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백성의 소리?

이재욱201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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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여러 형태의 소통 중에서도 국가와 국민과의 소통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국가와 국민과의 소통의 연원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 끝에 결국 일각에서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신문고가 최초로 국가와 국민과의 소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신문고가 여론의 창구이며, 백성의 소리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과연 신문고를 진정한 백성의 소리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점에는 많은 의문이 든다. 신문고는 많은 한계점을 지닌 제도였고, 이는 백성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호소를 저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신문고를 동시대의 비슷한 제도였던 격쟁과 비교하면서 신문고가 갖고 있었던 한계점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 신문고란?

 

신문고는 만백성의 소리를 듣고, 억울함을 해소해 주겠다는 취지로 태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제도이다. 태종은 처음 신문고를 설치할 때, ‘등문고’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에서 유사한 역할을 했던 ‘등문고원’이라는 기관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는 만백성의 소리를 듣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한층 강조한 것이었다.

이러한 태종의 바람대로 신문고는 많은 백성의 의견을 듣고, 그들의 억울함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왕조실록』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는『태종실록』에 실린 오금록의 사례가 있다. 오금록이 헌부에서 소량장(양인을 호소하는 문서)를 접수하지 않자 신문고를 울렸고, 이 때문에 해당 관리들이 파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문고는 세종 때 신설된 부민고소금지법(백성이 관리를 고소할 수 없도록 하는 법) 의 영향으로 격고 사유가 개인적인 억울함의 범위로 축소되기도 했다. 게다가 세조 때에는 신문고를 누고(시간을 알리는 북)으로 오인해서 울리는 사건이 벌어져서 신문고가 한때 폐지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신문고의 수난시대는 계속되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영·정조 대에 이르러 국왕들이 백성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사를 표방하자 이에 힘입어 신문고 또한 이전보다 더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문고의 전성기는 잠시 동안의 일일 뿐이었다. 순조 대부터는 신문고는 다시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었고, 고종 20년 이후로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조차 등장하지 않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신문고의 한계점

신문고는 백성의 억울함을 해소해 주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백성을 위한 제도였다. 하지만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신문고에도 한계점은 있기 마련이었다. 신문고의 한계는 백성들과 신문고 사이에서 큰 장벽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신문고의 운영을 원래의 취지에서 상당부분 어긋나게 하였다.

우선, 신문고는 백성이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제도였다. 신문고의 위치는 수도인 한양, 그 중에서도 궐 안이었다. 그러므로 신분이 낮은 일반 백성은 신문고에 접근조차 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지방의 백성은 신문고를 울리려면 신문고에 도착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조선 시대가 농업을 주 생업으로 하던 시대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거의 농사를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백성이 신문고를 울리려면 그만큼 큰 위험부담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신문고는 수용할 수 있는 백성의 의견이 한정적이라는 점도 문제였다. 신문고는 사건사(적처와 첩의 분별, 형벌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 양인과 천인의 변별, 부자간을 밝히는 것)에 해당되는 사유에 한해서만 활용할 수 있었다. 물론 사건사는 백성에게 있어서 상당히 골칫거리가 될 만한 요소이기는 했다. 하지만 백성의 의견을 듣기에는 이는 턱없이 모자랐다. 백성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도, 그들의 생각도 매우 다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고는 백성들의 진정한 소리를 듣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복잡한 절차 또한 신문고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 백성이 신문고를 울리기 위해서는 먼저 수령에게 자신의 의견을 알려야 했고, 수령에게 답을 얻지 못하면 관찰사나 헌부에 알려야 했다. 그 후에도 관찰사나 헌부가 답을 주지 않으면 비로소 그때서야 백성들은 신문고를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이중, 삼중의 절차를 거치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따로 있다. 백성의 의견이 신문고를 울리더라도 관리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아닌 제3자에 의해 의견이 전달되기 때문에 충분히 상황에 따라서 의견이 왜곡되거나 무시될 수도 있었다. 이는 백성들은 결국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도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백성의 소리가 허공의 메아리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무고죄의 위중한 처벌도 신문고와 백성들을 갈라놓는 요소였다. 『태종실록』에서 이러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대호군 주옥룡의 이야기이다. 대호군 주옥룡은 전 장군과 노비의 소유권 문제로 다투다가 해결이 나지 않자 신문고를 울린다. 하지만 그 결과 주옥룡은 패소하여 무고죄를 받게 되었고 그 벌로 수군 병졸로 강등되었다. 대호군은 종3품에 해당하는 상당히 높은 직책이었는데 한순간에 무고죄로 인해 병졸로 강등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백성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무고죄를 받으면 큰 벌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무심코 한 격고로 인해 백성들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의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 신문고와 격쟁의 비교

조선시대에는 신문고처럼 백성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는 격쟁이라는 제도가 허용되어 있었다. 게다가 신문고가 북을 치는 형태였다면 격쟁은 징이나 꽹과리를 치는 형태였기 때문에 형태 면에서도 두 제도는 비슷했다. 하지만 이처럼 형제자매 같이 비슷했던 신문고와 격쟁에도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백성들의 입장에서 두 제도를 비교해 보자면 신문고보다는 오히려 격쟁이 백성들을 위한 제도였다는 것이다.

우선, 격쟁은 신문고에 비해서 백성에게 훨씬 가까운 제도였다. 신문고는 들어가기도 궐 안에 있는 북을 울려야만 했지만 격쟁은 징이나 꽹과리를 울리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징이나 꽹과리는 마을에 하나쯤은 있기 때문에 구하기도 매우 쉬웠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멀리 있는 관청에 찾아갈 필요 없이 손닿는 곳에 있던 징과 꽹과리를 들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들어줄 때까지 두드리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격쟁의 간단한 절차도 신문고에 대한 상당한 강점이었다. 백성이 신문고를 울리기 위해서는 이중, 삼중의 절차를 거쳐야만 했지만 격쟁을 할 때에는 그저 징이나 꽹과리를 울리기만 하면 됐다. 게다가 운이 좋아 어가의 행렬이 근처를 지나간다면 백성들은 왕에게 자신의 의견을 직접 전달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의견이 왜곡되거나 무시될 소지도 적어지는 것이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에게 의사를 전달하는데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격쟁은 신문고보다 다양한 백성들의 의견을 수용할 수도 있었다. 격쟁의 경우 사건사를 포함해서 사람들이 서로를 위하는 일, 지나치게 원통하거나 민폐가 되는 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수용범위에 포함되었다. 이는 신문고가 사건사의 범위에 한해서만 백성의 의견을 들을 수 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백성들의 진정한 의견을 하나라도 더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신문고는 백성을 위해 설립된 제도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백성들이 왕에게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백성들이 신문고와 비슷한 성격의 격쟁을 활용할 때는 훨씬 편리하고도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오늘날 백성의 소리라고 평가받는 신문고보다도 격쟁이 더 백성들에게 친화적인 제도였던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신문고는 진정한 백성의 소리였다고 보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