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권]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Elly2013.01.20
조회30

 

 

「고통을 주고 싶다. 발로 차 주고 싶다」

 

저자 : 와타야 리사

역자 : 정유리

출판사 : 황매

출판일 : 2004년 02월

 

■ 까만 실험용 책상 위에 놓인 조각난 종이더미 위에 또 하나, 국숫발처럼 가늘고 긴 종잇조각을 올려놓는다. 높이 쌓인 종이의 산, 내 고독한 시간이 응축되어 있는 산. -p.6

 

■ 왜 저렇게 섞이고 싶어하는 걸까? 같은 용액에 잠겨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른 사람들에게 용해되어버리는 게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일까? 난 '나머지 인간'도 싫지만, '그룹'에 끼는 건 더더욱 싫다. 그룹의 일원이 된 순간부터 끊임없이 나를 꾸며대지 않으면 안 되는, 아무 의미 없는 노력을 해야 하니까. -p.19

 

■ 넌 언제나 한꺼번에 이야기를 쏟아놓지? 그것도 듣는 사람이 듣는 역할밖에 할 수 없는 자기 얘기만. 그러면 듣는 쪽은 맞장구치는 것 말곤 할 게 없잖아. 일방적으로 얘기하지 말고 대화를 하면, 침묵 따위는 생기지 않아. 만약 생겨도 그건 자연스런 침묵이니까 초조해지지도 않고. -p.86~87

 

■ 인정받고 싶다. 용서받고 싶다. 빗살 사이에 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걷어내듯, 내 마음에 끼어 있는 검은 실오라기들을 누군가 손가락으로 집어내 쓰레기통에 버려주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바랄 뿐이다. 남에게 해주고 싶은 것 따위는, 뭐 하나 떠올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p.96

 

■ 주변에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고독한 시간을 통해 길러온,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껍질이 얇게 쓸려나가서 불안한 느낌이 든다. -p.124

 

■ 같은 풍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분명, 나와 그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토록 아름답게, 하늘이, 공기가 파랗게 물들어 가는 곳에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p.148

 

리뷰

 

하루에도 수십만권의 신간도서들이 쏟아지는 요즘, 제목이 갖는 힘은 상당히 크다고 생각된다.

뭔가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그러면서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을만한 그런 제목. :)

이 책 역시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책을 펼치고 제일 첫장에서 작가의 사진과 그 밑에 있는 이력을 읽으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선, 구하라를 닮은듯한 너무나 수려한 외모와 그에 더불어 10대에 이 작품으로 큰 문학상을 받았다니.

지금은 나와 비슷한 나이가 된 작가지만, 오히려 10대일 때 이 이야기를 썼기에 그당시 고등학생들의

학교생활모습을 비롯한 수업시간마다의 세세한 묘사들이 더 사실적이고 생동감있게 다가온 것 같다.

 

황석영님의 <개밥바라기별>을 비롯해 최근 몇 편의 성장소설들을 연어어 읽어나가다보니

몇 번이나 내 학창시절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역시 책을 읽으면서 좋은 것 중에 하나가

시간이 지나 잠시 잊고 있었던 여러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해주는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래 맞아, 나도 좋아하는 연예인에 열광하던 때가 있었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기도 했었고,

때론 수줍은 첫사랑에게 제대로 마음 한 번 표현하지 못하고 끙끙 앓던 때가 있었고. :)

지나고나서 생각하니 이렇게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가슴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있는데

그 당시엔 어쩜 그렇게도 아프고, 화나고, 상처받고, 열병을 앓았던건지. :)

 

이 책은, 고등학생인 '하츠'와 '니나가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는데

두 사람은 조용히 혼자 있는 걸 좋아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먼저, '하츠'는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어떤 그룹에 속하기보다 일대일 교제를 원하고,

'니가가와'는 스타만을 광적으로 좋아하면서 그 밖의 다른 관계엔 도통 관심이 없다.

그 두 사람이 각자의 벽을 깨고 서로에게 다가가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책이 신선하다고 느껴졌던 건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감정이나 뻔한 묘사대신에

작가는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풀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츠가 니나가와를 '발로 차는' 그 행동은 하츠 나름의 관계하기 방식인 것이다.

'같은 풍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분명, 나와 그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토록 아름답게, 하늘이, 공기가 파랗게 물들어 가느 곳에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그 '소통불능'의 상황을 깨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인지도 모른다. 발로 차주고 싶다는 건 어떤 분노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서툰 감정을 전달하는 하나의 매개체 같은 것으로 그런 행동을 통해서

서로가 더 가까워지고 더 깊게 소통하고싶다는 그런 속뜻이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물론 내 십대시절과 함께 지금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다른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기에 지금 내 옆에 있는사람들과 더 진실된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며

더 소중히 그 인연 이어나가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