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확정]5.18은 폭동이맞습니다.민주화운동이라는건 거짓

잃어버린기억20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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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전에 5.18폭동의 상황을 알려드림.   해리티지 재단에 대한 설명 : http://ko.wikipedia.org/wiki/%ED%97%A4%EB%A6%AC%ED%8B%B0%EC%A7%80_%EC%9E%AC%EB%8B%A8

본문 요약 : - 1979.10.26(박통 저격사건)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지위가 됨으로써 격렬한 정치투쟁이 시작됨.   - 야당인 신민당의 김대중과 김영삼 사이에 당권경쟁이 치열해짐.   - 경제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정치 불안 격심해짐.   - 학생들의 계엄철폐를 요구와 거리투쟁 시작.   - 폭력시위를 일으킨 탄광노조에 의해 경찰관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 1980년4월16일, 김대중은 계엄포고령을 무시하고 서울에 운집한 학생들 앞에서 투쟁을 고무시키는 연설을 함. 
- 5월15일, 서울의 학생시위로 또 한사람의 경찰관이 살해됨.   - 5월16일, 이화여대에서 학생 조직 대표들이 5월22일 기점의 전국규모의 시위 지지 결의. 
- 5월17일, 최규하대통령은 계엄을 강화할 것을 명령, 대학에 휴교조치, 정치활동이 금지.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배치됨.   - 계엄군 배치계획에 따라, 광주에는 7공수 여단의 33 및 35대대가 북쪽(금마)에서 광주시내로 이동.   - 전국의 시위는 끝이 났지만, 광주에서는 폭동(riot)이 일어남.   - 5월18일, 전남대 앞에서 수백명의 학생의 투석으로 군과의 격돌을 야기시킴.   - 소요 첫날,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40명이 죽었다''김대중씨가 처형됐다'   '군인들에게 밥을 굶기고 마약을 투여했다'는 등의 해괴한 뜬소문을 믿고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 5월20일, 폭도들(rioters)이 시청과 방송국에 불을 지름.
- 버스와 택시를 강제 징발하여 도로 위를 달림.
- 도청건물 앞에서 이들 차량중 하나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4명의 경찰관을 숨지게 함.   - 5월21일, 폭도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공격, 소총과 실탄 기타 무기들을 탈취함.   - 오전 9시경 자동차 공장이 습격을 받음. 장갑차를 포함한 수백 대의 차량이 탈취됨.   - 인접지역의 군경시설이 습격을 받아 수백정의 총기들이 탈취됨.   - 화약제조 업자들로부터 다량의 TNT도 탈취함.   - 폭도들이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해놓고 군인들을 향해 사격을 했다.
- 광주교도소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장갑차와 소방차에 분승한 중무장한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음.    5월21일, 오후 6시 군인들의 후퇴로 광주시는 완전히 반란군중(rebel)에 수중에 들어감.   - 5월22일, 광주지역 의사, 변호사, 언론인, 종교지도자들이 중재를 위한 사태수습시민위원회를 구성했다.   - 탈취된 무기는 소총 5,008정, 엽총395정, 실탄288,680발, 수류탄526발,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로 집계됨.   - 5월26일, 계엄군의 광주 시내 재진출 시도는 격렬하고 조직적인 시민군의 저항으로 실패함.   - 계엄군은 탈환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인명과 재산에 대한 피해 극소화를 위해   공중정찰과 정보 제보자들을 활용하는 등 반란 시민들의 본거지와 거점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확인했다.   - 5월 27일, 새벽 1시 행동을 개시했다. 소부대단위로 병력으로 외과적 정밀 조준으로 목표에 타격을 가했다.   작전은 수 시간 이내에 완료되었고, 사살된 사람은 17명에 불과했다    5월22일, 최규하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광주에 와서 질서회복을 호소.   - 광주시 전역에 무기반환을 호소를 하는 전단이 살포, 헬리콥터와 비행기 차량의 확성기로 호소문을 전파함.   - 계엄당국은 광주시민위원회에 협력했으며 시민위원회를 중간에 두고 폭도 대표들과 5회에 걸쳐 협상 시도.   - 신뢰회복을 위해 연행했던 시위자들을 여러 차례 풀어놓기도 했으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 5월27일, 시민위원회는 계엄사와 합동으로 철저한 시체 확인과 검시 작업에 들어갔다.   (민간의사, 군의관, 성직자, 변호사, 광주시민을 합하여 49인이 조사와 확인 작업에 참여)   - 시민위원회 위원장은 본 헤리티지 재단과 면접한 자리에서 사망자 시체 확인을 직접 했으며,   191명의 숫자는 정확한 것 이였다고 강조 함.   - 쌍방의 중무장한 무력 집단 간의 격돌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였다.   - 광주교도소에서 죽은 50여명은 중무장한 폭도들이 광주교도소를 수차 강습, 공방전에서 사살된 것.   - 정부는 모든 사망자 가족에게 16,000달러 상당을 각각 지불하고, 모든 부상자들에게 치료비를 보상함.   - 기타 시민들에게도 비상식량과 연료비조로 200만 달러 상당이 지원됨.   - 파괴된 가옥과 영업소에 대해서는 수리와 복구를 위한 지원 예산이 집행됐다.   - 구속된 시민들은 2,522명, 이중 404명이 군법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사면조치로 모두 풀려났다.   - 광주사태는 한국정부가 죄 없는 전라도 도민을 학살할 의도와 목적아래 사전에 모의해서 만들어낸 사건이 아니며,미국이 개입된 사건도 아니다. 이 반란사태(insurrection)의 규모가 방대함을 생각한다면 사망자 수는 상대적으로 현저히 낮은 것이며, 이 사실은 한국정부가 인명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인 것으로 인정된다.
『- 탈취된 무기는 소총 5,008정, 엽총395정, 실탄288,680발, 수류탄526발,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로 집계됨.』  

 

 

5.18재판, 대법원에서 최종 승리

오늘(2012.12.27) 대법원이 검사의 상고를 기각했습니다. 판결문을 받으려면 좀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영하 12도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50여명의 회원님들께서 오셔서 승리의 함성을 외친 후 30여분은 헤어지기 싫어 사무실로 오셨습니다.

5.18 부상자회 신경진 등 5.18단체측이 저를 고소한 시점은 2008년 9월이었습니다. 이들이 고소한 글의 내용은 제가 2008년 1월에 시스템클럽에 게시한 아래의 표현이었습니다.

“모든 기록들을 보면서 필자는 5.18은 김대중 등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는 1980년 판결에 동의하며, 북한의 특수군이 파견되어 조직적인 작전지휘를 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불순분자들이 시민들을 총으로 쏘는 것은 물론 제주 4.3사건에서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러 놓고, 좌익들이 이를 군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소위 모략전을 반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으로 굳혀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심리적 내전’이 바로 5.18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대상으로 5.18단체가 고소를 했고, 안양지검 박윤희 여검사가 기소를 했습니다. 최초 공판일은 2009년 10월 8일, 이때부터 재판이 시작되어 1심 14회, 2심 9회 총 23회에 걸쳐 재판을 했고, 드디어 2012.8.23. 오후2시 서울고법 404호 법정에서 김기정 부장판사가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고 피고인 지만원에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검사가 상고하였고, 그 상고를 대법원이 2012.12.27. 기각시켰습니다. 10년 동안 싸워온 5.18과의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이제부터 누구든 5.18에 대한 역사관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1심에서는 재판부가 3번 바뀔 정도로 판사들이 이 재판 맡기를 싫어했습니다. 단독 판사가 두 번 바뀌고 세 번째 합의부 재판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합의부 재판장은 첫날 재판에서 참으로 기분 상하는 말을 했습니다. “피고인은 지금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지만 언제든지 구속될 수 있습니다”이만큼 5.18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회 전체에 확산돼 있었던 것입니다. 위 고소 대상의 글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근거들을 제가 제시하지 못했다면 구속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4년 반에 걸친 1,2심 재판에서 저는 오직 "북한특수군이 5.18광주에 왔다"는 증거와 논리를 제공했고, 그간 진행된 23회의 공판은 모두 이 하나의 주제를 놓고 진행됐으며 재판부는 매회의 공판진행 시간를 짧게는 90분, 길게는 5시간까지 할애해 주었습니다.

5.18의 ‘5’자만 거론해도 벌떼같이 덤벼들던 5.18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시비를 걸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관찰한 바로는 이미 5.18사람들은 논리의 부족으로 기가 바닥 수준으로 꺾여 있습니다. 싸움은 이제부터입니다. 더 이상 겁내지 말고 5.18의 진실을 온 국민에 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어코 거꾸로 서있는 5.18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제 5.18은 더 이상 성역이 아닙니다.

재판 때마다 멀다 바쁘다 하지 않으시고 법정 내부는 물론 복도까지 가득 채워주신 애국시민 여려 분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끈질기신 참여가 재판의 세를 이룩한 것입니다. 이제 광고도 한번 내야 하겠습니다. 우선은 5.18 소책자와 전교조 소책자를 널리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5.18역사가 뒤집힌 대로 굳어지고 교과서에 있는 한 학생들은 “민주화를 갈망하는 순수한 민중들의 욕구를 총칼로 탄압한 대한민국”은 학생들의 적이요 망해야 할 증오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서는 이제부터 5.18역사를 바로 잡는 투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박근혜가 5.18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질 수 있도록 애써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5.18재판, 대법원에서 최종 승리 (대긍모-대한민국 긍정파들의 모임) |작성자 박통의 혁명 전사

이래도 5.18이 민주화 운동이라고 우길텐가?   덤빌꺼면 팩트를 가지고와서 덤비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