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나 29살. 1984년생이다. 자폐증이면서도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어릴 때 글을 배울 때도 주변 간판이나 버스 번호, 테레비 뉴스, 조선일보를 보고 배웠다. 여의도에서 살다보니 테레비를 보면 바로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테레비 보는 재미로 살았다. 인기 만화영화부터 뉴스, 드라마 등등, 틀면 바로 나오는 곳이 여의도였으니까. 물론 전두환 대통령 당시라서, 광적으로 홍보방송을 많이 내보낸 탓도 있지만, 서울, 그 중에서도 여의도는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중심지요 세계의 중심지라는 생각을 했다. 뭐 이때만 해도 이웃집 애들이랑 잘 어울리고 그랬다. 지금도 여의도란 동네에 애착이 많이 가는 편일 정도로 그 당시를 오히려 기억을 많이 한다. 아파트에서 바라보면 대방역과 노량진수산시장이 바로 보이는, 전망좋은 명당이었다. 거기서 앵무새 두 마리를 키우던 기억도 나고, 많이 그립다. 엄마따라 회현동 신세계 간다고 740번 개봉여객 연두색 좌석버스 타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PART 2. 그런데 아버지의 직장문제로 저 멀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이게 대략 88 서울올림픽을 100일 정도 앞둔, 그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새로운 곳에 왔는데 뭔가 매우 낯선 기분이 들었고 옛날 집으로 가고픈 욕구만 솟구쳤다. 서울에 외가친척을 놔두고 내려와서 그런지,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탈 때가 제일 행복했을 정도였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을 못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일 이후로 말수가 급격히 적어졌다고 한다. 초등학교, 중학교에선 거의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말수가 적었다. 그야말로 "공부만 잘 하지, 결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말수가 적은 아이"였던 것이다. 담임선생님들도 그래서 오히려 골머리를 썩다가, 나중에 되니 태연해지면서 그대로 놔뒀다고 한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자기 할일은 잘 하는 그런 이미지가 된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고역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혼자서 뭘 만들고 하는 것을 좋아하던 그런 시기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왕따를 당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장난을 쳐도 재미없다고 건드리질 않았다.
PART 3. 고1이었던 2000년, 또 반전이 하나 벌어지고 만다. 아버지 직장이 다시 서울로 옮겨가시는 바람에. 아버지 계시던 곳은 역삼동 스타타워 뒤편의 원룸이었다. 그래서 그 참에 어머니에게 졸라댔다. 아버지와 함께 살며 서울 쪽에서 고등학교 다니고 싶다고. 그 당시 많이 뜨던 8학군 전통 명문고를 손쉽게 다닐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문화생활도 못 누리고 10년 정도동안 살면서 애착 하나 없는 동네에 뭐하러 있냐? 이러면서 어머니와 많이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어머니 입장은 고등학교는 한 곳에 다녀야 한다. 이거였다. 내 입장은 그래도 고등학교는 오랫동안 살 서울에서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내가 초중고 12년 다 다녔지만 그 지방엔 이상하게 애정이 없다. 군대식 표현으로, "자기 부대 방향으론 오줌도 안 눈다"고 한다. 딱 그 처지다. 지금 생각해도 어느 박자가 맞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거기서 다니느냐, 서울로 오느냐, 다 장단점이 있기에. 왜냐면... 내가 나온 고등학교 평판이 정말 추락할 대로 추락했던 것이다... 딱 84년생 입학한 뒤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핑계삼아(?) 서울을 두세달에 한번은 다녔다. 또한 그 당시 유행하던 "세이클럽"에 빠져 살기도 했고 실제로 몇 사람도 만나기도 했다.
PART 4. 월드컵과 부산아시안게임의 열기로 뜨겁던 2002년. (이상하게 난 그런 것에 흥미가 없어서 녹화뉴스로만 대충 봤다) 서울쪽 좀 괜찮은(?) 학교... 공대쪽으로 진학했다. 공부만 바라보다가 대학 입학을 앞둔 2003년 2월까지 잉여롭게 보냈다. 그 시기가 아마 내 나름대론 히키코모리의 서막일 수 있던 것이다. 12년간 공부 하나만 바라보고 왔다가, 공부엔 손을 완전히 놨다. 대학 입학 후... 문제는 내가 꿈꿔온 대학 생활과 판이하게 다른 것에 쇼크를 느꼈다. 84년생이거나 그 이전 분들은 대충 뭔 소린지 알아들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당시 공대라 함은 정말 잉여 쓰레기 찌질이들만 가는 곳이다. 라는 속설만 믿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아니며 30X동 다니는 사람이니 절대 오해 없길 바람) 팔도강산을 의치한, 교대로 다 그리고 나서 서울대 공대가 들어간다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교대나 한의대라 함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강했다. 자연히 공부에 흥미가 없어지는 건 당연지사. 그래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수능준비를 2년간 했고, 이로써 대학 동기와는 자연히 멀어졌다. 오히려, 운동권 형들을 동경하며 학교를 다녔으나 그것도 수능준비 또 한다고 멀어진 것이다. (당시엔 반미가 득세하던 시절이었으며 운동권이 시대의 대세인 줄로만 착각했었다) 결론은 초중고, 그리고 대학 신입생 시절 친구는 단 1명도 없게 된 것이다!
PART 5. 그러나 두 번의 시험에서 원하지 않는 결과를 받아들고 좌절과 절망을 하며, 2005,2006 두 해는 거의 자포자기식으로 대학을 다녔다. 덕분에 평점은 2.4/4.5.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군대를 지원하여 군 입대를 결심하게 된다. 물론 아는 사람 없이 혼자서 조용히 학교를 다녔다. 이 때만 해도. 솔직히 이 시기는 특별한 기억이 없어서 이 정도로만 글을 쓰고 마무리한다.
PART 6. 군 입대를 하고 나서도, 말주변이 없어서 고생 정말 많이 했다. 그러나 어찌 해도 욕을 먹는다는 것을 알고는, 그래도 버텨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나름대로 사람 상대할 일이 많은 행정병으로 갔고, 문서 처리 하나는 잘 해서 칭찬도 받았다. 그러면서 내 성격이 조금씩은 바뀌어 간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휴가 나와서도 친구도 없고 해서 하는 일은 거의 집안 살림하고 대청소하는 일뿐. (덕분에 큰 집안일 하나는 정말 잘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2009년 여름, 다시 민간 사회로 내던져졌다.
PART 7. 괜히 잉여짓 하느니 뭐라도 해보자 해서 2009년 2학기 복학. 무려 3학기의 기록을 말소시켜버리면서 복학을 했던 것이다. 이 때 나이는 26. 대학 2학년을 26살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습지만 그 당시엔 정말 절박함의 극치를 달렸던 것이다. 복학 첫 학기, 특이하게도 길 가다가 어떤 분 번호 하나 따서 근 2년간 만났던 사람도 생겼다. 이게 내 생애 첫 진지한 연애다.
PART 8. 2010년. 사실 공부만 바라보던 근성 어디 가나. 그런데 이상하게 내용이 이해가 잘 되는 것이었다. 덕분에 처음으로 학기성적 3 넘어 3.75. 그 이후로 졸업할 때까지(졸업 직전에도) 계절학기로 열심히 달렸다. 그해 2학기엔 성적장학금이란 것도 푼돈이지만 받아봤다. 무조건 성적으로만 잘라서 주는 성적장학금이란 것에 의미두고 싶다. 사실 이 시기엔 공부만 한다고 달려왔고 여자친구와 만나는 것도 적당히 하면서 잘 보냈다. 2011년도 거의 비슷한 반복. 그러면서 성적이 어느 정도 올라서 이 곳 대학원을 목표로 달렸다. 오히려 대학 와서 알게 된 친구들의 숫자가 비록 3~4명인 건 함정이지만 이 시기에 친구들이란 게 어떤 존재인지를 처음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물론 동기라고는 단 1명도 없고, 죄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긴 했지만 그들은 나를 잘 따랐다. 지금도 가끔 연락은 하고 지낸다.
PART 9. 2012년이다. 주변에 대학원 썼다 떨어진 사람이 있어서 그 친구 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았다. 뭘 잘못했는지 등등 물어보고 이래저래 힘들게 영어공부도 하고 바쁘게 보낸 한 학기였다. 하긴 올해 1학기도 졸업논문에 영어학원, 그게 끝이었다. 여자친구와도 서로 바빠 멀어지고,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더군다나 학점이 너무 모자라서 여름계절학기를 듣고 졸업해야 할 판이었다. 이곳 대학원에 오기 전, 그러니까 졸업 전 내게 주어진 휴가는 단 이틀. 1학기 끝나고 계절학기가 시작하기 직전 이틀을 말한다.
PART 10. 대학원을 왔다. 연구실 인원수가 X명밖에 되지 않는 극히 단촐한 연구실이다. 오히려 거기 형들과는 매우 친하게 잘 지낸다. 나는 담배를 피지 않지만 그 형들이 담배 가끔씩 핀다 그러면 같이 가서 커피 정도는 마신다. 2학기 신입생이라 아직 적응과정이지만 코스웍 숙제라든지 그런 면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다. 단지, 논문 주제를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겠지만 이것은 나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내일부턴 다시 열심히 하고 싶다.
PART 11.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후 정신적 공황상태가 찾아온 듯하다. 물론 연구에 치여살고 그러면 그런 걸 왜 느끼냐고 타박줄 선배들도 있겠지만 더군다나 원래 친구들도 없는 마당에 거의 혼자 버려진 듯한 이 상황에서 이 난국을 어찌 타개할지 그게 상당히 궁금하다. 여자친구를 떠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그러기엔 너무나 늦은 것 같다. 대학원생이라서 자기 시간을 갖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인슈타인 박사처럼 연구에 몰두하다 가정을 내팽겨친 그런 사람이고 싶진 않다.
PART 12. (추가) 결혼식이니 장례식이니 그런 내용. 아직 받아본 적이 없다. 연구실 형 중 1명이 금명간 결혼하는데 그게 친척 외엔 사실 처음이다. 더 걱정은, 과연 내가 결혼한다면 몇 명이나 올지다. 답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답없다고 마냥 포기하고 살기엔 불편하다. 그냥... 사람 자체가 그리운 것 같다.
인생상담이나 격려좀 해주세요 ㅠㅠ(장문)
음슴체 쓸려다가 다른데다가도 올린글이라 ㅠㅠ
PART 1.
나 29살. 1984년생이다.
자폐증이면서도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어릴 때 글을 배울 때도 주변 간판이나 버스 번호, 테레비 뉴스, 조선일보를 보고 배웠다.
여의도에서 살다보니 테레비를 보면 바로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테레비 보는 재미로 살았다.
인기 만화영화부터 뉴스, 드라마 등등, 틀면 바로 나오는 곳이 여의도였으니까.
물론 전두환 대통령 당시라서, 광적으로 홍보방송을 많이 내보낸 탓도 있지만,
서울, 그 중에서도 여의도는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중심지요 세계의 중심지라는 생각을 했다.
뭐 이때만 해도 이웃집 애들이랑 잘 어울리고 그랬다.
지금도 여의도란 동네에 애착이 많이 가는 편일 정도로 그 당시를 오히려 기억을 많이 한다.
아파트에서 바라보면 대방역과 노량진수산시장이 바로 보이는, 전망좋은 명당이었다.
거기서 앵무새 두 마리를 키우던 기억도 나고, 많이 그립다.
엄마따라 회현동 신세계 간다고 740번 개봉여객 연두색 좌석버스 타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PART 2.
그런데 아버지의 직장문제로 저 멀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이게 대략 88 서울올림픽을 100일 정도 앞둔, 그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새로운 곳에 왔는데 뭔가 매우 낯선 기분이 들었고 옛날 집으로 가고픈 욕구만 솟구쳤다.
서울에 외가친척을 놔두고 내려와서 그런지,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탈 때가 제일 행복했을 정도였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을 못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일 이후로 말수가 급격히 적어졌다고 한다.
초등학교, 중학교에선 거의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말수가 적었다.
그야말로 "공부만 잘 하지, 결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말수가 적은 아이"였던 것이다.
담임선생님들도 그래서 오히려 골머리를 썩다가, 나중에 되니 태연해지면서 그대로 놔뒀다고 한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자기 할일은 잘 하는 그런 이미지가 된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고역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혼자서 뭘 만들고 하는 것을 좋아하던 그런 시기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왕따를 당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장난을 쳐도 재미없다고 건드리질 않았다.
PART 3.
고1이었던 2000년, 또 반전이 하나 벌어지고 만다. 아버지 직장이 다시 서울로 옮겨가시는 바람에.
아버지 계시던 곳은 역삼동 스타타워 뒤편의 원룸이었다.
그래서 그 참에 어머니에게 졸라댔다. 아버지와 함께 살며 서울 쪽에서 고등학교 다니고 싶다고.
그 당시 많이 뜨던 8학군 전통 명문고를 손쉽게 다닐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문화생활도 못 누리고 10년 정도동안 살면서 애착 하나 없는 동네에 뭐하러 있냐?
이러면서 어머니와 많이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어머니 입장은 고등학교는 한 곳에 다녀야 한다. 이거였다.
내 입장은 그래도 고등학교는 오랫동안 살 서울에서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내가 초중고 12년 다 다녔지만 그 지방엔 이상하게 애정이 없다.
군대식 표현으로, "자기 부대 방향으론 오줌도 안 눈다"고 한다. 딱 그 처지다.
지금 생각해도 어느 박자가 맞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거기서 다니느냐, 서울로 오느냐, 다 장단점이 있기에.
왜냐면... 내가 나온 고등학교 평판이 정말 추락할 대로 추락했던 것이다...
딱 84년생 입학한 뒤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핑계삼아(?) 서울을 두세달에 한번은 다녔다.
또한 그 당시 유행하던 "세이클럽"에 빠져 살기도 했고 실제로 몇 사람도 만나기도 했다.
PART 4.
월드컵과 부산아시안게임의 열기로 뜨겁던 2002년.
(이상하게 난 그런 것에 흥미가 없어서 녹화뉴스로만 대충 봤다)
서울쪽 좀 괜찮은(?) 학교... 공대쪽으로 진학했다.
공부만 바라보다가 대학 입학을 앞둔 2003년 2월까지 잉여롭게 보냈다.
그 시기가 아마 내 나름대론 히키코모리의 서막일 수 있던 것이다.
12년간 공부 하나만 바라보고 왔다가, 공부엔 손을 완전히 놨다.
대학 입학 후... 문제는 내가 꿈꿔온 대학 생활과 판이하게 다른 것에 쇼크를 느꼈다.
84년생이거나 그 이전 분들은 대충 뭔 소린지 알아들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당시 공대라 함은 정말 잉여 쓰레기 찌질이들만 가는 곳이다. 라는 속설만 믿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아니며 30X동 다니는 사람이니 절대 오해 없길 바람)
팔도강산을 의치한, 교대로 다 그리고 나서 서울대 공대가 들어간다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교대나 한의대라 함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강했다.
자연히 공부에 흥미가 없어지는 건 당연지사.
그래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수능준비를 2년간 했고, 이로써 대학 동기와는 자연히 멀어졌다.
오히려, 운동권 형들을 동경하며 학교를 다녔으나 그것도 수능준비 또 한다고 멀어진 것이다.
(당시엔 반미가 득세하던 시절이었으며 운동권이 시대의 대세인 줄로만 착각했었다)
결론은 초중고, 그리고 대학 신입생 시절 친구는 단 1명도 없게 된 것이다!
PART 5.
그러나 두 번의 시험에서 원하지 않는 결과를 받아들고 좌절과 절망을 하며,
2005,2006 두 해는 거의 자포자기식으로 대학을 다녔다. 덕분에 평점은 2.4/4.5.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군대를 지원하여 군 입대를 결심하게 된다.
물론 아는 사람 없이 혼자서 조용히 학교를 다녔다. 이 때만 해도.
솔직히 이 시기는 특별한 기억이 없어서 이 정도로만 글을 쓰고 마무리한다.
PART 6.
군 입대를 하고 나서도, 말주변이 없어서 고생 정말 많이 했다.
그러나 어찌 해도 욕을 먹는다는 것을 알고는, 그래도 버텨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나름대로 사람 상대할 일이 많은 행정병으로 갔고, 문서 처리 하나는 잘 해서 칭찬도 받았다.
그러면서 내 성격이 조금씩은 바뀌어 간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휴가 나와서도 친구도 없고 해서 하는 일은 거의 집안 살림하고 대청소하는 일뿐.
(덕분에 큰 집안일 하나는 정말 잘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2009년 여름, 다시 민간 사회로 내던져졌다.
PART 7.
괜히 잉여짓 하느니 뭐라도 해보자 해서 2009년 2학기 복학.
무려 3학기의 기록을 말소시켜버리면서 복학을 했던 것이다. 이 때 나이는 26.
대학 2학년을 26살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습지만
그 당시엔 정말 절박함의 극치를 달렸던 것이다.
복학 첫 학기, 특이하게도 길 가다가 어떤 분 번호 하나 따서 근 2년간 만났던 사람도 생겼다.
이게 내 생애 첫 진지한 연애다.
PART 8.
2010년. 사실 공부만 바라보던 근성 어디 가나.
그런데 이상하게 내용이 이해가 잘 되는 것이었다. 덕분에 처음으로 학기성적 3 넘어 3.75.
그 이후로 졸업할 때까지(졸업 직전에도) 계절학기로 열심히 달렸다.
그해 2학기엔 성적장학금이란 것도 푼돈이지만 받아봤다.
무조건 성적으로만 잘라서 주는 성적장학금이란 것에 의미두고 싶다.
사실 이 시기엔 공부만 한다고 달려왔고 여자친구와 만나는 것도 적당히 하면서 잘 보냈다.
2011년도 거의 비슷한 반복. 그러면서 성적이 어느 정도 올라서 이 곳 대학원을 목표로 달렸다.
오히려 대학 와서 알게 된 친구들의 숫자가 비록 3~4명인 건 함정이지만
이 시기에 친구들이란 게 어떤 존재인지를 처음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물론 동기라고는 단 1명도 없고, 죄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긴 했지만 그들은 나를 잘 따랐다.
지금도 가끔 연락은 하고 지낸다.
PART 9.
2012년이다.
주변에 대학원 썼다 떨어진 사람이 있어서 그 친구 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았다.
뭘 잘못했는지 등등 물어보고 이래저래 힘들게 영어공부도 하고 바쁘게 보낸 한 학기였다.
하긴 올해 1학기도 졸업논문에 영어학원, 그게 끝이었다.
여자친구와도 서로 바빠 멀어지고,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더군다나 학점이 너무 모자라서 여름계절학기를 듣고 졸업해야 할 판이었다.
이곳 대학원에 오기 전, 그러니까 졸업 전 내게 주어진 휴가는 단 이틀.
1학기 끝나고 계절학기가 시작하기 직전 이틀을 말한다.
PART 10.
대학원을 왔다. 연구실 인원수가 X명밖에 되지 않는 극히 단촐한 연구실이다.
오히려 거기 형들과는 매우 친하게 잘 지낸다.
나는 담배를 피지 않지만 그 형들이 담배 가끔씩 핀다 그러면 같이 가서 커피 정도는 마신다.
2학기 신입생이라 아직 적응과정이지만 코스웍 숙제라든지 그런 면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다.
단지, 논문 주제를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겠지만 이것은 나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내일부턴 다시 열심히 하고 싶다.
PART 11.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후 정신적 공황상태가 찾아온 듯하다.
물론 연구에 치여살고 그러면 그런 걸 왜 느끼냐고 타박줄 선배들도 있겠지만
더군다나 원래 친구들도 없는 마당에 거의 혼자 버려진 듯한 이 상황에서
이 난국을 어찌 타개할지 그게 상당히 궁금하다.
여자친구를 떠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그러기엔 너무나 늦은 것 같다.
대학원생이라서 자기 시간을 갖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인슈타인 박사처럼 연구에 몰두하다 가정을 내팽겨친 그런 사람이고 싶진 않다.
PART 12. (추가)
결혼식이니 장례식이니 그런 내용. 아직 받아본 적이 없다.
연구실 형 중 1명이 금명간 결혼하는데 그게 친척 외엔 사실 처음이다.
더 걱정은, 과연 내가 결혼한다면 몇 명이나 올지다.
답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답없다고 마냥 포기하고 살기엔 불편하다.
그냥... 사람 자체가 그리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