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채널 e 그날 남편은 목욕탕에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33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글쎄, 제 남편이 신문에 나온 겁니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 1973년 10월 유신 반대 시위 전국 대학으로 확산 1974년, 중앙정보부는 유신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을 범죄단체로 규정 그리고 민청학련 배후로 인혁당(인민혁명당) 검거 인혁당은 반국가단체다. -중앙정보부 그러던 어느날 저는 어딘가로 끌려가서 다른 피고인의 아내들처럼 강제로 각서를 썼습니다. "내 남편은 간첩" 이라고, 그런 각서를 썼다는 죄책감으로 자살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쥐약을 먹으려고 하는 그 모습을 친정어머니가 보셨지요. 저는 죽음을 면하게 되었지만 친정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한 달 뒤, 눈을 감으셨습니다. -유승옥(故 김용원 씨 아내) 남편을 살리려고 언론에 손톱만큼이라도 기사를 내달라고 애원했지만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막내아들의 목에 새끼줄을 묶고 총살놀이를 하더군요. '빨갱이 자식'이라고 놀리면서... 그때 이웃들은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간첩' 이라는 누명을 쓴 것도 억울했지만 자칫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지인들과 접촉을 끊고서 숨만 쉬며 살았습니다. -신동숙(故도예종 씨 아내)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인혁당 피고인 8명 사형선고 다음 날 새벽 4시(사형선고 18시간 후) 교수형 집행 "대법원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심혈을 기울여 심리하고 선고한 것이므로 더 이상 불복할 여지가 없다." -서울신문 1975년 4월 10일 사설 중에서 "한국정부가 억압적이라는 비판은 편견입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형편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 -뉴스위크 지 회견, 박정희 대통령 민주주의(民主主義) : 국민이 주인인 정치 형태 2007년 1월 23일 법원, 무죄 판결 "당시 진술은 고문, 구타,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증거능력이 없다" 본 편을 제작하면서 잠시 주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혹시 나중에 세상이 바뀌어서 이 영상물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나쁜일을 겪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진짜 사과는 기자들 앞에서 할게 아니라 직접 피해자들을 찾아가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덧붙이지는 않을게요. 그 분이 역사의 판단에 맡기셨듯이 여러분의 판단에 맡길게요. 인혁당 아내 “죽어서 돌아온 남편 시신 손발톱 다 빠져…” 기사 링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1407.html)
(모바일배려)EBS 지식채널 e [잃어버린 33년] 인혁당 사건 1
지식채널 e
그날 남편은 목욕탕에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33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글쎄, 제 남편이 신문에 나온 겁니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
1973년 10월 유신 반대 시위
전국 대학으로 확산
1974년, 중앙정보부는 유신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을 범죄단체로 규정
그리고
민청학련 배후로 인혁당(인민혁명당) 검거
인혁당은 반국가단체다.
-중앙정보부
그러던 어느날
저는 어딘가로 끌려가서
다른 피고인의 아내들처럼
강제로 각서를 썼습니다.
"내 남편은 간첩" 이라고,
그런 각서를 썼다는 죄책감으로
자살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쥐약을 먹으려고 하는
그 모습을 친정어머니가 보셨지요.
저는 죽음을 면하게 되었지만
친정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한 달 뒤,
눈을 감으셨습니다.
-유승옥(故 김용원 씨 아내)
남편을 살리려고
언론에 손톱만큼이라도 기사를 내달라고
애원했지만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막내아들의 목에 새끼줄을 묶고
총살놀이를 하더군요.
'빨갱이 자식'이라고 놀리면서...
그때 이웃들은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간첩' 이라는 누명을 쓴 것도 억울했지만
자칫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지인들과 접촉을 끊고서
숨만 쉬며 살았습니다.
-신동숙(故도예종 씨 아내)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인혁당 피고인 8명 사형선고
다음 날 새벽 4시(사형선고 18시간 후)
교수형 집행
"대법원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심혈을 기울여 심리하고 선고한 것이므로
더 이상 불복할 여지가 없다."
-서울신문 1975년 4월 10일 사설 중에서
"한국정부가 억압적이라는 비판은 편견입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형편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
-뉴스위크 지 회견, 박정희 대통령
민주주의(民主主義)
: 국민이 주인인 정치 형태
2007년 1월 23일 법원, 무죄 판결
"당시 진술은 고문, 구타,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증거능력이 없다"
본 편을 제작하면서
잠시 주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혹시 나중에 세상이 바뀌어서
이 영상물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나쁜일을
겪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진짜 사과는 기자들 앞에서 할게 아니라
직접 피해자들을 찾아가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덧붙이지는 않을게요.
그 분이 역사의 판단에 맡기셨듯이
여러분의 판단에 맡길게요.
인혁당 아내 “죽어서 돌아온 남편 시신 손발톱 다 빠져…” 기사 링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14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