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날수록 한국 경제의 성장이 주춤해지고 국민 대다수가 사실상 가난해지고 있으며 일자리 문제가 더욱 악화되고 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크게 두가지 요인이 있다. 재벌독식 체제와 부동산 거품-가계 부채 폭탄이다. 이 두가지는 한국 경제위기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재벌독식체제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국내에서 재벌 문제를 거론하면 적잖은 이들이 “그나마 재벌 때문에 먹고사는 것 아니냐”, “재벌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같은 주장은 재벌의 광고에 목을 매는 기득권 신문이 재벌을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이들 언론은 끊임없이 ‘재벌이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린다’는 왜곡된 인식을 만들어내고 ‘한국 경제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재벌들을 최대한 지원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 같은 인식에 세뇌되다 보니 재벌의 횡포로 피해를 입은 사람조차 “그래도 재벌을 밀어줘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거의 ‘스톡홀름 증후군’ 수준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인질범에 사로잡힌 인질이 처음에는 인질범에게 저항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목숨이 인질범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는 인질범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는 심리학적 현상을 가리킨다. 지금 상당수의 한국 국민들이 재벌독식 체제로 인해 직간접적인 피해를 겪고 있음에도 ‘재벌을 지원해야 우리가 먹고살수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재벌독식 체제 때문에 한국의 산업 생태계는 질식해 활력을 잃고 있다. 미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부터 애플, 구글, 아마존에 이르기까지 학교 기숙사나 집 안의 주차장에서 시작한 벤처들이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수십년 전의 재벌 기업이 여전히 재벌이다. 벤처에서 시작해서 큰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기껏해야 네이버와 다음 정도인데 이들 회사도 겨우 매출 1조원 정도에서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
한국에서 벤처로 출발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극히 드문 이유는 바로 재벌독점 체제 때문이다. 좋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벤처도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좀 된다 싶은 사업이 보이면 재벌이 인수해버리거나 시장에 들어가서 해당 기업을 고사시켜버리거나 중소벤처기업의 특허를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벤처에서 성장한 네이버와 다음조차 중소벤처의 사업 아이템을 가로채는 등 재벌 기업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한명의 천재가 수백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을 했듯이 이들은 자신들 1%가 평범한 국민 99%를 먹여 살린다는 인식을 퍼뜨린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다. 이들 1%가 온갖 특혜를 누리며 99% 국민을 등쳐서 자신들의 부를 불리면서도 온갖 범죄와 비리를 일삼고 있다. 이들은 국민경제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경제에 꼽사리로 기생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 재벌 기업의 행태는 이건희 회장 등 재벌가의 파렴치한 악행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온갖 불법, 횡령, 탈세를 저질러도 한국의 재벌은 제대로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돈의 힘으로 사법 시스템과 정치를 매수해놓았기 때문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삼성특검에서만 4조 5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밝혀졌지만 상속세 과세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세금 한푼 내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히려 이건희 회장은 이명박 행정부 출범 이후 139일만에 초고속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범죄를 저질렀다면 부끄러워하는 염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들에게 “정직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설파한다.
미국의 경우 당시 재계 7위 규모를 자랑하던 엔론의 제프리 스킬링 회장이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집행유예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삼성가뿐만 아니다. 최태원 SK 회장의 사례를 보자. 최 회장은 노무현 행정부 초기인 2003년 이미 SK글로벌 분식회계 및 부당 내부거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지만 실형은 단 하루도 살지 않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러고도 2011년 SK 계열사들을 동원한 1960억원대의 횡령·배임에 개입한 최태원 회장을 검찰은 불구속 기소했다. 2003년 당시 응분의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결과 간이 부은 최 회장이 7, 8년만에 또 범죄를 저질렀으니 중형을 구형해야 맞다. 진실로 드러나고 있는 BBK 의혹을 제기했던 정봉주 전 대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이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수감된 것과 비교해보라. 이것이 과연 정치라고 할 수 있는가? 2003년 SK글로벌 사태 때 기득권 언론은 “최 회장이 구속되면 경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며 법치를 흔들었다. 이번에도 기득권 언론은 최 회장에게 내려진 솜방망이 처벌조차 ‘공황’이니 ‘글로벌 경영 차질’이라고 떠벌렸다. 온갖 탈불법이 글로벌 경영인가? 이런 식으로 사태를 왜곡, 호도하는 것들을 정말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최태원 회장은 몇 년 전부터 ‘사회 공헌’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은 화장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우리 나라의 대기업들에게 사회 공헌이나 나눔을 요구하지 않는다. 온갖 탈불법, 담합, 반칙으로 부당하게 배를 채운 이들이 마치 선심 쓰듯 으스대는 꼴은 정말 보고 싶지 않다. 그런 요구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기업하기 어렵다”는 헛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제발 법이나 제대로 지키고, 법을 어겼으면 일반인처럼 처벌받고, 내야 할 세금을 제대로 내고, 국민의 등이나 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검찰 수사를 받을 때면 어김없이 휠체어를 타는 행태는 정말이지 더 이상 보기 민망하다.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입대할 때만 되면 허리가 부러지고, 검찰 수사 때만 되면 휠체어를 타니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하지만 재벌가의 행태를 보고도 여전히 삼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삼성이 국민 수십만,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일 삼성이 순수하게 자신들의 경쟁력만으로 그 같은 규모를 갖추고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박수칠 일이다. 하지만 삼성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자원을 모조리 싹쓸이해가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예를 들어 삼성이 없는 경우 1천명이 먹고살 수 있는데 삼성 때문에 5백명밖에 못 먹고사는 경우라면. 더 많은 사람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는데 오히려 삼성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일자리가 줄고 협력업체와 소비자의 정당한 몫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라면.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 나라의 상황은 바로 이런 경우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국내 자원을 재벌 기업에 몰아주고 있는가?
환율 효과부터 살펴보자. 2009년 국채위기 이후 경제성장의 상당 부분은 급격한 수출 증가 덕분이었다. 수출이 급증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원-달러 환율의 급등이었다. 원-달러 환율은 2008년 금융위기 전에는 달러당 900원대 초반이었다가 국채위기 이후 1100원~1200원대를 유지해왔다. 일본 엔화처럼 원화가 강세를 보여서 900원대로 현상 유지가 됐더라도 삼성전자 등이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릴 수 있었을까? 실제로 2010년 수출 대기업이 올린 사상 최대 실적의 상당 부분은 환율 효과에 따른 것이다.
이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한국은행에서 작성된 원-달러 환율 및 경상수지 추이 그래프이다. 원-달러 환율이 올라가면 바로 경상수지가 흑자를 보이고, 원-달러 환율이 내려가면 경상수지가 적자를 보이는 흐름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한국의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수출 대기업이 얼마나 큰 덕을 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196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환율을 끌어올리며 수출 기업을 지원해왔다. 1960년대 200원대로 출발했던 환율은 1970년대 500원선에서 1980년대 중반 800원대 후반까지 치솟은 후 800원대 전후에서 움직였다. 이후 19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수직 상승했던 환율은 2008년 930원대까지 떨어졌다. 외환위기 때 지나치게 올랐던 환율이 조금씩 정상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수출 대기업을 지원해서 양적 성장 목표치를 달성하려던 이명박 행정부는 명시적으로 환율을 끌어올리겠다고 밝힘으로써 환율 폭등 사태를 빚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불에다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이처럼 속이 뻔히 보이는 정부의 정책 때문에 당시 외국계 투자은행은 외환투자를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갔다. 내가 만난 한 외국계 투자은행 대표는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을 듣고 외환 거래를 통해 약 1조원을 벌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 정도로 멍청하고 상황 판단을 못하는 정부였던 것이다. 이렇게 정부는 환율 폭등을 자초하고는 환율이 폭등하자 통화 스와프니 외환보유고 투입이니 온갖 난리를 다 쳤다. 어쨌거나 이후 환율 폭등 사태가 일단락되면서 과도하게 올랐던 환율이 떨어질 조짐을 보이자 이명박 행정부는 다시 수출 대기업을 위해 환율을 떠받쳤다.
이는 미국 FRB에서 작성된 2008년 1월에서 2011년 3월까지 달러 대비 각국의 환율 변동률이라는 그래프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사태가 불거지기 시작한 2008년 이후 미국의 주요 12개 교역국 가운데 달러 대비 환율 상승률을 보인 일본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달러 대비 환율이 하락세를 나타냈다. 사실 세계 경제위기의 진원지는 미국이었기 때문에 한 나라의 경제력을 나타내는 척도인 화폐가ㅣ는 달러 대비 강세(환율 하락)인 것이 정상이다. 물론 달러가 기축통화이기에 다른 국가의 통화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측면이 있다. 그렇더라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달러는 상대적 약세를 보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같은 기간 원-달러 환율은 대폭 올랐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 정부가 환율을 떠받치는 과정에서 외환보유고는 2009년 초 2천억 달러에서 2011년 하반기 3천억 달러로 급증했다. 고환율 유지를 위해 외환시장에서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시장 개입을 반복한 결과다. 이는 이미 미국 국무성이 제기한 대로 한국 정부가 수출 대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인위적으로 고환율 기조를 유지해왔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출 대기업은 엄청난 덕을 봤지만 다른 경제주체들은 정반대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예를 들어 외국 원자재를 쓰는 중소납품업체는 국채위기 전보다 훨씬 더 비싼 원화 가격으로 원자재를 수입해야 한다. 이것이 수입 인플레이션의 형태로 소비자 물가에 전가되므로 소비자도 상대적으로 더 높은 물가 부담을 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국민의 대외 구매력도 크게 떨어지게 된다. 결국 인위적인 고환율 유도 정책은 일반 가계와 수입업자 등에게 세금을 부과해서 수출 대기업에 막대한 수출 보조금을 지급해주는 정책인 셈이다. 2008년 이후 가계와 중소기업은 경기 침체에 시달리면서도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의 사상 최대 실적 잔치를 도와준 것이다.
막대한 재정적자 등을 통한 공공부채로 재벌 기접을 지원하는 것도 재벌에게 자원을 몰아주는 사례다. 뒤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이명박 행정부가 출범한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정부와 공공기관 전체의 공공부채는 약 4백조원 급증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재정 부양책 규모는 세계 경제위기의 진앙지인 미국에 이어 OECD 3위 수준이었다. 재정 부양책만 따져서 그렇지, 공기업을 포함한 공공 부문 전체의 부양책 규모는 세계 1위일 것이다. 이처럼 정부는 건설 및 부동산 경기부양 등의 명목으로 막대한 빚을 끌어다 썼다.
이런 건설 및 부동산 경기 부양으로 가장 혜택을 보는 이는 다름 아닌 재벌 건설업체들이다. 현대건설, 삼성물산, GS건설, SK건설 등 상위 6~10개의 재벌 건설업체는 정부의 부동산 부양책으로 가장 큰 혜택을 봤다. 사실 이들 재벌 건설업체도 2008년 국채위기 당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정부는 민간 주택시장의 물량이 줄어들자 공공 발주 사업을 마구잡이로 벌여서 이들 건설업체들을 먹여 살렸다. 실제로 정부와 공공 부문의 발주 물량은 노무현 정권 때인 2006년 20조원 수준에서 2009년에는 50조원 수준까지 늘어났다.
특히 이명박 행정부는 상위 6개 재벌 건설업체들이 가격을 담합해서 폭리를 취하는 턴키 발주 물량을 대폭 늘려다. 4대강, 새만금, 경인운하 등 대규모 건설 사업을 턴키 방식으로 발주해서 재벌들의 배를 불려주었던 것이다.
2011년 예산 기준으로 약 15조원에 이르는 각종 R&D 지원도 대부분 재벌 기업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 지원 예산이다. 중소기업에 돌아가는 R&D 예산은 10%인 1조 5천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 정부의 R&D 예산은 2010년 기준 GDP 대비 1.03%로 OECD 32개국 가운데 네번째로 높다. 중소기업에 혜택이 많이 돌아가는 직업훈련에 대한 재정투자는 2007년 기준 GDP 대비 0.14%(1조 3천 971억원)로 OECD 평균 0.58%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국의 예산은 대부분 재벌 기업에 극히 유리한 방식으로 배분된다.
그런데 R&D 예산의 대부분은 ‘신성장 동력산업 개발’ 등 거창한 포장을 두르고 있다. 더구나 ‘R&D 투자를 늘려야 미래에 대비할 수 있다’는 재벌계 연구소나 기득권 언론의 되풀이되는 주장에는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R&D 투자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같은 R&D 지원이 재벌 특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대기업에 대한 R&D 투자의 효율성은 높지 않다. R&D 예산의 효율성을 나타내는 정부 R&D 투자의 총요소생산성 기여도는 대기업 0.14%, 중소기업 0.92%로 중소기업 쪽이 오히려 6.5배나 높다. 똑같은 예산을 투자했을 때 대기업이 1백억원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면 중소기업은 650억원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R&D 투자를 어디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는 뻔하다. 또한 중소기업이 일자리의 88%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중소기업에 대한 R&D 투자가 그에 비례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 비율은 오히려 거꾸로 되어 있다.
더구나 대기업에 대한 투자는 대기업의 자체 R&D 투자를 위축시킨다.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상당수 대기업은 어차피 글로벌 경쟁에 직면해 있어서 자체적으로 R&D 투자를 안 할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부가 R&D 예산을 대기업에 지원해주면 대기업은 굳이 자신들의 돈을 투자할 이유가 없다. 정부가 지원해주는 만큼 대기업은 자신의 투자분을 줄이게 된다. 이른바 구축효과(Croding-out Effect)가 생겨나는 것이다. 반면 같은 돈을 자체 투자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 투자하면 이 같은 효과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가상의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해보자. 한국에 크게 대기업 A와 중소기업 B가 각각 하나씩만 있다고 하자. 정부가 R&D 예산 15조원 가운데 A에 13조원을 투자하고 B에 2조원을 쓴다고 하자. 글로벌 경쟁에 직면해 있는 A는 어차피 25조원을 R&D 예산에 써야 하고, 실제로 그 정도의 자금 여력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13조원을 지원해주므로 자체적으로는 12조원만 쓰면 된다. 반면 B는 13조원의 R&D 투자가 필요한데도 실제로는 3조원 정도밖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이 경우 중소기업은 정부 지원 2조원을 받고 자체 자금 3조원을 투자하게 된다. 그러면 국가 전체의 R&D 투자는 30조원(대기업 25조원+중소기업 5조원)에 그친다.
반면 정부가 A에 5조원만 쓰고 B에 10조원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대기업 A는 정부 지원 5조원에 더해 20조원을 투자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A의 R&D 투자는 25조원으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중소기업 B의 경우에는 필요한 13조원(B 자체투자 3조원+정부 지원 10조원)의 R&D 투자가 모두 일어나게 된다. 이 경우 국가 전체적으로는 8조원의 투자가 발생한다. 정부는 같은 돈을 썼지만 나라 전체로는 8조원의 추가 투자가 이뤄진 것이다. 더구나 중소기업에 대한 R&D 투자 효율성이 훨씬 높기 때문에 경쟁력 제고와 경기 진작에도 훨씬 도움이 된다. 이렇게 보면 같은 R&D 투자를 하더라도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정부는 재벌 대기업에 R&D 투자를 몰아주고 있다.
그러면 왜 이런 식으로 R&D 예산이 지원될까? 우선 관료들로서는 재벌 기업과 일하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유학 시절 기획재정부에서 연수 나온 한 관료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역시 현지에 연수 나와 있던 삼성과 SK 등 대기업의 중견 간부들도 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그 관료로부터 R&D 예산을 배정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오간 얘기를 기억해보면 당시 그 관료가 대기업에 R&D 예산을 배정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재벌 기업이 그럴듯한 아이템을 가져오고 실제 예산 투입의 효율성과는 별개로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가 깔끔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대기업이 가져온 그럴듯한 아이템에 예산을 배정하면 혹시 사고가 나더라도 면피하기가 좋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안 나온 얘기지만 재벌의 로비력이나 퇴임 후 재벌 기업의 후원을 기대하는 관료의 이해관계가 작동함은 물론이다.
그러면 재벌 기업의 세금 부담은 어떤가? 비과세 감면 혜택이 집중되는 대상은 재벌 기업이다.『국세통계연보』를 바탕으로 분석해보니 2009년 법인세 감면세액 6조 7천억원 가운데 40%가 넘는 2조 7천억원이 전체 대상 기업의 0.0004%에 불과한 상위 47개 대기업에 돌아갔다. 특히 앞서 설명한 대로 정부 R&D 예산의 거의 대부분이 대기업에 돌아가는 데다 민간 기업의 자체 R&D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도 대부분 대기업에 돌아간다. 정부는 2010년 세제 개편을 통해 R&D 투자 금액의 3~6%를 세액공제 해주던 것을 신성장 동력 및 원천 기술 R&D 투자의 경우 금액의 20%를 세액공제 해주는 것으로 바꿨다. 신성장 동력 및 원천 기술에는 3D 기술, 녹색 기술, 차세대 LCD 기술, IT 융합 기술 등이 포함되는데 거의 대부분이 대기업의 주력 투자 부문이다. 사실상 대기업의 R&D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을 3%~6%에서 20%로 대폭 늘려준 대기업 특혜였던 셈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기득권 세력은 “한국의 법인세 부담이 높아서 기업을 해먹기 어렵다”고 떠든다.
경제 대국인 일본과 미국이 법인세율 1, 2위를 다투고 있고, 한국보다 경제수준이 높은 나라들이 대부분 한국보다 법인세율이 높다. 일본의 주요 기업인 소니와 도요타 등은 30%대의 법인세를 부담하고 있다. 오히려 헝가리, 체코, 터키,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한국보다 경제수준이 낮은 나라들의 법인세율이 더 낮다. OECD 국가 가운데 법인세율이 가장 낮은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는 심각한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를 겪었다. 과도한 감세정책으로 유입된 투기 자본이 부동산 거품을 부풀려 결국 심각한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막대한 특혜와 지원을 받고 있는 재벌 기업이 세금은 제대로 내고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2008년 특검 과정에서 4조 5천억원에 이르는 차명 재산을 보유한 사실이 드러났던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단 한푼의 상속세도 내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냈다면 최소 2조원을 내야 했지만 과세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단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돈이 넘쳐나서 주체도 못할 국내 최고 재벌이 세금을 안 내려고 얼마나 파렴치한 짓을 한 것인지. 이 회장이 세금 한푼 안 내고 막대한 재신을 이리 빼돌리고 저리 빼돌릴 동안 도대체 국세청과 금융감독원과 검찰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건희 회장만이 아니다. 2010년 이후 태광 한화 등 잇따라 불거져 나온 차명 계좌를 통한 비자금과 탈세 의혹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일은 비단 삼성그룹만의 문제는 아니다.
재벌 일가는 정당한 상속세나 증여세를 내지 않고 탈불법적으로 경영권을 승계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삼성그룹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법 행위가 대표적이다. 그는 에버랜드 주식 25.1%, 삼성SDS 주식 0.1%, 삼성전자 주식 0.65% 등 시가로 2조원에 육박하는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납부한 증여세는 16억원에 불과하다. 1995년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60억원을 증여받는 과정에서 납부한 증여세가 전부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재벌은 온갖 명목으로 ‘세금 부담 없는 경영권 승계’를 집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상당수의 재벌 기업이 3대로 막대한 부를 이전했지만 이 과정에서 낸 상속세와 증여세의 규모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재용 사장처럼 쥐꼬리만한 상속·증여세를 내고도 수천억에서 수조원대로 평가되는 재산을 소유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이는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막대한 탈세와 탈법(또는 불법) 상속이 이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2010년 4월 현재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국내 대규모 기업집단(공기업 제외)의 회사수는 모두 1222개. 이들 기업집단의 자산 총액은 1106.2조원이 넘는다. 그리고 삼성, 현대, LG, SK 등 4대 재벌 그룹을 포함한 상당수 기업에서 3세 승계가 진행 중이다. 이들 그룹에서 3세들이 이미 승계한 자산만 최소 수십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이 자산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낸 상속·증여세는 이들이 승계한 자산을 도저히 합리화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만약 재벌 3, 4세가 전체 자산의 10%에 해당하는 재산을 승계할 경우 정상적으로 상속세나 증여세를 냈다면 약 44조원의 세금이 걷혀야 햇다. 하지만 2006년 이후 매년 과표 5백억원 이상의 상속세를 낸 상위 4~6명이 합쳐서 1300억원~1700억원대의 세금을 내왔을 뿐이다. 이나마도 재벌 기업의 승계자들이 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이처럼 재벌 3, 4세들은 사실상 탈세를 밥 먹듯이 하면서 극히 적은 지분으로 재벌 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재벌 계열사가 황소개구리처럼 빠르게 늘면서 산업 생태계는 무너지고 일자리는 줄게 된다. 이를 다음 사례로 살펴보자(이 사례는 어느 트위터 친구가 내게 알려준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우리 회사의 구내식당은 복리 후생 차원에서 4000원에 한 끼를 먹을 수 있어요. 우리 회사 자체의 케이터링 부서에서 아주머니 대여섯 분을 고용해서 운영하고 있었죠. 직원들은 약 2000원~3000원 정도의 품질을 가진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아주머니들은 정식 직원으로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어요.
그런데 이 구내식당이 어느 날 우리 회사 계열 케이터링업체인 O사로 이관됩니다. 우리 회사는 O사로부터 지하식당 사용료(또는 임대료)를 받아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됐고, O사는 매출을 올릴 수 잇는 사업장을 하나 더 확보하게 된 거죠.
이 건물에 우리 회사가 입주해 4개 층을 쓰고 있는데 월 임대료를 1억원 넘게 내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식당을 운영하는 O사로부터 사용료(또는 재임대료)를 받아 임대료를 줄일 수 있었죠. 그렇다면 O사의 매출은 얼마나 될까요? 구내식당 만석은 약 300석에 최대 2회전 정도 하는 걸로 추정됩니다. 대략 계산해보면 ‘4000원X300명X2회전X2식(하루 기준)X25일(한 달 기준)=약 1억 2천만원’이네요.
O사는 영양사 1, 2명과 조리사 1, 2명 그리고 이전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아주머니 서너 분의 비용을 지불한 뒤 마진을 챙깁니다. 물론 식자재 비용은 대폭 낮아지겠죠.
결과적으로 ‘4000원=식자재비+여려 명의 식당 아주머니 임금’이었던 것이 ‘4000원=낮아진 식자재비+1, 2명의 정직원 임금+낮아진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의 처우+장소 임대료+케이터링 화사의 마진’으로 바뀌게 되죠. 전에 비해 식사의 질은 떨어지고 직원들의 대우는 나빠지고 O사의 매출은 늘어나죠. 이런 식으로 기업의 구내식당 서비스도 전체 이용자의 혜택이 아닌 재벌 계열사의 배만 불리는 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네요.˝
이밖에도 한국의 재벌 기업이 이 나라에서 누리는 특혜는 막대하다. 사실 한국만큼 ‘재벌 기업 해먹기’ 좋은 나라도 드물다.
예를 들어 어느 선진국에서 기아와 현대차라는 사실상의 단일 회사가 내수시장의 80%를 점유하면서 신차가 나올 때마다 멋대로 값을 올릴 수 있을까? 탈세가 적발될 경우 감형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독과점과 담합을 벌일 경우 기업이 해체될 정도의 과징금을 물거나 이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하는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 삼성 같은 재벌 기업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삼성처럼 수십만명의 직원을 거느리고도 ‘무노조 경영’을 계속할 수 있을까? 불과 1%~3%의 지분으로 전 그룹을 지배하고 그룹의 자산을 개인 자산처럼 유용·횡령하면서도 세금 없는 경영권 승계를 할 수 있을까? 지금 국내 재벌 기업이 누리고 있는 초법적 특권을 법치주의와 시장경제 질서가 확립된 선진국에서 과연 보장받을 수 있을까?
단언컨대 한국과 같은 ‘재벌 천국’은 웬만한 선진국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삼성 등 재벌 기업이 한국을 떠날 가능성은 없다. 걱정 붙들어 매시라. 대신 국민경제를 희생해서 재벌을 총력 지원한 탓에 고사해가는 산업 생태계와 서민 경제를 걱정하라. 재벌 총력 지원 체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시간이 갈수록 한국 경제는 질식해 죽는다.
이처럼 재벌 총력 지원 체제를 만들어서 재벌독식 구조를 탄생시킨 것은 한국 경제의 활로가 아니라 사로(死路)였다. 한국 경제의 약이 아니라 독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재벌 유통 체인에 의한 재래시장과 골목 상권의 몰락이다.
재벌독식은 국민경제의 포트폴리오상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투자 격언 중에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격언은 투자에서 위험(risk) 분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우리 나라에서는 단순히 여러 종목에 분산 투자하라는 식으로 인식되고 있어서 문제다). 국민경제 전체로 볼 때도 삼성, 현대 등 재벌 기업의 주력 업종을 중심으로 자원이 집중되면 위험하다. 앞서 보았듯이 재벌독식 구조로 중견 재벌 기업도 맥을 못 출 정도로 산업 생태계가 무너져서 재벌 기업조차 경쟁력을 상실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 총체적 지원을 통해서도 재벌 기업이 더 이상 경쟁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 한국 경제는 어떻게 될까? 한국 경제가 다양한 산업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토대를 만든다는 측면에서도 이제 재벌독식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한 바구니에 너무 많은 달걀을 담아놓아 바구니가 엎어질 경우 한 번에 훅 가버릴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다.
삼성이 망하면 한국 경제가 흔들린다?:재벌 이데올로기
해가 지날수록 한국 경제의 성장이 주춤해지고 국민 대다수가 사실상 가난해지고 있으며 일자리 문제가 더욱 악화되고 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크게 두가지 요인이 있다. 재벌독식 체제와 부동산 거품-가계 부채 폭탄이다. 이 두가지는 한국 경제위기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재벌독식체제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국내에서 재벌 문제를 거론하면 적잖은 이들이 “그나마 재벌 때문에 먹고사는 것 아니냐”, “재벌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같은 주장은 재벌의 광고에 목을 매는 기득권 신문이 재벌을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이들 언론은 끊임없이 ‘재벌이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린다’는 왜곡된 인식을 만들어내고 ‘한국 경제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재벌들을 최대한 지원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 같은 인식에 세뇌되다 보니 재벌의 횡포로 피해를 입은 사람조차 “그래도 재벌을 밀어줘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거의 ‘스톡홀름 증후군’ 수준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인질범에 사로잡힌 인질이 처음에는 인질범에게 저항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목숨이 인질범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는 인질범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는 심리학적 현상을 가리킨다. 지금 상당수의 한국 국민들이 재벌독식 체제로 인해 직간접적인 피해를 겪고 있음에도 ‘재벌을 지원해야 우리가 먹고살수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재벌독식 체제 때문에 한국의 산업 생태계는 질식해 활력을 잃고 있다. 미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부터 애플, 구글, 아마존에 이르기까지 학교 기숙사나 집 안의 주차장에서 시작한 벤처들이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수십년 전의 재벌 기업이 여전히 재벌이다. 벤처에서 시작해서 큰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기껏해야 네이버와 다음 정도인데 이들 회사도 겨우 매출 1조원 정도에서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
한국에서 벤처로 출발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극히 드문 이유는 바로 재벌독점 체제 때문이다. 좋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벤처도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좀 된다 싶은 사업이 보이면 재벌이 인수해버리거나 시장에 들어가서 해당 기업을 고사시켜버리거나 중소벤처기업의 특허를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벤처에서 성장한 네이버와 다음조차 중소벤처의 사업 아이템을 가로채는 등 재벌 기업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한명의 천재가 수백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을 했듯이 이들은 자신들 1%가 평범한 국민 99%를 먹여 살린다는 인식을 퍼뜨린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다. 이들 1%가 온갖 특혜를 누리며 99% 국민을 등쳐서 자신들의 부를 불리면서도 온갖 범죄와 비리를 일삼고 있다. 이들은 국민경제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경제에 꼽사리로 기생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 재벌 기업의 행태는 이건희 회장 등 재벌가의 파렴치한 악행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온갖 불법, 횡령, 탈세를 저질러도 한국의 재벌은 제대로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돈의 힘으로 사법 시스템과 정치를 매수해놓았기 때문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삼성특검에서만 4조 5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밝혀졌지만 상속세 과세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세금 한푼 내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히려 이건희 회장은 이명박 행정부 출범 이후 139일만에 초고속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범죄를 저질렀다면 부끄러워하는 염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들에게 “정직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설파한다.
미국의 경우 당시 재계 7위 규모를 자랑하던 엔론의 제프리 스킬링 회장이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집행유예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삼성가뿐만 아니다. 최태원 SK 회장의 사례를 보자. 최 회장은 노무현 행정부 초기인 2003년 이미 SK글로벌 분식회계 및 부당 내부거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지만 실형은 단 하루도 살지 않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러고도 2011년 SK 계열사들을 동원한 1960억원대의 횡령·배임에 개입한 최태원 회장을 검찰은 불구속 기소했다. 2003년 당시 응분의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결과 간이 부은 최 회장이 7, 8년만에 또 범죄를 저질렀으니 중형을 구형해야 맞다. 진실로 드러나고 있는 BBK 의혹을 제기했던 정봉주 전 대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이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수감된 것과 비교해보라. 이것이 과연 정치라고 할 수 있는가? 2003년 SK글로벌 사태 때 기득권 언론은 “최 회장이 구속되면 경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며 법치를 흔들었다. 이번에도 기득권 언론은 최 회장에게 내려진 솜방망이 처벌조차 ‘공황’이니 ‘글로벌 경영 차질’이라고 떠벌렸다. 온갖 탈불법이 글로벌 경영인가? 이런 식으로 사태를 왜곡, 호도하는 것들을 정말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최태원 회장은 몇 년 전부터 ‘사회 공헌’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은 화장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우리 나라의 대기업들에게 사회 공헌이나 나눔을 요구하지 않는다. 온갖 탈불법, 담합, 반칙으로 부당하게 배를 채운 이들이 마치 선심 쓰듯 으스대는 꼴은 정말 보고 싶지 않다. 그런 요구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기업하기 어렵다”는 헛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제발 법이나 제대로 지키고, 법을 어겼으면 일반인처럼 처벌받고, 내야 할 세금을 제대로 내고, 국민의 등이나 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검찰 수사를 받을 때면 어김없이 휠체어를 타는 행태는 정말이지 더 이상 보기 민망하다.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입대할 때만 되면 허리가 부러지고, 검찰 수사 때만 되면 휠체어를 타니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하지만 재벌가의 행태를 보고도 여전히 삼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삼성이 국민 수십만,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일 삼성이 순수하게 자신들의 경쟁력만으로 그 같은 규모를 갖추고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박수칠 일이다. 하지만 삼성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자원을 모조리 싹쓸이해가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예를 들어 삼성이 없는 경우 1천명이 먹고살 수 있는데 삼성 때문에 5백명밖에 못 먹고사는 경우라면. 더 많은 사람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는데 오히려 삼성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일자리가 줄고 협력업체와 소비자의 정당한 몫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라면.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 나라의 상황은 바로 이런 경우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국내 자원을 재벌 기업에 몰아주고 있는가?
환율 효과부터 살펴보자. 2009년 국채위기 이후 경제성장의 상당 부분은 급격한 수출 증가 덕분이었다. 수출이 급증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원-달러 환율의 급등이었다. 원-달러 환율은 2008년 금융위기 전에는 달러당 900원대 초반이었다가 국채위기 이후 1100원~1200원대를 유지해왔다. 일본 엔화처럼 원화가 강세를 보여서 900원대로 현상 유지가 됐더라도 삼성전자 등이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릴 수 있었을까? 실제로 2010년 수출 대기업이 올린 사상 최대 실적의 상당 부분은 환율 효과에 따른 것이다.
이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한국은행에서 작성된 원-달러 환율 및 경상수지 추이 그래프이다. 원-달러 환율이 올라가면 바로 경상수지가 흑자를 보이고, 원-달러 환율이 내려가면 경상수지가 적자를 보이는 흐름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한국의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수출 대기업이 얼마나 큰 덕을 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196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환율을 끌어올리며 수출 기업을 지원해왔다. 1960년대 200원대로 출발했던 환율은 1970년대 500원선에서 1980년대 중반 800원대 후반까지 치솟은 후 800원대 전후에서 움직였다. 이후 19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수직 상승했던 환율은 2008년 930원대까지 떨어졌다. 외환위기 때 지나치게 올랐던 환율이 조금씩 정상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수출 대기업을 지원해서 양적 성장 목표치를 달성하려던 이명박 행정부는 명시적으로 환율을 끌어올리겠다고 밝힘으로써 환율 폭등 사태를 빚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불에다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이처럼 속이 뻔히 보이는 정부의 정책 때문에 당시 외국계 투자은행은 외환투자를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갔다. 내가 만난 한 외국계 투자은행 대표는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을 듣고 외환 거래를 통해 약 1조원을 벌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 정도로 멍청하고 상황 판단을 못하는 정부였던 것이다. 이렇게 정부는 환율 폭등을 자초하고는 환율이 폭등하자 통화 스와프니 외환보유고 투입이니 온갖 난리를 다 쳤다. 어쨌거나 이후 환율 폭등 사태가 일단락되면서 과도하게 올랐던 환율이 떨어질 조짐을 보이자 이명박 행정부는 다시 수출 대기업을 위해 환율을 떠받쳤다.
이는 미국 FRB에서 작성된 2008년 1월에서 2011년 3월까지 달러 대비 각국의 환율 변동률이라는 그래프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사태가 불거지기 시작한 2008년 이후 미국의 주요 12개 교역국 가운데 달러 대비 환율 상승률을 보인 일본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달러 대비 환율이 하락세를 나타냈다. 사실 세계 경제위기의 진원지는 미국이었기 때문에 한 나라의 경제력을 나타내는 척도인 화폐가ㅣ는 달러 대비 강세(환율 하락)인 것이 정상이다. 물론 달러가 기축통화이기에 다른 국가의 통화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측면이 있다. 그렇더라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달러는 상대적 약세를 보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같은 기간 원-달러 환율은 대폭 올랐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 정부가 환율을 떠받치는 과정에서 외환보유고는 2009년 초 2천억 달러에서 2011년 하반기 3천억 달러로 급증했다. 고환율 유지를 위해 외환시장에서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시장 개입을 반복한 결과다. 이는 이미 미국 국무성이 제기한 대로 한국 정부가 수출 대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인위적으로 고환율 기조를 유지해왔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출 대기업은 엄청난 덕을 봤지만 다른 경제주체들은 정반대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예를 들어 외국 원자재를 쓰는 중소납품업체는 국채위기 전보다 훨씬 더 비싼 원화 가격으로 원자재를 수입해야 한다. 이것이 수입 인플레이션의 형태로 소비자 물가에 전가되므로 소비자도 상대적으로 더 높은 물가 부담을 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국민의 대외 구매력도 크게 떨어지게 된다. 결국 인위적인 고환율 유도 정책은 일반 가계와 수입업자 등에게 세금을 부과해서 수출 대기업에 막대한 수출 보조금을 지급해주는 정책인 셈이다. 2008년 이후 가계와 중소기업은 경기 침체에 시달리면서도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의 사상 최대 실적 잔치를 도와준 것이다.
막대한 재정적자 등을 통한 공공부채로 재벌 기접을 지원하는 것도 재벌에게 자원을 몰아주는 사례다. 뒤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이명박 행정부가 출범한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정부와 공공기관 전체의 공공부채는 약 4백조원 급증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재정 부양책 규모는 세계 경제위기의 진앙지인 미국에 이어 OECD 3위 수준이었다. 재정 부양책만 따져서 그렇지, 공기업을 포함한 공공 부문 전체의 부양책 규모는 세계 1위일 것이다. 이처럼 정부는 건설 및 부동산 경기부양 등의 명목으로 막대한 빚을 끌어다 썼다.
이런 건설 및 부동산 경기 부양으로 가장 혜택을 보는 이는 다름 아닌 재벌 건설업체들이다. 현대건설, 삼성물산, GS건설, SK건설 등 상위 6~10개의 재벌 건설업체는 정부의 부동산 부양책으로 가장 큰 혜택을 봤다. 사실 이들 재벌 건설업체도 2008년 국채위기 당시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정부는 민간 주택시장의 물량이 줄어들자 공공 발주 사업을 마구잡이로 벌여서 이들 건설업체들을 먹여 살렸다. 실제로 정부와 공공 부문의 발주 물량은 노무현 정권 때인 2006년 20조원 수준에서 2009년에는 50조원 수준까지 늘어났다.
특히 이명박 행정부는 상위 6개 재벌 건설업체들이 가격을 담합해서 폭리를 취하는 턴키 발주 물량을 대폭 늘려다. 4대강, 새만금, 경인운하 등 대규모 건설 사업을 턴키 방식으로 발주해서 재벌들의 배를 불려주었던 것이다.
2011년 예산 기준으로 약 15조원에 이르는 각종 R&D 지원도 대부분 재벌 기업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 지원 예산이다. 중소기업에 돌아가는 R&D 예산은 10%인 1조 5천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 정부의 R&D 예산은 2010년 기준 GDP 대비 1.03%로 OECD 32개국 가운데 네번째로 높다. 중소기업에 혜택이 많이 돌아가는 직업훈련에 대한 재정투자는 2007년 기준 GDP 대비 0.14%(1조 3천 971억원)로 OECD 평균 0.58%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국의 예산은 대부분 재벌 기업에 극히 유리한 방식으로 배분된다.
그런데 R&D 예산의 대부분은 ‘신성장 동력산업 개발’ 등 거창한 포장을 두르고 있다. 더구나 ‘R&D 투자를 늘려야 미래에 대비할 수 있다’는 재벌계 연구소나 기득권 언론의 되풀이되는 주장에는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R&D 투자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같은 R&D 지원이 재벌 특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대기업에 대한 R&D 투자의 효율성은 높지 않다. R&D 예산의 효율성을 나타내는 정부 R&D 투자의 총요소생산성 기여도는 대기업 0.14%, 중소기업 0.92%로 중소기업 쪽이 오히려 6.5배나 높다. 똑같은 예산을 투자했을 때 대기업이 1백억원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면 중소기업은 650억원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R&D 투자를 어디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는 뻔하다. 또한 중소기업이 일자리의 88%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중소기업에 대한 R&D 투자가 그에 비례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 비율은 오히려 거꾸로 되어 있다.
더구나 대기업에 대한 투자는 대기업의 자체 R&D 투자를 위축시킨다.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상당수 대기업은 어차피 글로벌 경쟁에 직면해 있어서 자체적으로 R&D 투자를 안 할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부가 R&D 예산을 대기업에 지원해주면 대기업은 굳이 자신들의 돈을 투자할 이유가 없다. 정부가 지원해주는 만큼 대기업은 자신의 투자분을 줄이게 된다. 이른바 구축효과(Croding-out Effect)가 생겨나는 것이다. 반면 같은 돈을 자체 투자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 투자하면 이 같은 효과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가상의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해보자. 한국에 크게 대기업 A와 중소기업 B가 각각 하나씩만 있다고 하자. 정부가 R&D 예산 15조원 가운데 A에 13조원을 투자하고 B에 2조원을 쓴다고 하자. 글로벌 경쟁에 직면해 있는 A는 어차피 25조원을 R&D 예산에 써야 하고, 실제로 그 정도의 자금 여력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13조원을 지원해주므로 자체적으로는 12조원만 쓰면 된다. 반면 B는 13조원의 R&D 투자가 필요한데도 실제로는 3조원 정도밖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이 경우 중소기업은 정부 지원 2조원을 받고 자체 자금 3조원을 투자하게 된다. 그러면 국가 전체의 R&D 투자는 30조원(대기업 25조원+중소기업 5조원)에 그친다.
반면 정부가 A에 5조원만 쓰고 B에 10조원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대기업 A는 정부 지원 5조원에 더해 20조원을 투자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A의 R&D 투자는 25조원으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중소기업 B의 경우에는 필요한 13조원(B 자체투자 3조원+정부 지원 10조원)의 R&D 투자가 모두 일어나게 된다. 이 경우 국가 전체적으로는 8조원의 투자가 발생한다. 정부는 같은 돈을 썼지만 나라 전체로는 8조원의 추가 투자가 이뤄진 것이다. 더구나 중소기업에 대한 R&D 투자 효율성이 훨씬 높기 때문에 경쟁력 제고와 경기 진작에도 훨씬 도움이 된다. 이렇게 보면 같은 R&D 투자를 하더라도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정부는 재벌 대기업에 R&D 투자를 몰아주고 있다.
그러면 왜 이런 식으로 R&D 예산이 지원될까? 우선 관료들로서는 재벌 기업과 일하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유학 시절 기획재정부에서 연수 나온 한 관료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역시 현지에 연수 나와 있던 삼성과 SK 등 대기업의 중견 간부들도 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그 관료로부터 R&D 예산을 배정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오간 얘기를 기억해보면 당시 그 관료가 대기업에 R&D 예산을 배정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재벌 기업이 그럴듯한 아이템을 가져오고 실제 예산 투입의 효율성과는 별개로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가 깔끔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대기업이 가져온 그럴듯한 아이템에 예산을 배정하면 혹시 사고가 나더라도 면피하기가 좋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안 나온 얘기지만 재벌의 로비력이나 퇴임 후 재벌 기업의 후원을 기대하는 관료의 이해관계가 작동함은 물론이다.
그러면 재벌 기업의 세금 부담은 어떤가? 비과세 감면 혜택이 집중되는 대상은 재벌 기업이다.『국세통계연보』를 바탕으로 분석해보니 2009년 법인세 감면세액 6조 7천억원 가운데 40%가 넘는 2조 7천억원이 전체 대상 기업의 0.0004%에 불과한 상위 47개 대기업에 돌아갔다. 특히 앞서 설명한 대로 정부 R&D 예산의 거의 대부분이 대기업에 돌아가는 데다 민간 기업의 자체 R&D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도 대부분 대기업에 돌아간다. 정부는 2010년 세제 개편을 통해 R&D 투자 금액의 3~6%를 세액공제 해주던 것을 신성장 동력 및 원천 기술 R&D 투자의 경우 금액의 20%를 세액공제 해주는 것으로 바꿨다. 신성장 동력 및 원천 기술에는 3D 기술, 녹색 기술, 차세대 LCD 기술, IT 융합 기술 등이 포함되는데 거의 대부분이 대기업의 주력 투자 부문이다. 사실상 대기업의 R&D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을 3%~6%에서 20%로 대폭 늘려준 대기업 특혜였던 셈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기득권 세력은 “한국의 법인세 부담이 높아서 기업을 해먹기 어렵다”고 떠든다.
경제 대국인 일본과 미국이 법인세율 1, 2위를 다투고 있고, 한국보다 경제수준이 높은 나라들이 대부분 한국보다 법인세율이 높다. 일본의 주요 기업인 소니와 도요타 등은 30%대의 법인세를 부담하고 있다. 오히려 헝가리, 체코, 터키,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한국보다 경제수준이 낮은 나라들의 법인세율이 더 낮다. OECD 국가 가운데 법인세율이 가장 낮은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는 심각한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를 겪었다. 과도한 감세정책으로 유입된 투기 자본이 부동산 거품을 부풀려 결국 심각한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막대한 특혜와 지원을 받고 있는 재벌 기업이 세금은 제대로 내고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2008년 특검 과정에서 4조 5천억원에 이르는 차명 재산을 보유한 사실이 드러났던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단 한푼의 상속세도 내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냈다면 최소 2조원을 내야 했지만 과세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단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돈이 넘쳐나서 주체도 못할 국내 최고 재벌이 세금을 안 내려고 얼마나 파렴치한 짓을 한 것인지. 이 회장이 세금 한푼 안 내고 막대한 재신을 이리 빼돌리고 저리 빼돌릴 동안 도대체 국세청과 금융감독원과 검찰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건희 회장만이 아니다. 2010년 이후 태광 한화 등 잇따라 불거져 나온 차명 계좌를 통한 비자금과 탈세 의혹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일은 비단 삼성그룹만의 문제는 아니다.
재벌 일가는 정당한 상속세나 증여세를 내지 않고 탈불법적으로 경영권을 승계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삼성그룹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법 행위가 대표적이다. 그는 에버랜드 주식 25.1%, 삼성SDS 주식 0.1%, 삼성전자 주식 0.65% 등 시가로 2조원에 육박하는 계열사 지분을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납부한 증여세는 16억원에 불과하다. 1995년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60억원을 증여받는 과정에서 납부한 증여세가 전부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재벌은 온갖 명목으로 ‘세금 부담 없는 경영권 승계’를 집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상당수의 재벌 기업이 3대로 막대한 부를 이전했지만 이 과정에서 낸 상속세와 증여세의 규모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재용 사장처럼 쥐꼬리만한 상속·증여세를 내고도 수천억에서 수조원대로 평가되는 재산을 소유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이는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막대한 탈세와 탈법(또는 불법) 상속이 이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2010년 4월 현재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국내 대규모 기업집단(공기업 제외)의 회사수는 모두 1222개. 이들 기업집단의 자산 총액은 1106.2조원이 넘는다. 그리고 삼성, 현대, LG, SK 등 4대 재벌 그룹을 포함한 상당수 기업에서 3세 승계가 진행 중이다. 이들 그룹에서 3세들이 이미 승계한 자산만 최소 수십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이 자산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낸 상속·증여세는 이들이 승계한 자산을 도저히 합리화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만약 재벌 3, 4세가 전체 자산의 10%에 해당하는 재산을 승계할 경우 정상적으로 상속세나 증여세를 냈다면 약 44조원의 세금이 걷혀야 햇다. 하지만 2006년 이후 매년 과표 5백억원 이상의 상속세를 낸 상위 4~6명이 합쳐서 1300억원~1700억원대의 세금을 내왔을 뿐이다. 이나마도 재벌 기업의 승계자들이 낸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이처럼 재벌 3, 4세들은 사실상 탈세를 밥 먹듯이 하면서 극히 적은 지분으로 재벌 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재벌 계열사가 황소개구리처럼 빠르게 늘면서 산업 생태계는 무너지고 일자리는 줄게 된다. 이를 다음 사례로 살펴보자(이 사례는 어느 트위터 친구가 내게 알려준 내용을 수정한 것이다).
˝우리 회사의 구내식당은 복리 후생 차원에서 4000원에 한 끼를 먹을 수 있어요. 우리 회사 자체의 케이터링 부서에서 아주머니 대여섯 분을 고용해서 운영하고 있었죠. 직원들은 약 2000원~3000원 정도의 품질을 가진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아주머니들은 정식 직원으로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어요.
그런데 이 구내식당이 어느 날 우리 회사 계열 케이터링업체인 O사로 이관됩니다. 우리 회사는 O사로부터 지하식당 사용료(또는 임대료)를 받아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됐고, O사는 매출을 올릴 수 잇는 사업장을 하나 더 확보하게 된 거죠.
이 건물에 우리 회사가 입주해 4개 층을 쓰고 있는데 월 임대료를 1억원 넘게 내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식당을 운영하는 O사로부터 사용료(또는 재임대료)를 받아 임대료를 줄일 수 있었죠. 그렇다면 O사의 매출은 얼마나 될까요? 구내식당 만석은 약 300석에 최대 2회전 정도 하는 걸로 추정됩니다. 대략 계산해보면 ‘4000원X300명X2회전X2식(하루 기준)X25일(한 달 기준)=약 1억 2천만원’이네요.
O사는 영양사 1, 2명과 조리사 1, 2명 그리고 이전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아주머니 서너 분의 비용을 지불한 뒤 마진을 챙깁니다. 물론 식자재 비용은 대폭 낮아지겠죠.
결과적으로 ‘4000원=식자재비+여려 명의 식당 아주머니 임금’이었던 것이 ‘4000원=낮아진 식자재비+1, 2명의 정직원 임금+낮아진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의 처우+장소 임대료+케이터링 화사의 마진’으로 바뀌게 되죠. 전에 비해 식사의 질은 떨어지고 직원들의 대우는 나빠지고 O사의 매출은 늘어나죠. 이런 식으로 기업의 구내식당 서비스도 전체 이용자의 혜택이 아닌 재벌 계열사의 배만 불리는 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네요.˝
이밖에도 한국의 재벌 기업이 이 나라에서 누리는 특혜는 막대하다. 사실 한국만큼 ‘재벌 기업 해먹기’ 좋은 나라도 드물다.
예를 들어 어느 선진국에서 기아와 현대차라는 사실상의 단일 회사가 내수시장의 80%를 점유하면서 신차가 나올 때마다 멋대로 값을 올릴 수 있을까? 탈세가 적발될 경우 감형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독과점과 담합을 벌일 경우 기업이 해체될 정도의 과징금을 물거나 이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하는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 삼성 같은 재벌 기업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삼성처럼 수십만명의 직원을 거느리고도 ‘무노조 경영’을 계속할 수 있을까? 불과 1%~3%의 지분으로 전 그룹을 지배하고 그룹의 자산을 개인 자산처럼 유용·횡령하면서도 세금 없는 경영권 승계를 할 수 있을까? 지금 국내 재벌 기업이 누리고 있는 초법적 특권을 법치주의와 시장경제 질서가 확립된 선진국에서 과연 보장받을 수 있을까?
단언컨대 한국과 같은 ‘재벌 천국’은 웬만한 선진국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삼성 등 재벌 기업이 한국을 떠날 가능성은 없다. 걱정 붙들어 매시라. 대신 국민경제를 희생해서 재벌을 총력 지원한 탓에 고사해가는 산업 생태계와 서민 경제를 걱정하라. 재벌 총력 지원 체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시간이 갈수록 한국 경제는 질식해 죽는다.
이처럼 재벌 총력 지원 체제를 만들어서 재벌독식 구조를 탄생시킨 것은 한국 경제의 활로가 아니라 사로(死路)였다. 한국 경제의 약이 아니라 독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재벌 유통 체인에 의한 재래시장과 골목 상권의 몰락이다.
재벌독식은 국민경제의 포트폴리오상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투자 격언 중에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격언은 투자에서 위험(risk) 분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우리 나라에서는 단순히 여러 종목에 분산 투자하라는 식으로 인식되고 있어서 문제다). 국민경제 전체로 볼 때도 삼성, 현대 등 재벌 기업의 주력 업종을 중심으로 자원이 집중되면 위험하다. 앞서 보았듯이 재벌독식 구조로 중견 재벌 기업도 맥을 못 출 정도로 산업 생태계가 무너져서 재벌 기업조차 경쟁력을 상실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 총체적 지원을 통해서도 재벌 기업이 더 이상 경쟁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 한국 경제는 어떻게 될까? 한국 경제가 다양한 산업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토대를 만든다는 측면에서도 이제 재벌독식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한 바구니에 너무 많은 달걀을 담아놓아 바구니가 엎어질 경우 한 번에 훅 가버릴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다.
▶ 선대인 민생경제전략연구소장 저술『문제는 경제다』「버리고, 바꾸고, 바로잡아야할 것들」〈제1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웅진지식하우스 편찬(2012년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