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필연만 있습니다.

토루트막토2013.03.18
조회140

  고등학교 1학년 때, 펜팔을 통해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학교끼리, 같은 학년의 같은 반끼리 짝을 짓고, 그 다음 펜팔을 하고자 하는 친구들의 이름표를 무작위로 교환하여 상대방을 고르는 방식이었습니다.

 

  내 파트너도 정해졌습니다. '누굴까?', '예쁠까?', '목소리는 어떨까?' 호기심을 가득 품은 채, 30분만에 편지지를 골랐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보는 펜팔인지라 쓰기 전에 몇 시간씩 연습장에 연습을 해보고, 행여 손때라도 묻을까봐 비누로 손을 씻은 후에야 책상 속에서 편지지를 꺼냈습니다. 서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얼굴을 모른 채, 편지로서만 만났습니다.

 

  편지 속에서 우린 서로 너무 보고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상상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 더 멋있어 보였고, 또 순수해 보였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 않는 것을 무언의 규칙으로 지켜나갔습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면 이내 멋있는 글귀를 생각해내기 위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등하교 길에 마주치는 여학생 중, 그녀가 있을지 몰라 괜히 교복을 고쳐입기도 하고... 92년 가을 하늘을 온통 그녀 생각으로 채웠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무심코 신상정보를 물어봤는데, 친절히도 답장에 전화번호와 주소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견물생심이 발동했습니다. 전화통화로 만나자고 건의했습니다. 직접 만나는 것은 아니니, 순수성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밀어 붙였습니다. 다행히 그녀가 동의했습니다. 편지로 전화할 날짜를 정해 새벽 2시에 전화를 했고, 그녀는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도록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엄마에게 들키진 않았겠지?' 물어보며 가슴을 졸였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전화를 통해 속삭이고 웃었습니다. 당연히 다음 날이면 수업시간에 졸기 일쑤였죠. 선생님이 던지시는 분필에 맞아도, 또 뒷자리에 나가 의자를 들고 있어도, 부끄럽기는 커녕 무슨 훈장이라도 받은 듯, 목에 힘을 주고 다녔습니다.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녀를 만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최초 만나지 않기로 한 규칙은 깨지게 되지만, 용기를 내어 수화기에 대고 만나자는 말을 꺼냈습니다. 그녀 역시 처음의 약속과 어긋난다라고 생각했는지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드나봅니다.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냥 전화로만 만나도 재미있었는데 괜히 말을 꺼내가지고... 두려웠습니다. 만나기 싫다고, 이런 내 모습에 실망했다고 말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숨막히는 순간이었습니다. 대답을 해달라고 다그치지도 못했습니다. 드디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만나자."

 

  그녀를 처음으로 만난 곳은 어느 패스트푸드 점이었습니다. 약속 장소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온갖 잡다한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혹시 내 모습에 실망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만 만나자고 말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그녀의 모습이 상상 이하는 아닐까, 그래서 그동안 그리던 아름다운 모습이 깨지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뿐, 문을 열고 그녀의 얼굴을 보자 이내 말문이 트였습니다. 맘에 들었거든요. 그녀도 제가 싫지는 않았나 봅니다. 마치 전부터 계속 만나왔던 친구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대화 중, 그녀의 집이 내 집과 가깝다는 사실이 불연듯 생각났습니다. 몇 일 전 편지로 알려 준 신상정보 덕분이죠. 내친김에 새벽 2시에 그녀 집앞에서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각자 학생이라는 신분을 고려해서 공부할 것 다하고 만나자는, 나름의 건전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녀도 동의를 했습니다. 그날 밤은 내 평생 시간이 제일 느리게 흘러갔습니다. 10시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서 10분, 아니 5분마다 시계를 봤습니다.

 

  1시 45분. 미리 알려 준 약도대로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얀 가로등이 있고, 어느 집인지 멀리서 개가 짖는 그녀 집, 대문 앞이 우리의 데이트 장소였습니다. 매일 밤 그렇게 만났습니다. 새벽 안개도 멋있었고, 부르르 떠는 그녀 모습도 예뻐보였습니다. 지키지도 못하는 규칙이지만, 또 이번에는 15분씩만 만나자고 규칙을 정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계를 보면 항상 15분은 한참 지났죠. 

 

  어느 날 또 한가지 욕심이 생겼습니다. 입맞추고 싶었습니다. 인생의 첫 입맞춤을 그녀와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탁만은 좀처럼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통해 입맞춤 장면은 많이 봤지만,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도대체 생각이 안났습니다.

 "있잖아. 부탁이 있는데...어... 아니다. 다음에 하지뭐" 하며 매번 그냥 집으로 향했죠.

 

  드디어 입맞춤을 했습니다. 눈 딱 감고, 용기를 내어 말했죠. 당연히 그녀도 처음이랬습니다. 살며시 눈을 감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대었습니다. 입술이 닿는 순간, 분명 짜릿해지고, 달콤해진다고들 했는데, 저는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도망치듯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으로 입술을 만졌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서 입술이 따뜻해지며 그 느낌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연락을 안했습니다. 전화를 해도 그녀의 어머니가 받고, 편지를 해도 답장이 안왔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아니면 내가 그냥 싫어졌나, 답답했습니다. 그녀의 친구를 통해 계속 물어봐도 아무 연락도 없었습니다. 처음 경험해보는 이별이었습니다. 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고,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습니다. 홧김에 머리도 삭발하고, 음악한다고 잠시 공부를 중단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가슴의 빈 자리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같은 과에 다니는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남들이 우리를 보고'CC'라고 불러줬습니다.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고등학교 때의 그녀는 점점 기억에서 잊혀져갔습니다. 어느날 CC가 다른 사람 사귀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응? 어...고등학교 때 한 번."

  "왜 헤어졌어?"

  "응? 그 글쎄, 그냥 공부때문에..."

  "깊이 사귀었어?"

  "아...아니. 그냥 몇 번 만났다가 헤어졌어"

CC에게 예전 그녀와 첫 입맞춤까지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여인이 내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야 비로서 내 첫사랑은 고등학교 때의 그녀였음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혀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고 만났는데, 대학생이 되서, 또 다른 여자의 팔장을 끼고서야 고등학교 때 느꼈던 그 두근거림들이 첫사랑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시간은 점점 빨라져 2000년이 되었습니다. 군대도 다녀오고, 여자 친구도 몇 번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랑도 식상해져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젠 별로 사랑이라는 것도 두근거리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결혼 상대를 만나게 되겠지' 하는 무미건조한 연애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첫사랑만은 달랐습니다. 아직도 그 대문 앞만 생각하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고, 아직도 첫 입맞춤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만져보게 됩니다. 누군가 저에게 첫사랑이 누구였나고 물어보면 난 서슴없이 고등학교 때의 그녀라고 말합니다. 가끔 친구들과 술을 마실때 '넌 왜 아직도 여자 친구가 없냐?' 고 친구들이 물어오면 '능력이 안되니까 그렇지'하며 가볍게 웃어 넘깁니다. 그리곤 이내 고등학교 때 그녀 생각이 납니다. '지금쯤 뭐하고 사는지...'

  

 

 

  제 옆에 있는 아내가 자꾸 이 글을 엿보며 웃습니다.

 "야! 그 때 내가 뭘 머뭇거렸냐? 바로 대답했었잖아. 그리고 새벽 안개는 무슨... 그 때 한겨울이었거든?" 

 "아이 참! 그냥 글이잖아. 분위기 상 써주면 좋잖아."

 "야! 사실대로 써. 솔직한게 더 좋은거야."

 "싫어. 넌 인터넷이나 해!"

  난  세상에서 가장 우연스러운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필연적인 사랑도 하고 있습니다. 그 고등학생 그녀와 부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우린 우연히 만났고, 또 우연히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 주변 이들이 보통 그러하듯,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서로의 첫사랑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지독한 필연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것들은 필연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감히 단정지어 봅니다. 옆에 있는 아내가 제 어깨에 기댑니다. 글을 보더니 옛날 생각에 기분이 좋은가 봅니다. 나 역시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며,  처음 입맞추던 그 새벽이 11월이었는지, 12월이었는지를 더듬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