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괴물의 탑(26~마지막)

왕보리201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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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eb.humoruniv.com/main.html
< 웃대 : 듀라라 님 >

 

끊어졌던 의식이 재생버튼을 누른 듯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기억력이 되살아났고, 조심스럽게 눈을 떠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어딘가에 갇혀있는 상태였다.

많은 방들 중 하나를 감옥으로 개조한 모양인지 린의 집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곳이었다.

입구 쪽은 당연히 막혀있었고, 제대로 된 가공 기술이 없기 때문에 밧줄과 뼈만으로 입구를

막아 놨다.

하지만 어찌나 공들여서 만들어놨는지 손으로는 절대로 끊을 수 없어 보인다.

애초에 밧줄만 봐도 사람의 손으로 끊을 수 없는데 뼛조각들까지 달아나서 자칫 잘못하면

큰 상처가 날 것 같았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뜨거운 통증이 뒤통수를 자극했다.

 


“큭!”

 


뒤통수를 만져보니 붉은 것이 슬쩍 배어나온다.

어느 정도 굳은 걸로 봐선 기절한 지 몇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아프지만 꼼꼼히 뒤통수를 만져보았다.

혹시 어떤 부분이 부셔졌거나 하는 일이 있을까 싶어서.

다행히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고, 우리한 통증 말고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통증을 이겨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싶어 밧줄을 만져보니 마치 금속으로 만든 듯 단단하다.

이런 밧줄이 있었다니 마을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열고 있었는데 강한

배신감으로 오물을 뒤집어 쓴 듯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긴 노예였으니까.”

 


며칠이었지만 따뜻했던 사람들의 정을 떠올렸다.

몇 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온기.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나는 린의 노예일 뿐.

그 이상으로 보여 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설마 그렇게 갑자기 공격적으로 나올 줄이야.

여기의 규칙이란 게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나?

 


“아! 린!”

 


완전히 잊고 있었다.

린은 아직 죽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믿고 싶다.)

괴물에게 잡혀갔다는 것도 그저 나의 짐작일 뿐이잖아?

 


“그래, 린이라면 분명 괜찮을 거야.”

 

일단 린에 대한 걱정을 접고, 상황을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린이 괴물들에게 잡혀갔다고 하지 않고 사라졌다고 했으면 마을 사람들이 방금 전처럼 나를

공격했을까?

조급하고 어리석었던 태도를 자책했다.

그들을 너무 믿은 내 탓이다.

누굴 탓하겠는가.

흑인에게 그렇게 당했으면서 벌써 남을 쉽게 믿다니.


문득 손에 묻은 푸른 액체에 눈이 갔다.

이게 뭐지? 잠시 생각해보니 금방 그 답에 도달할 수 있었다.

괴물의 피다.

그것 말고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 순간 손이 기억하는 불쾌한 감각이 떠올랐다.

괴물이라고 해서 엄청나게 튼튼한 몸을 지닌 줄만 알았는데 보기보다 빈약한 녀석이었다.


불쾌감을 털어내기 위해 창에서 내리는 빗물로 빡빡 씻겨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사람들은 그들을 무서워하는 것일까?

그리고 보니 그들에게 대해서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요 며칠 간 너무나 즐거웠기 때문일까.

정말 어떻게 된 정신머리인지.


밧줄 사이로 미세하게 스며들어오는 빛줄기와 웃음소리. 역겹다.

내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실수였다. 젠장.

그 때 웃음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대화를 들었다.

 


‘그런데 저놈은 어떡해?’

‘사형이지 뭐, 예전부터 그랬잖아.’

‘그럼 간만에 고기 먹겠네?’

‘그렇지. 쥐고기도 이제 슬슬 질리니까. 사실 레이나가 그렇게 말할 때 입에 침이 고이더라니까.

‘킥킥킥, 정말 넌 인간말종이다.’

‘웃기고 있네! 매일 맛있는 부위는 지가 처먹으면서!’

‘야야, 그만하자. 다른 사람이 들으면 우리까지 처형한다고 뭐라고 할지도 몰라.’

‘뭐, 다 똑같은 생각일 텐데 뭔 걱정이야 킥킥’

 


온 몸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것이 같았고, 심장마저 서리가 끼는 듯 했다.

잊고 있던 삶에 대한 감각이 다시금 깨어나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청각에 5배 정도 민감해졌다.

내 심장소리까지 북소리처럼 들려왔다.


순간 그녀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여자라면 성……노리개라도 할 수 있겠지만 남자라면…… 그냥 퇴출이야. -

 


어째서 그녀는 중간에 뜸을 들였을까?

설마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중간의 말이 이것은 아니었을까?

여자라면 성노리개든 할 수 있겠지만 남자라면 그냥 먹힌다고.


온 몸에 커터 칼로 난도질하듯 두려움이 몸을 갈가리 찢어놓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째서 이 중요한 사실을 숨겼던 것일까? 뭐 때문에?

 


‘그건 그렇고, 저놈 아직도 기절하고 있으려나?’

‘아, 걱정 말라고 머리통을 처 맞았는데 벌써 일어나면 슈퍼맨이게? 그러지 말고 배고픈데

쥐고기 구이나 먹으러 다녀오자고’

‘그래, 뭐 잠깐인데.’

 


그들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이 순간이 유일한 찬스임을 알아차렸다.

주위를 빠르게 살펴보았다.

어두컴컴했지만 이미 어둠에 익숙한 눈이었기 때문일까 순식간에 여기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시간이 흘러갈수록 심장이 쪼그라드는 통증을 느꼈다.

어느 샌가 몸에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쾌한 공기가 온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놈들에게 먹힌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끔찍했다.

이미 배신이라는 가슴의 통증보다 목숨의 위협이라는 본능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있는 힘껏 소리쳐서 욕을 토해내고 싶었다.

마치 술 마시고 숙취에 취한 듯 정신이 없고 속이 메스껍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냉정하게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방이 떠올랐다.

그 때는 배고픔만 없앨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철창을 자르고 탈출했다. 그리고 떨어질 것 같은 무서움도 이겨냈다.

그 고통의 대가가 이거야?

 


“신발…….”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머리에 망치라도 후려 맞듯이 정신이 번뜩 떠졌다.

탈출할 수 있다! 그걸 왜 까먹고 있었을까!!


몸이 묶여있지 않다.

이 말은 즉, 밧줄로 된 감옥만 탈출한다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소리.

그들은 처음부터 내가 탈출할거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역시 탈출은 불가능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들은 놓친 것이 하나 있다.

몸 전체를 조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평소에도 그것을 사용한 것을 한번도 보인 적이 없으니까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바지춤에 넣어둔 그것을 꺼냈다. 이렇게 보니 상당히 작아보였다.

몸에 매번 지니고 있었는데도 까먹을 정도였으니까.


“설마 다시 사용하게 될 줄이야.”


가느다란 실톱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더 기다릴 필요 따윈 없다.

여기를 지키던 녀석들도 식사를 하러 갔으니 이 앞에는 아무도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밧줄 너머를 훑어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방금 전 녀석들의 대화를 본다면 내가 없어지면 상당히 곤란할 텐데 경비가 보기보다 소

홀했다. 이곳의 나태한 생활이 익숙해졌다는 소리겠지.

실톱으로 조심스럽게 밧줄을 끊어내기 시작했다. 철창마저 자른 톱이라 그런지 튼튼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힘이 들어가면서 톱질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역시 밧줄로 된 것이라 그런지 쉽게 끊어졌고, 금방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들 식사를 하러 갔는지 길거리는 고요했다.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그런지 다 같이 식사를 한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 사이에 끼여서 즐겁게 밥을 먹었었다.


“잊어버리자.”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생각을 떨쳐냈다.

그들은 나를 먹을 생각까지 한 놈들이다. 더 이상 정 따위는 없었다.


곧장 린의 집으로 향했다. 린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마을 놈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그녀의 집에 쓸만한 도구들은 모두 가져갔다.

그 덕분에 방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화염병과 풀이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혹시나 싶어 침대 밑 구석에 화염병을 숨겨뒀는데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화염병 3개와 바닥에 흩어져있는 풀 몇 개를 주워 예비용 바구니에 넣었다.


“!!”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귀로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이 목소리였다.


‘잠깐 식사한 사이에 도망을 쳤다고?’

‘이런 멍청한 자식들!! 다시 못 찾으면 네놈들이 무사할거라고 생각해!?’

‘허허허……. 자네들도 벌을 좀 받아야 정신 차리겠구먼’


레이나와 촌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촌장에게 맞은 뒤통수가 아려왔다.


지금 여기 숨어 있다가 들키는 것보다 그들이 이 곳에 도달하기 전에 도망가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장 행동에 옮겼다.

밖으로 뛰쳐나가자 저 멀리 나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곧 나를 발견하고 뭐라고 소리치며 뛰어오고 있었다.

젠장. 이래서는 괴물과 다를 바 없잖아!


“저 새끼 잡아! 고기 먹기 싫어!?!”


레이나의 앙칼진 목소리가 너무나도 무서워서 오금이 저렸다.

그렇다고 발을 멈출 순 없었다.

그들에게 잡혔다간 정말로 고기로 전락해 버릴 테니까.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그 때 뺨에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것은 그대로 바닥에 박혔고, 그것이 무엇인지 곧 알 수 있었다.

깃이 없는 짧은 화살이었다. 순식간에 동공이 확대되고,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 해댔다.


“죽여도 된다! 어차피 먹을 테니까!”


테루의 목소리였다. 순간 감정이 복받쳐서 그만 주저앉을 뻔 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면상을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처절한 배신감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든 그에게 상담했던 내 자신이 너무 병신같이 느껴졌다.


“미친 강아지들아!”


그런 처절한 울부짖음이 닿을 리가 없었지만 그만큼 속이 답답하고 울분을 토해내고 싶었다.

어느 정도 뛰었을까 익숙한 바위가 보였다.

저것을 밀면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2명씩 밀던 바위를 혼자 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살짝 들썩일 뿐 밀리지는 않았다.


“으윽! 열려! 열리라고!!”


이를 악물고 힘을 주면 줄수록 절망감과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 때였다.

갑자기 바위가 솜으로 바뀐 듯 순식간에 주르륵 밀렸고, 짜릿한 환희가 입가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상함을 느끼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귀에에에엑!”

“!?”


익숙한 소음이 들리자말자 거의 뒹굴다시피 입구에서 벗어났다.

어디로 몸을 숨길까 생각하다 방금 밀었던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생각 외로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바위 뒤로 몸을 숨긴 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구로 시선을 옮기자 본 적 없는 것들이

구멍에서 꾸역꾸역 튀어나오고 있었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옥에서 갓 나온 괴수들처럼 그들은 좁은 구멍 사이로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오고 있었다.


“꾸에에에에엑!”


무리들 중에 아귀를 닮은 괴물 한 마리가 거대한 포효를 내질렀다.

나를 쫓아오던 사람들은 끔찍한 비명을 질렀고,

그 괴상한 소리들이 마구 뒤섞여 순식간에 마을을 메웠다.

이가 미친 듯이 떨려왔지만 작은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들이 소리와 냄새를 맡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갑자기 찾아온 지옥의 사자들이 뇌세포의 움직임을 막았기 때문이다.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각막 너머로 멍하니 쳐다보는 일이었다.

빛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한 없이 괴기하기가 그지없었다.

바닷속에 있던 모든 괴물들이 모두 쏟아져 나온 듯 했다.

그리고 그 수가 어찌나 많은 지 순식간에 마을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도 쉽게 당할 생각은 없는지 나에게 날렸던 화살들을 괴물에게 쏘아댔다.

괴물들의 수가 많아서 그런지 대충 쏘는 화살도 괴물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활을 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는 화염병을 던져대면서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


순식간에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괴물들이 들고 다니던 하얀 창이 사람의 머리를 꿰뚫을 때면 눈을 찔끔 감았다.

마치 토끼사냥이라도 하듯 괴물들은 마을 사람들을 사냥했다.

위액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지만 억지로 참아냈다.

녀석들에게 내 존재를 알리는 꼴이니까.

겨우 속을 진정시키고 다시 그 지옥 같은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때 내 눈에 익숙한 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 쪽 눈이 다쳤는지 검은 안대를 착용하고 있었고, 한 손에는 하얀 창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녀석의 어깨에는 린이 자주 매고 다니던 바구니가 있었다.

거의 며칠동안 보았던 것이니 틀림없었다.

순식간에 온 몸의 열기가 머리에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 녀석의 남은 눈을 뽑아버리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겁쟁이다. 짜증날 정도 겁이 많은 놈이다. 젠장. 젠장. 젠장. 미안해.

입술 사이로 피가 새어나왔지만 금방 목구멍으로 삼켰다.


마을 사람들 중 몇 명은 벌써 죽임을 당해 처참하게 괴물들에게 도륙당하고 있었다.

하이에나들끼리 먹이 쟁탈을 하듯 죽은 자의 내장을 마구 잡아당기며 싸우고 있었다.

겨우 진정시켰던 위액이 다시 들썩거리면서 나오고 싶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증이 생겨났다.

이 마을의 입구에는 괴물들이 싫어하는 풀들이 잔뜩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들이 이 마을로 올 수 있었던 것일까?

일단 그 의문에 대해선 잠시 미뤄두고 여기를 벗어날 새로운 계획을 짰다.

계속 이 바위 뒤에 숨으면 결국 걸리게 될 것이다. 그런 개죽음은 사양이다.

구멍에서 기어 나오던 괴물들이 어느 순간부터 없어졌다.

모두 마을로 들어갔는지 입구 쪽에는 한 마리도 없었다.

지금이 유일한 찬스라고 느낀 나는 주위를 한번 살펴보고 곧장 입구를 향해 뛰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신발을 벗은 뒤였다.

그리고 겨우 입구에 도착했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많던 풀들이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검은 재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대, 대체 누가??”


작게 중얼거렸다가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괴물들의 눈을 피해 이리로 도망 온 것인데 작은 소리조차 내면 안 되는데!

순간의 작은 실수에 목숨도 잃을 수 있는 것인데. 섣부른 태도를 자책했다.

재에 손을 얹어보니 따뜻했다. 태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 풀은 괴물들이 태운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럴 머리가 있다면 진작 여기를 쳐들어왔겠지.

혹시 린? 아니다. 마을을 위해 매번 고생한 린이다. 그런 끔찍한 짓을 할 리가 없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린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조금씩 생겨났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마을 입구에 있던 바위가 빛을 차단하고 칠흑의 심해 속으로 점차 스며들어갔다.

익숙한 감각이지만 머리가 복잡해서 평소 같지 않았다.

자주 걷던 길인데도 불구하고 금방 숨이 차올랐다.

어둠 속에 있으면 있을수록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해졌다.

이제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없어졌다.

린이 없어진 시점부터 내 안에 있던 평온함과 여유가 사라졌다.

새롭게 마음에 찾아온 것은 두려움과 긴박감뿐이었다.

더 이상 여길 헤쳐 나갈 희망이 없었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당장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린과 마을 사람들을 만나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될 수 있다면 린을 아내로 맞이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 있어 바깥세상보다 이곳의 환경과 린이 좋았다.

그래서 린과 친해지고 싶었고,

겨우 린과 친해질 수 있었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신은 나의 행복을 앗아갔다.

지금까지 행복 없이 살아왔던 나에게 작은 행복이 생기니까 마음에 안 들었던 건가?

신이란 놈은 이만큼 치졸한 녀석인가?

고작 인간 하나의 행복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냐고!


“빌어먹을!!”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만 같았다.

괴물이 오든지 말든지 상관없을 정도로. 그저 이 상황이 미칠 듯이 짜증나고 힘겨웠다.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줬으면 좋겠다. 정말…….


"웃기고 있네.“


지금 상황에 누구에서 위로를 받고 싶은 거냐? 대장으로 줄넘기하고 있는 괴물한테?

어린애 같은 소리하지마라. 김희수! 정신 차리자.

바꿔 말하자면 지금 이 상황이 탈출할 수 있는 가장 절묘한 타이밍이잖아!


“그래, 할 수 있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탈출.

린의 말대로라면 오늘 괴물들이 숫자가 줄어든다고 했다.


어? 잠깐만……. 괴물들이 마을을 습격하는 바람에 많은 숫자가 마을로 쳐들어갔다.

그렇게 됨으로써 린의 말이 실현되었다. 혹시 린은 괴물들이 쳐들어올 거란 걸 알고 있었을까?

너무 앞서가지 말자. 일단은 이 틈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자.

지금은 오직 그것만 생각하자. 나는 며칠동안 다녔던 길들을 생각하며 지도를 그려갔다.

어두컴컴한 곳이다 보니 믿을 것은 자신 머릿속에 있는 지도뿐이었다.

그리고 린이 말해준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린이 위험하다고 가지 않았던 곳. 괴물들의 소굴. 그곳이 바로 계단이 위치일 것이다.

틀림없다.

평소 같으면 괴물들이 순찰하고 있을 곳에 아무 것도 없었다.


덕분에 무리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처음 밟아보는 길로 들어서자 진한 비린내가 코로 흘러들어왔다.

이곳에 몇 십 마리의 괴물들이 지냈다고 생각하자 털이 곤두섰다.

금방이라도 내 뒤통수를 꿰뚫고 하얀 창이 오른쪽 눈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후각까지 비린내로 차단된 상태여서 오직 믿을 것은 청각과 촉감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손을 뻗어서 만져보니 딱딱하면서도 익숙한 느낌. 그리고 손에 딱 잡히는 것까지.

뼈칼이었다. 이곳이 괴물들의 소굴임이 확실해졌다.

아니라면 이 칼이 이런 곳에 뒹굴고 다닐 리가 없으니까.

손에 무기가 생기자 마음에 작은 안도감이 생겨났다.

실톱도 있기는 하지만 무기로 본다면 쓸모가 없다.

끝부분은 둥그스름해서 베는 용도로 밖에 사용할 수 없는데다가 자르는 용도로 쓴다면

날이 작아서 무기로는 도저히 쓸 수 없다.

뼈칼을 바르게 잡아 쥐고 계속 나아갔다.

거의 500m 쯤은 걸은 것 같은데 아무리 걸어도 계단은커녕 내리막길조차 없었다.

린에게 어디쯤에 있는 지 미리 물어볼 걸 그랬나.

끝이 없는 어둠 탓에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때였다. 밝은 빛이 미세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저 멀리 보였다.

푸른빛이 아닌 밝은 햇볕 같은 그런 것이! 발걸음은 순식간에 빨라지고 숨이 차올랐다.

기대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마치 보물을 앞에 두고 있는 모험가처럼 심장이 벅차올랐다.


어둠 속에 오랫동안 걸었던 탓일까 밝은 빛을 보자 눈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매번 정찰을 끝나고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욱신거리는 통증. 눈알이 내 것이 아닌 듯한

괴기감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 공격이라도 당한다면 반항도 못해보고 당할 지경이었다.

그 때 예상했던 괴물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희수?”

“!?”


예상치도 못했던 목소리가 들리자 최대한 빨리 눈을 뜨려고 애를 썼다.

엄청 인상을 찌푸려서 보기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그녀’를 봐야만 했다.

하지만 눈을 뜨기도 전에 따뜻한 무언가가 몸을 감싸 안았다.


“린, 살아있었구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 공간에 울려 퍼졌다.


“너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목이 메여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남자가 꼴사납게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려주기 싫어서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어깨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 떨림을 없애주기 위해 양손으로 어깨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쿵쿵거리는 기분 좋은 리듬에 행복해졌다.

그녀와 나는 남북 상복한 이산가족처럼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던 몸을 떨어뜨렸다.

아쉬움이 미칠 듯이 몰려왔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직 눈을 뜰 수는 없었다.


“목소리를 보니 멀쩡한 것 같네?”


마음과는 다르게 실없는 말을 내뱉었다.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그 때 네가 뛰었을 때 같이 뛰다가 잡혔어.”


그녀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하는 나를 위해 조용히 책을 읽듯이 설명해주었다.

나보다 늦게 뛴 탓에 괴물들에게 잡혔다고 했다.

너무 놀라서 도와달라는 소리칠 수 없었단다.

그렇게 내가 사라지고 괴물들에게 잡힌 그녀는 이제 죽는구나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어.”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 손을 살짝 쥐었다.


“그들은 말을 할 수 있었어.”

“뭐?”

“그 괴물들은 우리와 같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니.

그럼 처음부터 누군가를 죽이고 쫓기고 그럴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그들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우리가 괴물로 보였을 테지. 그래서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화할 생각도 못했었대. 하지만 여기는 탑이야. 식량이 부족한 탑. 같은 종족도 잡아먹는

곳이지. 그래서 당연히 자신들과 종족이 다른 우리들을 잡아먹기로 했던 거래.”


잡혀가던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그들이 언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대화를 시도했고, 어느 정도 대화가 오갔지만 그들은 그녀를 놓치기

아쉬웠었다.

그저 말을 하는 고기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그대로 죽을 수 없어 그들과 약속을 하기로 했다.

머리가 나쁜 녀석들이라서 달콤한 말을 조금 속삭였더니 단숨에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 달콤한 말이란.


“그래, 네가 봤던 그거야”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뜻을 한번에 알아차렸다.

마을에 침입한 괴물들. 분명 그녀가 목숨을 담보로 한 짓임을 알 수 있었다.


“난 그대로 곧바로 탈출구로 향했지. 괴물들에게 있어 작은 고기보다 많은 고기가

매력적이니까. 사람이 많다고 많이 끌고 가야한다고 했더니 자기 굴에 있던 모든 괴물들을

다 끌고 가더라? 어찌나 무서웠던지.”

“죄책감 느끼지 않아?”

“솔직히 그들을 동료로 생각하지도 않았어. 인육중독. 그들은 인간고기에 반쯤 미쳐있었어.

이제 벌을 받아야 하잖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에게는 인간으로써의 상식이 전혀 없었다.


“너를 처음 발견했을 때 구해야겠다는 의미도 컸지만 먹히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뜻이 더

컸어. 괴물에게 잡히던 마을 사람에게 잡히던 먹힐 테니까”

“설마……. 마을 사람들이 나를 처음 봤을 때 그 눈빛이?”


마을에 처음 갔을 때 주인과 노예에 대해 강조한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래, 주인과 노예라는 뜻은 다른 말로 말하자면 주인이 노예를 ‘먹어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어.”

“그, 그런…….”

“만약 네가 레이나의 노예가 되었으면 그 날 파티가 벌여졌을지도 몰라.”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끔찍한 상상에 속이 메스꺼웠다.


“자, 잠깐……. 그럼 처음부터 나와 탈출하기 위해 길을 가르친 거야?”

“응, 눈치 챘구나.”


그녀의 놀라운 계획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사실 너를 두고 여기에 먼저 도착한 것이 마음에 걸렸어. 하지만 넌 보기 좋게 거기에서

벗어났었지. 정말 다행이야. 내가 너에게 가르쳐준 보람이 있다?”


점차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고, 겨우 눈을 뜨게 된 나에게 처음 보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이었다.

얼마나 넓은지도 얼마나 좁은지도 짐작조차 되지 않는 기이한 공간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야??”


린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물었고, 린의 눈동자는 주위를 빙글 둘러보고는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 눈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 했다.


“여기가 이 탑의 끝이야. 맨 꼭대기 층이라고”

“뭐?”


지금까지 그저 앞으로 걸어오기만 했을 뿐 올라온 기억은 없다.

그녀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필 이유도 없고,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하지만 맨 꼭대기 층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것이 틀림없어.”


그녀의 말대로 이런 기이한 공간에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다.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뭔가 공간의 변화가 느껴졌다.

마치 물 속을 떠다니듯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래, 마치 꿈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어?”


점차 익숙해진다고 느껴졌을 때 그것이 보였다.

콘크리트 정글이. 익숙한 매연냄새와 귀를 아프게 하는 소음까지. 낯익은 감각.

탈출구다! 지금 당장 뛰어가면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희망과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그것을 잠시 뒤로하고 기쁜 마음으로 린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와 상반되게 린의 표정은 귀신이라도 본 듯 사색으로 변해있었다.

입술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야?”

“내, 내가 살던 곳이…….”


그 때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신문기사가 기억났다.

일본에 있었던 대지진. 그것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사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는 듯 했다.


“호, 혹시 다른 곳일 수도 있잖아?”


그녀를 달래줘야 할 입장에서 오히려 말을 더듬고 있는 자신이 너무 병신 같았다.

이제 곧 탈출한다는 마음이 싹 가라앉는 듯 했다.

그 때 그녀의 뽀얀 피부 위로 무언가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가 자주 가던 꽃집 간판이 보인단 말이야…….”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확신에 차보였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도 여자다.

마음이 여린 그저 평범한 여자.

이런 장소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평생 이런 생활을 하지 않을 그런 여자였다.

내가 어깨를 안은 탓일까 그녀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처절한 울음소리.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너무나도 아픈 울음소리.

지금껏 돌아갈 생각만을 하며 고생했던 그녀에게 너무나도 잔혹한 대우였다.

신은 강아지다.

그런데 왜 그녀와 나는 다른 환경이 보이는 걸까?

내 눈에는 지진이 일어난 일본이 보이지 않는다.


“나와 가자.”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절망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동자에 가슴이 아려왔다.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그녀를 생각했던 것일까.

같은 지붕에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첫 눈에 반해서? 내 심경 변화를 내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녀를 꼭 지켜줘야겠다.

저 아름다운 얼굴에 근심 하나 만들기 싫었다.


“그, 그래도 살아있을 수도 있어……. 애들이.”


그 한마디에 수십 가지의 이야기들이 머리를 지나갔다.

애들이라고 한다면 그녀가 낳은 자식일까? 만약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괜찮다.

그녀의 모든 것을 수용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와 애들을 전부 키울 수 있을까? 애들이 나이가 좀 있다고 한다면 날 싫어할 텐데.

혹시 남편도 살아있나? 아니면 미혼모인가?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동생들이…….”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작게 안도했다.


“그렇구나. 동생이구나.”

“살아있을 지도 모르니까 일단 일본으로 가볼래.”

“…….”

“미안해, 희수야.”

“아니야, 미안은 무슨……. 당연히 자신의 가족들에게 가는 것이 맞지. 그럼 나도 가도 될까?”


내 주둥이에서는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로 그녀를 따라 일본으로 갈 생각으로 했던 말인지 아니면 그녀와 떨어지기 싫어서

나온 헛소리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지진으로 저렇게 되었다면 그녀에게는 제대로 된 것이 하나 없는 셈이다.

그럼 누가 그녀를 지켜주겠나? 나 밖에 없다.


“저기로 가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

“알아. 하지만 너랑 가고 싶은걸? 이렇게 보여도 적금으로 모아둔 돈 조금 있다고 일본에 몇

개월 있을 돈 정도는 있다고,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떠날 만큼 정 없는 놈도 아니라고 난.”


말을 하고 나니 너무 쑥스러워서 눈을 딴 데로 돌려버렸다.

어쩌자고 그런 소릴 했던 것일까.

그녀가 들으면 무슨 몇 억 정도 있는 졸부로 들었을 수도 있잖아.

너무 과장 되서 말했어. 만약 내가 지닌 금액을 정확히 알게 되면 그녀가 가만히 있을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렇게 혼자 배시시 웃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 사실 나 너를 이용했었어.”


가만히 있던 그녀가 갑자기 불현듯 그런 말을 했다.

순간 배신했던 감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서 정신이 멍해졌다.


“이, 이용이라니?”

“저 곳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무리였어. 그래서 네가 친해지고 싶다고 했을 때

그랬다고 한 거야.”


확실히 그녀 혼자서 탈출할 수 있을 리가 없기는 했다.

만약 괴물들이 말을 할 수 없었다면 절대로 혼자서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네가 날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고 정말 좋아하게 됐단 말이야.


확실히 조용하고 얌전하던 여자가 갑자기 친해지고 싶다는 소리에 한 번에 넘어온 것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괜찮다.


“괜찮아. 조금 배신감 느끼기는 했지만 결국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잖아. 말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


그 순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입술에 닿는 게 느껴졌다.

기분 좋은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고, 청각에는 심장소리가 마구 고동쳤고,

온 감각이 모두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몇 발자국 물러났다.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바보…… 그런 건 말 안 해도 된다고.”

“…….”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인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녀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으면 남자 노릇도 못하게 되는 셈이다.

용기를 내서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도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장 방금 내가 보았던 콘크리트 정글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 순간 그 배경은 일본의 지진이 일어난 처참한 장면으로 바뀌었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금 어디를 가든 그녀와 함께라면 갈 수 있다.


원룸에서 살면서 매일 상사나 짝사랑하는 한심한 한국남자가 여기서 나간다.

언제나 찌질하게 하루하루 살아가기 급급했고,

작은 결단조차 타인에게 맡겼던 한삼한 놈이 지옥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얻어낸 새로운 결실과 함께.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지켜야할 사람이 생긴다면 사람은 강해진다고, 정말 강해진 것만 같았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런 스트레스뿐인 직장도 즐거울 것만 같았다.

당당한 발걸음으로 이 탑의 출구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그렇게 나와 그녀는 이 지긋지긋한 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뭐 같습니까?”


구릿빛 피부를 지닌 중년 사내가 작은 기기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는 건너편에 앉아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던졌다.

건너편의 사내는 깡마른 외모에 어울리는 안경을 쓰고 있었고,

의사라기에는 어색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들이 ‘그들’입니까?”

“네, 지금까지 들으신 내용이 이번 사건의 전말입니다.”


둘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분위기만큼은 진중했다.

의사는 자신의 안경테를 슬쩍 밀어 올렸다.

그는 여기 오기 전에 받아둔 서류를 꺼내더니 형사 앞에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미리 생각해두었던 내용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사람에게 있어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닙니다. 정신병은 그만큼

다양하니까요.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특별합니다.”

“특별하다고요?”

“네.”


자신의 말을 끊어서 그런 것인지 의사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형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신은 고용된 입장이기에 못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부분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살아요. 하지만 이들은

완전히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제가 워낙 무식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의사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담았지만 안경 너머까지 그것이 비춰지지 않았다.

나름 쉽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저 멍청한 형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뇌가 있어야할 부분에 똥이라도 차 있는 것일까.


“여기서 더 쉽게 설명하시라 하시면 힘듭니다.”

“뭐, 대충 알아듣겠으니 계속하세요.”


형사도 의사가 자신을 곱지 않게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억양이 다소 무례하게 바뀌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낸 것일까. 의사는 잠깐 당황했다.


“흐, 흠! 아무튼, 그들에게 있어 혼자만의 세계는 있을 수는 있어도 여러 명, 즉 단체로

정신세계를 구상해낼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당신은 혼자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확실히 제가 야한 생각한다고 다른 놈들도 똑같은 생각을 할 리가 없다는 소리군요?”


의사는 포기했는지 그냥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확실히 이상하죠?”

“음, 이상하긴 하네요.”


형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야 의사의 말뜻을 이해한 모양이다.


“이번에 폐쇄병동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마 역사에 길이 남을 일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방금 설명 제대로 못 들으셨습니까? 생각을 공유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사적으로 한 번도 그런 사례가 없었습니까?”


형사도 의사의 태도에 익숙해졌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비슷한 사례는 있었지만 그건 단순히 쌍둥이였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건 완전

다른 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30년 동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생각이

같다 못해 완전히 똑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의사는 형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녹음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기기에는 폐쇄병동에서 탈옥한 또 다른 여성의 증언이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많이 치유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탑에서 살고 있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여성이다. 갑자기 그녀가 떠오르자, 머리에 지네라도 기어 다니는 듯 지끈거렸다.

40년 동안 정신과에서 몸담고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진 그였지만 이렇게 놀랍고 기이한

증상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탑’이란 곳에서 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럼, 다음 증거물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의사는 자신의 얼굴만 한 기기를 꺼내들었다. 요즘 인기 있는 아이패드다.

형사는 ‘요즘 세상 참 좋아졌구나.’ 라고 중얼거렸지만 의사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 아이패드에서 나오는 영상이 더욱 관심이 갔기 때문에.

맨 처음 영상이 시작된 것은 한 30대 남자가 개인 병동에서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 사내는 전날 다른 환자들을 폭행한 죄로 개인병동에 갇히게 되었다.

대부분 병원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그 환자들에게 심어둔 특수한 마취침으로 잠들게 한다.

마취침은 2013년에 개발된 제품으로 범죄자 혹은 다룰 수 없는 사람들을 관리 하에 놓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다.

처음에는 인격모독이니 자유침해니 말이 많았지만 재범죄율이 87%나 감소한 것 때문에

이제 반대파도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일반인에게 사용되는 것은 불법이다.

만약 개인의 이득을 위해 사용할 경우 1억에 가까운 벌금에 2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하니

상당한 중죄에 속하는 편이다.

이 침의 사용용도는 대개 범죄자의 위치가 파악이 안 되거나 사건이 생겼을 때 범인을

마취시켜 해결할 때 쓰인다.

정신병동 같이 물리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사람들에게도 자주 사용된다고 한다.

아무튼 그 30대 사내가 개인병동에 갇혀서 하는 말을 들어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정신 차려 김희수……. 호랑이굴에 갇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어.’

‘으아아아아아아악!! 신발!! 진짜 이런 강아지가!! 으아아아악!!’

‘젠장……. 내가 처음 걷기 시작하는 애새끼도 아니고……. 여긴 어디야?’


놀라운 말들뿐이었다.

그가 이 곳 폐쇄병동에 갇힌 지 거의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즉, 그는 이 곳에서 모르는 곳이 거의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깨어나자 말자 여기가 어디냐고

혼자 중얼거렸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해도 그는 그나마 정상인과 비슷한 모범환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바뀐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의사는 거기에 대한 생각을 잠시 미뤄두고 계속 영상을 주시했다.


그는 마취침의 부작용 때문인지 잘 움직이지 못했고,

거기에 대해서 아는 것도 거의 없어보였다.

예전의 그였다면 마취가 다 사라지기 전에 움직이거나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이중인격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지만 말투라든지 행동에 변화가 없으니

기억왜곡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그 때 그는 창 밖을 쳐다보더니 놀란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환자들이 말했던 ‘비와 바다’를 본 모양이다. 환자들은 모두 밖에는 비가 내렸다고 했었다.

그것도 끊임없는 비가.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지만 일단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몇 분 정도 지난 뒤에 그는 갑자기 여기저기 조사하기 시작했다.

개인병동을 자주 들락날락거리던 인간으로 보기에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중간에 노트를 발견하고 격분하는 것까지 정상인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노트는 ‘자기 자신’이 매일 적던 일기였으니까 말이다.

여기까지 오니 기억왜곡에 대한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까지 그런 기억왜곡이 일어날 순 없다.

아마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의학자가 온다고 하더라도 이 의사와 마찬가지로 골머리를

썩을 것이다.


그 때 갑자기 그가 잠이 들었다.

의사는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환자의 행동에 놀란 인턴이 마취침을 사용했으리라고.

마취침은 하루에 한 번 이상 사용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완전 미친 인턴이다.

저런 놈 때문에 정신의학자가 욕을 먹는 거다. 의사는 중얼거리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 때 갑자기 형사가 빨리 감기 버튼을 눌렀다.


“저렇게 몇 시간동안 잠만 자니까 아마 지루하실 겁니다. 깨는 시점부터 보여드릴게요.”


의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재생이 된 시점은 6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그는 일어나자말자 주위를 둘러보더니 창에 있는 철창을 보고 놀란 듯 보였다.

자기 전에도 있었던 철창을 왜 이제야 발견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이상자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그것도 잠시 그는 창가로 가서 손을 모우더니 마치 물을 마시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정말 그들에게는 보이는 것일까? ‘비’라는 것이.

새로운 행동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자신이 던져놓은 노트를 읽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는 집중해서 노트를 읽어 내렸다.

그리고 어디에 숨겨뒀었는지 작은 박카스 병과 실톱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박카스를 철창에 골고루 뿌렸다.

박카스 병에 있던 것이 그냥 물인지 철창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는 그 다음에 실톱으로 미친 듯이 톱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2시간 동안 잘라대더니 이내 철창을 모두 해체해냈다.


“아니, 정신병동에 실톱이라니? 저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저한테 그러셔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거기 의사도 아니고…….”


의사는 저 폐쇄병동의 인턴들을 한번 찾아가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내는 침대 위에 있던 하얀 이불로 밧줄을 만들더니 창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바깥의 감시카메라로 화면이 바뀌었다.

그는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겨우 아래층에 도달했다.

고작 2m 가량의 높이였지만 말이다.

사내가 들어간 층에는 외국인 정신이상자가 갇혀있던 개인병동이었다.

그 역시 사내와 마찬가지 증상을 보여서 갇혀있던 사람이었다.


“의사 선생, 여기서 대화를 주목해주시오.”

“알겠소.”


의사는 집중해서 귀를 기우렸고, 곧 그들의 대화가 무엇을 뜻하는 지 알아차렸을 때에는

경악 그 자체였다.

다른 나라에서 살았던 그들이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새로운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새로운 언어를 가르쳐준 사람이 있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들에게 새로운 언어에

대해서 가르쳐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저런 언어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마치 짐승의 언어처럼 불쾌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들은 서로 말이 통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흑인이 자신의 음식을 나눠주었을 때 사내는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 다음 흑인의 행동 때문에 의사는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그 흑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폐쇄병동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대체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요?”

“의사 선생, 나한테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차피 저 병동의 인턴들은 거의 잘렸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의사는 인턴을 보겠다는 다짐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계속해서 영상을 주시했다.

병동으로 돌아온 흑인은 이제 갓 깨어난 사내와 이상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들은 기이한 행동을 취했다.

두 사람 밖에 없는 병동에서 마치 제 3자가 있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흑인은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나무막대를 휘둘렀고,

사내는 공포에 질려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그 둘은 느닷없이 싸우기 시작했다.

흑인은 사내의 목을 조르는 등 정신적이 아닌 직접적인 공격을 취했다.

이것으로 그들은 단순히 정신세계에만 빠져있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사내는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실톱으로 그의 눈을 찔렀고, 그는 마구 비명을 질렀다.

그 때 사내가 갑자기 그의 위에 올라타더니 실톱으로 목을 그어버렸다.

의사는 생생히 녹화되어있는 그 장면에 치를 떨었다.


“대체 이 병동은 무슨 병동이기에 다들 이런 것입니까?”


의사는 사람이 죽는 현장을 직접 본 것처럼 충격에 빠져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병동이지요. 예전에 천재이중인격 살인마도 있었던 그 병동이지요.”


과거에 보았던 신문기사가 떠올랐고,

곧 그 병동의 이름과 이 병동의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은 그저 정신감정만 하면 됩니다.”

“아, 알겠소.”


자부심으로 가득 찬 그의 당당하던 모습이 한 풀 꺾이고 얌전한 고양이처럼 변했다.

형사 말대로 정신감정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다시 보기 싫은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개인병동에서 탈출한 그는 중간에 복도를 걷다가 갑자기 구석에 몸을 숨겼다.

감시카메라를 보니 마침 간호사가 지나가던 길이었다.

복도를 걷던 간호사는 도넛을 쥐면서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내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는지 갑자기 난데없이 비명을 지르고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간호사는 그 환자가 입고 있는 환자복을 보고 그가 개인병동에 있어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쫓기 시작했다.

(개인병동 환자는 대체로 이름표가 녹색으로 되어있다. 단체병동 환자는 이름표가

빨간색이다)

그 때였다.

갑자기 코너에서 다른 여성 환자가 나오더니 소주병을 바닥에 집어던졌고,

그것에 놀란 간호사는 쫓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의 가슴팍에는 빨간색 이름표가 있었다.


“정말이지, 위험한 물건뿐이군요.”

“일단 계속 보시죠.”


의사는 형사의 말대로 계속 보기로 했다. 보면 볼수록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만 같았다.

저런 정신병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들이 무서워졌다.

단순한 환자들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마치 괴물 같았다.

새로운 감시카메라 화면으로 넘어갔다.

그 사내가 도착한 곳은 단체병동이었다.

그 곳에 도착하자말자 사내가 죽은 듯 쓰러졌고,

그 주변의 사람들도 놀란 듯 그를 편안하게 누울 곳으로 옮겼다.


“또 마취침을 사용한 것입니까?”

“뭐, 간호사가 놀래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형사가 뭐 ‘어때요’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의사는 짧게 혀를 찼다.


“일단, 여기서도 한참동안 아무 일도 없으니 빨리 감기를 하겠습니다.”


그 사내는 한 동안 그 단체병동에서 생활했다.

자신을 구해준 여성과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들에게 정상적인 행동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렇게 한참 영상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형사가 재생버튼을 눌렀다.


“여기서부터 또 사건이 일어납니다.”


영상을 보면 사내와 여성이 간호사와 인턴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이제야 발각된 모양이다. 참, 빠른 대체다.

의사는 자신이 병원장이었다면 저 따위로 병원이 돌아가게 두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어찌저찌 그 둘은 그들의 포위막을 뚫었고, 사내는 도주할 수 있었지만 여성은 잡혀 버렸다.

난동을 부릴 줄 알았던 여성은 오히려 순순히 그들에게 이끌려갔다.


‘개인병동을 탈출한 사람들을 더 알아요. 절 풀어주시면 그들이 있는 곳을 알려드리죠.’


저 말이 과연 정신이상자가 할 소리일까?

같은 병동 사람을 팔아먹은 것은 둘 째 치더라도 너무나도 논리적인 말투와 행동이었다.

당연히 인턴과 간호사는 단체병동에 있는 모범 환자를 잡을 이유는 없다.

그러니 그녀의 말을 듣기로 한 모양이다.

인턴들은 그녀의 말을 따라 개인병동을 탈출한 사람들을 일망타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감시카메라를 보니 사람들이 쳐들어올 때 미리 화장실로 피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사내는 화장실을 나와서 병동 로비로 도망쳤다.

그 때 감시카메라 화면이 다른 카메라로 전환되었다.

거기에는 여성과 남성이 손을 잡고 병동 밖을 나가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여성은 언제 챙겨둔 것인지 인턴 전용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밖으로 나아갔고, 곧 감시카메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


영상이 끝난 뒤 의사와 형사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이게 정말 병동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저도 처음 볼 때에는 놀랐습니다.”

“일단, 이 사실을 협회에 알려야겠습니다. 무서운 정신병입니다. 아니, 오히려 전염병에

가깝겠군요. 끊임없이 저 정신병이 늘어나고 있으니……. 아무튼 상당히 위험한 병입니다.

빨리 사실을 알려야합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의사는 형사의 마중인사를 듣지도 않은 채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취조실에 혼자 남은 형사는 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더니 툭툭 손으로 쳐서 한 개피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물고 싸구려 은색 리포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푸후~”


형사는 이 알 수 없는 상황을 담배 연기에 실어 날려 보냈다.

‘머리 좋은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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