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마세요. 예수님 안 믿어도 지옥 안 갑니다.

카톨릭신자201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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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모든 물음을 한 데 모아놓은 것입니다. 각 물음별로 따로 올리기도 했으니,
귀찮으신 분은 그 물음만 골라서 읽으셔도 됩니다. ^.^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 글 하나에 모두 담기에는 너무도 긴 이야기가 될 듯 합니다.

일단은 짧게 시작하지요.

참고로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왔고, 거의 15년을 넘었습니다.

다만 최근에 어떤 체험 이후로, 종교에 대한 사고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지요.

어쩌면 이 글을 읽고 독실한 개신교 신자 분들께서는 저를 사탄이나 마귀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여태까지 기독교가 전부라고 믿고 계셨던 분들은 잘못 아신 겁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 글은 분명히 저의 체험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댓글 중에 중요한 질문이 있으면 본문에 추가시키는 식으로 점점 확장시켜갈 생각입니다.

반응이 없으면 그냥 이 글로 끝이겠지요.

알아보기 쉽게 문답 형식으로 갑니다.

1.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답은 '아니오' 입니다.
신은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한다고 하는데, 어찌 신이 기독교의 신을 믿는 사람만을 사랑하겠습니까?
우리가 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전체에 편재하는 법칙으로서의 신입니다.

인간의 행동에 분노해서 그 인간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인격신이겠지요?
신에게는 인격이 없습니다. 인격이 있는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지요.

2. 천국과 지옥은 있는가?

천국과 지옥의 존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삶을 살다보면, '나'라는 존재가 이 육신이 전부라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 저도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육신이 나의 전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요.

그러나 분명히 인간의 존재는 이 육신에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이게 천국이나 지옥과 무슨 상관이 있냐구요?

일단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이 육신에 갇힌 삶을 마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계십니다. 영원한 잠에 빠지는 것과 같은 개념이지요.
그러나 잠을 잘 때에도 꿈을 꾸지 않습니까?
사실은 꿈이란 것은 자신의 의식이 잠들고 무의식이 깨어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꿈에서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하지요?
인간이 죽게되면 육신의 제약에서 벗어나는데, 이 때는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이 완전히 이어지게 됩니다.
'나'라는 의식이 있는데 마치 무의식의 상태처럼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됩니다.

일단 이 순간부터 영의 세계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영의 세계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현실처럼 구현된다는 것입니다.

'아스트랄하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장난하는 것처럼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육신을 벗어난 바로 다음 단계를 아스트랄 계 또는 Astral Plane 이라 하여
생각이 현실로 구현되는 세계를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보통 이 아스트랄 계에 속합니다.
그런데 왜 지옥이 있는지 궁금하시지요? 사실은 지옥 또한 자신이 만들어내는 개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신으로서의 삶에서 악하게 산 사람들이 생전의 악한 의식으로 아스트랄 계에
진입했을 때, 그 사람들의 의식이 창조한 현실들이 중첩되어 이루는 세계를 지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라디오 주파수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악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악한 아스트랄계의 전파를 수신하여
그 쪽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선한 영혼은 선한 아스트랄계의 전파를 수신하여 천국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살아 생전에 선하게 산 영혼이라면 더 선한 사람들의 의식이 창조한 아름다운 세계로 자연스럽게 끌리는
것입니다.

정말 황당한 소리지요? 저도 사실 10년 가까이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나서는 이 개념이 점차 이해되기 시작하더군요.

불교에서 '일체유심조'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사실은 이와 비슷합니다. 무간지옥, 악귀, 나찰 이런 것들은
사실 생전에 악하게 산 영혼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묘사한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지옥불이나 영원한 천국 같은 것은 이 아스트랄계를 자신들의 종교 권력을 위해 고의로 왜곡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 묘사 자체는 그렇게 틀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요.

천국과 지옥에 대해 고민하시던 분이라면 이 질문으로 조금 고민을 덜 수 있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영욱 저 사람은 아마 독실한 개신교 신자겠지요.
목사님 말씀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을 보니, 신앙심은 굳건하신 듯 합니다.

사실 좀 독선적인 종교인이라도 선하게 살면 그 나름의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천상에 재물을 쌓는 일이라 하지 않습니까?

열심히 종교에 충실하시고 좋은 일도 많이 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그건 그렇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제가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만, 진실의 단편은
보여드릴 수 있을 듯 합니다.

인간이 한없이 깊어지면 신이 됩니다.
인간은 신의 7가지 권능을 부여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비록 그 고귀함이 악한 마음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럼에도 인간의 모든 영혼에는 신의 진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 좋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이나 다른 사람이나 모두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이 인간의 영적 진실을 깨달으신 것 뿐입니다.

인간은 어떤 다른 신적 존재에 종속된 열등한 존재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 안의 성령이라고 기독교에서도 말합니다. 이게 사실은 다 같은 이야기예요.

기독교에서 가장 크게 실수한 게, 아직도 구약을 버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약에서부터입니다. 구약의 인격신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한 기분이 들지 않던가요?

이게 마귀가 아니라, 사실은 인간 모두의 본성에 내재된 진리를 보는 눈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기독교가 거듭나려면 신약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절대신은 인간에게 그 어떤 언지도 내린 적이 없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인격신은 어쩌면 신의 모습을 가장한 사탄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 사탄에 속아 오고, 위축된 사람들의 억눌린 마음을 해방시키러 세상에 내려오신 것으로 봅니다.

하느님, 하나님, 여호와, 절대신
뭐라 부르든 좋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절대적인 신은 여태까지 여러분에게 단 한 번도 어떤 명령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바로 신의 일부이고, 신의 권능이 인간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부처님 그리고 이슬람 모두가 공통적으로 말해오던 진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세계관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하지 말고, 스스로의 진실을 보는 힘을 믿고

나아가세요.

진정한 깨달음은 누가 가져다 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구하는 겁니다. 사실은 밖에서 구할 것도
없이 여러분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체험이
뒤따라야 진정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4. 죄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원죄의 개념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원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이 부분은 제가 체험한 바가 없으니 제가 아는 한에서만 적습니다.

인간의 죄라는 것은 사실 절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죄'라는 것은 불교의 '업' 또는 '카르마'와 사실은 매우 비슷합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다른 이에게 영향을 주는 것 그게 그냥 업이예요.

선한 행위를 하면 선업이 되고 악한 행위를 하면 악업이 되지요.
기독교에서는 죄만 이야기하는데, 악업은 죄이고 선업은 사랑이라 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과 악이란 것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나눌까요?
악한 일을 하면 죄가 쌓인다고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좋은 의도로 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오히려 피해를
끼친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경우는 선인가요 악인가요?

이렇게 복잡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선과 악은 인간의 관점에서 구분한 것일 뿐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게요.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지 여행을 하다가, 맹수에게 습격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맹수를 악하다고 말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행위를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의 범주에 집어넣었을 때 선과 악의 개념이 생겨납니다.

물론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대체로 다른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악이라 할 수 있지요.

100%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면 악한 일이고 죄 짓는 일이라고 쉽게 생각하면 되요.

그런데, 이게 또 신기한게 인간의 관점을 벗어나 영혼의 세계에서는 조금 달라집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고통을 받은 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영혼의 단계에서 이미 그렇게 하기로 서로 계약을 맺은 겁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고통을 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고, 나는 그 고통을 받는 역할을 맡은 거죠.

인간의 의식에서 악한 행위를 하면 인간인 이상 악한 행위는 그대로 영혼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악한 행위는 지금 생이 아니더라도 다음 생에 다시 갚아야할 빚으로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말을 삼가고, 타인을 고통주지 않고 도우라는 말이 있는 거지요.

영의 차원에서는 선과 악이 하나의 역할 분담일 수 있으나, 인간의 차원에서는 그것이 선과 악이고
또한 청산해야 할 빚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차원에서 너가 날 괴롭혔으니 다음엔 내가 널 괴롭힐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면,
이 빚을 지고 빚을 지우는 관계가 이번 생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다음 생 그리고 그 다음 생을 넘어 영원히
이어지게 됩니다.

이 서로 주고 받는 관계를 지금 이 생애에서 딱 끊어주는 유일한 무기가 '용서'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신 겁니다.

이해하시겠지요?

요약하자면

인간의 몸으로 악한 행위를 하면 빚이 됩니다.
그러나 고통을 받은 사람이 그 고통을 용서하게 되면 그 사람 자신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고통을 준 자도
함께 구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실체란 것이지요.
그래서 죄라는 것은 실체가 있으면서도, 한 번 마음을 되돌림으로써 연기처럼 스러지기도 하는 기묘한
녀석입니다.

기독교의 회개라는 것도 사실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을 뉘우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한 일을 내가 용서'하여 영겁의 시간을 반복하여 이어지는 복수의 사슬을 한 번에
끊기 위한 것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물음 5 - 현실 생활과 신앙 중 어떤 것이 중요한가?

구원을 위해서 현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앙에 전념해야 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직 덜 깨달은 의식과 덜 깨달은 육신을 지닌 영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결국 시간적인 앞과 뒤의 문제이지 끝없는 영혼의 진화의 여정에서, 그 시간 차이는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깨달은 것 같다고 우쭐해하지 말 것이며, 나보다 조금 덜 깨달은 사람을

보고 우월감을 가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나는 진화의 여정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인간의 영혼은 이 지구에서 경험을 하기 위해 육신을 입었을 뿐이지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면 윤회를 반복하여 더 많은 경험을 쌓을 것이고, 경험이 충분하다면 이제 윤회를

마치고 다음 단계의 진화를 위해 지구를 떠날 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신앙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지구에서 주어진 삶 또한 자신들의 영혼의 진화를 위해 겪어내야 할 배움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탁 트인 공터에서 달리는 것과, 모래 사장 위에서 달리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힘들까요?

당연히 모래 사장 위에서 달리는 것이 더 힘들겠지요.

그리고 공터에서 달릴 때와 물 속에서 달릴 때를 비교하면 물 속에서 달리는 것이 더 힘듭니다.

지구의 삶이란 굳이 비유하자면 물 속에서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물속에서 달릴 때 공터에서 달리는 것보다 더 힘들지만 더 많은 운동이 되듯이,

지구상에서 육신을 가진 삶을 제대로 살아낼 때 더욱 영혼은 많은 것을 배웁니다.


기독교에서 사실 사탄이나 마귀를 이야기하지만, 그 개념이 다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탄이나 마귀는 사실은, 그 인간의 영혼이 얻어야 할 경험을 빼앗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입니다.

영혼의 배우는 것에 있어, 가장 큰 전제 조건은

남이 나에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그것을 경험한다는 자각입니다.

고통이 나에게 닥치지만, 그것에 대해 원망하기만 하면 결국 그 고통은 제게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못합니다.

경험이 주는 고통에 휘둘리게 되어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면 모처럼 힘겹게 겪은 고통의 경험은 결국

사탄과 마귀에게 뺏기게 됩니다.

제가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범죄자들을 인터뷰해 보면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

"나는 잘못한게 없는데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입니다.

내재론과 외재론으로 구분할 수도 있는데, 진정으로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내재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재론을 오해할 수 있는게,

모든 나쁜 일을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는게 내재론이 아닙니다.

만약 '내 탓이긴 한데, 이는 내가 힘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당한 것이 잘못일 뿐이야.'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또한 내재론의 탈을 쓴 외재론일 뿐입니다.


나의 구원을 누군가를 믿음으로서 얻는다는 것 또한 사실은 외재론일 뿐이지요.

내 자신은 결국 내가 구원할 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수호천사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수호령 또는 수호천사가 붙어 다닙니다.

그 수호천사는 다른 영일수도 있고, 아니면 나의 상위 영혼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호 천사는 누군가를 열심히 믿을 때 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닌,

내가 진정한 '나'라는 존재로서, 그리고 모든 경험의 주체가 '나'로서 현실을 헤쳐나갈 때

뒤에서 나를 지원해주는 존재입니다.


보통 '사명'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인간에게는 모두 부여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마치는 것이 사명입니다.

꼭 높은 자리에 올라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모아서 떵떵거리고 사는 게 사명이 아닙니다.

이 사명은 제가 찾아주는 것도, 하느님이 찾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의 직관과 체험에 의해서 발견하는 것일 뿐입니다.

다만 이 진정한 사명을 알고 그것에 부합하는 삶을 살 경우, 물질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 모두에서

이 수호천사 또는 수호령이 인간을 지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물론 독실한 종교인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것일 수도, 테레사 수녀처럼 봉사에 헌신하는 것일 수도, 아인슈타인처럼 학문적 발전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에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고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살아가는 것이 결국 궁극적인 진화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 모든 것을 바치고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 아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삶에서 겪는 경험의 진정한 '주체'가 되어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혼의 여정의

일부입니다.

물음 6 -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으로

이집트의 태양신 신화와의 유사성이 있습니다.

처녀 수태, 부활신앙 등등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다른 종교에서 이미 존재하던 신화를 베껴온 것이라고

합니다.

12월 25일은 사실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탄생과는 무관합니다.

12월 22일이 동지죠? 사실 태양신 신앙에서 동지는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시작되는 그 출발을 의미합니다.

태양신의 부활을, 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에 대입한 것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태양신과 아르테미스 여신, 호루스 등등 기독교의 신화는 표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탄생은 12월 25일이 아닌 4월 언저리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이거 아세요?

예수님이 목회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등에서 영적인 수행을 하셨다는거요.

목수로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갑자기 어느날 성령이 내려와서 광야로 가서 40일간 기도 한번 한 다음에

뿅 하고 구원자가 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수십년을 영적인 수행과 헌신의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은 선지자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모시는 예수님은 사실

그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본인을 의미하기보다는 어떤 형성된 관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에 신격을 덧씌운 존재지요.


그러나 인간의 힘이라는 것은 마음을 어떤 영적인 힘으로 실체화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가장 많이 외우는 '주기도문'이라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구조 자체가 어떤 영적인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역사상 수억명의 사람들이 수십 수백 수천번을 암송하였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 주기도문에 힘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마를 퇴치하는 힘이 깃든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도 있지만, 사람들의 신앙 속에서 힘을 부여받은 어떤 신성한
힘으로서의 예수님 또한 존재합니다.

지금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은 후자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이 힘이 많은 사람에게 신비 체험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악한 영혼을 제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역사적인 예수님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전제를 다신 겁니다.

자신을 어떤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자신 또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내려온 존재임을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결코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우열이 없이 모두다 신의 권능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만 탁한 마음과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 그 신의 진리를 체현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구약의 인격신 하느님은 어떤 의도를 가진 존재에 의해 왜곡된 존재라고 보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새롭게 나기 위해서는 구약을 과감히 포기하고, 신약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약이 없으면 종교의 시스템 자체의 존립이 위태하겠지요?

인간이 곧 신인데 왜 사제가 필요하고 왜 교회가 필요하고 왜 교황이 필요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구약을 붙들고 있을 따름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속일 수 있어도 결국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뭔가 마음 속으로 시원하게 뚫리지 않는 의문이 있는데, 그것을 단지 억누르기만 하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면 더한 고통의 연쇄가 있을 뿐입니다.

왜 다들 자신의 직감에 그렇게 자신이 없으십니까?

의심하면 누가 불벼락이라도 내릴까봐 두려우십니까?



인간의 고통은 사실 많은 부분이 두려움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잃으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

이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두려움. 내가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

사실 이러한 두려움은 영적 진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면서, 또한 그것을 극복했을 때 더 큰 진화로 이끌어

주는 스승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합니다.

물론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동전 그 자체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동전의 존재가 있다는 자각을 가졌을 때 더 이상 그 동전의 앞면과 뒷면 중 하나에 휘둘리는 삶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자각이 있고 없고가 자유 의지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두려움에 자신을 내맡기는 삶은 동전의 한 면이 세상의 전부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자신을 믿고 그 두려움을 뛰어 넘어 보세요.


물음 7 - 왜 세상에는 못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요?

개신교에서 신도를 현혹하는 가장 큰 무기는 물질적 풍요입니다.

그거 봐라 이 사람은 하나님 잘 믿어서 물질적인 풍요를 얻었다.

저 사람은 신앙이 없어서 가난하게 산다. 저 사람들은 마귀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이런 말씀들을 하지요.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우월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 그들의 역할을 할 뿐이지요.

이번 생에서는 부자가 다음 생에서는 거지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이번 생에서는 거지가 다음 생에서
부자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부자가 거지보다 더 좋다는 것은 이 지구에서의 관점일 뿐입니다.


그 놈의 돈, 돈, 돈

하나님 믿어 부자되세.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눈에 안 들어오시나 봅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


사실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영혼의 세계에서 지구상의 재물은 그저 하나의 경험일 뿐입니다. 재물이 많다고 더 우월한 것도 재물이

적다고 더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지구상의 재물은 한정되어 있으니, 부자의 역할을 할 사람은 소수겠고, 가난한 역할을 할 사람이 다수겠지요.

그러나 영혼에게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재물로 신앙을 가늠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들의 신앙은 신을 향한 것이 아닌 재물을 향한 것일 뿐입니다.


끝없는 영혼의 여정에서 겨우 몇 십년 움켜쥐는 재물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살 때

재물이 많으면 육신이 있는 동안은 편하겠지요.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그러면 이건희 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믿음이 깊은 사람이겠네요?




선과 악이 동전의 앞면과 뒷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행복과 고통 또한 동전의 앞면과 뒷면일 뿐이고,

재물이 있고 없음도 역할 놀이일 뿐입니다.

자신의 삶에 주어진 사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만약 재물이 꼭 필요하다면 수호천사들이 그에 합당하게
재물을 쌓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영혼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지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낙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자칫 재물의 달콤함에 취하여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을 못 보게 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프리카와 같은 나라는 경제력이 낮고 사람들이 일찍 죽습니다.

정말 가슴아픈 일이지요. 제가 한국에서 이렇게 편히 사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냉정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들 또한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저도 지구에서의 윤회 초기 단계에서는

오지에서 원시인으로 살고 일찍 사고로 생을 마감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삶의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삶이 주어진 것이고, 결국 그 삶과 지금의 삶에 낫고 못하고가

없음을 알 뿐입니다.


신앙심이 깊어서 부자가 된다는 본말전도의 사고를 버리지 못하는 한 진정한 구원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좀 강하게 나왔네요. 정신 차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