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마피아는 어디일까? 바로 천주교다. 교회에 비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천주교도 크고 작은 문제로 시끄럽다. 문제가 있어도 내부에서 처리하는 관습 때문에 외부로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특히 천주교의 고위직 사제들은 보수적이고 정치적인 행보로 교계에 오명을 남겼다.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 수는 4백만명가량 된다. 신자 수에 비해 우리나라 천주교는 큰 영향력을 갖고 있고 존경을 받는다. 신자가 늘고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도 하다. 이는 이 땅의 민주화가 정착하는 데 횃불 역할을 한 천주교 사제들의 헌신과 희생이 바탕에 있었다. 사제와 평신자들에 의해 조직된 단체들은 1970년대 이후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천주교 지도부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① 리포트:정진석, 추기경이 된 진짜 이유?(《시사저널》제854호, 2006.02.24)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니꼴라오, 75)가 지난 2월 22일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4백만명가량 되는 천주교 신자 수에 비해 한국에서 천주교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런 힘에는 이 땅에 민주화가 정착하는 데 횃불 구실을 한 천주교 사제들의 헌신과 희생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서울교구의 한 신부는 “엄밀히 말해 정 교구장이 민주화에 공헌한 것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1931년 서울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1년 3월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1970년 당시 39세로 최연소 주교 서품을 받아 청주교구장에 올랐다. 1998년부터 그는 김수환 추기경의 후임으로 서울대교구장 대주교로 있다. 정 추기경은 교회 살림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서울 강남의 하이닉스 반도체 사옥을 사서 세를 주고, 강남 성모병원을 세로 짓고 있다. ‘미사예물공유제도’라는 서울대교구만 시행하는 독특한 제도도 그가 만들었다. 이 제도 덕에 부실했던 서울대교구가 윤택해졌다.
정 추기경은 교회법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관련 서적을 22권이나 낸 학구파다. 그의 일상은 산책·명상·교회법 연구·집필이 되풀이된다. 정 추기경은 텔레비전을 일절 보지 않는다. 대신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를 열독한다고 한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그가 추기경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첫 번째가 꽃동네 문제가 정 추기경은 청주교구장으로서 오웅진 신부가 사회복지단체 꽃동네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꽃동네는 비리로 얼룩졌고, 오웅진 신부는 유죄선고를 받았다. 오 신부는 천주교 신부가 아니었다면 구속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는 구설에 올랐다.
꽃동네 문제·노조와 갈등 등으로 구설도
1998년 청주교구 신성국 신부는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내 “서울대교구청 정진석 대주교가 오웅진과 함께 권력과 금력을 향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신 신부의 주장이다. “정 추기경이 청주교구장으로 있었을 때인 1998년 청주 성모병원 인수를 강행하면서 ‘사재를 다 털었다’며 10억원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가 서울대교구로 떠난 뒤 개인적으로 관리하던 통장에서 무려 20억원이 나왔고, 다른 통장에서도 상당액이 드러났다. 정 추기경은 1년 뒤인 1999년에도 ‘전재산이다’라며 5억원을 꽃동네대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정 추기경은 꽃동네와 관련된 자금 거래를 밝혀야 한다.” 이에 대해 서울대교구의 한 신부는 “돈에 관한 의혹은 전혀 문제될 것 없다”라고 일축했다.
두 번째는 노조와의 갈등이다.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의 한 관계자는 “병원 파업 때마다 성모병원이 가장 문제였고 카톨릭 지도부는 악랄한 모습을 보였다. 정 추기경은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병원 문을 닫고 아파트를 건설하겠다고 협박했다”라고 말했다. 2002년 강남 성모병원의 한용문 노조지부장은 명동성당 내에서 집회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자제했던 정 추기경이었지만 사학법개정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노조 활동은 1890년부터 교황청이 장려하는 권고 사항이다.
그가 추기경에 서임된 데에는 추기경 권좌를 둘러싸고 경쟁하던 대주교보다 상대적으로 흠이 적었던 것이 주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던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의 경우 골프장을 운영하며 잡음을 낸 것이 탈락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정 추기경이 평양교구장을 맡고 있다는 점도 추기경에 오를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로 거론된다.
그런데 정 추기경이 북한 사회를 보는 시각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남북문제의 권위자인 박창일 신부는 “정 추기경은 북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며 서울대교구 신부들에게 북한에 가서 미사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평양교구장이 북한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기회까지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천주교 일각에서는 정 추기경이 그동안 보였던 보수적인 행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다면 정 추기경 서임의 의미를 천주교가 변화를 바라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② 이것이 팩트다:정진석 추기경, MB의 천군만마가 되다.
1976년 충북 음성군 맹동면에 세워진 꽃동네는 국내 최대 사회복지시설이다. 꽃동네를 일군 오 신부는 199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며,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제의 표본이 되었다. 그런 오 신부가 2005년 충주지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판결문을 들여다보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신부가 소외된 자들의 천국을 키우다 저지른 실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 신부가 수녀와 수사들이 요양원에 근무하는 것처럼 허위로 서류를 작성해 국고보조금 5억여원을 받은 사실과 환경오염을 이유로 꽃동네 수용자들을 동원해 인근 광산 개발을 저지한 혐의(업무방해)가 인정된다.”
오 신부는 땅을 사랑했다. 음성 지역 땅 수백만 평을 오 신부, 수사, 수녀 그리고 오 신부 가족 명의로 사들였다. 1998년 꽃동네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오 신부의 땅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자 꽃동네 측은 국정감사를 이틀 앞둔 1998년 10월 28일, 재단법인 청주교구 천주교유지재단 명의로 오 신부 형제들의 일부 땅에 근저당권을 설정했다. 유지재단 측은 1999년 9월 권리를 포기해 근저당권을 말소했다. 땅은 형제 소유가 되었다. 부동산 투기 의혹이 일기도 햇다. ‘꽃동네 인터체인지’ 투기 의혹도 그 중 하나다. 꽃동네 측은 1998년~1999년에 꽃동네 수녀와 수사 18명 명의로 맹동면 봉현리 일대를 집중 매입했다. 후에 이곳은 꽃동네IC가 생겼다. 꽃동네 측은 “주변 땅을 꽃동네 환우들의 자활 작업장으로 쓰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오 신부의 동생 충진 씨는 꽃동네 공사대금을 허위로 청구해 1억 4천여만원을 받아낸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오 신부는 태화광업의 광산 개발을 방해한 혐의에 대해서 유죄선고를 받았다. 태화광업 측은 오 신부가 금광을 탈취할 목적으로 광산개발을 막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청주교구 신부는 “광산개발을 막겠다고 꽃동네 측이 개의 머리를 광산 입구에 걸어놓고, 장애인들을 동원해 시위를 벌였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오웅진 신부가 꽃동네를 세우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이 정진석 추기경이었다. 꽃동네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을 때도 오웅진 신부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정진석 추기경 어머니의 묘소가 충북 음성군 맹동면 꽃동네에 있다.
2010년 12월 8일 국회에서 날치기로 4대강 예산이 처리되던 날, 정진석 추기경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주교단이 4대강 사업이 자연을 파괴하고 난개발의 위험을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는 안 했다. 오히려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개발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로도 볼 수 있다” “4대강 사업에 대한 판단은 자연 과학자들이 다루는 문제요, 토목공사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다룰 문제이지, 종교인들의 영역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동안 천주교는 한목소리로 ‘4대강 반대’를 외쳐왔다. ‘생명과 평화’는 천주교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다. 보수적이고 사회문제에 나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천주교 주교(개별 교구를 관할하는 성직자)들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이것이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2010년 3월 천주교 주교단은 성명서를 내놓았다. “한국 천주교의 모든 주교들은 4대강 사업이 이 나라 전역의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으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후손이 잘되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명기 30절).” 2010년 5월 서울 명동성당 본당에서 시국 미사가 열린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래 23년만의 일이다. 6월에는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4대강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그런데 왜 추기경은 국민들이 반대하고, 천주교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을 찬성하고 나섰을까? 그 이유로 그의 수구적인 정치색과 함께 이권을 꼽는 사람이 많다. 서울교구의 한 신부는 “사적지 명동성당의 재개발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추기경이 4대강 사업 반대 의사를 접은 게 아닌지 의구심을 가진 신부가 많다”라고 말했다. 2010년 12월 3일 명동성당 주변에 12층과 9층 건물 두 채를 세우는 내용을 골자로 한 재개발 사업이 문화재청 심의를 통과했다. 그동안 여섯 번이나 부결된 사안이었다.
정진석 추기경을 보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 광주민중항쟁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독실한 신자였던 김대중 대통령 가족이 당시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를 찾아가 여러 차례 김대중의 봉성체(미사에 참석할 수 없는 신자에게 성체를 모셔가 영해주는 것)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훗날 함세웅 신부가 사형수가 청한 봉성체를 사제가 거절한 이유를 묻자, 정진석 추기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③ 이것이 팩트다:박근혜를 사랑하는 주교들
천주교 주교들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이다. 사회문제에 나선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명박 행정부 들어 4대강과 용산 참사 그리고 강정 제주 해군기지 문제에 주교 한두 명이 관심을 표했을 뿐이다. 참여정부 당시 대통령 탄핵 때도 천주교 주교들은 신중함을 보였다. 독재 때도, 유신 때도, 1980년 광주에서 사람이 죽어갈 때도 그랬다.
그러던 천주교 주교들이 가장 분연히 나선 때가 있다. 아마 역사에 기록될 만큼 강력하게. 2005년 열린우리당이 주도로 사립학교법 개정에 나섰을 때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사학법 개정을 막겠다고 장외투쟁에 나섰다.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부패한 사립학교에 대한 추억은 대부분 가슴에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박근혜 대표는 한나라당 내에서도 고립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 나서면서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교들은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법률 불복종 운동, 한 발 나아가 노무현 정권 퇴진 운동을 벌여 나가기로 했다. 학교 문을 닫겠다는 소리까지 했다. 김수환 추기경까지 나서 대통령에게 개정 사학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김진표 당시 교육부총리는 사학법 처리 이후 종교 지도자를 부리나케 쫓아다니고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김 부총리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반면 추기경은 박근혜 대표를 만나 격려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일방 독주에 대해서 추기경의 쓴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주교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왜 천주교 주교들이 개정 사학법을 반대하는가? 무엇이 신부들을 화나게 했을까?
주교들이 가장 문제 삼는 부분이 이사회 이사 중 4분의 1을 외부인사로 한다는 대목. 사유재산권 침해와 더불어 종교 교육이 타격을 입는 것이 주교에게는 걱정거리인 거다.
주교들이 사학법 개정을 거부하는 다름 이유는 천주교가 보수화되었다는 데 있다. 천주교는 이미 거대한 조직을 거느린 기득권 세력이 되어버렸다. 천주교는 학교를 소유한 사용자·고용주 입장에서 개정 사학법을 판단한다. 천주교의 보수성은 주교들이 그간 보여준 노조에 대한 거부감에서 잘 드러난다. 천주교 산하 사업장의 노사 충돌이 잦았는데 대부분 파국으로 치닫고 노조 무력화로 끝났다. 1988년 대구 파티마병원 분규와 관련하여 ‘대구대교구 사제평의회·사제단’ 명의로 “노조가 반카톨릭·반교회적 도전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2002년 대전성모병원은 노조 파괴 전문가를 고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2년 목포 카톨릭병원은 노사 문제가 불거지자 아예 문을 닫았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2002년 강남 성모병원 한용문 노조지부장은 명동성당 내에서 집회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라고 말했다. 인도인인 배야고보 신부는 “한국 천주교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보다 법과 격식 중심의 좁은 시각에 갇혀 있다. 존재론적이라기보다는 소유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라고 말했다.
사학법개정 반대의 목소리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과 정치적 밀월 관계였던 대구교구에서 주도적으로 냈다. 천주교 내 대구교구의 위세는 막강하다. 사학법 개정 반대 분위기를 주도했던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선대부터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이 대주교의 부친은 이효상 전 국회의장. 그는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구 집권하도록 길을 닦아준 삼선개헌 날치기 통과 때 의사봉을 두드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효상 전 의장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딩이가 문딩이를 안 찍으마 누가 찍노” “이번 선거는 전라도캉 갱상도캉 싸우능기 아이가” 등 지역갈등을 노골적으로 선동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구교구는 이효상 전 의장의 차남 이문희 신부를 1972년 10월 보좌주교로 임명했다. 1965년 사제가 된 후 불과 7년만에 주교가 된 이 대주교는 40년 넘게 주교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문희 대주교는 우리나라 주교 가운데 추기경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천주교 내 영향력도 막강하다. 대구교구는 카톨릭신문사·대구평화방송·카톨릭대학교·대구카톨릭대학병원 등을 거느리고 있다. 특이한 점은 교구에서 일반 신문인 매일신문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 1988년 11월 5일자 기사다. “대구에서는 역사가 오랜 영남일보가 역사가 짧은 매일신문에 흡수되었다. 영남일보 사장 이재필 씨는 ‘발표는 51대 49였지만 나는 단 한푼의 보상도 받지 않았다’고 폭로하고 ‘매일 측이 우리를 삼킨 것은 입법의원 전달출 신부의 로비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매일신문은 다음 날 10일자〈내년 신입생 모집 중지〉라는 기사를 1면에 싣고, 사학법인들이 헌법소원과 법률 불복종 운동에 나서기로 했다고 썼다. 며칠 후에는 “개정 사학법이 사학의 정체성을 소멸시킨다”는 이문희 대주교의 성명을 그대로 1면에 올렸다.
대구교구에서 팔공골프장을 소유하고 운영한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제5공화국 당시 골프장 허가는 최고 권력자의 특혜 없이는 원천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대구시 안에 그것도 팔공산도립공원 내에 팔공컨트리클럽이 들어선 것은 대단한 특혜다. 현재 골프장의 주식 백 퍼센트를 카톨릭 대구교구에서 소유하고 있다. 전달출 신부는 팔공골프장의 회장이었다. 전 신부는 1980년 카톨릭 사제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구성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들어가 국가보안법, 언론기본법, 노동법 등 각종 악법을 양산하는 데 일조했다. 당시 카톨릭 사제의 신분으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했던 사람은 전달출, 이종흥 신부. 모두 대구교구청 소속이었다. 매일신문과 팔공골프장을 보면 어느 것 하나 교회적인 것이 없다.
역사적으로 일부 천주교 주교 등 수뇌부들은 민주화 세력에게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친일에 앞장섰고, 독재와 유신에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안중근 의사는 19세에 영세를 받았고 황해도에서 선교 활동을 한 신앙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도 기도를 잊지 않은 신실한 신자로 기록된다. 이토 저격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살인범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사형에 앞서 마지막 성사를 원하는 안중근 의사의 요청을 거부했고, 심지어 빌렘 신부에게 안중근 의사를 위한 미사 집전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노기남 대주교가 이끈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 연맹은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 안준생과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 이토 사네카즈를 종현성당에서 만나게 해서 안준생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살인죄를 인정하고 사죄하도록 하기도 했다.
천주교 대구교구는 박정희 정권의 버팀목이기도 했다. 1971년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신자들이 군사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대구교구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시보는 사설을 통해 지 주교를 비난했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미사’를 통해 ‘3·1민주구국 선언문’이 발표됐다. 김대중·문익환·문동환 등과 함께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함세웅·신현봉·문정현 신부가 구속되고, 김승훈·장덕필·김택암·안충석 신부가 불구속되었다. 주교단은 침묵을 지켰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광주교구의 윤공희 대주교가 광주의 아픔을 호소했다. 하지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다른 주교들은 침묵했다.
추기경과 주교들의 입장과 달리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개정 사립학교법을 찬성하며 나섰다. 한 신부는 “학교는 신자와 모든 국민들에게 기증한 아름다운 공동체 법인이다. 이를 성당의 것, 성직자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 구원을 위한 소명을 가진 종교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정진석 추기경이 4대강 사업을 옹호하자, 원로 신부와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추기경을 즉각 비난하고 나섰다.
④ 꼼꼼한 뒷얘기:〈두사부일체〉를 찍다
함세웅 신부님과의 첫 만남은 영화〈두사부일체〉스토리 그 자체였다. 2002년 당시도 청소년 폭력 문제, 성범죄 문제가 뜨거웠다. ‘일진’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아이들이 돈을 모아 월급처럼 정기적으로 일진에게 상납을 하면 일진은 그 돈으로 오토바이를 사고, 문신을 파는 구조가 밝혀졌다. 비행 청소년으로 분류되었던 내가 보기에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직접 학교에 가서 애들을 만나야 했다.
수소문하다가 소개를 받아 함 신부님을 찾아갔다.
“제가 학교 다니면서 말썽을 부리긴 했는데 요새 애들은 이해가 안 가요. 제가 학교에 다니면서 보고 이해하고 싶어요. 학교에 좀 넣어주세요. 적어도 한 학기는 다니면서 보겠습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멀뚱이 쳐다보셨지만 허락해주셨다. 그때가 서른 살쯤이었는데, 함 신부님 소개로 세종고에 가게 되었다. 머리도 깎고, 교복도 맞췄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너무 황당해했다. 교사들도 불편해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한 사학의 이사장을 졸라 강남의 어느 여고에 국어 교생으로 들어가기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첫날 한 학생이 눈앞에서 거짓말을 해서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내 딴에는 위장 학생이 오면 선생님들도 좋아할 줄 알았다. 나이 많은 애를 제일 문제 반에 넣으면, 문제아들은 꼼짝 못할 테니 학교 분위기도 정리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선생님들께서 불편했는지 반대하셨다. 그때 학생으로 들어갔으면 실사판〈두사부일체〉를 확실하게 찍고 나올 수 있었다.
내 취재 기법은 단 한 가지다. ‘일단 가본다. 그리고 일단 해본다.’ 누구를 만나야 하면 택배나 선물 배달원은 기본이고, 빚을 내서라도 해외에 나가고, 내곡동 땅이 문제라면 외제차를 빌려서 직접 땅을 보러 다닌다. 심지어 소개팅 자리를 만들어 취재원과 만나기도 했다. 취재를 위해 가동하는 사조직도 있다. 규모는 오토바이 2대하고 봉고차 1대. 명령만 하면 바로 모인다. 김용철 변호사 숨길 때도 이 친구들이 보초 서고 따라다녔다. 돈을 언제 줄지 모르고 안 줄 수도 있지만 나를 믿고 따라주는 동생들로, 인간적으로 엮여 있다. 문제는 그 동생들이 다 자기가 기자인 줄 안다는 거다.
⑤ 꼼꼼한 뒷얘기:신부님 신부님 함세웅 신부님
‘루카’, 내 세례명이다.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천주교 신자도 아니다. 하지만 주일에 미사를 올리고 심지어 성당 근처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이게 다 함세웅 신부님 때문이다. 함 신부님에게는 늘 사람이 찾아온다. 다 약자들이다. 경찰이나 검찰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사람이 오면 “네가 와서 좀 들어봐라” 하며 나를 부르신다. 어느 날, 또 누구 얘길 들어보라며 나를 부르셨는데 찾아온 사람이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을 되풀이하는 거였다. 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건 사실관계가 다른 것 같고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면서 말을 몇 번 잘랐다. 김용철 변호사 사건이 한창 진행될 때라 피곤한 신부님이 괜한 데 신경을 쓰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신부님이 나를 몇 번이나 제지하시더니 끝나고 나서 한 마디 하셨다. “저 사람은, 저 얘기가 하고 싶어서 온 건데, 내가 들어줘야지. 내가 사제인데. 내가 이거 들어주라고 있는 거야.” 아, 그때 내가 크게 배웠다. 내 월급은 기사 써서 받는 돈 20퍼센트, 사회에 보탬 되는 일 하고 받는 돈 30퍼센트, 나머지 50퍼센트는 약자 얘기 들어주는 것으로 받는 돈이라고 생각한 게 그때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해결사로 소문이 났다. 정말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기를 당한 판사나 조폭, 치정 관계에 휩싸인 재벌이나 마나님, 사채업자에 쫓기는 사람, 뭔가 끈이 필요한 사람 등등 헤아릴 수 없다. 오죽 답답했으면 나한테까지 찾아왔나 싶어서 웬만큼 나쁜 사람 아니면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끝까지 들어준다. 물론 90퍼센트 이상은 영양가 없는 얘기다.
정말 억울한 사람들도 많다. 할머니 한 분이 찾아오셨다. 무허가 주택에서 살았는데 신고하랄 때 안 해서 집을 뺏기자 소송을 걸었다. 대법까지 가서 결국 졌다. 따져보니 법적으로 할머니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냥 가시라고 할 수 없었다. 할머니 앞에서 바로 구청에 전화해서 소리를 높였다. “아니, 할머니한테 설명을 해야지. 서류를 보내면 알아? 당신이 집 뺏긴 사람 마음을 알아?” 그러면 저쪽에서 대거리를 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욕을 몇 마디 하고 끊는다. 대신 욕하는 거라도 듣고 응어리를 푸시라고. 할머니한테는 “아, 이 새끼 진짜 나쁜 새끼네. 법이라는 게 여러 사람 죽여요” 이러고 보내드린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다시 구청에 전화해서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이해하세요. 할머니가……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하고 사과한다.
간혹 그들의 하소연이 기사를 통해 나가더라도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사실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냥 같이 욕하고, 전화 한 통 해주는 게 그들을 위한 내 역할이다.
강정마을에 갔을 때 함 신부님께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우리는 만날 지는 싸움만 하느냐고. 왜 만날 져야 하느냐고. 신부님이 그러셨다. “주변 사람들, 동지들이 당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부끄러우면 안 되잖아.” 신부님은 신념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다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우리만 편하자고 그쪽으로 가면 안 되잖아.” “신부님, 그래도 너무 자주 져요.” 신부님한테는 괜히 응석이 부리고 싶다.
▶ 주진우《시사IN》기자 겸 인터넷 팟캐스트 라디오 시사토크《나는 꼼수다》고정 패널 저술『정통시사활극 주기자』「이것이 팩트다」〈제3장 종교,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마피아〉푸른숲 편찬(2012년 출판)
무엇이 높은 신부님들을 화나게 만들었을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마피아는 어디일까? 바로 천주교다. 교회에 비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천주교도 크고 작은 문제로 시끄럽다. 문제가 있어도 내부에서 처리하는 관습 때문에 외부로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특히 천주교의 고위직 사제들은 보수적이고 정치적인 행보로 교계에 오명을 남겼다.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 수는 4백만명가량 된다. 신자 수에 비해 우리나라 천주교는 큰 영향력을 갖고 있고 존경을 받는다. 신자가 늘고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도 하다. 이는 이 땅의 민주화가 정착하는 데 횃불 역할을 한 천주교 사제들의 헌신과 희생이 바탕에 있었다. 사제와 평신자들에 의해 조직된 단체들은 1970년대 이후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천주교 지도부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① 리포트:정진석, 추기경이 된 진짜 이유?(《시사저널》제854호, 2006.02.24)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니꼴라오, 75)가 지난 2월 22일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4백만명가량 되는 천주교 신자 수에 비해 한국에서 천주교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런 힘에는 이 땅에 민주화가 정착하는 데 횃불 구실을 한 천주교 사제들의 헌신과 희생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서울교구의 한 신부는 “엄밀히 말해 정 교구장이 민주화에 공헌한 것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1931년 서울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1년 3월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1970년 당시 39세로 최연소 주교 서품을 받아 청주교구장에 올랐다. 1998년부터 그는 김수환 추기경의 후임으로 서울대교구장 대주교로 있다. 정 추기경은 교회 살림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서울 강남의 하이닉스 반도체 사옥을 사서 세를 주고, 강남 성모병원을 세로 짓고 있다. ‘미사예물공유제도’라는 서울대교구만 시행하는 독특한 제도도 그가 만들었다. 이 제도 덕에 부실했던 서울대교구가 윤택해졌다.
정 추기경은 교회법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관련 서적을 22권이나 낸 학구파다. 그의 일상은 산책·명상·교회법 연구·집필이 되풀이된다. 정 추기경은 텔레비전을 일절 보지 않는다. 대신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를 열독한다고 한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그가 추기경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첫 번째가 꽃동네 문제가 정 추기경은 청주교구장으로서 오웅진 신부가 사회복지단체 꽃동네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꽃동네는 비리로 얼룩졌고, 오웅진 신부는 유죄선고를 받았다. 오 신부는 천주교 신부가 아니었다면 구속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는 구설에 올랐다.
꽃동네 문제·노조와 갈등 등으로 구설도
1998년 청주교구 신성국 신부는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내 “서울대교구청 정진석 대주교가 오웅진과 함께 권력과 금력을 향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신 신부의 주장이다. “정 추기경이 청주교구장으로 있었을 때인 1998년 청주 성모병원 인수를 강행하면서 ‘사재를 다 털었다’며 10억원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가 서울대교구로 떠난 뒤 개인적으로 관리하던 통장에서 무려 20억원이 나왔고, 다른 통장에서도 상당액이 드러났다. 정 추기경은 1년 뒤인 1999년에도 ‘전재산이다’라며 5억원을 꽃동네대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정 추기경은 꽃동네와 관련된 자금 거래를 밝혀야 한다.” 이에 대해 서울대교구의 한 신부는 “돈에 관한 의혹은 전혀 문제될 것 없다”라고 일축했다.
두 번째는 노조와의 갈등이다.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의 한 관계자는 “병원 파업 때마다 성모병원이 가장 문제였고 카톨릭 지도부는 악랄한 모습을 보였다. 정 추기경은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병원 문을 닫고 아파트를 건설하겠다고 협박했다”라고 말했다. 2002년 강남 성모병원의 한용문 노조지부장은 명동성당 내에서 집회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자제했던 정 추기경이었지만 사학법개정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노조 활동은 1890년부터 교황청이 장려하는 권고 사항이다.
그가 추기경에 서임된 데에는 추기경 권좌를 둘러싸고 경쟁하던 대주교보다 상대적으로 흠이 적었던 것이 주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던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의 경우 골프장을 운영하며 잡음을 낸 것이 탈락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정 추기경이 평양교구장을 맡고 있다는 점도 추기경에 오를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로 거론된다.
그런데 정 추기경이 북한 사회를 보는 시각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남북문제의 권위자인 박창일 신부는 “정 추기경은 북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며 서울대교구 신부들에게 북한에 가서 미사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평양교구장이 북한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기회까지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천주교 일각에서는 정 추기경이 그동안 보였던 보수적인 행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다면 정 추기경 서임의 의미를 천주교가 변화를 바라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② 이것이 팩트다:정진석 추기경, MB의 천군만마가 되다.
1976년 충북 음성군 맹동면에 세워진 꽃동네는 국내 최대 사회복지시설이다. 꽃동네를 일군 오 신부는 199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며,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제의 표본이 되었다. 그런 오 신부가 2005년 충주지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판결문을 들여다보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신부가 소외된 자들의 천국을 키우다 저지른 실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 신부가 수녀와 수사들이 요양원에 근무하는 것처럼 허위로 서류를 작성해 국고보조금 5억여원을 받은 사실과 환경오염을 이유로 꽃동네 수용자들을 동원해 인근 광산 개발을 저지한 혐의(업무방해)가 인정된다.”
오 신부는 땅을 사랑했다. 음성 지역 땅 수백만 평을 오 신부, 수사, 수녀 그리고 오 신부 가족 명의로 사들였다. 1998년 꽃동네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오 신부의 땅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자 꽃동네 측은 국정감사를 이틀 앞둔 1998년 10월 28일, 재단법인 청주교구 천주교유지재단 명의로 오 신부 형제들의 일부 땅에 근저당권을 설정했다. 유지재단 측은 1999년 9월 권리를 포기해 근저당권을 말소했다. 땅은 형제 소유가 되었다. 부동산 투기 의혹이 일기도 햇다. ‘꽃동네 인터체인지’ 투기 의혹도 그 중 하나다. 꽃동네 측은 1998년~1999년에 꽃동네 수녀와 수사 18명 명의로 맹동면 봉현리 일대를 집중 매입했다. 후에 이곳은 꽃동네IC가 생겼다. 꽃동네 측은 “주변 땅을 꽃동네 환우들의 자활 작업장으로 쓰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오 신부의 동생 충진 씨는 꽃동네 공사대금을 허위로 청구해 1억 4천여만원을 받아낸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오 신부는 태화광업의 광산 개발을 방해한 혐의에 대해서 유죄선고를 받았다. 태화광업 측은 오 신부가 금광을 탈취할 목적으로 광산개발을 막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청주교구 신부는 “광산개발을 막겠다고 꽃동네 측이 개의 머리를 광산 입구에 걸어놓고, 장애인들을 동원해 시위를 벌였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오웅진 신부가 꽃동네를 세우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이 정진석 추기경이었다. 꽃동네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을 때도 오웅진 신부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정진석 추기경 어머니의 묘소가 충북 음성군 맹동면 꽃동네에 있다.
2010년 12월 8일 국회에서 날치기로 4대강 예산이 처리되던 날, 정진석 추기경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주교단이 4대강 사업이 자연을 파괴하고 난개발의 위험을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는 안 했다. 오히려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개발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로도 볼 수 있다” “4대강 사업에 대한 판단은 자연 과학자들이 다루는 문제요, 토목공사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다룰 문제이지, 종교인들의 영역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동안 천주교는 한목소리로 ‘4대강 반대’를 외쳐왔다. ‘생명과 평화’는 천주교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다. 보수적이고 사회문제에 나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천주교 주교(개별 교구를 관할하는 성직자)들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이것이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2010년 3월 천주교 주교단은 성명서를 내놓았다. “한국 천주교의 모든 주교들은 4대강 사업이 이 나라 전역의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으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후손이 잘되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명기 30절).” 2010년 5월 서울 명동성당 본당에서 시국 미사가 열린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래 23년만의 일이다. 6월에는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4대강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그런데 왜 추기경은 국민들이 반대하고, 천주교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을 찬성하고 나섰을까? 그 이유로 그의 수구적인 정치색과 함께 이권을 꼽는 사람이 많다. 서울교구의 한 신부는 “사적지 명동성당의 재개발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추기경이 4대강 사업 반대 의사를 접은 게 아닌지 의구심을 가진 신부가 많다”라고 말했다. 2010년 12월 3일 명동성당 주변에 12층과 9층 건물 두 채를 세우는 내용을 골자로 한 재개발 사업이 문화재청 심의를 통과했다. 그동안 여섯 번이나 부결된 사안이었다.
정진석 추기경을 보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 광주민중항쟁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독실한 신자였던 김대중 대통령 가족이 당시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를 찾아가 여러 차례 김대중의 봉성체(미사에 참석할 수 없는 신자에게 성체를 모셔가 영해주는 것)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훗날 함세웅 신부가 사형수가 청한 봉성체를 사제가 거절한 이유를 묻자, 정진석 추기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③ 이것이 팩트다:박근혜를 사랑하는 주교들
천주교 주교들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보수적이다. 사회문제에 나선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명박 행정부 들어 4대강과 용산 참사 그리고 강정 제주 해군기지 문제에 주교 한두 명이 관심을 표했을 뿐이다. 참여정부 당시 대통령 탄핵 때도 천주교 주교들은 신중함을 보였다. 독재 때도, 유신 때도, 1980년 광주에서 사람이 죽어갈 때도 그랬다.
그러던 천주교 주교들이 가장 분연히 나선 때가 있다. 아마 역사에 기록될 만큼 강력하게. 2005년 열린우리당이 주도로 사립학교법 개정에 나섰을 때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사학법 개정을 막겠다고 장외투쟁에 나섰다.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부패한 사립학교에 대한 추억은 대부분 가슴에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박근혜 대표는 한나라당 내에서도 고립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 나서면서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교들은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법률 불복종 운동, 한 발 나아가 노무현 정권 퇴진 운동을 벌여 나가기로 했다. 학교 문을 닫겠다는 소리까지 했다. 김수환 추기경까지 나서 대통령에게 개정 사학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김진표 당시 교육부총리는 사학법 처리 이후 종교 지도자를 부리나케 쫓아다니고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김 부총리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반면 추기경은 박근혜 대표를 만나 격려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일방 독주에 대해서 추기경의 쓴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주교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왜 천주교 주교들이 개정 사학법을 반대하는가? 무엇이 신부들을 화나게 했을까?
주교들이 가장 문제 삼는 부분이 이사회 이사 중 4분의 1을 외부인사로 한다는 대목. 사유재산권 침해와 더불어 종교 교육이 타격을 입는 것이 주교에게는 걱정거리인 거다.
주교들이 사학법 개정을 거부하는 다름 이유는 천주교가 보수화되었다는 데 있다. 천주교는 이미 거대한 조직을 거느린 기득권 세력이 되어버렸다. 천주교는 학교를 소유한 사용자·고용주 입장에서 개정 사학법을 판단한다. 천주교의 보수성은 주교들이 그간 보여준 노조에 대한 거부감에서 잘 드러난다. 천주교 산하 사업장의 노사 충돌이 잦았는데 대부분 파국으로 치닫고 노조 무력화로 끝났다. 1988년 대구 파티마병원 분규와 관련하여 ‘대구대교구 사제평의회·사제단’ 명의로 “노조가 반카톨릭·반교회적 도전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2002년 대전성모병원은 노조 파괴 전문가를 고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2년 목포 카톨릭병원은 노사 문제가 불거지자 아예 문을 닫았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2002년 강남 성모병원 한용문 노조지부장은 명동성당 내에서 집회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라고 말했다. 인도인인 배야고보 신부는 “한국 천주교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보다 법과 격식 중심의 좁은 시각에 갇혀 있다. 존재론적이라기보다는 소유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라고 말했다.
사학법개정 반대의 목소리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과 정치적 밀월 관계였던 대구교구에서 주도적으로 냈다. 천주교 내 대구교구의 위세는 막강하다. 사학법 개정 반대 분위기를 주도했던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선대부터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이 대주교의 부친은 이효상 전 국회의장. 그는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구 집권하도록 길을 닦아준 삼선개헌 날치기 통과 때 의사봉을 두드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효상 전 의장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딩이가 문딩이를 안 찍으마 누가 찍노” “이번 선거는 전라도캉 갱상도캉 싸우능기 아이가” 등 지역갈등을 노골적으로 선동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구교구는 이효상 전 의장의 차남 이문희 신부를 1972년 10월 보좌주교로 임명했다. 1965년 사제가 된 후 불과 7년만에 주교가 된 이 대주교는 40년 넘게 주교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문희 대주교는 우리나라 주교 가운데 추기경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천주교 내 영향력도 막강하다. 대구교구는 카톨릭신문사·대구평화방송·카톨릭대학교·대구카톨릭대학병원 등을 거느리고 있다. 특이한 점은 교구에서 일반 신문인 매일신문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 1988년 11월 5일자 기사다. “대구에서는 역사가 오랜 영남일보가 역사가 짧은 매일신문에 흡수되었다. 영남일보 사장 이재필 씨는 ‘발표는 51대 49였지만 나는 단 한푼의 보상도 받지 않았다’고 폭로하고 ‘매일 측이 우리를 삼킨 것은 입법의원 전달출 신부의 로비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매일신문은 다음 날 10일자〈내년 신입생 모집 중지〉라는 기사를 1면에 싣고, 사학법인들이 헌법소원과 법률 불복종 운동에 나서기로 했다고 썼다. 며칠 후에는 “개정 사학법이 사학의 정체성을 소멸시킨다”는 이문희 대주교의 성명을 그대로 1면에 올렸다.
대구교구에서 팔공골프장을 소유하고 운영한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제5공화국 당시 골프장 허가는 최고 권력자의 특혜 없이는 원천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대구시 안에 그것도 팔공산도립공원 내에 팔공컨트리클럽이 들어선 것은 대단한 특혜다. 현재 골프장의 주식 백 퍼센트를 카톨릭 대구교구에서 소유하고 있다. 전달출 신부는 팔공골프장의 회장이었다. 전 신부는 1980년 카톨릭 사제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구성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들어가 국가보안법, 언론기본법, 노동법 등 각종 악법을 양산하는 데 일조했다. 당시 카톨릭 사제의 신분으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했던 사람은 전달출, 이종흥 신부. 모두 대구교구청 소속이었다. 매일신문과 팔공골프장을 보면 어느 것 하나 교회적인 것이 없다.
역사적으로 일부 천주교 주교 등 수뇌부들은 민주화 세력에게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친일에 앞장섰고, 독재와 유신에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안중근 의사는 19세에 영세를 받았고 황해도에서 선교 활동을 한 신앙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전에도 기도를 잊지 않은 신실한 신자로 기록된다. 이토 저격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살인범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사형에 앞서 마지막 성사를 원하는 안중근 의사의 요청을 거부했고, 심지어 빌렘 신부에게 안중근 의사를 위한 미사 집전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노기남 대주교가 이끈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 연맹은 안중근 의사의 둘째 아들 안준생과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 이토 사네카즈를 종현성당에서 만나게 해서 안준생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살인죄를 인정하고 사죄하도록 하기도 했다.
천주교 대구교구는 박정희 정권의 버팀목이기도 했다. 1971년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신자들이 군사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대구교구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시보는 사설을 통해 지 주교를 비난했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미사’를 통해 ‘3·1민주구국 선언문’이 발표됐다. 김대중·문익환·문동환 등과 함께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함세웅·신현봉·문정현 신부가 구속되고, 김승훈·장덕필·김택암·안충석 신부가 불구속되었다. 주교단은 침묵을 지켰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광주교구의 윤공희 대주교가 광주의 아픔을 호소했다. 하지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다른 주교들은 침묵했다.
추기경과 주교들의 입장과 달리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개정 사립학교법을 찬성하며 나섰다. 한 신부는 “학교는 신자와 모든 국민들에게 기증한 아름다운 공동체 법인이다. 이를 성당의 것, 성직자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 구원을 위한 소명을 가진 종교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정진석 추기경이 4대강 사업을 옹호하자, 원로 신부와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추기경을 즉각 비난하고 나섰다.
④ 꼼꼼한 뒷얘기:〈두사부일체〉를 찍다
함세웅 신부님과의 첫 만남은 영화〈두사부일체〉스토리 그 자체였다. 2002년 당시도 청소년 폭력 문제, 성범죄 문제가 뜨거웠다. ‘일진’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아이들이 돈을 모아 월급처럼 정기적으로 일진에게 상납을 하면 일진은 그 돈으로 오토바이를 사고, 문신을 파는 구조가 밝혀졌다. 비행 청소년으로 분류되었던 내가 보기에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직접 학교에 가서 애들을 만나야 했다.
수소문하다가 소개를 받아 함 신부님을 찾아갔다.
“제가 학교 다니면서 말썽을 부리긴 했는데 요새 애들은 이해가 안 가요. 제가 학교에 다니면서 보고 이해하고 싶어요. 학교에 좀 넣어주세요. 적어도 한 학기는 다니면서 보겠습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멀뚱이 쳐다보셨지만 허락해주셨다. 그때가 서른 살쯤이었는데, 함 신부님 소개로 세종고에 가게 되었다. 머리도 깎고, 교복도 맞췄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너무 황당해했다. 교사들도 불편해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 한 사학의 이사장을 졸라 강남의 어느 여고에 국어 교생으로 들어가기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첫날 한 학생이 눈앞에서 거짓말을 해서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내 딴에는 위장 학생이 오면 선생님들도 좋아할 줄 알았다. 나이 많은 애를 제일 문제 반에 넣으면, 문제아들은 꼼짝 못할 테니 학교 분위기도 정리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선생님들께서 불편했는지 반대하셨다. 그때 학생으로 들어갔으면 실사판〈두사부일체〉를 확실하게 찍고 나올 수 있었다.
내 취재 기법은 단 한 가지다. ‘일단 가본다. 그리고 일단 해본다.’ 누구를 만나야 하면 택배나 선물 배달원은 기본이고, 빚을 내서라도 해외에 나가고, 내곡동 땅이 문제라면 외제차를 빌려서 직접 땅을 보러 다닌다. 심지어 소개팅 자리를 만들어 취재원과 만나기도 했다. 취재를 위해 가동하는 사조직도 있다. 규모는 오토바이 2대하고 봉고차 1대. 명령만 하면 바로 모인다. 김용철 변호사 숨길 때도 이 친구들이 보초 서고 따라다녔다. 돈을 언제 줄지 모르고 안 줄 수도 있지만 나를 믿고 따라주는 동생들로, 인간적으로 엮여 있다. 문제는 그 동생들이 다 자기가 기자인 줄 안다는 거다.
⑤ 꼼꼼한 뒷얘기:신부님 신부님 함세웅 신부님
‘루카’, 내 세례명이다.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천주교 신자도 아니다. 하지만 주일에 미사를 올리고 심지어 성당 근처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이게 다 함세웅 신부님 때문이다. 함 신부님에게는 늘 사람이 찾아온다. 다 약자들이다. 경찰이나 검찰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사람이 오면 “네가 와서 좀 들어봐라” 하며 나를 부르신다. 어느 날, 또 누구 얘길 들어보라며 나를 부르셨는데 찾아온 사람이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을 되풀이하는 거였다. 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건 사실관계가 다른 것 같고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면서 말을 몇 번 잘랐다. 김용철 변호사 사건이 한창 진행될 때라 피곤한 신부님이 괜한 데 신경을 쓰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신부님이 나를 몇 번이나 제지하시더니 끝나고 나서 한 마디 하셨다. “저 사람은, 저 얘기가 하고 싶어서 온 건데, 내가 들어줘야지. 내가 사제인데. 내가 이거 들어주라고 있는 거야.” 아, 그때 내가 크게 배웠다. 내 월급은 기사 써서 받는 돈 20퍼센트, 사회에 보탬 되는 일 하고 받는 돈 30퍼센트, 나머지 50퍼센트는 약자 얘기 들어주는 것으로 받는 돈이라고 생각한 게 그때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해결사로 소문이 났다. 정말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기를 당한 판사나 조폭, 치정 관계에 휩싸인 재벌이나 마나님, 사채업자에 쫓기는 사람, 뭔가 끈이 필요한 사람 등등 헤아릴 수 없다. 오죽 답답했으면 나한테까지 찾아왔나 싶어서 웬만큼 나쁜 사람 아니면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끝까지 들어준다. 물론 90퍼센트 이상은 영양가 없는 얘기다.
정말 억울한 사람들도 많다. 할머니 한 분이 찾아오셨다. 무허가 주택에서 살았는데 신고하랄 때 안 해서 집을 뺏기자 소송을 걸었다. 대법까지 가서 결국 졌다. 따져보니 법적으로 할머니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냥 가시라고 할 수 없었다. 할머니 앞에서 바로 구청에 전화해서 소리를 높였다. “아니, 할머니한테 설명을 해야지. 서류를 보내면 알아? 당신이 집 뺏긴 사람 마음을 알아?” 그러면 저쪽에서 대거리를 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욕을 몇 마디 하고 끊는다. 대신 욕하는 거라도 듣고 응어리를 푸시라고. 할머니한테는 “아, 이 새끼 진짜 나쁜 새끼네. 법이라는 게 여러 사람 죽여요” 이러고 보내드린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다시 구청에 전화해서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이해하세요. 할머니가……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하고 사과한다.
간혹 그들의 하소연이 기사를 통해 나가더라도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사실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냥 같이 욕하고, 전화 한 통 해주는 게 그들을 위한 내 역할이다.
강정마을에 갔을 때 함 신부님께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우리는 만날 지는 싸움만 하느냐고. 왜 만날 져야 하느냐고. 신부님이 그러셨다. “주변 사람들, 동지들이 당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부끄러우면 안 되잖아.” 신부님은 신념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다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우리만 편하자고 그쪽으로 가면 안 되잖아.” “신부님, 그래도 너무 자주 져요.” 신부님한테는 괜히 응석이 부리고 싶다.
▶ 주진우《시사IN》기자 겸 인터넷 팟캐스트 라디오 시사토크《나는 꼼수다》고정 패널 저술『정통시사활극 주기자』「이것이 팩트다」〈제3장 종교,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마피아〉푸른숲 편찬(2012년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