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괴물의 탑(16~20)

왕보리201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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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eb.humoruniv.com/main.html
< 웃대 : 듀라라 님 >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의식이 점차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뜨자, 익숙한 백열등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 덕분에 정신이 맑아졌다.

어제 그대로 기절한건가? 손발을 움직여보았다.

다행히 묶여있지는 않았다.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약품냄새도 없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슬쩍 이불을 훑어보자 꽤 깨끗하다.

이런 곳에 와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아직 흐릿한 의식을 가진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계속 이 따뜻한 이불 속에 있고 싶다.

그 유혹을 어렵사리 떼어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에 갇혀있었던 곳과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바로 활짝 열린 입구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비가 오네.”


이 방에도 창이 있었고, 물론 비는 꾸준히 내리고 있었다.

정말 지겹도록 내린다.


“일어났네요?”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자,

거기에는 살짝 지저분한 환자복을 입은 여성이 나무로 된 그릇을 들고 서있었다.

그녀가 손에 든 그릇에서 나는 고소한 향이 후각을 마구 괴롭혔다.

그녀도 시선을 의식했는지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더러운 부분은 다 버리고 깨끗한 부분을 푹 삶은 박쥐국이에요.(하마터면 저 어이없는

작명센스에 웃을 뻔 했다.) 먹으면 좀 나아질 거예요”


그녀는 침대 옆에 그릇을 올려놓았고, 잠시 머뭇거리면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 그릇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 담겨있는 숟가락을 자세히 보니 동물의 뼈를 깎아서 만든 것이었다.

그 때문에 살짝 지저분한 면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릇에 담긴 국을 잠시 바라보았다. 고기 몇 조각과 처음 보는 식물이 담긴 맑은 고깃국이었다.

한 수저 떠서 입에 담았다.


“아, 맛있어요.”


순수하게 감탄했다.

요 근래 들어 가장 맛있고 인간다운 식사였다.

그 말을 끝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배가 고팠던 탓에 허겁지겁 국을 먹었다.

(어느 정도 식힌 국이라 입천장이 데이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다.)

따뜻한 국이라 그런지 한 수저 먹을 때마다 온 몸에 온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직도 나에게 대한 경계를 풀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깊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고, 곧장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보였기 때문에.


그녀를 따라 밖을 나가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그녀 말고 여러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큰 모닥불 근처에서 잡담을 떨고 있고,

어떤 사람은 모닥불 위에 올려놓은 큰 냄비를 젓고 있었다.

방금 먹은 국도 저기서 나온 것이라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더 넓게 보니 구석에서 뼈를 깎으면서 도구를 만드는 사람도 있었고,

쥐를 가축처럼 우리에 가둬놓고 관리하는 사람도 보였다.

쥐는 내가 알던 평범한 쥐가 아니었다. 얼핏 봐도 30c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짐승이었다.

그제야 왜 다들 쥐고기, 쥐고기 하는 지 이해가 되었다.

저 정도 크기면 확실히 식량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전체를 훑어보고 나니 적어도 10명은 되어 보이는 인파였다.

중간 중간에 어린 아이들도 있는 것을 보니 이 마을이 생긴 지 좀 된 모양이었다.

나와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같은 환자복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하나 둘 모여서 만든 마을이에요.”


그녀는 나의 궁금증을 알아차리고는 곧장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은은한 미소가 떠있었다.


“모두 여기에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도우면서 살고 있지요.”


이런 감옥 같은 곳에 모여서 의기투합하여 지내는 사람들을 보니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역시 인간의 사회적인 동물인가 보다.

그 때 그 모닥불 근처에서 떠들던 금발의 여인이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레이나……라고 했던가? 그녀는 성큼성큼 이리로 걸어왔다.


“레이나 또 무슨 이상한 소리할 생각은 마.”

“흥, 남이사”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흥, 보기보단 괜찮게 생겼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잠시 생각하다가 곧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이런 칭찬은 정말 오랜만에 들었기 때문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제야 다른 그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지, 이 분위기는?


“넌 어디서 왔어?”


레이나가 물어왔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라 잠시 머뭇거렸고, 그녀는 내 태도를 보고 질문을 새롭게 바꾸었다.


“그러니까 이 탑 어디에서 왔냐고”

“아? 여기가 탑이었어요?”


그저 큰 감옥인 줄 알았는데 탑이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이 건물의 생김새를 생각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으니까.


“나 참, 아무것도 모르잖아.”


머쓱한 미소를 지을 뿐 뭐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다들 쳐다보고 있었기에 숨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 이상한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마음만큼 쉽게 되지 않았다.

꼭 법원에 있는 피고가 된 기분이었다.


“뭐, 린한테 들었으니까 대충 알겠지?”


린이라면 저 일본인 여자를 말하는 건가?


“아니, 아직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았어. 방금 일어났거든.”


린의 말에 레이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팔목을 잡았다.

피부 위로 부드러운 여자의 온기가 감돌았다.

린의 따뜻한 온기와 다르게 레이나의 손길은 후끈하다고 느낄 정도로 열기가 강했다.


“자, 이리와”


그녀는 나를 끌어당겼고, 10명 정도 모인 사람들 앞으로 끌고 왔다.

린도 내 뒤를 따라 조용히 따라왔다.

대략 스무 쌍의 눈동자들이 나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어색하고 부담되는 자리 때문에 괜히 긴장으로 가득 찬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린이 데리고 온 남자야. 규칙대로 저 놈은 린의 노예가 될 꺼야.”


레이나의 말을 이해하는 데 10초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자, 잠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고, 모든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쏟아졌다.

역시 이런 주목에는 어색했지만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린의 남자라니?”

“아, 넌 처음이라서 모르겠구나. 아, 설명하기 귀찮은데…….”


레이나는 정말로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설명 하나 없다니…….

레이나도 미인이지만 저런 여자는 내 쪽에서 거절이다.

(총각 주제에 이런 말 하는 자체가 우습지만.)

물론 린과 같은 미녀의 노예라면 나야 너무나도 감사하지만

그래도 순서라는 게 있지 않는가? 밑도 끝도 없이 노예라니?


“이봐~ 레이나! 자기 남자 아니라고 너무 막 대하는 거 아니야??”


군중들 사이에서 작은 불만이 터져 나오자, 레이나는 그녀 특유의 도끼눈을 떴다.


“흥! 솔직히 여기 남자들이 물이 안 좋긴 하잖아!”

“우린 네가 좋아서 같이 있는 줄 알아?!”

“뭐, 뭐야!? 이 쓸모없는 다리 하나 더 달고 있는 놈 주제에!!”

“쓰, 쓸모없다니!! 네, 네가 내꺼 보기라도 했냐!?”

“흥! 네놈 꺼 안 봐도 뻔하다!”


레이나는 당당히 소리쳤고, 남자들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첫 인상이 너무 강해서 같이 살기라도 했다가는 기에 눌려버릴 것 같았다.

친구로써도 힘든 타입이다.


“또 무슨 일이냐?”


그 때 익숙한 음성이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방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숱이 거의 없는 머리에 익숙한 똥배.

처음 여기를 올 때 보았던 중년이다.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대충 상황이 이해되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나. 너는 여자란다. 여자라면 조금은 조숙해지는 게 어떠냐?”

“흥, 남이사”

“아이고……. 저 철부지”


중년은 레이나와 짧은 대화를 나눈 뒤에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명하려면 기니 일단 거기 앉게나.”


그는 모닥불 근처에 있는 가죽으로 된 방석을 가리켰고,

잠시 주춤하다 어색하게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사람들도 여기저기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 순간 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지자 그는 입을 열었다.

가운데에 있는 큰 모닥불의 탓에 마치 원주민이 된 기분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는 괴물들도 있고 비도 전혀 그치지 않는 곳이라네. 말 그대로 인간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적당치 않은 곳이지.”


그에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 돕고 살기 위해 마을을 만들었고, 그것이 지금 이 마을이라네.”


그는 자신이 가꾼 마을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거기에 앉아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일단은 우리도 인간이기에 여러 가지 욕구를 해소해야했네. 먹는 것은 쥐와 식물이 있으니

괜찮다네. 식수는 밖에서 끊임없이 내리고 있으니 걱정 없고……. 집이라고 한다면 여기저기

널린 게 침대와 방이지 않는가? 그것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안착하고 살면 되지. 그리고

옷은……. 솔직히 여기서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급급하다네. 그렇기 때문에 옷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안 쓰게 되지. 다들 좋은 옷을 입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기도 하고 말이야.

아름다운 옷이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뽐내기 위해 있는 것인데 우리들은 모두 같은 의복을

입고 있으니 굳이 아름다움을 뽐낼 필요가 없지. 다음은 여자와 남자 문제인데…… 이것은

그냥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결혼할 수 있다네. 물론 강제적으로 했다가는 마을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마지막 중년의 말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무튼 법적인 절차가 없는 곳이라 마음만 맞는다면 결혼이 가능한 모양이다.

법전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리고 우리는 서로 돌아가면서 밖을 정찰한다네. 혹시 괴물들이 여기를 알아차리고 쳐들어

올지도 모르니 말일세.”


그제야 왜 그런 위험한 곳에 여자가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린에게로 시선이 돌아갔고, 그 순간 그녀는 눈치 마주치고 말았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두근거렸다.


“그리고 방금 린과 자네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잠시 나와 린을 한번씩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순간 누군지는 모르지만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과 노예라고 보면 된다네.”

“네?”


그의 어이없는 답변에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한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소개를 대충 받은 나는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마을 남자들의 대부분이 린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남자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띠껍다는 것이 그 증거다.

확실히 아름다운 린을 보면 가슴이 떨린다.

그 뿐이겠는가? 린은 마을에서 가장 강한 여성이다.

남녀불문하고 말이다.

탑에 오기 전에 합기도와 유도 유단자였다고 하니 대충 짐작 가지 않는가?

유단자라서 그런지 남자들도 함부로 찝쩍거리지 못한다.

그런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남자가 와서 그녀와 같이 생활하게 됐으니

얼마나 배가 아프겠는가.


“부럽다.”

“부럽기는요……. 노예라고 하잖아요.”

“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 마을에서는 노예가 친구가 되고 친구가 남편이 되는 곳이라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말이다.

아무튼 그의 말이 맞는다면 난 아름다운 아내를 얻게 되는 것일까?

꿈만 같은 소리라서 실감이 가지 않았다.

아, 지금 옆에 앉아있는 사내는 린을 대놓고 좋아했던 테루라고 한다.

프랑스인으로 꽤 핸섬한 외모를 지니고 있고, 여기에 온 지는 5년이 된 마을 주민이다.

덧붙여 프랑스인 특유의 그윽한 눈빛을 지닌 옴므파탈이었다.

내가 여자였다면 한 번에 껌뻑 넘어갈 정도의 매력남이다.

“넌 참 재수 좋은 거야. 지금까지 린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사람은 촌장이랑 레이나뿐이었거든.

레이나는 그냥 들이댄 거지만 말이야.”

“그런가요.”

“그래……. 하아……. 이제 난 삶의 목적을 잃었어.”

“왜요? 레이나도 있잖아.”


문득 앙칼진 금발의 미녀가 눈에 그려졌다.


“걔는 이미 촌장의 노예야”

“에에에에에!!??”


생각지도 못한 그의 답변에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테루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반응에 작게 동조했다.


“나도 처음에 놀랐다니까. 레이나는 이미 주인이 있는 몸이니까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어”

“그, 그럼…….”

“그래, 레이나는 촌장의 아내라고 보면 될 거야”


50대 아저씨와 20대 아가씨의 만남이라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속으로 생각한 것을 알아차렸는지 테루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노예라는 건 함부로 할 수 없는 거야. 주인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니까? 마을 관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던데? 나도 적지 않게 동의하고 있고

말이야”

“동의하고 계신다구요?”

“그래, 만약 노예 제도가 없다면 누가 함부로 바깥에 가서 정찰을 하겠냐? 안 그래?”

“그, 그것도 그러네요.”


여기서 잠깐 집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바로 노예와 주인. 그게 성립되는 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찌 보면 간단하다.

다들 하기 싫은 정찰 임무를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보면 된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밖에 정찰하는 것을 싫어한다. 괴물에게 먹히고 싶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주어진 특권이 바로 노예제도.

이 탑으로 처음 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 어두운 복도에 도달하게 된다.

그 결과 90%이상이 죽게 되고 몇몇 운 좋은 사람들만이 마을로 들어올 수 있게 된다.

물론 정찰하던 사람의 눈에 띠어야 가능한 소리다.

이 부분에서 내가 재수 좋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탑은 생각보다 거대하기 때문에 좀처럼 정찰자와 마주하기가 쉽지 않아. 오히려 괴물과

마주할 확률이 더 높지.”

“저 괴물과 마주했었는데요.”

“에? 근데 어떻게 살아있대?”

“린이 구해줬어요”

“히야~ 너 진짜 재수 좋구나!”


테루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고,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너무 친한 척해서 그런지 소심한 나로서는 영 좋지만은 않았다.


“김희수.”

“응?”

“?”


테루와 나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뒤로 돌렸고,

거기에는 검은 머릿결이 매력적인 린이 서있었다.

모닥불의 빛을 받은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 덕에 테루와 나는 입을 벌린 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박자나 늦은 뒤 겨우 대꾸할 수 있었다.


“으, 응??”

“가자.”

“어, 어딜요?”

“집으로”

“지, 집이라니요?”

“내 집으로 가자고요. 내 노예가 되었으니까.”


정신 아찔해졌다. 좋은 의미로 말이다.


멍하니 그녀를 따라갔다.

지금 상황에 무슨 말을 했다가는 말을 더듬을 것 같았기 때문에

최대한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걸었다.

그녀도 친절한 성격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라 그런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걷다보니 금방 그녀의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비시설이 전혀 없는 뻥 뚫린 문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적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내버려둬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역시 원주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찰을 다녀와서 그런지 피곤하네. 청소랑 요리해.”


그녀의 말 톤은 확연히 달라져있었다.

처음에 느껴졌던 작은 친절은 온대간대 없고 완전 부하를 다루는 듯 했다.

언제나 상사 비위를 맞춘 나였기에 그녀가 아랫사람을 다루는 듯한 느낌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도 백소라 팀장님을 대하듯 당연하다는 느낌으로 하기로 했다.

구해준 사람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풀들부터 치우기 위해 허리춤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괴물들을 싫어하는 풀이라고 했으니 지니고 있으면 쓸만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주워 담고 있자 침대 위에 누워있던 린이 기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요? 하라는 청소하고 있자나요.”

“그걸 왜 주워 담아?”


너무나도 대놓고 반말을 하니 살짝 불쾌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백소라 팀장이

나에게 말을 걸어준다고 생각하고 기분 좋아듣기로 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니까.


“괴물들이 싫어한다면서요? 조금 챙겨 놓으려고요”

“어차피 정찰할거 아니면 풀을 지니고 있을 필요 없잖아?”

“만약을 위해서 애요.”

“그럼 그 가죽주머니는 뭐야? 받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잠깐 머뭇거렸지만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

흑인에 대해서 모두 설명해주었다.

처음 내가 방에서 탈출하고 흑인의 방에 갔었던 일을 설명해주자

그녀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실제로 들으니까 무섭네.”

“정말 죽다 살았다니까요.”

“알았으니까. 청소 끝났으면 이번에는 국 좀 가져다줘. 모닥불 근처로 가면 있을 거야.”


그녀의 아무렇지도 않은 대꾸에 김이 빠진 나는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내심 그녀의 위로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으니까.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흑인의 눈동자와 손길이 감각을 찌르는 듯 했다.

끔찍했다.


“하아……. 잊어버려야지.”


고개를 거칠게 흔들면서 기억을 떨쳐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새 모닥불 근처에 도달하고 있었다.

어제 보았던 커다란 냄비 근처로 가자 젊은 여성이 열심히 국을 젓고 있었다.

어제부터 계속 했던 건가? 속으로 감탄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콧가에 주근깨가 별처럼 잔뜩 박혀있는 귀여운 외모의 여성이었다.

나이는 아직 10대나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녀도 역시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말을 놓아버렸다.

노예 신분인데 이래도 되나 싶어 움찔했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저에게 준 일거리애요.”

“그래? 그럼 다들 자기 할 일이 있는 모양이네”

“네, 그래야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나름 사회적인 구조가 있었네.”

“그럼 사람들이 사는데 그런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신거애요??”


사람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듯한 말투.

원래 저런 성격인지 아니면 나한테만 그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린 애가 어른한테 말하는 거 하고는…….

귀여운 외모만 아니었다면 한 방 후려갈겼을 지도 모른다.


“너 이름이 뭐니?”

“자기 이름부터 말하는 게 순서 아닌가요?”


역시 마음에 안 든다.

“아, 맞네. 난 김희수. 알다시피 방금 이 마을에 온 사람이야. 귀여운 아가씨 이름이 뭘까?”

“느끼해.”

“뭐, 뭣…….”

“제인이라고 해요. 나이는 21살이나 먹었으니까 애 취급하는 말은 안 해주었으면 정말

고맙겠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뻘쭘하게 들고 있던 내 그릇을 낚아챘다.

크게 국자로 한 번 퍼더니 국물 한 번 튀지 않고 그릇에 깔끔하게 담아냈다.

딱 봐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여기요. 국은 하루에 한 사람당 2그릇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알아두세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바로 등을 돌렸다.

여기 여자들은 다 하나씩 문제가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까칠한 거야?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안고 린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따끈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요 근래에 계속 굶어서 그런지 정신력이 많이 약해진 모양이다.


“린, 가져왔어요.”


집에 도착하니 심해 같은 고요함이 집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분위기 탓에 까치발을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이불도 덮지 않은 체로 잠들어있는 린이 보였다.

얼마나 피곤했던 것인지 미약하게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물론 작게 웃었다.)

아무리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으로 자고 있는 그녀는 너무 귀여웠다.


“그래, 주인은 자라. 내가 대신 국 먹어 줄 테니까”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면서 침대 옆에 주저앉아 국을 먹었다.

중간 중간에 씹히는 고기가 따뜻한 포만감을 제공해주었다.

마치 자장면 먹다가 돼지고기를 씹는 그런 기분이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탕수육에 소주 한 잔이 그리워졌다.


미세한 소리가 귓가로 들려오자 의식이 점차 제자리를 찾는다.

살며시 눈꺼풀을 드니 린이 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정찰이라도 나가려고 그러나?

평소에 나였다면 잠이라는 달콤한 와인에 더 취했을 지도 모르지만

노예라는 자신의 처지가 생각나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났어요?"

"응"


처음의 그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괜히 괴기감이 들었지만

역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니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분명 어제만 해도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불과 시트가 깔려있었다.


"린이 한거예요?"


아직도 그녀와의 대화는 어색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차가운 바닥에 재울 수는 없잖아."

"고, 고마워요."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하던 준비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시트 위에 앉아서 멀뚱히 그녀가 하는 것을 보면서 뭔가 도울 것이 없나 유심히 살폈다.

"어, 그거."
"뭐?"
"그거 화염병 아닌가요?"
"맞아."

그녀가 검은 가죽으로 된 바구니에 화염병을 집어넣고 있었다.

소주병 크기에 투명한 액체를 담고 있었고, 작은 가죽이 그 병을 밀봉하고 있었다.

역한 휘발유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만든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전에 나를 구해줬을 때 보았던 불길이 저것이었나? 것보다 휘발유는 어디서 구한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

"?"


문득 고개를 드니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어색하거나 쑥스러워서 눈을 피했을 테지만 지금은 잠기운 덕분인지

그녀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흑요석을 갈아놓은 듯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그 눈동자가 나를 유혹하는 듯 껌뻑거렸다.


"같이 갈래?"

"네?"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연 그녀의 대답은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같이 가자니? 겨우 이 마을에 정착하기 시작한 나에게 정찰이라니?

거기다가 괴물의 약점은커녕 어떻게 생긴 지도 제대로 못 봤는데 무슨 놈의 정찰??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별로 안 어려워. 따라와."


그녀는 내 의사를 묻지 않고 그렇게 딱 잘라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혼자 덜렁 남게 된 나는 시트 위에서 짧은 고민에 빠졌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밖으로 나가자,

몇 시간 전에 봤던 큰 모닥불은 사라지고 불씨만 조금 남기고 있는 재들이 보였다.

저 모닥불이 이 마을의 스위치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취침시간에는 끄고 활동시간에는 켜지는 그런 형광등 같은 스위치 말이다.

내 짐작일 뿐이지만.


"일단 이걸 입어."


모닥불을 보면서 걷던 나에게 무언가 휙 날아왔고, 어정쩡한 자세로 무언가를 받았다.


"으……. 이게 무슨 냄새죠?"


망치로 후려치는 듯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지는 그런 냄새다.


"괴물들이 싫어하는 풀즙에 적신 가죽옷이야. 입어두면 좋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던진 것과 거의 비슷한 가죽옷을 환자복 위에 걸쳐 입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또 다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띵 해질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나는 옷이었다.


"자, 따라와."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아직 입지 못한 가죽옷을 한 손에 들고 말이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마을을 훑어보았다.

다들 잠을 자는 것인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단 한 방만 빼고 말이다.

코 고는 소리가 어찌나 큰 지 귀가 얼얼해질 정도였다.

어딜 가든 저런 민폐쟁이는 한 명씩 있는 모양이다.

마을 사람들도 그에 대한 피해를 적지 않게 입은 모양이다.

그의 집이 마을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번에는 문 앞에 창과 칼 같은 무기들이 잔뜩 세워져있는 방이 보였다.

아마 이 마을의 대장간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물론 철이 없기 때문에 도구들의 대부분이 뼈나 돌이다.

하나 챙길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마음대로 가져갔다가 오해 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의 방을 더 지나지고 서야 그녀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밀어."


그녀는 큰 바위를 보면서 짧게 말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보았던 입구다.

저 바위를 지나가면 또 그 괴물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온 몸을 굳게 만들었다.


"저, 저기…….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

"일단 밀어, 이 시간대라면 괴물들도 자고 있을 시간이라 가장 안전하단 말이야. 지금이

아니면 너무 위험해."

"아, 알았어요."


위험하다는 말에 마지못해 그녀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바위에 손을 얹고 체중을 실어 있는 힘껏 밀었다.


"으으!"


짧은 기합을 주면서 있는 힘껏 밀어보았지만 살짝 흔들거리기만 할 뿐 밀리는 지는 않았다.


"쯧……. 무슨 남자가 힘이 없어?"

"죄, 죄송……."


그녀의 앞에서 제대로 힘을 못 쓰니 괜히 민망해졌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떻게든 열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때 그녀가 슬쩍 옆에 붙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려다가 그냥 입 다물고 같이 밀었다.

그녀가 도와주니 어찌저찌 열 수 있었다.

매번 이 바위를 미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아무리 내가 힘이 없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묵직한데…….

이것도 따로 임무가 있는 것일까?

이 마을 사람들은 각각 임무를 맡고 있다고 했으니 내일 확인해봐야겠다.


바위를 옆으로 치우니 그것이 가리고 있던 끈적한 어둠이 눈동자에 비춰졌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고, 등골 시리게 찬 공기가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가 손을 뻗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도저히 무리다. 저기를 넘어간다는 것은.


"자, 잘 다녀오세요."

"뭔 헛소리야. 빨리 나와."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덥석 잡았다.

반항을 채 하기도 전에 밖으로 끌려 나갔다.

가로등이 있던 밝은 곳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으로 빠져들자 마치 심해로

떨어지는 듯한 공포감이 느껴졌다.


"이미 이리로 넘어왔으니까 돌아갈 생각은 하지마. 노예가 주인을 버리고 도망가게 되면

마을에서 쫓겨나게 될 테니까."


애초에 거부권 따위는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주인의 말을 어기게 되면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 말은 이 어둠 속에 혼자 남게 될 지도 모른다는 소리.

두 눈을 부릅뜨며 이 어둠에 익숙해지려 했다.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뒤를 따라갔다.


"!!!"


무언가 둔탁한 소음이 화살처럼 귓속으로 빨려 들어왔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을 때 문이 느닷없이 혼자 닫혔다.

그 덕에 안 그래도 어둡던 공간이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뭐, 뭣!"

"원래 살짝 경사진 곳이라서 문을 열면 금방 다시 닫기는 구조야. 오르막 내리막도 모르는 건

아니지?"

"아, 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군가가 ‘마을 입구를 닫았다.’ 라는 착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긴 마을 사람들이 그럴 이유가 없지.

가장 하기 싫은 정찰 임무를 이렇게 해주는데 말이다.


"이제부터 조용. 슬슬 풀을 심어놓은 통로를 벗어나게 될 거야. 그들은 냄새와 소리만으로

사냥감을 감지해내니까 조용히 하기만 하면 안전해."


냄새라면 이 지독한 가죽옷을 입었으니까 괜찮은 모양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순식간에 가죽옷을 입었다.

냄새고 나발이고 목숨이 위험하니 개똥으로 만든 옷이라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가죽옷을 입은 나는 잘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목이 타서 마른침을 수십 번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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