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편중화된 지원, 성장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로 특징 지을 수 있는 박정희 정권의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은 분배의 불평등, 사회적 통합 저해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많은 문제들의 근원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 박헌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1. 왜 재벌 중심의 근대화 전략 택했나
전 세계의 절대적 부(富)가 증가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양적인 부의 증가를 넘어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개발의 핵심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이들은 또한 지속적인 진보를 위해 정치적 최적화와 더불어 인류의 성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개발에 대한 시각이 변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사례는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육군 보병 제2군사령부의 박정희 장군이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후 놀라운 경제성장을 달성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현재까지 그 원인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서민들의 삶에 대한 고려가 배제된 국가 주도적인 통제경제정책으로 인해 물질적 풍요와 동시에 많은 사회적 병폐를 야기했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
경제성장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발전국가론자들은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관료제가 동아시아의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 주장해왔다. 그 연구들은 발전 과정에서 어떻게 국가가 시장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어떠한 개입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분석했으나, 국가가 그렇게 특정한 방법으로 개입하게 된 원인이나 그러한 개입이 일으킨 사회적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기존의 연구는 국가 주도적인 발전 방식을 택한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차이들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서구를 따라잡아야 하는 도전 과제, 국제적 압력과 제약 및 유사한 역사적·문화적·제도적 유산 등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녔던 일본과 대만 그리고 한국의 근대화 전략, 즉 통제경제정책을 통한 근대화 전략이 왜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 명백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존 자이스만(John Zysman) 버클리대학 교수가 분류한 바와 같이 세 국가는 은행대출을 기반으로 한(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같은 종류의)금융 시스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구조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나타난다. 발전 과정에서 일본과 대만에서는 중소기업이 국내외적으로 큰 활약을 보여준 반면 한국의 경우는 적어도 980년대 초까지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눌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러한 차이는 국가의 금융정책을 분석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대만·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박정희 행정부는 정치적 권력을 이용해 소수의 선택된 집단이 국가가 제시한 발전 방향에 따라 대규모의 사업을 추진하게 했고, 이를 통해 증가된 물질적 이익의 대부분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부의 편중화를 심화시켰다.
그렇다면 왜 박정희 정권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중소기업의 침체라는 큰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재벌 중심의 근대화 전략을 택했을까? 박정희 장군의 독재정치 아래서 한국은 자율적인 국가와 합리적인 관료제로 특징화되는 발전국가모델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집단은 정부 관료가 아닌 소수의 핵심 권력자였다.
이러한 주장은 피터 에반스(Peter Evans) 버클리대학 교수의 착근적 국가자율성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근대화 전략의 역동적인 변화와 기득권 간의 정치적 결탁 및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지지 기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사적 자본과의 자율적인 관계만을 살펴보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통제경제정책이라는 배경에서 정치적 결탁의 본질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한국에서 결탁은 기득권 내의 치열한 정치적 경쟁의 산물이었다. 또한 올슨(Olson)의 주장과는 달리 이 시대의 재벌을 포함한 사적 자본가는 근대화 전략을 선택하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즉, 대기업의 정치적인 힘은 국가에 비해서 매우 미약했다.
박정희 장군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잡고 대통령의 직책을 차지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 또는 최소한 묵인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압력이 근대화 전략 선택의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군사정권이 채택한 통제경제정책은 권위·합법성과 대중적 지지를 얻고자 했던 소수의 권력자들간의 경쟁의 결과였으며, 당시 이익집단들은 정치적 지원과 충성의 대가로 국가로부터 여러 혜택을 얻었으나 그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힘이 없었다.
한 국가의 발전을 논할 때는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과 국가의 경쟁력뿐 아니라 사회적 통합·부의 분배와 인권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다양한 요소를 고려한 인간 중심적 발전의 목표는 단순히 물질적 풍요가 아닌 삶의 질의 향상이다. 아마티아 센(Amartya Sen) 하버드대학 교수는 오직 국민소득(GNP)의 증가나 산업화 정도로 측정된 기존의 발전 개념을 넘어 발전의 정의에 정치·경제·사회 영역에서의 의사표현의 자유 등 인간의 자유의 확장과 일반 시민의 역량 강화를 포함시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발전은 지나치게 경제적인 측면에 편중되어 있아. 한국의 통제경제정책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를 정당화했다.
한국의 강한 정부가 경제정책을 성공적으로 주도했다는 암스덴(Amsden)·존슨(Johnson)·웨이드(Wade)와 같은 발전국가론자들의 주장이 나름 일리가 있지만, 이러한 관점은 국가통제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한국의 통제경제정책이 형평성과 민주화·사회적 통합을 저해하고 이에 따라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사회 참여 기회를 박탈했다는 점은 경시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보다 공정하고 정확한 분석과 평가를 위해서는 물질적 부의 확대라는 긍정적인 측면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야기된 문제점들도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박정희 정권이 특정한 발전경로를 택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고 이와 더불어 그러한 통제경제정책이 우리 사회에 야기한 문제점들을 제시함으로써 국가 발전에 관한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2. 국유기업처럼 통제하다
통제경제정책을 채택한 국가가 경제발전을 계획하고 주도한 경로를 분석해보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비민주주의적인 절차를 따르고 특정 계층과 결탁한 방식의 통제경제주의를 ‘왜곡된 통제경제’라 정의한다. 이러한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은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대안은 아니었다. 사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자라온 박정희 대통령은 1930년대 일본의 극단적인 국수주의 성향의 군사장교들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취임 직후 그가 재벌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쿠데타 직후 12일만인 1981년 5월 28일 당대 재계를 주름 잡던 거의 모든 재벌 총수들을 기소했고, 다음 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들의 구속을 발표하며 부정축재 처리요강을 공포하고 부정축재처리위원회를 구성해 이들이 취한 부당이득을 모두 환수한다고 선언했다.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재벌들의 공식적인 서약 이후 6월 30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조사를 일단락 짓고 구속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5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은 국가의 가난을 근절하고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재산 전부를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 재산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삼성의 총자산인 150억 환 중 38퍼센트를 차지하는 자신의 재산 57억 환이라고 밝혔으며 이를 전부 기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병철 회장과 같은 재벌들은 정부의 통제경제정책으로 인한 발전의 결과물을 충분히 누리게 되었다. 정부의 이러한 급격한 태도 변화는 빠르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정권의 합법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정치적 긴박성 때문이었다. 중소기업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대기업이 희소한 자원이며 이들의 ‘증명된’ 기업인 능력 없이는 빠른 경제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따라 기소된 재벌들은 새로운 생산시설을 짓고 그들의 주식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조건으로 자유를 얻었으며 몰수된 자산도 그들이 소유한 상업은행주에 국한되었다. 이를 통해 대기업은 국가의 명령에 충성하게 되었으며, 재벌을 통해 정치자금을 확보하게 된 정부는 이들을 위해 금융 및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동시에 시장의 경쟁을 제한했다. 이러한 구조는 정부로부터 선정된 소수의 기업이 대규모의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보장했고 이는 급격한 성장으로 이어졌다.
⑴ 선택 가능했던 근대화 정책:자유시장 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한 근대화
시장 기반 근대화 전략은 박정의 정권이 선택할 수 있었던 하나의 대안이었으며 따라서 이를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신고전파 경제 이론에 따르면 공급자의 이기심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이 인간이 고안한 가장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며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1945년 이후 한국에 대해 직접적이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의 경우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최고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추구하는 자유시장의 원리가 확고하게 구축된 국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적 리더들에게 미국의 모형은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박정희 정권의 생존과 유지를 위해서는 빠르고 자생적인 산업 확장이 필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미래를 시장경제에 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알렉산더 거셴크론(Alexander Gerschenkron) 하버드대학 교수의 주장대로 역사적 후진성에서 벗어나 선진적 산업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신고전파 경제 이론이 제공하는 것 이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박정희 대통령의 과거 경험도 그가 신고전파 경제 이론을 선택하지 않게 한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1930년대 만주의 일본 군대에 복무하면서 얻은 경험은 그를 일본 군대의 국가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최단기간 안에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 주도적인 경제정책과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집권 초기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전략적인 산업과 특정 기업에게 희소한 자본을 집중시킴으로써 일본의 성공 경험을 따라잡고 싶어 했다.
셋째,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의 권력에 대한 사기업의 잠재적 영향력을 최소화하고자 했기 때문에 시장 기반 접근을 선호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적 권력을 독점했고 그럼으로써 그의 비합법적인 정권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었다. 금융과 산업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이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바탕으로 그는 기업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차별적인 신용 배분을 바탕으로 대부분 독과점 형태였던 대기업들이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부채를 통한 자금 조달을 선호했는데, 이는 빠른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동시에 정부가 산업 구조의 형태와 방향을 결정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높은 레버리지, 즉 차입자본을 통해 수익증대를 꾀할 수 있다는 것과 이에 따른 파산 위험의 증가는 많은 기업들이 더욱 정부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대기업들의 실패와 실업은 정부의 안정성 유지에 치명적이었으므로 정부는 어떤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에서 대기업의 소유주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넷째, 극단적 반공주의를 집권 명분으로 내세웠던 박정희 대통령은 신고전주의가 지나친 비용을 야기한다고 판단했다. 6·25남북전쟁에 대한 기억과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으로부터 계속되는 위협은 국가안보에 대한 지도층의 관심을 극대화시켰다. 국가의 안보를 위해 정부는 철·시멘트·조선·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에 야심차게 투자했다. 이러한 국가의 목표는 자발적인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서는 달성될 수 없었다.
⑵ 국유기업을 통한 근대화
국가 주도 발전 패러다임에도 다양한 정책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대만과 같이 국유기업을 통해서 빠른 산업화를 달성할 수도 있다. 한국의 최초의 헌법은 금융·전기·통신과 교통 산업의 국유화를 명문화했으며 ‘공공복지’와 관계된 사업(제87조)이나 ‘국민의 삶 또는 국가 안보의 긴박한 필요’와 관계된 사업(제88조)의 국유화에 대해서도 중도 변경 가능 조항을 포함했다. 그러나 6·25남북전쟁 이후 악화되는 반공산주의정서가 팽배해짐에 따라 1954년 제88조는 수정되어 ‘국가의 긴급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법에 명시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국유화를 금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회주의 경제에 대해 개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국가의 발전 촉진과 국민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생산에 대한 사적 소유는 무조건적으로 지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국유기업의 부패와 비효율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재임 기간 국유기업은 비약적인 성과를 보여주었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제조업에 종사하는 국유기업의 실제 부가가치는 7배가량 증가해 총투자의 30퍼센트를 차지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국유기업은 초과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이들의 경쟁력은 다른 나라의 국유기업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층과 사회에 만연된 반사회주의적인 정서로 인해 대만식의 국유기업 중심 산업화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국제적인 제약도 국유기업 중심 산업화를 선택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사적 소유를 지배적인 생산방식으로 인정하고 이를 촉진함으로써 박정희 행정부는 미국과의 대립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 쿠데타 직후, 미국은 박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당시 한국주둔 UN군 사령부의 카터 매그루더(Carter M. Magruder) 장군의 공표는 미국의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매그루더 장군은 국제평화유지군 사령관으로서, 장면 수상이 이끄는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하기 위한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도록 명령했다. 미국의 반대는 새로운 군사정권에게 큰 부담이었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작은 국가에서 더군다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악화된 미국과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박 대통령은 국유기업 중심의 성장을 제한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국유기업이 아니면서도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국유기업과 비슷한 면모를 보엿다. 박정희에게 이것은 반공산주의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재벌기업을 확실히 통제하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⑶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 근대화 모델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전략은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 근대화를 의식적으로 모방했다. 군사통치에 대한 선호와 거대 사적 자본에 대한 혐오, 그리고 빠른 성장을 달성해야 할 필요성 등이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의 불균형적 산업화 모델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방향과 내용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일본의 압축적인 산업화를 모델로 삼았다. 신고전경제학파의 처방을 외면한 박정희 행정부는 초기부터 특정 산업에 대해 금융 및 다른 자원들을 지원해줌으로써 이들이 비교우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했던 유창순은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모태가 된 1950년대 계발계획 설계에 참여할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크게 보면 당시 두 가지 입장이 있었다. 한쪽은 균형 성장을 원했고 다른 쪽은 산업화를 중시하고 농업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불균형 성장을 선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를 위한 불균형 성장을 택했다. 그것은 일본이 메이지시대에 택한 방식이었다. 일본은 국가 예산으로 공장을 지었고 그에 따른 이익이 후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우리는 이 모델을 그대로 따랐다.”
로버트 캐슬리(Robert Castly)와 비벡 치버(Vivek Chibber)가 주장한 것과 같이, 전후 일본이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에 대해 자금·기술·시장·시장 네트워크와 성공적인 전례를 제공했다는 점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치버의 연구에서 일본이 미국 수출 시장으로의 연결 통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지나친 비약이다. 첫째, 그는 1965년 한·일 정상화 조약을 통해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한국 자본가들에 관한 한국 정부의 재량적인 권한을 과대평가했고 둘째, 한국의 재벌들이 수출 중심 산업화 전략을 도입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할 만큼 영향력이 컸다고 오판했다.
치버는 최종 투자에 대한 조정을 통해 정부에 맞서는 자본가들의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과 일본의 자본가들이 연계되었으며 이에 따른 정상화 조약 및 수출 중심 산업화가 한국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박정희 행정부가 재벌들과 공생관계를 유지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관계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으며 거대한 무리의 기업 계층이 존재했다는 치버의 반복되는 주장은 지나친 과장이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1963년에 한국에는 15개의 상장기업이 있었는데 그 당시 한국에는 건전한 재정 상태, 우수한 기술력, 또는 높은 수익성을 지닌 기업이 드물었다.
강하고 추진력 있는 소수의 기업인들이 당시의 소위 대기업을 운영했으나 그들은 1960년대 초반에는 조직력과 응집력이 약해 국가에 대항할 만한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렇기때문에 국가가 임의적인 통화개혁이나 민간 상업은행의 국유화 정책 등을 쉽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0년에 이르러 미국은 한일관계 정상화와 일본과 연결된 수출 중심 산업화를 적극 지지했다. 1950년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일본을 방파제 삼아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의 공산주의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데 집중되었던 반면, 1960년대에 이르러 발전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미국은 한국 정부에게 수출 중심 산업화를 이룰 수 있도록 예산 적자를 줄이기 위한 세금 개혁을 단행하고, 통화 가치를 50퍼센트 평가절하할 것 등의 시장개혁을 종용했다. 미국은 또한 일본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 박 대통령이 실패한다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일본을 협박하며, 일본이 한일관계 정상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미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일본식 수출 중심 산업화를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일본의 수상이었던 이케다 하야토 역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두 국가 간의 정상화는 시간문제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김종필과 일본의 외무상 오히라 마사요시는 1962년 조약의 내용에 대해 기초적인 합의를 했다. 조약은 당초 1964년에 체결될 계획이었으나 비밀회담에 대한 정보가 언론에 누설되어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함에 따라 미뤄졌다. 하지만 이듬해 박정희 정권은 정상화 조약의 체결을 강행했다.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도 일본의 자본가들은 박 대통령이 일본식 수출 중심 산업화를 모방하는 것을 기회로 활용했다. 1963년 한국의 대일 수입액은 1억 6천 2백만 달러를 기록해 이승만 대통령 집권시와 비교해 4배 정도 상승했고, 1962년에서 1964년 사이 일본의 대(對) 한국 무역흑자는 3억 달러에 육박했다. 한국의 수출 역시 같은 기간 무려 47.5퍼센트나 증가해 전례 없는 성장을 기록했다. 치버 역시 당시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를 생각하면 역시 박정희 정권의 용인과 전격적인 지원 없이는 1962년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투자가 그처럼 급격히 늘어날 수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3.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이 치른 비용
통제경제정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이며 이는 민주주의적 가치와도 어느 정도는 양립할 수 있다. 전후 일본의 국가 시스템에서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으며, 1960년대의 박정희 정권 역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건강한 시스템을 한국에 구축하는 것을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통제경제정책이 그 도입 초기 단계에서는 원활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나 민주주의적인 견제 및 균형과 더불어 민주적인 가치의 제도화가 부재한 상황에서 통제경제는 병들게 마련이다. 엘리트 집단의 결탁과 부패, 불평등과 노동에 대한 억압은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에 따른 몇 가지 병리적 증상들로 한국 사회에 여전히 만연해 있다.
한국의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의 체제화는 이렇게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 시작되었으며 이어진 행정부들에서 심각한 부작용들에 대한 약간의 개선이 이루어졌으나 그 근본적인 구조와 정치 유산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책적 선택 범위를 제한하고 사회 시스템의 기능을 저해시키며 시민들의 사회 참여를 제한하고 있다. 예컨대. 소수의 재벌들에 의한 승자 독식 체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비민주적인 통제경제정책은 인간 중심적인 발전과 양립할 수 없는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특정 경제집단에 편중된 지원, 성장만능주의와 전투적인 성장 속도라는 네 가지 핵심적인 특성을 지닌다.
⑴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상명하달식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은 수직적 정치 구조, 독점적·중앙집권적 정책 결정, 제도화된 균형과 견제의 부재 및 아래로부터의 정책 피드백을 좌절시키는 일방적인 권력의 행사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수직적 구조에서의 정책 결정은 통치 계층에 속한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행해져 다수의 의사가 전달되고 반영되기 어렵다.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체제의 국가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 향상에 대한 고려는 상대적으로 간과하기 쉽다. 경제성장률 지표 상승에만 초점을 맞춘 발전 방식은 장기적으로 볼 때 사회적인 역기능을 야기하며 이는 향후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
한국의 권력은 청와대로 상징되는 중앙정부에 여전히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와 더불어 계급주의적인 유교문화, 일본의 식민통치와 이승만 대통령의 1인 독재의 유산이기도 하다. 권력을 잡은 집단을 견제할 사회적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했다. 발전국가론자들의 주장과도 달리 공무원들은 정책적 결정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권력을 잡은 소수의 핵심 세력은 자신의 정치적 필요와 이해에 부합되는 관료들의 조언만을 귀담아 전략을 수립 또는 수정했다. 196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전략은 엄격하게 수직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군사적인 시스템을 통해 정책을 지시하고 통제했다.
통제경제정책을 수행하는 국가의 지도자는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수용성을 위해 대중적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군사독재정부는 그 권력을 획득한 방법상의 원죄 때문에 늘 비합법성과 대중적 반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근대화 전략 수행시에 아래로부터의 의견이 약간은 반영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지만, 실제로 일반 시민들의 사회적 참여는 매우 제한되었다. 전략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정권 세력 간의 경쟁적인 연합과 승리연합의 통치권 및 권위 유지라는 과제였다.
한국의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정권은 종종 극단적이고 작위적이었다, 예컨대, 1961년 한국 정부는 1957년에 사유화된 민간은행을 국유화했다가 1980년에 다시 사유화햇다. 1972년에는 모든 사채를 사실상 탕감해줌으로써 가장 채무가 많은 재벌들에게 가장 큰 수혜를 안겨주기도 했다.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은 군사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근로자들을 산업 역군으로 육성하며 발전을 꾀했다. 급속한 산업 성장 당시 인기 있었던 책 중 하나는『손자병법(孫子兵法)』의 개정판으로 이 책에서 전쟁은 군사가 아닌 경제 전쟁으로, 세계의 정복은 식민지가 아닌 시장 점유율 확보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묘사되었다. 이러한 체제 아래에서는 목표를 이루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시되었으며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명하달식 통치방식은 대다수의 국민이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며 근대화를 자생적으로 추진할 능력이 부족했던 한국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는 꽤 효과적이었다. 국가는 강력한 의지와 통제를 통해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경제적 시스템이 보다 복잡해지고 경제성장과 더불어 시민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정치적 역량이 강화되면서, 상명하달식 통치 방식의 효과성은 약화되고 유연한 혁신과 변화의 걸림돌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배체제는 한국 경제에 경제에 경직과 불안정을 야기했고, 소수 재벌의 문어발식 팽창과 더불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심각한 불균형은 1997년 외환위기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⑵ 편중화된 지원
편중화된 지원은 적은 수의 대기업들을 국가의 발전 명령을 수행하는 대리자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독과점 보장이나 자금 융자에 대한 낮은 이자율 등의 특권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곡된 통제 경제정책을 운용하는 국가에서 정치적 권력을 독점한 집단은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고 정치적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해 정책결정 과정을 불투명하게 하고자 하는 충분한 동기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 정부와 대기업 간의 정치적인 결탁은 부패를 야기하게 마련이다. 이 같은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정부 및 기업의 공공책임 의식이 결여된 상황에서 독립적인 외부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을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정책결정과 실행 과정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실주의와 정경유착은 중앙정부에 견제 없는 권력이 집중된 관계로 파생된 관행이었으나,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박정희 행정부로부터 소수의 재벌이 선정되어 편파적으로 지원을 받은 결과 더욱 심해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성장의 대리인으로 소수의 재벌을 선정해 지원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는 다수의 중소기업인들보다 소수의 거대 자본가들을 통제하는 것이 더 용이하다고 판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실제로는 반자본주의자로 아마도 대만과 같이 국유기업을 통해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미국에게 본인이 반공산주의노선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을 쓸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재벌을 선택했다. 둘째, 소수의 재벌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다수의 중소기업을 통하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훨씬 수월했다.
한국은 오늘날까지 정경유착에 따른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2000년 세계은행과 IMF 주관으로 매년 열리는 정기회의 때 당시 세계은행의 총재였던 제임스 울펜슨(James Wolfensohn)은 김대중 대통령이 부패와 정실주의와 싸우기 위해 당선되었으나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문제는 경제성장을 통해 잠시 표면적으로 가릴 수는 있으나 또 다른 위기의 씨앗을 키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부패와 정실주의로부터 발생한 증상들에 대한 지나친 집중은 그것을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인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에 대해 경시할 위험이 있다.
한국의 정경유착은 기적적인 경제성장에 기여했는지 모른다. 1997년 당시 충격적인 경제 붕괴와 국민들의 정치적 불신을 야기했고 정부 개혁의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왔다. 1980년대 초반부터 공정거래법과 정책적 도구를 통해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분야에서 재벌들의 판매와 부가가치는 각각 26퍼센트와 27퍼센트를 차지했다. 1990년 한국의 독과점 역시 생산제품 기준 81퍼센트와 매출액 기준 64퍼센트의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권력계층과 재벌들의 정치경제적 결탁은 독과점 구조를 개혁하는 데 방해물이 되었다.
한국의 정경유착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물은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심각한 격차이다. 예를 들어 1986년 한국의 중소기업은 전체 제조업 수출의 35퍼센트를 차지한 반면 일본과 중국의 경우 60퍼센트 이상의 제품이 중소기업에 의해 수출되었다. 중소기업의 후진성은 과다한 영세기업의 수와 건실한 중견기업의 부족에도 반영되었다. 1995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정규직 종업원이 5명~19명 사이인 영세기업의 경우 전체 기업의 72퍼센트나 차지한 반면, 종업원이 50명~299명 사이인 중기업은 고작 9퍼센트를 차지했다. 1990년 현재에도 종업원이 1명~19명 사이인 제조업체는 전체의 82퍼센트를 차지한 반면 이들 기업의 총매출은 전체 매출의 10퍼센트도 미치지 못했다. 1993년 현재 한국의 중소기업 중 30퍼센트만이 독립적이었으며 나머지 70퍼센트가량의 기업들이 대기업에 의존하며 그들에게 부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⑶ 성장만능주의
경제성장은 사회적 고통을 수반하며 특히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매우 크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선도주자로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훨씬 천천히 변화한 영국에서도 경제성장에 따른 심각한 피해들이 발생했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18세기 산업혁명의 중심에는 생산수단의 기적적인 발전이 있었고 이는 일반 시민들의 삶의 치명적인 혼란을 수반하였다”고 언급했다. 폴라니가 강조한 바는 비록 근대화와 경제적인 발전이 궁극적으로 사회에 유익할 경우에도 그 과정 자체는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을 완화하려는 정부의 적절한 개입 없이는 근대화가 제대로 지탱되기 어렵다.
성장을 최고로 여기는 성장만능주의는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의 세번째 특성이다. 성장만능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GNP, 수출과 물질적인 부에 최우선적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에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결과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성장에만 집착하는 사회는 이에 따른 사회적인 병폐를 당연하게 지불해야 할 비용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러한 성장에 대한 집착은 극심한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회에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의 기초적인 필요조차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경제성장과 물질적 반영에 대한 단순한 비전은 강력한 자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획일화된 목표에 따른 이익은 소수의 집단에만 집중되며 상대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러한 성장만능주의가 사회에 고착화되고 제도화되면 사회 통합과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은 점점 약화된다.
양적인 결과만을 본다면 한국의 경제발전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한 의지력과 엄청난 노력을 통해 한국을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것은 20세기의 중반 가난으로 고통 받던 한국에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경제적 진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장만을 중시했던 성장만능주의로 인해 야기되었던 엄청난 사회적 부작용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공장 근로자와 영세기업 운영자 등 많은 사회적 약자들은 성장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했다. 근로자들은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사고의 위험을 감수하며 초과근무를 해야 했고, 특히 여성 근로자들은 고용과 급여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아 이중고 또는 삼중고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국가는 대기업 위주의 금융정책을 실행하여 중소기업의 피해를 가중시켰다.
경제성장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은 그의 초반의 기록들에서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다. 자신의 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인간이 정치·사회나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기 이전에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경제의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는 다른 부분의 개혁 역시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경제의 재건축이 없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나 독립의 달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는 바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모든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로 간주했다. 그는 군사적인 캠페인을 통해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촉구했다. 한국을 강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지녔던 박 대통령은 한국의 전통은 후진적이고 경제성장의 방해 요소이며 따라서 싸워야 할 대상이라고 간주했다. 산업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싸워서 이겨야 한다. 우리가 진다는 것의 의미는 파괴이며 영원한 종말이다. 이는 5월 16일 군사혁명이 국가적 혁명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며 또한 국가혁명이 산업혁명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박 대통령은 빠른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비용은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높은 장벽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적인 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며 우리는 10년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 전쟁에서 모두 앞에 나와 항상 싸울 필요는 없다. 뒤에서 지원하는 것이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우리를 뒤에서 뒷받침해주는 지원군 역시 동일하게 헌신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시도는 위대하다. 우리는 피곤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망칠 수 없다. 첫 번째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른 사람들의 불편은 엄청날 것이며 우리의 도전 과제는 우리를 압도할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젊은 청년이며 젊어서는 사서 고생할 수 있는 것이다. 젊은 한국은 고통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많은 고통을 잘 견뎌냈다. 우리는 계속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자발적으로 좀 더 고통을 짐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경제성장이라는 박정희 정권의 단 하나의 목표는 경제개발의 초기 단계에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36년간의 일본의 식민통치와 6·25동란 이후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빈곤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갈망은 절대다수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였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에 대한 생생한 기억으로 인해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비용과 엄청난 희생을 묵인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빈곤으로부터 점차 벗어나면서 비인간적이고 군사적인 성장 방식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으며, 특히 성장에 따른 이익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계층 간 갈등과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면서 사람들의 불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성장에 대한 집착은 줄어들지 않아 여전히 이로부터 파생된 많은 문제들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 있게 되었다.
⑷ 전투적인 성장 속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후발 국가들의 경우 속도는 주요한 특징으로 인식되어왔다. 영국이 2백년 이상 걸려 이룩한 결과를 한국은 고작 몇 십년만에 달성했다.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물질적 부의 증가를 달성한 사실은 인정되어야 하나 동시에 급격한 성장에 따른 어두운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전투적인 성장 속도는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의 네번째 특징이다.
폴라니는 서민들의 삶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속도는 가능하다면 늦춰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급격한 산업화는 사람들의 삶에 더 큰 충분한 시간을 담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에서 배제되었다. 빨리 경제성장을 달성하고자 하는 집착은 기존의 문화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재빨리 변경할 것을 강요한다. 이것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 자유시장이 자생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위험한 믿음에 기인한다. 시장은 자연적으로 독점이나 과점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시장의 주도권은 인간이 아닌 돈이 쥐고 있다. 따라서 국가는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보호하고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러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적 비용을 무시한 채 재벌과 결탁하여 급격한 성장만을 추구했다.
한국의 성장 속도에 대한 집착은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통치 초기 단계에 내렸던 의사결정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비민주적이고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박 대통령은 빠른 시간 안에 경제성장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계속 불안한 입장에 서 있거나 권력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그는 자본 및 기타 자원을 몇 개의 선택된 기업에 집중하는 강압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다시 말해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를 억압하고 소수의 대기업이 대량생산 능력을 획득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수출 중심적인 산업정책을 추진하여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렇게 국가는 한 사람의 권력 유지를 위한 매개체가 되어 이를 위한 경제정책을 추진했고, 결과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가 이익을 독점하는 시스템이 유지되어왔다.
전투적인 속력으로 성장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권력자들은 사회적 통합과 더불어 중소기업에 대해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지원을 간과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중소기업을 경시하는 것은 매우 비생산적이다. 주지하는 대로, 수출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위해 대량생산 방식을 집중적으로 지원한 한국의 재벌 중심 근대화 정책은 급변하는 세계시장에 대응하기에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 한국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대량생산 방식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저가의 상품들은 물론 고도의 기술을 이용한 일본의 고가의 제품들과도 경쟁하기 위해서는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벗어나 지식집약적 산업을 육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소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포드주의 이후 기술의 발달하고 소비자의 기호가 다양해짐에 따라 중소기업의 경제적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을 인식한 피오리(Piore)와 세이블(Sable)은 이탈리아 북부나 미국의 실리콘밸리의 중소기업 단지를 예로 들며 대량생산 방식이 아닌 유연한 생산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로리다(Florida)와 케니(Kenny) 역시 피오리와 세이블과 마찬가지로 중소기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강조한다. 단,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생산체제는 파격적인 혁신을 창조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제품과 제조 과정의 작지만 지속적인 혁신을 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플로리다와 케니는 오히려 일본의 도요타 생산체제와 같은 장기적이고 미래 중심적인 중소기업 부품공급자 네트워크가 일본의 지속적인 제품 향상의 원동력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정부 역시 신용을 기반으로 한 하청업체 간의 네트워크가 고품질의 맞춤화된 부품과 완성품 생산을 가능케 해 일본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비록 생산방식의 변화와 효과적인 생산 시스템 형성을 위한 중소기업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오늘날 중소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특히 경제가 발전할수록 더욱 중요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중소 하청기업들의 상황은 계속해서 매우 열악한 실정이다. 1985년의 경우를 예로 들면, 한국은 완제품 1단위를 생산하기 위해 28퍼센트의 부품을 수입한 반면, 일본의 경우 7퍼센트의 부품만을 외국에서 공급받았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증거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와 재벌들 간의 정경유착이다. 이는 성장에 따른 이익의 분배를 왜곡시켰으며 부패를 확산하고 시민들의 냉소와 불신을 확산시켜 사회적 통합을 저해했다. 정경유착형 부정부패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재직 시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었으며, 발각 당시 온 국민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망신이었다.
기득권의 결탁에 따른 또 하나의 부작용은 시간이 갈수록 현저하게 증가된 부의 불평등이다. 1988년 현재 상위 1퍼센트가 전체 토지의 무려 44퍼센트를 소유했고 상위 10퍼센트가 77퍼센트를 소유했다. 그런데 토지 가치는 1974년에서 1989년 사이에 국내총생산의 증가 속도보다 3배 정도 빨리 증가했으며 어떤 해에는 이에 따른 자본 이득이 전체 국내총생산보다 컸다.
부의 불평등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적 박탈감에 비해 더 크게 인식되며 이는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1994년 한국은 지존파 사건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해온 이들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으며 검거되기 직전 서울에 있는 백화점의 주요 고객들 150명을 대상을 한 대규모 살인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물론 극단적이긴 하나 이 사건은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자들 간의 간극이 너무 커져버린 한국 사회와 국가에 대한 깊은 불만족과 분노가 표출된 사건이라고 하겠다.
기득권층의 결탁과 불평등한 분배 구조,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이 만연한 사회에서 오랜 동안 억압받아온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군사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고 이는 지지율의 지속적 하락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군사정권의 마지막 당선자인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 1980년대의 빠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36퍼센트의 지지율로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대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세계화와 시장주의를 표방하며 전투적인 성장 속도를 유지하려 했다. 시장자유화에 대한 국가의 집착에 가까운 태도는 과거 박정희 정권 이후 한국 정부가 계속 유지한 방식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 세계화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정부의 강압적인 태도는 급격한 변화로 야기되는 사회적 비용을 정부가 여전히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은 장거리를 달리는 운동선수의 상황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장거리를 달리는 선수가 이기기 위해서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어떤 선수는 승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몸이 상하는 것을 무시하고 달릴 수 있다. 또한 신체의 어느 한 부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도 얼마간의 효과를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매우 해롭다. 결과적으로 육체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달리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장거리를 달릴 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페이스다. 최고의 속력으로 달리려고 하는 선수는 결국 장거리 경주를 잘 완주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4. 인간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게 근본 원인
국가의 통제경제정책은 무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불균형적 산업화 추진 주체에 대한 발전국가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아래서 한국의 전문적인 관료들은 국가의 산업화 전략과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차별과 관련하여 매우 제한적인 권한밖에 행사할 수 없었다. 국가의 정치화와 국가와 재벌 간의 결탁은 한국의 비민주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통제경제정책의 산물이었고 이는 1997년의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벌 중심의 불균형적 산업화를 택했던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인 생존을 위해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사회와 경제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신고전파 시장 모델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국유기업 중심 국가주의 모델 역시 미국의 반감을 고려하여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박 대통령의 전략적 선택은 1930년대 일본 메이지 유신의 근대화 방식이었다. 이 전략은 박 대통령의 의도대로 빠른 성장을 가져다주었으나 한편으로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편중화된 지원, 성장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로 특징 지울 수 있는 박정희 행정부의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은 분배의 불평등, 사회 통합 저해 등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해 있는 많은 문제들의 근원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비록 여러 외적·내적 요인들에 의해 박정희 행정부의 근대화 전략이 결정되었으나, 이것이 당시에 주어진 유일한 대안은 아니었다. 국가주의 모델 안에서도 다른 방식이 선택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다. 통치권력을 행사했던 국가의 권력자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들의 이득에 맞는 특정 전략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것은 국민들을 위한 최적의 전략이 아니었으며 권위·합법성과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정권세력 집단 간의 경쟁의 산물이었다. 즉, 당시 선택된 정책은 유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대안 중의 하나였으며 선택 과정에서 경제적인 요인보다 정치적인 요인이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
경제성장을 유일한 목표로 달려온 한국의 군사적 근대화 전략은 인간의 삶의 가치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성장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이를 달성하기 위해 소수의 재벌들에 편중되었던 정부 차원의 지원은 결국 외환위기 촉발의 주요 원인이 되었을뿐 아니라 정치에 대한 국민의 냉소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선택한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의사전달 방식은 인간 중심적 발전과 양립될 수 없는 개념이며 근본적으로 상호 배타적이다. 한국의 경우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은 약자를 억압하고 인간 중심적 발전을 저해해왔다. 인간에 중심을 둔 발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반면, 국가가 일방적으로 이끄는 경제발전은 더 큰 물질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면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을 합리화하고 용인한다. 이는 단기적으로 수치화된 발전 지표를 개선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의 질을 악화시키며 장기적으로 볼 때 치유하기 힘든 사회적 병폐를 야기한다.
이제라도 한국은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이 야기한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치유하고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 통합을 목표로 하는 인간 중심적 발전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러 선택 대안들 중에서 정치적·경제적 이익에만 초점을 맞춘 대안이 아니라 국민의 자유와 인간 존엄성을 확대하는 대안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은 재벌 중심의 왜곡된 구조를 만들었다.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편중화된 지원, 성장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로 특징 지을 수 있는 박정희 정권의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은 분배의 불평등, 사회적 통합 저해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많은 문제들의 근원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 박헌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1. 왜 재벌 중심의 근대화 전략 택했나
전 세계의 절대적 부(富)가 증가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양적인 부의 증가를 넘어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개발의 핵심 과제로 여기게 되었다. 이들은 또한 지속적인 진보를 위해 정치적 최적화와 더불어 인류의 성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개발에 대한 시각이 변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사례는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육군 보병 제2군사령부의 박정희 장군이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후 놀라운 경제성장을 달성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현재까지 그 원인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서민들의 삶에 대한 고려가 배제된 국가 주도적인 통제경제정책으로 인해 물질적 풍요와 동시에 많은 사회적 병폐를 야기했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
경제성장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발전국가론자들은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관료제가 동아시아의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 주장해왔다. 그 연구들은 발전 과정에서 어떻게 국가가 시장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어떠한 개입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분석했으나, 국가가 그렇게 특정한 방법으로 개입하게 된 원인이나 그러한 개입이 일으킨 사회적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기존의 연구는 국가 주도적인 발전 방식을 택한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차이들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서구를 따라잡아야 하는 도전 과제, 국제적 압력과 제약 및 유사한 역사적·문화적·제도적 유산 등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녔던 일본과 대만 그리고 한국의 근대화 전략, 즉 통제경제정책을 통한 근대화 전략이 왜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 명백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존 자이스만(John Zysman) 버클리대학 교수가 분류한 바와 같이 세 국가는 은행대출을 기반으로 한(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같은 종류의)금융 시스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구조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나타난다. 발전 과정에서 일본과 대만에서는 중소기업이 국내외적으로 큰 활약을 보여준 반면 한국의 경우는 적어도 980년대 초까지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눌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러한 차이는 국가의 금융정책을 분석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대만·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박정희 행정부는 정치적 권력을 이용해 소수의 선택된 집단이 국가가 제시한 발전 방향에 따라 대규모의 사업을 추진하게 했고, 이를 통해 증가된 물질적 이익의 대부분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부의 편중화를 심화시켰다.
그렇다면 왜 박정희 정권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중소기업의 침체라는 큰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재벌 중심의 근대화 전략을 택했을까? 박정희 장군의 독재정치 아래서 한국은 자율적인 국가와 합리적인 관료제로 특징화되는 발전국가모델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집단은 정부 관료가 아닌 소수의 핵심 권력자였다.
이러한 주장은 피터 에반스(Peter Evans) 버클리대학 교수의 착근적 국가자율성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근대화 전략의 역동적인 변화와 기득권 간의 정치적 결탁 및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지지 기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사적 자본과의 자율적인 관계만을 살펴보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통제경제정책이라는 배경에서 정치적 결탁의 본질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한국에서 결탁은 기득권 내의 치열한 정치적 경쟁의 산물이었다. 또한 올슨(Olson)의 주장과는 달리 이 시대의 재벌을 포함한 사적 자본가는 근대화 전략을 선택하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즉, 대기업의 정치적인 힘은 국가에 비해서 매우 미약했다.
박정희 장군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을 잡고 대통령의 직책을 차지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 또는 최소한 묵인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압력이 근대화 전략 선택의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군사정권이 채택한 통제경제정책은 권위·합법성과 대중적 지지를 얻고자 했던 소수의 권력자들간의 경쟁의 결과였으며, 당시 이익집단들은 정치적 지원과 충성의 대가로 국가로부터 여러 혜택을 얻었으나 그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힘이 없었다.
한 국가의 발전을 논할 때는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과 국가의 경쟁력뿐 아니라 사회적 통합·부의 분배와 인권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다양한 요소를 고려한 인간 중심적 발전의 목표는 단순히 물질적 풍요가 아닌 삶의 질의 향상이다. 아마티아 센(Amartya Sen) 하버드대학 교수는 오직 국민소득(GNP)의 증가나 산업화 정도로 측정된 기존의 발전 개념을 넘어 발전의 정의에 정치·경제·사회 영역에서의 의사표현의 자유 등 인간의 자유의 확장과 일반 시민의 역량 강화를 포함시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발전은 지나치게 경제적인 측면에 편중되어 있아. 한국의 통제경제정책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를 정당화했다.
한국의 강한 정부가 경제정책을 성공적으로 주도했다는 암스덴(Amsden)·존슨(Johnson)·웨이드(Wade)와 같은 발전국가론자들의 주장이 나름 일리가 있지만, 이러한 관점은 국가통제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한국의 통제경제정책이 형평성과 민주화·사회적 통합을 저해하고 이에 따라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사회 참여 기회를 박탈했다는 점은 경시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보다 공정하고 정확한 분석과 평가를 위해서는 물질적 부의 확대라는 긍정적인 측면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야기된 문제점들도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박정희 정권이 특정한 발전경로를 택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고 이와 더불어 그러한 통제경제정책이 우리 사회에 야기한 문제점들을 제시함으로써 국가 발전에 관한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2. 국유기업처럼 통제하다
통제경제정책을 채택한 국가가 경제발전을 계획하고 주도한 경로를 분석해보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비민주주의적인 절차를 따르고 특정 계층과 결탁한 방식의 통제경제주의를 ‘왜곡된 통제경제’라 정의한다. 이러한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은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대안은 아니었다. 사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자라온 박정희 대통령은 1930년대 일본의 극단적인 국수주의 성향의 군사장교들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취임 직후 그가 재벌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쿠데타 직후 12일만인 1981년 5월 28일 당대 재계를 주름 잡던 거의 모든 재벌 총수들을 기소했고, 다음 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들의 구속을 발표하며 부정축재 처리요강을 공포하고 부정축재처리위원회를 구성해 이들이 취한 부당이득을 모두 환수한다고 선언했다.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재벌들의 공식적인 서약 이후 6월 30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조사를 일단락 짓고 구속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5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은 국가의 가난을 근절하고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재산 전부를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 재산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삼성의 총자산인 150억 환 중 38퍼센트를 차지하는 자신의 재산 57억 환이라고 밝혔으며 이를 전부 기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병철 회장과 같은 재벌들은 정부의 통제경제정책으로 인한 발전의 결과물을 충분히 누리게 되었다. 정부의 이러한 급격한 태도 변화는 빠르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정권의 합법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정치적 긴박성 때문이었다. 중소기업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대기업이 희소한 자원이며 이들의 ‘증명된’ 기업인 능력 없이는 빠른 경제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따라 기소된 재벌들은 새로운 생산시설을 짓고 그들의 주식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조건으로 자유를 얻었으며 몰수된 자산도 그들이 소유한 상업은행주에 국한되었다. 이를 통해 대기업은 국가의 명령에 충성하게 되었으며, 재벌을 통해 정치자금을 확보하게 된 정부는 이들을 위해 금융 및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동시에 시장의 경쟁을 제한했다. 이러한 구조는 정부로부터 선정된 소수의 기업이 대규모의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보장했고 이는 급격한 성장으로 이어졌다.
⑴ 선택 가능했던 근대화 정책:자유시장 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한 근대화
시장 기반 근대화 전략은 박정의 정권이 선택할 수 있었던 하나의 대안이었으며 따라서 이를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신고전파 경제 이론에 따르면 공급자의 이기심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이 인간이 고안한 가장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며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1945년 이후 한국에 대해 직접적이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의 경우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최고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추구하는 자유시장의 원리가 확고하게 구축된 국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적 리더들에게 미국의 모형은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박정희 정권의 생존과 유지를 위해서는 빠르고 자생적인 산업 확장이 필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정치적 미래를 시장경제에 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알렉산더 거셴크론(Alexander Gerschenkron) 하버드대학 교수의 주장대로 역사적 후진성에서 벗어나 선진적 산업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신고전파 경제 이론이 제공하는 것 이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박정희 대통령의 과거 경험도 그가 신고전파 경제 이론을 선택하지 않게 한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1930년대 만주의 일본 군대에 복무하면서 얻은 경험은 그를 일본 군대의 국가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은 최단기간 안에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 주도적인 경제정책과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집권 초기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전략적인 산업과 특정 기업에게 희소한 자본을 집중시킴으로써 일본의 성공 경험을 따라잡고 싶어 했다.
셋째,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의 권력에 대한 사기업의 잠재적 영향력을 최소화하고자 했기 때문에 시장 기반 접근을 선호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적 권력을 독점했고 그럼으로써 그의 비합법적인 정권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었다. 금융과 산업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이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바탕으로 그는 기업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차별적인 신용 배분을 바탕으로 대부분 독과점 형태였던 대기업들이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부채를 통한 자금 조달을 선호했는데, 이는 빠른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동시에 정부가 산업 구조의 형태와 방향을 결정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높은 레버리지, 즉 차입자본을 통해 수익증대를 꾀할 수 있다는 것과 이에 따른 파산 위험의 증가는 많은 기업들이 더욱 정부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대기업들의 실패와 실업은 정부의 안정성 유지에 치명적이었으므로 정부는 어떤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에서 대기업의 소유주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넷째, 극단적 반공주의를 집권 명분으로 내세웠던 박정희 대통령은 신고전주의가 지나친 비용을 야기한다고 판단했다. 6·25남북전쟁에 대한 기억과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으로부터 계속되는 위협은 국가안보에 대한 지도층의 관심을 극대화시켰다. 국가의 안보를 위해 정부는 철·시멘트·조선·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에 야심차게 투자했다. 이러한 국가의 목표는 자발적인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서는 달성될 수 없었다.
⑵ 국유기업을 통한 근대화
국가 주도 발전 패러다임에도 다양한 정책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대만과 같이 국유기업을 통해서 빠른 산업화를 달성할 수도 있다. 한국의 최초의 헌법은 금융·전기·통신과 교통 산업의 국유화를 명문화했으며 ‘공공복지’와 관계된 사업(제87조)이나 ‘국민의 삶 또는 국가 안보의 긴박한 필요’와 관계된 사업(제88조)의 국유화에 대해서도 중도 변경 가능 조항을 포함했다. 그러나 6·25남북전쟁 이후 악화되는 반공산주의정서가 팽배해짐에 따라 1954년 제88조는 수정되어 ‘국가의 긴급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법에 명시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국유화를 금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회주의 경제에 대해 개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국가의 발전 촉진과 국민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생산에 대한 사적 소유는 무조건적으로 지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국유기업의 부패와 비효율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재임 기간 국유기업은 비약적인 성과를 보여주었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제조업에 종사하는 국유기업의 실제 부가가치는 7배가량 증가해 총투자의 30퍼센트를 차지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국유기업은 초과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이들의 경쟁력은 다른 나라의 국유기업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층과 사회에 만연된 반사회주의적인 정서로 인해 대만식의 국유기업 중심 산업화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국제적인 제약도 국유기업 중심 산업화를 선택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사적 소유를 지배적인 생산방식으로 인정하고 이를 촉진함으로써 박정희 행정부는 미국과의 대립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 쿠데타 직후, 미국은 박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당시 한국주둔 UN군 사령부의 카터 매그루더(Carter M. Magruder) 장군의 공표는 미국의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매그루더 장군은 국제평화유지군 사령관으로서, 장면 수상이 이끄는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하기 위한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도록 명령했다. 미국의 반대는 새로운 군사정권에게 큰 부담이었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작은 국가에서 더군다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악화된 미국과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박 대통령은 국유기업 중심의 성장을 제한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국유기업이 아니면서도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국유기업과 비슷한 면모를 보엿다. 박정희에게 이것은 반공산주의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재벌기업을 확실히 통제하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⑶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 근대화 모델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전략은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 근대화를 의식적으로 모방했다. 군사통치에 대한 선호와 거대 사적 자본에 대한 혐오, 그리고 빠른 성장을 달성해야 할 필요성 등이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의 불균형적 산업화 모델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방향과 내용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일본의 압축적인 산업화를 모델로 삼았다. 신고전경제학파의 처방을 외면한 박정희 행정부는 초기부터 특정 산업에 대해 금융 및 다른 자원들을 지원해줌으로써 이들이 비교우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했던 유창순은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모태가 된 1950년대 계발계획 설계에 참여할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크게 보면 당시 두 가지 입장이 있었다. 한쪽은 균형 성장을 원했고 다른 쪽은 산업화를 중시하고 농업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불균형 성장을 선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를 위한 불균형 성장을 택했다. 그것은 일본이 메이지시대에 택한 방식이었다. 일본은 국가 예산으로 공장을 지었고 그에 따른 이익이 후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우리는 이 모델을 그대로 따랐다.”
로버트 캐슬리(Robert Castly)와 비벡 치버(Vivek Chibber)가 주장한 것과 같이, 전후 일본이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에 대해 자금·기술·시장·시장 네트워크와 성공적인 전례를 제공했다는 점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치버의 연구에서 일본이 미국 수출 시장으로의 연결 통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지나친 비약이다. 첫째, 그는 1965년 한·일 정상화 조약을 통해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한국 자본가들에 관한 한국 정부의 재량적인 권한을 과대평가했고 둘째, 한국의 재벌들이 수출 중심 산업화 전략을 도입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할 만큼 영향력이 컸다고 오판했다.
치버는 최종 투자에 대한 조정을 통해 정부에 맞서는 자본가들의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과 일본의 자본가들이 연계되었으며 이에 따른 정상화 조약 및 수출 중심 산업화가 한국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박정희 행정부가 재벌들과 공생관계를 유지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관계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으며 거대한 무리의 기업 계층이 존재했다는 치버의 반복되는 주장은 지나친 과장이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1963년에 한국에는 15개의 상장기업이 있었는데 그 당시 한국에는 건전한 재정 상태, 우수한 기술력, 또는 높은 수익성을 지닌 기업이 드물었다.
강하고 추진력 있는 소수의 기업인들이 당시의 소위 대기업을 운영했으나 그들은 1960년대 초반에는 조직력과 응집력이 약해 국가에 대항할 만한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렇기때문에 국가가 임의적인 통화개혁이나 민간 상업은행의 국유화 정책 등을 쉽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0년에 이르러 미국은 한일관계 정상화와 일본과 연결된 수출 중심 산업화를 적극 지지했다. 1950년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일본을 방파제 삼아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의 공산주의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데 집중되었던 반면, 1960년대에 이르러 발전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미국은 한국 정부에게 수출 중심 산업화를 이룰 수 있도록 예산 적자를 줄이기 위한 세금 개혁을 단행하고, 통화 가치를 50퍼센트 평가절하할 것 등의 시장개혁을 종용했다. 미국은 또한 일본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 박 대통령이 실패한다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일본을 협박하며, 일본이 한일관계 정상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미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일본식 수출 중심 산업화를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일본의 수상이었던 이케다 하야토 역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두 국가 간의 정상화는 시간문제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김종필과 일본의 외무상 오히라 마사요시는 1962년 조약의 내용에 대해 기초적인 합의를 했다. 조약은 당초 1964년에 체결될 계획이었으나 비밀회담에 대한 정보가 언론에 누설되어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함에 따라 미뤄졌다. 하지만 이듬해 박정희 정권은 정상화 조약의 체결을 강행했다.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도 일본의 자본가들은 박 대통령이 일본식 수출 중심 산업화를 모방하는 것을 기회로 활용했다. 1963년 한국의 대일 수입액은 1억 6천 2백만 달러를 기록해 이승만 대통령 집권시와 비교해 4배 정도 상승했고, 1962년에서 1964년 사이 일본의 대(對) 한국 무역흑자는 3억 달러에 육박했다. 한국의 수출 역시 같은 기간 무려 47.5퍼센트나 증가해 전례 없는 성장을 기록했다. 치버 역시 당시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를 생각하면 역시 박정희 정권의 용인과 전격적인 지원 없이는 1962년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투자가 그처럼 급격히 늘어날 수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3.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이 치른 비용
통제경제정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이며 이는 민주주의적 가치와도 어느 정도는 양립할 수 있다. 전후 일본의 국가 시스템에서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으며, 1960년대의 박정희 정권 역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건강한 시스템을 한국에 구축하는 것을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통제경제정책이 그 도입 초기 단계에서는 원활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나 민주주의적인 견제 및 균형과 더불어 민주적인 가치의 제도화가 부재한 상황에서 통제경제는 병들게 마련이다. 엘리트 집단의 결탁과 부패, 불평등과 노동에 대한 억압은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에 따른 몇 가지 병리적 증상들로 한국 사회에 여전히 만연해 있다.
한국의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의 체제화는 이렇게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 시작되었으며 이어진 행정부들에서 심각한 부작용들에 대한 약간의 개선이 이루어졌으나 그 근본적인 구조와 정치 유산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책적 선택 범위를 제한하고 사회 시스템의 기능을 저해시키며 시민들의 사회 참여를 제한하고 있다. 예컨대. 소수의 재벌들에 의한 승자 독식 체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비민주적인 통제경제정책은 인간 중심적인 발전과 양립할 수 없는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특정 경제집단에 편중된 지원, 성장만능주의와 전투적인 성장 속도라는 네 가지 핵심적인 특성을 지닌다.
⑴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상명하달식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은 수직적 정치 구조, 독점적·중앙집권적 정책 결정, 제도화된 균형과 견제의 부재 및 아래로부터의 정책 피드백을 좌절시키는 일방적인 권력의 행사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수직적 구조에서의 정책 결정은 통치 계층에 속한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행해져 다수의 의사가 전달되고 반영되기 어렵다.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체제의 국가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 향상에 대한 고려는 상대적으로 간과하기 쉽다. 경제성장률 지표 상승에만 초점을 맞춘 발전 방식은 장기적으로 볼 때 사회적인 역기능을 야기하며 이는 향후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
한국의 권력은 청와대로 상징되는 중앙정부에 여전히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와 더불어 계급주의적인 유교문화, 일본의 식민통치와 이승만 대통령의 1인 독재의 유산이기도 하다. 권력을 잡은 집단을 견제할 사회적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했다. 발전국가론자들의 주장과도 달리 공무원들은 정책적 결정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권력을 잡은 소수의 핵심 세력은 자신의 정치적 필요와 이해에 부합되는 관료들의 조언만을 귀담아 전략을 수립 또는 수정했다. 196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전략은 엄격하게 수직적인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군사적인 시스템을 통해 정책을 지시하고 통제했다.
통제경제정책을 수행하는 국가의 지도자는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수용성을 위해 대중적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군사독재정부는 그 권력을 획득한 방법상의 원죄 때문에 늘 비합법성과 대중적 반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근대화 전략 수행시에 아래로부터의 의견이 약간은 반영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지만, 실제로 일반 시민들의 사회적 참여는 매우 제한되었다. 전략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정권 세력 간의 경쟁적인 연합과 승리연합의 통치권 및 권위 유지라는 과제였다.
한국의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정권은 종종 극단적이고 작위적이었다, 예컨대, 1961년 한국 정부는 1957년에 사유화된 민간은행을 국유화했다가 1980년에 다시 사유화햇다. 1972년에는 모든 사채를 사실상 탕감해줌으로써 가장 채무가 많은 재벌들에게 가장 큰 수혜를 안겨주기도 했다.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은 군사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근로자들을 산업 역군으로 육성하며 발전을 꾀했다. 급속한 산업 성장 당시 인기 있었던 책 중 하나는『손자병법(孫子兵法)』의 개정판으로 이 책에서 전쟁은 군사가 아닌 경제 전쟁으로, 세계의 정복은 식민지가 아닌 시장 점유율 확보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묘사되었다. 이러한 체제 아래에서는 목표를 이루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시되었으며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명하달식 통치방식은 대다수의 국민이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며 근대화를 자생적으로 추진할 능력이 부족했던 한국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는 꽤 효과적이었다. 국가는 강력한 의지와 통제를 통해 급격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경제적 시스템이 보다 복잡해지고 경제성장과 더불어 시민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정치적 역량이 강화되면서, 상명하달식 통치 방식의 효과성은 약화되고 유연한 혁신과 변화의 걸림돌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배체제는 한국 경제에 경제에 경직과 불안정을 야기했고, 소수 재벌의 문어발식 팽창과 더불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심각한 불균형은 1997년 외환위기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⑵ 편중화된 지원
편중화된 지원은 적은 수의 대기업들을 국가의 발전 명령을 수행하는 대리자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독과점 보장이나 자금 융자에 대한 낮은 이자율 등의 특권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곡된 통제 경제정책을 운용하는 국가에서 정치적 권력을 독점한 집단은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고 정치적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해 정책결정 과정을 불투명하게 하고자 하는 충분한 동기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 정부와 대기업 간의 정치적인 결탁은 부패를 야기하게 마련이다. 이 같은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정부 및 기업의 공공책임 의식이 결여된 상황에서 독립적인 외부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을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정책결정과 실행 과정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실주의와 정경유착은 중앙정부에 견제 없는 권력이 집중된 관계로 파생된 관행이었으나,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박정희 행정부로부터 소수의 재벌이 선정되어 편파적으로 지원을 받은 결과 더욱 심해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성장의 대리인으로 소수의 재벌을 선정해 지원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는 다수의 중소기업인들보다 소수의 거대 자본가들을 통제하는 것이 더 용이하다고 판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실제로는 반자본주의자로 아마도 대만과 같이 국유기업을 통해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미국에게 본인이 반공산주의노선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을 쓸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재벌을 선택했다. 둘째, 소수의 재벌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다수의 중소기업을 통하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훨씬 수월했다.
한국은 오늘날까지 정경유착에 따른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2000년 세계은행과 IMF 주관으로 매년 열리는 정기회의 때 당시 세계은행의 총재였던 제임스 울펜슨(James Wolfensohn)은 김대중 대통령이 부패와 정실주의와 싸우기 위해 당선되었으나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문제는 경제성장을 통해 잠시 표면적으로 가릴 수는 있으나 또 다른 위기의 씨앗을 키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부패와 정실주의로부터 발생한 증상들에 대한 지나친 집중은 그것을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인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에 대해 경시할 위험이 있다.
한국의 정경유착은 기적적인 경제성장에 기여했는지 모른다. 1997년 당시 충격적인 경제 붕괴와 국민들의 정치적 불신을 야기했고 정부 개혁의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왔다. 1980년대 초반부터 공정거래법과 정책적 도구를 통해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분야에서 재벌들의 판매와 부가가치는 각각 26퍼센트와 27퍼센트를 차지했다. 1990년 한국의 독과점 역시 생산제품 기준 81퍼센트와 매출액 기준 64퍼센트의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권력계층과 재벌들의 정치경제적 결탁은 독과점 구조를 개혁하는 데 방해물이 되었다.
한국의 정경유착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물은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심각한 격차이다. 예를 들어 1986년 한국의 중소기업은 전체 제조업 수출의 35퍼센트를 차지한 반면 일본과 중국의 경우 60퍼센트 이상의 제품이 중소기업에 의해 수출되었다. 중소기업의 후진성은 과다한 영세기업의 수와 건실한 중견기업의 부족에도 반영되었다. 1995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정규직 종업원이 5명~19명 사이인 영세기업의 경우 전체 기업의 72퍼센트나 차지한 반면, 종업원이 50명~299명 사이인 중기업은 고작 9퍼센트를 차지했다. 1990년 현재에도 종업원이 1명~19명 사이인 제조업체는 전체의 82퍼센트를 차지한 반면 이들 기업의 총매출은 전체 매출의 10퍼센트도 미치지 못했다. 1993년 현재 한국의 중소기업 중 30퍼센트만이 독립적이었으며 나머지 70퍼센트가량의 기업들이 대기업에 의존하며 그들에게 부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⑶ 성장만능주의
경제성장은 사회적 고통을 수반하며 특히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매우 크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선도주자로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훨씬 천천히 변화한 영국에서도 경제성장에 따른 심각한 피해들이 발생했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18세기 산업혁명의 중심에는 생산수단의 기적적인 발전이 있었고 이는 일반 시민들의 삶의 치명적인 혼란을 수반하였다”고 언급했다. 폴라니가 강조한 바는 비록 근대화와 경제적인 발전이 궁극적으로 사회에 유익할 경우에도 그 과정 자체는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을 완화하려는 정부의 적절한 개입 없이는 근대화가 제대로 지탱되기 어렵다.
성장을 최고로 여기는 성장만능주의는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의 세번째 특성이다. 성장만능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GNP, 수출과 물질적인 부에 최우선적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에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결과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성장에만 집착하는 사회는 이에 따른 사회적인 병폐를 당연하게 지불해야 할 비용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러한 성장에 대한 집착은 극심한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회에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의 기초적인 필요조차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경제성장과 물질적 반영에 대한 단순한 비전은 강력한 자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획일화된 목표에 따른 이익은 소수의 집단에만 집중되며 상대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러한 성장만능주의가 사회에 고착화되고 제도화되면 사회 통합과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은 점점 약화된다.
양적인 결과만을 본다면 한국의 경제발전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한 의지력과 엄청난 노력을 통해 한국을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것은 20세기의 중반 가난으로 고통 받던 한국에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경제적 진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장만을 중시했던 성장만능주의로 인해 야기되었던 엄청난 사회적 부작용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공장 근로자와 영세기업 운영자 등 많은 사회적 약자들은 성장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했다. 근로자들은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사고의 위험을 감수하며 초과근무를 해야 했고, 특히 여성 근로자들은 고용과 급여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아 이중고 또는 삼중고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국가는 대기업 위주의 금융정책을 실행하여 중소기업의 피해를 가중시켰다.
경제성장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은 그의 초반의 기록들에서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다. 자신의 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인간이 정치·사회나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기 이전에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경제의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는 다른 부분의 개혁 역시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경제의 재건축이 없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나 독립의 달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는 바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모든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로 간주했다. 그는 군사적인 캠페인을 통해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촉구했다. 한국을 강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지녔던 박 대통령은 한국의 전통은 후진적이고 경제성장의 방해 요소이며 따라서 싸워야 할 대상이라고 간주했다. 산업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싸워서 이겨야 한다. 우리가 진다는 것의 의미는 파괴이며 영원한 종말이다. 이는 5월 16일 군사혁명이 국가적 혁명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며 또한 국가혁명이 산업혁명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박 대통령은 빠른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비용은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높은 장벽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적인 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며 우리는 10년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 전쟁에서 모두 앞에 나와 항상 싸울 필요는 없다. 뒤에서 지원하는 것이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우리를 뒤에서 뒷받침해주는 지원군 역시 동일하게 헌신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시도는 위대하다. 우리는 피곤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망칠 수 없다. 첫 번째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른 사람들의 불편은 엄청날 것이며 우리의 도전 과제는 우리를 압도할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젊은 청년이며 젊어서는 사서 고생할 수 있는 것이다. 젊은 한국은 고통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많은 고통을 잘 견뎌냈다. 우리는 계속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자발적으로 좀 더 고통을 짐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경제성장이라는 박정희 정권의 단 하나의 목표는 경제개발의 초기 단계에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36년간의 일본의 식민통치와 6·25동란 이후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빈곤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갈망은 절대다수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였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에 대한 생생한 기억으로 인해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비용과 엄청난 희생을 묵인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빈곤으로부터 점차 벗어나면서 비인간적이고 군사적인 성장 방식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으며, 특히 성장에 따른 이익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계층 간 갈등과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면서 사람들의 불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성장에 대한 집착은 줄어들지 않아 여전히 이로부터 파생된 많은 문제들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 있게 되었다.
⑷ 전투적인 성장 속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후발 국가들의 경우 속도는 주요한 특징으로 인식되어왔다. 영국이 2백년 이상 걸려 이룩한 결과를 한국은 고작 몇 십년만에 달성했다.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물질적 부의 증가를 달성한 사실은 인정되어야 하나 동시에 급격한 성장에 따른 어두운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전투적인 성장 속도는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의 네번째 특징이다.
폴라니는 서민들의 삶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속도는 가능하다면 늦춰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급격한 산업화는 사람들의 삶에 더 큰 충분한 시간을 담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에서 배제되었다. 빨리 경제성장을 달성하고자 하는 집착은 기존의 문화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재빨리 변경할 것을 강요한다. 이것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 자유시장이 자생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위험한 믿음에 기인한다. 시장은 자연적으로 독점이나 과점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시장의 주도권은 인간이 아닌 돈이 쥐고 있다. 따라서 국가는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보호하고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러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적 비용을 무시한 채 재벌과 결탁하여 급격한 성장만을 추구했다.
한국의 성장 속도에 대한 집착은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통치 초기 단계에 내렸던 의사결정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비민주적이고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박 대통령은 빠른 시간 안에 경제성장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계속 불안한 입장에 서 있거나 권력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그는 자본 및 기타 자원을 몇 개의 선택된 기업에 집중하는 강압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다시 말해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를 억압하고 소수의 대기업이 대량생산 능력을 획득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수출 중심적인 산업정책을 추진하여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렇게 국가는 한 사람의 권력 유지를 위한 매개체가 되어 이를 위한 경제정책을 추진했고, 결과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가 이익을 독점하는 시스템이 유지되어왔다.
전투적인 속력으로 성장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권력자들은 사회적 통합과 더불어 중소기업에 대해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지원을 간과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중소기업을 경시하는 것은 매우 비생산적이다. 주지하는 대로, 수출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위해 대량생산 방식을 집중적으로 지원한 한국의 재벌 중심 근대화 정책은 급변하는 세계시장에 대응하기에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 한국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대량생산 방식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저가의 상품들은 물론 고도의 기술을 이용한 일본의 고가의 제품들과도 경쟁하기 위해서는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벗어나 지식집약적 산업을 육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소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포드주의 이후 기술의 발달하고 소비자의 기호가 다양해짐에 따라 중소기업의 경제적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을 인식한 피오리(Piore)와 세이블(Sable)은 이탈리아 북부나 미국의 실리콘밸리의 중소기업 단지를 예로 들며 대량생산 방식이 아닌 유연한 생산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로리다(Florida)와 케니(Kenny) 역시 피오리와 세이블과 마찬가지로 중소기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강조한다. 단,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생산체제는 파격적인 혁신을 창조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제품과 제조 과정의 작지만 지속적인 혁신을 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플로리다와 케니는 오히려 일본의 도요타 생산체제와 같은 장기적이고 미래 중심적인 중소기업 부품공급자 네트워크가 일본의 지속적인 제품 향상의 원동력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정부 역시 신용을 기반으로 한 하청업체 간의 네트워크가 고품질의 맞춤화된 부품과 완성품 생산을 가능케 해 일본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비록 생산방식의 변화와 효과적인 생산 시스템 형성을 위한 중소기업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오늘날 중소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특히 경제가 발전할수록 더욱 중요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중소 하청기업들의 상황은 계속해서 매우 열악한 실정이다. 1985년의 경우를 예로 들면, 한국은 완제품 1단위를 생산하기 위해 28퍼센트의 부품을 수입한 반면, 일본의 경우 7퍼센트의 부품만을 외국에서 공급받았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증거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와 재벌들 간의 정경유착이다. 이는 성장에 따른 이익의 분배를 왜곡시켰으며 부패를 확산하고 시민들의 냉소와 불신을 확산시켜 사회적 통합을 저해했다. 정경유착형 부정부패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재직 시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었으며, 발각 당시 온 국민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망신이었다.
기득권의 결탁에 따른 또 하나의 부작용은 시간이 갈수록 현저하게 증가된 부의 불평등이다. 1988년 현재 상위 1퍼센트가 전체 토지의 무려 44퍼센트를 소유했고 상위 10퍼센트가 77퍼센트를 소유했다. 그런데 토지 가치는 1974년에서 1989년 사이에 국내총생산의 증가 속도보다 3배 정도 빨리 증가했으며 어떤 해에는 이에 따른 자본 이득이 전체 국내총생산보다 컸다.
부의 불평등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적 박탈감에 비해 더 크게 인식되며 이는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1994년 한국은 지존파 사건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해온 이들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으며 검거되기 직전 서울에 있는 백화점의 주요 고객들 150명을 대상을 한 대규모 살인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물론 극단적이긴 하나 이 사건은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자들 간의 간극이 너무 커져버린 한국 사회와 국가에 대한 깊은 불만족과 분노가 표출된 사건이라고 하겠다.
기득권층의 결탁과 불평등한 분배 구조,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이 만연한 사회에서 오랜 동안 억압받아온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군사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고 이는 지지율의 지속적 하락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군사정권의 마지막 당선자인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 1980년대의 빠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36퍼센트의 지지율로 가까스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대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세계화와 시장주의를 표방하며 전투적인 성장 속도를 유지하려 했다. 시장자유화에 대한 국가의 집착에 가까운 태도는 과거 박정희 정권 이후 한국 정부가 계속 유지한 방식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 세계화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정부의 강압적인 태도는 급격한 변화로 야기되는 사회적 비용을 정부가 여전히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은 장거리를 달리는 운동선수의 상황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장거리를 달리는 선수가 이기기 위해서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어떤 선수는 승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몸이 상하는 것을 무시하고 달릴 수 있다. 또한 신체의 어느 한 부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도 얼마간의 효과를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매우 해롭다. 결과적으로 육체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달리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장거리를 달릴 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페이스다. 최고의 속력으로 달리려고 하는 선수는 결국 장거리 경주를 잘 완주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4. 인간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게 근본 원인
국가의 통제경제정책은 무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불균형적 산업화 추진 주체에 대한 발전국가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아래서 한국의 전문적인 관료들은 국가의 산업화 전략과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차별과 관련하여 매우 제한적인 권한밖에 행사할 수 없었다. 국가의 정치화와 국가와 재벌 간의 결탁은 한국의 비민주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통제경제정책의 산물이었고 이는 1997년의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벌 중심의 불균형적 산업화를 택했던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인 생존을 위해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사회와 경제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신고전파 시장 모델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국유기업 중심 국가주의 모델 역시 미국의 반감을 고려하여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박 대통령의 전략적 선택은 1930년대 일본 메이지 유신의 근대화 방식이었다. 이 전략은 박 대통령의 의도대로 빠른 성장을 가져다주었으나 한편으로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편중화된 지원, 성장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로 특징 지울 수 있는 박정희 행정부의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은 분배의 불평등, 사회 통합 저해 등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해 있는 많은 문제들의 근원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비록 여러 외적·내적 요인들에 의해 박정희 행정부의 근대화 전략이 결정되었으나, 이것이 당시에 주어진 유일한 대안은 아니었다. 국가주의 모델 안에서도 다른 방식이 선택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다. 통치권력을 행사했던 국가의 권력자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들의 이득에 맞는 특정 전략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것은 국민들을 위한 최적의 전략이 아니었으며 권위·합법성과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정권세력 집단 간의 경쟁의 산물이었다. 즉, 당시 선택된 정책은 유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대안 중의 하나였으며 선택 과정에서 경제적인 요인보다 정치적인 요인이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
경제성장을 유일한 목표로 달려온 한국의 군사적 근대화 전략은 인간의 삶의 가치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성장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이를 달성하기 위해 소수의 재벌들에 편중되었던 정부 차원의 지원은 결국 외환위기 촉발의 주요 원인이 되었을뿐 아니라 정치에 대한 국민의 냉소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선택한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의사전달 방식은 인간 중심적 발전과 양립될 수 없는 개념이며 근본적으로 상호 배타적이다. 한국의 경우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은 약자를 억압하고 인간 중심적 발전을 저해해왔다. 인간에 중심을 둔 발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반면, 국가가 일방적으로 이끄는 경제발전은 더 큰 물질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면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을 합리화하고 용인한다. 이는 단기적으로 수치화된 발전 지표를 개선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의 질을 악화시키며 장기적으로 볼 때 치유하기 힘든 사회적 병폐를 야기한다.
이제라도 한국은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이 야기한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치유하고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 통합을 목표로 하는 인간 중심적 발전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러 선택 대안들 중에서 정치적·경제적 이익에만 초점을 맞춘 대안이 아니라 국민의 자유와 인간 존엄성을 확대하는 대안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