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사실 짜집기적 거짓 만들기"가 가능한 기사나 언론만 보지 마시고,
제대로된 증거자료를 찾아보시고 나서 욕을 하던지, 말던지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는 것은 본인입니다.
경찰,군인을 사칭해 사진을 찍어, 직접 진압하지도 않은 장면을 진압한 것 처럼
가장하여 유포한 것 보고 소름이 끼칩니다...
또한 광주사태(중립적 단어)에 사망자가 2000명이었다 100명대로 줄었다는 사실도
... '노무현 정부'때 5공청문회가 오고 나서도 그 사망자 수는 100명대로 변동이 없었다는 것
또한 소름이 끼치네요.
5만명이 넘는 시위군에게 무차별적 사격을 했다면 어째서 사망자수가 200명도 채 안될까요?
왜 2000명으로 부풀려졌으며, 왜 200명도 안되는 사람들중 70명은
국가에서 사용하지 않은 총탄에 의해 사망한 사람입니다. 즉 서로 적군으로 오인하여
아군을 쏜 것입니다. 무기고에서 턴 무기로 서로를 죽인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진정한 시민이라면 자기 아들딸 뻘인 중학생들을 앞세워 진격을 합니까?
무섭네요.
왜, 진압이 광주안에서 다른 지역의 국민들이 모르게
진압된 것 처럼 포장을 할까요? 당시 기사를 보면 진압은 비밀리가 아니었습니다...
이 글의 증거자료대로라면, 광주사태를 진압하지 못했다면, 제 2의 6.25가 일어나여
적화통일 될뻔 하였네요.
왜 이 것들을 잘 모르고있죠 우리나라 국민들이? 어째서 북한의 국민들이 더 잘알고 있나요?
어째서 북한 국민들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 칭하며 찬양하지요..? 왜 생중계 되었으며..
또 세계에서 2번째로 못살던 나라의 시민이
도청지하 tnt설치는 어찌 했으며, 무기고 44곳을 어떻게 정확히 털도록 지휘할 수 있었으며..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왜 요즘 영화에서는 화려한 휴가,26년,남영동 1985 등...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진압의 수위까지 과장하여 표현하며,
역사적 사실을 쓰지않은 허구 영화... 게다가 이 3영화의 공통점은
'현재 북화하여 김정일,김일성을 찬양하여 떠 받드는 인물'을 굉장히 많이
미화하고 있습니다. 남영동 1985에서는 8명 이상정도 되더군요..
무슨 대선다가오니까, 이런 말도안돼는 영화를 만들어 하는지요.
왜 이러한 증거자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자료도 없이 무조건 욕만해대는 사람은 왜그러는 걸까....
rkdqnwkd18
님의답변
님 보고있는 혹은 봤던 교과서
5.18에 관한 내용은 거짓말이고 사기입니다.
교과서라고 종교처럼 믿는다면 맹신이요 미신이지요.
특히 5.18관련내용은
황석영이 89년 월북해서 김일성 지령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입니다.
그걸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한거죠
그래서 내용에 앞뒤가 맞지 않고 이상한겁니다.
5.18옹호론자들의 주장 수사기록은 신군부가 작성한것이므로 믿을수없다. 교도소 습격사건은 조작이다. 탈북자들의 주장은 증거가 없다. 5.18측 자료는 유네스코가 인정했으므로 믿을수있다. 전두환은 하극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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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측은 5.18측 주장만 옳다하고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5.18측 주장이 틀렸다고 하는겁니다. 그러니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신다면 5.18측이 제시하는 자료들중 의문나는 점을 해결해줘야 하는겁니다.
그런데 그 의문나는점이 5.18의 핵심 내용입니다. 5.18이 일어나게한 원동력이고 확장되어 대규모 무장시위를 하게된 두뇌라고 할수있죠
다이너 마이트가 광주 시민이라면 이 다이너 마이트가 터질수 있도록 불을 당긴 사람말입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서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이런 5.18을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측의 자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누군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그렇다 하기에 확인도 하지 않고 쫒아가서 얼떨결에 민주화운동했다....입니다.
그럼 왜 누군가가준 정보 그리고 누군가가준 정보의 진위확인이 중요한지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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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차가 도로가에 한대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 앞에는 한 여인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 옆에는 운전자가 그 여인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10여명의 남자들에게 누가 차로 저 여인을 치어 살해했다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 10명의 남자들이 화가 단단히 나서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려 합니다.
헌데 누군가 이들에게 몽둥이를 줍니다.
그 몽둥이를 들고 사건현장으로 달려가 그 운전자를 두들겨 패 줍니다. 그리고 운전자가 사망했습니다.
자 이 10명의 남자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 일까요?
나중에 안 사실은 도로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여인을 운전자가 발견하고 앞에 차를 세웁니다. 그 여인의 상태를 확인하려 앞에 서있었던 겁니다.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누가 10명의 남자들에게 그 정보를 줬는지 누가 몽둥이를 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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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런질문을 할수있을겁니다.
만약 실제 그 운전자가 그 여인을 차로 치었다면 그들은 의인인가? 폭력배인가?
이에 대한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렇다면 민주화운동이란것이 모 아니면 도로 정확한 사실확인 없이 누군가의 말에 의존하여 일단 저지르고 본다음 운좋게 맞아떨어지면 민주화운동이되고 아니면 폭력배가 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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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기 때문에
최초정보제공자
최초정보전달자
정보의 진위확인자가 중요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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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정보말이죠 이는 엄청난 중대 사건입니다.
한나라의 정권을 무력으로 잡겠다는거죠 그럼 이 정보를 누군가 알아내서 대학생이나 광주시민에게 전달했을거 아닙니까?
그사람이 누구입니까?
설마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떤이가 그런 중요한 정보를 광주시민에게 전달하여 무장투쟁을 하자 했는데
아무런 확인도 없이 네~그렇군요 하고서는 무기고 탈취하여 계엄군에 총을 쏜게 아니것죠
그리고 그 누군가 즉 정보를 전달한 이의 정보가 정확하다는걸 광주시민들은 어떻게 확인하였는가?
(전두환이 국권을 찬탈하려한다.
최규하는 허수아비다. 이에대한 정보 진위를 어떻게 확인했나요?)
사실확인을 했으니 "맞다!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한다 는 정보와 사실이 딱~ 맞다" 인정하고 무장투쟁을 했겠지요.
이런 사실확인도 없이 무작정 무기고 털어서 무장항쟁을 하진 않앗겠지요
자! 누가 어떤경로로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내서 광주시민 누구에게 전달하였고
그 광주시민은 어떻게 그 사실이 맞다는걸 확인 하였는지 설명해 주시죠.
38개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왜 나타나질 않는가? 국가 유공자가 뭔지 몰라서? 죄의식때문에? 아니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안사람은 현재 대한민국에 살지 않아서? 설마 귀신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알려줬다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겟죠.
누군가는 알고있었것지?
무기고 탈취는 매우 중요한 대목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위치를 누가 알려줬는지 아무도 모른다?
즉 5.18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이 있기는 한데 누구인지는 모른다?
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 광주5.18의 핵심 역할을 한사람 이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보 유출자 정보 전달자 정보 확인자 정보 확산자
무기고 위치를 알고있었던자 최소38명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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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보제공자와 38개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가 누구인의 중요성이 또하나 있습니다. 만일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위 정보제공자들을 알지못한다면 5.18의 주인이 바뀔수 있다는 겁니다.
5.18의 주연급들이 누군인지 모르기때문에 막말로 개나 소나 돼지가 와서 그 정보는 내가 알려줬다 라고 한다면 5.18의주인이 정신병자 혹은 개나 소나 돼지가 될수 있는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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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정보제공자 무기고 위치 정보제공자 이들이 사망했다 가정한다면 만약 이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하더라도 또다른 의문이 여기 가세하는 겁니다. 이 중요 정보제공자의 정보를 확인한 절차가 없다는것이 이상한겁니다. 누군가 최초 정보를 줬는데 100퍼센트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위를 했다? 극비사항인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 알고있어 안내하는데 이에 아무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38개 무기고를 털러간 38개 조직이 있습니다. 이 조직들중 극비사항인 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에 대하여
신분이나 그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의혹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면 결국 5.18주인공은 북 특전사 출신들이 되는겁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소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그런데 북특전사 출신들이 그 누군가가 우리요 하고 5.18의 주인임을 천명했고 이에대한 구체적 진술을 했습니다.
자 이 사건 즉 북특전사들의 증언
이들이 증언한 5.18관련 내용의 의미가 바로 5.18주인이 없다는 것이고, 5.18측에서 그 누군가를 제시하지 못하면 5.18주인은 북특전사가 될수있는겁니다.
특히 유언비어 그리고 38개 무기고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여 38개 분팀을 만들어 무기고까지 갔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5.18이 순수 광주시민들에 의해 일어났다면 빨리 정보제공자 ,38개 무기고위치 정보제공자를 찾아내야 하는겁니다
누군가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다. 운전자는 도망쳐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동차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럼 자동차가 범죄자인가? 운전자가 범죄자죠? 그 운전자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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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5.18유네스코등재 설명은 매우 간단합니다. 히로시마 원폭돔도 평화의 상징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특별한 사건이면 무엇이든 등재시킬수 있는곳입니다.
법(ex post facto law, retroactive law)의 금지를 말한다. 소급입법금지원칙이라고
도 한다.
한국 헌법은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헌법 제13조 제1항 전단). 이는 적법한 행위에
대하여 사후에 이를 처벌하는 소급법을 제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또 그러한
방법으로 형을 가중하는 것도 금지하는 것이다
============================
헌법 제 84조 =================================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 이조항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는 재직중에도 형사 소추를 받는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하는 오류를 범할수 있습니다.
내란 또는 외환 이외의 죄는 재직후 형사상 소추를 받는다
그러므로 공소시효가 재직중에는 정지되었다로 볼수있다.
이렇게 오류를 범할수 있습니다. ---------------------------------------------------
과연 대통령은 재직중에 내란,외환 이외의 죄는 형사상 소추를 받을수 없는가.
받을수 있습니다.
재임중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형사상 소추를 할수 있습니다.
탄핵을 하면됩니다.
탄핵후 형사상 소추를 하면됩니다.
즉 공소시효가 정지 되는것이 아닙니다. -----------------------------------------------
삼권분립주의와 법치주의에 의하여
입법부 -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주면. (우두머리 국회의장)
행정부 - 정부기관에서 그 만들어진 법을 구체화하여 집행하고 (우두머리 대통령)
사법부 - 법률상의 위법여부를 판단해서. 분쟁해결과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기관입니
다. (우두머리 대법원장)
이 이상 혹은 동등한 기관이 있을수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름처럼 헌법을 재판하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을 재판하는 곳도 아닙니다. 입법부,법원의 시다바리가 바로 헌법재판소 입니다.
법원의 재판사항에 관여,판결할수도 없습니다. 조문숙 법학자의 말처럼
수사기관에서 지문감식반에 지문감식을 의뢰하면
지문 식별만 해주면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즉 헌법재판소는 수사기관의 지문감식반같은 곳입니다.
만약 민주화빨갱이들의 논리대로
헌법재판소가 입법,사법,행정부등과 동등하다거나 그 위에 설수있다면
대한민국은 헌법재판소가 점령한 독재국가가 되는것입니다.
현재 네이버 백과사전등에 올라있는
소급효 소급입법에 관한 내용은 1995년
5.18특별법을 억지로 제정하기 위해
민주화빨갱이들과 헌법재판소가 작당하여
사기친 내용들 입니다.
결국 이들은 이사실을 더이상 숨기지 못하고
5.18특별법을 개정했습니다.
헌법 제 84조 =================================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
그러므로 공소시효가 재직중에는 정지되었다로 볼수있다.
로 해석하여 1995년 5.18특별법에 ---------------------------------------------------
헌법 제84조 공소시효에 관한 내용(오일팔 특별법 제2조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헌정질서 파괴 범죄 행위에 대하여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것으로 본다(제1항) 제1항에서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기간 이라 함은 당해범죄행위의 종료일로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제2항)고 하였다가.
계엄사령관은 대통령 혹은 국방장관의 지휘 감독아래 계엄군을 동원비상목표에 출동을 시키는것이
정상적인 상황이다
그런데.정승화 김재규 김계원은거꾸로
그리고 김재규의 명령에따라
20사단 30사단 9공수여단을 출동시킨후
방송국,변전소,은행 등을 점령시키고나서
국무위원과 최규하를 국방부로 불러들여
어서 계엄을 선포하라 한것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최규하 국무위원들은 쿠데타임을 직감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던중
신현확 부총리의 강력한 반발로 불법적인 계엄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이에 국방부 장관은 김재규 체포를 전두환에 지시했고 김재규는 체포되었다.
하지만 정승화는 자신의 행적을 누구에게도 발설 하지 않아
이사실을 몰랐던 최규하 국무위원들은
범죄자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김재규가 전두환에 체포되고 나서
김재규는 전두환에 정승화 김계원과 콤비 플레이한것을 실토했고
이로인해 전두환은 모든것을 알게되었지만
범죄자 정승화는 막강한 권한과 권력을가진 계엄사령관이 되어있었다.
계엄선포가 왜 이들에게 급선무였나?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쿠데타를 할마음이 없었다면
제일먼저 직속상관인 노재현국방장관에 보고를하고
대통령 시해범을 잡기위해 자동규칙 청와대경호비상 제1호인
호랑이1호를 발령하여
경호실 병력을 출동시켰어야 했으며
또 노재현국방장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시해현장을 조사 범인체포 잔존 쿠데타세력을 체포하란 지시를 내렸을것이다.
정승화가 김재규를 도와 쿠데타할 마음이 없었다면
차지철만 지휘할수있는 수경사와 경호실에 병력이 쿠데타세력을 잡기위해
청와대로 가는것을 금지시키는 월권적인 명령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정승화가 후에 차지철이 범인이라 생각했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만약 차지철이 쿠데타 세력이었다고 믿었다면
차지철이 지휘감독하는 수경사 전성각과
경호실차장 이재전에 전화를 걸어 병력동결 명령을 할수는 없는것이다.
결국 정승화는 김재규의 쿠데타를 적극 도왔고
이를 몰랐던 최규하와 국무위원들의 실수로
범죄자 정승화는 막강한 계엄사령관이 되었고
극비에 체포할수 밖에 없는 성향의 범죄자였던 것이다
정승화는 한술더떠 계엄 포고문까지 스스로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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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난동 부분 요약
장태완은 보안사에서 정승화를 연행해간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합수부에서 정승화 같은 위치의 사람를 연행해가면 어떠한 범죄사실때문이라는것도 상식으로 알고있었다.
그런데도 친분을 이유로 수경사령관 월권적 행위를 한것이고 무력을 동반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승화가 장태완을 수령사령관에 임명했을때도 장태완은 정승화에 충성을 다할것이라 했다. 장태완은 정승화의 개인적 사병이었던 것이다.
나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다. 총장님 공관에 이미 연락이 돼 있다.”
해병 헌병이 총장공관으로 연락을 하더니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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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30경비단장, 경복궁 위치) 김진영(33경비단장, 필동 수경사 외곽에 위치)
30경비단은 대통령 방호부대다.
설사 수경사 사령관이 공격해 오더라도 이를 방어할 의무가 있다.
청와대 울타리 내부 경비는 55대대가 담당했다.
55대대의 모체부대는 30경비단이다.
외곽 경비는 나머지 30경비단이 담당한다.
외곽과 내곽이 뚫리면
마지막으로 경호실 경호관들이 대통령을 보호한다.
30경비단장이 부대를 이끌고
그의 예하 부대인 55대대가 경비하는 곳을 향해 진군해 와도
그 예하인 55대대 대대장은 상관을 상대로 방어를 해야 한다.
여기에 하극상이란 있을 수 없다.
12월 12일 오후 4시경, 장세동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에 30단에 장군 몇 분이 오시게 되어 있다.
장군들에 대한 시중을 병사들에게 맡기기도 좀 뭣하다.
차나 마신다고 하니 인사도 드릴 겸 해서 나와 함께
안내하는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전화를 받고 나는 6시 15분경에 30경비단 단장실로 갔다.
어느 장군이 오는지, 왜 오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들은 바 없었다.
30경비단장실에는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가 앉아
그날 끝난 장군 진급심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장군 세계에서 장군들의 진급소식은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 후 다른 장군들이 속속 도착했다.
6시30분경, 장세동이 전화를 받더니 장군들에게,
‘합수부장이 대통령 보고사항이 있어서 좀 늦는다’는 전갈을 전했다.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으로부터 받은 전화내용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늦겠다는 전갈을 받은 장군들은 장세동에게
“뭐 먹을 것 좀 없나, 있으면 좀 가져오지” 하여
초밥과 맥주를 급히 구해드렸다.
7시40분경, 장세동이 허화평으로부터 또 다른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장세동이 전화 받은 내용을 장군들에게 알렸다.
“정승화가 10.26과 관련하여 연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격이 있었다.
대통령 재가는 이에 관한 것이다.
+++++++++++++++++++++
8시30분경,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최세창과 장기오가 “비상이 결렸으니 부대로 가봐야겠다”며 일어섰고,
나머지 장군들도 부대에 전화를 걸어
부대장악을 잘 하고 있으라 당부들을 하면서
전두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장군들이 부대출동을 결심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놀라 부대에 전화를 걸어 부하들을 챙겼을 뿐이다.
12.12 이후 장태완은 예편해 있었다. 장태완은 12.12 때 그가 병력을 동원한 것을 후회했다. 합수부가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규명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은 정의로운 애국의 길이었다고도 말했다. 장태완을 한국전산회사에 사장으로 근무시켜 걱정 없이 살도록 배려해준 것에 대해 장세동에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하여 전해 준 일이 있다. 그리고 장태완이 심근경색증을 앓고 있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경비를 대주어서 미국에 가서 수술을 받게 해준 데 대해 고맙다고 했고, 또 이 고맙다는 이야기는 장태완이 여러 사람들에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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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상 징후가 있으면 연대장도 발령할 수 있는 것
재가+++++++++++++++++++++++++++++++++++++++
최규하는 전두환의 재가 보고를 듣고서는 국방장관을 불러오라 했다. 부결할 마음이 있었다면 즉시 부결을 하지 왜 국방장관을 전두환더러 불러오라 했겠나. 전두환 입장에서도 반란을 일으키려했다면 최규하를 협박하여 즉시 재가를 받았으면 될일이었다.
대통령께서는 국방장관을 배석시켜서 재가를 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국방장관을 빨리 찾아서 배석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가서 빨리 찾아오겠습니다 말씀드리니까 비서들 시키면 빨리 찾아올 텐데, 서울에 있는 사람이 어디로 갔겠나, 앉아서 차나 마시고 기다려 봅시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을 두 시간이상 모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저도 여러 가지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 어른이 기분이 나빠서 장관의 결재도 없이 이런 것 결재할 수 없어, 저보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라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저런 시국얘기도 듣고 저도 말씀드리고 이래서 근 두 시간 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국방장관의 결재가 없이 내가 결재하지 못하겠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은 전혀 없습니다.
연행에 동조할 수 있는 철학을 가진 군의 여론 주도층에게 연행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동조를 얻으려
초청된 장성은 유학성(군수차관보), 차규헌(수도군단장), 황영시(1군단장), 노태우(9사단장), 박준병(20사단장), 박희도(1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장기오(5공수여단장), 백운택(71방위사단장), 이렇게 9명이었다. 여기에서 백운택 장군은 우연히 보안사에 들렸다가 합석을 하게 된 것이다.
수경사령관은 병력과 포를 가지고 공격해 오겠다 압박을 가해오고, 참모차장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세력은 거병을 하려하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마냥 노재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는데 이들 장군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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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두환 일행이 총리공관을 나갈 때가지 총리공관 경비는 구정길 중령이 담당했던 것이다. 전두환 측이 무장 경비병을 깔아놓고 재가를 받기 위해 최규하에게 공포감을 주었다는 검사의 주장과 판사의 판시가 억지인 것이다. 구중령의 진술에 대해 당시 총리공관 경비를 인수한 최영덕(1928년생, 당시 총경) 101단장은 94년 2월 15일, 서울지검 918호 검사실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2월12일, 7시30분경, 고명승 대령이 만나자 하여 경호실 차장실로 갔더니 고대령이 함께 총리공관으로 가자하여 동승했다. 고대령이 구중령에게 공관경비를 101단에 맡기고 철수하라 하자, 구중령이 자기에게도 지휘계통이 있으니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겠다며 나가더니 20-30분 후에 의전수석인 정동열과 함께 왔다. 정동열은 이 사람들이 그동안 수고했는데 오늘은 공관 막사에서 자고 내일 철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떠냐 하기에 고대령이 동의했다. 나는 즉시 명령을 내려 공관경비를 인수했다. 경호실장 정동호는 정수석이 오기 조금 전에 도착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높은 사람들이 구정길을 강제로 제압했겠는가?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공관으로 갈 때 나와 고대령 두 사람만 갔다. 그날 밤 내내 두 사람이 함께 근무했다. 그 후 간혹 55경비대장인 임재길 중령이 안내소를 방문한 적은 있었다. 공관 출입자 통제는 의전비서실이 하는 일이었고, 우리는 경비만 했다. 출입자를 통제한 적도 없고, 공포감을 조성한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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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1공수는 당연히 출동준비를 해야 했고, 출동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국방부와 육본으로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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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 합참의장과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차례로 수경사에 가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전화를 걸어 정승화의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한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개인적인 것이니, 병력 동원을 금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 연합사 상황실에 피신 중에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도 김용휴 차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밤 11시경에 수경사에 가 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병력동원을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경사에 모여 있는 장군들이 병력동원을 협의하고 있는 모양인데 절대로 병력을 동원하지 말라. 합수부의 총장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총장 개인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이니까 장군들에게 흥분하지 말고 있으라 하라. 보안사령관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니 내일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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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부 차장에서 곧바로 그 막강하다는 수경사령관에 임명된 것이다. 수경사령관은 통상 참모부장을 마친 고참 부장급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런데 정승화는 신출내기 차장급에 있는 장태완을 파격적으로 수경사령관에 임명한 것이다. 그가 취임하던 11월 16일, 수경사 장교식당에서 가졌던 취임축하 리셉션에서 그는 이렇게 흥분했다.
나 같은 촌놈이 수경사령관이 된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수경사령관에 임명해준 정승화 총장에게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며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정총장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다. 정승화 총장을 위해여 건배~
수경사령관은 대통령을 수호하는 공화국 사령관이다.
하지만 정승화는 본인의 직분보다는 정승화를 위해 행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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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진실 요약
5월 18일(일요일) 새벽에는 이미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이 휴교령은 헌법기관이 내린 정당한 명령이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가 1개 대대씩 들어가 있었던 것은 평소에 계획돼 있었던 부대배치 계획에 의해 자동적으로 배치된 것이며, 2개 대대 규모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상징적인 규모에 불과했다. 2개 대대를 내보낸 것은 순전히 계엄사 작전계통과 계엄사령관 사이에서 취해진 조치였고, 여기에 전두환이나 정호용 등이 개입한 증거는 없으며 그렇게 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계엄군의 배치는 합법적인 것이었으며 배치된 계엄군의 지위야말로 헌법기관이었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 9시경, 광주의 대학생 들은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을 위반했다. 200여명의 대학생들이 전남대 도서관에 간다는 이유를 내걸고 학교에 진압하려 했지만 정문에 이미 배치돼 있던 공수 7여단 병력 20여명이 이들에게 귀가를 종용했고, 귀가의 종용은 정당한 임무수행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고 가방에 숨겨온 돌멩이를 꺼내 계엄군에 던져 부상을 입혔다.
도서관에 가겠다는 학생들이 가방에 돌을 숨겨 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5.18측은 계엄군이 먼저 학생들을 공격했다고 하지만 수사기록에는 분명히 학생시위대가 먼저 계엄군을 공격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계엄군이 쫓아가자 학생시위대는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몰려가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수많은 시민을 결집시켜 파출소를 파괴 방화하고 경찰관들을 폭행했다.
이는 각본이 있는 행동이었다.
공수부대가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화려한 휴가’라는 암호명으로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를 비롯하여 경상도 군인들이 대검을 가지고 전라도 여인의 가슴을 도려내고 머리 껍질을 벗겨 매달아 놓았다는 식의 유언비어들이 사람에서 사람의 입으로 전달되는 동안 증폭되어 나돌았고, 이에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경상도 사람들을 집단으로 구타하여 살해했고, 경상도 차량들을 보면 불태워 버렸고, 경상도 사람이 운영하는 상점을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7여단이었고, 7여단의 주둔지는 전북 금마, 여단 병력의 40%는 호남출신이었다.
유언비어는 모두가 거짓이었고, 그 제작 진원지는 북한이었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과 정기간행물들에 그 괴담들이 실려져 있었다. 1980년대 대학가를 물들인 ‘찢어진 깃발’의 진원지도 북한이었다(솔로몬 앞에 선 5.18). 모두가 광주시민들에 내재해있는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증폭시키려고 제작된 고도의 심리전 전술로 작성-유포된 것들이었다.
유언비어에 자극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여기에 더해 평소에 사회를 뒤집어보고 싶었던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으로 대표되는 소외계층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삽시간에 배수 단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파출소들이 수도 없이 파괴-방화되고 경찰들이 매 맞고 인질로 잡히는 등 경찰력은 단 두 시간 만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에 다급해진 전남경찰과 전남도지사는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은 시내로 나가 길목을 지키면서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을 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공수부대를 상대로 화염병을 던지고 옥상에 올라가 역기와 화분을 머리위로 던진 존재는 시위대였고, 시위대의 지나친 폭력이 계엄군의 반적용을 유도한 것이다. 시위대의 요구는 김대중 석방,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 계엄령 해제 등이었다.
이러 요구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의 요구였고, 이 요구는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내각을 일거에 전복하려는 요구들이었다. 광주는 폭력, 방화, 살인이 난무하는 광란의 도시였다.
거리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방화되어 광주시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는 시위대가 계엄군을 상대로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인 살육전을 벌였고, 수십 개의 파출소, 도청의 6개 부속건물, 세무서, MBC, KBS 등 공공건물에 대한 무차별한 파괴와 방화 작전이 수행됐다.
계엄군이 교외로 나간
5월 22일 새벽부터는
시위대가 점령한 광주시와 시위대가 점령한 17개 시군을 연결하기 위한 공격과 6회에 걸친 교도소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폭도 사망자만도 28명으로 집계됐다.
광주시위의 폭력과 과열성은 5월 19일 밤부터 5월 21일 오후 5시까지에 절정을 이루었다.
광범위하게 널려진 파출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하고 계엄군을 조롱하면서 감정을 유발하고,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정렬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장갑차, 군용차, 대형 화물차, 버스를 기발한 방법들로 계엄군을 향해 돌진시켰다. 돌진차량 운전수를 잡아보니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나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공격들은 총알보다 더 공포스러운 살인공격이었고,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지휘한 지도부가 기록에는 없다.
이러한 공격들이 과연 지도부 없이 시민들이 알아서 한 행동일까?
광주시에는 5월 22일에야 비로소 광주유지들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등장하여 무기 회수를 주도했고, 이에 병행하여 김창길(22세 대학생)이라는 온건파가 주도하는 ‘학생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 졌으나 이후 3일간 이들 간에는 무기반납을 놓고 벌이는 강온파 간의 대립이 연속됐다.
5월 25일부터는
강경파인 김종배(26세 대학생)가 김창길 위원장을 제치고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됐고, 학생수습대책위는 시민군 지휘부가 됐다. 이때 화려한 휴가에서 시민군 대장으로 등극한 박남선(26세, 골재운반 화물차 운전수)은 시민군 지휘부의 상황실장 자리를 맡았고, 5.18 최고의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겨우 대변인 자리를 맡았다.
상황 기록들을 보면 5월 25일 이전, 윤상원과 박남선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는다.
종북 좌익들이 애국가 대신 부르는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여기에서의 ‘임’은 김일성이라는 설도 있고 윤상원이라는 설도 있다. 좌파들은 윤상원이 5.18의 꽃이라 했지만 윤상원은 불온서적을 취급한 녹두서점 점원이며 공원들을 상대로 야학을 지도한 30세의 청년에 불과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시민군 대장으로 윤상원을 내세우지 않고 5월 26일에 상황실장으로 임명된 박남선(배우 안성기)을 내세웠다. 영화에서는 박남선을 예비역 공수부대 대령으로 신분을 도용했지만 박남선은 당시 26세의 골재채취화물차 운전병이었다.
공수부대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26세 골재채취운전병에 불과했던 시민군의 상황실장 박남선을 공수부대 대령출신으로 둔갑시키고 7공수여단장 신우식 준장과 동기생인 것으로 묘사한 것은 5.18의 열등의식을 웅변적으로 나타내준 것이다.
아마도 광주시위는 양아치들의 잔치라는 세간의 조롱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나타나있지는 않았지만 광주에는 숨어 있는 지도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강력한 심증을 갖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 중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44개 무기고의 동시 탈취다. 시위대가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사실에는 ‘불법’이라는 의미가 부여됐을 뿐, 이제까지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고가 탈취된 과정을 보면 여기에는 분명히 지휘부가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일반 시민들은 무기고 옆길로 걸어 다니면서도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5월 21일 아침 9시. 아시아 자동차 업체에 모인 600명은 300여 대의 차량에 시민군을 태워가지고 17개 시군에 널려있는 44개의 무기고를 향해 44개조로 나뉘어 달려갔다. 광주시로부터 100 여 키로 떨어진 곳들도 많이 있었다.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44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것은 위치를 미리 파악한 군사작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44개 무기고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종합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는 간첩 말고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정상일 것이다. 이 무기고 탈취과정은 5.18에 간첩이 개입했다는 심증을 갖게 하는 데 가장 설득력 있는 대목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5월 21일 08:00시, 광주 톨게이트에서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무전기와 공용무기가 탑재된 위엄 있어 보이는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하자마자 이 지프차들을 모두 몰고 방위산업 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직행했다는 점,
그리고 아시아 자동차에서 군용트럭을 탈취해 그 군용트럭을 몰고 무기고로 갔다는 점이다.
14대의 지휘용 지프차는 어마어마한 수량이다. 이를 본 아시아자동차 직원들은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 없이 차량들의 열쇠를 내주었을 것이며,
44개 무기고에서는 지휘용 지프차나 군용트럭을 보고는 역시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고 생각하여 무기고 문을 순순히 열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러는 위압감에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20사단 지휘부가 몇 시쯤 톨게이트를 지날 것이라는 군 내부의 극비 정보를 알아내 가지고 위와 같은 연속작전을 편 것이다.
이런 작전은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작전은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광주작전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00명! 이 600명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숫자다.
수사기록에도 600명이 나오고, 광주의 악녀 전옥주의 증언에서도 연고대생 600명이 광주를 해방시키러 온다는 말이 나오고, 2006년 12월 20일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기자회견에서도 북한특수군 600명이 왔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몸서리쳐지게도 이 600명은 1985년에 발행된 북한의 역사책 ‘광주의 분노’ 34-35쪽에도 나온다.
“누군가가 군중들 속에서 ”총! 총!“ 하고 피나게 절규하였다. . . 그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놈들이 순진한 녀학생들의 옷을 벗겨놓고 갖은 희롱을 다하며 지어 젖가슴까지 도려내어 죽이고, 배를 갈라 태를 치는 것을 보고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시민들은 드디어 ‘피를 피로 갑자면 총을 들어야 한다’는 구호를 들었으며 무기획득을 위한 투쟁에 떨쳐 나갔다.
5월 21일, 광주고등학교와 숭일고등학교 학생들이 ‘학도호국단’의 무기고를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광주 인민봉기과정에 봉기군이 처음으로 벌린 무시탈취투쟁이었다. . . . 이 때부터 봉기군들은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놈들의 무기고를 본격적으로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폭동군중들은 괴뢰들의 군용차령 공장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들은 이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일반국민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경찰과 정부군을 향해 발포한 것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이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5.18측은 5월 21일, 13:30분경에 도청 앞에서 군에 의한 집단발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당방위로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향해 발포했다고 항변한다.
과연 무엇이 사실인가?
수사기록을 보면 도청 앞 발포는 9번째 발생했던 자위 즉 정당방위용 발포였다. 그 이전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지휘관들이 6차례에 거쳐 발포를 했고, 시민군도 1회의 발포를 했다. 5월 21일 이전에 이미 시위대에는 26정의 카빈과 7정 이상의 M-16이 있었다. 계엄군이 없는 지역에서 수없이 발생한 사격과 시체들은 이들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다.
가장 치열했다는 5월 21일,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사망한 민간인에 대한 통계는 33명,
3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자상, 자동차 전복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계엄군은 오직 M-16소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 총상은 계엄군에 의한 총상이 아니라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꺼내온 총들이다.
5월 19일 19세의 나이로 지휘자를 호위하여 광주에 왔다가 돌아가 1급 국기훈장을 받고 탈북 해 현재 분당에 살고 있는 정 모씨는 자기가 사용한 카빙총이 북한에서 가져온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총상에 의한 망자 중 70% 이상이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쏘는 불순분자들이 시민군 속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탈북자들은 한결같이 이것이 바로 북한특수군의 소임이었다고 증언한다.
사람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경에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첫 발포를 했고, 거기에는 발포 명령자가 있을 것이지만 단지 규명이 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논리와 군대상식에 기초하지 않은 질 낮은 주장일 뿐이다. 5월 21일 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면으로 나오더니 그들 중 한 대의 장갑차가 도청 앞을 지키고 있던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여
병사 1명을 깔아 죽였고, 1명에 중상을 입혔다.
이러한 차량공격이 그 후 세 차례나 더 계속됐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은 그야말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돌진차량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도청 앞 발포였다. 이 이외에도 5월 21일 아침부터 오후 5시 3공수가 전남대를 철수할 때까지에는 6.25 고지쟁탈전을 방불할 만큼의 밀리고 미는 식의 교전과 쌍방 발포들이 있었다.
특전사 10개 대대가 광주시를 철수할 때 철수로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무장 시위대가 사격을 가함으로써 광주시에서는 정규군과 정규군 사이에 벌어지는 정도의 교전들이 이어졌다.
누구를 위와 같은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발포를 놓고 5.18측은 발포명령자가 전두환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공수부대 대신 정규군인 20사단을 투입시켰더라면 처음부터 위협사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수부대는 과도하리만큼 민심을 다치지 않도록 억제되고 통제되어 왔기 때문에 발포에 대한 자제력이 군으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강했고, 바로 지나친 자제력이 광주 전투를 필요 이상으로 키웠다. 공수대원들은 미국 헤리티지 연구소의 분석가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듯이 끝까지 시민군을 조준하지 않고 위협사격 차원에서 대응했다.
5월 21일 탈취한 무기는 2개 연대 규모의 것이었다. 카빈, M-1, 기관총 등 5,403 대,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이 탈취됐고, 이들 779대는 군용으로부터 탈취한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로 구성됐다.
광주로 상품을 나르는 상인들이 없어지자, 식료품과 생필품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간들이 지속되면 광주시민들의 고통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거기에 일부 무장 시위대들은 시민들을 협박하여 금품을 뜯고 가족 단위로 살해하고 돈을 뜯어가고 방을 빼앗는 등 광주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기록을 보면 계엄군은 이러한 광주시민들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덜어주기 위해 노심초사했으며 그 결과 5월27일 새벽 극비의 특공대식 작전을 폈고, 이로써 무법천지 광주에는 다시 치안질서가 확립된 것이다. 이런 극비 정보마저 새어나가는 바람에 탈환작전 시 불필요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당국이 광주시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TNT 제거작업 과정에 웅변돼 있다. 시민군은 8톤 트럭 분량의 TNT를 도청 지하실에 저장하고 거기에 뇌관까지 연결해놓았다.
폭발하면 광주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그런 분량이었다. 시민군은 이를 폭파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협박했지만 계엄군은 목숨을 내놓고 잠입하여 10여 시간에 걸쳐 뇌관을 제거해주었다. 시민군과 계엄군 중, 누가 광주시민을 더 사랑하였는가?
광주시위대는 헌법기관인 경찰과 계엄군에 폭력을 먼저 행사했고,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에 불복했으며,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바로 이런 것이 내란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의 재판부는 5.18을 김대중에 의한 내란음모였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광주시위대를 헌법기관에 준하는 존재라 판결했고, 헌법기관으로서 이를 진압한 계엄군을 국가폭력집단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광주시민에 하루라도 빨리 질서를 찾아주려고 세웠던 조기진압 계획을 놓고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경우 내란목적에 불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저지른 신군부의 행위이므로 재진입작전은 내란을 목적으로 하는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5.18을 신군부가 일으킨 것이라 판결했지만 수사기록을 보아도 신군부와 5.18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수사기록을 보아도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주체는 신군부가 아니라 계엄사-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 통수체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신군부가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것은 대통령과 내각에 공포심을 갖게 한 행위이기 때문에 헌법기관을 협박한 행위가 됨으로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참으로 괴변이었다. 무장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광주시는 진압하지 말았어야 했고,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차단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의 판결인 것이다. 이러한 억지의 인민재판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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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사람들의 증언중
19일 작성된 (선동)유인물 차량을 접수,제공하라 폭약이나 총기류를 시민군이 가져야한다 주변의 관공서와 악질 기업주집에 방화하라 조금만견디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해방정권을 세울수있다. (손남승,5.18연구소)-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
도청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나기도했다 오발을 하거나 재미로 한방씩 쏘아보기 때문이었다. 더 기겁을 할일은 수류탄을 차고다니는 꼴들이었다. 안전핀고리를 그렇게 차고 다니는 고린줄알고 그 고리를 줄래줄래 꾀어 달고 다니고 있었다. 그게 뽑히는 날에는 떼죽음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리고 총 파지법을 모르기 때문에 대작대기 들듯 들고 휘젓고 다니는데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송기숙,5.18연구소)
친구와 함께 2인1조가되어 학동교회 옥상으로 가려는데 목사가 못들어가게 했다. 목사는 계단의 핏자국을 보여주며 어떤 고등학생이 자신의 발에 오발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최남식,5.18연구소)
5.18당시 광주시민들에게 30년전의 빨치산 투쟁은 결코 잊혀진 역사가 아니었다.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
21일 용봉 국민학교 철도변근처에서 나는 거기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수가 타라고 하면서 시민군에 징집된 차량처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징발 당한다고 했다. (정상현,5.18연구소)
주유소 주인들이 대부분 시위대 차량에 기름을 조금씩밖에 넣어주지 않았다. 다른시위대 차량이 와서 기름을 달라고하는데 없다고하면 격해진 시위대가 주유소기름들을 막무가내로 부숴버릴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기름을 분재해주었기때문에 금방금방 기름이 떨어졌고 그럴때마다 차를 팽개치고 다른차를 타곤했다. (윤석진,5.18연구소)
당시 총을잡았던 사람들은 수탈받고 착취받는 계급이었고 사회변혁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사는 사람들은 집에 숨어서 지냈다는 것이다. (전용호,1988년 9월)
노동자계급,농민층,도시중하층,쁘띠부르주아지,중간계층,중소자본가들로 구성된 민중들이 주체가된 민중항쟁이었다. 당시 도청뒤의 부촌지역 사람들은 모두어디론가 도망을 간 상태였고 고아나 서럽게 살아온 사람들이 참여했다. (한국현대사 산책,강준만)
5월 20일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담양으로 나가는 길목은 피신하는 시민 학생들이 많았다. 차를 탈수없어 많은사람들이 걸었다. (임낙평,1988년 9월)
지원동에서 배추장사를 하던 사람이 트럭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그 사람은 계엄군이 아닌 시민군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돈을벌려고 장사하는것이 얄미워 일부러 치었다고 했다. (최남식,5.18연구소)
5월25일 미국무장관 머스키의 전송: "광주에서의 상황은 용납할수 없는 곳으로 전개되었다" 그의 정보원에 따르면 "온건파 시민위원회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급진파가 상황을 장악한것으로 보인다. 인민재판이 열렸고 몇건의 처형이 벌어졌다. 학생시위대는 혁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신원미상의 무장한 급진세력들로 대부분 대체 되었다.
5월26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고하다: 광주에서의 상황은 더 나쁜쪽으로 전개되엇다 민병대 무장한 급진파의 복귀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에 관한 보고들이 있다. (웬트위스공대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고등학생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시민군들에게 제공할 쌀을얻었다 (최지수,5.18연구소)
방림동에서 쌀을 가져가라하는데 차가 없어서 가져올수 없다며 나더러 기동타격대 차를타고 쌀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후에 그사람들은 나를 강도로 매도했다. 내가 총으로 사람들의 배를 위협하고 쌀내놔라며 갖은 협박을 가했다는 것이다. (구성주,5.18연구소)
우리가 맨먼저간곳은 중앙고속터미널 이었다. 터미널홀에 차 몇대가 세워져 있었지만 키를 모두 뽑아가버린 상태였다. "시위차량이 부족하니 그레이하운드를 좀 내주시오" "차를 줄수없소" 그 말을 들은 100여명의 흥분한 사람들이 세워놓은 차에 달라붙어 밀기시작하였다. 어떻게 된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중앙고속 건물안으로 들어가 회사기물과 기타 시설물들을 모두 부숴버렸다. (윤석진,5.18연구소)
주유소에는 사장은 없고 부인과 종업원1명이 있었다. "기름좀 주시오" "없어요" "비상탱크것좀 주시오" "비상탱크도 없어요" 그것을본 일행중 한사람이 각목으로 유리창을 박살내버렸다. 그때서야 놀란여자는 비상탱크에 있는 기름을 주었다. (허춘섭,5.18연구소)
한쪽에서 아이스크림도 놔두면 다 녹으니 가지고 가서 사람들이나 먹게하자고 했다. 우린그때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김윤기,5.18연구소)
광주사태 기간동안 윤상원이 지도자들이 모인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파리꼬뮨에대하여 이야기했고 많은사람들이 '함께투쟁하고 함께산다' 는 생존방식에 있어서 광주사태와 파리꼬뮨이 유사하다고 진술했다. 광주사태 기간동안 이양현은 1970년대 파리꼬뮨에 대하여 읽으면서 보았던 내용을 몸소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3~4살어린아이가 프랑스군대에 돌을던졌다'는 내용을 기억하고는 3살짜리 자신의 아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양현과의 인터뷰,2001년 6월22일)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7권 69-95쪽에는 윤영규(당시 42세)가 “살육의 낮과 밤”이라는 제하로 쓴 글이 들어있다. 그 책에 있는 시체장면을 아래에 소개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사진들이다. 북한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사진들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몸부림치는 여학생의 가X을 도려내는 장면, 임신부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장면, 긴 대검을 여성의 음X로 밀어 넣는 장면 등 지금에 와서도 머리에 떠올리기 싫은 잔인한 장면들이 많았다. 여기서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북한이 그런 생생한 살인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남한에서는 그런 사진이 왜 나타나지 않는 지이다. 북한텔레비전에서 나왔다면 광주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작품’들이 연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송정리 공군 3252부대 방위병이었던 이재춘 의증언)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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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2일 한편 광주시내 무장 시위대들은 거리거리에 차량을 질주하며 총을 쏘아가면서 공포분위기를 연출했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장례비에 쓴다며 돈을 뜯어냈고, 여염집에 들어가 가족단위로 집단살인을 저질렀고, 평소 앙심을 갖고 있던 집에 들어가 가족을 몰살시켰고, 금품을 훔치고 강간을 자행하는 등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언비어에 속아 거리로 나갔지만 이렇게 무법천지로 변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도를 다스리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불만을 토하기도 하고, 계엄군을 다시 보내 달라 애원하기도 했다. 시민군은 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면서 합세를 권장하기도 했다. 시민들까지도 학살했다. 한편으로는 무장시위대가 보여주는 무서운 행동들을 지켜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무총리서리의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차츰 “속았다. 광주시민이 폭도에 속았다. 지금부터라도 빨리 수습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나주에 있던 무장시민 100여 명이 군부대에 처음으로 투항하여 무기, 차량 등을 반납했다. 폭도들은 학동 지원동 일대로 몰려다니면서 “우리가 투숙할 테니 집을 비우라”며 주민을 내쫓고 우진아파트에 와서는 침구를 다 가져갔다. 금남, 삼익, 삼양맨션 아파트 주민들에게 식사제공을 강요했고, 사창가 일대에 들어가 창녀들에게 수혈을 강요했다. 일부 폭도들은 경찰복을 착용하고 경찰 행세를 했다. 공수부대 복장을 한 폭도들은 “우리는 전라도 공수부대다. 어제까지는 경상도 공수단이 와서 우리를 쳤는데, 이번에는 우리 전라도가 그들을 없애야겠다.” 등의 언동을 하고 다니면서 행패를 부렸다. 시민들에는 공수부대가 재투입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 폭도들을 격퇴시켜 주기를 바라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자칭 학생대표 2-5명이 전남부지사를 만나 학생 요구사항 6개항을 제안했고, 부지사는 무기를 자진 반납하고 자수할 것을 권했다. 일반시민들은 광주교도소로 전화를 계속하여 폭도들을 속히 소탕해 줄 것을 관계기관에 연락해달라고 요청한다 도청 정문에는 학생들 상호간에 의견충돌이 일고 있다. 도청에 불을 지르자는 파와 우리의 재산인데 그러면 되느냐는 온건파 사이에 의견충돌인 것이다. 오후엔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장유동과 전남대학교 학생대표인 김창길이 계엄당국과의 협의 내용을 보고하면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투쟁을 한다면 폭도 밖에 되지 않는다. 어서 빨리 탈취한 무기를 계엄사에 반납하고 치안질서는 경찰에게 맡기자”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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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반란 폭동을 주도하기 위해
김일성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공작을 펼쳤던
북 특전사 출신 탈북자의 증언
(5.18당시 실제 김정일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공작을 펼친 북특전사 출신의 증언: 현재 탈북하여 서울에살고있습니다)
5.18은 오랜시간을 가지고 김일성이 준비한 대한민국체제 정복의 시나리오였다
5.18폭통이 일어나기전해인 1979년도에 나는 711군부대(60저격려단) 에 대남공작 전투원으로 근무하고있었다 (711군부대는 1968년청와대 습격을 비롯한 한국에서 무장활동 을하여온 124군부대임)
2)인민군정찰국소속 60저격려단, 11공군저격여단, 3.8공군육전여단, 64해상저격려단, 직속정찰대대(8개대대)등이였으며 군단들이보유한 저격려단은 4군단에 17저격여단, 1군단에 61저격여단, 2군단에 62저격여단, 108훈련소, 5군단에 63저격여단등이있으며 1개여단은 10-12개대대로 편성되여 있으며 1개대대병력은 약500명 1개여단 병력은5000명 정도이다 여단내의 각 대대에는 작전조(대남침투조)를 따로 조직하고 육체적 정신적 골간들을 추려 맹훈련을 시켜왔다
3)인민무력부 직속으로 교도훈련지도총국이 있으며 예하부대로 경보병여단들을 가지고 있으며 교도훈련지도총국이 보유한 북한경보병여단 병역은 10만명에 달한다
5.18 광주폭동이 일어나기전해인
1979년5월 인민군총참모부 정찰국명령서를 하달받았다
명령서의 내용은 “정찰국직속대대와 각여단작전조 전투원역량을 보충하고 작전조 전투원들의 머리를 장발로 깍을데대하여”였다
당시 인민군병사는 전부 삭발을 하였으며 남파임무를 수행하는 중앙당 대남연락소와 정찰국직속 저격여단과 인민군군관(장교)들만 평상머리를 하고있었다
당시북한에서는 일반국민들이 장발을하면 자본주의 요소라고하여 국가와단체의 비판대상이 되어 누구도 장발을 할수없었다
남파공작부대에 전달된 명령서에 장발을 명령한것은 당시한국의 청년들과 시민들이 장발을 하고있기 때문에 광주에 침투하는 전투원들을 광주시민으로 위장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다 당시 김일성은 서울, 인천, 부산, 대구에서 동시 다발적인 폭동을 계흭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후회하였다
광주5.18사건은 김일성의 적색통일 구상에의하여 북한대남공작 부대와 김일성이 고용하고 키워온 한국의민주세력으로 둔갑한 국내간첩들의 국가정복 반란이였다 역사외곡을 바로잡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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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보고있는 혹은 봤던 교과서
5.18에 관한 내용은 거짓말이고 사기입니다.
교과서라고 종교처럼 믿는다면 맹신이요 미신이지요.
특히 5.18관련내용은
황석영이 89년 월북해서 김일성 지령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입니다.
그걸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한거죠
그래서 내용에 앞뒤가 맞지 않고 이상한겁니다.
5.18옹호론자들의 주장 수사기록은 신군부가 작성한것이므로 믿을수없다. 교도소 습격사건은 조작이다. 탈북자들의 주장은 증거가 없다. 5.18측 자료는 유네스코가 인정했으므로 믿을수있다. 전두환은 하극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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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측은 5.18측 주장만 옳다하고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5.18측 주장이 틀렸다고 하는겁니다. 그러니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신다면 5.18측이 제시하는 자료들중 의문나는 점을 해결해줘야 하는겁니다.
그런데 그 의문나는점이 5.18의 핵심 내용입니다. 5.18이 일어나게한 원동력이고 확장되어 대규모 무장시위를 하게된 두뇌라고 할수있죠
다이너 마이트가 광주 시민이라면 이 다이너 마이트가 터질수 있도록 불을 당긴 사람말입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서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이런 5.18을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측의 자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누군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그렇다 하기에 확인도 하지 않고 쫒아가서 얼떨결에 민주화운동했다....입니다.
그럼 왜 누군가가준 정보 그리고 누군가가준 정보의 진위확인이 중요한지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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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차가 도로가에 한대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 앞에는 한 여인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 옆에는 운전자가 그 여인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10여명의 남자들에게 누가 차로 저 여인을 치어 살해했다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 10명의 남자들이 화가 단단히 나서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려 합니다.
헌데 누군가 이들에게 몽둥이를 줍니다.
그 몽둥이를 들고 사건현장으로 달려가 그 운전자를 두들겨 패 줍니다. 그리고 운전자가 사망했습니다.
자 이 10명의 남자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 일까요?
나중에 안 사실은 도로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여인을 운전자가 발견하고 앞에 차를 세웁니다. 그 여인의 상태를 확인하려 앞에 서있었던 겁니다.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누가 10명의 남자들에게 그 정보를 줬는지 누가 몽둥이를 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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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런질문을 할수있을겁니다.
만약 실제 그 운전자가 그 여인을 차로 치었다면 그들은 의인인가? 폭력배인가?
이에 대한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렇다면 민주화운동이란것이 모 아니면 도로 정확한 사실확인 없이 누군가의 말에 의존하여 일단 저지르고 본다음 운좋게 맞아떨어지면 민주화운동이되고 아니면 폭력배가 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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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기 때문에
최초정보제공자
최초정보전달자
정보의 진위확인자가 중요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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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정보말이죠 이는 엄청난 중대 사건입니다.
한나라의 정권을 무력으로 잡겠다는거죠 그럼 이 정보를 누군가 알아내서 대학생이나 광주시민에게 전달했을거 아닙니까?
그사람이 누구입니까?
설마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떤이가 그런 중요한 정보를 광주시민에게 전달하여 무장투쟁을 하자 했는데
아무런 확인도 없이 네~그렇군요 하고서는 무기고 탈취하여 계엄군에 총을 쏜게 아니것죠
그리고 그 누군가 즉 정보를 전달한 이의 정보가 정확하다는걸 광주시민들은 어떻게 확인하였는가?
(전두환이 국권을 찬탈하려한다.
최규하는 허수아비다. 이에대한 정보 진위를 어떻게 확인했나요?)
사실확인을 했으니 "맞다!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한다 는 정보와 사실이 딱~ 맞다" 인정하고 무장투쟁을 했겠지요.
이런 사실확인도 없이 무작정 무기고 털어서 무장항쟁을 하진 않앗겠지요
자! 누가 어떤경로로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내서 광주시민 누구에게 전달하였고
그 광주시민은 어떻게 그 사실이 맞다는걸 확인 하였는지 설명해 주시죠.
38개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왜 나타나질 않는가? 국가 유공자가 뭔지 몰라서? 죄의식때문에? 아니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안사람은 현재 대한민국에 살지 않아서? 설마 귀신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알려줬다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겟죠.
누군가는 알고있었것지?
무기고 탈취는 매우 중요한 대목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위치를 누가 알려줬는지 아무도 모른다?
즉 5.18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이 있기는 한데 누구인지는 모른다?
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 광주5.18의 핵심 역할을 한사람 이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보 유출자 정보 전달자 정보 확인자 정보 확산자
무기고 위치를 알고있었던자 최소38명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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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보제공자와 38개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가 누구인의 중요성이 또하나 있습니다. 만일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위 정보제공자들을 알지못한다면 5.18의 주인이 바뀔수 있다는 겁니다.
5.18의 주연급들이 누군인지 모르기때문에 막말로 개나 소나 돼지가 와서 그 정보는 내가 알려줬다 라고 한다면 5.18의주인이 정신병자 혹은 개나 소나 돼지가 될수 있는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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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정보제공자 무기고 위치 정보제공자 이들이 사망했다 가정한다면 만약 이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하더라도 또다른 의문이 여기 가세하는 겁니다. 이 중요 정보제공자의 정보를 확인한 절차가 없다는것이 이상한겁니다. 누군가 최초 정보를 줬는데 100퍼센트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위를 했다? 극비사항인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 알고있어 안내하는데 이에 아무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38개 무기고를 털러간 38개 조직이 있습니다. 이 조직들중 극비사항인 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에 대하여
신분이나 그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의혹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면 결국 5.18주인공은 북 특전사 출신들이 되는겁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소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그런데 북특전사 출신들이 그 누군가가 우리요 하고 5.18의 주인임을 천명했고 이에대한 구체적 진술을 했습니다.
자 이 사건 즉 북특전사들의 증언
이들이 증언한 5.18관련 내용의 의미가 바로 5.18주인이 없다는 것이고, 5.18측에서 그 누군가를 제시하지 못하면 5.18주인은 북특전사가 될수있는겁니다.
특히 유언비어 그리고 38개 무기고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여 38개 분팀을 만들어 무기고까지 갔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5.18이 순수 광주시민들에 의해 일어났다면 빨리 정보제공자 ,38개 무기고위치 정보제공자를 찾아내야 하는겁니다
누군가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다. 운전자는 도망쳐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동차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럼 자동차가 범죄자인가? 운전자가 범죄자죠? 그 운전자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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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5.18유네스코등재 설명은 매우 간단합니다. 히로시마 원폭돔도 평화의 상징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특별한 사건이면 무엇이든 등재시킬수 있는곳입니다.
법(ex post facto law, retroactive law)의 금지를 말한다. 소급입법금지원칙이라고
도 한다.
한국 헌법은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헌법 제13조 제1항 전단). 이는 적법한 행위에
대하여 사후에 이를 처벌하는 소급법을 제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또 그러한
방법으로 형을 가중하는 것도 금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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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 84조 =================================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 이조항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는 재직중에도 형사 소추를 받는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하는 오류를 범할수 있습니다.
내란 또는 외환 이외의 죄는 재직후 형사상 소추를 받는다
그러므로 공소시효가 재직중에는 정지되었다로 볼수있다.
이렇게 오류를 범할수 있습니다. ---------------------------------------------------
과연 대통령은 재직중에 내란,외환 이외의 죄는 형사상 소추를 받을수 없는가.
받을수 있습니다.
재임중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형사상 소추를 할수 있습니다.
탄핵을 하면됩니다.
탄핵후 형사상 소추를 하면됩니다.
즉 공소시효가 정지 되는것이 아닙니다. -----------------------------------------------
삼권분립주의와 법치주의에 의하여
입법부 -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주면. (우두머리 국회의장)
행정부 - 정부기관에서 그 만들어진 법을 구체화하여 집행하고 (우두머리 대통령)
사법부 - 법률상의 위법여부를 판단해서. 분쟁해결과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기관입니
다. (우두머리 대법원장)
이 이상 혹은 동등한 기관이 있을수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름처럼 헌법을 재판하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을 재판하는 곳도 아닙니다. 입법부,법원의 시다바리가 바로 헌법재판소 입니다.
법원의 재판사항에 관여,판결할수도 없습니다. 조문숙 법학자의 말처럼
수사기관에서 지문감식반에 지문감식을 의뢰하면
지문 식별만 해주면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즉 헌법재판소는 수사기관의 지문감식반같은 곳입니다.
만약 민주화빨갱이들의 논리대로
헌법재판소가 입법,사법,행정부등과 동등하다거나 그 위에 설수있다면
대한민국은 헌법재판소가 점령한 독재국가가 되는것입니다.
현재 네이버 백과사전등에 올라있는
소급효 소급입법에 관한 내용은 1995년
5.18특별법을 억지로 제정하기 위해
민주화빨갱이들과 헌법재판소가 작당하여
사기친 내용들 입니다.
결국 이들은 이사실을 더이상 숨기지 못하고
5.18특별법을 개정했습니다.
헌법 제 84조 =================================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
그러므로 공소시효가 재직중에는 정지되었다로 볼수있다.
로 해석하여 1995년 5.18특별법에 ---------------------------------------------------
헌법 제84조 공소시효에 관한 내용(오일팔 특별법 제2조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헌정질서 파괴 범죄 행위에 대하여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것으로 본다(제1항) 제1항에서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기간 이라 함은 당해범죄행위의 종료일로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제2항)고 하였다가.
계엄사령관은 대통령 혹은 국방장관의 지휘 감독아래 계엄군을 동원비상목표에 출동을 시키는것이
정상적인 상황이다
그런데.정승화 김재규 김계원은거꾸로
그리고 김재규의 명령에따라
20사단 30사단 9공수여단을 출동시킨후
방송국,변전소,은행 등을 점령시키고나서
국무위원과 최규하를 국방부로 불러들여
어서 계엄을 선포하라 한것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최규하 국무위원들은 쿠데타임을 직감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던중
신현확 부총리의 강력한 반발로 불법적인 계엄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이에 국방부 장관은 김재규 체포를 전두환에 지시했고 김재규는 체포되었다.
하지만 정승화는 자신의 행적을 누구에게도 발설 하지 않아
이사실을 몰랐던 최규하 국무위원들은
범죄자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김재규가 전두환에 체포되고 나서
김재규는 전두환에 정승화 김계원과 콤비 플레이한것을 실토했고
이로인해 전두환은 모든것을 알게되었지만
범죄자 정승화는 막강한 권한과 권력을가진 계엄사령관이 되어있었다.
계엄선포가 왜 이들에게 급선무였나?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쿠데타를 할마음이 없었다면
제일먼저 직속상관인 노재현국방장관에 보고를하고
대통령 시해범을 잡기위해 자동규칙 청와대경호비상 제1호인
호랑이1호를 발령하여
경호실 병력을 출동시켰어야 했으며
또 노재현국방장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시해현장을 조사 범인체포 잔존 쿠데타세력을 체포하란 지시를 내렸을것이다.
정승화가 김재규를 도와 쿠데타할 마음이 없었다면
차지철만 지휘할수있는 수경사와 경호실에 병력이 쿠데타세력을 잡기위해
청와대로 가는것을 금지시키는 월권적인 명령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정승화가 후에 차지철이 범인이라 생각했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만약 차지철이 쿠데타 세력이었다고 믿었다면
차지철이 지휘감독하는 수경사 전성각과
경호실차장 이재전에 전화를 걸어 병력동결 명령을 할수는 없는것이다.
결국 정승화는 김재규의 쿠데타를 적극 도왔고
이를 몰랐던 최규하와 국무위원들의 실수로
범죄자 정승화는 막강한 계엄사령관이 되었고
극비에 체포할수 밖에 없는 성향의 범죄자였던 것이다
정승화는 한술더떠 계엄 포고문까지 스스로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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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난동 부분 요약
장태완은 보안사에서 정승화를 연행해간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합수부에서 정승화 같은 위치의 사람를 연행해가면 어떠한 범죄사실때문이라는것도 상식으로 알고있었다.
그런데도 친분을 이유로 수경사령관 월권적 행위를 한것이고 무력을 동반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승화가 장태완을 수령사령관에 임명했을때도 장태완은 정승화에 충성을 다할것이라 했다. 장태완은 정승화의 개인적 사병이었던 것이다.
나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다. 총장님 공관에 이미 연락이 돼 있다.”
해병 헌병이 총장공관으로 연락을 하더니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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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30경비단장, 경복궁 위치) 김진영(33경비단장, 필동 수경사 외곽에 위치)
30경비단은 대통령 방호부대다.
설사 수경사 사령관이 공격해 오더라도 이를 방어할 의무가 있다.
청와대 울타리 내부 경비는 55대대가 담당했다.
55대대의 모체부대는 30경비단이다.
외곽 경비는 나머지 30경비단이 담당한다.
외곽과 내곽이 뚫리면
마지막으로 경호실 경호관들이 대통령을 보호한다.
30경비단장이 부대를 이끌고
그의 예하 부대인 55대대가 경비하는 곳을 향해 진군해 와도
그 예하인 55대대 대대장은 상관을 상대로 방어를 해야 한다.
여기에 하극상이란 있을 수 없다.
12월 12일 오후 4시경, 장세동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에 30단에 장군 몇 분이 오시게 되어 있다.
장군들에 대한 시중을 병사들에게 맡기기도 좀 뭣하다.
차나 마신다고 하니 인사도 드릴 겸 해서 나와 함께
안내하는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전화를 받고 나는 6시 15분경에 30경비단 단장실로 갔다.
어느 장군이 오는지, 왜 오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들은 바 없었다.
30경비단장실에는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가 앉아
그날 끝난 장군 진급심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장군 세계에서 장군들의 진급소식은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 후 다른 장군들이 속속 도착했다.
6시30분경, 장세동이 전화를 받더니 장군들에게,
‘합수부장이 대통령 보고사항이 있어서 좀 늦는다’는 전갈을 전했다.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으로부터 받은 전화내용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늦겠다는 전갈을 받은 장군들은 장세동에게
“뭐 먹을 것 좀 없나, 있으면 좀 가져오지” 하여
초밥과 맥주를 급히 구해드렸다.
7시40분경, 장세동이 허화평으로부터 또 다른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장세동이 전화 받은 내용을 장군들에게 알렸다.
“정승화가 10.26과 관련하여 연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격이 있었다.
대통령 재가는 이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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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30분경,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최세창과 장기오가 “비상이 결렸으니 부대로 가봐야겠다”며 일어섰고,
나머지 장군들도 부대에 전화를 걸어
부대장악을 잘 하고 있으라 당부들을 하면서
전두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장군들이 부대출동을 결심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놀라 부대에 전화를 걸어 부하들을 챙겼을 뿐이다.
12.12 이후 장태완은 예편해 있었다. 장태완은 12.12 때 그가 병력을 동원한 것을 후회했다. 합수부가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규명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은 정의로운 애국의 길이었다고도 말했다. 장태완을 한국전산회사에 사장으로 근무시켜 걱정 없이 살도록 배려해준 것에 대해 장세동에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하여 전해 준 일이 있다. 그리고 장태완이 심근경색증을 앓고 있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경비를 대주어서 미국에 가서 수술을 받게 해준 데 대해 고맙다고 했고, 또 이 고맙다는 이야기는 장태완이 여러 사람들에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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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상 징후가 있으면 연대장도 발령할 수 있는 것
재가+++++++++++++++++++++++++++++++++++++++
최규하는 전두환의 재가 보고를 듣고서는 국방장관을 불러오라 했다. 부결할 마음이 있었다면 즉시 부결을 하지 왜 국방장관을 전두환더러 불러오라 했겠나. 전두환 입장에서도 반란을 일으키려했다면 최규하를 협박하여 즉시 재가를 받았으면 될일이었다.
대통령께서는 국방장관을 배석시켜서 재가를 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국방장관을 빨리 찾아서 배석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가서 빨리 찾아오겠습니다 말씀드리니까 비서들 시키면 빨리 찾아올 텐데, 서울에 있는 사람이 어디로 갔겠나, 앉아서 차나 마시고 기다려 봅시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을 두 시간이상 모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저도 여러 가지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 어른이 기분이 나빠서 장관의 결재도 없이 이런 것 결재할 수 없어, 저보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라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저런 시국얘기도 듣고 저도 말씀드리고 이래서 근 두 시간 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국방장관의 결재가 없이 내가 결재하지 못하겠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은 전혀 없습니다.
연행에 동조할 수 있는 철학을 가진 군의 여론 주도층에게 연행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동조를 얻으려
초청된 장성은 유학성(군수차관보), 차규헌(수도군단장), 황영시(1군단장), 노태우(9사단장), 박준병(20사단장), 박희도(1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장기오(5공수여단장), 백운택(71방위사단장), 이렇게 9명이었다. 여기에서 백운택 장군은 우연히 보안사에 들렸다가 합석을 하게 된 것이다.
수경사령관은 병력과 포를 가지고 공격해 오겠다 압박을 가해오고, 참모차장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세력은 거병을 하려하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마냥 노재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는데 이들 장군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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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두환 일행이 총리공관을 나갈 때가지 총리공관 경비는 구정길 중령이 담당했던 것이다. 전두환 측이 무장 경비병을 깔아놓고 재가를 받기 위해 최규하에게 공포감을 주었다는 검사의 주장과 판사의 판시가 억지인 것이다. 구중령의 진술에 대해 당시 총리공관 경비를 인수한 최영덕(1928년생, 당시 총경) 101단장은 94년 2월 15일, 서울지검 918호 검사실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2월12일, 7시30분경, 고명승 대령이 만나자 하여 경호실 차장실로 갔더니 고대령이 함께 총리공관으로 가자하여 동승했다. 고대령이 구중령에게 공관경비를 101단에 맡기고 철수하라 하자, 구중령이 자기에게도 지휘계통이 있으니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겠다며 나가더니 20-30분 후에 의전수석인 정동열과 함께 왔다. 정동열은 이 사람들이 그동안 수고했는데 오늘은 공관 막사에서 자고 내일 철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떠냐 하기에 고대령이 동의했다. 나는 즉시 명령을 내려 공관경비를 인수했다. 경호실장 정동호는 정수석이 오기 조금 전에 도착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높은 사람들이 구정길을 강제로 제압했겠는가?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공관으로 갈 때 나와 고대령 두 사람만 갔다. 그날 밤 내내 두 사람이 함께 근무했다. 그 후 간혹 55경비대장인 임재길 중령이 안내소를 방문한 적은 있었다. 공관 출입자 통제는 의전비서실이 하는 일이었고, 우리는 경비만 했다. 출입자를 통제한 적도 없고, 공포감을 조성한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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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1공수는 당연히 출동준비를 해야 했고, 출동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국방부와 육본으로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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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 합참의장과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차례로 수경사에 가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전화를 걸어 정승화의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한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개인적인 것이니, 병력 동원을 금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 연합사 상황실에 피신 중에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도 김용휴 차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밤 11시경에 수경사에 가 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병력동원을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경사에 모여 있는 장군들이 병력동원을 협의하고 있는 모양인데 절대로 병력을 동원하지 말라. 합수부의 총장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총장 개인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이니까 장군들에게 흥분하지 말고 있으라 하라. 보안사령관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니 내일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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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부 차장에서 곧바로 그 막강하다는 수경사령관에 임명된 것이다. 수경사령관은 통상 참모부장을 마친 고참 부장급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런데 정승화는 신출내기 차장급에 있는 장태완을 파격적으로 수경사령관에 임명한 것이다. 그가 취임하던 11월 16일, 수경사 장교식당에서 가졌던 취임축하 리셉션에서 그는 이렇게 흥분했다.
나 같은 촌놈이 수경사령관이 된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수경사령관에 임명해준 정승화 총장에게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며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정총장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다. 정승화 총장을 위해여 건배~
수경사령관은 대통령을 수호하는 공화국 사령관이다.
하지만 정승화는 본인의 직분보다는 정승화를 위해 행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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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진실 요약
5월 18일(일요일) 새벽에는 이미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이 휴교령은 헌법기관이 내린 정당한 명령이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가 1개 대대씩 들어가 있었던 것은 평소에 계획돼 있었던 부대배치 계획에 의해 자동적으로 배치된 것이며, 2개 대대 규모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상징적인 규모에 불과했다. 2개 대대를 내보낸 것은 순전히 계엄사 작전계통과 계엄사령관 사이에서 취해진 조치였고, 여기에 전두환이나 정호용 등이 개입한 증거는 없으며 그렇게 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계엄군의 배치는 합법적인 것이었으며 배치된 계엄군의 지위야말로 헌법기관이었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 9시경, 광주의 대학생 들은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을 위반했다. 200여명의 대학생들이 전남대 도서관에 간다는 이유를 내걸고 학교에 진압하려 했지만 정문에 이미 배치돼 있던 공수 7여단 병력 20여명이 이들에게 귀가를 종용했고, 귀가의 종용은 정당한 임무수행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고 가방에 숨겨온 돌멩이를 꺼내 계엄군에 던져 부상을 입혔다.
도서관에 가겠다는 학생들이 가방에 돌을 숨겨 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5.18측은 계엄군이 먼저 학생들을 공격했다고 하지만 수사기록에는 분명히 학생시위대가 먼저 계엄군을 공격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계엄군이 쫓아가자 학생시위대는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몰려가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수많은 시민을 결집시켜 파출소를 파괴 방화하고 경찰관들을 폭행했다.
이는 각본이 있는 행동이었다.
공수부대가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화려한 휴가’라는 암호명으로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를 비롯하여 경상도 군인들이 대검을 가지고 전라도 여인의 가슴을 도려내고 머리 껍질을 벗겨 매달아 놓았다는 식의 유언비어들이 사람에서 사람의 입으로 전달되는 동안 증폭되어 나돌았고, 이에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경상도 사람들을 집단으로 구타하여 살해했고, 경상도 차량들을 보면 불태워 버렸고, 경상도 사람이 운영하는 상점을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7여단이었고, 7여단의 주둔지는 전북 금마, 여단 병력의 40%는 호남출신이었다.
유언비어는 모두가 거짓이었고, 그 제작 진원지는 북한이었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과 정기간행물들에 그 괴담들이 실려져 있었다. 1980년대 대학가를 물들인 ‘찢어진 깃발’의 진원지도 북한이었다(솔로몬 앞에 선 5.18). 모두가 광주시민들에 내재해있는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증폭시키려고 제작된 고도의 심리전 전술로 작성-유포된 것들이었다.
유언비어에 자극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여기에 더해 평소에 사회를 뒤집어보고 싶었던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으로 대표되는 소외계층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삽시간에 배수 단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파출소들이 수도 없이 파괴-방화되고 경찰들이 매 맞고 인질로 잡히는 등 경찰력은 단 두 시간 만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에 다급해진 전남경찰과 전남도지사는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은 시내로 나가 길목을 지키면서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을 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공수부대를 상대로 화염병을 던지고 옥상에 올라가 역기와 화분을 머리위로 던진 존재는 시위대였고, 시위대의 지나친 폭력이 계엄군의 반적용을 유도한 것이다. 시위대의 요구는 김대중 석방,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 계엄령 해제 등이었다.
이러 요구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의 요구였고, 이 요구는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내각을 일거에 전복하려는 요구들이었다. 광주는 폭력, 방화, 살인이 난무하는 광란의 도시였다.
거리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방화되어 광주시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는 시위대가 계엄군을 상대로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인 살육전을 벌였고, 수십 개의 파출소, 도청의 6개 부속건물, 세무서, MBC, KBS 등 공공건물에 대한 무차별한 파괴와 방화 작전이 수행됐다.
계엄군이 교외로 나간
5월 22일 새벽부터는
시위대가 점령한 광주시와 시위대가 점령한 17개 시군을 연결하기 위한 공격과 6회에 걸친 교도소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폭도 사망자만도 28명으로 집계됐다.
광주시위의 폭력과 과열성은 5월 19일 밤부터 5월 21일 오후 5시까지에 절정을 이루었다.
광범위하게 널려진 파출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하고 계엄군을 조롱하면서 감정을 유발하고,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정렬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장갑차, 군용차, 대형 화물차, 버스를 기발한 방법들로 계엄군을 향해 돌진시켰다. 돌진차량 운전수를 잡아보니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나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공격들은 총알보다 더 공포스러운 살인공격이었고,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지휘한 지도부가 기록에는 없다.
이러한 공격들이 과연 지도부 없이 시민들이 알아서 한 행동일까?
광주시에는 5월 22일에야 비로소 광주유지들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등장하여 무기 회수를 주도했고, 이에 병행하여 김창길(22세 대학생)이라는 온건파가 주도하는 ‘학생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 졌으나 이후 3일간 이들 간에는 무기반납을 놓고 벌이는 강온파 간의 대립이 연속됐다.
5월 25일부터는
강경파인 김종배(26세 대학생)가 김창길 위원장을 제치고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됐고, 학생수습대책위는 시민군 지휘부가 됐다. 이때 화려한 휴가에서 시민군 대장으로 등극한 박남선(26세, 골재운반 화물차 운전수)은 시민군 지휘부의 상황실장 자리를 맡았고, 5.18 최고의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겨우 대변인 자리를 맡았다.
상황 기록들을 보면 5월 25일 이전, 윤상원과 박남선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는다.
종북 좌익들이 애국가 대신 부르는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여기에서의 ‘임’은 김일성이라는 설도 있고 윤상원이라는 설도 있다. 좌파들은 윤상원이 5.18의 꽃이라 했지만 윤상원은 불온서적을 취급한 녹두서점 점원이며 공원들을 상대로 야학을 지도한 30세의 청년에 불과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시민군 대장으로 윤상원을 내세우지 않고 5월 26일에 상황실장으로 임명된 박남선(배우 안성기)을 내세웠다. 영화에서는 박남선을 예비역 공수부대 대령으로 신분을 도용했지만 박남선은 당시 26세의 골재채취화물차 운전병이었다.
공수부대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26세 골재채취운전병에 불과했던 시민군의 상황실장 박남선을 공수부대 대령출신으로 둔갑시키고 7공수여단장 신우식 준장과 동기생인 것으로 묘사한 것은 5.18의 열등의식을 웅변적으로 나타내준 것이다.
아마도 광주시위는 양아치들의 잔치라는 세간의 조롱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나타나있지는 않았지만 광주에는 숨어 있는 지도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강력한 심증을 갖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 중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44개 무기고의 동시 탈취다. 시위대가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사실에는 ‘불법’이라는 의미가 부여됐을 뿐, 이제까지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고가 탈취된 과정을 보면 여기에는 분명히 지휘부가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일반 시민들은 무기고 옆길로 걸어 다니면서도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5월 21일 아침 9시. 아시아 자동차 업체에 모인 600명은 300여 대의 차량에 시민군을 태워가지고 17개 시군에 널려있는 44개의 무기고를 향해 44개조로 나뉘어 달려갔다. 광주시로부터 100 여 키로 떨어진 곳들도 많이 있었다.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44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것은 위치를 미리 파악한 군사작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44개 무기고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종합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는 간첩 말고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정상일 것이다. 이 무기고 탈취과정은 5.18에 간첩이 개입했다는 심증을 갖게 하는 데 가장 설득력 있는 대목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5월 21일 08:00시, 광주 톨게이트에서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무전기와 공용무기가 탑재된 위엄 있어 보이는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하자마자 이 지프차들을 모두 몰고 방위산업 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직행했다는 점,
그리고 아시아 자동차에서 군용트럭을 탈취해 그 군용트럭을 몰고 무기고로 갔다는 점이다.
14대의 지휘용 지프차는 어마어마한 수량이다. 이를 본 아시아자동차 직원들은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 없이 차량들의 열쇠를 내주었을 것이며,
44개 무기고에서는 지휘용 지프차나 군용트럭을 보고는 역시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고 생각하여 무기고 문을 순순히 열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러는 위압감에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20사단 지휘부가 몇 시쯤 톨게이트를 지날 것이라는 군 내부의 극비 정보를 알아내 가지고 위와 같은 연속작전을 편 것이다.
이런 작전은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작전은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광주작전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00명! 이 600명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숫자다.
수사기록에도 600명이 나오고, 광주의 악녀 전옥주의 증언에서도 연고대생 600명이 광주를 해방시키러 온다는 말이 나오고, 2006년 12월 20일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기자회견에서도 북한특수군 600명이 왔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몸서리쳐지게도 이 600명은 1985년에 발행된 북한의 역사책 ‘광주의 분노’ 34-35쪽에도 나온다.
“누군가가 군중들 속에서 ”총! 총!“ 하고 피나게 절규하였다. . . 그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놈들이 순진한 녀학생들의 옷을 벗겨놓고 갖은 희롱을 다하며 지어 젖가슴까지 도려내어 죽이고, 배를 갈라 태를 치는 것을 보고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시민들은 드디어 ‘피를 피로 갑자면 총을 들어야 한다’는 구호를 들었으며 무기획득을 위한 투쟁에 떨쳐 나갔다.
5월 21일, 광주고등학교와 숭일고등학교 학생들이 ‘학도호국단’의 무기고를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광주 인민봉기과정에 봉기군이 처음으로 벌린 무시탈취투쟁이었다. . . . 이 때부터 봉기군들은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놈들의 무기고를 본격적으로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폭동군중들은 괴뢰들의 군용차령 공장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들은 이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일반국민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경찰과 정부군을 향해 발포한 것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이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5.18측은 5월 21일, 13:30분경에 도청 앞에서 군에 의한 집단발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당방위로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향해 발포했다고 항변한다.
과연 무엇이 사실인가?
수사기록을 보면 도청 앞 발포는 9번째 발생했던 자위 즉 정당방위용 발포였다. 그 이전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지휘관들이 6차례에 거쳐 발포를 했고, 시민군도 1회의 발포를 했다. 5월 21일 이전에 이미 시위대에는 26정의 카빈과 7정 이상의 M-16이 있었다. 계엄군이 없는 지역에서 수없이 발생한 사격과 시체들은 이들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다.
가장 치열했다는 5월 21일,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사망한 민간인에 대한 통계는 33명,
3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자상, 자동차 전복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계엄군은 오직 M-16소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 총상은 계엄군에 의한 총상이 아니라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꺼내온 총들이다.
5월 19일 19세의 나이로 지휘자를 호위하여 광주에 왔다가 돌아가 1급 국기훈장을 받고 탈북 해 현재 분당에 살고 있는 정 모씨는 자기가 사용한 카빙총이 북한에서 가져온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총상에 의한 망자 중 70% 이상이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쏘는 불순분자들이 시민군 속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탈북자들은 한결같이 이것이 바로 북한특수군의 소임이었다고 증언한다.
사람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경에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첫 발포를 했고, 거기에는 발포 명령자가 있을 것이지만 단지 규명이 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논리와 군대상식에 기초하지 않은 질 낮은 주장일 뿐이다. 5월 21일 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면으로 나오더니 그들 중 한 대의 장갑차가 도청 앞을 지키고 있던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여
병사 1명을 깔아 죽였고, 1명에 중상을 입혔다.
이러한 차량공격이 그 후 세 차례나 더 계속됐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은 그야말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돌진차량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도청 앞 발포였다. 이 이외에도 5월 21일 아침부터 오후 5시 3공수가 전남대를 철수할 때까지에는 6.25 고지쟁탈전을 방불할 만큼의 밀리고 미는 식의 교전과 쌍방 발포들이 있었다.
특전사 10개 대대가 광주시를 철수할 때 철수로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무장 시위대가 사격을 가함으로써 광주시에서는 정규군과 정규군 사이에 벌어지는 정도의 교전들이 이어졌다.
누구를 위와 같은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발포를 놓고 5.18측은 발포명령자가 전두환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공수부대 대신 정규군인 20사단을 투입시켰더라면 처음부터 위협사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수부대는 과도하리만큼 민심을 다치지 않도록 억제되고 통제되어 왔기 때문에 발포에 대한 자제력이 군으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강했고, 바로 지나친 자제력이 광주 전투를 필요 이상으로 키웠다. 공수대원들은 미국 헤리티지 연구소의 분석가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듯이 끝까지 시민군을 조준하지 않고 위협사격 차원에서 대응했다.
5월 21일 탈취한 무기는 2개 연대 규모의 것이었다. 카빈, M-1, 기관총 등 5,403 대,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이 탈취됐고, 이들 779대는 군용으로부터 탈취한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로 구성됐다.
광주로 상품을 나르는 상인들이 없어지자, 식료품과 생필품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간들이 지속되면 광주시민들의 고통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거기에 일부 무장 시위대들은 시민들을 협박하여 금품을 뜯고 가족 단위로 살해하고 돈을 뜯어가고 방을 빼앗는 등 광주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기록을 보면 계엄군은 이러한 광주시민들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덜어주기 위해 노심초사했으며 그 결과 5월27일 새벽 극비의 특공대식 작전을 폈고, 이로써 무법천지 광주에는 다시 치안질서가 확립된 것이다. 이런 극비 정보마저 새어나가는 바람에 탈환작전 시 불필요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당국이 광주시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TNT 제거작업 과정에 웅변돼 있다. 시민군은 8톤 트럭 분량의 TNT를 도청 지하실에 저장하고 거기에 뇌관까지 연결해놓았다.
폭발하면 광주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그런 분량이었다. 시민군은 이를 폭파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협박했지만 계엄군은 목숨을 내놓고 잠입하여 10여 시간에 걸쳐 뇌관을 제거해주었다. 시민군과 계엄군 중, 누가 광주시민을 더 사랑하였는가?
광주시위대는 헌법기관인 경찰과 계엄군에 폭력을 먼저 행사했고,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에 불복했으며,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바로 이런 것이 내란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의 재판부는 5.18을 김대중에 의한 내란음모였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광주시위대를 헌법기관에 준하는 존재라 판결했고, 헌법기관으로서 이를 진압한 계엄군을 국가폭력집단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광주시민에 하루라도 빨리 질서를 찾아주려고 세웠던 조기진압 계획을 놓고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경우 내란목적에 불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저지른 신군부의 행위이므로 재진입작전은 내란을 목적으로 하는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5.18을 신군부가 일으킨 것이라 판결했지만 수사기록을 보아도 신군부와 5.18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수사기록을 보아도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주체는 신군부가 아니라 계엄사-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 통수체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신군부가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것은 대통령과 내각에 공포심을 갖게 한 행위이기 때문에 헌법기관을 협박한 행위가 됨으로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참으로 괴변이었다. 무장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광주시는 진압하지 말았어야 했고,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차단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의 판결인 것이다. 이러한 억지의 인민재판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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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사람들의 증언중
19일 작성된 (선동)유인물 차량을 접수,제공하라 폭약이나 총기류를 시민군이 가져야한다 주변의 관공서와 악질 기업주집에 방화하라 조금만견디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해방정권을 세울수있다. (손남승,5.18연구소)-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
도청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나기도했다 오발을 하거나 재미로 한방씩 쏘아보기 때문이었다. 더 기겁을 할일은 수류탄을 차고다니는 꼴들이었다. 안전핀고리를 그렇게 차고 다니는 고린줄알고 그 고리를 줄래줄래 꾀어 달고 다니고 있었다. 그게 뽑히는 날에는 떼죽음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리고 총 파지법을 모르기 때문에 대작대기 들듯 들고 휘젓고 다니는데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송기숙,5.18연구소)
친구와 함께 2인1조가되어 학동교회 옥상으로 가려는데 목사가 못들어가게 했다. 목사는 계단의 핏자국을 보여주며 어떤 고등학생이 자신의 발에 오발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최남식,5.18연구소)
5.18당시 광주시민들에게 30년전의 빨치산 투쟁은 결코 잊혀진 역사가 아니었다.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
21일 용봉 국민학교 철도변근처에서 나는 거기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수가 타라고 하면서 시민군에 징집된 차량처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징발 당한다고 했다. (정상현,5.18연구소)
주유소 주인들이 대부분 시위대 차량에 기름을 조금씩밖에 넣어주지 않았다. 다른시위대 차량이 와서 기름을 달라고하는데 없다고하면 격해진 시위대가 주유소기름들을 막무가내로 부숴버릴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기름을 분재해주었기때문에 금방금방 기름이 떨어졌고 그럴때마다 차를 팽개치고 다른차를 타곤했다. (윤석진,5.18연구소)
당시 총을잡았던 사람들은 수탈받고 착취받는 계급이었고 사회변혁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사는 사람들은 집에 숨어서 지냈다는 것이다. (전용호,1988년 9월)
노동자계급,농민층,도시중하층,쁘띠부르주아지,중간계층,중소자본가들로 구성된 민중들이 주체가된 민중항쟁이었다. 당시 도청뒤의 부촌지역 사람들은 모두어디론가 도망을 간 상태였고 고아나 서럽게 살아온 사람들이 참여했다. (한국현대사 산책,강준만)
5월 20일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담양으로 나가는 길목은 피신하는 시민 학생들이 많았다. 차를 탈수없어 많은사람들이 걸었다. (임낙평,1988년 9월)
지원동에서 배추장사를 하던 사람이 트럭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그 사람은 계엄군이 아닌 시민군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돈을벌려고 장사하는것이 얄미워 일부러 치었다고 했다. (최남식,5.18연구소)
5월25일 미국무장관 머스키의 전송: "광주에서의 상황은 용납할수 없는 곳으로 전개되었다" 그의 정보원에 따르면 "온건파 시민위원회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급진파가 상황을 장악한것으로 보인다. 인민재판이 열렸고 몇건의 처형이 벌어졌다. 학생시위대는 혁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신원미상의 무장한 급진세력들로 대부분 대체 되었다.
5월26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고하다: 광주에서의 상황은 더 나쁜쪽으로 전개되엇다 민병대 무장한 급진파의 복귀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에 관한 보고들이 있다. (웬트위스공대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고등학생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시민군들에게 제공할 쌀을얻었다 (최지수,5.18연구소)
방림동에서 쌀을 가져가라하는데 차가 없어서 가져올수 없다며 나더러 기동타격대 차를타고 쌀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후에 그사람들은 나를 강도로 매도했다. 내가 총으로 사람들의 배를 위협하고 쌀내놔라며 갖은 협박을 가했다는 것이다. (구성주,5.18연구소)
우리가 맨먼저간곳은 중앙고속터미널 이었다. 터미널홀에 차 몇대가 세워져 있었지만 키를 모두 뽑아가버린 상태였다. "시위차량이 부족하니 그레이하운드를 좀 내주시오" "차를 줄수없소" 그 말을 들은 100여명의 흥분한 사람들이 세워놓은 차에 달라붙어 밀기시작하였다. 어떻게 된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중앙고속 건물안으로 들어가 회사기물과 기타 시설물들을 모두 부숴버렸다. (윤석진,5.18연구소)
주유소에는 사장은 없고 부인과 종업원1명이 있었다. "기름좀 주시오" "없어요" "비상탱크것좀 주시오" "비상탱크도 없어요" 그것을본 일행중 한사람이 각목으로 유리창을 박살내버렸다. 그때서야 놀란여자는 비상탱크에 있는 기름을 주었다. (허춘섭,5.18연구소)
한쪽에서 아이스크림도 놔두면 다 녹으니 가지고 가서 사람들이나 먹게하자고 했다. 우린그때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김윤기,5.18연구소)
광주사태 기간동안 윤상원이 지도자들이 모인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파리꼬뮨에대하여 이야기했고 많은사람들이 '함께투쟁하고 함께산다' 는 생존방식에 있어서 광주사태와 파리꼬뮨이 유사하다고 진술했다. 광주사태 기간동안 이양현은 1970년대 파리꼬뮨에 대하여 읽으면서 보았던 내용을 몸소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3~4살어린아이가 프랑스군대에 돌을던졌다'는 내용을 기억하고는 3살짜리 자신의 아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양현과의 인터뷰,2001년 6월22일)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7권 69-95쪽에는 윤영규(당시 42세)가 “살육의 낮과 밤”이라는 제하로 쓴 글이 들어있다. 그 책에 있는 시체장면을 아래에 소개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사진들이다. 북한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사진들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몸부림치는 여학생의 가X을 도려내는 장면, 임신부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장면, 긴 대검을 여성의 음X로 밀어 넣는 장면 등 지금에 와서도 머리에 떠올리기 싫은 잔인한 장면들이 많았다. 여기서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북한이 그런 생생한 살인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남한에서는 그런 사진이 왜 나타나지 않는 지이다. 북한텔레비전에서 나왔다면 광주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작품’들이 연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송정리 공군 3252부대 방위병이었던 이재춘 의증언)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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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2일 한편 광주시내 무장 시위대들은 거리거리에 차량을 질주하며 총을 쏘아가면서 공포분위기를 연출했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장례비에 쓴다며 돈을 뜯어냈고, 여염집에 들어가 가족단위로 집단살인을 저질렀고, 평소 앙심을 갖고 있던 집에 들어가 가족을 몰살시켰고, 금품을 훔치고 강간을 자행하는 등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언비어에 속아 거리로 나갔지만 이렇게 무법천지로 변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도를 다스리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불만을 토하기도 하고, 계엄군을 다시 보내 달라 애원하기도 했다. 시민군은 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면서 합세를 권장하기도 했다. 시민들까지도 학살했다. 한편으로는 무장시위대가 보여주는 무서운 행동들을 지켜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무총리서리의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차츰 “속았다. 광주시민이 폭도에 속았다. 지금부터라도 빨리 수습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나주에 있던 무장시민 100여 명이 군부대에 처음으로 투항하여 무기, 차량 등을 반납했다. 폭도들은 학동 지원동 일대로 몰려다니면서 “우리가 투숙할 테니 집을 비우라”며 주민을 내쫓고 우진아파트에 와서는 침구를 다 가져갔다. 금남, 삼익, 삼양맨션 아파트 주민들에게 식사제공을 강요했고, 사창가 일대에 들어가 창녀들에게 수혈을 강요했다. 일부 폭도들은 경찰복을 착용하고 경찰 행세를 했다. 공수부대 복장을 한 폭도들은 “우리는 전라도 공수부대다. 어제까지는 경상도 공수단이 와서 우리를 쳤는데, 이번에는 우리 전라도가 그들을 없애야겠다.” 등의 언동을 하고 다니면서 행패를 부렸다. 시민들에는 공수부대가 재투입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 폭도들을 격퇴시켜 주기를 바라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자칭 학생대표 2-5명이 전남부지사를 만나 학생 요구사항 6개항을 제안했고, 부지사는 무기를 자진 반납하고 자수할 것을 권했다. 일반시민들은 광주교도소로 전화를 계속하여 폭도들을 속히 소탕해 줄 것을 관계기관에 연락해달라고 요청한다 도청 정문에는 학생들 상호간에 의견충돌이 일고 있다. 도청에 불을 지르자는 파와 우리의 재산인데 그러면 되느냐는 온건파 사이에 의견충돌인 것이다. 오후엔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장유동과 전남대학교 학생대표인 김창길이 계엄당국과의 협의 내용을 보고하면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투쟁을 한다면 폭도 밖에 되지 않는다. 어서 빨리 탈취한 무기를 계엄사에 반납하고 치안질서는 경찰에게 맡기자”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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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반란 폭동을 주도하기 위해
김일성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공작을 펼쳤던
북 특전사 출신 탈북자의 증언
(5.18당시 실제 김정일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공작을 펼친 북특전사 출신의 증언: 현재 탈북하여 서울에살고있습니다)
5.18은 오랜시간을 가지고 김일성이 준비한 대한민국체제 정복의 시나리오였다
5.18폭통이 일어나기전해인 1979년도에 나는 711군부대(60저격려단) 에 대남공작 전투원으로 근무하고있었다 (711군부대는 1968년청와대 습격을 비롯한 한국에서 무장활동 을하여온 124군부대임)
2)인민군정찰국소속 60저격려단, 11공군저격여단, 3.8공군육전여단, 64해상저격려단, 직속정찰대대(8개대대)등이였으며 군단들이보유한 저격려단은 4군단에 17저격여단, 1군단에 61저격여단, 2군단에 62저격여단, 108훈련소, 5군단에 63저격여단등이있으며 1개여단은 10-12개대대로 편성되여 있으며 1개대대병력은 약500명 1개여단 병력은5000명 정도이다 여단내의 각 대대에는 작전조(대남침투조)를 따로 조직하고 육체적 정신적 골간들을 추려 맹훈련을 시켜왔다
3)인민무력부 직속으로 교도훈련지도총국이 있으며 예하부대로 경보병여단들을 가지고 있으며 교도훈련지도총국이 보유한 북한경보병여단 병역은 10만명에 달한다
5.18 광주폭동이 일어나기전해인
1979년5월 인민군총참모부 정찰국명령서를 하달받았다
명령서의 내용은 “정찰국직속대대와 각여단작전조 전투원역량을 보충하고 작전조 전투원들의 머리를 장발로 깍을데대하여”였다
당시 인민군병사는 전부 삭발을 하였으며 남파임무를 수행하는 중앙당 대남연락소와 정찰국직속 저격여단과 인민군군관(장교)들만 평상머리를 하고있었다
당시북한에서는 일반국민들이 장발을하면 자본주의 요소라고하여 국가와단체의 비판대상이 되어 누구도 장발을 할수없었다
남파공작부대에 전달된 명령서에 장발을 명령한것은 당시한국의 청년들과 시민들이 장발을 하고있기 때문에 광주에 침투하는 전투원들을 광주시민으로 위장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다 당시 김일성은 서울, 인천, 부산, 대구에서 동시 다발적인 폭동을 계흭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후회하였다
광주5.18사건은 김일성의 적색통일 구상에의하여 북한대남공작 부대와 김일성이 고용하고 키워온 한국의민주세력으로 둔갑한 국내간첩들의 국가정복 반란이였다 역사외곡을 바로잡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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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는 광주시민을 살렸다.
5.18반란 폭동 당시
전남도청 지하실에는 광주시 전체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무서운 양의 TNT가 저장돼 있었고,
저장만 된 것이 아니라 뇌관까지 설치되어 폭탄상태에 있었다.
그 방대한 양에 일일이 뇌관을 설치했다는 것은
전문기술자가 동원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기술은 군에서도 소수의 문관이나 준위들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어마어마한양의 폭발물을 그것도 전남도민에 대한
일체의 행정서류가 보관돼 있는 도청건물에 설치해 놓는 행위는
시위대가 광주시민을 대량 학살하려 했다는것을 말해준다.
시위대는 이무기를 가지고 광주시민과 광주시를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했다.
80만 광주시민을 인질로삼아 계엄군을 협박한 것이다.
그러면 이른바 시민군은 어째서 계엄군에게 이런 인질 협박을 벌였을까?
계엄군이 광주시민 만큼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유언비어의 내용처럼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70%를 몰살시키려 내려왔다면
이 TNT8톤에 대해 모른 척하면 됐을것이다.
그리고 구태여 부하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광주시 탈환작전을 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계엄당국은 준위 등을 시민군으로 위장하여 2차례에 걸쳐 잠입시켰다.
발각되면 살해당할 수 있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장장 10여 시간에 걸쳐 모든 뇌관을 분리했고,
그과정에서 침투했던 계엄군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다.
적진 속에 들어가 뇌관을 제거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를 광주인들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광주시민들은 계엄군과 시민군 중 어느 쪽이 광주를더아끼고염려했는지생각 해야할것이다.
0930psj
님의답변
일단 518의 근본원인이 전두환의 권력에 대한 사심이 최우선 원인임은
부인하기 힘드나,
왜 하필 광주였을까?
그곳이 제일 극심한 혼돈을 야기 했기 때문에 계엄령이 내린것 아닌가?
그럼 광주시민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렇게 했나?
내가 알기론 김대중 때문에 그런것 같은데?
쉽게 말해서 가해자가 악하다고 해서 피해자가 선하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는것이지.
민주화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왜 무기고는 털어서 교도소는 습격했나?
아래 사진 잘봐봐, 경찰로 위장한 자칭 민주화 운동가들,
경찰서 습격후에 무기탈취하고,,,
경찰 아니니까 잘봐봐,,장발족도 있을테니까,,
왼쪽 사진 동그라미 잘 보고.
아래 동그라미 다시 봐봐,,,이 아저씨가 위의 그 아저씨 맞지?
이건 어떤가? 시민들을 머리 박게 만들고 총 겨누고 있는 인간들.
이 사람들이 계엄군 맞어?
저 당시 계엄군은 모두 장발족들인가?
그리고, 전두환이 뭘 숨겨? 내가 제일 이해 안되는 부분이 이것이다.
마치 광주진압이 '비밀리에' 진행된것 처럼 말하는것.
그러나 당시 언론을 보면 유혈진압이 일어나고 있음은 대한민국이 다 알고 있었다.
위에 네모 박스 친 것의 앞부분은 '시민'이라는 글자를 칸이 좁아서 잘라온건데,
저게 518로 부터 며칠후의 뉴스이다.
아래는 518이후 한달 약간 지나서 나온 뉴스이다. 여기서도 사망자를 언급하면서 보상급을 언급하고 있다.
32년전 420만원이면 요즘 돈으로 얼마일까? 알아서 계산해 보도록.
내가 젊은 시절엔
광주 사망자 2000명수가 기정사실화 되면서 나를 흥분시켰지.
그런데 그게 어느날 100명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난 5,6공의 조작이라고 믿었어.
그런데 야당이 참여하고,,
노무현이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 던지던
5공 청문회가 끝나도록 그 숫자가 바뀌지 않는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걸까? 아래 기사에서 그 숫자의 진원지를 찾았다.
아마 이것때문에 그런 루머가 생긴듯.
전두환이 518이후 맞아 죽을까봐 광주에 못갔을줄 알지?
1년후 방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신문기사가 나왔다.
물론 당시 시대적 분위기에서 언론도 '전두환 만세'글을 올릴수 밖엔 없었을 것이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는 할만한 기사들이다.
김대중이 조금이라도 義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광주에서의 유혈참사에 대해서 자신이 조금만 중재를 잘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거라는건 알았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고 있는데'라는 식의 과대방상적인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부추킨것 아닌가?
김대중, 그는 도대체 김영삼정권때 사형언도를 받은 전두환을 왜 풀어준것인가?
'화해'를 위해서? 그거 믿어도 되나? 혹시 약점 잡힌것은 없었나?
하여간,,,
광주시민이 그렇게 충성하던 김대중,,,그는 정말로 용감한 사람이었나? 난 그렇게 생각안함.
탄 원 서
본적: 서울 마포구 동교동 31-1 주소: 좌 상 178-1 성명: 김 대 중 (1925.12.6)
대통령각하 본인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계엄포고 위반사건등으로 1,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현재 상고중에 있습니다. 본인은 그간 본인의 행동으로 국내외에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국가 안보에 누를 끼친데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국민앞에 미안하게 생각해 마지 않습니다. 본인은 앞으로 자중자숙하면서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아니할 것이며 오직 새시대의 조국의 민주 발전과 국가 발전을 위하여 적극협력 할것을 다짐합니다. 본인은 본인과 특히 본인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특별한 아량과 너그러운 선처가 있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981년 1월 18일
위 김 대 중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게서도 아시다싶이 본인은 교도소 생활이 2년 반에 이르렀사온데 본인의 지병인 고관절변형증과 이명 등 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충분한 치료를 받고 자 갈망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각하게서 출국(?) 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서 2 3년 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 하여주시면 감사천만이겠읍니다. 아울러 말씀 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절(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 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무엇이 5.18의 진실? 우리나라사람이라면 꼭 읽어야함
네이버 지식인에서 퍼왔습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404&docId=153226694&qb=6rSR7KO87Y+t64+Z&enc=utf8§ion=kin&rank=3&search_sort=0&spq=1&pid=RKDFAU5Y7vNsstxZbOlssssssuK-080250&sid=UMlnLnJvLBUAAE8GDFM
-자세히 보시려면 주소입니다.-
길다고만 생각지 마시고, 꼭 읽어주세요.
어려운 내용을 조금 건너 뛴다 하더라도 꼭 끝까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사실 짜집기적 거짓 만들기"가 가능한 기사나 언론만 보지 마시고,
제대로된 증거자료를 찾아보시고 나서 욕을 하던지, 말던지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는 것은 본인입니다.
경찰,군인을 사칭해 사진을 찍어, 직접 진압하지도 않은 장면을 진압한 것 처럼
가장하여 유포한 것 보고 소름이 끼칩니다...
또한 광주사태(중립적 단어)에 사망자가 2000명이었다 100명대로 줄었다는 사실도
... '노무현 정부'때 5공청문회가 오고 나서도 그 사망자 수는 100명대로 변동이 없었다는 것
또한 소름이 끼치네요.
5만명이 넘는 시위군에게 무차별적 사격을 했다면 어째서 사망자수가 200명도 채 안될까요?
왜 2000명으로 부풀려졌으며, 왜 200명도 안되는 사람들중 70명은
국가에서 사용하지 않은 총탄에 의해 사망한 사람입니다. 즉 서로 적군으로 오인하여
아군을 쏜 것입니다. 무기고에서 턴 무기로 서로를 죽인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진정한 시민이라면 자기 아들딸 뻘인 중학생들을 앞세워 진격을 합니까?
무섭네요.
왜, 진압이 광주안에서 다른 지역의 국민들이 모르게
진압된 것 처럼 포장을 할까요? 당시 기사를 보면 진압은 비밀리가 아니었습니다...
이 글의 증거자료대로라면, 광주사태를 진압하지 못했다면, 제 2의 6.25가 일어나여
적화통일 될뻔 하였네요.
왜 이 것들을 잘 모르고있죠 우리나라 국민들이? 어째서 북한의 국민들이 더 잘알고 있나요?
어째서 북한 국민들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 칭하며 찬양하지요..? 왜 생중계 되었으며..
또 세계에서 2번째로 못살던 나라의 시민이
도청지하 tnt설치는 어찌 했으며, 무기고 44곳을 어떻게 정확히 털도록 지휘할 수 있었으며..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왜 요즘 영화에서는 화려한 휴가,26년,남영동 1985 등...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진압의 수위까지 과장하여 표현하며,
역사적 사실을 쓰지않은 허구 영화... 게다가 이 3영화의 공통점은
'현재 북화하여 김정일,김일성을 찬양하여 떠 받드는 인물'을 굉장히 많이
미화하고 있습니다. 남영동 1985에서는 8명 이상정도 되더군요..
무슨 대선다가오니까, 이런 말도안돼는 영화를 만들어 하는지요.
왜 이러한 증거자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자료도 없이 무조건 욕만해대는 사람은 왜그러는 걸까....
rkdqnwkd18님의답변
님 보고있는 혹은 봤던 교과서
5.18에 관한 내용은 거짓말이고 사기입니다.
교과서라고 종교처럼 믿는다면 맹신이요 미신이지요.
특히 5.18관련내용은
황석영이 89년 월북해서 김일성 지령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입니다.
그걸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한거죠
그래서 내용에 앞뒤가 맞지 않고 이상한겁니다.
5.18옹호론자들의 주장
수사기록은 신군부가 작성한것이므로 믿을수없다.
교도소 습격사건은 조작이다.
탈북자들의 주장은 증거가 없다.
5.18측 자료는 유네스코가 인정했으므로 믿을수있다.
전두환은 하극상을 일으켰다.
+++++++++++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측은 5.18측 주장만 옳다하고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5.18측 주장이 틀렸다고 하는겁니다.
그러니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신다면
5.18측이 제시하는 자료들중 의문나는 점을 해결해줘야 하는겁니다.
그런데 그 의문나는점이 5.18의 핵심 내용입니다.
5.18이 일어나게한 원동력이고
확장되어 대규모 무장시위를 하게된 두뇌라고 할수있죠
다이너 마이트가 광주 시민이라면
이 다이너 마이트가 터질수 있도록 불을 당긴 사람말입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서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이런 5.18을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측의 자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누군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그렇다 하기에 확인도 하지 않고
쫒아가서 얼떨결에 민주화운동했다....입니다.
그럼 왜 누군가가준 정보
그리고 누군가가준 정보의 진위확인이 중요한지
설명하겠습니다.
++++++++++
예를 들어
차가 도로가에 한대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 앞에는 한 여인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 옆에는 운전자가 그 여인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10여명의 남자들에게
누가 차로 저 여인을 치어 살해했다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 10명의 남자들이 화가 단단히 나서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려 합니다.
헌데 누군가 이들에게 몽둥이를 줍니다.
그 몽둥이를 들고 사건현장으로 달려가
그 운전자를 두들겨 패 줍니다.
그리고 운전자가 사망했습니다.
자 이 10명의 남자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 일까요?
나중에 안 사실은
도로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여인을
운전자가 발견하고 앞에 차를 세웁니다.
그 여인의 상태를 확인하려 앞에 서있었던 겁니다.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누가 10명의 남자들에게 그 정보를 줬는지
누가 몽둥이를 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일까요?
++++++++++++++++
그러면 이런질문을 할수있을겁니다.
만약 실제 그 운전자가 그 여인을 차로 치었다면
그들은 의인인가? 폭력배인가?
이에 대한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렇다면 민주화운동이란것이
모 아니면 도로
정확한 사실확인 없이
누군가의 말에 의존하여
일단 저지르고 본다음
운좋게 맞아떨어지면 민주화운동이되고
아니면 폭력배가 된단 말인가?
++++++++++
이렇기 때문에
최초정보제공자
최초정보전달자
정보의 진위확인자가 중요한겁니다.
+++++++++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정보말이죠
이는 엄청난 중대 사건입니다.
한나라의 정권을 무력으로 잡겠다는거죠
그럼 이 정보를 누군가 알아내서 대학생이나 광주시민에게 전달했을거 아닙니까?
그사람이 누구입니까?
설마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떤이가 그런 중요한 정보를 광주시민에게
전달하여 무장투쟁을 하자 했는데
아무런 확인도 없이 네~그렇군요 하고서는
무기고 탈취하여 계엄군에 총을 쏜게 아니것죠
그리고 그 누군가 즉 정보를 전달한 이의 정보가
정확하다는걸 광주시민들은 어떻게 확인하였는가?
(전두환이 국권을 찬탈하려한다.
최규하는 허수아비다. 이에대한 정보 진위를 어떻게 확인했나요?)
사실확인을 했으니
"맞다!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한다 는 정보와 사실이 딱~ 맞다"
인정하고 무장투쟁을 했겠지요.
이런 사실확인도 없이
무작정 무기고 털어서 무장항쟁을 하진 않앗겠지요
자! 누가
어떤경로로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내서
광주시민 누구에게 전달하였고
그 광주시민은 어떻게 그 사실이 맞다는걸
확인 하였는지
설명해 주시죠.
38개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왜 나타나질 않는가?
국가 유공자가 뭔지 몰라서?
죄의식때문에?
아니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안사람은
현재 대한민국에 살지 않아서?
설마 귀신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알려줬다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겟죠.
누군가는 알고있었것지?
무기고 탈취는 매우 중요한 대목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위치를 누가 알려줬는지 아무도 모른다?
즉 5.18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이 있기는 한데
누구인지는 모른다?
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
광주5.18의 핵심 역할을 한사람
이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보 유출자
정보 전달자
정보 확인자
정보 확산자
무기고 위치를 알고있었던자 최소38명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걸까요?
++++++++++++
++++++++++++
(이 정보제공자와 38개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가 누구인의
중요성이 또하나 있습니다.
만일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위 정보제공자들을 알지못한다면
5.18의 주인이 바뀔수 있다는 겁니다.
5.18의 주연급들이 누군인지 모르기때문에
막말로 개나 소나 돼지가 와서 그 정보는 내가 알려줬다 라고 한다면
5.18의주인이 정신병자 혹은 개나 소나 돼지가 될수 있는겁니다.)
+++++++++++++
+++++++++++++
최초 정보제공자 무기고 위치 정보제공자 이들이 사망했다 가정한다면
만약 이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하더라도 또다른 의문이 여기 가세하는 겁니다.
이 중요 정보제공자의 정보를 확인한 절차가 없다는것이 이상한겁니다.
누군가 최초 정보를 줬는데 100퍼센트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위를 했다?
극비사항인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 알고있어 안내하는데 이에 아무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38개 무기고를 털러간 38개 조직이 있습니다.
이 조직들중 극비사항인 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에 대하여
신분이나 그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의혹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면
결국 5.18주인공은 북 특전사 출신들이 되는겁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소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그런데 북특전사 출신들이 그 누군가가 우리요 하고 5.18의 주인임을 천명했고
이에대한 구체적 진술을 했습니다.
자 이 사건 즉 북특전사들의 증언
이들이 증언한 5.18관련 내용의 의미가 바로
5.18주인이 없다는 것이고, 5.18측에서 그 누군가를 제시하지 못하면
5.18주인은 북특전사가 될수있는겁니다.
특히 유언비어 그리고 38개 무기고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여
38개 분팀을 만들어 무기고까지 갔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5.18이 순수 광주시민들에 의해 일어났다면
빨리 정보제공자 ,38개 무기고위치 정보제공자를 찾아내야 하는겁니다
누군가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다.
운전자는 도망쳐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동차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럼 자동차가 범죄자인가?
운전자가 범죄자죠?
그 운전자가 누구입니까?
+++++++++++++
+++++++++++++
그리고 남은
5.18유네스코등재 설명은 매우 간단합니다.
히로시마 원폭돔도 평화의 상징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특별한 사건이면 무엇이든 등재시킬수 있는곳입니다.
따라서 5.18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고
민주화운동이라 고무도장을 찍어준게 아닙니다.
+++++++++++
+++++++++++
전두환은 하극상을 일으켰다?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고 전두환보다 계급이 높아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체포하면 하극상이 된다?
그렇다면 상급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모두 하극상이 되고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아무도 체포할수 없는것인가?
대한민국의 법은 만인에 전국민에 공평하기때문에
대통령이든 계엄사령관이든
범죄를 저지르면 집행자에 의해 언제든지 체포될수있다.
정승화는 범죄자 김재규의 뜻에 동조하여 직속상관인
국방장관의 명령없이 불법적인 계엄선포를 진행했고
이과정은 5.18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 측에서도 알고있는 내용이다.
즉 정승화는 운좋게 계엄사령관이 되기 이전에
범죄를 저질렀고 범죄자가 계엄사령관이 된것에 불과하다.
++++++++++++
++++++++++++
최규하는 전두환의 허수아비다?
전두환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길래
그리고 최규하가 얼마나 나약했길래
허수아비가 된단말이죠
최규하가 허수아비라는 과학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만약 최규하가 허수아비였다면 왜 지금은 대통령이 누군가의 허수아비가 되었는지
조사하지 않습니까?
전두환보다 더 무서운 김일성 김정일의 허수아비도 될수있을것이고
함마 전기톱 최류탄이 날아다니는 공포의 국회를보고 허수아비가 될수있을것이고
보다더 효과적인 최면이나 약물 아니면 가족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여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 가능성도 있는거 아닙니까.
이렇게 비추어볼때
만약 최규하가 전두환의 허수아비였다면
김영삼은 박계동의 허수아비고
노무현은 김대중의 허수아비고
김대중은 김정일의 허수아비고
이명박은 촛불좀비의 허수아비가 맞는겁니다.
+++++++++++++++++++
+++++++++++++++++++
전두환이 5.18폭도들과 다른것은
전두환은 정승화의 범죄사실을 면밀히 조사하여
증거를 확보하고 법에따라 체포한것이고
5.18폭도들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 의하여 들은 정보를
확인도 하지 않고 누군가가 털어준 무기로 무장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
5.18옹호론자들의 5.18기록을보면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소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즉 5.18민주화운동설을 보면
머리는 없고 몸통만 있습니다.
더욱 웃긴건 민주화운동이라고 대대적으로
매년 5월 18일 마다 기념하면서 5.18의 주역 핵심인물이 누구인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광주시민들,5.18을 연구하는 단체들 조차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
+++++++++++
이상태에서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려한다는 정보를 정신병자가 줬다며 이런 주장을 할수도 있을겁니다.
5.18이 일어나게된 최초 정보제공자는...
어떤 정신병자때문 이었습니다.
이 정신병자는 누가 한말을 1년동안 반복하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좋게 정신병원을 탈출합니다.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궁금이왈 쿠데타가 뭐야 하고 물엇습니다.
아직 코흘리게인 친구 띨띨이가 그걸 알리 없엇습니다.
헌데 TV에 전두환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냅다.
전두환에게 물어봐
하고 답해줬드랍니다.
그걸본 정신병자는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 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서는 전두환이 구데타를 안다?를 반복햇습니다.
그 정신병자는 정처없이 걷다 전라도 광주까지 갔더랍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를 중얼거리면서.
전라도광주에 도착한 정신병자는 기진 맥진 힘이 다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중얼거렷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아~안~다?
전남대 앞에서 비틀거리기 시작햇습니다.
그를본 광주시민이 놀라 그를 부축해 줍니다.
그는 그 광주시민을 보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전~두~환이 쿠~쿠~데타~를 하~아~안~다?
이말에 놀란 광주시민들이
전두환이 쿠데타를 한다 라고 오해하여 일어난 폭동이엇습니다.
이런 주장을 누가 한다면
5.18이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대응을 하겠습니까?
"정신병자설은 허위다 " 이렇게 대응한다면
당연히 반문할것입니다.
그럼 전두환이 쿠데타를 할것이라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
자~어떤 답변을 주시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광주5.18은
정확한 정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일어난 폭동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탈북을해 서울에 살고있습니다.
++++++++++++++++++++++++++++++++++++++++++++++++++
상식적으로 봐도 5.18은 폭동.
백번 천번 양보해도 5.18은 폭동입니다.
5.18이 그들 주장처럼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이었다면
독재에 항거했거나
탄압에 항거했거나
부정부패에 분노했거나
이런 류의 명분으로
진압이 되고나서
그 폭동에 가담했거나 동조 동의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지역은
그에 준하는 분위기와 문화를 가지게 될겁니다.
그런데
80년이후 대한민국에선
이런 말들이 기정 사실로 인식화 되어있었습니다.
전라도에 경상도 차량이 가면 기름을 주유해 주지 않는다
전라도에 경상도 사람이 가면 밥도 팔지 않고 여관방도 주지않는다
전라도에 경상도 말투를 쓰면 구타를 당하거나 김대중 만세 삼창을 불러야 한다
전라도에서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진압이후 이들은 왜 경상도에 분노하고 원한을 가졌겠습니까?
이는 지역감정 유발시키는 유언비어에 일어난 폭동이기 때문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북의 공작이 없었다 해주어도
5.18은 결코 민주화 운동이 될수 없습니다.
+++++++++++++++++++++++++++++++++++++++++++++++++
5.18반란 폭동 문제는 여야가 한통속입니다.
2010년 2월 26일 그동안 대국민 사기쳣던5.18특별법을
국회에서 몰래 개정햇습니다.
헌데 이사실을 국민에 알리지 않고있지요.
소급입법 금지를 어겨 위헌 법률을 만든 여야가 이를 인정한것이
바로 2010년 2월 26일 입니다.
어떻게 대국민 사기를 쳤는지 민주화빨갱이들은 고백해야 할겁니다..
단순 기관인 헌법재판소를 이용해서
위헌 법률을 입법하여 불가능을 가능으로 사기를 친
대국민 5.18반란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민 사건입니다.
5.18반란 폭동을 사기치기 위해 소급효 금지와 소급입법 금지를 어겼고
헌법 84조를 어겼습니다. 이는 명백한 위헌이요 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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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급 (遡及) 다른 뜻(1건) [명사]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미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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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급효(遡及效)란 (위키백과)
법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효력을 발생하는 것을 뜻하는 법률용어이다. 특히 한국
의 형법에서는 소급효를 인정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는 헌법 제13조에 의하며
소급효를 인정할 경우 인권을 중대히 침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소급효는 법적
정의라는 개념에는 합치하지만 법적안정성에는 위협을 준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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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형법정주의
'죄형법정주의'는 어떤 행위가 범죄가 되고 그 범죄에 대하여 어떠한 처벌을 할 것
인가를 미리 성문의 법률로 정해놓아야 한다는 형법의 원칙이다.
즉, 이미 제정된 정의로운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되지 아니한다는 원칙으로
, 이는 무엇이 처벌될 행위인가를 국민이 예측가능한 형식으로 정하도록 하여 개인
의 법적 안정성을 보호하고 성문의 형벌법규에 의한 실정법질서를 확립하여 국가형
벌권의 자의적 행사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법치국가 형법의 기본
원칙이다.
■ 법률주의/명확성의 원칙/유추해석금지의 원칙/소급효금지의 원칙
죄형법정주의에는 법률주의(관습형법금지의 원칙), 명확성의 원칙, 유추해석금지의
원칙, 소급효금지의 원칙 등이 있다.
-법률주의: 죄와 형의 내용은 국회를 통과한 법형식인 성문의 법률에 의해 규정해야
한다는 원칙.
-명확성의 원칙: 죄와 형을 규정하는 법률은 그 내용이 명확해야 한다. 즉, 국회를
통과한 법률에 의해 죄와 형을 규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법률의 내용이 불명확하고
애매모호하면 죄형법정주의 정신의 실현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국회는 죄와 형
의 내용을 명확히 하여 법률에 담아야 한다.
-유추해석금지: 죄와 형을 규정한 법률을 해석함에 있어서 유추해석은 허용되지 않
는다.
-소급효 금지: 죄와 형을 규정한 법률은 그 법률의 시행 이전에 행해진 행위에 대해
소급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사후법의 금지란 행위 당시 적법한 행위에 대하여 사후에 형사책임을 지우는 소급입
법(ex post facto law, retroactive law)의 금지를 말한다. 소급입법금지원칙이라고
도 한다.
한국 헌법은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헌법 제13조 제1항 전단). 이는 적법한 행위에
대하여 사후에 이를 처벌하는 소급법을 제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또 그러한
방법으로 형을 가중하는 것도 금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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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 8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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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
이조항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는 재직중에도 형사 소추를 받는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하는 오류를 범할수 있습니다.
내란 또는 외환 이외의 죄는 재직후 형사상 소추를 받는다
그러므로 공소시효가 재직중에는 정지되었다로 볼수있다.
이렇게 오류를 범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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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대통령은 재직중에 내란,외환 이외의 죄는
형사상 소추를 받을수 없는가.
받을수 있습니다.
재임중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형사상 소추를 할수 있습니다.
탄핵을 하면됩니다.
탄핵후 형사상 소추를 하면됩니다.
즉 공소시효가 정지 되는것이 아닙니다.
-----------------------------------------------
삼권분립주의와 법치주의에 의하여
입법부 -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주면. (우두머리 국회의장)
행정부 - 정부기관에서 그 만들어진 법을 구체화하여 집행하고 (우두머리 대통령)
사법부 - 법률상의 위법여부를 판단해서. 분쟁해결과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기관입니
다. (우두머리 대법원장)
이 이상 혹은 동등한 기관이 있을수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름처럼 헌법을 재판하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을 재판하는 곳도 아닙니다.
입법부,법원의 시다바리가 바로 헌법재판소 입니다.
법원의 재판사항에 관여,판결할수도 없습니다.
조문숙 법학자의 말처럼
수사기관에서 지문감식반에 지문감식을 의뢰하면
지문 식별만 해주면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즉 헌법재판소는 수사기관의 지문감식반같은 곳입니다.
만약 민주화빨갱이들의 논리대로
헌법재판소가 입법,사법,행정부등과 동등하다거나 그 위에 설수있다면
대한민국은 헌법재판소가 점령한 독재국가가 되는것입니다.

현재 네이버 백과사전등에 올라있는
소급효 소급입법에 관한 내용은 1995년
5.18특별법을 억지로 제정하기 위해
민주화빨갱이들과 헌법재판소가 작당하여
사기친 내용들 입니다.
결국 이들은 이사실을 더이상 숨기지 못하고
5.18특별법을 개정했습니다.
헌법 제 84조
=================================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
그러므로 공소시효가 재직중에는 정지되었다로 볼수있다.
로 해석하여 1995년 5.18특별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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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84조 공소시효에 관한 내용(오일팔 특별법 제2조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헌정질서 파괴 범죄 행위에 대하여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것으로 본다(제1항) 제1항에서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기간 이라 함은 당해범죄행위의 종료일로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제2항)고 하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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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대통령은 재직중에 내란,외환 이외의 죄는
형사상 소추를 받을수 있다.
(재임중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탄핵후 형사상 소추를 할수있다.
즉 공소시효가 정지 되는것이니다.)
로 정정하여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헌정질서 파괴 범죄 행위에 대하여 해당범죄 종료일로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것으로 본다
로개정하여
5.18특별법은 완전 수건가 된것입니다.
1995년에 국회가 소급법이자 처분적 법률인 5·18특별법을 제정하고,
행정부가 이를 공포·시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장세동씨 등이 신청한 위헌제청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이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정했고,
사법부는 ‘위헌의 의심이 있지만’
국회가 제정하고
헌법재판소가 위헌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이 법을 적용하겠다고 하면서
위헌법률인 5·18특별법에 따라 ‘5·18전두환재판’을 열고,
피고인들에게 유죄판결했다.
대법원은 이 판결문 첫머리에
원래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완성된 사건이어서
검사의 공소권이 없고
사법부의 사법재판권이 없는 사건이었다는 것과
국회에서 전직대통령의 경우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에는 국가소추권이 정지된다는 것을 규정한
헌법 제84조를 ‘확인하는’ 의미에서 행한
‘확인적 입법’인 5·18특별법을 제정했다는 것을 먼저 밝혔다.
그리고 5·18특별법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에
후임 대통령인 노태우 전대통령의 재임기간을 합산한 기간 동안 공소시효가 정지되고,
노태우 전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에
전임 대통령인 전두환 전대통령의 재임기간을 합산한 기간 동안 공소시효가 정지된다고
규정하였으므로 1996년 5·18전두환재판 당시
검사의 공소권과 사법부의 사법재판권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2009년 『식인-리걸마인드2』에서
“헌법 제84조는 국가소추권 정지조항이 아니다”라는 것을
기록증거와 함께 논증했고
국회는 그 이듬해 5·18특별법의 ‘국가소추권 장애’부분을 삭제하는 법개정을 했다.
이로써 헌법 제84조를 자의로 해석하여
헌법을 훼손했던 헌법파괴세력은 철퇴를 맞게 된 것이다.
헌법 제84조가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것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짐으로 하여
5·18특별법은 ‘확인적 입법’이 아니라
‘창설적 입법’으로 되었고,
그 결과 헌법이 금지하는 소급법으로서 위헌법률이 된 것이다.
물론 1996년에 시작된 5·18전두환재판도 공소권 없이 공소제기되고,
사법재판권 없이 판결한 재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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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반란 폭동입니다.
화려한휴가의 모태
님을위한 교향시를 아십니까
이영화는
북한에서 대한민국에 제2의 5.18반란 폭동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만든 영화로
황석영이 89년 월북하여
김일성 지령에의해 재간둥이라는 칭호를 받고서는
윤이상이 영화음악을 맡아 91년도에 만든 영화입니다.
황석영은 “광주 5월 민중항쟁기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통일부북한자료센터에 가시면 관람하실수 있는데
북한의5.18영화 내용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알고있는5.18내용과 같습니다.
김일성주체의기치에따라 나아가는 광주인민들의 영웅적인투쟁이라는 5.18이
어찌 민주화운동입니까
5.18특별법 제정은
김영삼의 정치적 위기를 타파하기위해 정치적 사기를 친 행위입니다.
5.18의 맹점은
12.12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2.12를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위해 일으킨 쿠데타라 사기를 쳤습니다.
왜 사기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2.12는 아시는것처럼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한것이 맹점이지요
계엄선포는 아무나 하는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계엄선포였다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를 맞이하여
군병력 동원없이는 공공의 질서를 유지할수 없을경우에 한하여)
대통령유고시 대통령권한대행 최규하와국무위원들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선포한다
정승화(육참총장)김재규(정보부장)김계원(비서실장)따위가 하는것이 아니다
계엄이 선포된후 계엄사령관을 임명하고
계엄사령관은 대통령 혹은 국방장관의 지휘 감독아래 계엄군을 동원비상목표에 출동을 시키는것이
정상적인 상황이다
그런데.정승화 김재규 김계원은거꾸로
그리고 김재규의 명령에따라
20사단 30사단 9공수여단을 출동시킨후
방송국,변전소,은행 등을 점령시키고나서
국무위원과 최규하를 국방부로 불러들여
어서 계엄을 선포하라 한것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최규하 국무위원들은 쿠데타임을 직감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던중
신현확 부총리의 강력한 반발로 불법적인 계엄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이에 국방부 장관은 김재규 체포를 전두환에 지시했고 김재규는 체포되었다.
하지만 정승화는 자신의 행적을 누구에게도 발설 하지 않아
이사실을 몰랐던 최규하 국무위원들은
범죄자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김재규가 전두환에 체포되고 나서
김재규는 전두환에 정승화 김계원과 콤비 플레이한것을 실토했고
이로인해 전두환은 모든것을 알게되었지만
범죄자 정승화는 막강한 권한과 권력을가진 계엄사령관이 되어있었다.
계엄선포가 왜 이들에게 급선무였나?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쿠데타를 할마음이 없었다면
제일먼저 직속상관인 노재현국방장관에 보고를하고
대통령 시해범을 잡기위해 자동규칙 청와대경호비상 제1호인
호랑이1호를 발령하여
경호실 병력을 출동시켰어야 했으며
또 노재현국방장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시해현장을 조사 범인체포 잔존 쿠데타세력을 체포하란 지시를 내렸을것이다.
정승화가 김재규를 도와 쿠데타할 마음이 없었다면
차지철만 지휘할수있는 수경사와 경호실에 병력이 쿠데타세력을 잡기위해
청와대로 가는것을 금지시키는 월권적인 명령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정승화가 후에 차지철이 범인이라 생각했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만약 차지철이 쿠데타 세력이었다고 믿었다면
차지철이 지휘감독하는 수경사 전성각과
경호실차장 이재전에 전화를 걸어 병력동결 명령을 할수는 없는것이다.
결국 정승화는 김재규의 쿠데타를 적극 도왔고
이를 몰랐던 최규하와 국무위원들의 실수로
범죄자 정승화는 막강한 계엄사령관이 되었고
극비에 체포할수 밖에 없는 성향의 범죄자였던 것이다
정승화는 한술더떠 계엄 포고문까지 스스로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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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난동 부분 요약
장태완은 보안사에서
정승화를 연행해간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합수부에서
정승화 같은 위치의 사람를 연행해가면 어떠한 범죄사실때문이라는것도
상식으로 알고있었다.
그런데도 친분을 이유로 수경사령관 월권적 행위를 한것이고
무력을 동반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승화가 장태완을 수령사령관에 임명했을때도
장태완은 정승화에 충성을 다할것이라 했다.
장태완은 정승화의 개인적 사병이었던 것이다.
나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다.
총장님 공관에 이미 연락이 돼 있다.”
해병 헌병이 총장공관으로 연락을 하더니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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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30경비단장, 경복궁 위치)
김진영(33경비단장, 필동 수경사 외곽에 위치)
30경비단은 대통령 방호부대다.
설사 수경사 사령관이 공격해 오더라도 이를 방어할 의무가 있다.
청와대 울타리 내부 경비는 55대대가 담당했다.
55대대의 모체부대는 30경비단이다.
외곽 경비는 나머지 30경비단이 담당한다.
외곽과 내곽이 뚫리면
마지막으로 경호실 경호관들이 대통령을 보호한다.
30경비단장이 부대를 이끌고
그의 예하 부대인 55대대가 경비하는 곳을 향해 진군해 와도
그 예하인 55대대 대대장은 상관을 상대로 방어를 해야 한다.
여기에 하극상이란 있을 수 없다.
12월 12일 오후 4시경, 장세동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에 30단에 장군 몇 분이 오시게 되어 있다.
장군들에 대한 시중을 병사들에게 맡기기도 좀 뭣하다.
차나 마신다고 하니 인사도 드릴 겸 해서 나와 함께
안내하는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전화를 받고 나는 6시 15분경에 30경비단 단장실로 갔다.
어느 장군이 오는지, 왜 오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들은 바 없었다.
30경비단장실에는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가 앉아
그날 끝난 장군 진급심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장군 세계에서 장군들의 진급소식은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 후 다른 장군들이 속속 도착했다.
6시30분경, 장세동이 전화를 받더니 장군들에게,
‘합수부장이 대통령 보고사항이 있어서 좀 늦는다’는 전갈을 전했다.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으로부터 받은 전화내용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늦겠다는 전갈을 받은 장군들은 장세동에게
“뭐 먹을 것 좀 없나, 있으면 좀 가져오지” 하여
초밥과 맥주를 급히 구해드렸다.
7시40분경, 장세동이 허화평으로부터 또 다른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장세동이 전화 받은 내용을 장군들에게 알렸다.
“정승화가 10.26과 관련하여 연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격이 있었다.
대통령 재가는 이에 관한 것이다.
+++++++++++++++++++++
8시30분경,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최세창과 장기오가 “비상이 결렸으니 부대로 가봐야겠다”며 일어섰고,
나머지 장군들도 부대에 전화를 걸어
부대장악을 잘 하고 있으라 당부들을 하면서
전두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장군들이 부대출동을 결심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놀라 부대에 전화를 걸어 부하들을 챙겼을 뿐이다.
12.12 이후 장태완은 예편해 있었다.
장태완은 12.12 때 그가 병력을 동원한 것을 후회했다.
합수부가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규명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은
정의로운 애국의 길이었다고도 말했다.
장태완을 한국전산회사에 사장으로 근무시켜 걱정 없이 살도록 배려해준 것에 대해
장세동에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하여 전해 준 일이 있다.
그리고 장태완이 심근경색증을 앓고 있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경비를 대주어서 미국에 가서 수술을 받게 해준 데 대해 고맙다고 했고,
또 이 고맙다는 이야기는 장태완이 여러 사람들에게 했다.
++++++++++++++++++++++++++++++++++++++++
진돗개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상 징후가 있으면 연대장도 발령할 수 있는 것
재가+++++++++++++++++++++++++++++++++++++++
최규하는 전두환의 재가 보고를 듣고서는
국방장관을 불러오라 했다.
부결할 마음이 있었다면 즉시 부결을 하지
왜 국방장관을 전두환더러 불러오라 했겠나.
전두환 입장에서도 반란을 일으키려했다면
최규하를 협박하여 즉시 재가를 받았으면 될일이었다.
대통령께서는 국방장관을 배석시켜서 재가를 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국방장관을 빨리 찾아서 배석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가서 빨리 찾아오겠습니다 말씀드리니까 비서들 시키면 빨리 찾아올 텐데,
서울에 있는 사람이 어디로 갔겠나, 앉아서 차나 마시고 기다려 봅시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을 두 시간이상 모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저도 여러 가지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 어른이 기분이 나빠서 장관의 결재도 없이 이런 것 결재할 수 없어,
저보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라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저런 시국얘기도 듣고 저도 말씀드리고 이래서 근 두 시간 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국방장관의 결재가 없이 내가 결재하지 못하겠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은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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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에 동조할 수 있는 철학을 가진 군의 여론 주도층에게
연행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동조를 얻으려
초청된 장성은 유학성(군수차관보), 차규헌(수도군단장), 황영시(1군단장),
노태우(9사단장), 박준병(20사단장), 박희도(1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장기오(5공수여단장), 백운택(71방위사단장), 이렇게 9명이었다.
여기에서 백운택 장군은 우연히 보안사에 들렸다가 합석을 하게 된 것이다.
수경사령관은 병력과 포를 가지고 공격해 오겠다 압박을 가해오고,
참모차장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세력은 거병을 하려하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마냥 노재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는데 이들 장군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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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두환 일행이 총리공관을 나갈 때가지 총리공관 경비는 구정길 중령이 담당했던 것이다.
전두환 측이 무장 경비병을 깔아놓고 재가를 받기 위해
최규하에게 공포감을 주었다는 검사의 주장과 판사의 판시가 억지인 것이다.
구중령의 진술에 대해 당시 총리공관 경비를 인수한 최영덕(1928년생, 당시 총경) 101단장은
94년 2월 15일, 서울지검 918호 검사실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2월12일, 7시30분경, 고명승 대령이 만나자 하여 경호실 차장실로 갔더니
고대령이 함께 총리공관으로 가자하여 동승했다.
고대령이 구중령에게 공관경비를 101단에 맡기고 철수하라 하자,
구중령이 자기에게도 지휘계통이 있으니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겠다며 나가더니
20-30분 후에 의전수석인 정동열과 함께 왔다.
정동열은 이 사람들이 그동안 수고했는데 오늘은 공관 막사에서 자고
내일 철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떠냐 하기에 고대령이 동의했다.
나는 즉시 명령을 내려 공관경비를 인수했다.
경호실장 정동호는 정수석이 오기 조금 전에 도착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높은 사람들이 구정길을 강제로 제압했겠는가?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공관으로 갈 때 나와 고대령 두 사람만 갔다.
그날 밤 내내 두 사람이 함께 근무했다.
그 후 간혹 55경비대장인 임재길 중령이 안내소를 방문한 적은 있었다.
공관 출입자 통제는 의전비서실이 하는 일이었고, 우리는 경비만 했다.
출입자를 통제한 적도 없고, 공포감을 조성한 일도 없다.
++++++++++++++++++++++++++++++++++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1공수는 당연히 출동준비를 해야 했고,
출동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국방부와 육본으로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
김종환 합참의장과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차례로 수경사에 가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전화를 걸어
정승화의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한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개인적인 것이니,
병력 동원을 금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 연합사 상황실에 피신 중에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도 김용휴 차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밤 11시경에 수경사에 가 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병력동원을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경사에 모여 있는 장군들이 병력동원을 협의하고 있는 모양인데
절대로 병력을 동원하지 말라.
합수부의 총장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총장 개인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이니까
장군들에게 흥분하지 말고 있으라 하라.
보안사령관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니 내일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
참모부 차장에서 곧바로 그 막강하다는 수경사령관에 임명된 것이다.
수경사령관은 통상 참모부장을 마친 고참 부장급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런데 정승화는 신출내기 차장급에 있는 장태완을 파격적으로 수경사령관에 임명한 것이다.
그가 취임하던 11월 16일, 수경사 장교식당에서 가졌던 취임축하 리셉션에서 그는 이렇게 흥분했다.
나 같은 촌놈이 수경사령관이 된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수경사령관에 임명해준 정승화 총장에게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며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정총장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다.
정승화 총장을 위해여 건배~
수경사령관은 대통령을 수호하는 공화국 사령관이다.
하지만 정승화는 본인의 직분보다는 정승화를 위해 행동하였다.
++++++++++++++++++++++++
5.18의 진실 요약
5월 18일(일요일) 새벽에는 이미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이 휴교령은 헌법기관이 내린 정당한 명령이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가 1개 대대씩 들어가 있었던 것은
평소에 계획돼 있었던 부대배치 계획에 의해 자동적으로 배치된 것이며,
2개 대대 규모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상징적인 규모에 불과했다.
2개 대대를 내보낸 것은 순전히 계엄사 작전계통과 계엄사령관 사이에서 취해진 조치였고,
여기에 전두환이나 정호용 등이 개입한 증거는 없으며
그렇게 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계엄군의 배치는 합법적인 것이었으며 배치된 계엄군의 지위야말로 헌법기관이었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 9시경,
광주의 대학생 들은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을 위반했다.
200여명의 대학생들이 전남대 도서관에 간다는 이유를 내걸고
학교에 진압하려 했지만
정문에 이미 배치돼 있던 공수 7여단 병력 20여명이 이들에게 귀가를 종용했고,
귀가의 종용은 정당한 임무수행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고 가방에 숨겨온 돌멩이를 꺼내 계엄군에 던져 부상을 입혔다.
도서관에 가겠다는 학생들이
가방에 돌을 숨겨 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5.18측은 계엄군이 먼저 학생들을 공격했다고 하지만
수사기록에는 분명히 학생시위대가 먼저 계엄군을 공격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계엄군이 쫓아가자 학생시위대는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몰려가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수많은 시민을 결집시켜 파출소를 파괴 방화하고 경찰관들을 폭행했다.
이는 각본이 있는 행동이었다.
공수부대가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화려한 휴가’라는 암호명으로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를 비롯하여
경상도 군인들이 대검을 가지고
전라도 여인의 가슴을 도려내고 머리 껍질을 벗겨 매달아 놓았다는 식의 유언비어들이
사람에서 사람의 입으로 전달되는 동안 증폭되어 나돌았고,
이에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경상도 사람들을 집단으로 구타하여 살해했고,
경상도 차량들을 보면 불태워 버렸고,
경상도 사람이 운영하는 상점을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7여단이었고,
7여단의 주둔지는 전북 금마, 여단 병력의 40%는 호남출신이었다.
유언비어는 모두가 거짓이었고, 그 제작 진원지는 북한이었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과 정기간행물들에 그 괴담들이 실려져 있었다.
1980년대 대학가를 물들인 ‘찢어진 깃발’의 진원지도 북한이었다(솔로몬 앞에 선 5.18).
모두가 광주시민들에 내재해있는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증폭시키려고 제작된
고도의 심리전 전술로 작성-유포된 것들이었다.
유언비어에 자극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여기에 더해 평소에 사회를 뒤집어보고 싶었던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으로 대표되는 소외계층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삽시간에 배수 단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파출소들이 수도 없이 파괴-방화되고 경찰들이 매 맞고 인질로 잡히는 등
경찰력은 단 두 시간 만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에 다급해진 전남경찰과 전남도지사는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은 시내로 나가 길목을 지키면서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을 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공수부대를 상대로 화염병을 던지고 옥상에 올라가
역기와 화분을 머리위로 던진 존재는 시위대였고,
시위대의 지나친 폭력이 계엄군의 반적용을 유도한 것이다.
시위대의 요구는 김대중 석방,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 계엄령 해제 등이었다.
이러 요구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의 요구였고,
이 요구는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내각을 일거에 전복하려는 요구들이었다.
광주는 폭력, 방화, 살인이 난무하는 광란의 도시였다.
거리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방화되어 광주시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는
시위대가 계엄군을 상대로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인 살육전을 벌였고,
수십 개의 파출소, 도청의 6개 부속건물, 세무서, MBC, KBS 등
공공건물에 대한 무차별한 파괴와 방화 작전이 수행됐다.
계엄군이 교외로 나간
5월 22일 새벽부터는
시위대가 점령한 광주시와 시위대가 점령한 17개 시군을 연결하기 위한 공격과
6회에 걸친 교도소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폭도 사망자만도 28명으로 집계됐다.
광주시위의 폭력과 과열성은
5월 19일 밤부터 5월 21일 오후 5시까지에 절정을 이루었다.
광범위하게 널려진 파출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하고
계엄군을 조롱하면서 감정을 유발하고,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정렬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장갑차, 군용차, 대형 화물차, 버스를 기발한 방법들로 계엄군을 향해 돌진시켰다.
돌진차량 운전수를 잡아보니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나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공격들은 총알보다 더 공포스러운 살인공격이었고,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지휘한 지도부가 기록에는 없다.
이러한 공격들이 과연 지도부 없이 시민들이 알아서 한 행동일까?
광주시에는 5월 22일에야 비로소 광주유지들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등장하여 무기 회수를 주도했고,
이에 병행하여 김창길(22세 대학생)이라는 온건파가 주도하는
‘학생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 졌으나
이후 3일간 이들 간에는 무기반납을 놓고 벌이는 강온파 간의 대립이 연속됐다.
5월 25일부터는
강경파인 김종배(26세 대학생)가 김창길 위원장을 제치고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됐고,
학생수습대책위는 시민군 지휘부가 됐다.
이때 화려한 휴가에서 시민군 대장으로 등극한 박남선(26세, 골재운반 화물차 운전수)은
시민군 지휘부의 상황실장 자리를 맡았고,
5.18 최고의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겨우 대변인 자리를 맡았다.
상황 기록들을 보면 5월 25일 이전,
윤상원과 박남선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는다.
종북 좌익들이 애국가 대신 부르는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여기에서의 ‘임’은 김일성이라는 설도 있고
윤상원이라는 설도 있다.
좌파들은 윤상원이 5.18의 꽃이라 했지만
윤상원은 불온서적을 취급한 녹두서점 점원이며
공원들을 상대로 야학을 지도한 30세의 청년에 불과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시민군 대장으로 윤상원을 내세우지 않고
5월 26일에 상황실장으로 임명된 박남선(배우 안성기)을 내세웠다.
영화에서는 박남선을 예비역 공수부대 대령으로 신분을 도용했지만
박남선은 당시 26세의 골재채취화물차 운전병이었다.
공수부대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26세 골재채취운전병에 불과했던 시민군의 상황실장 박남선을
공수부대 대령출신으로 둔갑시키고
7공수여단장 신우식 준장과 동기생인 것으로 묘사한 것은
5.18의 열등의식을 웅변적으로 나타내준 것이다.
아마도 광주시위는 양아치들의 잔치라는 세간의 조롱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나타나있지는 않았지만
광주에는 숨어 있는 지도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강력한 심증을 갖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 중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44개 무기고의 동시 탈취다.
시위대가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사실에는
‘불법’이라는 의미가 부여됐을 뿐,
이제까지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고가 탈취된 과정을 보면
여기에는 분명히 지휘부가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일반 시민들은 무기고 옆길로 걸어 다니면서도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5월 21일 아침 9시.
아시아 자동차 업체에 모인 600명은
300여 대의 차량에 시민군을 태워가지고
17개 시군에 널려있는 44개의 무기고를 향해 44개조로 나뉘어 달려갔다.
광주시로부터 100 여 키로 떨어진 곳들도 많이 있었다.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44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것은
위치를 미리 파악한 군사작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44개 무기고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종합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는 간첩 말고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정상일 것이다.
이 무기고 탈취과정은 5.18에 간첩이 개입했다는 심증을 갖게 하는 데
가장 설득력 있는 대목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5월 21일 08:00시,
광주 톨게이트에서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무전기와 공용무기가 탑재된 위엄 있어 보이는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하자마자
이 지프차들을 모두 몰고 방위산업 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직행했다는 점,
그리고 아시아 자동차에서 군용트럭을 탈취해
그 군용트럭을 몰고 무기고로 갔다는 점이다.
14대의 지휘용 지프차는 어마어마한 수량이다.
이를 본 아시아자동차 직원들은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 없이 차량들의 열쇠를 내주었을 것이며,
44개 무기고에서는 지휘용 지프차나 군용트럭을 보고는
역시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고 생각하여 무기고 문을 순순히 열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러는 위압감에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20사단 지휘부가 몇 시쯤 톨게이트를 지날 것이라는
군 내부의 극비 정보를 알아내 가지고 위와 같은 연속작전을 편 것이다.
이런 작전은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작전은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광주작전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00명! 이 600명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숫자다.
수사기록에도 600명이 나오고,
광주의 악녀 전옥주의 증언에서도
연고대생 600명이 광주를 해방시키러 온다는 말이 나오고,
2006년 12월 20일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기자회견에서도
북한특수군 600명이 왔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몸서리쳐지게도
이 600명은 1985년에 발행된
북한의 역사책
‘광주의 분노’ 34-35쪽에도 나온다.
“누군가가 군중들 속에서 ”총! 총!“ 하고 피나게 절규하였다. . .
그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놈들이 순진한 녀학생들의 옷을 벗겨놓고
갖은 희롱을 다하며 지어 젖가슴까지 도려내어 죽이고,
배를 갈라 태를 치는 것을 보고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시민들은 드디어 ‘피를 피로 갑자면 총을 들어야 한다’는 구호를 들었으며
무기획득을 위한 투쟁에 떨쳐 나갔다.
5월 21일,
광주고등학교와 숭일고등학교 학생들이
‘학도호국단’의 무기고를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광주 인민봉기과정에 봉기군이 처음으로 벌린 무시탈취투쟁이었다. . . .
이 때부터 봉기군들은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놈들의 무기고를 본격적으로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폭동군중들은 괴뢰들의 군용차령 공장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들은 이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일반국민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경찰과 정부군을 향해 발포한 것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이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5.18측은
5월 21일, 13:30분경에
도청 앞에서 군에 의한 집단발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당방위로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향해 발포했다고 항변한다.
과연 무엇이 사실인가?
수사기록을 보면 도청 앞 발포는
9번째 발생했던 자위 즉 정당방위용 발포였다.
그 이전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지휘관들이 6차례에 거쳐 발포를 했고,
시민군도 1회의 발포를 했다.
5월 21일 이전에 이미 시위대에는
26정의 카빈과 7정 이상의 M-16이 있었다.
계엄군이 없는 지역에서 수없이 발생한 사격과 시체들은 이들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다.
가장 치열했다는 5월 21일,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사망한 민간인에 대한 통계는 33명,
3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자상,
자동차 전복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계엄군은 오직 M-16소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 총상은 계엄군에 의한 총상이 아니라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꺼내온 총들이다.
5월 19일 19세의 나이로 지휘자를 호위하여 광주에 왔다가 돌아가
1급 국기훈장을 받고 탈북 해
현재 분당에 살고 있는
정 모씨는
자기가 사용한 카빙총이 북한에서 가져온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총상에 의한 망자 중 70% 이상이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쏘는 불순분자들이
시민군 속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탈북자들은 한결같이 이것이 바로 북한특수군의 소임이었다고 증언한다.
사람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경에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첫 발포를 했고,
거기에는 발포 명령자가 있을 것이지만
단지 규명이 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논리와 군대상식에 기초하지 않은 질 낮은 주장일 뿐이다.
5월 21일 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면으로 나오더니
그들 중 한 대의 장갑차가 도청 앞을 지키고 있던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여
병사 1명을 깔아 죽였고, 1명에 중상을 입혔다.
이러한 차량공격이 그 후 세 차례나 더 계속됐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은
그야말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돌진차량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도청 앞 발포였다.
이 이외에도 5월 21일 아침부터
오후 5시 3공수가 전남대를 철수할 때까지에는
6.25 고지쟁탈전을 방불할 만큼의 밀리고 미는 식의 교전과 쌍방 발포들이 있었다.
특전사 10개 대대가 광주시를 철수할 때
철수로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무장 시위대가 사격을 가함으로써
광주시에서는 정규군과 정규군 사이에 벌어지는 정도의 교전들이 이어졌다.
누구를 위와 같은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발포를 놓고 5.18측은
발포명령자가 전두환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공수부대 대신
정규군인 20사단을 투입시켰더라면 처음부터 위협사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수부대는 과도하리만큼 민심을 다치지 않도록 억제되고 통제되어 왔기 때문에
발포에 대한 자제력이 군으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강했고,
바로 지나친 자제력이
광주 전투를 필요 이상으로 키웠다.
공수대원들은
미국 헤리티지 연구소의 분석가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듯이 끝까지 시민군을 조준하지 않고 위협사격 차원에서 대응했다.
5월 21일 탈취한 무기는 2개 연대 규모의 것이었다.
카빈, M-1, 기관총 등 5,403 대,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이 탈취됐고, 이들 779대는 군용으로부터 탈취한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로 구성됐다.
광주로 상품을 나르는 상인들이 없어지자, 식료품과 생필품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간들이 지속되면 광주시민들의 고통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거기에 일부 무장 시위대들은
시민들을 협박하여 금품을 뜯고 가족 단위로 살해하고
돈을 뜯어가고 방을 빼앗는 등 광주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기록을 보면 계엄군은 이러한 광주시민들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덜어주기 위해 노심초사했으며
그 결과
5월27일 새벽
극비의 특공대식 작전을 폈고,
이로써 무법천지 광주에는 다시 치안질서가 확립된 것이다.
이런 극비 정보마저 새어나가는 바람에
탈환작전 시 불필요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당국이 광주시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TNT 제거작업 과정에 웅변돼 있다.
시민군은 8톤 트럭 분량의 TNT를 도청 지하실에 저장하고
거기에 뇌관까지 연결해놓았다.
폭발하면 광주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그런 분량이었다.
시민군은 이를 폭파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협박했지만
계엄군은 목숨을 내놓고 잠입하여 10여 시간에 걸쳐 뇌관을 제거해주었다.
시민군과 계엄군 중, 누가 광주시민을 더 사랑하였는가?
광주시위대는
헌법기관인 경찰과 계엄군에 폭력을 먼저 행사했고,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에 불복했으며,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바로 이런 것이 내란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의 재판부는 5.18을 김대중에 의한 내란음모였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광주시위대를 헌법기관에 준하는 존재라 판결했고,
헌법기관으로서 이를 진압한 계엄군을 국가폭력집단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광주시민에 하루라도 빨리 질서를 찾아주려고 세웠던 조기진압 계획을 놓고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경우
내란목적에 불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저지른
신군부의 행위이므로 재진입작전은 내란을 목적으로 하는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5.18을 신군부가 일으킨 것이라 판결했지만
수사기록을 보아도 신군부와 5.18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수사기록을 보아도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주체는 신군부가 아니라
계엄사-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 통수체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신군부가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것은
대통령과 내각에 공포심을 갖게 한 행위이기 때문에
헌법기관을 협박한 행위가 됨으로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참으로 괴변이었다.
무장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광주시는 진압하지 말았어야 했고,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차단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의 판결인 것이다.
이러한 억지의 인민재판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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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사람들의 증언중
19일 작성된 (선동)유인물
차량을 접수,제공하라
폭약이나 총기류를 시민군이 가져야한다
주변의 관공서와 악질 기업주집에 방화하라
조금만견디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해방정권을 세울수있다.
(손남승,5.18연구소)-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무기를 제작하라! 다이너마이트,화염병,사제폭탄,불화살,불깡통,각종기름준비,
전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차량을 획득하라! 특공대를 조직,군무기를 탈취하라!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
(최정운,5.18 민중항쟁과 절대공동체의등장)
도청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나기도했다
오발을 하거나 재미로 한방씩 쏘아보기 때문이었다.
더 기겁을 할일은 수류탄을 차고다니는 꼴들이었다.
안전핀고리를 그렇게 차고 다니는 고린줄알고 그 고리를
줄래줄래 꾀어 달고 다니고 있었다.
그게 뽑히는 날에는 떼죽음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리고 총 파지법을 모르기 때문에 대작대기 들듯 들고
휘젓고 다니는데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송기숙,5.18연구소)
친구와 함께 2인1조가되어 학동교회 옥상으로 가려는데
목사가 못들어가게 했다. 목사는 계단의 핏자국을 보여주며
어떤 고등학생이 자신의 발에 오발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최남식,5.18연구소)
5.18당시 광주시민들에게 30년전의 빨치산 투쟁은 결코
잊혀진 역사가 아니었다.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
21일 용봉 국민학교 철도변근처에서 나는 거기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수가 타라고 하면서 시민군에 징집된 차량처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징발 당한다고 했다.
(정상현,5.18연구소)
주유소 주인들이 대부분 시위대 차량에 기름을 조금씩밖에 넣어주지 않았다.
다른시위대 차량이 와서 기름을 달라고하는데 없다고하면 격해진 시위대가
주유소기름들을 막무가내로 부숴버릴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기름을 분재해주었기때문에 금방금방 기름이
떨어졌고 그럴때마다 차를 팽개치고 다른차를 타곤했다.
(윤석진,5.18연구소)
당시 총을잡았던 사람들은 수탈받고 착취받는 계급이었고
사회변혁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사는 사람들은 집에 숨어서 지냈다는 것이다.
(전용호,1988년 9월)
노동자계급,농민층,도시중하층,쁘띠부르주아지,중간계층,중소자본가들로
구성된 민중들이 주체가된 민중항쟁이었다.
당시 도청뒤의 부촌지역 사람들은 모두어디론가 도망을 간 상태였고 고아나
서럽게 살아온 사람들이 참여했다.
(한국현대사 산책,강준만)
5월 20일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담양으로 나가는 길목은 피신하는 시민 학생들이 많았다.
차를 탈수없어 많은사람들이 걸었다.
(임낙평,1988년 9월)
지원동에서 배추장사를 하던 사람이 트럭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그 사람은 계엄군이 아닌 시민군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돈을벌려고
장사하는것이 얄미워 일부러 치었다고 했다.
(최남식,5.18연구소)
5월25일 미국무장관 머스키의 전송:
"광주에서의 상황은 용납할수 없는 곳으로 전개되었다"
그의 정보원에 따르면 "온건파 시민위원회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급진파가 상황을 장악한것으로 보인다.
인민재판이 열렸고 몇건의 처형이 벌어졌다.
학생시위대는 혁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신원미상의 무장한 급진세력들로 대부분 대체 되었다.
5월26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고하다:
광주에서의 상황은 더 나쁜쪽으로 전개되엇다
민병대 무장한 급진파의 복귀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에 관한 보고들이 있다.
(웬트위스공대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고등학생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시민군들에게
제공할 쌀을얻었다
(최지수,5.18연구소)
방림동에서 쌀을 가져가라하는데 차가 없어서
가져올수 없다며 나더러 기동타격대 차를타고
쌀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후에 그사람들은 나를 강도로 매도했다.
내가 총으로 사람들의 배를 위협하고
쌀내놔라며 갖은 협박을 가했다는 것이다.
(구성주,5.18연구소)
우리가 맨먼저간곳은 중앙고속터미널 이었다.
터미널홀에 차 몇대가 세워져 있었지만 키를 모두 뽑아가버린
상태였다.
"시위차량이 부족하니 그레이하운드를 좀 내주시오"
"차를 줄수없소"
그 말을 들은 100여명의 흥분한 사람들이 세워놓은 차에 달라붙어
밀기시작하였다. 어떻게 된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중앙고속 건물안으로 들어가 회사기물과
기타 시설물들을 모두 부숴버렸다.
(윤석진,5.18연구소)
주유소에는 사장은 없고 부인과 종업원1명이 있었다.
"기름좀 주시오"
"없어요"
"비상탱크것좀 주시오"
"비상탱크도 없어요"
그것을본 일행중 한사람이 각목으로 유리창을 박살내버렸다.
그때서야 놀란여자는 비상탱크에 있는 기름을 주었다.
(허춘섭,5.18연구소)
한쪽에서 아이스크림도 놔두면 다 녹으니 가지고 가서 사람들이나
먹게하자고 했다. 우린그때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김윤기,5.18연구소)
광주사태 기간동안 윤상원이 지도자들이 모인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파리꼬뮨에대하여 이야기했고 많은사람들이 '함께투쟁하고 함께산다'
는 생존방식에 있어서 광주사태와 파리꼬뮨이 유사하다고 진술했다.
광주사태 기간동안 이양현은 1970년대 파리꼬뮨에 대하여 읽으면서
보았던 내용을 몸소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3~4살어린아이가 프랑스군대에 돌을던졌다'는 내용을
기억하고는 3살짜리 자신의 아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양현과의 인터뷰,2001년 6월22일)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7권 69-95쪽에는
윤영규(당시 42세)가 “살육의 낮과 밤”이라는 제하로 쓴 글이 들어있다.
그 책에 있는 시체장면을 아래에 소개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사진들이다.
북한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사진들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몸부림치는 여학생의 가X을 도려내는 장면,
임신부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장면,
긴 대검을 여성의 음X로 밀어 넣는 장면 등
지금에 와서도 머리에 떠올리기 싫은 잔인한 장면들이 많았다.
여기서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북한이 그런 생생한 살인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남한에서는 그런 사진이 왜 나타나지 않는 지이다.
북한텔레비전에서 나왔다면 광주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작품’들이 연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송정리 공군 3252부대 방위병이었던 이재춘 의증언)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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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2일
한편 광주시내 무장 시위대들은
거리거리에 차량을 질주하며 총을 쏘아가면서 공포분위기를 연출했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장례비에 쓴다며 돈을 뜯어냈고,
여염집에 들어가 가족단위로 집단살인을 저질렀고,
평소 앙심을 갖고 있던 집에 들어가 가족을 몰살시켰고,
금품을 훔치고 강간을 자행하는 등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언비어에 속아 거리로 나갔지만
이렇게 무법천지로 변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도를 다스리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불만을 토하기도 하고,
계엄군을 다시 보내 달라 애원하기도 했다.
시민군은
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면서 합세를 권장하기도 했다.
시민들까지도 학살했다.
한편으로는 무장시위대가 보여주는 무서운 행동들을 지켜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무총리서리의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차츰 “속았다. 광주시민이 폭도에 속았다. 지금부터라도 빨리 수습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나주에 있던 무장시민 100여 명이 군부대에 처음으로 투항하여
무기, 차량 등을 반납했다.
폭도들은 학동 지원동 일대로 몰려다니면서
“우리가 투숙할 테니 집을 비우라”며 주민을 내쫓고
우진아파트에 와서는 침구를 다 가져갔다.
금남, 삼익, 삼양맨션 아파트 주민들에게 식사제공을 강요했고,
사창가 일대에 들어가 창녀들에게 수혈을 강요했다.
일부 폭도들은 경찰복을 착용하고 경찰 행세를 했다.
공수부대 복장을 한 폭도들은
“우리는 전라도 공수부대다. 어제까지는 경상도 공수단이 와서 우리를 쳤는데,
이번에는 우리 전라도가 그들을 없애야겠다.”
등의 언동을 하고 다니면서 행패를 부렸다.
시민들에는 공수부대가 재투입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 폭도들을 격퇴시켜 주기를 바라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자칭 학생대표 2-5명이 전남부지사를 만나 학생 요구사항 6개항을 제안했고,
부지사는 무기를 자진 반납하고 자수할 것을 권했다.
일반시민들은 광주교도소로 전화를 계속하여
폭도들을 속히 소탕해 줄 것을 관계기관에 연락해달라고 요청한다
도청 정문에는 학생들 상호간에 의견충돌이 일고 있다.
도청에 불을 지르자는 파와 우리의 재산인데 그러면 되느냐는
온건파 사이에 의견충돌인 것이다.
오후엔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장유동과
전남대학교 학생대표인 김창길이 계엄당국과의 협의 내용을 보고하면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투쟁을 한다면 폭도 밖에 되지 않는다.
어서 빨리 탈취한 무기를 계엄사에 반납하고
치안질서는 경찰에게 맡기자”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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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반란 폭동을 주도하기 위해
김일성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공작을 펼쳤던
북 특전사 출신 탈북자의 증언
(5.18당시 실제 김정일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공작을 펼친 북특전사 출신의 증언:
현재 탈북하여 서울에살고있습니다)
5.18은 오랜시간을 가지고
김일성이 준비한 대한민국체제 정복의 시나리오였다
5.18폭통이 일어나기전해인
1979년도에 나는 711군부대(60저격려단) 에 대남공작 전투원으로 근무하고있었다
(711군부대는 1968년청와대 습격을 비롯한 한국에서 무장활동 을하여온 124군부대임)
711군부대는 1970년까지 군기도없었던 비밀특수 군관부대(장교부대) 였으며
“장교부대를 10년이상 보유하고 있는것은 새전쟁 도발을 위한것이라는” UN과 국제사회의 항의에 부닥치자
1976년 기계화군단인 3군단에 형식적으로 변입시키고
3군단장 옥치선에게는 이부대에 보급물자 공급만하게 하고
모든 군사작전 지휘권한은 정찰국장 오룡방에 전속되여 있었다
이해를 도모하기위해 5.18직전북한군 대남특수부대 조직에대하여 설명하려한다
북한이 남파목적으로 조직한 특수부대(게레라군)조직현항:
1) 중앙당 작전부에 소속되여있는 대남연락소 예화부대로 원산연락소, 청진연락소 ,
해주연락소 (해주연락소는 항공기폭파범 김현희가 훈련받던 부대이다)등기타부대...
2)인민군정찰국소속 60저격려단, 11공군저격여단, 3.8공군육전여단, 64해상저격려단,
직속정찰대대(8개대대)등이였으며 군단들이보유한 저격려단은 4군단에 17저격여단,
1군단에 61저격여단, 2군단에 62저격여단, 108훈련소, 5군단에 63저격여단등이있으며
1개여단은 10-12개대대로 편성되여 있으며 1개대대병력은 약500명 1개여단 병력은5000명 정도이다
여단내의 각 대대에는 작전조(대남침투조)를 따로 조직하고 육체적 정신적 골간들을 추려 맹훈련을 시켜왔다
3)인민무력부 직속으로 교도훈련지도총국이 있으며
예하부대로 경보병여단들을 가지고 있으며
교도훈련지도총국이 보유한 북한경보병여단 병역은 10만명에 달한다
5.18 광주폭동이 일어나기전해인
1979년5월 인민군총참모부 정찰국명령서를 하달받았다
명령서의 내용은
“정찰국직속대대와 각여단작전조 전투원역량을 보충하고
작전조 전투원들의 머리를 장발로 깍을데대하여”였다
당시 인민군병사는 전부 삭발을 하였으며
남파임무를 수행하는 중앙당 대남연락소와 정찰국직속 저격여단과
인민군군관(장교)들만 평상머리를 하고있었다
당시북한에서는 일반국민들이 장발을하면
자본주의 요소라고하여 국가와단체의 비판대상이 되어 누구도 장발을 할수없었다
남파공작부대에 전달된 명령서에 장발을 명령한것은
당시한국의 청년들과 시민들이 장발을 하고있기 때문에
광주에 침투하는 전투원들을 광주시민으로 위장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다
당시 김일성은 서울, 인천, 부산, 대구에서 동시 다발적인 폭동을 계흭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후회하였다
광주5.18사건은
김일성의 적색통일 구상에의하여
북한대남공작 부대와 김일성이 고용하고 키워온
한국의민주세력으로 둔갑한 국내간첩들의 국가정복 반란이였다
역사외곡을 바로잡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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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보고있는 혹은 봤던 교과서
5.18에 관한 내용은 거짓말이고 사기입니다.
교과서라고 종교처럼 믿는다면 맹신이요 미신이지요.
특히 5.18관련내용은
황석영이 89년 월북해서 김일성 지령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입니다.
그걸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한거죠
그래서 내용에 앞뒤가 맞지 않고 이상한겁니다.
5.18옹호론자들의 주장
수사기록은 신군부가 작성한것이므로 믿을수없다.
교도소 습격사건은 조작이다.
탈북자들의 주장은 증거가 없다.
5.18측 자료는 유네스코가 인정했으므로 믿을수있다.
전두환은 하극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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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측은 5.18측 주장만 옳다하고
5.18이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5.18측 주장이 틀렸다고 하는겁니다.
그러니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신다면
5.18측이 제시하는 자료들중 의문나는 점을 해결해줘야 하는겁니다.
그런데 그 의문나는점이 5.18의 핵심 내용입니다.
5.18이 일어나게한 원동력이고
확장되어 대규모 무장시위를 하게된 두뇌라고 할수있죠
다이너 마이트가 광주 시민이라면
이 다이너 마이트가 터질수 있도록 불을 당긴 사람말입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서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이런 5.18을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측의 자료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누군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그렇다 하기에 확인도 하지 않고
쫒아가서 얼떨결에 민주화운동했다....입니다.
그럼 왜 누군가가준 정보
그리고 누군가가준 정보의 진위확인이 중요한지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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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차가 도로가에 한대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 앞에는 한 여인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 옆에는 운전자가 그 여인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10여명의 남자들에게
누가 차로 저 여인을 치어 살해했다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 10명의 남자들이 화가 단단히 나서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려 합니다.
헌데 누군가 이들에게 몽둥이를 줍니다.
그 몽둥이를 들고 사건현장으로 달려가
그 운전자를 두들겨 패 줍니다.
그리고 운전자가 사망했습니다.
자 이 10명의 남자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 일까요?
나중에 안 사실은
도로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여인을
운전자가 발견하고 앞에 차를 세웁니다.
그 여인의 상태를 확인하려 앞에 서있었던 겁니다.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누가 10명의 남자들에게 그 정보를 줬는지
누가 몽둥이를 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의인일까요?
폭력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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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런질문을 할수있을겁니다.
만약 실제 그 운전자가 그 여인을 차로 치었다면
그들은 의인인가? 폭력배인가?
이에 대한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렇다면 민주화운동이란것이
모 아니면 도로
정확한 사실확인 없이
누군가의 말에 의존하여
일단 저지르고 본다음
운좋게 맞아떨어지면 민주화운동이되고
아니면 폭력배가 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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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기 때문에
최초정보제공자
최초정보전달자
정보의 진위확인자가 중요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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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정보말이죠
이는 엄청난 중대 사건입니다.
한나라의 정권을 무력으로 잡겠다는거죠
그럼 이 정보를 누군가 알아내서 대학생이나 광주시민에게 전달했을거 아닙니까?
그사람이 누구입니까?
설마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떤이가 그런 중요한 정보를 광주시민에게
전달하여 무장투쟁을 하자 했는데
아무런 확인도 없이 네~그렇군요 하고서는
무기고 탈취하여 계엄군에 총을 쏜게 아니것죠
그리고 그 누군가 즉 정보를 전달한 이의 정보가
정확하다는걸 광주시민들은 어떻게 확인하였는가?
(전두환이 국권을 찬탈하려한다.
최규하는 허수아비다. 이에대한 정보 진위를 어떻게 확인했나요?)
사실확인을 했으니
"맞다!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려한다 는 정보와 사실이 딱~ 맞다"
인정하고 무장투쟁을 했겠지요.
이런 사실확인도 없이
무작정 무기고 털어서 무장항쟁을 하진 않앗겠지요
자! 누가
어떤경로로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내서
광주시민 누구에게 전달하였고
그 광주시민은 어떻게 그 사실이 맞다는걸
확인 하였는지
설명해 주시죠.
38개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왜 나타나질 않는가?
국가 유공자가 뭔지 몰라서?
죄의식때문에?
아니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안사람은
현재 대한민국에 살지 않아서?
설마 귀신이 38개 무기고 위치를 알려줬다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겟죠.
누군가는 알고있었것지?
무기고 탈취는 매우 중요한 대목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위치를 누가 알려줬는지 아무도 모른다?
즉 5.18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이 있기는 한데
누구인지는 모른다?
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사람
광주5.18의 핵심 역할을 한사람
이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보 유출자
정보 전달자
정보 확인자
정보 확산자
무기고 위치를 알고있었던자 최소38명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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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보제공자와 38개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가 누구인의
중요성이 또하나 있습니다.
만일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위 정보제공자들을 알지못한다면
5.18의 주인이 바뀔수 있다는 겁니다.
5.18의 주연급들이 누군인지 모르기때문에
막말로 개나 소나 돼지가 와서 그 정보는 내가 알려줬다 라고 한다면
5.18의주인이 정신병자 혹은 개나 소나 돼지가 될수 있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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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정보제공자 무기고 위치 정보제공자 이들이 사망했다 가정한다면
만약 이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하더라도 또다른 의문이 여기 가세하는 겁니다.
이 중요 정보제공자의 정보를 확인한 절차가 없다는것이 이상한겁니다.
누군가 최초 정보를 줬는데 100퍼센트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위를 했다?
극비사항인 무기고 위치를 누군가 알고있어 안내하는데 이에 아무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38개 무기고를 털러간 38개 조직이 있습니다.
이 조직들중 극비사항인 무기고위치정보제공자에 대하여
신분이나 그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의혹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면
결국 5.18주인공은 북 특전사 출신들이 되는겁니다.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소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그런데 북특전사 출신들이 그 누군가가 우리요 하고 5.18의 주인임을 천명했고
이에대한 구체적 진술을 했습니다.
자 이 사건 즉 북특전사들의 증언
이들이 증언한 5.18관련 내용의 의미가 바로
5.18주인이 없다는 것이고, 5.18측에서 그 누군가를 제시하지 못하면
5.18주인은 북특전사가 될수있는겁니다.
특히 유언비어 그리고 38개 무기고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여
38개 분팀을 만들어 무기고까지 갔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5.18이 순수 광주시민들에 의해 일어났다면
빨리 정보제공자 ,38개 무기고위치 정보제공자를 찾아내야 하는겁니다
누군가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다.
운전자는 도망쳐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동차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럼 자동차가 범죄자인가?
운전자가 범죄자죠?
그 운전자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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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5.18유네스코등재 설명은 매우 간단합니다.
히로시마 원폭돔도 평화의 상징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특별한 사건이면 무엇이든 등재시킬수 있는곳입니다.
따라서 5.18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고
민주화운동이라 고무도장을 찍어준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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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하극상을 일으켰다?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고 전두환보다 계급이 높아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이 체포하면 하극상이 된다?
그렇다면 상급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모두 하극상이 되고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아무도 체포할수 없는것인가?
대한민국의 법은 만인에 전국민에 공평하기때문에
대통령이든 계엄사령관이든
범죄를 저지르면 집행자에 의해 언제든지 체포될수있다.
정승화는 범죄자 김재규의 뜻에 동조하여 직속상관인
국방장관의 명령없이 불법적인 계엄선포를 진행했고
이과정은 5.18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 측에서도 알고있는 내용이다.
즉 정승화는 운좋게 계엄사령관이 되기 이전에
범죄를 저질렀고 범죄자가 계엄사령관이 된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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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는 전두환의 허수아비다?
전두환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길래
그리고 최규하가 얼마나 나약했길래
허수아비가 된단말이죠
최규하가 허수아비라는 과학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만약 최규하가 허수아비였다면 왜 지금은 대통령이 누군가의 허수아비가 되었는지
조사하지 않습니까?
전두환보다 더 무서운 김일성 김정일의 허수아비도 될수있을것이고
함마 전기톱 최류탄이 날아다니는 공포의 국회를보고 허수아비가 될수있을것이고
보다더 효과적인 최면이나 약물 아니면 가족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여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 가능성도 있는거 아닙니까.
이렇게 비추어볼때
만약 최규하가 전두환의 허수아비였다면
김영삼은 박계동의 허수아비고
노무현은 김대중의 허수아비고
김대중은 김정일의 허수아비고
이명박은 촛불좀비의 허수아비가 맞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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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5.18폭도들과 다른것은
전두환은 정승화의 범죄사실을 면밀히 조사하여
증거를 확보하고 법에따라 체포한것이고
5.18폭도들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 의하여 들은 정보를
확인도 하지 않고 누군가가 털어준 무기로 무장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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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옹호론자들의 5.18기록을보면
누군가 전두환이국권 찬탈하려한다고했다 ,
누군가 경상도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고 했다,
누군가 무기고를 털자고해서 몰려갔다,
누군가 무기고 위치를 알아서 따라갔다,
누군가 교도소를 습격하자고해서 따라갔다.
즉 5.18민주화운동설을 보면
머리는 없고 몸통만 있습니다.
더욱 웃긴건 민주화운동이라고 대대적으로
매년 5월 18일 마다 기념하면서 5.18의 주역 핵심인물이 누구인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광주시민들,5.18을 연구하는 단체들 조차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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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태에서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려한다는 정보를 정신병자가 줬다며 이런 주장을 할수도 있을겁니다.
5.18이 일어나게된 최초 정보제공자는...
어떤 정신병자때문 이었습니다.
이 정신병자는 누가 한말을 1년동안 반복하는 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좋게 정신병원을 탈출합니다.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궁금이왈 쿠데타가 뭐야 하고 물엇습니다.
아직 코흘리게인 친구 띨띨이가 그걸 알리 없엇습니다.
헌데 TV에 전두환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냅다.
전두환에게 물어봐
하고 답해줬드랍니다.
그걸본 정신병자는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 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서는 전두환이 구데타를 안다?를 반복햇습니다.
그 정신병자는 정처없이 걷다 전라도 광주까지 갔더랍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안다?를 중얼거리면서.
전라도광주에 도착한 정신병자는 기진 맥진 힘이 다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중얼거렷습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하~아~안~다?
전남대 앞에서 비틀거리기 시작햇습니다.
그를본 광주시민이 놀라 그를 부축해 줍니다.
그는 그 광주시민을 보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전~두~환이 쿠~쿠~데타~를 하~아~안~다?
이말에 놀란 광주시민들이
전두환이 쿠데타를 한다 라고 오해하여 일어난 폭동이엇습니다.
이런 주장을 누가 한다면
5.18이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대응을 하겠습니까?
"정신병자설은 허위다 " 이렇게 대응한다면
당연히 반문할것입니다.
그럼 전두환이 쿠데타를 할것이라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
자~어떤 답변을 주시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광주5.18은
정확한 정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일어난 폭동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탈북을해 서울에 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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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봐도 5.18은 폭동.
백번 천번 양보해도 5.18은 폭동입니다.
5.18이 그들 주장처럼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이었다면
독재에 항거했거나
탄압에 항거했거나
부정부패에 분노했거나
이런 류의 명분으로
진압이 되고나서
그 폭동에 가담했거나 동조 동의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지역은
그에 준하는 분위기와 문화를 가지게 될겁니다.
그런데
80년이후 대한민국에선
이런 말들이 기정 사실로 인식화 되어있었습니다.
전라도에 경상도 차량이 가면 기름을 주유해 주지 않는다
전라도에 경상도 사람이 가면 밥도 팔지 않고 여관방도 주지않는다
전라도에 경상도 말투를 쓰면 구타를 당하거나 김대중 만세 삼창을 불러야 한다
전라도에서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진압이후 이들은 왜 경상도에 분노하고 원한을 가졌겠습니까?
이는 지역감정 유발시키는 유언비어에 일어난 폭동이기 때문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북의 공작이 없었다 해주어도
5.18은 결코 민주화 운동이 될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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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반란 폭동 문제는 여야가 한통속입니다.
2010년 2월 26일 그동안 대국민 사기쳣던5.18특별법을
국회에서 몰래 개정햇습니다.
헌데 이사실을 국민에 알리지 않고있지요.
소급입법 금지를 어겨 위헌 법률을 만든 여야가 이를 인정한것이
바로 2010년 2월 26일 입니다.
어떻게 대국민 사기를 쳤는지 민주화빨갱이들은 고백해야 할겁니다..
단순 기관인 헌법재판소를 이용해서
위헌 법률을 입법하여 불가능을 가능으로 사기를 친
대국민 5.18반란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민 사건입니다.
5.18반란 폭동을 사기치기 위해 소급효 금지와 소급입법 금지를 어겼고
헌법 84조를 어겼습니다. 이는 명백한 위헌이요 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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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급 (遡及) 다른 뜻(1건) [명사]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미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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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급효(遡及效)란 (위키백과)
법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효력을 발생하는 것을 뜻하는 법률용어이다. 특히 한국
의 형법에서는 소급효를 인정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는 헌법 제13조에 의하며
소급효를 인정할 경우 인권을 중대히 침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소급효는 법적
정의라는 개념에는 합치하지만 법적안정성에는 위협을 준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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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형법정주의
'죄형법정주의'는 어떤 행위가 범죄가 되고 그 범죄에 대하여 어떠한 처벌을 할 것
인가를 미리 성문의 법률로 정해놓아야 한다는 형법의 원칙이다.
즉, 이미 제정된 정의로운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되지 아니한다는 원칙으로
, 이는 무엇이 처벌될 행위인가를 국민이 예측가능한 형식으로 정하도록 하여 개인
의 법적 안정성을 보호하고 성문의 형벌법규에 의한 실정법질서를 확립하여 국가형
벌권의 자의적 행사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법치국가 형법의 기본
원칙이다.
■ 법률주의/명확성의 원칙/유추해석금지의 원칙/소급효금지의 원칙
죄형법정주의에는 법률주의(관습형법금지의 원칙), 명확성의 원칙, 유추해석금지의
원칙, 소급효금지의 원칙 등이 있다.
-법률주의: 죄와 형의 내용은 국회를 통과한 법형식인 성문의 법률에 의해 규정해야
한다는 원칙.
-명확성의 원칙: 죄와 형을 규정하는 법률은 그 내용이 명확해야 한다. 즉, 국회를
통과한 법률에 의해 죄와 형을 규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법률의 내용이 불명확하고
애매모호하면 죄형법정주의 정신의 실현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국회는 죄와 형
의 내용을 명확히 하여 법률에 담아야 한다.
-유추해석금지: 죄와 형을 규정한 법률을 해석함에 있어서 유추해석은 허용되지 않
는다.
-소급효 금지: 죄와 형을 규정한 법률은 그 법률의 시행 이전에 행해진 행위에 대해
소급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사후법의 금지란 행위 당시 적법한 행위에 대하여 사후에 형사책임을 지우는 소급입
법(ex post facto law, retroactive law)의 금지를 말한다. 소급입법금지원칙이라고
도 한다.
한국 헌법은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헌법 제13조 제1항 전단). 이는 적법한 행위에
대하여 사후에 이를 처벌하는 소급법을 제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또 그러한
방법으로 형을 가중하는 것도 금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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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 8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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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
이조항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는 재직중에도 형사 소추를 받는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하는 오류를 범할수 있습니다.
내란 또는 외환 이외의 죄는 재직후 형사상 소추를 받는다
그러므로 공소시효가 재직중에는 정지되었다로 볼수있다.
이렇게 오류를 범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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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대통령은 재직중에 내란,외환 이외의 죄는
형사상 소추를 받을수 없는가.
받을수 있습니다.
재임중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형사상 소추를 할수 있습니다.
탄핵을 하면됩니다.
탄핵후 형사상 소추를 하면됩니다.
즉 공소시효가 정지 되는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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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권분립주의와 법치주의에 의하여
입법부 -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주면. (우두머리 국회의장)
행정부 - 정부기관에서 그 만들어진 법을 구체화하여 집행하고 (우두머리 대통령)
사법부 - 법률상의 위법여부를 판단해서. 분쟁해결과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기관입니
다. (우두머리 대법원장)
이 이상 혹은 동등한 기관이 있을수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름처럼 헌법을 재판하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을 재판하는 곳도 아닙니다.
입법부,법원의 시다바리가 바로 헌법재판소 입니다.
법원의 재판사항에 관여,판결할수도 없습니다.
조문숙 법학자의 말처럼
수사기관에서 지문감식반에 지문감식을 의뢰하면
지문 식별만 해주면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즉 헌법재판소는 수사기관의 지문감식반같은 곳입니다.
만약 민주화빨갱이들의 논리대로
헌법재판소가 입법,사법,행정부등과 동등하다거나 그 위에 설수있다면
대한민국은 헌법재판소가 점령한 독재국가가 되는것입니다.

현재 네이버 백과사전등에 올라있는
소급효 소급입법에 관한 내용은 1995년
5.18특별법을 억지로 제정하기 위해
민주화빨갱이들과 헌법재판소가 작당하여
사기친 내용들 입니다.
결국 이들은 이사실을 더이상 숨기지 못하고
5.18특별법을 개정했습니다.
헌법 제 8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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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
그러므로 공소시효가 재직중에는 정지되었다로 볼수있다.
로 해석하여 1995년 5.18특별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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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84조 공소시효에 관한 내용(오일팔 특별법 제2조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헌정질서 파괴 범죄 행위에 대하여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것으로 본다(제1항) 제1항에서 국가의 소추권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기간 이라 함은 당해범죄행위의 종료일로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제2항)고 하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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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대통령은 재직중에 내란,외환 이외의 죄는
형사상 소추를 받을수 있다.
(재임중 대통령이 범죄를 저지르면
탄핵후 형사상 소추를 할수있다.
즉 공소시효가 정지 되는것이니다.)
로 정정하여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헌정질서 파괴 범죄 행위에 대하여 해당범죄 종료일로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것으로 본다
로개정하여
5.18특별법은 완전 수건가 된것입니다.
1995년에 국회가 소급법이자 처분적 법률인 5·18특별법을 제정하고,
행정부가 이를 공포·시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장세동씨 등이 신청한 위헌제청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이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결정했고,
사법부는 ‘위헌의 의심이 있지만’
국회가 제정하고
헌법재판소가 위헌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이 법을 적용하겠다고 하면서
위헌법률인 5·18특별법에 따라 ‘5·18전두환재판’을 열고,
피고인들에게 유죄판결했다.
대법원은 이 판결문 첫머리에
원래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완성된 사건이어서
검사의 공소권이 없고
사법부의 사법재판권이 없는 사건이었다는 것과
국회에서 전직대통령의 경우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에는 국가소추권이 정지된다는 것을 규정한
헌법 제84조를 ‘확인하는’ 의미에서 행한
‘확인적 입법’인 5·18특별법을 제정했다는 것을 먼저 밝혔다.
그리고 5·18특별법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에
후임 대통령인 노태우 전대통령의 재임기간을 합산한 기간 동안 공소시효가 정지되고,
노태우 전대통령은 자신의 재임기간에
전임 대통령인 전두환 전대통령의 재임기간을 합산한 기간 동안 공소시효가 정지된다고
규정하였으므로 1996년 5·18전두환재판 당시
검사의 공소권과 사법부의 사법재판권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2009년 『식인-리걸마인드2』에서
“헌법 제84조는 국가소추권 정지조항이 아니다”라는 것을
기록증거와 함께 논증했고
국회는 그 이듬해 5·18특별법의 ‘국가소추권 장애’부분을 삭제하는 법개정을 했다.
이로써 헌법 제84조를 자의로 해석하여
헌법을 훼손했던 헌법파괴세력은 철퇴를 맞게 된 것이다.
헌법 제84조가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것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짐으로 하여
5·18특별법은 ‘확인적 입법’이 아니라
‘창설적 입법’으로 되었고,
그 결과 헌법이 금지하는 소급법으로서 위헌법률이 된 것이다.
물론 1996년에 시작된 5·18전두환재판도 공소권 없이 공소제기되고,
사법재판권 없이 판결한 재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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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반란 폭동입니다.
화려한휴가의 모태
님을위한 교향시를 아십니까
이영화는
북한에서 대한민국에 제2의 5.18반란 폭동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만든 영화로
황석영이 89년 월북하여
김일성 지령에의해 재간둥이라는 칭호를 받고서는
윤이상이 영화음악을 맡아 91년도에 만든 영화입니다.
황석영은 “광주 5월 민중항쟁기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통일부북한자료센터에 가시면 관람하실수 있는데
북한의5.18영화 내용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알고있는5.18내용과 같습니다.
김일성주체의기치에따라 나아가는 광주인민들의 영웅적인투쟁이라는 5.18이
어찌 민주화운동입니까
5.18특별법 제정은
김영삼의 정치적 위기를 타파하기위해 정치적 사기를 친 행위입니다.
5.18의 맹점은
12.12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2.12를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위해 일으킨 쿠데타라 사기를 쳤습니다.
왜 사기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2.12는 아시는것처럼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한것이 맹점이지요
계엄선포는 아무나 하는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계엄선포였다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를 맞이하여
군병력 동원없이는 공공의 질서를 유지할수 없을경우에 한하여)
대통령유고시 대통령권한대행 최규하와국무위원들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선포한다
정승화(육참총장)김재규(정보부장)김계원(비서실장)따위가 하는것이 아니다
계엄이 선포된후 계엄사령관을 임명하고
계엄사령관은 대통령 혹은 국방장관의 지휘 감독아래 계엄군을 동원비상목표에 출동을 시키는것이
정상적인 상황이다
그런데.정승화 김재규 김계원은거꾸로
그리고 김재규의 명령에따라
20사단 30사단 9공수여단을 출동시킨후
방송국,변전소,은행 등을 점령시키고나서
국무위원과 최규하를 국방부로 불러들여
어서 계엄을 선포하라 한것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최규하 국무위원들은 쿠데타임을 직감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던중
신현확 부총리의 강력한 반발로 불법적인 계엄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이에 국방부 장관은 김재규 체포를 전두환에 지시했고 김재규는 체포되었다.
하지만 정승화는 자신의 행적을 누구에게도 발설 하지 않아
이사실을 몰랐던 최규하 국무위원들은
범죄자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김재규가 전두환에 체포되고 나서
김재규는 전두환에 정승화 김계원과 콤비 플레이한것을 실토했고
이로인해 전두환은 모든것을 알게되었지만
범죄자 정승화는 막강한 권한과 권력을가진 계엄사령관이 되어있었다.
계엄선포가 왜 이들에게 급선무였나?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쿠데타를 할마음이 없었다면
제일먼저 직속상관인 노재현국방장관에 보고를하고
대통령 시해범을 잡기위해 자동규칙 청와대경호비상 제1호인
호랑이1호를 발령하여
경호실 병력을 출동시켰어야 했으며
또 노재현국방장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시해현장을 조사 범인체포 잔존 쿠데타세력을 체포하란 지시를 내렸을것이다.
정승화가 김재규를 도와 쿠데타할 마음이 없었다면
차지철만 지휘할수있는 수경사와 경호실에 병력이 쿠데타세력을 잡기위해
청와대로 가는것을 금지시키는 월권적인 명령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정승화가 후에 차지철이 범인이라 생각했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만약 차지철이 쿠데타 세력이었다고 믿었다면
차지철이 지휘감독하는 수경사 전성각과
경호실차장 이재전에 전화를 걸어 병력동결 명령을 할수는 없는것이다.
결국 정승화는 김재규의 쿠데타를 적극 도왔고
이를 몰랐던 최규하와 국무위원들의 실수로
범죄자 정승화는 막강한 계엄사령관이 되었고
극비에 체포할수 밖에 없는 성향의 범죄자였던 것이다
정승화는 한술더떠 계엄 포고문까지 스스로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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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난동 부분 요약
장태완은 보안사에서
정승화를 연행해간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리고 합수부에서
정승화 같은 위치의 사람를 연행해가면 어떠한 범죄사실때문이라는것도
상식으로 알고있었다.
그런데도 친분을 이유로 수경사령관 월권적 행위를 한것이고
무력을 동반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승화가 장태완을 수령사령관에 임명했을때도
장태완은 정승화에 충성을 다할것이라 했다.
장태완은 정승화의 개인적 사병이었던 것이다.
나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다.
총장님 공관에 이미 연락이 돼 있다.”
해병 헌병이 총장공관으로 연락을 하더니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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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30경비단장, 경복궁 위치)
김진영(33경비단장, 필동 수경사 외곽에 위치)
30경비단은 대통령 방호부대다.
설사 수경사 사령관이 공격해 오더라도 이를 방어할 의무가 있다.
청와대 울타리 내부 경비는 55대대가 담당했다.
55대대의 모체부대는 30경비단이다.
외곽 경비는 나머지 30경비단이 담당한다.
외곽과 내곽이 뚫리면
마지막으로 경호실 경호관들이 대통령을 보호한다.
30경비단장이 부대를 이끌고
그의 예하 부대인 55대대가 경비하는 곳을 향해 진군해 와도
그 예하인 55대대 대대장은 상관을 상대로 방어를 해야 한다.
여기에 하극상이란 있을 수 없다.
12월 12일 오후 4시경, 장세동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에 30단에 장군 몇 분이 오시게 되어 있다.
장군들에 대한 시중을 병사들에게 맡기기도 좀 뭣하다.
차나 마신다고 하니 인사도 드릴 겸 해서 나와 함께
안내하는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전화를 받고 나는 6시 15분경에 30경비단 단장실로 갔다.
어느 장군이 오는지, 왜 오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들은 바 없었다.
30경비단장실에는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가 앉아
그날 끝난 장군 진급심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장군 세계에서 장군들의 진급소식은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 후 다른 장군들이 속속 도착했다.
6시30분경, 장세동이 전화를 받더니 장군들에게,
‘합수부장이 대통령 보고사항이 있어서 좀 늦는다’는 전갈을 전했다.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으로부터 받은 전화내용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늦겠다는 전갈을 받은 장군들은 장세동에게
“뭐 먹을 것 좀 없나, 있으면 좀 가져오지” 하여
초밥과 맥주를 급히 구해드렸다.
7시40분경, 장세동이 허화평으로부터 또 다른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장세동이 전화 받은 내용을 장군들에게 알렸다.
“정승화가 10.26과 관련하여 연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격이 있었다.
대통령 재가는 이에 관한 것이다.
+++++++++++++++++++++
8시30분경,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최세창과 장기오가 “비상이 결렸으니 부대로 가봐야겠다”며 일어섰고,
나머지 장군들도 부대에 전화를 걸어
부대장악을 잘 하고 있으라 당부들을 하면서
전두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장군들이 부대출동을 결심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놀라 부대에 전화를 걸어 부하들을 챙겼을 뿐이다.
12.12 이후 장태완은 예편해 있었다.
장태완은 12.12 때 그가 병력을 동원한 것을 후회했다.
합수부가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규명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은
정의로운 애국의 길이었다고도 말했다.
장태완을 한국전산회사에 사장으로 근무시켜 걱정 없이 살도록 배려해준 것에 대해
장세동에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하여 전해 준 일이 있다.
그리고 장태완이 심근경색증을 앓고 있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경비를 대주어서 미국에 가서 수술을 받게 해준 데 대해 고맙다고 했고,
또 이 고맙다는 이야기는 장태완이 여러 사람들에게 했다.
++++++++++++++++++++++++++++++++++++++++
진돗개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상 징후가 있으면 연대장도 발령할 수 있는 것
재가+++++++++++++++++++++++++++++++++++++++
최규하는 전두환의 재가 보고를 듣고서는
국방장관을 불러오라 했다.
부결할 마음이 있었다면 즉시 부결을 하지
왜 국방장관을 전두환더러 불러오라 했겠나.
전두환 입장에서도 반란을 일으키려했다면
최규하를 협박하여 즉시 재가를 받았으면 될일이었다.
대통령께서는 국방장관을 배석시켜서 재가를 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국방장관을 빨리 찾아서 배석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가서 빨리 찾아오겠습니다 말씀드리니까 비서들 시키면 빨리 찾아올 텐데,
서울에 있는 사람이 어디로 갔겠나, 앉아서 차나 마시고 기다려 봅시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을 두 시간이상 모시고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저도 여러 가지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 어른이 기분이 나빠서 장관의 결재도 없이 이런 것 결재할 수 없어,
저보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라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저런 시국얘기도 듣고 저도 말씀드리고 이래서 근 두 시간 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국방장관의 결재가 없이 내가 결재하지 못하겠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은 전혀 없습니다.
++++++++++++++++++++++++++++++++++++++++++++++++++++
연행에 동조할 수 있는 철학을 가진 군의 여론 주도층에게
연행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동조를 얻으려
초청된 장성은 유학성(군수차관보), 차규헌(수도군단장), 황영시(1군단장),
노태우(9사단장), 박준병(20사단장), 박희도(1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장기오(5공수여단장), 백운택(71방위사단장), 이렇게 9명이었다.
여기에서 백운택 장군은 우연히 보안사에 들렸다가 합석을 하게 된 것이다.
수경사령관은 병력과 포를 가지고 공격해 오겠다 압박을 가해오고,
참모차장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세력은 거병을 하려하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마냥 노재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는데 이들 장군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
이처럼 전두환 일행이 총리공관을 나갈 때가지 총리공관 경비는 구정길 중령이 담당했던 것이다.
전두환 측이 무장 경비병을 깔아놓고 재가를 받기 위해
최규하에게 공포감을 주었다는 검사의 주장과 판사의 판시가 억지인 것이다.
구중령의 진술에 대해 당시 총리공관 경비를 인수한 최영덕(1928년생, 당시 총경) 101단장은
94년 2월 15일, 서울지검 918호 검사실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2월12일, 7시30분경, 고명승 대령이 만나자 하여 경호실 차장실로 갔더니
고대령이 함께 총리공관으로 가자하여 동승했다.
고대령이 구중령에게 공관경비를 101단에 맡기고 철수하라 하자,
구중령이 자기에게도 지휘계통이 있으니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겠다며 나가더니
20-30분 후에 의전수석인 정동열과 함께 왔다.
정동열은 이 사람들이 그동안 수고했는데 오늘은 공관 막사에서 자고
내일 철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떠냐 하기에 고대령이 동의했다.
나는 즉시 명령을 내려 공관경비를 인수했다.
경호실장 정동호는 정수석이 오기 조금 전에 도착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높은 사람들이 구정길을 강제로 제압했겠는가?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공관으로 갈 때 나와 고대령 두 사람만 갔다.
그날 밤 내내 두 사람이 함께 근무했다.
그 후 간혹 55경비대장인 임재길 중령이 안내소를 방문한 적은 있었다.
공관 출입자 통제는 의전비서실이 하는 일이었고, 우리는 경비만 했다.
출입자를 통제한 적도 없고, 공포감을 조성한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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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1공수는 당연히 출동준비를 해야 했고,
출동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국방부와 육본으로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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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환 합참의장과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차례로 수경사에 가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전화를 걸어
정승화의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한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개인적인 것이니,
병력 동원을 금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 연합사 상황실에 피신 중에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도 김용휴 차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밤 11시경에 수경사에 가 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병력동원을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경사에 모여 있는 장군들이 병력동원을 협의하고 있는 모양인데
절대로 병력을 동원하지 말라.
합수부의 총장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총장 개인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이니까
장군들에게 흥분하지 말고 있으라 하라.
보안사령관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니 내일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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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부 차장에서 곧바로 그 막강하다는 수경사령관에 임명된 것이다.
수경사령관은 통상 참모부장을 마친 고참 부장급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런데 정승화는 신출내기 차장급에 있는 장태완을 파격적으로 수경사령관에 임명한 것이다.
그가 취임하던 11월 16일, 수경사 장교식당에서 가졌던 취임축하 리셉션에서 그는 이렇게 흥분했다.
나 같은 촌놈이 수경사령관이 된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수경사령관에 임명해준 정승화 총장에게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며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정총장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다.
정승화 총장을 위해여 건배~
수경사령관은 대통령을 수호하는 공화국 사령관이다.
하지만 정승화는 본인의 직분보다는 정승화를 위해 행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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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진실 요약
5월 18일(일요일) 새벽에는 이미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이 휴교령은 헌법기관이 내린 정당한 명령이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가 1개 대대씩 들어가 있었던 것은
평소에 계획돼 있었던 부대배치 계획에 의해 자동적으로 배치된 것이며,
2개 대대 규모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상징적인 규모에 불과했다.
2개 대대를 내보낸 것은 순전히 계엄사 작전계통과 계엄사령관 사이에서 취해진 조치였고,
여기에 전두환이나 정호용 등이 개입한 증거는 없으며
그렇게 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계엄군의 배치는 합법적인 것이었으며 배치된 계엄군의 지위야말로 헌법기관이었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 9시경,
광주의 대학생 들은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을 위반했다.
200여명의 대학생들이 전남대 도서관에 간다는 이유를 내걸고
학교에 진압하려 했지만
정문에 이미 배치돼 있던 공수 7여단 병력 20여명이 이들에게 귀가를 종용했고,
귀가의 종용은 정당한 임무수행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고 가방에 숨겨온 돌멩이를 꺼내 계엄군에 던져 부상을 입혔다.
도서관에 가겠다는 학생들이
가방에 돌을 숨겨 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5.18측은 계엄군이 먼저 학생들을 공격했다고 하지만
수사기록에는 분명히 학생시위대가 먼저 계엄군을 공격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계엄군이 쫓아가자 학생시위대는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몰려가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수많은 시민을 결집시켜 파출소를 파괴 방화하고 경찰관들을 폭행했다.
이는 각본이 있는 행동이었다.
공수부대가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화려한 휴가’라는 암호명으로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를 비롯하여
경상도 군인들이 대검을 가지고
전라도 여인의 가슴을 도려내고 머리 껍질을 벗겨 매달아 놓았다는 식의 유언비어들이
사람에서 사람의 입으로 전달되는 동안 증폭되어 나돌았고,
이에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경상도 사람들을 집단으로 구타하여 살해했고,
경상도 차량들을 보면 불태워 버렸고,
경상도 사람이 운영하는 상점을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때까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7여단이었고,
7여단의 주둔지는 전북 금마, 여단 병력의 40%는 호남출신이었다.
유언비어는 모두가 거짓이었고, 그 제작 진원지는 북한이었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과 정기간행물들에 그 괴담들이 실려져 있었다.
1980년대 대학가를 물들인 ‘찢어진 깃발’의 진원지도 북한이었다(솔로몬 앞에 선 5.18).
모두가 광주시민들에 내재해있는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증폭시키려고 제작된
고도의 심리전 전술로 작성-유포된 것들이었다.
유언비어에 자극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여기에 더해 평소에 사회를 뒤집어보고 싶었던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으로 대표되는 소외계층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삽시간에 배수 단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파출소들이 수도 없이 파괴-방화되고 경찰들이 매 맞고 인질로 잡히는 등
경찰력은 단 두 시간 만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에 다급해진 전남경찰과 전남도지사는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은 시내로 나가 길목을 지키면서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했을 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공수부대를 상대로 화염병을 던지고 옥상에 올라가
역기와 화분을 머리위로 던진 존재는 시위대였고,
시위대의 지나친 폭력이 계엄군의 반적용을 유도한 것이다.
시위대의 요구는 김대중 석방,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 계엄령 해제 등이었다.
이러 요구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의 요구였고,
이 요구는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내각을 일거에 전복하려는 요구들이었다.
광주는 폭력, 방화, 살인이 난무하는 광란의 도시였다.
거리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방화되어 광주시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는
시위대가 계엄군을 상대로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인 살육전을 벌였고,
수십 개의 파출소, 도청의 6개 부속건물, 세무서, MBC, KBS 등
공공건물에 대한 무차별한 파괴와 방화 작전이 수행됐다.
계엄군이 교외로 나간
5월 22일 새벽부터는
시위대가 점령한 광주시와 시위대가 점령한 17개 시군을 연결하기 위한 공격과
6회에 걸친 교도소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폭도 사망자만도 28명으로 집계됐다.
광주시위의 폭력과 과열성은
5월 19일 밤부터 5월 21일 오후 5시까지에 절정을 이루었다.
광범위하게 널려진 파출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하고
계엄군을 조롱하면서 감정을 유발하고,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정렬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장갑차, 군용차, 대형 화물차, 버스를 기발한 방법들로 계엄군을 향해 돌진시켰다.
돌진차량 운전수를 잡아보니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나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했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공격들은 총알보다 더 공포스러운 살인공격이었고,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지휘한 지도부가 기록에는 없다.
이러한 공격들이 과연 지도부 없이 시민들이 알아서 한 행동일까?
광주시에는 5월 22일에야 비로소 광주유지들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등장하여 무기 회수를 주도했고,
이에 병행하여 김창길(22세 대학생)이라는 온건파가 주도하는
‘학생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 졌으나
이후 3일간 이들 간에는 무기반납을 놓고 벌이는 강온파 간의 대립이 연속됐다.
5월 25일부터는
강경파인 김종배(26세 대학생)가 김창길 위원장을 제치고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됐고,
학생수습대책위는 시민군 지휘부가 됐다.
이때 화려한 휴가에서 시민군 대장으로 등극한 박남선(26세, 골재운반 화물차 운전수)은
시민군 지휘부의 상황실장 자리를 맡았고,
5.18 최고의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겨우 대변인 자리를 맡았다.
상황 기록들을 보면 5월 25일 이전,
윤상원과 박남선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는다.
종북 좌익들이 애국가 대신 부르는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여기에서의 ‘임’은 김일성이라는 설도 있고
윤상원이라는 설도 있다.
좌파들은 윤상원이 5.18의 꽃이라 했지만
윤상원은 불온서적을 취급한 녹두서점 점원이며
공원들을 상대로 야학을 지도한 30세의 청년에 불과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시민군 대장으로 윤상원을 내세우지 않고
5월 26일에 상황실장으로 임명된 박남선(배우 안성기)을 내세웠다.
영화에서는 박남선을 예비역 공수부대 대령으로 신분을 도용했지만
박남선은 당시 26세의 골재채취화물차 운전병이었다.
공수부대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26세 골재채취운전병에 불과했던 시민군의 상황실장 박남선을
공수부대 대령출신으로 둔갑시키고
7공수여단장 신우식 준장과 동기생인 것으로 묘사한 것은
5.18의 열등의식을 웅변적으로 나타내준 것이다.
아마도 광주시위는 양아치들의 잔치라는 세간의 조롱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나타나있지는 않았지만
광주에는 숨어 있는 지도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강력한 심증을 갖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 중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44개 무기고의 동시 탈취다.
시위대가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사실에는
‘불법’이라는 의미가 부여됐을 뿐,
이제까지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고가 탈취된 과정을 보면
여기에는 분명히 지휘부가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일반 시민들은 무기고 옆길로 걸어 다니면서도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5월 21일 아침 9시.
아시아 자동차 업체에 모인 600명은
300여 대의 차량에 시민군을 태워가지고
17개 시군에 널려있는 44개의 무기고를 향해 44개조로 나뉘어 달려갔다.
광주시로부터 100 여 키로 떨어진 곳들도 많이 있었다.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44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것은
위치를 미리 파악한 군사작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44개 무기고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종합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는 간첩 말고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정상일 것이다.
이 무기고 탈취과정은 5.18에 간첩이 개입했다는 심증을 갖게 하는 데
가장 설득력 있는 대목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5월 21일 08:00시,
광주 톨게이트에서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무전기와 공용무기가 탑재된 위엄 있어 보이는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하자마자
이 지프차들을 모두 몰고 방위산업 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직행했다는 점,
그리고 아시아 자동차에서 군용트럭을 탈취해
그 군용트럭을 몰고 무기고로 갔다는 점이다.
14대의 지휘용 지프차는 어마어마한 수량이다.
이를 본 아시아자동차 직원들은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 없이 차량들의 열쇠를 내주었을 것이며,
44개 무기고에서는 지휘용 지프차나 군용트럭을 보고는
역시 사태가 시위대에 유리하게 기울고 있다고 생각하여 무기고 문을 순순히 열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러는 위압감에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20사단 지휘부가 몇 시쯤 톨게이트를 지날 것이라는
군 내부의 극비 정보를 알아내 가지고 위와 같은 연속작전을 편 것이다.
이런 작전은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작전은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광주작전의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00명! 이 600명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숫자다.
수사기록에도 600명이 나오고,
광주의 악녀 전옥주의 증언에서도
연고대생 600명이 광주를 해방시키러 온다는 말이 나오고,
2006년 12월 20일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기자회견에서도
북한특수군 600명이 왔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몸서리쳐지게도
이 600명은 1985년에 발행된
북한의 역사책
‘광주의 분노’ 34-35쪽에도 나온다.
“누군가가 군중들 속에서 ”총! 총!“ 하고 피나게 절규하였다. . .
그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놈들이 순진한 녀학생들의 옷을 벗겨놓고
갖은 희롱을 다하며 지어 젖가슴까지 도려내어 죽이고,
배를 갈라 태를 치는 것을 보고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시민들은 드디어 ‘피를 피로 갑자면 총을 들어야 한다’는 구호를 들었으며
무기획득을 위한 투쟁에 떨쳐 나갔다.
5월 21일,
광주고등학교와 숭일고등학교 학생들이
‘학도호국단’의 무기고를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광주 인민봉기과정에 봉기군이 처음으로 벌린 무시탈취투쟁이었다. . . .
이 때부터 봉기군들은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놈들의 무기고를 본격적으로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폭동군중들은 괴뢰들의 군용차령 공장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들은 이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일반국민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경찰과 정부군을 향해 발포한 것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이냐며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5.18측은
5월 21일, 13:30분경에
도청 앞에서 군에 의한 집단발포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당방위로 무기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향해 발포했다고 항변한다.
과연 무엇이 사실인가?
수사기록을 보면 도청 앞 발포는
9번째 발생했던 자위 즉 정당방위용 발포였다.
그 이전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지휘관들이 6차례에 거쳐 발포를 했고,
시민군도 1회의 발포를 했다.
5월 21일 이전에 이미 시위대에는
26정의 카빈과 7정 이상의 M-16이 있었다.
계엄군이 없는 지역에서 수없이 발생한 사격과 시체들은 이들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다.
가장 치열했다는 5월 21일,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한 총격전에서 사망한 민간인에 대한 통계는 33명,
33명의 사망자 중 20명은 자상,
자동차 전복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계엄군은 오직 M-16소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 총상은 계엄군에 의한 총상이 아니라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꺼내온 총들이다.
5월 19일 19세의 나이로 지휘자를 호위하여 광주에 왔다가 돌아가
1급 국기훈장을 받고 탈북 해
현재 분당에 살고 있는
정 모씨는
자기가 사용한 카빙총이 북한에서 가져온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총상에 의한 망자 중 70% 이상이
시민군이 소유한 카빈소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을 쏘는 불순분자들이
시민군 속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탈북자들은 한결같이 이것이 바로 북한특수군의 소임이었다고 증언한다.
사람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경에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첫 발포를 했고,
거기에는 발포 명령자가 있을 것이지만
단지 규명이 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논리와 군대상식에 기초하지 않은 질 낮은 주장일 뿐이다.
5월 21일 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면으로 나오더니
그들 중 한 대의 장갑차가 도청 앞을 지키고 있던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여
병사 1명을 깔아 죽였고, 1명에 중상을 입혔다.
이러한 차량공격이 그 후 세 차례나 더 계속됐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은
그야말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돌진차량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이것이 이른바 도청 앞 발포였다.
이 이외에도 5월 21일 아침부터
오후 5시 3공수가 전남대를 철수할 때까지에는
6.25 고지쟁탈전을 방불할 만큼의 밀리고 미는 식의 교전과 쌍방 발포들이 있었다.
특전사 10개 대대가 광주시를 철수할 때
철수로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무장 시위대가 사격을 가함으로써
광주시에서는 정규군과 정규군 사이에 벌어지는 정도의 교전들이 이어졌다.
누구를 위와 같은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발포를 놓고 5.18측은
발포명령자가 전두환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공수부대 대신
정규군인 20사단을 투입시켰더라면 처음부터 위협사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수부대는 과도하리만큼 민심을 다치지 않도록 억제되고 통제되어 왔기 때문에
발포에 대한 자제력이 군으로서는 지나칠 정도로 강했고,
바로 지나친 자제력이
광주 전투를 필요 이상으로 키웠다.
공수대원들은
미국 헤리티지 연구소의 분석가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듯이 끝까지 시민군을 조준하지 않고 위협사격 차원에서 대응했다.
5월 21일 탈취한 무기는 2개 연대 규모의 것이었다.
카빈, M-1, 기관총 등 5,403 대, 소화기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 폭약 2,500여 상자,
뇌관 35만개, 4만여m의 도화선 등이었다.
779대의 차량이 탈취됐고, 이들 779대는 군용으로부터 탈취한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로 구성됐다.
광주로 상품을 나르는 상인들이 없어지자, 식료품과 생필품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간들이 지속되면 광주시민들의 고통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인가?
거기에 일부 무장 시위대들은
시민들을 협박하여 금품을 뜯고 가족 단위로 살해하고
돈을 뜯어가고 방을 빼앗는 등 광주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기록을 보면 계엄군은 이러한 광주시민들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덜어주기 위해 노심초사했으며
그 결과
5월27일 새벽
극비의 특공대식 작전을 폈고,
이로써 무법천지 광주에는 다시 치안질서가 확립된 것이다.
이런 극비 정보마저 새어나가는 바람에
탈환작전 시 불필요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당국이 광주시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TNT 제거작업 과정에 웅변돼 있다.
시민군은 8톤 트럭 분량의 TNT를 도청 지하실에 저장하고
거기에 뇌관까지 연결해놓았다.
폭발하면 광주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그런 분량이었다.
시민군은 이를 폭파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협박했지만
계엄군은 목숨을 내놓고 잠입하여 10여 시간에 걸쳐 뇌관을 제거해주었다.
시민군과 계엄군 중, 누가 광주시민을 더 사랑하였는가?
광주시위대는
헌법기관인 경찰과 계엄군에 폭력을 먼저 행사했고,
헌법기관이 내린 명령에 불복했으며,
과도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바로 이런 것이 내란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의 재판부는 5.18을 김대중에 의한 내란음모였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광주시위대를 헌법기관에 준하는 존재라 판결했고,
헌법기관으로서 이를 진압한 계엄군을 국가폭력집단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광주시민에 하루라도 빨리 질서를 찾아주려고 세웠던 조기진압 계획을 놓고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경우
내란목적에 불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저지른
신군부의 행위이므로 재진입작전은 내란을 목적으로 하는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5.18을 신군부가 일으킨 것이라 판결했지만
수사기록을 보아도 신군부와 5.18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수사기록을 보아도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주체는 신군부가 아니라
계엄사-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 통수체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신군부가 광주시위대를 진압한 것은
대통령과 내각에 공포심을 갖게 한 행위이기 때문에
헌법기관을 협박한 행위가 됨으로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참으로 괴변이었다.
무장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광주시는 진압하지 말았어야 했고,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차단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의 판결인 것이다.
이러한 억지의 인민재판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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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사람들의 증언중
19일 작성된 (선동)유인물
차량을 접수,제공하라
폭약이나 총기류를 시민군이 가져야한다
주변의 관공서와 악질 기업주집에 방화하라
조금만견디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해방정권을 세울수있다.
(손남승,5.18연구소)-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무기를 제작하라! 다이너마이트,화염병,사제폭탄,불화살,불깡통,각종기름준비,
전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차량을 획득하라! 특공대를 조직,군무기를 탈취하라!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
(최정운,5.18 민중항쟁과 절대공동체의등장)
도청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나기도했다
오발을 하거나 재미로 한방씩 쏘아보기 때문이었다.
더 기겁을 할일은 수류탄을 차고다니는 꼴들이었다.
안전핀고리를 그렇게 차고 다니는 고린줄알고 그 고리를
줄래줄래 꾀어 달고 다니고 있었다.
그게 뽑히는 날에는 떼죽음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리고 총 파지법을 모르기 때문에 대작대기 들듯 들고
휘젓고 다니는데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송기숙,5.18연구소)
친구와 함께 2인1조가되어 학동교회 옥상으로 가려는데
목사가 못들어가게 했다. 목사는 계단의 핏자국을 보여주며
어떤 고등학생이 자신의 발에 오발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최남식,5.18연구소)
5.18당시 광주시민들에게 30년전의 빨치산 투쟁은 결코
잊혀진 역사가 아니었다.
(김상봉,전남대 철학과 교수)
21일 용봉 국민학교 철도변근처에서 나는 거기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수가 타라고 하면서 시민군에 징집된 차량처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징발 당한다고 했다.
(정상현,5.18연구소)
주유소 주인들이 대부분 시위대 차량에 기름을 조금씩밖에 넣어주지 않았다.
다른시위대 차량이 와서 기름을 달라고하는데 없다고하면 격해진 시위대가
주유소기름들을 막무가내로 부숴버릴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기름을 분재해주었기때문에 금방금방 기름이
떨어졌고 그럴때마다 차를 팽개치고 다른차를 타곤했다.
(윤석진,5.18연구소)
당시 총을잡았던 사람들은 수탈받고 착취받는 계급이었고
사회변혁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사는 사람들은 집에 숨어서 지냈다는 것이다.
(전용호,1988년 9월)
노동자계급,농민층,도시중하층,쁘띠부르주아지,중간계층,중소자본가들로
구성된 민중들이 주체가된 민중항쟁이었다.
당시 도청뒤의 부촌지역 사람들은 모두어디론가 도망을 간 상태였고 고아나
서럽게 살아온 사람들이 참여했다.
(한국현대사 산책,강준만)
5월 20일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담양으로 나가는 길목은 피신하는 시민 학생들이 많았다.
차를 탈수없어 많은사람들이 걸었다.
(임낙평,1988년 9월)
지원동에서 배추장사를 하던 사람이 트럭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그 사람은 계엄군이 아닌 시민군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돈을벌려고
장사하는것이 얄미워 일부러 치었다고 했다.
(최남식,5.18연구소)
5월25일 미국무장관 머스키의 전송:
"광주에서의 상황은 용납할수 없는 곳으로 전개되었다"
그의 정보원에 따르면 "온건파 시민위원회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급진파가 상황을 장악한것으로 보인다.
인민재판이 열렸고 몇건의 처형이 벌어졌다.
학생시위대는 혁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신원미상의 무장한 급진세력들로 대부분 대체 되었다.
5월26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고하다:
광주에서의 상황은 더 나쁜쪽으로 전개되엇다
민병대 무장한 급진파의 복귀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에 관한 보고들이 있다.
(웬트위스공대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고등학생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시민군들에게
제공할 쌀을얻었다
(최지수,5.18연구소)
방림동에서 쌀을 가져가라하는데 차가 없어서
가져올수 없다며 나더러 기동타격대 차를타고
쌀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후에 그사람들은 나를 강도로 매도했다.
내가 총으로 사람들의 배를 위협하고
쌀내놔라며 갖은 협박을 가했다는 것이다.
(구성주,5.18연구소)
우리가 맨먼저간곳은 중앙고속터미널 이었다.
터미널홀에 차 몇대가 세워져 있었지만 키를 모두 뽑아가버린
상태였다.
"시위차량이 부족하니 그레이하운드를 좀 내주시오"
"차를 줄수없소"
그 말을 들은 100여명의 흥분한 사람들이 세워놓은 차에 달라붙어
밀기시작하였다. 어떻게 된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중앙고속 건물안으로 들어가 회사기물과
기타 시설물들을 모두 부숴버렸다.
(윤석진,5.18연구소)
주유소에는 사장은 없고 부인과 종업원1명이 있었다.
"기름좀 주시오"
"없어요"
"비상탱크것좀 주시오"
"비상탱크도 없어요"
그것을본 일행중 한사람이 각목으로 유리창을 박살내버렸다.
그때서야 놀란여자는 비상탱크에 있는 기름을 주었다.
(허춘섭,5.18연구소)
한쪽에서 아이스크림도 놔두면 다 녹으니 가지고 가서 사람들이나
먹게하자고 했다. 우린그때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김윤기,5.18연구소)
광주사태 기간동안 윤상원이 지도자들이 모인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파리꼬뮨에대하여 이야기했고 많은사람들이 '함께투쟁하고 함께산다'
는 생존방식에 있어서 광주사태와 파리꼬뮨이 유사하다고 진술했다.
광주사태 기간동안 이양현은 1970년대 파리꼬뮨에 대하여 읽으면서
보았던 내용을 몸소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3~4살어린아이가 프랑스군대에 돌을던졌다'는 내용을
기억하고는 3살짜리 자신의 아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양현과의 인터뷰,2001년 6월22일)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7권 69-95쪽에는
윤영규(당시 42세)가 “살육의 낮과 밤”이라는 제하로 쓴 글이 들어있다.
그 책에 있는 시체장면을 아래에 소개한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사진들이다.
북한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사진들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몸부림치는 여학생의 가X을 도려내는 장면,
임신부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장면,
긴 대검을 여성의 음X로 밀어 넣는 장면 등
지금에 와서도 머리에 떠올리기 싫은 잔인한 장면들이 많았다.
여기서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북한이 그런 생생한 살인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남한에서는 그런 사진이 왜 나타나지 않는 지이다.
북한텔레비전에서 나왔다면 광주의 어느 구석에서
그런 ‘작품’들이 연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송정리 공군 3252부대 방위병이었던 이재춘 의증언)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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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2일
한편 광주시내 무장 시위대들은
거리거리에 차량을 질주하며 총을 쏘아가면서 공포분위기를 연출했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장례비에 쓴다며 돈을 뜯어냈고,
여염집에 들어가 가족단위로 집단살인을 저질렀고,
평소 앙심을 갖고 있던 집에 들어가 가족을 몰살시켰고,
금품을 훔치고 강간을 자행하는 등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언비어에 속아 거리로 나갔지만
이렇게 무법천지로 변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도를 다스리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불만을 토하기도 하고,
계엄군을 다시 보내 달라 애원하기도 했다.
시민군은
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면서 합세를 권장하기도 했다.
시민들까지도 학살했다.
한편으로는 무장시위대가 보여주는 무서운 행동들을 지켜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무총리서리의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차츰 “속았다. 광주시민이 폭도에 속았다. 지금부터라도 빨리 수습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나주에 있던 무장시민 100여 명이 군부대에 처음으로 투항하여
무기, 차량 등을 반납했다.
폭도들은 학동 지원동 일대로 몰려다니면서
“우리가 투숙할 테니 집을 비우라”며 주민을 내쫓고
우진아파트에 와서는 침구를 다 가져갔다.
금남, 삼익, 삼양맨션 아파트 주민들에게 식사제공을 강요했고,
사창가 일대에 들어가 창녀들에게 수혈을 강요했다.
일부 폭도들은 경찰복을 착용하고 경찰 행세를 했다.
공수부대 복장을 한 폭도들은
“우리는 전라도 공수부대다. 어제까지는 경상도 공수단이 와서 우리를 쳤는데,
이번에는 우리 전라도가 그들을 없애야겠다.”
등의 언동을 하고 다니면서 행패를 부렸다.
시민들에는 공수부대가 재투입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 폭도들을 격퇴시켜 주기를 바라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자칭 학생대표 2-5명이 전남부지사를 만나 학생 요구사항 6개항을 제안했고,
부지사는 무기를 자진 반납하고 자수할 것을 권했다.
일반시민들은 광주교도소로 전화를 계속하여
폭도들을 속히 소탕해 줄 것을 관계기관에 연락해달라고 요청한다
도청 정문에는 학생들 상호간에 의견충돌이 일고 있다.
도청에 불을 지르자는 파와 우리의 재산인데 그러면 되느냐는
온건파 사이에 의견충돌인 것이다.
오후엔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장유동과
전남대학교 학생대표인 김창길이 계엄당국과의 협의 내용을 보고하면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투쟁을 한다면 폭도 밖에 되지 않는다.
어서 빨리 탈취한 무기를 계엄사에 반납하고
치안질서는 경찰에게 맡기자”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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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반란 폭동을 주도하기 위해
김일성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공작을 펼쳤던
북 특전사 출신 탈북자의 증언
(5.18당시 실제 김정일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공작을 펼친 북특전사 출신의 증언:
현재 탈북하여 서울에살고있습니다)
5.18은 오랜시간을 가지고
김일성이 준비한 대한민국체제 정복의 시나리오였다
5.18폭통이 일어나기전해인
1979년도에 나는 711군부대(60저격려단) 에 대남공작 전투원으로 근무하고있었다
(711군부대는 1968년청와대 습격을 비롯한 한국에서 무장활동 을하여온 124군부대임)
711군부대는 1970년까지 군기도없었던 비밀특수 군관부대(장교부대) 였으며
“장교부대를 10년이상 보유하고 있는것은 새전쟁 도발을 위한것이라는” UN과 국제사회의 항의에 부닥치자
1976년 기계화군단인 3군단에 형식적으로 변입시키고
3군단장 옥치선에게는 이부대에 보급물자 공급만하게 하고
모든 군사작전 지휘권한은 정찰국장 오룡방에 전속되여 있었다
이해를 도모하기위해 5.18직전북한군 대남특수부대 조직에대하여 설명하려한다
북한이 남파목적으로 조직한 특수부대(게레라군)조직현항:
1) 중앙당 작전부에 소속되여있는 대남연락소 예화부대로 원산연락소, 청진연락소 ,
해주연락소 (해주연락소는 항공기폭파범 김현희가 훈련받던 부대이다)등기타부대...
2)인민군정찰국소속 60저격려단, 11공군저격여단, 3.8공군육전여단, 64해상저격려단,
직속정찰대대(8개대대)등이였으며 군단들이보유한 저격려단은 4군단에 17저격여단,
1군단에 61저격여단, 2군단에 62저격여단, 108훈련소, 5군단에 63저격여단등이있으며
1개여단은 10-12개대대로 편성되여 있으며 1개대대병력은 약500명 1개여단 병력은5000명 정도이다
여단내의 각 대대에는 작전조(대남침투조)를 따로 조직하고 육체적 정신적 골간들을 추려 맹훈련을 시켜왔다
3)인민무력부 직속으로 교도훈련지도총국이 있으며
예하부대로 경보병여단들을 가지고 있으며
교도훈련지도총국이 보유한 북한경보병여단 병역은 10만명에 달한다
5.18 광주폭동이 일어나기전해인
1979년5월 인민군총참모부 정찰국명령서를 하달받았다
명령서의 내용은
“정찰국직속대대와 각여단작전조 전투원역량을 보충하고
작전조 전투원들의 머리를 장발로 깍을데대하여”였다
당시 인민군병사는 전부 삭발을 하였으며
남파임무를 수행하는 중앙당 대남연락소와 정찰국직속 저격여단과
인민군군관(장교)들만 평상머리를 하고있었다
당시북한에서는 일반국민들이 장발을하면
자본주의 요소라고하여 국가와단체의 비판대상이 되어 누구도 장발을 할수없었다
남파공작부대에 전달된 명령서에 장발을 명령한것은
당시한국의 청년들과 시민들이 장발을 하고있기 때문에
광주에 침투하는 전투원들을 광주시민으로 위장하기 위한 사전준비였다
당시 김일성은 서울, 인천, 부산, 대구에서 동시 다발적인 폭동을 계흭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후회하였다
광주5.18사건은
김일성의 적색통일 구상에의하여
북한대남공작 부대와 김일성이 고용하고 키워온
한국의민주세력으로 둔갑한 국내간첩들의 국가정복 반란이였다
역사외곡을 바로잡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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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는 광주시민을 살렸다.
5.18반란 폭동 당시
전남도청 지하실에는 광주시 전체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무서운 양의 TNT가 저장돼 있었고,
저장만 된 것이 아니라 뇌관까지 설치되어 폭탄상태에 있었다.
그 방대한 양에 일일이 뇌관을 설치했다는 것은
전문기술자가 동원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기술은 군에서도 소수의 문관이나 준위들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어마어마한양의 폭발물을 그것도 전남도민에 대한
일체의 행정서류가 보관돼 있는 도청건물에 설치해 놓는 행위는
시위대가 광주시민을 대량 학살하려 했다는것을 말해준다.
시위대는 이무기를 가지고 광주시민과 광주시를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했다.
80만 광주시민을 인질로삼아 계엄군을 협박한 것이다.
그러면 이른바 시민군은 어째서 계엄군에게 이런 인질 협박을 벌였을까?
계엄군이 광주시민 만큼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유언비어의 내용처럼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70%를 몰살시키려 내려왔다면
이 TNT8톤에 대해 모른 척하면 됐을것이다.
그리고 구태여 부하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광주시 탈환작전을 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계엄당국은 준위 등을 시민군으로 위장하여 2차례에 걸쳐 잠입시켰다.
발각되면 살해당할 수 있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장장 10여 시간에 걸쳐 모든 뇌관을 분리했고,
그과정에서 침투했던 계엄군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다.
적진 속에 들어가 뇌관을 제거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를 광주인들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광주시민들은 계엄군과 시민군 중 어느 쪽이 광주를더아끼고염려했는지생각 해야할것이다.
0930psj
님의답변
일단 518의 근본원인이 전두환의 권력에 대한 사심이 최우선 원인임은
부인하기 힘드나,
왜 하필 광주였을까?
그곳이 제일 극심한 혼돈을 야기 했기 때문에 계엄령이 내린것 아닌가?
그럼 광주시민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렇게 했나?
내가 알기론 김대중 때문에 그런것 같은데?
쉽게 말해서 가해자가 악하다고 해서 피해자가 선하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는것이지.
민주화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왜 무기고는 털어서 교도소는 습격했나?
아래 사진 잘봐봐, 경찰로 위장한 자칭 민주화 운동가들,
경찰서 습격후에 무기탈취하고,,,
경찰 아니니까 잘봐봐,,장발족도 있을테니까,,
왼쪽 사진 동그라미 잘 보고.
아래 동그라미 다시 봐봐,,,이 아저씨가 위의 그 아저씨 맞지?
이건 어떤가? 시민들을 머리 박게 만들고 총 겨누고 있는 인간들.
이 사람들이 계엄군 맞어?
저 당시 계엄군은 모두 장발족들인가?
그리고, 전두환이 뭘 숨겨? 내가 제일 이해 안되는 부분이 이것이다.
마치 광주진압이 '비밀리에' 진행된것 처럼 말하는것.
그러나 당시 언론을 보면 유혈진압이 일어나고 있음은 대한민국이 다 알고 있었다.
위에 네모 박스 친 것의 앞부분은 '시민'이라는 글자를 칸이 좁아서 잘라온건데,
저게 518로 부터 며칠후의 뉴스이다.
아래는 518이후 한달 약간 지나서 나온 뉴스이다. 여기서도 사망자를 언급하면서 보상급을 언급하고 있다.
32년전 420만원이면 요즘 돈으로 얼마일까? 알아서 계산해 보도록.
내가 젊은 시절엔
광주 사망자 2000명수가 기정사실화 되면서 나를 흥분시켰지.
그런데 그게 어느날 100명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난 5,6공의 조작이라고 믿었어.
그런데 야당이 참여하고,,
노무현이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 던지던
5공 청문회가 끝나도록 그 숫자가 바뀌지 않는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걸까? 아래 기사에서 그 숫자의 진원지를 찾았다.
아마 이것때문에 그런 루머가 생긴듯.
전두환이 518이후 맞아 죽을까봐 광주에 못갔을줄 알지?
1년후 방문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신문기사가 나왔다.
물론 당시 시대적 분위기에서 언론도 '전두환 만세'글을 올릴수 밖엔 없었을 것이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는 할만한 기사들이다.
김대중이 조금이라도 義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광주에서의 유혈참사에 대해서 자신이 조금만 중재를 잘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거라는건 알았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고 있는데'라는 식의 과대방상적인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부추킨것 아닌가?
김대중, 그는 도대체 김영삼정권때 사형언도를 받은 전두환을 왜 풀어준것인가?
'화해'를 위해서? 그거 믿어도 되나? 혹시 약점 잡힌것은 없었나?
하여간,,,
광주시민이 그렇게 충성하던 김대중,,,그는 정말로 용감한 사람이었나? 난 그렇게 생각안함.
탄 원 서
본적: 서울 마포구 동교동 31-1
주소: 좌 상 178-1
성명: 김 대 중 (1925.12.6)
대통령각하
본인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계엄포고 위반사건등으로 1,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현재 상고중에 있습니다.
본인은 그간 본인의 행동으로 국내외에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국가 안보에 누를 끼친데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국민앞에 미안하게 생각해 마지 않습니다.
본인은 앞으로 자중자숙하면서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아니할 것이며 오직 새시대의 조국의 민주 발전과 국가
발전을 위하여 적극협력 할것을 다짐합니다.
본인은 본인과 특히 본인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특별한 아량과 너그러운 선처가 있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981년 1월 18일
위 김 대 중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게서도 아시다싶이 본인은 교도소 생활이 2년 반에
이르렀사온데 본인의 지병인 고관절변형증과 이명 등
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충분한 치료를 받고
자 갈망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각하게서 출국(?) 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서 2 3년
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
하여주시면 감사천만이겠읍니다.
아울러 말씀 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절(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
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 12월 13일
김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