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해서 한국에 돌아온 나는, 고3이였다. 매일 불면증에 악몽을 시달리며 일어나면 배게가 흠뻑젖어있었고, 옷도 젖어있었고, 발작을 해대며 잠을 설쳤다. 미국에서의 악몽이다.
1년간 두드러기는 더 심해져, 거의매일 몸에도좋지않는 약을 먹게되고, 머리카락빠지는건 물론이고, 그토록먹고싶던 한국음식도 들어가지않았다.
하루에 두끼먹으면 잘먹는 생활을 1년간하며 1년째 되는 새벽날 아버지꼐서 내방문을열고 들어오셨다.
온몸을 부르르떨면서 발작을 하고있던 나를 꼭 껴안아주시면서
"아들, 아빠가 사실 다 알고있다"라며 꾹 껴안아주셨다.
그렇다, 난 미국에서의일을 부모님께 다 말씀드리지않았다. 기껏 가고싶다해서보내줬는데 그런 쓰레기같은생활을 하면 걱정하실까봐 숨겨왔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이신가보다. 그뒤로 불면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하루에 다섯끼를먹어도 배가고픈 식욕도 돌아오고, 두드러기도 잠시 사라지고 머리도 많이 자라나고 살도 쪄갔다. 문득, 지금 5년이 지난 일이지만, 내사정을 알고있는 단한명의 친구와 술을마시며 그때이야기를하면, 술집에 앉아있기 창피할정도로 눈물이 흘러나온다.
책에서읽은적이있다.세상에서 제일큰병은 '외로움'이다.
나는 정작 13개월동안 배게와 알람시계와 이야기를하며 외로움이란 병을 앓았다. 난 정신병자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제대로된교육을 받고온줄만 알고있는 친구들에게 밉보이지않으려고
내자 지금껏 만들었던 국가공인영어인증시험점수들은 모두 한국에서 공부한것이다.
미국에서 10년살다온것같다고 미국인이 내 발음에대해 칭찬을해주는것도 모두, 한국에서 공부하였다.
왜냐면, 창피했다. 학교에 다니다왔다고 뻥을쳤기때문이다.
오히려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하게된 나는 지금은 지방국립대 경영학부로 군대도 다녀오고 너무나 좋은 생활을 하고있다.
물론 인기는 식지않았다. 엄청난훈남이다. 자부한다.
많은시간이지났는데, 요즘 인터넷에 행복한투정부리는 사람들 천지다.
자신의상황에대해 감사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뿐이다
심지어 목숨을 버리려고도한다.
모두들,
일어나길 바란다.
모두들, 일어나세요.
고비를 한번넘길때 그냥넘기는것보단 그것을 계단삼아 한칸한칸 올라가며 인생의 성공길을 것는것이
모두, 일어나길 바란다.
벌써 5년전이다. 2007년도, 미국에 가셔서 30년만에 연락이 닿은 고모의 소식에, 무작정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던 날
흔쾌히 허락해주시던 부모님의 쿨한 표정과 말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는 소고기가 유명한 밀워키, 위스칸슨에 가게되었고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은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대학원까지 그곳에서 나와 한국에 돌아와 멋지게 무역회사에 취직하는것이 나의 철통같은 계획이었지만, 결론부터말하자면,
그곳에 1년남짓 지내다온것이 전부였던것 같다.
나에겐 마치, 12월 21일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으리으리한 일들이 일어난것만 같다.
가자마자 머리를 미국인처럼 짧게 자르고 사립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처음엔 "hey glasses"라고 무시를 해대서
한번 벽에다 밀치고 "어따대고 영어야 씹새꺄" 라고 한 후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져 어느새 "ladyman"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한달간을 한국인한명 없는 1300명 학생중, 거의 반절이상은 인사하며, 친한친구들도 30명이 넘는 무차별한 빠른 적응력으로
나는 미국생활이 슬슬 좋아지게됐다.
그렇지만, 여행비자로 가서 학생비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서, 학교에선 학생비자로 바뀌기전까진 나오지 말라는 끔찍한 말을 하였다.
그것이 사건의 전개다.
친척누나는 미국에서의 변호사이다. 그래, 자기가 다 알아서 해준다고했다.
심지어 이민국전문변호사가아닌 범죄전문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눈빛으로 책임감을떠앉고 나에게 걱정말라고 했다.
"Don't worry about it, I got your back"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흘러, 나는 학교에나가지못하고 집에만 있었어야했다.
잠시 고모집을 설명해보겠다.
조그마한 2층집인데, 집엔 신기하게도 창문하나 없다. 그리고 어꺠펴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통로가 한둘이 아니며, 옆으로 게처럼 걸어다니고.
운동을 할수조차도없는 좁은방에서, 간신히 침대에 기어올라가, 자는것이 전부였다.
고모는 하루에 두가지 일을 하신다. 새벽일, 낮일.
그래서 나에게 밥을 차려주는시간은 오후4시땡 하면 요리하는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결벽증이 심하였다.
월요일 - 스파게티
화요일 - 소고기스테이크
수요일 - 돼지고기스테이크
목요일 - 햄버거
금요일 - 그린(그지역에서 유명한 풀때기랑 고기넣고 삶은 탕이다)
토요일 - 햄버거
일요일 - 한달에한번 한인식당에서 가져온 쌀밥과 김치.
문득 뭔가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할수도있는 식단이겠지만, 잘보면 알다시피
하루에 한끼, 저 식사가 내겐 전부였다.
너무배가고파 집밖으로 나가 2시간을 걸어본적이있지만 모두 집이었다.
wall mart(미국 대형마트)로 가려면 차를타고 한시간남짓 달려가야했고.
한인교회역시 차타고 40분은 기본이었다.
그리하여 급격히 줄어드는 몸무게와, 그렇게 친구들과 어설픈영어 쓰면서 웃으면서 지내던 시절이 자꾸떠올라.
어느새 2달간 집안에서만 지내 나의 외로움은 극에 다달았다.
팔뚝은 손목만해지고, 온갖스트레스로, 샤워할때 머리카락 한웅큼씩빠지는건 기본이였으며, 창문하나없는집에서 곧 돌아가실것같은 고모부는 하루에 담배를 3갑 반을 펴대셨다. 난 왠만한 흡연자보고 줄담배핀다고 하질 않는다.
온몸엔 이유모를 전신두드러기에, 새벽3시에 문득 간지럽다못해 너무아파서 보면 긁다가 피가나오며, 드라마에서처럼 물이없이 손을 벌벌떨면서 알약 한알을 입에 간신히 집어넣고 10분간 앉아서 졸다가 침대에 눕는다. 이런짓을 2달간 해오다가 이민국에서 편지가왔다.
-학생비자로 바꾸는과정에서 잠깐 문제가생겼으니, 3달만 기다려달라-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해탈을한것인지, 무슨감정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날 샤워를하면서 천사와 악마의 실물을 보았다.
왼쪽어깨엔 악마, 오른쪽어깨엔 천사가 서있었다.
정확히말하면 악마는 앉아서 다리를 계곡위의 다리위에 앉은 아이처럼 흔들고 있었다.
삼지창같은 막대기도 들고있찌않고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빨간눈초리를하며 나에게 말을걸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이딴곳이 뭐가좋다고신발. 나같으면 이미 돌아갔겠따"
천사는 형광색 정장을 입고 팔짱을끼고 서있었다. 무시무시한얼굴에 오히려 악마처럼 보였지만 내겐 그당시 천사였다
"한국으로 돌아가지말고 참아, 그래도 조그마한 희망의 빛줄기가 있는한, 절대 포기하지 마, 포기는 쉽게하는거아니야"
솔직히 아직도 누가 천사고 누가 악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그당시 내 내면에선 미국에서 조금 외롭고 배고픈생활을하더라도 기다리고싶단 욕망에 돌아가지말라고 말한 형광색녀석을 천사라고 생각했던것같다.
그리고 그렇게 3달을 버텨냈다. 한달에한번씩 가는 한인교회에선 여전히 나는 인기쟁이였다
나를보며 너무 웃기다고, 학교에서 인기 많겠다고, 역시 한국애는 옷을 잘입는다는둥.
나를보며 웃는 그 얼굴을 보고 나는 나도모르게 눈물이 봇물터지듯 나와 화장실로 마구 달려가서 세면대의 물을틀어놓고 엉엉 울었다.
왜울었냐고? 너무 행복해서울었다. 난 아침에 일어나 배게와 대화를했다 "잘잤니?"
그리고 중학교때부터 함께해온 오리알람시계도 움직이며 나에게 말을걸어서 나의 대화상대는 늘 비생명채였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움직이는 인간이 내게 말을 걸고 좋아해주는모습이 너무나 행복해서 한인교회가는날이면 늘 울었었다.
그렇게 3개월을 탈모처럼 빠지는 머리카락과 간지럽다못해 아픈 두드러기를 참아내며, 버텨내고 이민국에서 또 편지가왔다.
-3개월만 더 기다려라 . 문제를 찾아냈다. 너희 어머니와 너의성이 다르지않냐? 친자확인이 되어야한다. (미국은 어머니와 아들성이 같음)
그리고통장에 학비를댈만한 잔고가 없다 돈이 부족한거아니냐 (그당시 1학기 학비의 6배가량 들어있었음)-
문득 변호사가 일처리를 잘못하여 이렇게된것같아 억울하기도했지만 처음보는친척이 발벗고나서 도와주는데 난 뭐라고할수도없었다.
그리고방으로 올라가 달력을 넘겼다. 3개월뒤까지 넘기는데 한장한장 너무나 오래걸렸다. 그리고3개월뒤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고, 그떄 눈물이 흘러나왔다. 부모님사진을 보며 엉엉 울고, 오리알람시계와 함께 껴안고 울면서 3일밤낮없이 잠도자지않고 밥도먹지않고 그렇게 울었다.
가슴이아파서 티셔츠를부여잡고 울었는데 티셔츠가 찢어졌다.
그리고문득 눈을떠보니 응급실.
3일동안 밥도먹지않고 잠도자지않고 울기만해서 눈은 배찌눈이된상태로 병원에서 눈떠서 보험도되지않는 어마어마한 병원비를내고 다시 돌아왔다.
그때부터 난 팔굽혀펴기조차도 할수없는 좁은방에서 운동을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책상위로올려두고 팔굽혀펴기를 하기시작했고, 윗몸일으키기도구를 사서 윗몸일으키기를했고, 문턱을잡고 턱걸이를 하기시작했다.
2시간거리를 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않아 2시간왕복으로 뜀걸음을 하였고 , 그렇게해서 3개월을버텼는데 이민국에선 결국
-한달안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라, 안그러면 불법체류자인증할것이다-라는 내용의 편지
바로 1주일간 미국 여행계획을 세우고 LA며, 시카고며, 버지니아며 놀다갈계획을 세웠다.
한국으로 돌아갈짐을 싸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 그래 , 분명 1년뒤에 이런일 생각하면 피식웃으면서 넘길수있을거야 그래..힘내자..힘내자 아무일도아닐거야"
그렇게해서 한국에 돌아온 나는, 고3이였다. 매일 불면증에 악몽을 시달리며 일어나면 배게가 흠뻑젖어있었고, 옷도 젖어있었고, 발작을 해대며 잠을 설쳤다. 미국에서의 악몽이다.
1년간 두드러기는 더 심해져, 거의매일 몸에도좋지않는 약을 먹게되고, 머리카락빠지는건 물론이고, 그토록먹고싶던 한국음식도 들어가지않았다.
하루에 두끼먹으면 잘먹는 생활을 1년간하며 1년째 되는 새벽날 아버지꼐서 내방문을열고 들어오셨다.
온몸을 부르르떨면서 발작을 하고있던 나를 꼭 껴안아주시면서
"아들, 아빠가 사실 다 알고있다"라며 꾹 껴안아주셨다.
그렇다, 난 미국에서의일을 부모님께 다 말씀드리지않았다. 기껏 가고싶다해서보내줬는데 그런 쓰레기같은생활을 하면 걱정하실까봐 숨겨왔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이신가보다. 그뒤로 불면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하루에 다섯끼를먹어도 배가고픈 식욕도 돌아오고, 두드러기도 잠시 사라지고 머리도 많이 자라나고 살도 쪄갔다. 문득, 지금 5년이 지난 일이지만, 내사정을 알고있는 단한명의 친구와 술을마시며 그때이야기를하면, 술집에 앉아있기 창피할정도로 눈물이 흘러나온다.
책에서읽은적이있다.세상에서 제일큰병은 '외로움'이다.
나는 정작 13개월동안 배게와 알람시계와 이야기를하며 외로움이란 병을 앓았다. 난 정신병자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제대로된교육을 받고온줄만 알고있는 친구들에게 밉보이지않으려고
내자 지금껏 만들었던 국가공인영어인증시험점수들은 모두 한국에서 공부한것이다.
미국에서 10년살다온것같다고 미국인이 내 발음에대해 칭찬을해주는것도 모두, 한국에서 공부하였다.
왜냐면, 창피했다. 학교에 다니다왔다고 뻥을쳤기때문이다.
오히려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하게된 나는 지금은 지방국립대 경영학부로 군대도 다녀오고 너무나 좋은 생활을 하고있다.
물론 인기는 식지않았다. 엄청난훈남이다. 자부한다.
많은시간이지났는데, 요즘 인터넷에 행복한투정부리는 사람들 천지다.
자신의상황에대해 감사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뿐이다
심지어 목숨을 버리려고도한다.
모두들,
일어나길 바란다.
모두들, 일어나세요.
고비를 한번넘길때 그냥넘기는것보단 그것을 계단삼아 한칸한칸 올라가며 인생의 성공길을 것는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힘든일이있으면, 좌절만하지말고 그것을 계단으로만들어라.
모두들, 번쩍 일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