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동북부 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2년이 되어간다.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고 수십 만 명 삶의 터전이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렸다. 사고 발생 직후의 충격은 어느덧 희미해졌지만 시커멓게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는 아마 모두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후쿠시마는 지구 구조상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자연재해의 이미지에 하나를 더 얹었다. 핵발전소에서 새어 나오는 치명적 재앙, 방사능의 이미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 나라의 재난은 우리 일상생활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더욱 현실로 다가온다. 후쿠시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재난은 일상화된 듯 보이고 거대한 자연의 힘과 인간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개인은 무력감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예술이 현실에 대해 갖는 영향력을 과신하는 ‘허세’가 아니다. 거대한 재앙 앞에 한없이 나약한 인간에게 현실을 뛰어넘는 소생의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부인하긴 어렵다. 한 점의 그림, 한 장의 사진, 한 사람의 노래와 몸짓이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재난을 재현하거나 재난 현장에 직접 개입하는 예술가의 활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지난 1년 반 동안 ‘재난’을 주제로 한 전시들이 다양하게 열렸다. 전쟁과 테러, 자연재해 등 대형 재난에 대한 직접적 반응 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스며든 일상적 불안과 우울함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는 현상은 21세기 초입에 세기말적 증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재난 현장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그러나 예술가들의 활동이 전시장 안에만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은 긴급 구호 활동가들처럼 현지에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함께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시각적인 결과물을 제작하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는 개인의 치유를 돕고 공동체의 힘을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다.
침↑폼(Chim↑Pom)은 도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작가 6명이 모인 아티스트 그룹이다. 이들은 30대 이하의 젊은 세대이며 사회 비판적인 퍼포먼스와 미술작품으로 알려졌다. 특히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핵문제에 집중한 퍼포먼스로 주목받고 있다.
침↑폼 작가들이 후쿠시마현 소마시의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기합 100연발(KI-AI 100)>은 매우 단순한 영상이다. 어깨동무를 하고 둥글게 둘러선 참가자들이 바닥에 둔 카메라를 바라보며 번갈아 구호를 외친다. 모두가 10번씩 구호를 외친 다음에는 손을 모으고 ‘와아아아!’ 하는 함성을 지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별다른 편집 없이 참가자들의 얼굴과 그들의 구호를 담은 이 작업은 묘하게 감동을 준다. “힘내라”는 내용이 주종을 이루는 단순한 구호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서로에 의지하여 점점 자신감이 붙는다.
가토 쓰바사(Kato Tsubasa)의 <11.3 후쿠시마> 프로젝트는 좀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가토 쓰바사는 건축물을 만들어 일으키거나 쓰러뜨리는 작업을 주로 해 왔다. 사람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지만 동시에 이를 넘어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 있다. 작가는 이것을 눈에 보이는 실체로 만들고자 한다. 사고 후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한 마을에 들어가 봉사활동을 하던 작가는 마을에 남은 집의 잔해를 모아 ‘등대’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3.11을 거꾸로 한 11월 3일 일본 ‘문화의 날’에 마을 사람들의 힘을 모아 등대를 끌어올려 세웠다.
제의와 환상을 넘어서
재난에 대응하는 예술의 어떤 경향은, 이렇듯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함께 행동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키려고 한다. 사실은, 아무런 답도 보이지 않는 지금 나서서 뭔가 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은 칭찬받아 마땅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수고로움과 감동이 치유와 복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 최고!”, “우리는 친구!”라는 구호가 단결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관람자와의 연대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탑을 들어 올리는 제의적 행위는 기원을 위한 것일 뿐, 현실의 문제는 그대로 놓여 있다. 피해지역 주민들의 고통을 마주한 관람자들은 감동과 미안함의 눈물을 흘릴 수 있지만, 그 눈물은 한 편의 재난영화를 보듯이 안도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술의 시도가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접근에 그친다면, 무책임하다거나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에 편승한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예술의 개입은 제의에 그치거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의 힘을 모으는 것이 시작임을 인정하지만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부조리를 지적하지 못하는 맹목적인 단결의 요구는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피해지역 학생들에게 애향심과 애국심을 확인하기 위해 방사능 우유를 마시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위험도를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운 재난지역에 계속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주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재난에 직접 개입하는 예술은 참여자와 대화하는 과정에 중심을 두어야 하며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재난과 미술, 후쿠시마 이후 미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후쿠시마 이후, 재난과 예술
일본 동북부 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2년이 되어간다.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고 수십 만 명 삶의 터전이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렸다. 사고 발생 직후의 충격은 어느덧 희미해졌지만 시커멓게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는 아마 모두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후쿠시마는 지구 구조상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자연재해의 이미지에 하나를 더 얹었다. 핵발전소에서 새어 나오는 치명적 재앙, 방사능의 이미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 나라의 재난은 우리 일상생활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더욱 현실로 다가온다. 후쿠시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재난은 일상화된 듯 보이고 거대한 자연의 힘과 인간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개인은 무력감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예술이 현실에 대해 갖는 영향력을 과신하는 ‘허세’가 아니다. 거대한 재앙 앞에 한없이 나약한 인간에게 현실을 뛰어넘는 소생의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부인하긴 어렵다. 한 점의 그림, 한 장의 사진, 한 사람의 노래와 몸짓이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재난을 재현하거나 재난 현장에 직접 개입하는 예술가의 활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지난 1년 반 동안 ‘재난’을 주제로 한 전시들이 다양하게 열렸다. 전쟁과 테러, 자연재해 등 대형 재난에 대한 직접적 반응 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스며든 일상적 불안과 우울함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는 현상은 21세기 초입에 세기말적 증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재난 현장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그러나 예술가들의 활동이 전시장 안에만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은 긴급 구호 활동가들처럼 현지에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함께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시각적인 결과물을 제작하는 데 목적을 두기보다는 개인의 치유를 돕고 공동체의 힘을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다.
침↑폼(Chim↑Pom)은 도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작가 6명이 모인 아티스트 그룹이다. 이들은 30대 이하의 젊은 세대이며 사회 비판적인 퍼포먼스와 미술작품으로 알려졌다. 특히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핵문제에 집중한 퍼포먼스로 주목받고 있다.
Chim↑Pom, KI-AI 100 (detail), 2011, Video. (출처: http://momaps1.org/slideshow/view/279/)
침↑폼 작가들이 후쿠시마현 소마시의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기합 100연발(KI-AI 100)>은 매우 단순한 영상이다. 어깨동무를 하고 둥글게 둘러선 참가자들이 바닥에 둔 카메라를 바라보며 번갈아 구호를 외친다. 모두가 10번씩 구호를 외친 다음에는 손을 모으고 ‘와아아아!’ 하는 함성을 지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별다른 편집 없이 참가자들의 얼굴과 그들의 구호를 담은 이 작업은 묘하게 감동을 준다. “힘내라”는 내용이 주종을 이루는 단순한 구호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서로에 의지하여 점점 자신감이 붙는다.
Kato Tsubasa, 11.3 Fukushima, 프로젝트 스틸사진, 2011. (출처: 월간미술 2012. 4월호)
가토 쓰바사(Kato Tsubasa)의 <11.3 후쿠시마> 프로젝트는 좀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가토 쓰바사는 건축물을 만들어 일으키거나 쓰러뜨리는 작업을 주로 해 왔다. 사람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지만 동시에 이를 넘어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 있다. 작가는 이것을 눈에 보이는 실체로 만들고자 한다. 사고 후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한 마을에 들어가 봉사활동을 하던 작가는 마을에 남은 집의 잔해를 모아 ‘등대’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3.11을 거꾸로 한 11월 3일 일본 ‘문화의 날’에 마을 사람들의 힘을 모아 등대를 끌어올려 세웠다.
제의와 환상을 넘어서
재난에 대응하는 예술의 어떤 경향은, 이렇듯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함께 행동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키려고 한다. 사실은, 아무런 답도 보이지 않는 지금 나서서 뭔가 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은 칭찬받아 마땅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수고로움과 감동이 치유와 복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 최고!”, “우리는 친구!”라는 구호가 단결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관람자와의 연대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탑을 들어 올리는 제의적 행위는 기원을 위한 것일 뿐, 현실의 문제는 그대로 놓여 있다. 피해지역 주민들의 고통을 마주한 관람자들은 감동과 미안함의 눈물을 흘릴 수 있지만, 그 눈물은 한 편의 재난영화를 보듯이 안도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술의 시도가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접근에 그친다면, 무책임하다거나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에 편승한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예술의 개입은 제의에 그치거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의 힘을 모으는 것이 시작임을 인정하지만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부조리를 지적하지 못하는 맹목적인 단결의 요구는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피해지역 학생들에게 애향심과 애국심을 확인하기 위해 방사능 우유를 마시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위험도를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운 재난지역에 계속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주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재난에 직접 개입하는 예술은 참여자와 대화하는 과정에 중심을 두어야 하며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