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6

둥이2012.12.28
조회492

매번 추천 꼭 눌러주는 분이 계시네요ㅠㅠ

같은 분이실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힘이 나네요..

 

 

 

 

 

 

 

 

 

 흔쾌히 허락은 했지만 약속한 목요일이 되기까지 이틀 동안 엄청난 갈등을 했습니다. 꾀병을 부릴까하는 나쁜 생각도 했습니다. 오빠가 싫은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데이트는 처음일 뿐더러 영화관 같은 사람 많은 곳에서 이성과 함께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하니 정말 숨이 막히도록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모솔들의 공통적인 특질이라 하던가요. 기회를 줘도 회피하려고만 하는 성격이요.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주위엔 대부분 모솔들밖에 없었고 연애고수인 10년지기 친구가 있었지만 연락할 엄두도 못냈습니다. 쓰다보니 자퇴도 그렇고, 여기서 제 결함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네요. 저는 제 주관이 불분명하고 늘 자신이 없고 자책만 하는 찌질이였던 거죠. 그렇게 조언을 받아놓고 나중에 잘 안 되면 어떡하지? "그 오빠랑은 어떻게 됐어?" 묻는 친구에게 "아 그냥...편하게 지내기로 했어." 이렇게 대답할 때의 비참함...까지 상상이 뻗어나간 거였습니다.

 

 

 

 

 

 약속 시간은 4시였던 것 같네요. 그러나 정오가 지나도록 저는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준비고 뭐고 멍하니 누워 있다가 약속시간이 촉박해져오자 그제야 자릴 벅차고 일어났습니다. 그 간의 고민이 우스워지도록 저는 아무 생각 없이, 흡사 학교 갈 채비를 하듯 자동적으로 씻고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조금 여성스러운 옷을 골라 입었는데 평소에 입고 다니는 반팔티들보다 소매가 짧아 팔뚝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너무 신경이 쓰였던 게 기억납니다. 그런데 오빠가 하필 제 예민한 팔뚝살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면서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습니다.

 

 

 

 

 

 대충 생각나는 건...소매를 접어올린 개나리색 셔츠에 검은 스키니진, 손등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힘줄들과 얇은 메탈와치. 손을 잡는 건 무슨, 두 발짝 정도의 거리를 두고 오빠 뒤를 졸졸 쫓아다닌 것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오빠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이것저것 말을 시켜줬습니다.

 

 "밖에서 나 만나니까 어때?"

 "어? 똑같은데...똑같아 그냥."

 "난 좀 다른데."

 "진짜???"

 "응. 밖에서가 더 밝아 보여."

 "아 내가 아침(교대할 때가 아침이었으니까)에 좀 저혈압이 있나? 아침엔 기분이 진짜 안 좋아!"

 "왜? 난 아침 좋은데. 아침에 기분 진짜 좋아."

 

 이렇게 자연스레 이야기가 이어져갔습니다. 좌석에 앉아서도 광고할 때 이것저것 귓속말로 속삭여주고. 아 남자친구랑 영화 보면 늘 이런(너무너무 좋은!!!) 느낌이겠구나...정말 난생 처음으로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참나, 그럼 이 남자를 어떻게든 남자친구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야지, 연인들만 부러워 하면 뭐 떡이 나오냐구ㅠㅠ......

 

 영화를 재밌게 보고 나와보니, 초저녁인데도 해가 길어 주변은 밝기만 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저녁 뭐 먹을래?" 묻더라구요. 생각이나 했겠습니까?...눈치 없고 우유부단해서 재빨리 센스 있게 결단도 못내리고...전 정말 그때의 저에게 데이트 상대로서 점수를 매기자면 빵점을 주고 싶네요^^그나마 다행인 건 오빠가 결단력있는 성격이라는 거였습니다.

 

 "먹고 싶은 거 없어?"

 "음......ㅠㅠ"

 "피자 먹을래?"

 "어?...그래!!!"

 

 영화관 건물을 나와 가게들이 밀집된 번화가 쪽으로 쭉 내려왔습니다. 거리가 꽤 됐는데 그동안 한 1년 못 본 동창 만난 것처럼 얘기가 끊임 없이 이어졌습니다. 피자를 먹으면서 서로에 대해 궁금했던 걸 알아가다보니 드디어 공통 관심사가 나왔습니다. 바로 책이었습니다. 저는 약간 문학적이거나 감성적인 소설들을, 오빠는 서스펜스물을 좋아했습니다. 취향이 겹치는 작가는 없었지만 책 이야기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자 주위는 그제야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근처 영풍문고에 들르자는 오빠를 따라가 책도 고르고 그 앞 빵집에서 빵까지 한 보따리 챙겨주고...

 

 "이제 갈까?"

 

 웃으면서 오빠가 그 말을 하는데 가슴이 좀 두근거렸던 것 같습니다. 오빠는 제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가 정말 버스 문 바로 앞까지ㅎㅎ 바래다 줬습니다.

 

 "카톡할게."

 "응. 잘 가."

 

 인사하면서 웃던 오빠의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오빠가 저에게 관심과 호의를 잔뜩 보여주었던 첫 데이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답답이병은 쉽게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습니다^^...우린 그 후로도 계속 하루종일, 잠들기 전까지 카톡을 했고 이따금 오빠가 의미심장한 말도 여러번 했습니다. 그것은 연애의 전조였으나 저는 쉽게 그 뜻들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사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좋지만 불안하고, 종일 연락을 기다리면서도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습니다.

 

 어느 날은 오빠가 갑자기 또 혈액형 얘길 꺼내더라구요.

 

 [너 A형이랬지? 혈액형 별로 안 맞고 대부분 틀리거든? 근데 넌 완전 천상여자에 전형적인 A형]
 [백퍼확실]
 [그냥 내느낌?]
 [언제는나AB형같다며...]
 [지금느꼈어 백퍼센트야]

 

 전 A형 맞고 오빠는 O형이었는데 갑자기 옛날에 주워들은 얘기가 떠오르더구요.


 [오빠]
 [A형하고O형하고궁합잘맞는대...ㅎㅎ]

 

 나름 쑥스럽게 애교 떤 거라 두근두근하고 있는데...


 [그런 건 어떻게 알아?]
 [나도 보는 법 좀]
 [A형남자O형여자?]
 [우린 그반대잖아?]

 

 이런 반응을 원한 게 아닌데...?


 [성별상관없이..그냥 어디서주워들은겨...]
 [이 오빠 팔랑귀네 그런거믿지마]
 [아 어디서봐 알려줘]
 [싫어]
 [믿지 말라니까]
 [ㅋㅋㅋ단호하네]

 

 내가 싫어! 하지 마! 해야 알아듣는 게 친오빠랑 비슷해서, 떠오른 김에 친오빠가 철없이 굴었던 일화를 하나 얘기해줬습니다. 친오빠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밥통 터뜨려서 제가 뒷수습(청소)하라고 시킨 이야기였습니다. 막 친오빠가 불쌍하게 같이 청소하자길래 일부러 안 해줬다니까.


 [근데 같이 좀 (뒷수습)해주지ㅋㅋㅋ]
 [오빠가 몰라서 그래..내가 얼마나 걔 뒷바라지 해줬는데...]
 [완전 나 같은 동생 또 없을듯]
 [웅 잘해줄 거같아 참으면서]
 [오빠도]
 [여동생있었으면 동생바보였을것같아]
 [왜]
 [그냥..친동생도아닌나한테겁나잘해주자나..친동생이었으면더우쭈쭈해줬을듯ㅋ]
 [벌써한시당ㅋㅋ]
 [ㅋㅋ나 아무한테나 잘해주는 거 아니야]
 [내가왜그러는지 모르겠어 너?]
 [그러네 벌써한시네]
 [잠이나 잘까?]

 

 나도 오빠가 좋아.

 나도 오빠를 좋아해.

 

 저도 그런 의미를 품은 말을 해보고 싶었지만, 늘 망설이게 되고 물러나게만 되더라구요. 오빠는 늘 진심을 강조했지만 저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항상.

 

 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뭔데?
 ...

 [아니 안알려줘 내 첫번째남친한테만 알려줄거야]

 내가 그렇게 항상 한 걸음 물러나면.

 

 [그럼 난데?]

 

 오빠가 한 걸음 더 다가오는, 그런 날들이었습니다.

 

 

 

 

 

 카톡을 하다 피아노가 좋고 시간이 되면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빠가 바로 카톡으로 피아노곡을 전송했는데 이어폰을 끼고 피아노를 실컷 들으며 카톡을 했던 밤이 기억나네요.

 

 우연인지 운명인지...저는 그 주에 알바에서 잘리게 되었습니다.(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네요...)

 그 주에 오빠도 그만둔 셈이니, 편의점은 그저 우리가 만나기 위한 장소였나 싶기도 합니다.

 

 

 

 

 의도치 않았지만(그래서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는 늘 목요일에 만났습니다. 영화를 본 바로 일주일 후, 우리는 예술회관에서 만났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원피스를 입어본 날이었습니다. 일주일만에 본 오빠는 머리를 자르고 갈색으로 염색한 모습이었습니다. 여전히 쑥스러운, 여름날의 우리...

 

 공교롭게도 전시장에는 아무 전시회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실망한 채 근처에 있는 스무디킹으로 들어가 시원한 음료수를 먹었습니다. 마주보고 앉아 빨대를 쪽쪽 빨고 있으니 오빠가 갑자기 가방에서 포스트잇과 펜을 꺼냈습니다.

 

 "보면 안 돼."

 

 볼 생각도 없는데 열심히 뭐라고 끼적이던 오빠가 이번에는,

 

 "너만 봐."

 

 하고 저한테 조심스럽게 건넸습니다.

 

 너 오렌지 같아

 이유는 싱그럽고

 예뻐서?

 

 

 

 

 

 우린 한참을 헤매다 간신히 매표소를 찾았고 연주회 하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아노를 좋아한다고 말한 걸 기억하고 오빠가 계속 피아니스트가 나왔다 하면 저기, 피아노 하면서 챙겨줬습니다.

 

 연주회가 끝나고 나왔을 때 이미 깜깜한 저녁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술회관답게 웅장한 건물들과 높다란 계단, 은은한 가로등과 수많은 사람들...오빠 뒤를 쫓아가는데 오빠가 갑자기 저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손 잡을래?"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졌고 저는 뜸 들이다 오빠의 손을 잡았습니다. 당황한 탓이었을까요? 정말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잡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불편하고 이상한 각도로 잡아 버렸고, 결국 가다가 팔목이 아파와서 다시 고쳐 잡아야 했습니다...ㅋㅋ...

 

 덥기도 했지만 긴장해서 그런지 손바닥에 땀이 빠르게 차기 시작했고 아랫배쪽이 찌릿찌릿거렸습니다. 도대체 그 느낌을 뭐라고 해야할지, 정말 몸 구석구석에서 찌릿거리는 느낌이 나고 심장소리가 엄청나게 커지고......

 

 맥도날드에서 스낵랩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면서 또 손을 잡았습니다. 오빠가 갑자기 편의점에 한 번 가봐야겠다면서 저와 같은 버스를 탔습니다. 집 근처까지 데려다준 오빠와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나중에 오빠가 그러기를, "그 시간에 편의점을 왜 갔겠냐?"

 

 

 

 

 오빠는 그 날 이후로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걸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습니다.

 

 

 

 

 

 

 

 

 

 

 

 

 

 

 

 다음편이 마지막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