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물음별로 따로 올리기도 하지만, 모든 물음을 한데 모은 글 링크도 같이 남겨 놓습니다.질문은 아래 링크에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http://pann.nate.com/talk/317763794구원을 위해서 현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앙에 전념해야 할까요?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사실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다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직 덜 깨달은 의식과 덜 깨달은 육신을 지닌 영혼이 있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또한 결국 시간적인 앞과 뒤의 문제이지 끝없는 영혼의 진화의 여정에서, 그 시간 차이는한 순간에 불과합니다.내가 먼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깨달은 것 같다고 우쭐해하지 말 것이며, 나보다 조금 덜 깨달은 사람을보고 우월감을 가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나는 진화의 여정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단지 인간의 영혼은 이 지구에서 경험을 하기 위해 육신을 입었을 뿐이지요.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면 윤회를 반복하여 더 많은 경험을 쌓을 것이고, 경험이 충분하다면 이제 윤회를마치고 다음 단계의 진화를 위해 지구를 떠날 뿐입니다.그런데, 한 가지 신앙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이 지구에서 주어진 삶 또한 자신들의 영혼의 진화를 위해 겪어내야 할 배움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탁 트인 공터에서 달리는 것과, 모래 사장 위에서 달리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힘들까요?당연히 모래 사장 위에서 달리는 것이 더 힘들겠지요.그리고 공터에서 달릴 때와 물 속에서 달릴 때를 비교하면 물 속에서 달리는 것이 더 힘듭니다.지구의 삶이란 굳이 비유하자면 물 속에서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물속에서 달릴 때 공터에서 달리는 것보다 더 힘들지만 더 많은 운동이 되듯이, 지구상에서 육신을 가진 삶을 제대로 살아낼 때 더욱 영혼은 많은 것을 배웁니다.기독교에서 사실 사탄이나 마귀를 이야기하지만, 그 개념이 다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탄압하는 용도로사용되고 있습니다.사탄이나 마귀는 사실은, 그 인간의 영혼이 얻어야 할 경험을 빼앗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입니다.영혼의 배우는 것에 있어, 가장 큰 전제 조건은남이 나에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그것을 경험한다는 자각입니다.고통이 나에게 닥치지만, 그것에 대해 원망하기만 하면 결국 그 고통은 제게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못합니다.경험이 주는 고통에 휘둘리게 되어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면 모처럼 힘겹게 겪은 고통의 경험은 결국사탄과 마귀에게 뺏기게 됩니다.제가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범죄자들을 인터뷰해 보면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나는 잘못한게 없는데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입니다.내재론과 외재론으로 구분할 수도 있는데, 진정으로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내재론자가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여기서 내재론을 오해할 수 있는게,모든 나쁜 일을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는게 내재론이 아닙니다.만약 '내 탓이긴 한데, 이는 내가 힘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당한 것이 잘못일 뿐이야.'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또한 내재론의 탈을 쓴 외재론일 뿐입니다.나의 구원을 누군가를 믿음으로서 얻는다는 것 또한 사실은 외재론일 뿐이지요. 내 자신은 결국 내가 구원할 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수호천사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모든 인간에게는 수호령 또는 수호천사가 붙어 다닙니다. 그 수호천사는 다른 영일수도 있고, 아니면 나의 상위 영혼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호 천사는 누군가를 열심히 믿을 때 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닌,내가 진정한 '나'라는 존재로서, 그리고 모든 경험의 주체가 '나'로서 현실을 헤쳐나갈 때뒤에서 나를 지원해주는 존재입니다.보통 '사명'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인간에게는 모두 부여받은 '사명'이 있습니다.이 '사명'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무사히 마치는 것이 사명입니다.꼭 높은 자리에 올라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모아서 떵떵거리고 사는 게 사명이 아닙니다.이 사명은 제가 찾아주는 것도, 하느님이 찾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의 직관과 체험에 의해서 발견하는 것일 뿐입니다.다만 이 진정한 사명을 알고 그것에 부합하는 삶을 살 경우, 물질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 모두에서이 수호천사 또는 수호령이 인간을 지원하게 됩니다.그것이 물론 독실한 종교인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 사명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것일 수도, 테레사 수녀처럼 봉사에 헌신하는 것일 수도, 아인슈타인처럼 학문적 발전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 사명에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고는 없습니다.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살아가는 것이 결국 궁극적인 진화로 이어지는 길입니다.그렇기 때문에신앙에 모든 것을 바치고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 아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내가 삶에서 겪는 경험의 진정한 '주체'가 되어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혼의 여정의일부입니다.
물음 5 - 현실 생활과 신앙 중 어떤 것이 중요한가?
질문은 아래 링크에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pann.nate.com/talk/317763794
구원을 위해서 현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앙에 전념해야 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직 덜 깨달은 의식과 덜 깨달은 육신을 지닌 영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결국 시간적인 앞과 뒤의 문제이지 끝없는 영혼의 진화의 여정에서, 그 시간 차이는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깨달은 것 같다고 우쭐해하지 말 것이며, 나보다 조금 덜 깨달은 사람을
보고 우월감을 가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나는 진화의 여정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인간의 영혼은 이 지구에서 경험을 하기 위해 육신을 입었을 뿐이지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면 윤회를 반복하여 더 많은 경험을 쌓을 것이고, 경험이 충분하다면 이제 윤회를
마치고 다음 단계의 진화를 위해 지구를 떠날 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신앙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지구에서 주어진 삶 또한 자신들의 영혼의 진화를 위해 겪어내야 할 배움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탁 트인 공터에서 달리는 것과, 모래 사장 위에서 달리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힘들까요?
당연히 모래 사장 위에서 달리는 것이 더 힘들겠지요.
그리고 공터에서 달릴 때와 물 속에서 달릴 때를 비교하면 물 속에서 달리는 것이 더 힘듭니다.
지구의 삶이란 굳이 비유하자면 물 속에서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물속에서 달릴 때 공터에서 달리는 것보다 더 힘들지만 더 많은 운동이 되듯이,
지구상에서 육신을 가진 삶을 제대로 살아낼 때 더욱 영혼은 많은 것을 배웁니다.
기독교에서 사실 사탄이나 마귀를 이야기하지만, 그 개념이 다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탄이나 마귀는 사실은, 그 인간의 영혼이 얻어야 할 경험을 빼앗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입니다.
영혼의 배우는 것에 있어, 가장 큰 전제 조건은
남이 나에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그것을 경험한다는 자각입니다.
고통이 나에게 닥치지만, 그것에 대해 원망하기만 하면 결국 그 고통은 제게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못합니다.
경험이 주는 고통에 휘둘리게 되어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면 모처럼 힘겹게 겪은 고통의 경험은 결국
사탄과 마귀에게 뺏기게 됩니다.
제가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범죄자들을 인터뷰해 보면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
"나는 잘못한게 없는데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입니다.
내재론과 외재론으로 구분할 수도 있는데, 진정으로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내재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재론을 오해할 수 있는게,
모든 나쁜 일을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는게 내재론이 아닙니다.
만약 '내 탓이긴 한데, 이는 내가 힘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당한 것이 잘못일 뿐이야.'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또한 내재론의 탈을 쓴 외재론일 뿐입니다.
나의 구원을 누군가를 믿음으로서 얻는다는 것 또한 사실은 외재론일 뿐이지요.
내 자신은 결국 내가 구원할 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수호천사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수호령 또는 수호천사가 붙어 다닙니다.
그 수호천사는 다른 영일수도 있고, 아니면 나의 상위 영혼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호 천사는 누군가를 열심히 믿을 때 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닌,
내가 진정한 '나'라는 존재로서, 그리고 모든 경험의 주체가 '나'로서 현실을 헤쳐나갈 때
뒤에서 나를 지원해주는 존재입니다.
보통 '사명'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요? 인간에게는 모두 부여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마치는 것이 사명입니다.
꼭 높은 자리에 올라가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모아서 떵떵거리고 사는 게 사명이 아닙니다.
이 사명은 제가 찾아주는 것도, 하느님이 찾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의 직관과 체험에 의해서 발견하는 것일 뿐입니다.
다만 이 진정한 사명을 알고 그것에 부합하는 삶을 살 경우, 물질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 모두에서
이 수호천사 또는 수호령이 인간을 지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물론 독실한 종교인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것일 수도, 테레사 수녀처럼 봉사에 헌신하는 것일 수도, 아인슈타인처럼 학문적 발전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에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고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살아가는 것이 결국 궁극적인 진화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 모든 것을 바치고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 아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삶에서 겪는 경험의 진정한 '주체'가 되어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혼의 여정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