레비전 코드를 뽑듯이 의식이 한순간에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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