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열정적 혁명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지사(志士)

참의부201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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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나라의 사회가 겪는 많은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상류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부족에 있다. 영국의 명문학교 이튼스쿨 출신 귀족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자녀들을 군에 입대시켜 전쟁에 참전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 지도층은 전시에는 물론 평화시에도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다. 게다가 재벌들은 대기업의 경제적 이윤에 눈이 멀어 산업의 생산과 시장을 지배하여 독점자본을 확산,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을 몰락시키고 소득분배의 불균형과 자원배분의 비효율성을 야기시키며 고용률을 떨어뜨리는 탐욕과 횡포로 내수경제를 침체시키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조선왕조가 망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사회 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부족이었다. 물론 민영환(閔泳煥)·홍만식(洪萬植)·박승환(朴昇煥) 등 나라가 망하자 스스로 목숨을 던진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5백년 장구한 사직(社稷)의 지배층치고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이들이 너무 적었다. 평양대에 소속된 군졸 김봉학(金奉學)과 시골의 유생이었던 매천(梅泉) 황현(黃玹) 등의 순절이 더욱 빛나는 이유도 이들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을 돌아보면 기가 막히는 이유도 나라를 망하게 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상을 받은 사회 지도층이 너무 많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1910년 10월 7일 이른바 합방(合邦)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하는데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등 모두 76명이나 되었다. 이들 대부분이 합방 공로작이 아니라 나라와 운명을 같이해야 할 신분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이회영의 사돈 조정구(趙鼎九)나 민영달(閔泳達)처럼 수작을 거부하고 자결을 시도한 인물들도 없지는 않으나 대부분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생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고종명(考終命)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 역시 오늘날까지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잇고 있으니 한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가족의 집단 망명

 

일제(日帝)의 대한제국 병탄(倂呑)에 협조·기여한 공로로 작위를 받는 사람들이 일제로부터 받은 훈작(勳爵)과 상금의 희열에서 채 깨지 못한 그 해 12월, 한겨울의 혹한 속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40여명의 대가족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일가였다. 그때 이회영의 나이 이미 44세였다. 그의 형 이건영(李健榮)·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과 두 동생 이시영·이호영(李護榮) 가족도 포함한 대가족이었다. 이 대가족은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망하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혹한의 만주행을 결행한 것이다.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李裕承)은 고종(高宗) 때 이조판서를 역임했지만 이회영은 고종이 탁지부 주사를 제수했을 때 완강히 사양한 데서 알 수 있듯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의 멸망과 운명을 같이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온 형제를 설득해 전가족 집단 망명이라는 희귀한 사례를 만들어냈다.

 

그는 비록 벼슬하지 않은 백신(白身)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유원(李裕元)을 비롯해 영조(英祖) 때의 영의정 이종성(李宗城), 선조(宣祖) 때의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등이 있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이었다. 이회영은 비록 벼슬은 사양했지만 바로 이 삼한갑족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기 위해 전가족 집단 망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회영 일가가 집단으로 이주한 이유는 만주 지역에서 군사학교를 꾸리기 위해서였다. 만주 지역에 군사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은 1907년 발족한 비밀결사단체 신민회(新民會)의 구상이었다. 이회영은 신민회의 창설 멤버이자 핵심 멤버였다. 신민회는 해외에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건설해 적당한 때를 이용해 항일독립전쟁을 일으켜 무력(武力)으로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회영은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그곳에 망명중인 평생지기 이상설(李相卨)을 만나 국내에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고 만주에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후 신민회를 조직하고 군사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만주행을 결정한 것이다.

 

드디어 1910년 8월 일제가 합방이라는 명목 아래 국권을 강탈하자 이회영은 신민회원들과 협의해 전가족을 이끌고 만주행을 단행했다. 이때 이회영은 가산을 모두 정리해 거금 40만원이란 현금을 마련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씩 했으니 쌀값이 당시보다 상대적으로 눅은 지금의 비율로 따져도 5백억~6백억원은 되는 거금이었다. 

 

이들이 자리 잡은 곳은 압록강을 건너 통화(通化)를 지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 서쪽의 추가가(鄒家街)였다. 추씨가 토호로 있는 지역이라 추가가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일제의 감시 때문에 국경을 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신의주에서 동지 이선구(李宣九)가 주막으로 위장한 비밀연락소에서 몇 시간 머무르다 새벽 세시쯤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 압록강을 건넜다. 한겨울의 살을 에는 압록강을 건너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황도촌(黃道村)을 거쳐 도착한 추가가는 그러나 이회영 일가를 반기지 않았다. 심지어 현지인들은 ‘한국인들에게 토지나 가옥의 매매를 일절 거부하고, 한국인들의 가옥 건축이나 학교 시설도 역시 금지하며, 한국인과의 교제까지 금지하자’고까지 결의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중국군 병사들이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무기가 있는지 조사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회영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회영은 봉천(奉天)으로 가서 동삼성(東三省) 총독 조이손(趙爾巽)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이손은 이회영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 이회영은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일개 망명객이 중국의 총리대신 원세개(袁世凱)를 만나려는 무모한 계획은 예상과 달리 성사되었다. 원세개가 국내에 있을 때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의 집에 들르는 등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한국인들이 집단으로 만주로 이주한 이유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면서 협조를 요청한 이회영에게 원세개는 “이 대인은 한국의 참다운 의사(義士)이십니다”라고 답하면서 자신이 신임하는 비서 호명신(胡明臣)로 하여금 이회영을 동반해 동삼성 총독을 찾아가도록 했다.

 

원세개의 전갈을 들은 조이손은 비서 조세웅(趙世雄)을 보내 회인(懷仁)·통화·유하의 세 현장(縣長)에게 서간도 일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사업과 생활에 협력하고 편의를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총독의 명령을 받은 세 현장은 ‘한국인들과 친선을 도모하고 분쟁을 야기하지 말 것과 이를 위반할 경우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의 게시문을 붙였다. 드디어 만주에서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었다.

 

◆ 독립군의 배출지, 신흥무관학교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이듬해인 1911년 4월 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 등과 협의해 유하현 삼원보 고산자(孤山子)에서 노천(露天) 군중대회를 열고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경학사는 표면적으로 재만한인(在滿韓人)들의 자치단체를 표방했으나 실상은 민족 독립을 위한 혁명단체였다.

 

경학사는 설립과 아울러 그 산하에 군사학교를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추가가에서 현지인들이 의심하던 시기여서 옥수수를 저장했던 허술한 빈 창고에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1911년 음력 5월경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외부에는 현지인과 일제 관헌의 의혹을 피하려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곳은 만주에서 한국인들에게 군사 교육을 시킨 효시로서 중대한 의미가 있다.

 

우당이 원세개를 만난 후에도 추가가는 추씨들이 여러 대를 누리고 살던 곳이라 토지를 팔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추가가 인근의 삼원보가 교통의 요충지여서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지역을 물색했다. 여러 지역을 물색한 결과 통화현에서 1백여리 떨어진 합니하(哈泥河)가 적당한 지역으로 떠올랐다. 둘째 이석영이 2만석 토지를 매각한 자금을 대 1912년 7월 합니하에 새로운 교사가 신축되어 낙성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이전의 옥수수 창고에 비하면 군사 훈련을 시킬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군사학교로 발전한 것을 뜻했다.

 

신흥무관학교에는 중학반과 군사반이 있었는데, 곧 중학반은 폐지해 인근 중학에 인계한 후 군사반에 전력을 기울였다.

 

신흥무관학교는 국내와 만주 각지에서 애국 청장년들이 몰려들어 1919년에는 유하현 고산자가(孤山子街)로 이전했는데, 1920년 가을 폐교될 때까지 약 3천 5백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졸업생의 대부분은 독립군에 입대했다.

 

1920년에 벌어졌던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청천(李靑天)·김경천(金擎天)·신팔균(申八均) 등이 중국으로 망명, 교관이 되어 일본 육군사관학교 생도들과 똑같은 정규 교육을 이들에게 시켰기 때문에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군부(義軍府)·신민단(新民團)·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등의 독립군 장병들이 일본의 정규군 3천여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힐 수 있었다. 전투에 참가한 대원들 중 상당수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고, 이들은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용사들이 참전했기에 일제(日帝)의 정예군을 상대로 전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이청천은 사관생도 3백여명을 인솔하고 안도현(安圖縣) 산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洪範圖)의 부대와 합세하였고,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부대를 뒤따라 밀산(密山)에 도착해 여기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편성에 참여했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없었다면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극일승전(克日勝戰)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 국내 잠입

 

1911년과 1912년 잇따라 흉년이 들면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커다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수많은 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군사학교를 꾸리는 일은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1913년 초 수원에 사는 동지 맹보순(孟普淳)으로부터 이회영·이동녕·이시영·장유순(張裕淳)·김형선(金炯善) 등을 체포하거나 암살하기 위해 형사대를 만주로 파견하거나 속히 피신하라는 비밀 연락이 왔다. 이동녕은 불라디보스토크로 가 이상룡과 합류하기로 했으며 이시영은 봉천으로 갔다. 그러나 우당은 다시 특유의 정면 돌파 수법을 택했다. 기왕 위험할 바에야 도망다니느니 국내로 잠입해 자금을 마련하겠다며 비밀리에 귀국했던 것이다. 국내 잠입에 성공한 우당은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자금을 모금했으나,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잠행하는 동안 종로경찰서에 귀국 사실이 탐지돼 우당은 결국 체포되었다. 우당이 만주로 간 것은 농장 개척을 위해서이며, 귀국한 것은 도적이 선영(先塋)의 나무를 도벌했기 때문에 묘소를 수리하기 위해서라고 맞섰다. 일본 경찰관들이 우당의 이 말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별다른 증거가 없었고, 명문가의 후손인 그를 증거도 없이 무작정 구속할 수도 없어서 석방한 후 감시를 계속했다. 

 

그 후 일본 경찰관들은 1915년 8월 20일경 또 다시 우당을 체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사흘간 휴교하면서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주도면밀한 우당은 아무런 증거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3주일만에 석방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가 우당을 석방한 이유는 명문가 집안의 귀족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이 일반에 알려질 경우 많은 사람이 동요할 것이란 점을 고려해 석방했을 것이란 얘기다.

 

◆ 고종의 망명을 시도하는 극비 계획

 

우당은 이런 상황에서 움츠러들기는커녕 그만이 추진할 수 있는 묘책을 생각해냈다. 바로 고종을 망명시키는 일이었다. 고종을 해외로 출국시켜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이었다. 우당이 국내에 잠입해 비밀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둘째 아들인 이규학(李圭鶴;이종찬(李鍾贊)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의 부친)도 국내로 잠입했는데, 이때 이규학을 조정구의 딸 조계진과 결혼시켰다. 조정구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사위였으므로, 딸인 조계진은 고종의 외조카가 되는 셈이었다. 고종의 망명 계획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15년경 이상설을 중심으로 망명 계획이 추진되었는데, 이를 위해 국내에 잠입한 성낙형·김사준 등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다.   

 

우당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을 통해 의사를 타진하자 고종은 선뜻 망명 계획을 승낙했다. 고종이 해외 망명이란 위험한 길을 선뜻 받아들인 것은 고종이 해외 망명이란 위험한 길을 선뜻 받아들인 것은 합방이란 명목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도 외에 태자이자 순종(純宗)의 동생인 영친왕(英親王)을 일본의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와 혼인시키려 하는 일제의 의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것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고종이 측근인 민영달에게 망명 결심을 알리자 민영달은 “황제의 뜻이 그렇다면 분골쇄신(粉骨碎身)하더라도 따르겠다”며 거금 5만원을 내놓았다. 민영달은 호조판서와 좌참찬 등을 지낸 후 일본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자 항의 사직하고 일본 정부가 내린 남작 작위도 거부했고 5만원은 베이징에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마련할 자금이었다. 베이징 행궁은 우당이 물색하기로 역할 분담을 했다.

 

고종이 망명하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커다란 파장이 일 사건이었다. 이른바 한국병탄의 허구성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국내에서는 목숨 건 봉기가 일 것이었다. 해외의 군주제 국가에서는 황제가 망명해 세운 망명정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고종이 망명해 일제와 맺은 병탄 조약은 강제에 의한 무효라며 만백성이 일어나 일제와 싸우라는 개전 조칙을 내린다면 조선 전역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질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금이 준비되고 행궁 마련 계획까지 세워져 구체화되던 고종의 망명 계획은 의외의 사태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고종이 갑자기 급서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고종(高宗)이 사망한 1919년 1월에 열린 국민대회에서 “그들(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 관료들)은 출로가 막히자 후일을 두려워하여 간신배를 사서 시해하기로 하였다. 윤덕영과 한상학 두 역적을 시켜 식사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올려 시해했다”고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데서 알 수 있듯 독살설은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있었다. 고종의 급서가 전 국민적 항거가 일어나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데서 알 수 있듯 우당의 계획대로 고종의 망명이 성공했다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다.

 

◆ 베이징으로의 재차 망명

 

고종 망명 계획이 무산되자 우당은 1919년 2월경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출국했다. 망명 전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만나 국내외에서 대규모 시위와 조직을 건설하기로 의논하고 준비차 미리 베이징으로 떠난 것이었다. 우당은 베이징에서 동생인 이시영과 이동녕을 만났는데, 이때 비로소 이상설(李相卨)이 1917년 니콜리스크에서 죽은 사실을 알고 밤새 통곡하며 “운명(運命)이여!”라고 부르짖었다고 전한다.

 

국내에서 드디어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우당은 이시영·이동녕·현순(玄楯) 등과 함께 상하이로 가기로 했다. 상하이에는 국내를 비롯해 러시아와 간도, 일본 등에서 온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었다. 우당은 상하이에서 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조성환(曺成煥)·손정도(孫貞道) 등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같은 지인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안에 대해 의논했다.

 

이 과정에서 우당은 임시정부를 구성하려는 당시의 대세와 다르게 정부 조직을 만드는 것을 반대했다. 우당은 정부라는 행정적 조직 형태보다 각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복과 마찰 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조직을 세우자고 주장했다. 이런 조직은 정부라는 행정 조직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정부라는 조직 형태를 취하면 정부 내의 지위와 권력을 다투는 내분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도 정부 조직을 반대한 이유 중 하나였다. 상황은 우당의 우려대로 돌아갔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출범한 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도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가 세워지고, 이 두 임시정부가 정통성에 대해 다툼을 벌인 것이다. 우당은 정부라는 조직 형태를 취한 것이 바로 이런 내분으로 이어졌다며 각 독립운동 단체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게 조정하는 독립운동 지휘부를 만들자고 거듭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해 5월 중순 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하고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우당은 베이징의 자금성 뒤 거대한 고루(鼓樓) 근처인 후고루원의 소경창이란 곳에 거처를 정했다. 뒤이어 조소앙(趙素昻)·조성환(曺成煥)·박용만(朴容萬)·김원봉(金元鳳)·이광(李光) 등 독립운동가들이 베이징으로 모여들었다. 베이징에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한 그룹이 형성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박찬익(朴贊翊)을 특사로 파견해 이들을 설득했고, 약 반년간에 걸친 설득 끝에 이시영·이동녕·조완구 등은 1923년경 다시 상하이로 갔으나 우당과 단재는 끝내 상하이 행을 거부했다. 이것이 바로 우당이 그 역할이나 치열했던 삶에 비해 일반에 알려지지 않게 된 주된 요인이 되었다.

 

우당은 평생 감투 쓰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임시정부로 갔다면 그 비중으로 미루어 볼 때 동생 이시영이 선임된 초대 법무총장 이상의 자리가 돌아갔겠지만 그는 끝내 상하이 행을 거부하고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 베이징의 아나키스트들

 

우당의 거처는 베이징을 드나드는 독립운동가들이 반드시 들르는 요지가 되었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이곳에서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乙奎)·백정기(白貞基)·정현섭(鄭賢燮)·류자명(柳子明) 등 젊은 아나키스트들과 만나 아나키즘에 뜻을 같이한다. 이 무렵 국내에 잠입해 거대 사건을 일으키려다 체포돼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의열단(義烈團) 출신 유석현(劉錫鉉)도 베이징에서 우당과 자주 만난 사람이었다. 유석현은 권총 5정과 폭탄 36개, 독립선언문 3천장을 휴대하고 비밀리에 입국에 조선총독부·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차례로 폭파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인물이다. 우당의 베이징 집에 여러 달 거주했던 문학인 심훈(沈熏)은 “…만두 한 조각 얻어먹고/긴긴 밤을 달달 떠는데/고루에 북이 운다/뎅뎅 종이 운다”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우당의 베이징 거처는 유석현 같은 열혈 의열단원이나 심훈 같은 시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거쳐 간 곳이었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베이징의 항일독립운동 3거두로 불렸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처를 같이 하다 보니 베이징 시절의 우당 이회영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한 달에 들어가는 쌀만 해도 많을 때는 열 가마가 넘게 들어갔다고 하니 부식이나 다른 것들을 합치면 막대한 자금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에게 밥값을 받을 수도 없어 외상이 늘어갔고, 나중에는 2천~3천원의 거금이 되어 도저히 갚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25년에는 빚 받기를 포기한 중국 상인이 스스로 빚을 탕감해 주기까지 약 2년간 우당의 둘째 딸 이규숙과 넷째 아들 이규창은 중국 상인에게 갖은 욕설과 구타까지 당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당의 항일독립운동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베이징 거처에는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과 류자명도 자주 드나들었는데 약산은 그 유명한 의열단의 단장이었고, 류자명은 의열단의 참모격이었다. 단재가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작성하게 된 소이(所以)도 류자명의 부탁을 받아 한 일이었다.

 

우당은 젊은이들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1924년 4월 말에는 이을규·백정기·류자명·정현섭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고 기관지「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했다.「정의공보」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한편 당시 해외 독립운동에 큰 파장을 일으킨 흥사단(興士團)의 무실역행론(務實力行論)의 부작용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1921년 이래 독립운동 전선에서 이탈해 일제에 투항하는 자들이 속출했는데 이들이 투항하는 이론적 근거가 무실역행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이석영의 첫째 아들 이규준과 우당의 둘째 아들 이규학, 그리고 류자명 등이 다물단(多勿團)이란 조직을 만들었는데, 우당이 이 조직의 이념과 조직 요령을 지도했다. 우당은 유흥식과 상의해 베이징에서 의열단과 다물단이 합작하도록 지도했다. 다물단은 1925년 일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해 중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김달하는 중국 단기서(段祺瑞) 정권의 고관으로 있는 한국인이자 친일파였는데 다물단이 처단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우당의 딸 이규숙이 1년 동안 공안국에 구류되었고, 이규학은 상하이로 탈출했다.

 

1925년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아들 이규학은 격일로 딸 둘을 잃는 비극을 겪었으며, 김달하가 피살된 이후 공안국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발이 꽁꽁 묶여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우당과 함께 지낸 아들 이규창은 이 시절을 “일주일에 세 번 밥을 지어먹으면 운수가 대통한 것”이라고 회상할 정도로 궁핍에 시달렸다. 이규창은 이때 아버지인 우당이 달 밝은 밤에 밥도 굶은 상태에서 퉁소를 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우당의 부인 이은숙은 1925년 7월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두 사람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 톈진에서의 나날들

 

우당은 1926년 톈진[天津]으로 이주했다. 성암(星巖) 이광(李光)이 하남성(河南省) 군벌 독판(督瓣) 호경익(胡景翼)의 행정고문으로 취임하면서 자금을 일부 가져왔던 것이다. 톈진의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에서 집 두 채를 구해 한 채는 우당과 넷째 아들 이규창이 살고 다른 한 채에는 이을규·정규 형제와 정현섭·백정기 등 상하이에서 오는 아나키스트들이 묵게 되었다. 이들은 톈진으로 10여정의 권총을 반입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톈진에서도 곧 극심한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활동 계획도 중국 내 사정으로 연기되고 보니 동지들도 베이징과 상하이로 떠나고 말았다. 혼자 남은 이회영 일가는 집세가 비싼 프랑스 조계를 떠나 대흥리로 이사했다.

 

이때 혼자 남은 우당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말해 주는 기록이 있다. 베이징으로 갔던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은 상하이로 가기 위해 톈진의 우당 거처를 방문했다가 이런 회상을 남긴다.

 

“남개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규숙의 옷까지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우당은 이런 톈진에서도 피신해야 했다. 1926년 12월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폭탄을 던지고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의 일본인 사원 6명을 총살한 뒤 일본인 경찰관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에 나석주가 사용했던 권총은 우당이 류자명으로부터 받아 보관했던 것이므로 일제의 수사망이 언제 덮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우당의 두 딸은 톈진의 빈민구제원에 맡기고 아들 이규창과 함께 걸어서 상하이로 수천리 길을 향했다. 이때 하북성(河北省)을 지나 산동성(山東省) 제남시(濟南市)와 태안부(泰安府)를 거쳐 숙현(宿縣)까지 수천리 길을 걸어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 무렵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주역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사촌동생인 김종진(金宗鎭)이 찾아와 우당과 여러 날 묵으면서 앞으로의 운동 방향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이때 우당은 “장차 독립을 전취(戰取)한 우리 민족은 어떤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까?”라는 김종진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자유·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 국가와 민족 간에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이 섰으면 그 원칙 아래 독립한 민족 자체의 내부에서도 또한 이 자유·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어야 할 테니 국민 상호간에 일체의 부자유·불평등의 관계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 합의로써 활동한 운동자들의 조직적인 희생으로 독립이 쟁취된 것이니 독립 후의 내부적 정치 구조는 물론 권력의 집중을 피하여 지방분권적 지방자치제의 확립과 아울러 지방자치제의 연합으로 중앙정치구조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 관계에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 재산의 사회화를 원칙으로 함과 동시에 사회적 계획 아래 관리되어야 한다. 교육도 사회적으로 공영(公營)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당은 공산주의가 보이고 있는 권력 집중 현상에 대해 강한 비판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우당은 베이징에 있었던 조소앙을 만나 1920년에 소련에 다녀온 그의 견문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 냉혹 무자비한 독재정치가 과연 만인에게 빈부의 차이가 없는 균등한 생활을 보장한다는 이상을 성취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처럼 자유가 없는 인간 생활이 가능할까? 그들이 말하는 평등 생활이 하루에 세 끼 밥을 균등하게 주는 감옥 생활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한 독재권을 장악하고 인민을 지배하는 정치는 옛날의 절대 왕권의 정치보다 더 심한 폭력정치이니 그러한 사회에 평등이 있을 수 없으며, 마치 새 왕조가 세워지면 전날의 천민이 귀족이 되듯 신흥 지배계급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이처럼 공산당의 권력 집중을 반대했던 우당은 김종진에게 “아나키즘은 공산주의와 달라서 획일성을 꼭 요구하는 것은 아니니 그 민족의 생활 습관 또는 전통과 문화적·경제적 실정에 맞도록 그 기본 원리를 살려 나가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 아나키스트들, 이번에는 만주로

 

김종진은 우당의 이런 구상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군관학교를 졸업했으나 중국군에 입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북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터였다. 김종진은 1927년 북만주의 신민부(新民府)에 합류하여 김좌진을 보좌하였다. 약 1년 후인 1928년 상하이에 있던 이을규도 만주로 가서 김좌진과 협의해 신민부를 해체하고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발족시켰는데 김좌진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좌진과 아나키스트들이 연합해 출범시킨 한족총연합회는 빠른 속도로 발전해갔다.

 

이에 아나키스트들은 대거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자금이었다. 이때 국내로 잠입했던 아나키스트 신현상이 미곡상을 경영하는 친지 최석영과 함께 호서은행에서 5만 8천원이라는 거금을 빼내는 데 성공해 베이징으로 왔다. 이 자금은 북만주에서 운동을 전개하는 데 필수적인 자금이 될 것이었다. 국내 신문에는「호서은행 대금(大金) 사기사건」이라고 대서특필됐는데 일제는 이 자금이 해외로 흘러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중국 경찰대를 앞세워 베이징에서 아나키스트들이 회의하던 장소를 덮쳤다. 이때 신현상과 최석영은 물론 이을규·김지강 등 많은 아나키스트들과 톈진으로 가 동정을 알아보라는 우당의 지시를 받고 온 이규창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중국대학을 졸업한 아나키스트 류기석이 당시 베이징 시장 장인우(張藺偶)와 동창이었던 관계로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신현상과 최석영만 국내로 압송되고 나머지는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때 송순보 등이 톈진 일본 조계 내 중심가인 욱가(旭街)의 중·일 합자은행 정실은호(正實銀號)를 강탈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감시가 심한 일본 조계 중심가의 중·일 합자은행을 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비상한 방법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 1929년 장기준·양여주·송순보 등 5인은 권총을 휴대하고 정오에 정실은호에 들어가 은행을 터는 데 성공했다. 이튿날『중국대공보(中國大公報)』등 도하 각 신문에는 백주대낮에 권총강도단이 일본 조계 중심가의 은행을 강탈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질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여서 이들은 빨리 톈진을 떠나 만주로 가기로 했다. 이들이 협의한 후 젊은 동지들은 만주로 가고 노구의 우당 이회영은 상하이로 가기로 했다. 우당은 상하이로 가서 이동녕·조완구, 동생 이시영 같은 과거의 동지와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연합하기 위해 상하이를 택한 것이었다. 그래서 만주는 물론 과거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기반을 다져 놓은 복건성(福建省)에도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려 하였다.

 

이때 우당은 딸 이규숙을 장기준과 결혼시켜 이현숙과 함께 만주로 떠나보내기로 했다. 일제의 감시망이 삼엄하게 펼쳐진 1929년 9월 중순경, 화암과 백정기·오면직·양여주·김동우·장기준 등이 만주로 떠날 때 이규숙과 이현숙이 권총과 폭탄을 몸에 간직하고 북만주 해림으로 간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이들이 가세하자 만주의 한족총연합회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한족총연합회는 농번기에는 동포들의 농사일을 거들었으며, 농한기에는 자녀 교육을 맡는 한편, 지방 조직, 사상 계몽, 생활 개선과 지도에 노력했다. 각 부락을 돌며 강연을 갖고 학생들과 교사들로 극단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하며 상호 부조와 자주·자치의 정신을 고양하면서 이것이 2백만 재만동포의 살길이며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 길이라고 강조한 것이 큰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자 세력 위축을 느낀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제어하기 위해 암살 같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왔다. 공산주의자 김봉환은 수하인 박상실을 시켜 한족총연합회가 수익 사업의 하나로 운영하던 방앗간에 있던 김좌진을 암살하도록 했다. 1930년 1월의 일이었다. 김종진은 아나키스트 엄형순 등과 함게 김봉환을 체포해 처단했으나 독립운동의 거성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한족총연합회는 한편으로는 일제와 맞서 싸우는 한편 공산주의 세력과도 맞서 싸웠다. 그러나 김종진 역시 1931년 8월경 중동선(中東線) 해림(海林)역 부근에서 박내춘·이백호·이익화 등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일제는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만주 일대를 장악해 버렸다. 한족총연합회의 독립운동가들은 일본군의 소탕작전을 피해 목숨을 걸고 만주를 탈출해야 했다.

 

◆ 한·중·일 아나키스트 공동전선

 

우당은 1929년 10월 말경 한이 서린 톈진을 떠나 기선을 타고 일주일 만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비롯해 이동녕·조소앙·조완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우당이 상하이에 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앞길이 한층 더 희망을 지니게 되었다는 환영사를 해 주었다. 우당은 상하이에서 젊은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는 화암 정현섭·류자명·백정기·엄순봉·오면직 등과 더불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했다. 회원들은 우당을 의장으로 추대했으나, 우당은 이 조직은 젊은 동지들이 이끌어 가야 할 것이라고 사양하며 류자명을 대신 추천해 그가 의장이자 대외책임자가 되었는데, 남화한인청년연맹은 기관지「남화통신」을 발간했다.

 

한편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점령함에 따라 중국 내에 항일투쟁의 기운이 더욱 드높아갔고, 이를 계기로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이 공동전선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높아갔다. 드디어 그해 10월에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결성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이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우당이 의장이 되어 열린 회의에는 화암·류자명·백정기 등 한국인 동지 7명과 왕아초(王亞樵)·화균실(華均實)·천리방(千里芳) 등 중국인 동지 7명, 그리고 전화민(田華民)이란 가명을 쓰는 일본인 사노와 오수민(吳秀民)이란 가명을 쓰는 또 한 명의 일본인 이츠카 등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였다. 항일구국연맹은 선전·연락·행동·기획 등 5개 부를 두었는데, 우당은 중국인 왕아초와 함께 기획위원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중국 육군 제19로군의 배후실력자인 왕아초가 재정과 무기 조달을 책임지기로 한 것이었다.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의지는 있었으나 무기와 자금이 없어 커다란 애로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항일구국연맹은 프랑스 조계 밖의 중국 거리와 조계 안에 인쇄공장과 미곡상을 차려 일제의 눈을 속이고 비밀리에 행동했다. ‘적의 군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조사와 파괴, 적의 요인 암살, 중국인 친일분자 숙청’ 등의 행동 방침을 정한 이들은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들은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라 불리며 일제를 공포에 떨게 했다.

 

중국인 화균실과 한국인 이용준, 그리고 일본인 사노 등은 상하이 북역에서 대일굴욕외교의 주역으로 지목된 국민당의 외교부장 왕정위(汪精衛)를 저격했으나 총상만 입히는 데 그쳤으며, 복건성 천주(泉州)의 동지들과 연합하여 샤먼[廈門]의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던지기도 하였다.

 

백정기·원심창·이강훈 등은 중국인 동지 천리방, 전화민이란 이름의 중국인으로 위장한 일본인 이츠카 등과 함께 일본군의 화북(華北) 수송 요충인 톈진으로 폭탄과 권총을 반입해 갔다. 1932년 1월 톈진의 일청기선부두(日淸汽船埠頭)에서 일본군 병사들과 군수물자를 싣고 입항한 1만 톤급 기선에 시한폭탄을 설치해 선체를 파괴하고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또한 톈진의 일본 영사관에도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폭파시키고 일본 헌병 4~6명을 사살했다. 일본군 병영에도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되고 말았다. 이런 행동들은 항일구국연맹의 활약이라고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이런 눈부신 활약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32년 2월 일제가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략하자 중국 육군 제19로군이 강력히 저항하면서 일본군에 타격을 가했다. 그러자 일본은 남경(南京)의 국민당 정부에 압력을 넣어 19로군의 해산과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본국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大將)이 1만여명의 지원병력을 이끌고 군사력을 증강했고, 결국 고립무원의 19로군은 패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제의 군부는 이 승전을 기뻐해 일왕(日王)의 생일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겸한 승전축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이 행사에는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과 남화한인청년연맹 측에서 각각 투탄의거(投彈義擧)를 준비했는데, 한인애국단원 윤봉길(尹奉吉)은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입장한 데 비해 남화한인청년연맹 측의 백정기는 중국인 왕아초가 구해주기로 했던 입장표를 끝내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동안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고위 간부들을 처단해 버렸다.

 

이 의거는 한국인들의 반일 의지를 드높인 쾌거였으나 일제의 상하이 점령 자체를 무위로 돌릴 수는 없었다. 항일구국연맹의 왕아초는 19로군과의 관계 때문에 남경정부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고, 국민당 비밀조직 남의사(藍衣社)의 두월생(杜月笙)과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왕아초와 화균실은 끝내 홍콩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는 결국 항일구국연맹의 재정과 무기 조달에 결정적인 약화를 가져왔다.

 

◆ 운명의 다롄 행(行)

 

그러나 우당 이회영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우당은 화암과 함께 중국 국민당의 거물로 역시 아나키스트였던 이석증(李石曾)·오종휘(吳鍾暉)를 찾아가 항일투쟁을 계속할 수 있게 협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석증과 오종휘는 우당의 협조 요청에 흔쾌히 동의하면서 만주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했다. 만주에는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으니 만주에서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 같은 의열투쟁을 전개한다면 광범위한 한·중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며 장래에 중국 정부도 만주를 당연히 한국인들의 자치구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에 우당은 “한·중 공동전선 결성은 가능하지만 무기와 재정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이것이 없다는 것을 그대들이 잘 알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이석증과 오종휘는 “그대들처럼 물욕과 영예를 모르는 담백한 아니키스트들이 중심이 되어 싸울 결심이 있다면 우리가 동북군의 장학량(張學良)에게 연락해 자금과 무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장학량의 심복으로 아직 만주에 남아 있는 인물들과 비밀 연락이 되도록 주선하겠다”고 답했다. 이 때가 1932년 9월이었다. 이에 고무된 남화한인청년연맹은 활동 무대를 다시 만주로 옮기기로 하고 젊은 동지를 파견하려 했으나 뜻밖에도 우당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했다.

 

우당은 드디어 1932년 11월초 다롄[大連]행 기선에 몸을 실었다. 달이 환한 밤에 아들 이규창은 홀로 우당을 황포강 부두의 기선에 승선시킨 후 절을 하고 떠나보냈다.

 

우당이 근거지만 만들면 상하이에서는 이석증·오종휘 등과 연락하여 장학량과 연결을 맺은 후 한·중·일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만주로 갈 계획이었다. 만주에서 한·중·일 공동 유격대를 조직하고, 각 도시에 편의대(便衣隊) 파괴 대원들을 배치해 도시와 촌락을 연결하며 결사항전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2년 11월 17일 창춘에 있던 딸 이규숙은 다롄 수상경찰서의 연락을 받았다. 황급히 다롄으로 달려가니 우당은 수상경찰서에서 이미 숨져 있었다. 일본 경찰관들은 우당이 자살했다고 꾸며댔지만 이규숙은 아버지의 몸에 핏자국이 아롱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문사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안면을 확인하니 선혈이 낭자하였고 대포(大袍)에도 선혈이 많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국내 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다롄 수상서 유치 중 괴(怪) 의사(鎰死)한 노인, 배에서 내리자 경찰에 잡혀 취조 중 유치장 창살에 목매어 죽은 이상한 노인”이란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그러면서 ‘○○운동의 중대 인물’이란 부기를 달았다. ‘○○’은 독립이란 말을 검열 과정에서 지운 것이다. 향년 66세, 우당은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신분으로 부귀를 갖고 태어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끝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것이었다.

 

우당이 다롄 부두에 내리자마자 수상서에 체포된 데는 엄청난 내막이 담겨 있었다. 밀고였다. 우당은 자신의 만주 행을 둘째 형 이석영에게는 말하지 않을 수 없어 그를 찾아가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석영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만주로 간다고 답했는데, 그 자리에 이석영의 둘째 아들 이규서와 연충렬이란 두 청년이 있었다. 두 청년은 모두 임정 요인들의 친척이었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말했던 것인데 이들이 일본 경찰대에 밀고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탐지한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는 두 청년을 류자명이 관리하던 상하이 근교의 남상(南湘) 입달학원(立達學院)으로 유인했고, 자백을 받은 후 처단해 고인의 한을 달랬다.

 

1932년 11월 28일 새벽 화장한 고인의 시신이 고국 장단(長湍)역에 도착했다. 변영태(卞榮泰)·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 등 수백여명의 인사들이 모여 한 줌의 뼈로 돌아온 노혁명가(老革命家)를 맞이했다. 이 자리에서 우당은 비로소 부인 이은숙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은숙이 품에 안은 6세의 다섯째 아들 이규동(이종걸(李鍾杰)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의 부친)은 그때까지 아버지인 우당을 한 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이 모녀의 슬픈 호곡을 뒤로 한 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지사(志士)는 경기도 개풍군 선영에 안장되어 파란만장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