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면 길고 짧았다면 짧았을 5개월..

잘가라2012.09.18
조회593

 

 

익명의 힘을 빌어 여기 글을 적어.

때로는 누가 봐주지 않더라도 그냥 정말 주저리주저리 쓰기만 해도 해소가 될 때가 있으니까.

나중에 내가 써놓은걸 보며 코웃음치며 웃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

 

5개월.

길면 길고 짧았으면 짧았을 5개월. 반 년이 채 안되는 그 시간.

그래도 계절이 한 번은 바뀌었지.

오빠를 처음 만날때는 초봄이라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어. 오빠도 잠바를 입고있었지.

우리 처음에 갔던 식당에서, 서로 이름과 직업정도밖에 몰랐던 그 때.

수줍게 웃으면서 뭔 말을 해야할지 몰랐었어.

사실 소개팅으로 그렇게까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온 건 정말 오랫만이었거든.

 

술을 잘 못하는 오빠.

첫만남에 일찍 헤어졌고, 다음날 떨리는 마음으로 내가 먼저 처음으로 연락했어.

소개팅을 많이 해봤지만, 소개팅으로 사귀어본적도 없거니와

내가 먼저 연락한 거는 또 처음이었어. 자고있었다고 답장이 2시간 늦게왔을때 어찌나 기뻤는지.

 

4번째 만남.

우린 사귀게 되었어. 강가를 옆에 두고 한참을 말을 고르다가 꺼낸 사귀자는 말에.

나도 드디어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과 연애를 할 수 있구나, 뛸듯이 기뻤지.

 

연애 초반.

처음엔 레스토랑 리서치까지 해왔던 오빠. 저 식당은 저게 유명하고 이 식당은 이게 맛있대.

우리 내일 만나서 영화볼까? 저녁먹었으니 맥주 한잔 할까? 커피 마시러 갈까?

 

이렇게나 능동적이었던 오빠는 우리의 만남이 점점 잦아지면서 조금씩 수동적이 되어갔어.

 

 

처음으로 우리가 잤을 때.

내 나이에 처녀라고 하면 요즘 시대에 모두들 헉 하겠지만 정말로 나는 처음이었어.

무서웠고, 아팠어. 정말 너무너무 아파서 몸이 다 쪼개지는 기분이었어.

너무 아파서 자꾸 내가 오빠를 밀어내던 상황.

그 상황에서 오빠가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에게 냈던 짜증. "그럼 어떡하라고" 라고 했던 그 한마디.

후에 미안하다고 안아주고 했지만 난 잊을 수가 없었어.

나중에 이 이야기를 농담처럼 ㅋㅋㅋ를 섞어가며 하면 난처한 표정으로

그땐 정말 미안했어. 라고 했었지.

난 다 기억해.

 

처음으로 우리가 여행갔을 때.

장롱면허였던 오빠. 아예 면허가 없는 나. 버스를 타고 놀러갔었지.

교통수단이 없어 모든 곳을 택시를 타고 다녀야 했어.

여행가는 지역에 최소한의 정보도 없이 가고싶은 곳만 딱 딱 골라와서

택시비만 5만원이 넘게 나오고, 결국 너무 멀어 버스시간때문에 가는 도중에 돌아와버리고..

몰랐어, 나는. 서울에서만 살아서 지방택시들은 카드결제시스템이 안될 수도 있다는걸.

도중에 택시비가 부족해져서 ATM기계를 지나가게 되었을 때,

내가 잠깐 세워주세요. 여기서 돈 뽑아서 가자. 했더니 오빠는

있다 가서도 있을텐데 뭐하러 여기서 뽑아? 했었지. 이때 조금 놀랬어.

아니,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뭐하러 없을지도 모르는 도착지점에서의 ATM기를 찾고 있는지.

나는 답답했고, 오빠는 내가 재촉하는것처럼 보였겠지.

 

처음으로 우리 크게 싸웠을 때.

오빠는 아차싶었는지 나에게 정말 싹싹 빌었었어. 무릎은 꿇지 않았지만 정말 나를 계속 붙들고

미안하다고 했지. 두번다시 화내지 않기로, 화내면 마지막이라고 약속을 했어.

 

그러다 어느순간부터 오빠는 이렇게 살면 안된다 싶었던 것 같아.

언젠가부터 오빠는 화낼때 내 말을 반복하며 과거 일을 들추기 시작했어.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그때 지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오빠의 그런 모습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똑같이 오빠의 과거를 들춰냈지.

그랬더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오빠는 더더욱 화를 냈어.

어이가없었지.

너도 그렇게 해서 나도 그렇게 하는거라고?

받은만큼 되갚아야한다는 오빠의 그 생각.

물론.

사람이라면 주는만큼 기대하게 되어있지.

인간관계가 일방적이면 유지될 수 없는 거, 나도 잘 알고있어.

사귀는 사이말고도 일상적인 친구관계에서도 잘 통용되는 사실이고.

하지만 그렇게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해야돼.

내가 사과했으니 너도 사과해. 하고 강요하는 오빠를 보며.

이미 너덜너덜해질 대로 지치고 닳아있던 나는

 

아.

여기까지구나.

이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내 그릇이 크지 않구나.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어.

붙잡지 않는 오빠 성격 알면서 나도 너무 힘들어서 말했어.

 

꼭 받아야 할 물건때문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게 되었지.

어디 카페같은데라도 들어가서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래도 마지막인데.

곱게 얼굴 보여주려고 화장도 하고 머리도 빗고 옷도 차려입었어.

마지막이니까.

고마웠다고.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인사하고 싶었어.

싫은일도 많았고 힘든일도 많았지만, 그만큼 좋은일도 많았고 행복했으니까.

 

좋은사람 만나, 오빠라면 좋은사람 만날 수 있을거야, 내가 행복하게 해주지못해서 미안.

 

이 한마디를 정말 얼굴보고,

눈동자를 마주보고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나 약속있다고 바로 가봐야한다던 오빠.

 

그래. 그 약속이 뭔지 이제 내가 물어볼 바는 아니지.

 

마지막이라고 예의라도 차리려고 했던 내가 너무 병신같아질만큼

나를 무색하게 만들었던 당신.

이제야 비로소 보이더라.

내가 왜 이렇게까지 지쳤는지.

내가 오빠의 어떤 점에 실망을 해왔었고 화가 나고 그게 누적이 되었는지.

 

난 그 약속이 뭔지 전혀 몰라.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오빠도 나름대로 속상하고 우울하니까

늘 마시던 친구들에게 위로받는 약속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정말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냥 원래부터 있었던 떠들썩한 술자리였을지도.

 

난 이제 남이니까 물어볼 자격 없지.

 

하지만.

오빠가 그래도 나에게... 예의를 마지막으로는 차려줄 줄 알았어.

적어도,

얼굴 마주보고 고마웠어, 미안해.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

 

내가...

 

괜한 기대를 했네 정말.

 

딱 일주 전만해도, 아니, 4일전만해도 우린 껴안고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라는 말보다는

언제부터 우린 이렇게 된걸까 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아.

난 이유를 알고 있어.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

오빠와 나와 서로 좁힐 수 없던 성격차이가 가장 큰거였겠지.

 

그 약속이 뭔지는 정말 모르지만.

이 게시판의 익명의 힘을 빌어 마지막으로 주저리 써볼게.

 

 

정말 고마웠어.

싫은일도 많았어도, 오빠는 그래도 좋은 남자친구였어.

내가 그릇이 작아 오빠의 성격을 받아주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깝고 미안해.

난 나대로, 나를 포용할 수 있는 그런 큰 그릇의 사람을 원해.

오빤 오빠가 컨트롤할 수 있는 그런 유순한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어.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

함께 했던 모든 일들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는데,

마지막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게 좀 아쉽다.

 

잘 살아.

나도 잘 살테니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