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사 정권의 경제성장신화는 과연 정확한 사실인가? 그 당시 최하위급 노동자들과 가난한 서민들은 박정희 집권기에 과연 삶의 질이 높아졌는가?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흔히 박정희 행정부가 수출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고 하지만, 그 금자탑을 쌓은 것은 잠이 오지 않는 주사를 맞으며 세계에서 가장 긴 근로시간에 가장 적은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최하위급 노동자들인 것이다. 평범한 국민들로부터 고혈을 짜서 수출의 증대를 이루고 그것을 경제성장신화라는 타이틀로 포장해 전부 박정희 개인의 공로로 왜곡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비인간적인 경제개발정책이 오늘날 ‘신화’라는 이름으로 새누리당의 제18대 대통령선거 후보인 박근혜와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물론 박정희식 경제체제를 21세기에 다시 구현하려는 기득권 계층의 음모도 있겠지만 우리 나라만의 비상식적인 사회적 특성도 그 원인으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성장은 있지만 분배가 없는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와 더불어 취업률 감소와 비정규직 양산 속에서 평범한 국민들의 삶이 대단히 어려운 지경에 빠지는 가운데, 마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이 우리 나라를 대단히 부유하게 만들었다, 일자리를 많이 만들었다, 국민소득을 높였다, 경제적 성장을 빠르게 이루었다는 식의 신화를 조작해내면서 향수를 불러 일으켜 이번 대선에서 수구정치세력의 재집권을 성공시키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데 있다.
지금의 기득권 계층은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했지만, 그들이 신봉하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계획경제였다. 그러나 그 계획이 과연 누가 구상했던 계획이었는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결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구상한 계획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청와대에서도 일본식 군복을 입고 칼을 차며 일본군가를 부르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그런 자의 머리에서 고도의 전략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실제로 살펴보면 미국 국방성 산하 랜드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의 연구원 찰스 호프 박사가 실질적으로 1957년부터 한국의 경제개발정책을 입안하기 시작했다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호프 박사는 1957년 당시 이승만 행정부의 김영철 부흥부 장관에게 장기적인 경제개발정책을 구상해야 한국이 계속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이듬해에 송인상 장관은 마이클 허터 미국 국무장관 대리를 만나 경제개발정책에 관련된 논의를 하고 오리건주대학교의 경제학과 교수 5명이 이승만 행정부의 자문역으로 초청받게 된다. 1961년에 준비과정을 거쳐 1962년부터 본격적인 실천에 옮기자는 이 계획은 박정희 행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부분이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통해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에 오른 직후 한·미 합동 경제협력위원회가 구성되는데, 협의기구를 통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정·보완해 나갔다. 그리하여 박정희 행정부가 공업·제조업·무역 등의 분야에서 어떤 실적을 쌓았는지 한·미 경협위에 보고하면 한·미 경협위는 다음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박정희 행정부에게 주문한다. 즉 박정희 행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은 전부 한·미 경협위에 의해 조율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1960·70년대의 한국경제가 미국 정부의 관리를 받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1960년대를 전후한 동북아시아의 상황은 사회주의 진영의 고속성장으로 자본주의 세력이 위기를 겪고 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북한의 경제사정이 남한을 추월하고 있었던 현상에 있어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대한 주도권 확보를 위해 남한에 ‘쇼윈도우’ 방식의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지나친 공업화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가 대두됨으로 인해 공업개발의 모델을 한국으로 도입시켜 유해산업문제를 묻어버리려는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한일국교정상화를 강요하고 차관경제를 강제한 것이다.
박정희 군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미국의 조절통제에 의해 진행되었고 일본의 자본을 도입하는 형태에 의해 수출중공업을 전개하면서 일본의 사양산업(斜陽産業)을 그대로 들여오는 체제가 한국 경제의 실상이었다. 일본의 투자원칙을 정의한 야스키 계획에 따르면 한국의 경제체제가 일본에 유리한 경제체제로의 편입과 한국 경제정책이 일본 경제정책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일본의 대한투자정책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으로부터 공유된 차관은 일본 제품을 구입해야 하는 데가 줄을 이루었으며, 공공차관은 한국 정부와 일본 경제협력기구 간의 합의된 특정사업에만 공유된다고 하였다. 일본의 세금은 무상으로 한국 정부에 지급되었고, 이 돈은 미쓰비시의 제품 구입에 사용되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포괄적인 지원 정책을 마련하였고, 독점자본재원으로 대체되었다.
일본의 낡은 설비를 차관이라는 형태로 한국의 공업현장에 들여오게 되면 이것은 GDP 성장 수치로 왜곡된다. 그 결과로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박정희 행정부 시기의 경제성장률이 평균 16.5%라고 수구우파가 주장하는데, 그만큼 외상으로 늘어난 채무가 매우 높아졌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의 외채가 높아진 것은 후대의 주머니를 털어서 자신의 업적으로 포장하여 번영을 누렸던 박정희식 경제정책이었다.
차관이 들어올 때 그 소유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 차관은 권력자들이나 재벌들의 독점소유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의 자본주의는 재벌이 독주하는 구조로 굳혀진 것이다. 물론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1950년대에 비해 1970년대 들어 더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활여건이 나아지는 과정 속에서 과연 국민들이 열심히 노력한 만큼 그 댓가가 온전하게 돌아갔는지의 여부가 큰 문제이다. 국민들이 소중한 시간을 모두 노동력에 쏟아부은 댓가는 전부 대기업이 차지하고 일반 가계에는 막대한 채무만 남았다. 실제로 보면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으로 인해 한국 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노동력 헌신으로 한국 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내수경제가 아닌 수출주도형 경제로 재벌성장의 토대를 가져왔던 것이다.
차관경제의 이익은 박정희 정권과 연줄이 닿은 대기업에게 집중되었다. 1970년대 대기업의 생산비중이 56%까지 올라가는데, 우리 나라 전체 1년간 생산량의 60% 정도를 대기업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극화가 심각하고 재벌독점이 지나치다고 평가되는 오늘날에도 2005년 대기업의 생산비중은 55%에 달한다. 결론적으로 경제성장의 성과를 재벌이 독식했다는 것이다. 정경유착이 매우 심했던 유신독재시대에 한국 경제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은 것은 오로지 재계와 정치권뿐이었다.
차관을 도입해서 재벌의 배를 불리고 재벌과 밀착한 정부는 뒷돈을 챙기는 순환구조에서 평범한 국민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실제로 박정희 집권기에 네 차례의 외채위기가 찾아오는데, 1990년대의 외환위기는 실질적으로 그 책임이 김영삼 정권이 아닌 박정희 정권에 있었다. 쉽게 말해 김영삼 정권의 외환위기는 은행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였는데, 박정희 정권의 외채위기는 차관을 빌려온 주체가 정부였기 때문에 당시 정부의 채무 증폭은 네 차례나 한국경제를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서 생기는 정부의 채무는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액수를 늘려서 빚을 갚게 된다. 결국 대다수 평범한 국민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극소수 부유층이 형성되는 사회구조가 만들어졌다.
한국의 부유층이 1953년부터 1984년까지 군사독재정부 덕택에 공짜로 얻은 재정적 이익이 무려 70억 달러에 달한다. 수출을 위한 차관은 수입이 불가피하게 되고 수출이 아무리 100억불을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적자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집권기 18년간 수출이 678억불인데, 수입이 871억불을 기록하게 되어 무역적자는 233억불로 남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 전체를 빚더미에 앉힌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시기에 외부에서 자본이 무분별하게 유입되면 통화량이 높아지고 물가가 상승하게 되는데, 부유층은 두둑해진 돈주머니를 굴리기 위해 부동산 투기에 열중하게 된다. 1965년~69년 기간에 연평균 부동산 가격 상승률이 한 해에 34%이고 직가상승롤이 한 해에 38%씩 올랐다고 한다. 1975년~79년 기간에 또 한 번의 엄청난 부동산 가격 폭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연평균 30%이고, 직가상승률이 33%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 있었던 부동산 가격 폭등 현상은 박정희 정권 시기의 부동산 가격 상승률에 비하면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집권기 토지불로소득이 국민소득의 두 배였다고 하니 유신독재시절의 우리 나라 경제체제는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경제였다.
박정희 집권기에 일반 노동자의 근로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길었고, 임금 수준은 미국인 노동자의 1/12정도였고, 산업재해 또한 세계 최고였다.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에 74.9%, 1978년에는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즉 대다수 일반 노동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받지 못했던 시기였으니 박정희 집권기에 서민들 입장에서 삶의 질은 6·25남북전쟁 이후의 수준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는 말이다. 1960년대 초반에 학교에서 점심을 굶는 아동 인구가 60%를 넘었고 1970년대 중반 서울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1백만명~3백만명의 서민 가정이 판자촌에서 생활했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노동자인권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추종자로 매도되어 형사처벌을 받고 파면당했으며, 서울 평화시장의 경우 17세 이하의 여성 노동자 약 1만명이 하루 16시간 이상 1인당 1평도 안 되는 면적에서 최저임금의 1/5도 안 되는 수당을 받으며 혹사당했던 고통의 역사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지나친 건설사업과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 농촌이 피폐해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박정희 집권기에 연간 5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게 되는데, 1960년대 초반에 58.3%였던 농촌의 인구가 미국산 잉여농산물 수입이나 농가부채 등으로 인해 1970년대 중반에 37.5%로 줄어들게 된다. 즉 1967년부터 1976년 사이에 무려 670만명의 농촌 인구가 도시로 떠나는데, 이 때 가구유출은 68.2%이며 단신유출은 31.8%에 해당했다. 세계 주요국가와 비교한 연평균 경제성장비율을 보면 박정희 정권 때는 3.3%였으나 전두환 정권 때는 5%가 넘었고, 김대중 정권 때는 4.8%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박정희가 ‘경제성장의 아버지’라는 신화는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며 허구인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말기인 1979년에는 GNP가 이미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 최악인 41억 5천만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었고 국가 전체의 기름 재고는 7인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소비자 물가상승도 18.4%나 뛰어 있는 상황이었고 외환보유고도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IMF 외환관리체제에 들어간 1997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심각해진 가계부채는 곧 박정희식 경제개발의 모순과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대출을 당겨서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사고 고급 승용차에 저택을 구입한들 그것이 나중에 자녀 세대에 커다란 빚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기만적인 경제정책을 신화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바로 박정희 정권의 파시즘이 구사한 최면술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차관은 미국과 일본의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것인데 그만큼 빚을 늘린 것을 경제성장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사채를 많이 쓰면 개인과 가족이 패가망신하게 된다. 나중에 갚을 빚을 감당하지 못하게 늘려서 그것을 경제개발의 성과라고 한다면 이것은 분명한 날조·왜곡이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신화’가 아닌 ‘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잘못된 과거에서 탈출해서 더 좋은 동반성장, 더 올바른 경제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수구정치세력의 기만적 책동에 속지 말고 제대로 된 공부에 열중해야 한다. 우리 나라는 이미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도 민주화를 이룩하지 못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역시 박정희 독재 잔재에서 벗어나야 우리 나라가 진정으로 모든 국민이 행복한 복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정권교체의 명분과 유신독재시대에 대한 비판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집단최면술의 대가 박정희……유신독재시대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허구성
박정희 군사 정권의 경제성장신화는 과연 정확한 사실인가? 그 당시 최하위급 노동자들과 가난한 서민들은 박정희 집권기에 과연 삶의 질이 높아졌는가?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흔히 박정희 행정부가 수출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고 하지만, 그 금자탑을 쌓은 것은 잠이 오지 않는 주사를 맞으며 세계에서 가장 긴 근로시간에 가장 적은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최하위급 노동자들인 것이다. 평범한 국민들로부터 고혈을 짜서 수출의 증대를 이루고 그것을 경제성장신화라는 타이틀로 포장해 전부 박정희 개인의 공로로 왜곡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비인간적인 경제개발정책이 오늘날 ‘신화’라는 이름으로 새누리당의 제18대 대통령선거 후보인 박근혜와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물론 박정희식 경제체제를 21세기에 다시 구현하려는 기득권 계층의 음모도 있겠지만 우리 나라만의 비상식적인 사회적 특성도 그 원인으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성장은 있지만 분배가 없는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와 더불어 취업률 감소와 비정규직 양산 속에서 평범한 국민들의 삶이 대단히 어려운 지경에 빠지는 가운데, 마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이 우리 나라를 대단히 부유하게 만들었다, 일자리를 많이 만들었다, 국민소득을 높였다, 경제적 성장을 빠르게 이루었다는 식의 신화를 조작해내면서 향수를 불러 일으켜 이번 대선에서 수구정치세력의 재집권을 성공시키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데 있다.
지금의 기득권 계층은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했지만, 그들이 신봉하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계획경제였다. 그러나 그 계획이 과연 누가 구상했던 계획이었는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결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구상한 계획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청와대에서도 일본식 군복을 입고 칼을 차며 일본군가를 부르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그런 자의 머리에서 고도의 전략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실제로 살펴보면 미국 국방성 산하 랜드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의 연구원 찰스 호프 박사가 실질적으로 1957년부터 한국의 경제개발정책을 입안하기 시작했다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호프 박사는 1957년 당시 이승만 행정부의 김영철 부흥부 장관에게 장기적인 경제개발정책을 구상해야 한국이 계속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이듬해에 송인상 장관은 마이클 허터 미국 국무장관 대리를 만나 경제개발정책에 관련된 논의를 하고 오리건주대학교의 경제학과 교수 5명이 이승만 행정부의 자문역으로 초청받게 된다. 1961년에 준비과정을 거쳐 1962년부터 본격적인 실천에 옮기자는 이 계획은 박정희 행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부분이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통해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에 오른 직후 한·미 합동 경제협력위원회가 구성되는데, 협의기구를 통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정·보완해 나갔다. 그리하여 박정희 행정부가 공업·제조업·무역 등의 분야에서 어떤 실적을 쌓았는지 한·미 경협위에 보고하면 한·미 경협위는 다음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박정희 행정부에게 주문한다. 즉 박정희 행정부의 경제개발정책은 전부 한·미 경협위에 의해 조율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1960·70년대의 한국경제가 미국 정부의 관리를 받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1960년대를 전후한 동북아시아의 상황은 사회주의 진영의 고속성장으로 자본주의 세력이 위기를 겪고 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북한의 경제사정이 남한을 추월하고 있었던 현상에 있어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대한 주도권 확보를 위해 남한에 ‘쇼윈도우’ 방식의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지나친 공업화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가 대두됨으로 인해 공업개발의 모델을 한국으로 도입시켜 유해산업문제를 묻어버리려는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한일국교정상화를 강요하고 차관경제를 강제한 것이다.
박정희 군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미국의 조절통제에 의해 진행되었고 일본의 자본을 도입하는 형태에 의해 수출중공업을 전개하면서 일본의 사양산업(斜陽産業)을 그대로 들여오는 체제가 한국 경제의 실상이었다. 일본의 투자원칙을 정의한 야스키 계획에 따르면 한국의 경제체제가 일본에 유리한 경제체제로의 편입과 한국 경제정책이 일본 경제정책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일본의 대한투자정책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으로부터 공유된 차관은 일본 제품을 구입해야 하는 데가 줄을 이루었으며, 공공차관은 한국 정부와 일본 경제협력기구 간의 합의된 특정사업에만 공유된다고 하였다. 일본의 세금은 무상으로 한국 정부에 지급되었고, 이 돈은 미쓰비시의 제품 구입에 사용되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포괄적인 지원 정책을 마련하였고, 독점자본재원으로 대체되었다.
일본의 낡은 설비를 차관이라는 형태로 한국의 공업현장에 들여오게 되면 이것은 GDP 성장 수치로 왜곡된다. 그 결과로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박정희 행정부 시기의 경제성장률이 평균 16.5%라고 수구우파가 주장하는데, 그만큼 외상으로 늘어난 채무가 매우 높아졌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의 외채가 높아진 것은 후대의 주머니를 털어서 자신의 업적으로 포장하여 번영을 누렸던 박정희식 경제정책이었다.
차관이 들어올 때 그 소유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 차관은 권력자들이나 재벌들의 독점소유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의 자본주의는 재벌이 독주하는 구조로 굳혀진 것이다. 물론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1950년대에 비해 1970년대 들어 더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활여건이 나아지는 과정 속에서 과연 국민들이 열심히 노력한 만큼 그 댓가가 온전하게 돌아갔는지의 여부가 큰 문제이다. 국민들이 소중한 시간을 모두 노동력에 쏟아부은 댓가는 전부 대기업이 차지하고 일반 가계에는 막대한 채무만 남았다. 실제로 보면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으로 인해 한국 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노동력 헌신으로 한국 경제가 발전한 것이다. 내수경제가 아닌 수출주도형 경제로 재벌성장의 토대를 가져왔던 것이다.
차관경제의 이익은 박정희 정권과 연줄이 닿은 대기업에게 집중되었다. 1970년대 대기업의 생산비중이 56%까지 올라가는데, 우리 나라 전체 1년간 생산량의 60% 정도를 대기업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극화가 심각하고 재벌독점이 지나치다고 평가되는 오늘날에도 2005년 대기업의 생산비중은 55%에 달한다. 결론적으로 경제성장의 성과를 재벌이 독식했다는 것이다. 정경유착이 매우 심했던 유신독재시대에 한국 경제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은 것은 오로지 재계와 정치권뿐이었다.
차관을 도입해서 재벌의 배를 불리고 재벌과 밀착한 정부는 뒷돈을 챙기는 순환구조에서 평범한 국민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실제로 박정희 집권기에 네 차례의 외채위기가 찾아오는데, 1990년대의 외환위기는 실질적으로 그 책임이 김영삼 정권이 아닌 박정희 정권에 있었다. 쉽게 말해 김영삼 정권의 외환위기는 은행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였는데, 박정희 정권의 외채위기는 차관을 빌려온 주체가 정부였기 때문에 당시 정부의 채무 증폭은 네 차례나 한국경제를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서 생기는 정부의 채무는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액수를 늘려서 빚을 갚게 된다. 결국 대다수 평범한 국민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극소수 부유층이 형성되는 사회구조가 만들어졌다.
한국의 부유층이 1953년부터 1984년까지 군사독재정부 덕택에 공짜로 얻은 재정적 이익이 무려 70억 달러에 달한다. 수출을 위한 차관은 수입이 불가피하게 되고 수출이 아무리 100억불을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적자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집권기 18년간 수출이 678억불인데, 수입이 871억불을 기록하게 되어 무역적자는 233억불로 남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 전체를 빚더미에 앉힌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시기에 외부에서 자본이 무분별하게 유입되면 통화량이 높아지고 물가가 상승하게 되는데, 부유층은 두둑해진 돈주머니를 굴리기 위해 부동산 투기에 열중하게 된다. 1965년~69년 기간에 연평균 부동산 가격 상승률이 한 해에 34%이고 직가상승롤이 한 해에 38%씩 올랐다고 한다. 1975년~79년 기간에 또 한 번의 엄청난 부동산 가격 폭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연평균 30%이고, 직가상승률이 33%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 있었던 부동산 가격 폭등 현상은 박정희 정권 시기의 부동산 가격 상승률에 비하면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집권기 토지불로소득이 국민소득의 두 배였다고 하니 유신독재시절의 우리 나라 경제체제는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경제였다.
박정희 집권기에 일반 노동자의 근로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길었고, 임금 수준은 미국인 노동자의 1/12정도였고, 산업재해 또한 세계 최고였다.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에 74.9%, 1978년에는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즉 대다수 일반 노동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받지 못했던 시기였으니 박정희 집권기에 서민들 입장에서 삶의 질은 6·25남북전쟁 이후의 수준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는 말이다. 1960년대 초반에 학교에서 점심을 굶는 아동 인구가 60%를 넘었고 1970년대 중반 서울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1백만명~3백만명의 서민 가정이 판자촌에서 생활했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노동자인권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추종자로 매도되어 형사처벌을 받고 파면당했으며, 서울 평화시장의 경우 17세 이하의 여성 노동자 약 1만명이 하루 16시간 이상 1인당 1평도 안 되는 면적에서 최저임금의 1/5도 안 되는 수당을 받으며 혹사당했던 고통의 역사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지나친 건설사업과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 농촌이 피폐해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박정희 집권기에 연간 50만명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게 되는데, 1960년대 초반에 58.3%였던 농촌의 인구가 미국산 잉여농산물 수입이나 농가부채 등으로 인해 1970년대 중반에 37.5%로 줄어들게 된다. 즉 1967년부터 1976년 사이에 무려 670만명의 농촌 인구가 도시로 떠나는데, 이 때 가구유출은 68.2%이며 단신유출은 31.8%에 해당했다. 세계 주요국가와 비교한 연평균 경제성장비율을 보면 박정희 정권 때는 3.3%였으나 전두환 정권 때는 5%가 넘었고, 김대중 정권 때는 4.8%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박정희가 ‘경제성장의 아버지’라는 신화는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며 허구인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말기인 1979년에는 GNP가 이미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 최악인 41억 5천만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었고 국가 전체의 기름 재고는 7인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소비자 물가상승도 18.4%나 뛰어 있는 상황이었고 외환보유고도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IMF 외환관리체제에 들어간 1997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심각해진 가계부채는 곧 박정희식 경제개발의 모순과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대출을 당겨서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사고 고급 승용차에 저택을 구입한들 그것이 나중에 자녀 세대에 커다란 빚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기만적인 경제정책을 신화라고 인식하게 된 것은 바로 박정희 정권의 파시즘이 구사한 최면술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차관은 미국과 일본의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것인데 그만큼 빚을 늘린 것을 경제성장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사채를 많이 쓰면 개인과 가족이 패가망신하게 된다. 나중에 갚을 빚을 감당하지 못하게 늘려서 그것을 경제개발의 성과라고 한다면 이것은 분명한 날조·왜곡이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신화’가 아닌 ‘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잘못된 과거에서 탈출해서 더 좋은 동반성장, 더 올바른 경제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수구정치세력의 기만적 책동에 속지 말고 제대로 된 공부에 열중해야 한다. 우리 나라는 이미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도 민주화를 이룩하지 못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역시 박정희 독재 잔재에서 벗어나야 우리 나라가 진정으로 모든 국민이 행복한 복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정권교체의 명분과 유신독재시대에 대한 비판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