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란화(五胡亂華)란 오호(五胡)가 중국을 혼란시켰다는 말이다. 오호(五胡)란 다섯 오랑캐를 말하는데 동진시대 중원에 침임한 흉노(匈奴) · 갈(?) · 선비(鮮卑) · 저(?) · 강(羌)의 다섯 종족을 말한다.
동물은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다. 두 다리를 가진 양은 무엇일까.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쌍각양(雙脚羊)에 대해서는 후술할 영가지란(永嘉之亂)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여기서는 인터넷에 소개된 "《우리는 중국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일막인 오호난화(五胡亂華) 시대, 중국인의 천년 악몽을 고발한다》는 글을 통해서 쌍각양(雙脚羊)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글을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서기 316년, 사마씨(司馬氏)가 건립한 서진왕조는 팔왕의 난(八王之亂)을 거치면서 국력의 손실이 막대하고 허약으로 감당할 수 없어 최종적으로 흉노인들에 의해 나라가 멸망되었다. 북방과 서역의 각종 호족 세력들은 천하가 크게 혼란한 틈을 나서 중원을 침입, 한민족을 마구 도살하고, 한인들을 마치 개만도 못하게 취급당했는 바, 역사상 기록하기를 "북지의 창량(滄凉: 강이름)은 의관(衣冠: 관료, 사대부)의 남천으로 호적들이 온 땅을 뒤덥고 한가(漢家)의 자제들은 이제 바야흐로 거의 다 도륙될 운명에 처해 있다.(北地滄凉, 衣冠南遷, 胡狄編地, 漢家子弟, 幾欲被數屠殆盡。"라고 하였다.
변경에 침입해 온 호족 중에 갈(?) · 백흉노(白匈奴) · 정령(丁零) · 철불(鐵弗) · 노수호(魯水胡) · 선비(鮮卑) · 구대석호(九大石胡) 등 부락의 주동 세력 중에는 금발벽안(金髮璧眼)의 백인종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 미개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지역에서 온 야만의 호족들인지라 아직도 원시의 식인 야만성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갈족(?族) · 백종흉노(白種匈奴) · 선비족(鮮卑族) 3족은 가장 흉악하였다. 우리들 가운데 벌써 노신(魯迅)의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은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중국의 수천년의 봉건도덕으로 "吃人(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뜻) 이란 두 글자에 대하여 개괄하고 있다. 이러한 "吃人"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을 잡아 먹는 사람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중국에서 사람을 잡아 먹는 것은 그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춘추시대 때, 제나라의 역아(易牙)는 자기의 아이로 요리를 만들어 제환공(齊桓公)에게 드렸고, 당나라 때 장순(張巡)이 수양(?陽)의 군수를 하면서, 먹을 양식이 다 떨어져을 때 사람을 잡아 먹었다고 하고, 황소(黃巢)의 반란 때에도 사람을 잡아 먹었다고 한다. 일부 성지(城池: 성)가 포위되어 사람들이 배고픈 것을 참을 수 없으면 아들을 바꿔서 잡아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극히 이례적인 것으로 간혹 소수 통치자의 미친짓, 혹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오호란화(五胡亂華)라고 하는 중국과 인류 역사사상 가장 암흑시대에는 도리어 허다한 사람들이 대규모로 도살이 되어 삶아 먹혔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기 304년에, 모용선비(慕容鮮卑)는 중원을 크게 약탈하여, 무수한 재부를 강탈해 가고, 또 수만 명의 한족(漢族) 소녀들을 약탈해 갔다. 회군 도중에 마구 간음을 하고, 동시에 이러한 소녀들이 군량으로 충당, 도살하여 끓여 먹었다. 하북 역수(易水) 가에 이르렀을 때, 잡아 먹고 남아 있던 8천 명의 소녀들이 있었는데, 모용선비는 이들을 한꺼번에 먹어 치울 수도 없고, 게다가 놓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드디어 그 8천 명의 소녀들을 전부 물에 빠뜨려 죽여 역수(易水)가 이 때문에 흐름이 끊어졌다고 한다.
갈족(?族)으로 말하자면 정말로 "식인악마(食人惡魔)"라고 할 수 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갈족의 군대가 행군작전을 하면서 양초(糧草: 군량과 마초)를 휴대한 적이 없이, 한족 여자들을 약탈하여 군량으로 삼았는데 갈족은 이를 "쌍각양(雙脚羊)"이라고 하였다. 그 의미는 길을 걸어갈 때 두 다리를 쓰는 면양(綿羊)이나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쫓아가서 잡으로 다니는 성노예와 가축으로서, 저녁에는 사병들의 간음의 대상으로 제공되었다가 낮에는 잡아서 삶아 먹었다는 말이다. 갈족의 한족에 대한 피의 댓가는 실제로 너무 커서 태자 석수(石邃)는 그의 아비 석호(石虎)에 비하여 또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도록 하나게 한다. 만약 석호를 잔폭황음(殘暴荒淫)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이 20여 세의 청년은 기껏해야 변태(變態)라고만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자기의 관부에서 빈둥거리면서 무료할 때에는 칼을 들고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는데, 자기의 시녀를 만나기라도 하면 그녀의 머리를 두 동강으로 내버리고, 피자욱을 깨끗이 닦고, 거기에 쟁반을 놓고 그 안에 공예품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구경을 시키곤 하였다. 가장 사람들로 하여금 불가사의하게 하는 것은 이 악마가 필경에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그가 약탈하여 데리고 온 한족 여자를 비구니로 만들고, 얼굴이 헤반죽한 여자라도 만날라치면 바로 그녀를 강간해 버리고 그런 다음에, 바로 저 지지리도 운이 없는 비구니의 몸에서 살을 베어 내어 소와 양고기와 섞어서 끓인 이런 음식을 부하 장수들에게 먹게 하면서 그들에게 무슨 재로로 만들었는지 알아 맞추어 보라고 하였단다. 갈족이 건립한 갈조(?趙) 정권 통치하에는 일찍이 웅진성한(雄秦盛漢)의 한민족은 더 이상 어찌 해 볼 수 없는 멸족의 지경을 겪게 되었다.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 염민(?閔)이란 사람이 누구인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다음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
염민(?閔)(대략 322~352),어떤 문헌에서는 양민(梁閔)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자는 영증(永曾), 어렸을 때 자는 자노(棘奴)였다. 위군(魏郡) 내황인(內黃人)으로 한족이다. 서기 350년에 중국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기에 염위(?魏) 정권을 세웠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오랑캐들을 도살하도록 명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곧 살호령(殺胡令)으로, "안팎의 육이(六夷)로서 감히 병장기를 든 자는 참하라!"라고 하여 한민족을 구원해 낸 항호영웅(抗胡英雄)이요, 용맹으로 널리 알려졌다. 대혼전중, 갈족과 흉노와의 피비린내나는 민족보복 중에 기본적으로 다 죽여 없애라는 살인명령이었다. 기원 352년에 모용준(慕容儁)에게 붙잡혀 알형산(??山)에서 목베였고, 나중에 무도천황(武悼天皇)으로 추봉되었다.
각설하고, 염민(?閔)이 갈조(?趙)를 멸망할 때 중원의 한인은 대략 400만 명(서진의 인구 2천만 명)쯤 남아 있었는데 염민은 업의 도성을 해방시킨 뒤 일차로 포로로 붙잡혔던 한인 여자를 구한 것이 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한족 여자들은 갈족인들에게 쌍각양(雙脚羊)으로 간주된 길러진 가축으로 언제 어디서나 간음을 하였고, 그 즉시 도살되어 끓여 먹히는 대상이었다. 당시 풀려난 5만여 명의 소녀들은 오갈 데가 없어 염민이 떠맡고 있었다. 나중에 염민(?閔)이 모용선비에게 쫒겨 나면서 업성(?城)이 점령이 되어 또 이 5만 명의 소년들은 또 전부 식인악마 묘용선비의 수중에 떨어졌다. 모용선비가 간음하고 능욕을 하여 또 이 5만 명의 소녀들은 갈족의 마수를 벗어나자마자 불쌍한 소녀들은 군량으로 충당되고 말았다.
수천년 북방민족의 노예생활한 열등한 중국인들 그리고 인육
한나라가 망하고, 삼국시대 이후, 사마씨에 의해서 진나라가 성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나라는 곧 이민족들에게
패퇴하여 남부지역에 자리잡게 됩니다. 이 시기를 일컬어서 동진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동진은 곧 망하고
이민족들에 의해서 5호 16국 시대가 개막됩니다.
동진이 망한 420년부터 오랑케 출신이 세운 수나라가 창건,된 후, 망한 618년까지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당나라가 들어섰으나, 당나라를 세운 이연도 이민족인 선비족 출신입니다.
즉, 중국역사 420년부터 당나라가 망하는 907년간 총 487년간 한^족은 이민족의 노예였습니다. (420년~907년 487년간)
그러나 여기에서 중국의 노예역사는 그치지 않습니다.
당나라가 망하자 5대10국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데 5대 10국의 주축세력은 돌궐족이었습니다.
다시 907년에서 960년 송나라가 세워지기전까지 53년의 노예 역사가 추가 됩니다. (907년~960년 53년간)
지금까지 총 540년이 중국역사 중 노예역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540년간의 노예역사를 거치면서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나는 노예이다"라는
정신이 깊숙히 박혀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송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요나라와 금나라에 조공을 받치면서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거란족인 요나라가 907년에서 1125년까지, 여진족인 금나라가 1115년에서 1234까지 존재했으니,
총 327년의 역사가 노예역사로 중국사에 편입되게 됩니다. (907년~1234년 327년간)
이런 오랜 노예근성을 버리고자 송나라는 새로이 세력을 확장하던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노예근성에 찌들어버린 그들은, 마침내 나라까지 이민족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1234년에서 1368년까지 천한 농민의 자식이 세운 명나라가 나타나기 전까지 몽골 이민족의 노예로써
총 1001년간 이민족의 노예로써, 충실하게 살아오게 됩니다. (1234년~1368년 134년간)
곧이어 명나라가 나타나지만 명나라 1368년에서 1644년까지 276년간은 노예들에게는 과분한 기간이었습니다.
여진족은 이들 노예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갖는것을 용서치 못하여 곧바로 이들 노예들을 응징하러 갑니다.
이로 인해서 또다시 이민족 여진족에 의해서 명나라는 멸망하고, 중국에는 청나라가 세워지게 되어 그후,
1644년에서 1911년까지 267년간을 노예로 살게 됩니다. 여기까지 총 1268년간 노예들의 역사가 이어져 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패퇴하고난 뒤 (1644년~1911년 267년간)
20세기초부터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홍콩,까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내륙일부 지역이 일본에게 정렴당하고 1931년에는
일본에 의해서 만주국이 세워지기까지 합니다. 1945년 일본세력이 물러나기까지 34년간의 노예역사가 추가됩니다.
물론 여기서 노예역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홍콩은 영국에 의해서 156년간, 마카오는 1999년까지 포르투갈에 의해서
통치되었습니다. 뭐~ 이거는 예의상 노예역사에서 빼주겠습니다. (1911년~1945년 34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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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화(五胡亂華)와 쌍각양(雙脚羊)은 무엇인가
오호란화(五胡亂華)란 오호(五胡)가 중국을 혼란시켰다는 말이다. 오호(五胡)란 다섯 오랑캐를 말하는데 동진시대 중원에 침임한 흉노(匈奴) · 갈(?) · 선비(鮮卑) · 저(?) · 강(羌)의 다섯 종족을 말한다.
동물은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다. 두 다리를 가진 양은 무엇일까.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쌍각양(雙脚羊)에 대해서는 후술할 영가지란(永嘉之亂)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여기서는 인터넷에 소개된 "《우리는 중국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일막인 오호난화(五胡亂華) 시대, 중국인의 천년 악몽을 고발한다》는 글을 통해서 쌍각양(雙脚羊)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글을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서기 316년, 사마씨(司馬氏)가 건립한 서진왕조는 팔왕의 난(八王之亂)을 거치면서 국력의 손실이 막대하고 허약으로 감당할 수 없어 최종적으로 흉노인들에 의해 나라가 멸망되었다. 북방과 서역의 각종 호족 세력들은 천하가 크게 혼란한 틈을 나서 중원을 침입, 한민족을 마구 도살하고, 한인들을 마치 개만도 못하게 취급당했는 바, 역사상 기록하기를 "북지의 창량(滄凉: 강이름)은 의관(衣冠: 관료, 사대부)의 남천으로 호적들이 온 땅을 뒤덥고 한가(漢家)의 자제들은 이제 바야흐로 거의 다 도륙될 운명에 처해 있다.(北地滄凉, 衣冠南遷, 胡狄編地, 漢家子弟, 幾欲被數屠殆盡。"라고 하였다.
변경에 침입해 온 호족 중에 갈(?) · 백흉노(白匈奴) · 정령(丁零) · 철불(鐵弗) · 노수호(魯水胡) · 선비(鮮卑) · 구대석호(九大石胡) 등 부락의 주동 세력 중에는 금발벽안(金髮璧眼)의 백인종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들 미개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지역에서 온 야만의 호족들인지라 아직도 원시의 식인 야만성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갈족(?族) · 백종흉노(白種匈奴) · 선비족(鮮卑族) 3족은 가장 흉악하였다. 우리들 가운데 벌써 노신(魯迅)의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읽은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중국의 수천년의 봉건도덕으로 "吃人(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뜻) 이란 두 글자에 대하여 개괄하고 있다. 이러한 "吃人"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을 잡아 먹는 사람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중국에서 사람을 잡아 먹는 것은 그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춘추시대 때, 제나라의 역아(易牙)는 자기의 아이로 요리를 만들어 제환공(齊桓公)에게 드렸고, 당나라 때 장순(張巡)이 수양(?陽)의 군수를 하면서, 먹을 양식이 다 떨어져을 때 사람을 잡아 먹었다고 하고, 황소(黃巢)의 반란 때에도 사람을 잡아 먹었다고 한다. 일부 성지(城池: 성)가 포위되어 사람들이 배고픈 것을 참을 수 없으면 아들을 바꿔서 잡아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극히 이례적인 것으로 간혹 소수 통치자의 미친짓, 혹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오호란화(五胡亂華)라고 하는 중국과 인류 역사사상 가장 암흑시대에는 도리어 허다한 사람들이 대규모로 도살이 되어 삶아 먹혔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서기 304년에, 모용선비(慕容鮮卑)는 중원을 크게 약탈하여, 무수한 재부를 강탈해 가고, 또 수만 명의 한족(漢族) 소녀들을 약탈해 갔다. 회군 도중에 마구 간음을 하고, 동시에 이러한 소녀들이 군량으로 충당, 도살하여 끓여 먹었다. 하북 역수(易水) 가에 이르렀을 때, 잡아 먹고 남아 있던 8천 명의 소녀들이 있었는데, 모용선비는 이들을 한꺼번에 먹어 치울 수도 없고, 게다가 놓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드디어 그 8천 명의 소녀들을 전부 물에 빠뜨려 죽여 역수(易水)가 이 때문에 흐름이 끊어졌다고 한다.
갈족(?族)으로 말하자면 정말로 "식인악마(食人惡魔)"라고 할 수 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갈족의 군대가 행군작전을 하면서 양초(糧草: 군량과 마초)를 휴대한 적이 없이, 한족 여자들을 약탈하여 군량으로 삼았는데 갈족은 이를 "쌍각양(雙脚羊)"이라고 하였다. 그 의미는 길을 걸어갈 때 두 다리를 쓰는 면양(綿羊)이나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쫓아가서 잡으로 다니는 성노예와 가축으로서, 저녁에는 사병들의 간음의 대상으로 제공되었다가 낮에는 잡아서 삶아 먹었다는 말이다. 갈족의 한족에 대한 피의 댓가는 실제로 너무 커서 태자 석수(石邃)는 그의 아비 석호(石虎)에 비하여 또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도록 하나게 한다. 만약 석호를 잔폭황음(殘暴荒淫)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이 20여 세의 청년은 기껏해야 변태(變態)라고만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자기의 관부에서 빈둥거리면서 무료할 때에는 칼을 들고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는데, 자기의 시녀를 만나기라도 하면 그녀의 머리를 두 동강으로 내버리고, 피자욱을 깨끗이 닦고, 거기에 쟁반을 놓고 그 안에 공예품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구경을 시키곤 하였다. 가장 사람들로 하여금 불가사의하게 하는 것은 이 악마가 필경에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그가 약탈하여 데리고 온 한족 여자를 비구니로 만들고, 얼굴이 헤반죽한 여자라도 만날라치면 바로 그녀를 강간해 버리고 그런 다음에, 바로 저 지지리도 운이 없는 비구니의 몸에서 살을 베어 내어 소와 양고기와 섞어서 끓인 이런 음식을 부하 장수들에게 먹게 하면서 그들에게 무슨 재로로 만들었는지 알아 맞추어 보라고 하였단다. 갈족이 건립한 갈조(?趙) 정권 통치하에는 일찍이 웅진성한(雄秦盛漢)의 한민족은 더 이상 어찌 해 볼 수 없는 멸족의 지경을 겪게 되었다.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 염민(?閔)이란 사람이 누구인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다음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
염민(?閔)(대략 322~352),어떤 문헌에서는 양민(梁閔)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자는 영증(永曾), 어렸을 때 자는 자노(棘奴)였다. 위군(魏郡) 내황인(內黃人)으로 한족이다. 서기 350년에 중국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기에 염위(?魏) 정권을 세웠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오랑캐들을 도살하도록 명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곧 살호령(殺胡令)으로, "안팎의 육이(六夷)로서 감히 병장기를 든 자는 참하라!"라고 하여 한민족을 구원해 낸 항호영웅(抗胡英雄)이요, 용맹으로 널리 알려졌다. 대혼전중, 갈족과 흉노와의 피비린내나는 민족보복 중에 기본적으로 다 죽여 없애라는 살인명령이었다. 기원 352년에 모용준(慕容儁)에게 붙잡혀 알형산(??山)에서 목베였고, 나중에 무도천황(武悼天皇)으로 추봉되었다.
각설하고, 염민(?閔)이 갈조(?趙)를 멸망할 때 중원의 한인은 대략 400만 명(서진의 인구 2천만 명)쯤 남아 있었는데 염민은 업의 도성을 해방시킨 뒤 일차로 포로로 붙잡혔던 한인 여자를 구한 것이 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한족 여자들은 갈족인들에게 쌍각양(雙脚羊)으로 간주된 길러진 가축으로 언제 어디서나 간음을 하였고, 그 즉시 도살되어 끓여 먹히는 대상이었다. 당시 풀려난 5만여 명의 소녀들은 오갈 데가 없어 염민이 떠맡고 있었다. 나중에 염민(?閔)이 모용선비에게 쫒겨 나면서 업성(?城)이 점령이 되어 또 이 5만 명의 소년들은 또 전부 식인악마 묘용선비의 수중에 떨어졌다. 모용선비가 간음하고 능욕을 하여 또 이 5만 명의 소녀들은 갈족의 마수를 벗어나자마자 불쌍한 소녀들은 군량으로 충당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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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유목민족은 한족에 대해 '여자,식량' 에 주관심
2. 중국여자는 수천년 이민족남자 위안부 신세
3. 인육도 행해짐
짤방은 열심히 이시각에도 한국에서 몸파시는 중국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