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독신 그것은 무엇일까요

결혼201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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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독신생활

사제는 그 양떼들을 성사(聖事)의 비옥한 목장으로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사제는 복음의 진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낳은 영적인 자녀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주는 영적 아버지입니다(Ⅰ고린 4,15; 갈라 4,19).

 

사제는 죄를 고백하는 회개자에게 죄사함을 선언하는 재판관이며 추악한 죄악의 질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의사입니다. 또한 구원의 진리를 설교하는 사람이자 모범적인 성직자이기에 그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기 위하여 가톨릭에서는 그 성직자(사제)에게 일생 독신으로 지내기를 엄명합니다.

 

사제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예수님께서도 동정을 칭찬하시고(마태 11,11-12) 몸소 동정의 모범(독신)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14장에서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구출된 십사만 사천명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숫총각들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닙니다......”(묵시 14,3-4)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가 되려면 먼저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마르 8,34). 십자가의 길을 부르짖는 성직자로서 부부간의 향락과 단란한 가정 생활의 감미로움을 즐겨 가면서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마태 19,27).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위한 일의 업적으로도 가정이 있는 교역자는 가족 부양이라는 무거운 짐에 눌려 교회를 위해서 온힘을 쏟을 수 가 없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가정이 있는 교역자의 생활비는 독신자보다 많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그 밖의 자녀 교육비 등 모든 생활비를 합해 보면 독신자의 생활비보다 몇 배나 됩니다.

 

따라서 어떤 목사님의 사모님은 부업으로 생활비를 보태기도 하고 심지어 외국의 어떤 목사님은 장사를 하여 생활비에 보태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한사람의 교역자의 경우도 이러한데 교회 전체를 비교 통산하면 엄청난 차이가 날것이며 이 모두는 결국 신도들이 부담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예수님께서 독신생활을 강요하신 것은 아니지만 위와같은 행동으로 이를 적극 권장하셨으므로 교회에서는 점차 성문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독신자 신자가 절대 부족한 관계로 결혼한 사람도 성직자를 맡아 볼 수 있었으나 한번 사제직에 서품 된 후에는 별거하였습니다.

 

사제의 독신 생활들은 2세기의 성 이냐시오, 유스트노 타치아노, 3세기의 테르톨리아노와 오리제네스, 4세기의 에우세비오와 치릴로 등의 서간 및 저서 등에서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 사제 독신 제도의 반대 이론

사제들의 독신에 대하여 어떤 이는 “자손을 낳고 번성하여....”(창세 1,28) 라시는 것에 위배된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 조상 아담에게 하신 명령이지 그 후의 억만인에게 일일이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독신에 관하여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 들여라”(마태 11,11-12)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1845년 8월 17일 서품) 이래 150년간 서품 된 총 사제 수는 우리나라 개신교의 1년간 양성되는 목회자 수의 절반(½)도 훨씬 못됩니다.

 

그만큼 어려우면서도 또 그만큼 주님의 초자연적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사제의 길은 주님을 위한 좁은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혹자는 “감독(주교)은...... 한 여자만 아내로 가져야 하고 ....”(Ⅰ디모 3,2) 라는 것을 들어 주교는 반드시 결혼한 사람이어야 한다고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서 자유 해석자의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오로 자신이 주교로서 평생 독신으로 지낸 사실로 보아도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다만 재혼한 사람은 주교에 서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교직이 부족하여 독신자 중에서 뿐 아니라 결혼한 사람 가운데서도 주교를 선택하기도 하였으나, 사도 바오로는 오히려 평신도들에게마저 자기처럼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Ⅰ고린 7,32-35).

 

혹 어떤 이들은 “훗날에.... 결혼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못 먹게 합니다.”(Ⅰ디모 4,1-3) 라는 성경 구절을 들어 반대 근거를 삼고 있으나 이는 그 당시 에비온파, 그노시스파, 마니교파의 이설(異說)에 대한 반박의 말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직자 뿐 아니라 현재 수십만이 훨씬 넘는 남녀 수도자들이 자기의 성화만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한 폐병원, 시료원, 요양원, 양로원, 고아원, 감화원 등엔 물론이요 각종 교육, 문화 전도, 구제 사업에 엄격한 수도 규칙을 지켜 가며 일생 독신생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신교에서 영국 성공회의 극소수 수도원을 제외한 어떤 교파도 복음사업을 위한 단 하나의 수도원이 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독신생활을 결코 강요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각각 자유의사에 맡길 뿐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라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십계를 받기 전에 모두들 사흘 동안이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여자를 멀리하였다면(출애 19) 일생 동안 하느님의 십계를 강론하고 주님의 복음을 가르치는 성직에 있는 사제는 평생 여자를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유명한 개신교 목사 “톤다이크(Thorndyke)”의 말을 인용해 봅니다. 즉 “바울(바오로)사도는 비록 부부 사이일지라도 기도를 위하여 한 동안 동침하지 말도록 권하였으나(Ⅰ고린 7,5) 지극히 거룩한 미사를 날마다 거행하는 사제들은 일생을 동정으로 지냄으로서 정결한 생활을 하는 것은 마땅하다”(Just Weights and Measures p 239) 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따라 영원한 대사제가 되신 우리 주님(히브  6,20) 께서는 당신 사제들을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이 사랑의 계획안에서 “사제들은” 더욱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는 것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매일 사제들을 통하여 오십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제들의 말은 모든 언어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분의 복음의 반복인 까닭입니다.

 

-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르 16,16) 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사제들의 사제적 활동을 통해서 오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속자요 구세주이신 그분께로 모든 사람을 데려가는 활동인 까닭입니다.

 

-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 고린 11,24) 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온 세계에서 사제들에 의해 행하여지는 사제들이 제관이 되는 “성찬의 전례(미사)” 를 통하여 날마다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갈바리아에서 이루신 희생 제사를 오늘날에도 새롭게 반복하는 것이니 세상의 모든 죄악을 그분의 성혈로 씻어 내기 위함입니다.

 

-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을 것이다”(요한 20,23) 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제들이 집전하는 화해의 성사(고백성사)” 를 통해서 오십니다. 그것은 이 모든 죄인들로 하여금 그분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집” 으로 돌아오게 하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 “나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사제들이 성직자로서 집전하는 모든 성사들을 통해서 또한 그분의 항구적 현존의 빛을 반영해야 할 사제들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참으로 사제직이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주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의 몫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제는 좋은 신자들이 만든다고 합니다. 때문에 사제나 수도자들을 존경해야 하며 그들의 인간적 약점을 기도로서 보충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제들에게는 주님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17) 라고요. 그분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야훼의 눈에 들어 25세에 왕위에 올라 29년간을 다스린 유다왕 아마지아(Ⅱ역대 25,1)의 아들 우찌아왕도 52년간 다스리면서 야훼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으나(Ⅱ역대 26,3) 그가 사제들에게 화를 내려 하자 문둥병이 들린 것은(Ⅱ역대 26,19) 오늘의 우리는 더욱 깊은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할머니 얼마 전 71세 된 잠비아 대주교가 결혼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는 오래 전 교회로부터 활동이 금지된바 있으나 이번에는 “성직자의 희생적 독신주의는 이제 그 목적을 다했다”는 명분으로 가톨릭 교회에 충격을 주기 위한 의도된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하기야 영세 직후 수도원 가려던 마음을 아버지와 타협으로 이를 저버리고 첫 순정을 할머니의 손자며느리 “로사” 에게 스스로 고스란히 가져다 바친 이 손자놈이 그에 관하여 비판하거나 평가할 자격은 없습니다만 그가 비록 43세의 한국계 여성과 결혼하여 71년간 지켜 온 동정을 계속 지키겠노라고 장담하며 떠돌아다니지만 주님이 주신 초자연적 은총 없이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주님을 “실패한 구세주”라고 믿는 통일교는 몰라도 저는 결사코 부정적입니다.

 

이렇듯 그는 신성한 결혼을 이유야 어떻든 다른 목적에 사용함으로서 하느님의 창조 진리를 모독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렇게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요한 17,12)

 

제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21세기 디지털식 희극적 경우를 16세기이래 또 한번 보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저도 온 세계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매일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저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는 언제나 계속될 것입니다.(기도문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