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열 일곱 때 쯤 이었나. 성적은 지지리도 안 나오고 학원 같이 다니자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첫 발 걸음을 들인 날. 너랑 나는 같은 반이 아니었어. 그냥, 분반하는 수업에 의해 잠깐 스치는 사이, 그리고 내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 그 뿐. 난 뭐 저렇게 남자애가 열 일곱이나 먹고 장난기가 많나 싶었지. 그래, 심하지는 않았으니까. 얼떨결에 같이 당하기도 하고 웃고 그랬던 거 같아. 그 때만 해도 그냥 너는, 내게 첫 인상을 이렇게 남겨 줬어.
키 큰, 키가 무지막지하게 큰 까불이.
그래, 나는 키가 150 대 밖에 안 되는 꼬마매미인데 반해, 너는 180이나 되는 고목나무였으니까. 고목나무에 매미란 말은 꼭 우리 둘을 두고 하는 말 같았지. 우리 틈만 나면 쉬는 시간에 세-네 명이서 우르르 몰려 서로 발장난 걸기에 바빴고 때로는 정말 아파 째려보거나 헛걸리면 웃기도 하면서 시간 함께 보냈던거, 기억나니?
한 참을 그렇게 친해질 무렵, 네가 번호도 따고 문자도 하면서 점점 더 가까워져 갔지. 어느 날은 네가 그러더라.
"너 내 첫 인상이 어땠어?"
음, 한참을 생각했지만 별반 훌륭한 말은 나오지 않더라구.
"우와- 키 크다. 요거!"
"야야, 고작 그게 다냐? 아, 이거 실망이네."
그러면서 너는 나에게 별명을 붙여 달라고 징징 거렸었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네 이름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어.
네 이름에는 '목'자가 들어가니까 음-.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나는 건, '나무' 거기다가 너는 나에 비해 키가 무지막지하게 크지? 그러면, 키-. 키.. 그러니까...
아,
"키다리나무!"
내가 생각해도 정말 절묘한거야. 이걸 생각하면서 웃음도 났어. 문자로 막바로 보내주니까 반응이 아주 좋던데?
"야, 너 대박. 너 작명해라, 작명!"
그 때부터 우린 더 친해졌고, '키다리나무'가 나에게 소중한 '나무 한 그루'가 되기 까지는 얼마 크게 안 걸렸더랬지, 아마.
#2. 그깟 과자 쯤은 얼마든지 사 줄 수 있어!
학원을 계속 다녔으니 너하고 보낼 시간은 점점 더 많아졌어. 조금 아쉬웠던 건, 우리는 분반에 의해 갈라져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는 거? 나는 내 친구와 계속 수업을 함께 들었고, 어느 날 우연히 네가 없는 네 반, 네 자리에 가서 수업을 듣게 됐지.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내 친구가 책상 아래로 갑자기 고개를 휙 내리더니 싱글생글 웃으면서 봉다리 하나를 책상에 올려놓는거야.
"우와, 득템했다- 득템!"
"응? 이거 뭐야?"
"아싸, 우리 이거 먹자, 얼른!"
"누구 껀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먹어-"
"여기 떡-하니 써 있네. 한씨 이름. 걔 꺼잖아. 걔 꺼는 먹어도 돼."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손은 네가 사 놓은 양파링에 가 있더라고. 사이 좋게 친구랑 나눠 먹고 복도에서 마주치는 네 얼굴을 슬쩍 모른 척 했지. 그런데 그 날 학원 끝나고 버스타러 갈 때 까지도 너는 모르는 거 같더라. 그래서 귀띔을 좀 했어.
"그.... 있잖아."
"어? 뭐?"
"너 오늘 과자.... 양파링? 고거 사서 먹을라 하지 않았어?"
"응? 아, 맞다. 아이씨, 그거 내 자리에 있는 건데 까먹고 있었네. 누가 벌써 먹었겠지-. 잠깐, 근데 너 그거 어떻게 아냐? 뭐야 너 ㅋㅋㅋㅋ"
뜨끔-. 그래도 이실직고를 해야 좀 덜 맞을 거 같더라고 ㅋㅋㅋㅋㅋ
"그....거 나랑 다인이가 먹...."
그런데 네 표정이 갑자기 싹 굳어지는거야. 속으로 큰일났다 싶었어. 얼른 말 바꾸려고 막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핑곗거리를 만들었지, 근데 '먹은' 핑계는 도무지 없더라고. 에라이,
"누가 그거 먹으랬냐."
목소리만 듣고 있으면 정말 화난 거 같았어. 생각해보니까 나는 나대로 또 억울한 거야. 아니, 무슨 남자가 그거 하나 먹었다고 저렇게 쩨쩨하게 구는건지-.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거니까 기분은 또 풀어줘야지, 하면서 울상 짓고 네 얼굴을 봤는데-,
"ㅋㅋㅋ 너 표정이 그게 뭐야. 아서라, 그거 하나 먹는다고 뭐 내가 죽어? 너 배 안고팠으면 됐어-."
"아...... 그래도......"
"야야, 그깟 양파링 쯤은 얼마든지 더 사줄 수 있어! 뭘 그런거 가지고-. 너 버스 타 얼른, 나 간다!"
너는 정말 별 말 아니었겠지만. 버스 타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오랜만에, 두근두근 하더라.
'그 깟 양파링 쯤은 얼마든지 더 사줄 수 있어.'
그러면서 생각이 난 게, 내가 단거 먹고 싶다고 다인이한테 찡찡 거린 날, 갑자기 매점 올라가서 평소에 잘 먹지도 않던 허쉬 초콜릿 내 앞에서 몇 알 까먹고,
"아, 나 단 거 진짜 못 먹겠다-. 느네 다 먹어."
하면서 건네 준 초콜릿도 생각이 나더라고. 그 순간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지. 얘가 혹시 날 위해서 이러나- 하고, 하지만 그것도 그냥 내 착각이라 여겼어. 그런 생각 한 두번 해본 게 아니거든. 어쨌거나 너는 별명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별명이 바뀌었어.
"양파링 주고 간 키 큰 까불이"
줄여서, 양키 까불이.
어때, 무지 절묘하지 않아?
#3. 걔가 너 좋아하는 거 같아.
하지만 우습게도 난 그 때 남자친구가 있었지. 때문에 너랑은 크게 가까워지지 못했어. 하지만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아니지? 물론, 조금 골키퍼가 틈을 준 후에 느즈막이 골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각설하고, 학원에서 집에 가는 길에 타는 버스는 내 친구 다인이, 그리고 나와 내 남자친구가 차례로 앉아 갔어. 원래 다인이는 따로 앉고 나와 남자친구는 한 좌석에 함께 앉는데, 그 날 따라 다인이가 자꾸 남자친구 눈치를 보더라고.
"오늘은 나랑 같이 앉아가자, 나 할 말이 있거든."
별 거 아닐거라 생각하고 양해를 구했지, 남자친구는 아마 귀를 꽤 기울였던 거 같아.
"한씨가, 너 좋아하는 거 같아."
"에이, 나 남자친구 있잖아."
"야, 그러나마나 좋아하는 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어. 너 좋아하는 거야, 맞아."
사실 나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 문자가 여간 달달한 게 아니었거든. 너는 네 미니홈피 다이어리에도 나를 '천사'라 칭하며 은근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거든.
더군다나 내 방명록에도,
「 '내가 원래 이런 말 잘 안하는데ㅋ 너 너무 귀여운거 같아 ㅋㅋㅋ
사진 볼 때마다 느낀 점~~ㅋㅋ^^"
"넌 너무 착해~~"
"나 오늘 옷 정말 이상했거든 ㅠㅠ 오늘의 난... 정말 답이 없었어 ㅋㅋ 너 보기도 민망했어 ㅠㅠ"
"난 너 같은 여자가 좋...더라 ㅎㅎㅎ" 」
이러니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지. 하지만 난 애써 부정했어. 그리고 그 날, 차에서 내린 뒤 남자친구는 나한테 역정을 냈고 결국 싸웠지. 그 때 나는,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왜 나한테 그래?"
라는 시덥잖은 별명만을 늘어놓으며 애써 덮으려고만 했지, 미안해.
#4. 저, 저기 잠깐만. 그게 아니라....
남자친구와는 끝내 헤어졌어.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거든. 덕분에 힘들었던 나에게는 네가 나무 밑둥만큼이나 편안한 존재가 되었지. 너는, 끝내 그렇게 나무인가봐. 그리고, 네가 들어올 자리도 점점 넓어졌고. 버스까지 데려다 주는 선을 넘어서, 이제는 같이 차를 타고 데려다 주는 관계까지 갔어. 버스를 탈 때는 물론이고 집까지 데려다 주러 걸어가는 통에 대화도 많아지고.
나는 너랑 스치는 스킨십도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을 만한, 그런 사이라 생각했는데 넌 정말 아니었나봐.
그렇게 집에 가고 있는데 갑자기 골목 쪽으로 차가 들어서는 거야. 아차- 싶어서 얼른 내 쪽으로 네 팔을 꼭 잡고 끌어당겼어. 아무 생각없이 팔을 놓고 걸어가는데 옆이 허전하네.
"저기요, 뭐하세요. 안 오고ㅋㅋㅋㅋ"
"......"
"응? 너 왜 그래?"
"아, 아냐! 가!"
한 겨울에 밤이라 얼굴색은 잘 비치지도 않는데, 왜 난 네 얼굴이 빤히 다 보였을까.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그 얼굴이. 너, 단풍나무였니?
"잠깐, 너 설마...... 지금 내가 팔 잡아 끌어서 그런거야?"
"......"
"야, 야 잠깐 ㅋㅋㅋㅋ 얔ㅋㅋㅋㅋㅋㅋㅋ 아우 미치겠닼ㅋㅋㅋㅋㅋㅋㅋ"
팔 한 번 당긴 것 뿐인데 그 스침에 그렇게 떠는 남자는 처음봤다 나는, 그 날. 게다가 패딩이라 내 손의 온기는 느껴지지도 않았을텐데. 덕분에 꽁꽁 언 입 좀 풀었어, 고마워.
"아, 참 남자가 그리 부끄러워해서 쓰나-. 이리 와봐!"
나는 아무 생각없이 네 굳은 팔 사이로 내 팔을 끼워넣었지. 그러자 헤- 벌어지다 못해 동시에 굳어서 어쩔 줄 모르는 네 입.
"ㅋㅋㅋㅋ 내가 너 때문에 못 살겠닼ㅋㅋㅋㅋㅋ 이것도 떨리나ㅋㅋㅋㅋㅋ"
"으흐흐....."
어색하게 웃으며 걸쳐진 팔을 고쳐잡던 너, 부끄러워하긴.
그게 아마 우리 첫, 스킨십. 맞나?
#5. 나 소원 좀 들어줄래?
"나 지금 볼링장에 왔어, 쭈이짝꿍!"
아, 맞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짝꿍"이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했어. 원내 연애는 금지에 퇴원까지 동반했거든. 때문에 사귄다는 소문을 뒤로하고 그냥 많이 친하다는- 핑계를 가지고 가까이 붙어 다녔지.
"커플" 대신 "짝꿍" 이라... 때문에 너는 많이 섭섭해했지만 아무튼,
"볼링장? 볼링 잘 해?"
"아이, 그냥 좀 치는 편? ㅋㅋㅋㅋ"
"좀 치나 부네~ 증명을 해 봐요, 증명을!"
"그럼 나 소원 하나만 들어주라!"
으잉, 소원? 뭐 못 들어줄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나라고 못 들어주겠냐.
"뭔데?"
"나 이거 스트라이크 치면, 소원 들어줘!"
나는 증명을 해 달라고 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어.
아, 물론 그렇게 계산하고 들어준 건 아니야, 믿어줘 T.T
잠시 후, 너는 볼링전광판? 아무튼 점수가 나온 사진을 내게 보내왔고, 나는 꼼짝없이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 당시 우리는 '팔 끌어당긴 사건' 이후로 팔짱 정도? 는 OK.
(스압주의) 몰래 과자 먹은 걸로 시작했지, 아마.
#1. 학원이 무슨 죄야.
내 나이 열 일곱 때 쯤 이었나. 성적은 지지리도 안 나오고 학원 같이 다니자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첫 발 걸음을 들인 날. 너랑 나는 같은 반이 아니었어. 그냥, 분반하는 수업에 의해 잠깐 스치는 사이, 그리고 내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 그 뿐. 난 뭐 저렇게 남자애가 열 일곱이나 먹고 장난기가 많나 싶었지. 그래, 심하지는 않았으니까. 얼떨결에 같이 당하기도 하고 웃고 그랬던 거 같아. 그 때만 해도 그냥 너는, 내게 첫 인상을 이렇게 남겨 줬어.
키 큰, 키가 무지막지하게 큰 까불이.
그래, 나는 키가 150 대 밖에 안 되는 꼬마매미인데 반해, 너는 180이나 되는 고목나무였으니까. 고목나무에 매미란 말은 꼭 우리 둘을 두고 하는 말 같았지. 우리 틈만 나면 쉬는 시간에 세-네 명이서 우르르 몰려 서로 발장난 걸기에 바빴고 때로는 정말 아파 째려보거나 헛걸리면 웃기도 하면서 시간 함께 보냈던거, 기억나니?
한 참을 그렇게 친해질 무렵, 네가 번호도 따고 문자도 하면서 점점 더 가까워져 갔지. 어느 날은 네가 그러더라.
"너 내 첫 인상이 어땠어?"
음, 한참을 생각했지만 별반 훌륭한 말은 나오지 않더라구.
"우와- 키 크다. 요거!"
"야야, 고작 그게 다냐? 아, 이거 실망이네."
그러면서 너는 나에게 별명을 붙여 달라고 징징 거렸었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네 이름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어.
네 이름에는 '목'자가 들어가니까 음-.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나는 건, '나무' 거기다가 너는 나에 비해 키가 무지막지하게 크지? 그러면, 키-. 키.. 그러니까...
아,
"키다리나무!"
내가 생각해도 정말 절묘한거야. 이걸 생각하면서 웃음도 났어. 문자로 막바로 보내주니까 반응이 아주 좋던데?
"야, 너 대박. 너 작명해라, 작명!"
그 때부터 우린 더 친해졌고, '키다리나무'가 나에게 소중한 '나무 한 그루'가 되기 까지는 얼마 크게 안 걸렸더랬지, 아마.
#2. 그깟 과자 쯤은 얼마든지 사 줄 수 있어!
학원을 계속 다녔으니 너하고 보낼 시간은 점점 더 많아졌어. 조금 아쉬웠던 건, 우리는 분반에 의해 갈라져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는 거? 나는 내 친구와 계속 수업을 함께 들었고, 어느 날 우연히 네가 없는 네 반, 네 자리에 가서 수업을 듣게 됐지.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내 친구가 책상 아래로 갑자기 고개를 휙 내리더니 싱글생글 웃으면서 봉다리 하나를 책상에 올려놓는거야.
"우와, 득템했다- 득템!"
"응? 이거 뭐야?"
"아싸, 우리 이거 먹자, 얼른!"
"누구 껀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먹어-"
"여기 떡-하니 써 있네. 한씨 이름. 걔 꺼잖아. 걔 꺼는 먹어도 돼."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손은 네가 사 놓은 양파링에 가 있더라고. 사이 좋게 친구랑 나눠 먹고 복도에서 마주치는 네 얼굴을 슬쩍 모른 척 했지. 그런데 그 날 학원 끝나고 버스타러 갈 때 까지도 너는 모르는 거 같더라. 그래서 귀띔을 좀 했어.
"그.... 있잖아."
"어? 뭐?"
"너 오늘 과자.... 양파링? 고거 사서 먹을라 하지 않았어?"
"응? 아, 맞다. 아이씨, 그거 내 자리에 있는 건데 까먹고 있었네. 누가 벌써 먹었겠지-. 잠깐, 근데 너 그거 어떻게 아냐? 뭐야 너 ㅋㅋㅋㅋ"
뜨끔-. 그래도 이실직고를 해야 좀 덜 맞을 거 같더라고 ㅋㅋㅋㅋㅋ
"그....거 나랑 다인이가 먹...."
그런데 네 표정이 갑자기 싹 굳어지는거야. 속으로 큰일났다 싶었어. 얼른 말 바꾸려고 막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핑곗거리를 만들었지, 근데 '먹은' 핑계는 도무지 없더라고. 에라이,
"누가 그거 먹으랬냐."
목소리만 듣고 있으면 정말 화난 거 같았어. 생각해보니까 나는 나대로 또 억울한 거야. 아니, 무슨 남자가 그거 하나 먹었다고 저렇게 쩨쩨하게 구는건지-.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거니까 기분은 또 풀어줘야지, 하면서 울상 짓고 네 얼굴을 봤는데-,
"ㅋㅋㅋ 너 표정이 그게 뭐야. 아서라, 그거 하나 먹는다고 뭐 내가 죽어? 너 배 안고팠으면 됐어-."
"아...... 그래도......"
"야야, 그깟 양파링 쯤은 얼마든지 더 사줄 수 있어! 뭘 그런거 가지고-. 너 버스 타 얼른, 나 간다!"
너는 정말 별 말 아니었겠지만. 버스 타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오랜만에, 두근두근 하더라.
'그 깟 양파링 쯤은 얼마든지 더 사줄 수 있어.'
그러면서 생각이 난 게, 내가 단거 먹고 싶다고 다인이한테 찡찡 거린 날, 갑자기 매점 올라가서 평소에 잘 먹지도 않던 허쉬 초콜릿 내 앞에서 몇 알 까먹고,
"아, 나 단 거 진짜 못 먹겠다-. 느네 다 먹어."
하면서 건네 준 초콜릿도 생각이 나더라고. 그 순간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지. 얘가 혹시 날 위해서 이러나- 하고, 하지만 그것도 그냥 내 착각이라 여겼어. 그런 생각 한 두번 해본 게 아니거든. 어쨌거나 너는 별명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별명이 바뀌었어.
"양파링 주고 간 키 큰 까불이"
줄여서, 양키 까불이.
어때, 무지 절묘하지 않아?
#3. 걔가 너 좋아하는 거 같아.
하지만 우습게도 난 그 때 남자친구가 있었지. 때문에 너랑은 크게 가까워지지 못했어. 하지만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아니지? 물론, 조금 골키퍼가 틈을 준 후에 느즈막이 골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각설하고, 학원에서 집에 가는 길에 타는 버스는 내 친구 다인이, 그리고 나와 내 남자친구가 차례로 앉아 갔어. 원래 다인이는 따로 앉고 나와 남자친구는 한 좌석에 함께 앉는데, 그 날 따라 다인이가 자꾸 남자친구 눈치를 보더라고.
"오늘은 나랑 같이 앉아가자, 나 할 말이 있거든."
별 거 아닐거라 생각하고 양해를 구했지, 남자친구는 아마 귀를 꽤 기울였던 거 같아.
"한씨가, 너 좋아하는 거 같아."
"에이, 나 남자친구 있잖아."
"야, 그러나마나 좋아하는 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어. 너 좋아하는 거야, 맞아."
사실 나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 문자가 여간 달달한 게 아니었거든. 너는 네 미니홈피 다이어리에도 나를 '천사'라 칭하며 은근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거든.
더군다나 내 방명록에도,
「 '내가 원래 이런 말 잘 안하는데ㅋ 너 너무 귀여운거 같아 ㅋㅋㅋ
사진 볼 때마다 느낀 점~~ㅋㅋ^^"
"넌 너무 착해~~"
"나 오늘 옷 정말 이상했거든 ㅠㅠ 오늘의 난... 정말 답이 없었어 ㅋㅋ 너 보기도 민망했어 ㅠㅠ"
"난 너 같은 여자가 좋...더라 ㅎㅎㅎ" 」
이러니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지. 하지만 난 애써 부정했어. 그리고 그 날, 차에서 내린 뒤 남자친구는 나한테 역정을 냈고 결국 싸웠지. 그 때 나는,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왜 나한테 그래?"
라는 시덥잖은 별명만을 늘어놓으며 애써 덮으려고만 했지, 미안해.
#4. 저, 저기 잠깐만. 그게 아니라....
남자친구와는 끝내 헤어졌어.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거든. 덕분에 힘들었던 나에게는 네가 나무 밑둥만큼이나 편안한 존재가 되었지. 너는, 끝내 그렇게 나무인가봐. 그리고, 네가 들어올 자리도 점점 넓어졌고. 버스까지 데려다 주는 선을 넘어서, 이제는 같이 차를 타고 데려다 주는 관계까지 갔어. 버스를 탈 때는 물론이고 집까지 데려다 주러 걸어가는 통에 대화도 많아지고.
나는 너랑 스치는 스킨십도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을 만한, 그런 사이라 생각했는데 넌 정말 아니었나봐.
그렇게 집에 가고 있는데 갑자기 골목 쪽으로 차가 들어서는 거야. 아차- 싶어서 얼른 내 쪽으로 네 팔을 꼭 잡고 끌어당겼어. 아무 생각없이 팔을 놓고 걸어가는데 옆이 허전하네.
"저기요, 뭐하세요. 안 오고ㅋㅋㅋㅋ"
"......"
"응? 너 왜 그래?"
"아, 아냐! 가!"
한 겨울에 밤이라 얼굴색은 잘 비치지도 않는데, 왜 난 네 얼굴이 빤히 다 보였을까.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그 얼굴이. 너, 단풍나무였니?
"잠깐, 너 설마...... 지금 내가 팔 잡아 끌어서 그런거야?"
"......"
"야, 야 잠깐 ㅋㅋㅋㅋ 얔ㅋㅋㅋㅋㅋㅋㅋ 아우 미치겠닼ㅋㅋㅋㅋㅋㅋㅋ"
팔 한 번 당긴 것 뿐인데 그 스침에 그렇게 떠는 남자는 처음봤다 나는, 그 날. 게다가 패딩이라 내 손의 온기는 느껴지지도 않았을텐데. 덕분에 꽁꽁 언 입 좀 풀었어, 고마워.
"아, 참 남자가 그리 부끄러워해서 쓰나-. 이리 와봐!"
나는 아무 생각없이 네 굳은 팔 사이로 내 팔을 끼워넣었지. 그러자 헤- 벌어지다 못해 동시에 굳어서 어쩔 줄 모르는 네 입.
"ㅋㅋㅋㅋ 내가 너 때문에 못 살겠닼ㅋㅋㅋㅋㅋ 이것도 떨리나ㅋㅋㅋㅋㅋ"
"으흐흐....."
어색하게 웃으며 걸쳐진 팔을 고쳐잡던 너, 부끄러워하긴.
그게 아마 우리 첫, 스킨십. 맞나?
#5. 나 소원 좀 들어줄래?
"나 지금 볼링장에 왔어, 쭈이짝꿍!"
아, 맞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짝꿍"이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했어. 원내 연애는 금지에 퇴원까지 동반했거든. 때문에 사귄다는 소문을 뒤로하고 그냥 많이 친하다는- 핑계를 가지고 가까이 붙어 다녔지.
"커플" 대신 "짝꿍" 이라... 때문에 너는 많이 섭섭해했지만 아무튼,
"볼링장? 볼링 잘 해?"
"아이, 그냥 좀 치는 편? ㅋㅋㅋㅋ"
"좀 치나 부네~ 증명을 해 봐요, 증명을!"
"그럼 나 소원 하나만 들어주라!"
으잉, 소원? 뭐 못 들어줄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나라고 못 들어주겠냐.
"뭔데?"
"나 이거 스트라이크 치면, 소원 들어줘!"
나는 증명을 해 달라고 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어.
아, 물론 그렇게 계산하고 들어준 건 아니야, 믿어줘 T.T
잠시 후, 너는 볼링전광판? 아무튼 점수가 나온 사진을 내게 보내왔고, 나는 꼼짝없이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 당시 우리는 '팔 끌어당긴 사건' 이후로 팔짱 정도? 는 OK.
그래도 설마 그게 소원일 줄이야.
"우와, 진짜 스트라이크네? 대박!"
"ㅋㅋ 나 소원 들어줄꺼지?"
"그러니까, 글쎄. 뭐냐구요-."
"아, 근데 그건 지금 말하면 안되는데......"
뭐지, 싶었지만. 아니, 솔직히 대충 짐작도 갔지만 모른 척 했어. 순수하고 싶었어, 나도!
"싱겁긴, 알았어요. 보류!"
그 걸로 나는 넘어갈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
#7. 그냥, 우리 같이 지옥 가자.
그 소원은 끝이라 생각했는데. 원래 아쉬운 사람이 더 잘 안다나 뭐라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같이 하원하는 길에 네가 우물쭈물-.
"아고, 춥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가요-."
"아, 나 근데 지금 가면 안되는데."
"응?"
"나 소원 있다고 했잖어!"
"ㅋㅋㅋ 그래서 그게 뭔지 알려줘야 들어주지!"
"음... 근데 있잖아,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응? 사람 많은 거랑 네 소원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ㅠㅠ 나 추워 ㅠㅠ 얼른!"
"그러니까, 그게 여기서 하면 안되는 소원인데.."
"그래서 뭐요!ㅠㅠ"
"우리 놀이터 가자."
응? 이 추운데 뭔 놈의 놀이터람.
어쨌거나 소원이라니까 나는......
놀이터 벤치에 앉았는데, 우와 너무 추운거야.
그래도 하나도 안 추운 척 하면서 덜덜 떨었지.
"그래서, 소원! 뭐!"
"나 너가 처음이야."
"......뭐?"
"나 소원 들어줘."
뭔 말 인지는 눈치 챘지. 그래도 아는 척 하기는 싫었어.
"......."
"나 너랑, 첫 키스 하고 싶어."
몰랐던 건 아니지만, 설마 했다지만.
정말 그 말이 네 입술을 타고 나올 지는 몰랐어.
나는 전 남자친구랑 첫 키스를 해본 유 경험자이고.
너는, 나보다 경험 없고 그리 순수한. 그래......
뭔가 많이 미안했어.
내가 너를 더럽힌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더 주저했는지도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눈치없게.
"......너 나한테 고백, 안 했잖아..."
"그래서, 지금 우리 사귀는 거 아니야?"
그래, 그 말에 할 말은 없더라구.
그런데, 딱히 할 만한 핑계가 없더라.
네 그 소원 말고는.
하지만 너도 키스는 처음이기에 딱히 뭐라 할 수 없었나봐. 핑계라고는 그거 딱, 하나 뿐이었으니까.
한참을 침묵, 그 침묵이 너무 무섭고 힘들었는데.
그 순간, 네가 무릎을 탁 치더니. 그 침묵을 깨더라.
"그냥, 우리 같이 지옥 가자."
그 말 끝에 다가오는 네 얼굴, 덮이는 입술. 감기는 눈.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이상야릇한 감촉.
그 한겨울 그렇게 추웠는데, 나는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어.
생각외로 처음이 아닌 것 같이 잘하던데, 덕분에 분위기는 더 이상해졌지.
몇 분이 흘렀을까. 입술을 떼고 난 뒤.
"흠, 흠......"
"......가자."
와, 정말 그 어색함이란.
원래 연인들이 첫 키스하면 다 이런건가, 싶을 정도로.
나는 경험이 있어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처음이라는 너는 정말 처음같지도 않고 매우 태평하더라.
오히려 나는 그게 더 섭섭했어.
"첫 키스......맞지?"
"어? 응......"
"근데 뭐 이리 잘하냐... ㅋㅋ"
"뭘 잘해, 잘하길......"
"아무 느낌 안 들었지?"
"......응."
이 말 듣는데, 괜히 창피하고 기분이 안 좋더라.
내가 너무 소극적으로 다가갔나, 싶기도 하고.
첫 키스라는데 종이 귓가에 울리고 뭐고 아무 느낌 안 들었다니.
그게 우리 첫 키스 였어, 기억나?
......물론, 넌 후에 나한테 이렇게 말했지만.
"자기야, 나 그 때 완전 흥분되가지고 어쩔 줄 몰라했던건데 ㅋㅋㅋㅋㅋㅋㅋ"
에라이, 이 늑대야.
#8. Epilogue.
시간이 무지막지하게 흘러 벌써 우리가 470일 여 가까이 사귀었어, 신기하지 ^-^
그 기간 안에 고백도 흐지부지했던 내 남자, 에라이.
그래도 지금 우리는 커플티도, 커플링도 함께 하고 있는 예쁜 커플 사이.
짝꿍이라고 어색하게 불렀던 그 순간과 달리,
지금은 자기야, 여보야, 그리고.
키다리나무와 애기가 아닌,
햇님과 달님.
내가 널 품은건지, 네가 날 품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 오늘도 하나 또 작명했다 여보.
우리는 '해를 품은 달' 이야 ^-^
한번 크게 싸우고 헤어졌을 때,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내가 널 많이 좋아했나봐.
연락을 하고 싶어서 수십번도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했었는데,
용기가 없어 그렇게도 못했고.
어찌어찌하다 우리는 친구란 명목 속에 다시 연락을 했고,
그로 인해 다시 붙었지.
"너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나도 그랬어, 여보.
그리고 나서 다시 얻은 호칭,
햇님과 달님.
처음엔 저게 뭐야! 했지만 보면 볼수록 아기자기하고 예쁜 게 딱 우리 같아. ^-^
한창 예민하고 힘들 때 만나 고생 많이 했고,
지금은 누구보다 당당하게 서로의 옆 자리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치?
우리 첫 만남을 생각하면서 쓴 글이야.
사랑해,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