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들어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이 본격화되고 독립군과 일본군간의 교전 규모가 갈수록 커지자 일제(日帝)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본격적인 군사작전에 돌입하였다. 일제는 만주지역 각지의 영사관에 전투경찰병력을 크게 증가시켜 독립군 부대원들에 대한 체포와 탄압에 열을 올렸으며, 때로는 중국관헌을 회유·협박하여 이용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1920년 5월에 이르면 조선총독부의 경무국장 적지(赤地), 봉천성총영사 적총(赤塚), 길림독군 고문 재등(齋藤), 봉천독군 고문 정야(町野) 등은 봉천에서 간도지역 독립군 검거에 관한 사항을 협의하고 자신들의 결정사항을 동삼성 순열사 장작림(張作霖)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봉천에서는 상전(上田)과 판본(坂本) 2명의 일본인 경찰고문을 책임자로 하는 중·일합동수색대가 편성되어 독립군 부대원에 대한 체포와 독립군기지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활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이러한 활동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에 착수했음을 의미한다. 상전대(上田隊)는 1920년 5월 13일부터 7월 3일까지 흥경현(興京縣)·유하현(柳河縣)·해룡현(海龍縣)·통화현(通化縣) 등지에서, 판본대(坂本隊)는 5월 15일부터 8월 18일까지 안동현(安東縣)·관전현(寬甸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집안현(集安縣)·임강현(臨江縣)·장백현(長白縣) 등지에서 한족회(韓族會)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에 소속된 독립군 병사들을 체포·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는 국내언론에 대한 보도통제를 통해 독립군 토벌에 유리한 분위기 조성을 위한 준비를 갖추기도 하였다.『동아일보(東亞日報)』는 훈춘사변(琿春事變)이 발발한 1920년 10월 2일 이전인 9월 26일부터 무기정간당하였다. 총독부는 9월 25일자『동아일보』의 ‘제사문제(祭祀問題)를 재론하노라’는 사설 가운데 우상의 예로 일본의 신사(神社)가 봉안하고 있는 물품을 거론했다는 이유를 들어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으며, 이듬해인 1921년 2월 21일에 이르러서야 복간하도록 하였다.『조선일보(朝鮮日報)』의 경우도 1920년 8월 28일 강우규(姜宇奎) 의사(義士)의 사형에 관한 기사가 문제가 되어 정간된 이후 경신참변(庚申慘變)이 수그러지는 12월 2일에 복간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일제는 7월 16일 다시 중국당국을 강박하여 일본군 파견장교 재등(齋藤) 대좌(大佐) 등의 감시하에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중국군 제2혼성여단 보병 제1단장 맹부덕(孟富德) 부대가 동원되었다.
중국군이 토벌대를 편성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는 맹부덕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 중국군은 일본군의 간도침입의 구실을 막기 위하여 부득이 독립군 토벌을 위한 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독립군은 이와 같은 중국 측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 대책을 세워 상호 타협·행동한다. ㉡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 상에서 군복 차림이나 총기(銃器)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동함으로써 중국 측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 ㉢ 중국군은 토벌을 위한 출동 전에 독립군에게 그 내용을 사전에 통보하여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준비와 시간을 갖게 한다. ㉣ 중국인과 독립군은 서로 피전(避戰)을 약정하고 중국군은 출동해도 독립군을 공격하지 않고 독립군의 이동과 산림지대 등지에서 새 기지 건설 등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이 합의를 통해 독립군은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독립군의 전력을 보완할 수 있었다.
독립군과 중국군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자 대한국민회에서는 1920년 8월 하순부터 각 지방지회와 독립군 부대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통지하고 독립군 부대의 근거지 이동을 권고하였다. 근거지를 제일 먼저 옮긴 것은 명월구(明月溝)에 주둔하고 있던 홍범도(洪範圖) 휘하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었다. 이들은 안도현(安圖縣) 방면의 백두산록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의란구(依蘭溝)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안무(安武)의 국민단(國民團)도 안도현 방면을 향해 이동했다.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신민단(新民團)·의민단(義民團)·광복단(光復團) 등의 독립군도 근거지 이동을 시작하였다. 다만 왕청현(王淸縣)에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졸업식 때문에 이동을 미루고 있다가 중국군과 협의하에 9월 9일 사관연성소 생도들의 졸업식을 거행한 후 9월 17일에야 서대파(西大坡)를 이동하여 10월 12일~13일에 청산리(靑山里)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각지에 산재한 독립군은 청산리로 집결하는 등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⑵ 훈춘사변
중국군대를 이용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했던 일제의 계획은 처음부터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일제의 강압적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군은 9월 4일 대한독립군의 근거지였던 명월구에 도착하여 독립군의 막사만 불태우고 연길로 돌아왔다. 9월 19일에는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서대파에서도 비어있는 사관연성소 건물만 파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이미 1920년 8월에 확정한 ‘간도지방불령선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에 의거하여 직접 간도에 출병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제는 1920년 9월 12일과 10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장강호(張江好)의 마적단(馬賊團)을 이용하여 이른바 훈춘사변(琿春事變)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제2차 훈춘사변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약 4백명의 장강호 마적부대가 9월 25일 훈춘 북방의 번자구자(藩子溝子)에 출현하여 10월 2일 상호 5시 3문의 야포(野砲)를 동원, 훈춘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훈춘의 영사관 분관에 있던 일본인의 피해는 사망자가 14명(한국인 순사 1명 포함), 중경상자가 30여명이었다. 영사관에 구금되어 있던 한국인 3명과 중국인1명은 피살되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저들의 피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10월 4일자『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는 마적의 계통은 분명치 않으나 중국군이 얼마쯤 섞여 있었고 일본인을 습격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배일조선인이 있는 듯하다고 보도하였다. 같은 날짜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 발표에서도 ‘단순한 마적이 아니라 과격파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마적단은 독가스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장강호는 중야천락(中野天樂)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총독부 고등과장의 비호 아래 천우당약방(天祐堂藥房)에서 독가스를 만들어 한국인 살해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훈춘사변의 조작에 성공한 일제는 일본의 만주거류민 회장에서 일본인과 영사관의 보호를 위해 출병을 청원하는 전보를 당국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응하는 형식으로 나남에 있는 제19사단 안부(安部) 대대를 10월 2일 당일 훈춘으로 불법 파견하엿다. 이후 일본육군은 10월 6일부터 작전계획에 따라 각 부대를 간도의 중요지역에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해당 사단에 하달했다. 10월 7일 일본의 내각회의에서는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결정하였다.
조선총독부도 간도출병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매일신보』를 동원하여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기사를 게재하고 있었다. 10월 4일자 기사에는 ‘폭학잔인(暴虐殘忍)한 마적단의 소위(所爲)로 훈춘이 열화맹염(烈火猛焰)에 빠졌으며, 잔악무비한 마적은 여자까지 참살하고 남자는 총살하였음으로 일본수비대가 급행했다’고 보도하여 훈춘사변 이후의 정황을 호도하였다. 8월 21일자 기사에서는 ‘연길도윤 도빈이 지방치안을 문란케 하는 독립군들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였으며, 낭패를 당한 군정서는 그 근거지를 러시아 땅으로 옮기고자 한다’고 하여 독립군의 활동에 대해 중국당국이 반대의 입장인 것처럼 왜곡보도하였다.
10월 8일자에서는 4일 새벽 훈춘에서 일본통신병 40명과 독립군이 교전하여 조선인들은 50명의 사체를 버리고 패주하였는데 일본군은 14명이 부상당했을 뿐이라고 하엿다. 이밖에 같은 날 기사에서는 7일 저녁 일본군이 국자가에 도착하자 이곳에 재류하는 ‘일지인(日支人)’이 연연(然然)한 빛을 나타냈다고 하거나 독립군과 연결된 5백여명의 마적단이 두도구를 음습한다는 소문이 있어 이 지방 주민이 극히 혼란해지자 영사관 분관에서는 구원병의 파견을 요구하였다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한편 일제는 10월 16일 중국 측에 일본군이 10월 17일 자정을 기해 간도에서 군사작전을 실시할 것임을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일본군의 토벌작전지역은 중지철도(中支鐵道) 이남 20리 이외의 동녕·훈춘·연길·왕청 등 5개현이다. 둘째, 일본군대는 2개월 내의 최단 시일 내에 군사작전을 종료한다. 셋째, 일본군은 위의 지역 이외에서는 출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일제는 먼저 10월 2일 오후 2시에 국경에 배치돼 있던 경원수비대 80명을 침입시켰고, 이어서 경원헌병대 헌병 6명과 19사단 소속의 안부(安部) 소좌(少佐)가 이끄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 및 그 외에 국경수비대 30명까지 합하여 3일 밤까지 훈춘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또한 일제는 대체로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본군대를 신속하게 간도로 침입시키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두만강을 넘어 남방에서는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제19사단과 제20사단의 제78연대 제3대대, 그리고 헌병대 및 경관대가 연합하여 간도로 들어왔다. 이 병력은 다시 기림(磯林)·목촌(木村)·동(東) 지대(支隊)와 사단직할부대 및 국경수비대로 나뉘어 토벌구역을 분담하였다.
이들의 부대 구성과 작전지역을 살펴보면 기림직명(磯林直明) 소장(少將)이 총지휘하는 기림지대(磯林支隊)는 보병 제75연대, 보병 제78연대 제3대대, 기병 제27연대 제3중대, 포병 제25연대 제2대대, 공병 제19대대 제2중대와 헌병 약간이 병력 구성원으로서 경원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훈춘방면으로 진출하여 그 일대에 대한 토벌의 주력이 되며, 독립군을 나자구 방면으로 추격하여 삼차구(三差口) 방면에서 남진하는 포조군(浦潮軍)과 공동작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목촌익삼(木村益三) 대좌(大佐)가 총지휘하는 목촌지대(木村支隊)는 보병 제76연대, 기병 제27연대 제2중대 제1소대, 산포병 제1중대, 공병 제19대대 제1중대와 헌병 약간이 병력 구성원으로서 대한국민회·북로군정서 등을 대상으로 토벌작전을 수행하되, 특히 서대파·대감자·백초구·합마당 등지를 반복 토벌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동정언(東正彦) 소장(少將)이 지대장으로 있는 동지대(東支隊)는 보병 제73연대, 특종포대,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 기병 제27연대 일부, 포병 제25연대 제1대대 야포병·산포병 각 1중대, 공병 제19대대 제3중대와 헌병 약간이 병력 구성원으로서 회령 등지에서 월강, 용정 방면으로 진출하여 그 일원을 소탕하는 주력부대가 되었으며, 무산에서 북상하는 제20사단의 부대와 합동작전으로 독립군이 안도·돈화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초멸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밖에 사단직할부대로는 제19사단장 자작(子爵) 고도우무(高島友武) 중장(中將)의 휘하에 보병 제74연대 제1대대 본부와 제3중대, 비행기반·무선통신반·비둘기반으로 편성되었으며, 국경수비대가 있었다.
또한 동쪽으로 중·소 국경을 넘어 간도로 일제의 토벌군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일찍이 시베리아에 침범해 있던 포조(浦潮)파견군 제14사단·제11사단 토문자(土門子)지대, 제13사단 우입(羽入) 지대였다. 이들은 훈춘·초모정자·토문자·수분대전자(綏芬大甸子) 등에서 주력부대인 19사단과 연합하여 한인들을 학살·탄압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북쪽에서는 북만에 파견되어 있던 안서지대(安西支隊)가 보병중대 3개와 기관총대 4개, 기병소대 1개 병력으로 편성되어 간도로 진격해 왔으며, 마지막 서쪽으로는 관동군 제19연대 1개 대대 병력이 무순·흥경·통화·환인·관전·안동 등에, 그리고 기병 제20연대가 해룡·유하·통화·환인·관전·안동 등의 지방을 향해 침입해 왔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간도를 침입한 일제는 동서남북에서 포위작전을 통해 독립군을 압박하였으며, 일본군 병력은 제19사단의 약 9천명, 제20사단의 약 4천명, 제11사단에서 약 1천명, 안서지대에서 약 1천명, 관동군에서 1천 2백여명 등 총계 약 1만 8천명~2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외에 일제는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한인 집단거주지인 용정촌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한인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⑶ ‘연합독립군(聯合獨立軍)’ 편성과 응전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 참가한 독립군의 규모와 구체적인 전력은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서일(徐一)의「대한군정서보고(大韓軍政署報告)」와 같은 독립군 측의 기록,『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등 일제 측 기록의 내용을 통해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경우는 약 6백명의 정예병력과 1백명 가량의 보충대 병력이 1920년 10월 12일부터 13일 사이에 청산리 부근에 도착해 있었다. 청산리대첩 직전 북로군정서의 편제를 살펴보면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부장 나중소(羅仲昭),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 부관 박영희(朴寧熙), 중군장교 이민화·김훈·백종렬·한건원, 대대장서리 겸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熹), 제1중대장 서리 강화린(姜華鱗), 제3중대장 김찬수, 제4중대장 오상세 등이었다.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의 경우에는 홍범도가 직접 지휘하는 병력은 3백명~4백명이었으며, 연합부대(聯合部隊)의 형성을 위해 노력한 결과 청산리대첩 직전에는 4개 부대 병사 1천 6백여명의 큰 군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부대 편성은 허근(許根)·방우룡(方雨龍)·임춘산(林春山) 등이 지휘하는 의군단(義軍團) 혼성부대와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김성(金星)이 지휘하는 신민단(新民團) 등으로 구성되어 았었다.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당시 독립군의 병력규모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훈춘국민회(琿春國民會)·광복단(光復團)·대한의민단(大韓義民團)·신민단(新民團) 등을 합하여 약 2천명 정도였다.
전력상 절대적으로 열세인 독립군단들은 맹렬한 기세로 추격해 오는 토벌대를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불리했음에도 독립군단들은 10월 13일에는 이도구(二道溝) 합마당(蛤蟆塘)에서 대한국민회·대한신민단·훈춘한민회 등의 대표자들이 모여 홍범도(洪範圖)의 지휘하에 체계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작전 수행을 위해 병력과 군수물자를 동원하는 한편, 일본군의 동향에 대한 정보수집에도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대하국민회는 ‘광복사업의 성패(成敗)의 추(秋)’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한인(韓人) 매호당 10원, 모든 동산·부동산의 1/10을 군자금으로 모집하기도 하였다.
독립군단들은 용정촌(龍井村)과 두도구(頭道溝)·국자가(國子街) 등 큰 마을에 있는 상가지역을 방화하여 일본군이 숙영할 수 있는 곳을 없앴으며, 일본군의 동향을 상세하게 보고 받을 수 있는 지역간의 상호 연락망을 갖추었다. 이 연락망을 통해 독립군단은 작전지역에 도착한 일본군의 병종(兵種)과 인원, 도착시간, 통역하는 조선인 등의 이름까지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 중에 이동휘(李東輝)의 노력으로 러시아의 흑룡강 방면에서 총기(銃器) 1천 6백정이 군정서에 전달됨으로써 독립군의 전력과 자신감은 한층 더 고조될 수 있었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홍범도 연합부대는 김좌진의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와도 연합작전을 논의했다. 이 회의는 10월 10일 묘령에서 개최되었는데, 군정서의 부총재 현천묵(玄天默)과 길림분서고문 윤복영(尹復榮) 등이 주장하는 피전책(避戰策)은 주요 논의 대상이었다. 당시 독립군단은 일본군과 벌이는 대규모의 교전이 중국 정부의 반감을 야기하는 한편, 일본군의 병력증파를 야기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고 더 이상의 교전회피가 오히려 불리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고 판단되자 독립군은 전면적인 전투태세에 돌입하였으며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2.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청산리대결전은 일본군 토벌대 병력의 일부인 동지대(東支隊)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공격하기 위해 청산리 방면으로 진격해 오다가 1920년 10월 21일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백운평(白雲坪) 부근의 골짜기에서 기습공격을 받고 패퇴한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천수평·어랑촌·맹개골·만기구·쉬구·천보산·고동하 등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돌입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는 산전연대(山田聯隊)를 삼도구 방면으로 파견하여 10월 20일을 기해 북로군정서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도구에 주둔하면서 홍범도의 지휘를 받던 독립군 연합부대(獨立軍聯合部隊)도 동지대의 주력이 19일 오전 8시를 기해 이도구로 출동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기병과 포병을 포함하는 약 5천명의 전투병력으로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를 대상으로 10월 20일 총공격을 가하는 군사작전을 계획하였다. 이후 청산리대결전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접전을 벌인 주요 전투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⑴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
백운평 전투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가 1920년 10월 21일 산전연대(山田聯隊)를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골짜기에서 섬멸한 전투로,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승리였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이 독립군을 추격해 청산리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총사령관 김좌진은 이곳에서 일본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군사작전에 돌입했다. 이후 김좌진은 부대를 2개의 제대(弟隊)로 나누어 제1제대는 본대(本隊)로 자신이 직접 통솔하여 제2제대가 잠복한 지점의 건너편 사방정자(四方町子)의 산기슭에 배치하였다. 또한 제2제대는 연성대장 이범석의 지휘하에 3백명의 사관연성소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후위대(後衛隊)를 편성하여 최전선을 맡게 하였다. 그리고 교전지가 될 넓은 고지를 기준으로 우측 산허리의 1개 중대 병력은 이민화(李敏華)가, 좌측 산허리의 1개 중대 병력은 한근원(韓根源)이 각각 지휘를 맡게 하였다. 정면의 우측 1개 중대는 김훈(金勳)이, 좌측 1개 중대는 이교성(李敎成)이 각각 통솔하도록 하였다.
북로군정서의 독립군 장병들이 매복한 계곡은 지형적으로 보아 청산리 안에서도 계곡의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절벽이 높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 넓은 공지가 있어 골짜기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 공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세였다. 때문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북로군정서에게 있어서 지형조건은 상당히 유리했다. 북로군정서는 이러한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공지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매복하였다. 이민화 중대가 매복한 우측은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였고, 김훈 중대가 매복한 정면 우측은 경사가 90도나 되는 절벽이었다.
1920년 10월 21일 안천(安川) 소좌(少佐)가 지휘하는 1개 중대 병력의 일본군 전위부대는 독립군이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채 하루 전에 독립군 부대가 행군해 온 길을 따라 백운평지역의 공지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 전위부대의 전 병력이 공지 안에 들어서고 북로군정서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보 앞에 도달했을 때, 일시에 기습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는 6백여정의 소총(小銃)과 4정의 기관총(機關銃), 2문의 박격포(迫擊砲)를 동원한 집중사격으로 일본군 전위부대의 정면을 공격했다.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자 일본군도 대응사격을 전개했으나 독립군의 정확한 은폐지점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군의 반격은 효과적일 수 없었다. 20여분의 교전 끝에 2백여명의 일본군은 거의 전멸되는 패배를 당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또한 전위부대의 뒤를 이어 도착한 산전연대(山田聯隊)의 본대도 매복해 있던 북로군정서를 향해 필사적으로 응전하였으나, 이 역시 효과적인 공격이 되지 못하고 2백여명의 전사자만 더 낸 채 전사자들의 시체를 그대로 남겨두고 숙영지(宿營地)로 패주하였다. 이것은 북로군정서가 항일전(抗日戰)에서 획득한 최초의 완전한 승리였으며, 청산리대결전의 서전(緖戰)이었다.
백운평전투에서 완승한 북로군정서는 퇴각하는 일본군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이도구 방면으로 이동하여 밤을 새워 갑산촌(甲山村) 방향으로 행군하였다. 이는 산전(山田) 대좌(大佐)의 별동 기병대가 청산리를 향하고 있었음으로 이들에 의해 독립군의 행로가 차단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⑵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두번째 전투는 홍범도 연합부대와 일본군 동지대(東支隊)가 이도구의 완루구에서 1920년 10월 21일 늦은 오후부터 22일 새벽에 걸쳐 전개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 대해 독립군 측의 기록은 일본군이 자기편 군대를 독립군으로 잘못 알고 서로 사격해 큰 피해를 냈다고 하거나, 일본군이 홍범도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홍범도의「군중일지」에서 보면, 홍범도 부대가 완루구의 어느 마을에 들어가 머무르고 있는 사실이 일본군에게 알려지자 일본군 주력부대가 그곳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대공세가 펼쳐지는 상황에서 별다른 대책 없이 산간마을에 숙영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홍범도는 밤에 독립군 병사들을 집결하여 산 높은 곳에 매복시켜 놓았다.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일본군은 독립군이 마을에 있는 줄 알고 집중사격을 가하며 진격해 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범도 부대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온 일본군에 대해 독립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히 사격하였으며, 약 4백명의 일본군이 섬멸되었고, 독립군은 약 240자루의 총기(銃器)를 노획하였다. 이와 관련해 홍범도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날 밤으로 밀리거우 조분고려 둘러싸고 날 밝기를 저대하는 중에 나의 심정에 난솔하여 밤중에 군사를 취군(聚軍)하여 말리거우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밤을 새는 중에 날이 금시 밝자 대포소리 한 방 나더니 사방으로 미아소리가 천지 진동하면서 사격소리가 그치지 않고 단박에 말리거우 민간촌에 달려드니 인적이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으니 물론 어떤 웅덩이든지 몰수이 없대서 나갈 밤수을 얻는 중에 나의 군인 520명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벼락치듯 막 사격하니까 총천강 종지출 못할 것을 그려놓았다. 밤이 삼경되도록 진을 풀지 못하고 답세우다나니 다 잡았다. 장총 240정과 탄환 500발을 받아가지고 조선놈 사복하고 몸빠져 나가는 놈 여섯 놈을 부뜨러……”
완루구전투에서 대패한 부대는 반야대대(飯野大隊)와 지대(支隊) 예비대를 합친 5백명 내외의 부대였는데, 일본군은 후일『간도출병사』에서 밀림 중에 길을 잃어 남양촌에 이르러 숙영하였다고 얼버무리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완루구전투는 일본군끼리의 오인사격에 의해 큰 피해가 난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철저한 매복작전을 전개했던 홍범도 장군의 전술에 의한 승리였다.
⑶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
천수평전투는 백운평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 부대가 전개한 두번째의 전투였다. 백운평전투 이후 철수를 시작한 북로군정서는 22일 새벽 2시를 넘어 이도구 갑산촌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인근 주민으로부터 일본군 1개 기병중대 병력이 천수평 마을에 들어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 지휘관들은 천수평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기병대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독립군 병사들을 독려, 다시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월 22일 새벽 4시 30분경 이범석이 지휘하는 연성대를 선두로 북로군정서는 천수평 외곽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일본군 중대장 도전(島田) 중위(中尉)가 지휘하는 기병중대는 독립군이 아직도 1백리 밖의 청산리 부근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토성 안에 말을 메어놓고 민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북로군정서는 연성대의 김훈 장교에게 북쪽 산을 타고 나가 신속하게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이민화 중대에게는 천수평 남방고지를 점령하게 하였다. 또한 이범석은 2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동쪽에서 일본군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했다. 김훈·이민화 중대가 작전대로 예정한 지점에 도달하였고 이범석이 이끄는 2개 중대 병력이 냇물을 타고 천수평 동쪽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기병순찰대 보초가 독립군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 연성대도 일본군 기병중대가 자고 있는 촌락과 토성 안으로 집중사격을 가하며 돌격전을 감행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총성에 놀란 일본군은 허둥대며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으나 북로군정서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4명이 말을 타고 탈출한 이외에 1개 중대 전원이 몰살당하였다. 이들은 27연대 소속 기병중대였다.
⑷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
어랑촌전투는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이 거둔 승전(勝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전투였다. 10월 22일 오전 7시 30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이도구 어랑촌 서남방 표고 874호 고지 남측에서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연합부대가 함께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인 전투였다. 어랑촌은 경술병탄(庚戌倂呑) 이후 함북 경성군(鏡城郡) 어랑사(漁郞社)의 주민 10여호가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로 이도구에서 서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져 있었다.
전투는 어랑촌 일대에서 10월 22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북로군정서 병사 약 6백여명과 홍범도 연합부대의 전투병력 7백여명이 동지대(東支隊)의 1개 기병연대 병력과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정서 부대는 천수평전투 이후 곧바로 어랑촌 서남단의 고지를 일본군보다 먼저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천수평전투에서 노획한 일본군의 작전명령서에서 일본군의 주력이 어랑촌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김좌진의 부대는 부근의 874미터의 고지를 선점하고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얼마 후 일본군과 북로군정서 사이에 교전이 시작되었다.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던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의 돌격전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도 가납(加納) 대좌(大佐)가 직접 지휘를 맡아 오전 9시를 기해 독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병력을 추가로 투입한 일본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이때 완루구전투를 끝내고 안도현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던 홍범도 부대는 북로군정서가 많은 일본군과 혈전을 치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이날 오후부터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연합작전으로 일본군의 공격에 응전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 연합부대는 북로군정서가 있는 바로 옆 최고 고지에 진을 치고 일본군의 배후에서 기습공격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본군과 독립군은 숫자상으로 대등한 전력하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독립군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여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전투 초기부터 격전을 치러야 했던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의해 피해를 입었지만, 새롭게 전력을 보강하게 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할 수 있었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독립군 장병들은 보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굶주리며 대격전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물심양면으로 독립군을 후원하는 동포들의 도움에 힘입어 어랑촌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야음을 틈타 북로군정서는 산줄기를 타고 서북쪽으로 퇴각하였으며, 홍범도 부대도 북로군정서의 일부 부대와 합세하여 안도현 방면으로 철수함으로써 전투가 끝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군무부(軍務部)에서도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어랑촌 전투를 함께 수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첫째, 김좌진 부대는 어랑촌 후방고지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진로를 차단하였고, 홍범도 부대는 같은 고지의 최고 표고에 위치하여 지원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둘째, 일본군과의 전투는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각각 맹렬한 사격으로 함께 전개했다. 셋째,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승리하였다. 넷째, 철수할 때는 홍범도 부대가 점령한 고지의 최고 표고에서 김좌진 부대가 합류하여 일단 공동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병력을 나누었다.
어랑촌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가납(加納) 대좌(大佐)를 비롯해 다수의 전사자를 내었다. 북로군정서 사령부에서는 일본군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6백명으로 발표하였으며, 중국 관변(官邊) 언론인『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에서는 일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3백명으로 추산하기도 하였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어랑촌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이 3백명이라고 발표하였으며, 전투에 참전했던 이범석은 연대장 가납(加納) 대좌(大佐)를 비롯하여 1천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한 것으로 추산하고 독립군도 1백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회상하였다. 일제(日帝)는 패전의 사실을 숨긴 채 단지 전사자 3명, 부상자 11명이라는 허위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랑촌전투의 전황에 대해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이에 적군은 즉시 출동하여 전개진전(展開進展)할 새, 어랑촌(漁郞村) 전방 약 3리 허에 아군이 은폐 잠복한 고지에서 약 2백미터 되는 산곡에 그 본대가 도착하자 좌우고지에서 아군은 맹렬한 감제사격(瞰制射擊)을 시(始)하고 아군을 대항할 새, 적의 기병중재는 아군의 익측(翼側)을 위협하고 보병·포병은 소총·기관총으로 효과 무(無)한 사격을 아군의 정면에서 맹렬히 하여 위협적인 행동을 하나 천연적 지형이 유리함으로 아군은 조금도 피해가 무하니, 사기왕성하여 좌우 전방으로 침습(侵襲)하는 적을 대항할 새, 익측에서 무익한 동작을 하려는 적의 기병을 격퇴하며 정면에 재(在)한 다수 완강한 적을 맹렬 과감히 대항하니, 통쾌 비참한 대전투가 된다. 시(時)에 적은 지형이 불리하여 아의 감제사격을 수(受)하는 중에 피아의 거리는 불과 2백미터라. 적은 각 방면에 산재하였던 부대가 집중 증가되어 최종에는 아군 5배 이상 병력이 된지라. 연이(然而) 아의 여행대(旅行隊)는 적의 수색 기병대를 격멸한 후 우리의 본대에 집합하고 아군 제2연대도 예비의 점위(占位)한 최고의 표고(標高)로 퇴합(退合)하여 일제히 맹렬한 집중사격을 행하니, 적은 황겁한 중에 분개하여 산포·기관총으로 가치가 무한 사격을 위협적으로 맹렬히 하나 아군의 피해는 소무(少無)함으로 사기는 더욱 왕성하더라 점점 일모(日募)하던 중에 적은 지대(支隊)로, 아군도 퇴각하다.˝
어랑촌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북로군정서는 23일 아침 소부대를 편성하여 안도현 황구령(黃口嶺)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 오후 3시경에 맹개골 산림 속에서 일본군 기병 30명이 이 골짜기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 병사들은 곧 산림 속에 몸을 숨긴 후 접근해 오는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총격을 가하여 1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나머지는 패주시켰다. 이 전투에서 군마 5필, 군용지도 4장, 시계 5개, 기타 피복 장구 등을 노획하였다. 또한 북로군정서는 맹개골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만기구(萬麒溝)의 후방 산림 속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전방 약 100미터 지점에서 일본군 보병 50명이 행군해 오는 것을 발견하고 총격을 가하여 30여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패주시켰다.
쉬구에서도 한차례 교전이 있었다. 북로군정서가 10월 24일 아침에 산림 속에서 숙영을 하고 쉬구로 향하던 중 일본군 1백여명이 방심한 채 북로군정서 병사 50명이 있는 산림 쪽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공격하여 섬멸한 것이다. 또한 이때 일본군 기병 1개 소대 병력이 마을에 말을 매어두고 산개하여 산으로 올라오자 독립군은 이들을 향해 약 20분간 공격을 가하여 섬멸하였다.
⑸ 천보산전투(天寶山戰鬪)
천보산전투는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1개 중대 병력과 홍범도 부대의 일부가 10월 24일 저녁 8시와 9시경 두 차례, 25일 새벽 한 차례에 걸쳐 천보산(天寶山)의 서남쪽 부근에서 은(銀)·동광(銅鑛)을 지키고 있던 1개 중대 병력 규모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먼저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한 부대는 10월 24일 8시와 9시 두 차례에 걸쳐 천보산 부근의 일본군 1개 중대 병력을 공격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국자가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소대 병력의 증파를 요청할 정도로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또한 홍범도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독립군 1개 소대 병력도 10월 25일 새벽 식량조달을 위해 천보산 부근에 나갔다가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독립군으로부터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공격을 받고 당황한 일본군은 국자가에 있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의 증원을 요청하여 병력을 보충하였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일본군의 피해는 상당햇을 것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투보고서에는 독립군 2명이 전사했다고 하고, 자신들의 피해에 대래서는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재까지 이 전투에 대한 정확한 실상은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⑹ 고동하전투(古洞河戰鬪)
고동하전투는 청산리대첩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진 전투이다. 10월 25일 밤부터 26일 새벽 사이에 일본군이 홍범도 부대를 야습하였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한 전투였다. 고동하는 노령(老嶺)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화룡현 관내의 화룡향(和龍鄕)을 거쳐 안도현 관내로 들어가는 하천으로 송화강 수계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 전투에는 홍범도 연합부대와 대한국민회 경비대 등 약 4백명의 독립군 병력이 동정언(東正彦) 소장(少將)이 직접 거느리는 일본군 병사 150명과 총격전을 전개하여 2개 소대 1백여명을 전몰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홍범도 부대를 찾아 산림 속을 헤매던 일본군은 10월 25일 밤 10시경에 고동하 골짜기에서 홍범도 부대를 발견하고 12시 정각에 동정언 소장의 지휘를 받는 반야(飯野) 소좌(少佐) 휘하 150명의 전투병력을 앞세워 기습적인 돌격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용맹하게 반격을 가하는 독립군 연합부대와 약 45분간 치른 교전에서 일본군은 1백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전투에 대해 일본군의 전투 보고서에도 ‘동쪽 하늘이 점차 밝아오자 일본군 장졸의 얼굴마다 기쁨이 나타났다’고 회술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지대장인 동정언 소장의 직접 지휘를 받던 장교 반야 소좌는 일본군이 처음 출정했을 때는 1개 대대 병력을 통솔하는 대대장이었는데, 이들이 고작 150명 정도의 부대원만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는 것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일본군이 받았던 피해가 상당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간도지역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던 독립군 부대들도 각자의 활동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우선 백두산 산록을 향해 근거지 이동을 시작한 본대의 뒷수습을 위해 훈춘에 남아있던 독립군 병사들은 기림지대(磯林支隊)의 제1토벌대인 상판대대(上坂大隊)와 11월 4일 훈춘의 삼도구에서 일전을 벌였다. 나자구에 근거지를 둔 대의순의사회(大義旬議事會) 소속 의군대(義軍隊)인 최정국(崔正國) 중대는 기림지대의 제2토벌대인 아부대대(阿部大隊)와 교전하였다.
이밖에 11월 9일에는 김운서(金雲瑞)의 모험대(冒險隊) 30명이 훈춘 북방의 산림지대인 우두산(牛頭山) 남쪽 기슭에서 서촌(西村) 중좌(中佐)가 지휘하는 일본군 보병 2개 중대 병력과 맞서 싸웠다. 모험대원들은 한동안 총격전을 벌이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재빨리 훈춘 동북방에 있는 낙타하자(駱駝河子) 부근으로 부대를 이동하였으며, 이곳에서 다시 11월 20일 일본군 1개 소대 병력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일련의 전투과정에서 모험대장 김운서는 11월 30일에 훈춘현 판석구(板石溝)에서 일본군 보병 제75연대의 일부와 교전하던 중에 전사하였으며, 동생 김운하(金雲河) 역시 같은 부대의 일본군에게 생포된 후 독립군의 통신사무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11월 8일 훈춘 차대인구(車大人溝) 북방 골짜기에서 참수(斬首)되는 비운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훈춘지역의 독립군은 대황국·노흑산·왕팔발자(王八渤子) 등으로 진격해오는 기림지대에 대해 유인작전이나 기습공격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왕청현 십리평의 독립군 본부와 사관연성소를 지키고 본대 이동 후의 뒷수습을 위해 잔류해 있던 북로군정서 소속의 일부 독립군은 왕청현 지역에서 목촌지대(木村支隊)의 횡전(橫田)을 맞아 밀림에서 일본군의 작전을 방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한편 일본군의 독립군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되자『매일신보(每日申報)』는 일본군의 활동이나 군사작전의 성과를 왜곡하는 기사를 자주 보도함으로써 전황을 왜곡하고 있었다. 우선 1920년 10월 19일자에서는 ‘토벌대 행동 개시, 토벌대 제3대로 편성하여 15일 출발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여 일본군이 간도지역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작전에 돌입했음을 알렸다.
토벌대의 성과에 대해서도 14일부터 16일 사이에 ‘훈춘현 토벌대는 사도구(四道溝)에서 음모단의 소굴을 발견하고 몇 명은 쏘아 죽였으며, 20여명을 체포하였고, 소총 50정과 육혈포(六穴砲) 1정, 탄약 660발을 얻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대황구 부근에서는 ‘독립군으로 보이는 3명을 사살하고 총기·탄약 및 음모 관계서류를 획득하여 귀환하였다’고 하였다. 10월 10일에는 ‘명동소학교를 소각했다’고 보도하였다. ‘교장 김약연(金躍淵) 이하 직원 생도가 모두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명동학교를 수색하여 총기와 괴문서 등을 입수한 후 학교와 집을 불태우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또한 10월 28일에는 김좌진 부대와의 교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보도하기도 하였다.
˝초적단(草賊團)을 합한 1천여명의 수괴 김좌진 부하, 어로촌(漁老村)에서 서로 만나 충돌되며 일장 접전이 시작, 피차사상이 불소(不少)했다.
두도구에 있던 동지대(東支隊)의 예비대는 봉밀구(蜂密溝) 부근에 음모단의 집단이 있는 것을 탐지하고 당시 봉밀구 서북방 약 80리 되는 후차창구(後車廠溝)로부터 돌아오는 길인 21일 이른 아침 기병연대와 합하여 동지 서편 산중에서 음모단과 충돌하여 오후 7시까지 싸움을 계속한 후 드디어 그들을 뒤편 되는 밀림지대 안으로 격퇴하였다.
그 싸움에 대한 일본군의 손해는 전사자로 하사 1명, 병졸 2명 부상자로 졸병 11명, 점획(占獲)한 도적의 군수품으로 기관총 1정, 소총 11정, 총검 2자루, 탄약 1천 2백발, 면총(眠銃) 1정이었는데 음모단의 두목은 김좌진이요 부하 2~300명을 거느렸으며, 그 외에 초적단 7~800명이 그에 참가한 듯 한데 그 합계는 1000명 내외인 바, 음모단의 사상은 다대한 모양이나 아직 알 수 없다.˝
위의 내용을 통해서 보면 일본군 토벌대는 21일 오전 김좌진 부대와 ‘어로촌’에서 대규모의 접전을 치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좌진 부대는 1천여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부대였다고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는 일본군의 피해와 전과만을 언급하고 있으며, 소위 음모단의 피해에 대해 ‘다대한 모양이나 아직 알 수 없다’고 함으로써 토벌대의 패전을 은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매일신보』는 독립군에 대해 초적단이라고 하여 극히 폄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일본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사자가 3명에 불과하고 부상자는 11명에 그쳤다고 하는 등 궁극적으로 전투의 상황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월 29일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 발표를 인용한『매일신보』의 보도에서는 동지대 예비대가 어로촌에서 홍범도 부대의 노영지(露營地)를 돌격했다고 하면서 ‘아군에게는 피해가 없으며 음모단의 손해는 캄캄한 밤중이라 그 수효를 알 수는 없으나 죽은 자가 30명 가량이요, 손해가 다대한 모양’이라고 보도하였다. 더욱이 11월 6일자 기사에서는 ‘음모단 중 가장 무서운 두령’ 홍범도가 10월 25일 수비대의 맹렬한 야습을 받고 혼잡한 틈에 저격당했다는 설(說)이 있다고 하는 등 마치 토벌대가 홍범도를 사살하는데 성공한 듯한 추측성 보도를 게재하는 등 토벌대의 전황을 극단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매일신보』의 이러한 보도는 모두 어로촌, 즉 독립군과 일본군의 최대의 격전지였던 어랑촌전투의 상황에 대한 일제 측 언론의 보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어랑촌 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가 받았던 충격이 상당히 큰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밖에『매일신보』에서는 ‘소지(小池) 대위(大尉)가 지휘하는 헌병과 경찰관이 12월 4일부터 18일까지 무산 건너편 유동(游洞)과 맹하동(孟下洞)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음모조선인 1명을 사살하고 감추어 둔 총기 20여종을 확보했다’고 보도하였다. 12월 22일자 기사에서는 ‘합마당으로부터 서편으로 약 50리 되는 중국인의 집에 10여명의 조선인 음모인이 숨어 있다는 밀고를 받은 도전(島田) 소위(少慰)가 3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그 집을 포위하여 5명을 사살하고 2명을 포박하고, 총기와 탄약을 노획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병사 3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고 하였다. 1921년 12월 1일에는 ‘근등(近藤) 중위(中尉)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국자가 용정의 상삼봉(上三峰)에서 저공비행으로 부근의 조선인 음모단에게 폭탄을 투하하고 귀환했다’고 보도하였다.
『매일신보』12월 11일자 기사에서는 ‘제19사단이 간도지방에 출동한 이래 체포한 조선인 음모단의 연인원은 116명인데 간도영사관에 인도한 인원은 44명이며, 소총 356정, 소총탄약 19110발, 권총 65정, 탄약 43발, 기타 불온문서, 피복, 나팔 등을 입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에서는 또한 ‘12월 1일까지 훈춘현과 사도구에서 귀순한 인원이 605명인데, 앞으로도 귀순할 자가 더 있을 것’이라고 하여, 전체적으로 일제의 ‘간도토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도했다.
12월 18일자에서는 ‘김좌진은 이도구로, 홍범도는 안도현으로 도망하여 그림자도 없으며, 음모단체 중 한민회(韓民會)는 귀순하였고 기타 단체도 그림자도 없다’고 하였다. 12월 22일자에서는 ‘군정서 경신국장 채규오(蔡奎五)가 12월 10일 목촌(木村) 토벌대에 귀순하였으며, 광복단 총무 홍두식(洪斗植), 독립군과 국민회의 연락원이었던 박춘서(朴春瑞) 등 2명이 12월 18일에 동지대에 귀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모단의 수령이 토벌을 견디지 못하여 속속 귀순하는 모양’이라는 보도기사를 게재하였다. 한편『매일신보』1920년 12월 13일자에서는 ‘한민회의 유력인사들이 토벌대의 위력에 눌려 귀순할 의사를 표명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훈춘 부근에서 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한민회 소속인 음모조선인단은 우리 파견군의 위력에 눌리어서 유력한 자의 대부분은 모두 귀순할 뜻을 표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다시 자신의 성의를 일반 조선인에게 표할 목적으로 지난 7일에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배부하였더라.
一. 각 촌락에 잠복하여 있는 음모단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귀순시킬 일.
二. 위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회원을 각 촌락에 파견하여 경고문을 배부하고 또는 별호 방문을 하여 귀순을 권고할 일.
三. 가부의 사용하는 무기는 수색하여 그것을 일본군에게 제공할 일.
四. 훈춘현 하에 재주하는 조선인은 지금으로부터 경거망동하지 안코 안녕질서를 유지할 일.
五. 조선인 보민회를 설립하여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교육산업을 장려할 일.
六. 보민회를 설립키 위하여 그 유지법을 협의하여 우유지방법에 대하여 평의원 8명을 서명하여 오는 13일에 회합케 하여서 구체적 방침을 협의할 일.˝
위의 내용에서 보면 일제는 훈춘지역에 친일세력을 부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보민회(保民會)가 설립되었다. 이는 일제가 간도지역 독립군의 자생적 기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군사작전 뿐만 아니라 대민활동의 확대·강화라는 전략도 구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2월 16일자 보도에서는 ‘말 70두~80두를 가진 140명~150명의 조선인 음모단이 영고탑(零古塔)에 도착하였는데, 이들은 남방에서 토벌한 자들의 잔당이며, 십수명의 부상자를 데리고 있는데 적장한 가옥을 급여 받을 수 있으며, 대신 무기를 제공하고 농사일에 종사하겠다고 신청하였다’는 기사를 게재하여, 궁극적으로 독립군 부대가 전의를 상실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였다.
이러한 보도 경향에도 불구하고『매일신보』는 토벌에 참전했던 안천삼랑(安川三郞)이 ‘청산리 서대포(西大浦)에 있던 무관학교는 군대의 편성도 매우 규칙적으로 되어 있었으며,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는 모두 크나큰 수목 속과 기타 수림 사이에 숨어 있어서 토벌하기에 간단치 않았다’는 증언을 보도하는 등 독립군에 대한 토벌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매일신보』는 일본군의 간도침략이 구체화되기 이전부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보도기사를 게재했다. 그리고 전황에 대해서는 토벌계획이 성공적이었다는 보도기사를 반복적으로 게재함으로써 상황을 왜곡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매일신보』는 당시의 상황을 왜곡·보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제(日帝)의 절박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단이 거둔 구체적인 전과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윤곽을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상해 임시정부는『독립신문(獨立新聞)』에서 ‘김좌진(金佐鎭) 씨 부하 6백명과 홍범도(洪範圖) 씨 부하 3백명은 대소전쟁 10회에서 왜병(倭兵)을 격살한 자 1천 2백명’이라고 하였는데, 군무부에서는 북로군정서의 전황보고에 근거하여 청산리대첩의 총체적인 전과를 확인하였다. 중국의 신문인『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에서는 일본군 전사자를 2천여명으로 추산하였다. 이 신문에서는 ‘일인(日人) 사망 2천여명, 단장 1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한인(韓人)은 1천여정의 소총과 기관총 몇 정을 노획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를 2천여명으로 추산하였고, 청산리대첩에 참전했던 이범석의『우등불』에서는 일본군의 사상자가 약 3천 3백여명이라고 회상하였다.
이에 비해 일제의 기록에서는 백운평전투에서 병사 4명 전사에 하사 1명과 병사 2명이 부상하엿다고 하고 있을 뿐이며, 어랑촌전투에서 조차도 보병 1명과 기병 2명이 전사하고 보졸 4명과 기병 4명이 부상했을 정도라고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동하전투에서는 ‘아(我)의 피해 없으며, 적의 피해 30명’이라고 하여 전투 상황을 철저하게 왜곡하였다.
그러나 전황에 대한 이러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간도주재 계(堺) 일본총영사가 내전(內田)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긴급전문에서 보면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2개 연대의 병력으로서 2개월 동안이면 소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기대에 반해, 성적은 다소 실패로 끝났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고 보고함으로써 일본군이 패전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이밖에 일본영사관의 비밀보고서에는 일본군이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병사 8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독립군 측도 상대적으로 경미하기는 했지만 인명의 손실이 있었다. 이범석의『우등불』에 의하면 전사자 60여명, 부상자 90여명, 실종자 2백여명으로 파악하면서 실종자는 그후 대부분 복귀한 것으로 회고하고 있다. 독립군의 피해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군무부 특파원 안정근(安定根)이 임시정부에 보고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0월 22일부터 3일간의 전투에서 3백여명에 달하는 독립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경우 21일의 백운평 전투와 25일~26일의 소규모 전투들에서 피해를 합치면 독립군의 피해는 안정근의 보고보다도 많다.
청산리대결전에서 독립군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엇던 요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북로군정서의 서일(徐一) 총재는 ‘적의 실패와 아군의 승전’으로 나누어 독립군의 승리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번 전투에 백반의 승한을 유(有)한 적은 하(何)로 인하여 반(反)히 대패를 초(招)하였으며, 백반을 준비가 부족한 아군은 능히 승전(勝戰)을 득(得)하였는지 차(此)를 약진(略陳)함.
적의 실패 이유
1. 병가에서 가장 기피하는 것은 경적(輕敵)하는 행위로 험곡장림(險谷長林)을 별로 수색도 경계도 없이 맹진(盲進)하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을 당한 것.
2. 국지전술(局地戰術)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산림과 산지 중에서 종종의 자상충돌(自相衝突)을 낳은 것.
3. 일본군인의 염전심(厭戰心)과 피사도생(避死圖生)하는 겁나심(怯懦心)은 그 도에 달하여 군기(軍紀)가 문란하여 사법(射法)이 정확하지 못하여 1발의 효과도 없는 난사를 행한 뿐인 것.
독립군의 승전 이유
1.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용결투(奮勇決鬪)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심기를 압도한 것.
2. 양호안 진지를 선점하고 완전한 준비를 하여 사격성능을 극도로 발휘한 것.
3. 임기응변의 전술과 예민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에서 벗어나서 뛰어난 것.˝
또한 청산리대결전에서 독립군의 승리 원인을 좀 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첫째, 독립군에 대한 한인사회 전반의 전폭적인 지지가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전투지역 내의 한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밀림장곡(密林長谷)의 지형에서 독립군에게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역으로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일본군의 군용 전선을 찾아내어 절단함으로써 독립군의 승전에 기여한 점,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독립군을 후원한 점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청산리대결전은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강점당한 우리 민족이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건설한 한인사회와 이를 바탕으로 민족적 역량을 통합함으로서 이룩한 빛나는 승리였다.
3·1운동 이후 만주에서 결성된 독립군 무장 부대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승리 ⑥
☞ 황민호(黃敏湖) 숭실대학교 교수
Ⅶ. 독립군의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승첩(勝捷)
1. 일제의 토벌작전과 독립군의 대응
⑴ 일본군의 토벌작전
1920년대 들어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이 본격화되고 독립군과 일본군간의 교전 규모가 갈수록 커지자 일제(日帝)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본격적인 군사작전에 돌입하였다. 일제는 만주지역 각지의 영사관에 전투경찰병력을 크게 증가시켜 독립군 부대원들에 대한 체포와 탄압에 열을 올렸으며, 때로는 중국관헌을 회유·협박하여 이용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1920년 5월에 이르면 조선총독부의 경무국장 적지(赤地), 봉천성총영사 적총(赤塚), 길림독군 고문 재등(齋藤), 봉천독군 고문 정야(町野) 등은 봉천에서 간도지역 독립군 검거에 관한 사항을 협의하고 자신들의 결정사항을 동삼성 순열사 장작림(張作霖)에게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봉천에서는 상전(上田)과 판본(坂本) 2명의 일본인 경찰고문을 책임자로 하는 중·일합동수색대가 편성되어 독립군 부대원에 대한 체포와 독립군기지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활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이러한 활동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에 착수했음을 의미한다. 상전대(上田隊)는 1920년 5월 13일부터 7월 3일까지 흥경현(興京縣)·유하현(柳河縣)·해룡현(海龍縣)·통화현(通化縣) 등지에서, 판본대(坂本隊)는 5월 15일부터 8월 18일까지 안동현(安東縣)·관전현(寬甸縣)·환인현(桓仁縣)·통화현·집안현(集安縣)·임강현(臨江縣)·장백현(長白縣) 등지에서 한족회(韓族會)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에 소속된 독립군 병사들을 체포·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는 국내언론에 대한 보도통제를 통해 독립군 토벌에 유리한 분위기 조성을 위한 준비를 갖추기도 하였다.『동아일보(東亞日報)』는 훈춘사변(琿春事變)이 발발한 1920년 10월 2일 이전인 9월 26일부터 무기정간당하였다. 총독부는 9월 25일자『동아일보』의 ‘제사문제(祭祀問題)를 재론하노라’는 사설 가운데 우상의 예로 일본의 신사(神社)가 봉안하고 있는 물품을 거론했다는 이유를 들어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으며, 이듬해인 1921년 2월 21일에 이르러서야 복간하도록 하였다.『조선일보(朝鮮日報)』의 경우도 1920년 8월 28일 강우규(姜宇奎) 의사(義士)의 사형에 관한 기사가 문제가 되어 정간된 이후 경신참변(庚申慘變)이 수그러지는 12월 2일에 복간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일제는 7월 16일 다시 중국당국을 강박하여 일본군 파견장교 재등(齋藤) 대좌(大佐) 등의 감시하에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중국군 제2혼성여단 보병 제1단장 맹부덕(孟富德) 부대가 동원되었다.
중국군이 토벌대를 편성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서는 맹부덕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 중국군은 일본군의 간도침입의 구실을 막기 위하여 부득이 독립군 토벌을 위한 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독립군은 이와 같은 중국 측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 대책을 세워 상호 타협·행동한다. ㉡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 상에서 군복 차림이나 총기(銃器)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동함으로써 중국 측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 ㉢ 중국군은 토벌을 위한 출동 전에 독립군에게 그 내용을 사전에 통보하여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준비와 시간을 갖게 한다. ㉣ 중국인과 독립군은 서로 피전(避戰)을 약정하고 중국군은 출동해도 독립군을 공격하지 않고 독립군의 이동과 산림지대 등지에서 새 기지 건설 등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이 합의를 통해 독립군은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독립군의 전력을 보완할 수 있었다.
독립군과 중국군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자 대한국민회에서는 1920년 8월 하순부터 각 지방지회와 독립군 부대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통지하고 독립군 부대의 근거지 이동을 권고하였다. 근거지를 제일 먼저 옮긴 것은 명월구(明月溝)에 주둔하고 있던 홍범도(洪範圖) 휘하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었다. 이들은 안도현(安圖縣) 방면의 백두산록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의란구(依蘭溝)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안무(安武)의 국민단(國民團)도 안도현 방면을 향해 이동했다.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신민단(新民團)·의민단(義民團)·광복단(光復團) 등의 독립군도 근거지 이동을 시작하였다. 다만 왕청현(王淸縣)에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졸업식 때문에 이동을 미루고 있다가 중국군과 협의하에 9월 9일 사관연성소 생도들의 졸업식을 거행한 후 9월 17일에야 서대파(西大坡)를 이동하여 10월 12일~13일에 청산리(靑山里)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각지에 산재한 독립군은 청산리로 집결하는 등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⑵ 훈춘사변
중국군대를 이용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했던 일제의 계획은 처음부터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일제의 강압적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군은 9월 4일 대한독립군의 근거지였던 명월구에 도착하여 독립군의 막사만 불태우고 연길로 돌아왔다. 9월 19일에는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서대파에서도 비어있는 사관연성소 건물만 파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이미 1920년 8월에 확정한 ‘간도지방불령선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에 의거하여 직접 간도에 출병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제는 1920년 9월 12일과 10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장강호(張江好)의 마적단(馬賊團)을 이용하여 이른바 훈춘사변(琿春事變)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제2차 훈춘사변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약 4백명의 장강호 마적부대가 9월 25일 훈춘 북방의 번자구자(藩子溝子)에 출현하여 10월 2일 상호 5시 3문의 야포(野砲)를 동원, 훈춘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훈춘의 영사관 분관에 있던 일본인의 피해는 사망자가 14명(한국인 순사 1명 포함), 중경상자가 30여명이었다. 영사관에 구금되어 있던 한국인 3명과 중국인1명은 피살되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저들의 피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10월 4일자『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는 마적의 계통은 분명치 않으나 중국군이 얼마쯤 섞여 있었고 일본인을 습격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배일조선인이 있는 듯하다고 보도하였다. 같은 날짜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 발표에서도 ‘단순한 마적이 아니라 과격파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마적단은 독가스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장강호는 중야천락(中野天樂)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총독부 고등과장의 비호 아래 천우당약방(天祐堂藥房)에서 독가스를 만들어 한국인 살해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훈춘사변의 조작에 성공한 일제는 일본의 만주거류민 회장에서 일본인과 영사관의 보호를 위해 출병을 청원하는 전보를 당국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응하는 형식으로 나남에 있는 제19사단 안부(安部) 대대를 10월 2일 당일 훈춘으로 불법 파견하엿다. 이후 일본육군은 10월 6일부터 작전계획에 따라 각 부대를 간도의 중요지역에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해당 사단에 하달했다. 10월 7일 일본의 내각회의에서는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결정하였다.
조선총독부도 간도출병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매일신보』를 동원하여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기사를 게재하고 있었다. 10월 4일자 기사에는 ‘폭학잔인(暴虐殘忍)한 마적단의 소위(所爲)로 훈춘이 열화맹염(烈火猛焰)에 빠졌으며, 잔악무비한 마적은 여자까지 참살하고 남자는 총살하였음으로 일본수비대가 급행했다’고 보도하여 훈춘사변 이후의 정황을 호도하였다. 8월 21일자 기사에서는 ‘연길도윤 도빈이 지방치안을 문란케 하는 독립군들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였으며, 낭패를 당한 군정서는 그 근거지를 러시아 땅으로 옮기고자 한다’고 하여 독립군의 활동에 대해 중국당국이 반대의 입장인 것처럼 왜곡보도하였다.
10월 8일자에서는 4일 새벽 훈춘에서 일본통신병 40명과 독립군이 교전하여 조선인들은 50명의 사체를 버리고 패주하였는데 일본군은 14명이 부상당했을 뿐이라고 하엿다. 이밖에 같은 날 기사에서는 7일 저녁 일본군이 국자가에 도착하자 이곳에 재류하는 ‘일지인(日支人)’이 연연(然然)한 빛을 나타냈다고 하거나 독립군과 연결된 5백여명의 마적단이 두도구를 음습한다는 소문이 있어 이 지방 주민이 극히 혼란해지자 영사관 분관에서는 구원병의 파견을 요구하였다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한편 일제는 10월 16일 중국 측에 일본군이 10월 17일 자정을 기해 간도에서 군사작전을 실시할 것임을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일본군의 토벌작전지역은 중지철도(中支鐵道) 이남 20리 이외의 동녕·훈춘·연길·왕청 등 5개현이다. 둘째, 일본군대는 2개월 내의 최단 시일 내에 군사작전을 종료한다. 셋째, 일본군은 위의 지역 이외에서는 출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일제는 먼저 10월 2일 오후 2시에 국경에 배치돼 있던 경원수비대 80명을 침입시켰고, 이어서 경원헌병대 헌병 6명과 19사단 소속의 안부(安部) 소좌(少佐)가 이끄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 및 그 외에 국경수비대 30명까지 합하여 3일 밤까지 훈춘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또한 일제는 대체로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본군대를 신속하게 간도로 침입시키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두만강을 넘어 남방에서는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제19사단과 제20사단의 제78연대 제3대대, 그리고 헌병대 및 경관대가 연합하여 간도로 들어왔다. 이 병력은 다시 기림(磯林)·목촌(木村)·동(東) 지대(支隊)와 사단직할부대 및 국경수비대로 나뉘어 토벌구역을 분담하였다.
이들의 부대 구성과 작전지역을 살펴보면 기림직명(磯林直明) 소장(少將)이 총지휘하는 기림지대(磯林支隊)는 보병 제75연대, 보병 제78연대 제3대대, 기병 제27연대 제3중대, 포병 제25연대 제2대대, 공병 제19대대 제2중대와 헌병 약간이 병력 구성원으로서 경원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훈춘방면으로 진출하여 그 일대에 대한 토벌의 주력이 되며, 독립군을 나자구 방면으로 추격하여 삼차구(三差口) 방면에서 남진하는 포조군(浦潮軍)과 공동작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목촌익삼(木村益三) 대좌(大佐)가 총지휘하는 목촌지대(木村支隊)는 보병 제76연대, 기병 제27연대 제2중대 제1소대, 산포병 제1중대, 공병 제19대대 제1중대와 헌병 약간이 병력 구성원으로서 대한국민회·북로군정서 등을 대상으로 토벌작전을 수행하되, 특히 서대파·대감자·백초구·합마당 등지를 반복 토벌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동정언(東正彦) 소장(少將)이 지대장으로 있는 동지대(東支隊)는 보병 제73연대, 특종포대,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 기병 제27연대 일부, 포병 제25연대 제1대대 야포병·산포병 각 1중대, 공병 제19대대 제3중대와 헌병 약간이 병력 구성원으로서 회령 등지에서 월강, 용정 방면으로 진출하여 그 일원을 소탕하는 주력부대가 되었으며, 무산에서 북상하는 제20사단의 부대와 합동작전으로 독립군이 안도·돈화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초멸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밖에 사단직할부대로는 제19사단장 자작(子爵) 고도우무(高島友武) 중장(中將)의 휘하에 보병 제74연대 제1대대 본부와 제3중대, 비행기반·무선통신반·비둘기반으로 편성되었으며, 국경수비대가 있었다.
또한 동쪽으로 중·소 국경을 넘어 간도로 일제의 토벌군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일찍이 시베리아에 침범해 있던 포조(浦潮)파견군 제14사단·제11사단 토문자(土門子)지대, 제13사단 우입(羽入) 지대였다. 이들은 훈춘·초모정자·토문자·수분대전자(綏芬大甸子) 등에서 주력부대인 19사단과 연합하여 한인들을 학살·탄압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북쪽에서는 북만에 파견되어 있던 안서지대(安西支隊)가 보병중대 3개와 기관총대 4개, 기병소대 1개 병력으로 편성되어 간도로 진격해 왔으며, 마지막 서쪽으로는 관동군 제19연대 1개 대대 병력이 무순·흥경·통화·환인·관전·안동 등에, 그리고 기병 제20연대가 해룡·유하·통화·환인·관전·안동 등의 지방을 향해 침입해 왔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간도를 침입한 일제는 동서남북에서 포위작전을 통해 독립군을 압박하였으며, 일본군 병력은 제19사단의 약 9천명, 제20사단의 약 4천명, 제11사단에서 약 1천명, 안서지대에서 약 1천명, 관동군에서 1천 2백여명 등 총계 약 1만 8천명~2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외에 일제는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한인 집단거주지인 용정촌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한인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⑶ ‘연합독립군(聯合獨立軍)’ 편성과 응전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 참가한 독립군의 규모와 구체적인 전력은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서일(徐一)의「대한군정서보고(大韓軍政署報告)」와 같은 독립군 측의 기록,『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등 일제 측 기록의 내용을 통해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경우는 약 6백명의 정예병력과 1백명 가량의 보충대 병력이 1920년 10월 12일부터 13일 사이에 청산리 부근에 도착해 있었다. 청산리대첩 직전 북로군정서의 편제를 살펴보면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부장 나중소(羅仲昭),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 부관 박영희(朴寧熙), 중군장교 이민화·김훈·백종렬·한건원, 대대장서리 겸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熹), 제1중대장 서리 강화린(姜華鱗), 제3중대장 김찬수, 제4중대장 오상세 등이었다.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의 경우에는 홍범도가 직접 지휘하는 병력은 3백명~4백명이었으며, 연합부대(聯合部隊)의 형성을 위해 노력한 결과 청산리대첩 직전에는 4개 부대 병사 1천 6백여명의 큰 군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부대 편성은 허근(許根)·방우룡(方雨龍)·임춘산(林春山) 등이 지휘하는 의군단(義軍團) 혼성부대와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김성(金星)이 지휘하는 신민단(新民團) 등으로 구성되어 았었다.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당시 독립군의 병력규모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훈춘국민회(琿春國民會)·광복단(光復團)·대한의민단(大韓義民團)·신민단(新民團) 등을 합하여 약 2천명 정도였다.
전력상 절대적으로 열세인 독립군단들은 맹렬한 기세로 추격해 오는 토벌대를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불리했음에도 독립군단들은 10월 13일에는 이도구(二道溝) 합마당(蛤蟆塘)에서 대한국민회·대한신민단·훈춘한민회 등의 대표자들이 모여 홍범도(洪範圖)의 지휘하에 체계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작전 수행을 위해 병력과 군수물자를 동원하는 한편, 일본군의 동향에 대한 정보수집에도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대하국민회는 ‘광복사업의 성패(成敗)의 추(秋)’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한인(韓人) 매호당 10원, 모든 동산·부동산의 1/10을 군자금으로 모집하기도 하였다.
독립군단들은 용정촌(龍井村)과 두도구(頭道溝)·국자가(國子街) 등 큰 마을에 있는 상가지역을 방화하여 일본군이 숙영할 수 있는 곳을 없앴으며, 일본군의 동향을 상세하게 보고 받을 수 있는 지역간의 상호 연락망을 갖추었다. 이 연락망을 통해 독립군단은 작전지역에 도착한 일본군의 병종(兵種)과 인원, 도착시간, 통역하는 조선인 등의 이름까지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 중에 이동휘(李東輝)의 노력으로 러시아의 흑룡강 방면에서 총기(銃器) 1천 6백정이 군정서에 전달됨으로써 독립군의 전력과 자신감은 한층 더 고조될 수 있었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홍범도 연합부대는 김좌진의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와도 연합작전을 논의했다. 이 회의는 10월 10일 묘령에서 개최되었는데, 군정서의 부총재 현천묵(玄天默)과 길림분서고문 윤복영(尹復榮) 등이 주장하는 피전책(避戰策)은 주요 논의 대상이었다. 당시 독립군단은 일본군과 벌이는 대규모의 교전이 중국 정부의 반감을 야기하는 한편, 일본군의 병력증파를 야기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고 더 이상의 교전회피가 오히려 불리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고 판단되자 독립군은 전면적인 전투태세에 돌입하였으며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2.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청산리대결전은 일본군 토벌대 병력의 일부인 동지대(東支隊)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공격하기 위해 청산리 방면으로 진격해 오다가 1920년 10월 21일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백운평(白雲坪) 부근의 골짜기에서 기습공격을 받고 패퇴한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천수평·어랑촌·맹개골·만기구·쉬구·천보산·고동하 등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돌입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는 산전연대(山田聯隊)를 삼도구 방면으로 파견하여 10월 20일을 기해 북로군정서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도구에 주둔하면서 홍범도의 지휘를 받던 독립군 연합부대(獨立軍聯合部隊)도 동지대의 주력이 19일 오전 8시를 기해 이도구로 출동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기병과 포병을 포함하는 약 5천명의 전투병력으로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를 대상으로 10월 20일 총공격을 가하는 군사작전을 계획하였다. 이후 청산리대결전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접전을 벌인 주요 전투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⑴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
백운평 전투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부대가 1920년 10월 21일 산전연대(山田聯隊)를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골짜기에서 섬멸한 전투로,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승리였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이 독립군을 추격해 청산리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총사령관 김좌진은 이곳에서 일본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군사작전에 돌입했다. 이후 김좌진은 부대를 2개의 제대(弟隊)로 나누어 제1제대는 본대(本隊)로 자신이 직접 통솔하여 제2제대가 잠복한 지점의 건너편 사방정자(四方町子)의 산기슭에 배치하였다. 또한 제2제대는 연성대장 이범석의 지휘하에 3백명의 사관연성소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후위대(後衛隊)를 편성하여 최전선을 맡게 하였다. 그리고 교전지가 될 넓은 고지를 기준으로 우측 산허리의 1개 중대 병력은 이민화(李敏華)가, 좌측 산허리의 1개 중대 병력은 한근원(韓根源)이 각각 지휘를 맡게 하였다. 정면의 우측 1개 중대는 김훈(金勳)이, 좌측 1개 중대는 이교성(李敎成)이 각각 통솔하도록 하였다.
북로군정서의 독립군 장병들이 매복한 계곡은 지형적으로 보아 청산리 안에서도 계곡의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절벽이 높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 넓은 공지가 있어 골짜기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 공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세였다. 때문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북로군정서에게 있어서 지형조건은 상당히 유리했다. 북로군정서는 이러한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공지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매복하였다. 이민화 중대가 매복한 우측은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였고, 김훈 중대가 매복한 정면 우측은 경사가 90도나 되는 절벽이었다.
1920년 10월 21일 안천(安川) 소좌(少佐)가 지휘하는 1개 중대 병력의 일본군 전위부대는 독립군이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채 하루 전에 독립군 부대가 행군해 온 길을 따라 백운평지역의 공지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 전위부대의 전 병력이 공지 안에 들어서고 북로군정서 제2제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보 앞에 도달했을 때, 일시에 기습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는 6백여정의 소총(小銃)과 4정의 기관총(機關銃), 2문의 박격포(迫擊砲)를 동원한 집중사격으로 일본군 전위부대의 정면을 공격했다.
독립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자 일본군도 대응사격을 전개했으나 독립군의 정확한 은폐지점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군의 반격은 효과적일 수 없었다. 20여분의 교전 끝에 2백여명의 일본군은 거의 전멸되는 패배를 당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또한 전위부대의 뒤를 이어 도착한 산전연대(山田聯隊)의 본대도 매복해 있던 북로군정서를 향해 필사적으로 응전하였으나, 이 역시 효과적인 공격이 되지 못하고 2백여명의 전사자만 더 낸 채 전사자들의 시체를 그대로 남겨두고 숙영지(宿營地)로 패주하였다. 이것은 북로군정서가 항일전(抗日戰)에서 획득한 최초의 완전한 승리였으며, 청산리대결전의 서전(緖戰)이었다.
백운평전투에서 완승한 북로군정서는 퇴각하는 일본군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이도구 방면으로 이동하여 밤을 새워 갑산촌(甲山村) 방향으로 행군하였다. 이는 산전(山田) 대좌(大佐)의 별동 기병대가 청산리를 향하고 있었음으로 이들에 의해 독립군의 행로가 차단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⑵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두번째 전투는 홍범도 연합부대와 일본군 동지대(東支隊)가 이도구의 완루구에서 1920년 10월 21일 늦은 오후부터 22일 새벽에 걸쳐 전개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 대해 독립군 측의 기록은 일본군이 자기편 군대를 독립군으로 잘못 알고 서로 사격해 큰 피해를 냈다고 하거나, 일본군이 홍범도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산에 불을 질렀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홍범도의「군중일지」에서 보면, 홍범도 부대가 완루구의 어느 마을에 들어가 머무르고 있는 사실이 일본군에게 알려지자 일본군 주력부대가 그곳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대공세가 펼쳐지는 상황에서 별다른 대책 없이 산간마을에 숙영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홍범도는 밤에 독립군 병사들을 집결하여 산 높은 곳에 매복시켜 놓았다.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일본군은 독립군이 마을에 있는 줄 알고 집중사격을 가하며 진격해 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범도 부대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온 일본군에 대해 독립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히 사격하였으며, 약 4백명의 일본군이 섬멸되었고, 독립군은 약 240자루의 총기(銃器)를 노획하였다. 이와 관련해 홍범도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날 밤으로 밀리거우 조분고려 둘러싸고 날 밝기를 저대하는 중에 나의 심정에 난솔하여 밤중에 군사를 취군(聚軍)하여 말리거우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밤을 새는 중에 날이 금시 밝자 대포소리 한 방 나더니 사방으로 미아소리가 천지 진동하면서 사격소리가 그치지 않고 단박에 말리거우 민간촌에 달려드니 인적이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으니 물론 어떤 웅덩이든지 몰수이 없대서 나갈 밤수을 얻는 중에 나의 군인 520명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벼락치듯 막 사격하니까 총천강 종지출 못할 것을 그려놓았다. 밤이 삼경되도록 진을 풀지 못하고 답세우다나니 다 잡았다. 장총 240정과 탄환 500발을 받아가지고 조선놈 사복하고 몸빠져 나가는 놈 여섯 놈을 부뜨러……”
완루구전투에서 대패한 부대는 반야대대(飯野大隊)와 지대(支隊) 예비대를 합친 5백명 내외의 부대였는데, 일본군은 후일『간도출병사』에서 밀림 중에 길을 잃어 남양촌에 이르러 숙영하였다고 얼버무리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완루구전투는 일본군끼리의 오인사격에 의해 큰 피해가 난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철저한 매복작전을 전개했던 홍범도 장군의 전술에 의한 승리였다.
⑶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
천수평전투는 백운평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 부대가 전개한 두번째의 전투였다. 백운평전투 이후 철수를 시작한 북로군정서는 22일 새벽 2시를 넘어 이도구 갑산촌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인근 주민으로부터 일본군 1개 기병중대 병력이 천수평 마을에 들어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 지휘관들은 천수평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기병대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독립군 병사들을 독려, 다시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월 22일 새벽 4시 30분경 이범석이 지휘하는 연성대를 선두로 북로군정서는 천수평 외곽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일본군 중대장 도전(島田) 중위(中尉)가 지휘하는 기병중대는 독립군이 아직도 1백리 밖의 청산리 부근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토성 안에 말을 메어놓고 민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북로군정서는 연성대의 김훈 장교에게 북쪽 산을 타고 나가 신속하게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이민화 중대에게는 천수평 남방고지를 점령하게 하였다. 또한 이범석은 2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동쪽에서 일본군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했다. 김훈·이민화 중대가 작전대로 예정한 지점에 도달하였고 이범석이 이끄는 2개 중대 병력이 냇물을 타고 천수평 동쪽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기병순찰대 보초가 독립군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 연성대도 일본군 기병중대가 자고 있는 촌락과 토성 안으로 집중사격을 가하며 돌격전을 감행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총성에 놀란 일본군은 허둥대며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으나 북로군정서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4명이 말을 타고 탈출한 이외에 1개 중대 전원이 몰살당하였다. 이들은 27연대 소속 기병중대였다.
⑷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
어랑촌전투는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이 거둔 승전(勝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전투였다. 10월 22일 오전 7시 30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이도구 어랑촌 서남방 표고 874호 고지 남측에서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연합부대가 함께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인 전투였다. 어랑촌은 경술병탄(庚戌倂呑) 이후 함북 경성군(鏡城郡) 어랑사(漁郞社)의 주민 10여호가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로 이도구에서 서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져 있었다.
전투는 어랑촌 일대에서 10월 22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북로군정서 병사 약 6백여명과 홍범도 연합부대의 전투병력 7백여명이 동지대(東支隊)의 1개 기병연대 병력과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정서 부대는 천수평전투 이후 곧바로 어랑촌 서남단의 고지를 일본군보다 먼저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천수평전투에서 노획한 일본군의 작전명령서에서 일본군의 주력이 어랑촌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김좌진의 부대는 부근의 874미터의 고지를 선점하고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얼마 후 일본군과 북로군정서 사이에 교전이 시작되었다.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던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의 돌격전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도 가납(加納) 대좌(大佐)가 직접 지휘를 맡아 오전 9시를 기해 독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병력을 추가로 투입한 일본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이때 완루구전투를 끝내고 안도현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던 홍범도 부대는 북로군정서가 많은 일본군과 혈전을 치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이날 오후부터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연합작전으로 일본군의 공격에 응전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 연합부대는 북로군정서가 있는 바로 옆 최고 고지에 진을 치고 일본군의 배후에서 기습공격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본군과 독립군은 숫자상으로 대등한 전력하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독립군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여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전투 초기부터 격전을 치러야 했던 북로군정서는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의해 피해를 입었지만, 새롭게 전력을 보강하게 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할 수 있었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독립군 장병들은 보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굶주리며 대격전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물심양면으로 독립군을 후원하는 동포들의 도움에 힘입어 어랑촌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야음을 틈타 북로군정서는 산줄기를 타고 서북쪽으로 퇴각하였으며, 홍범도 부대도 북로군정서의 일부 부대와 합세하여 안도현 방면으로 철수함으로써 전투가 끝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군무부(軍務部)에서도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어랑촌 전투를 함께 수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첫째, 김좌진 부대는 어랑촌 후방고지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진로를 차단하였고, 홍범도 부대는 같은 고지의 최고 표고에 위치하여 지원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둘째, 일본군과의 전투는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각각 맹렬한 사격으로 함께 전개했다. 셋째,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승리하였다. 넷째, 철수할 때는 홍범도 부대가 점령한 고지의 최고 표고에서 김좌진 부대가 합류하여 일단 공동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병력을 나누었다.
어랑촌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가납(加納) 대좌(大佐)를 비롯해 다수의 전사자를 내었다. 북로군정서 사령부에서는 일본군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6백명으로 발표하였으며, 중국 관변(官邊) 언론인『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에서는 일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3백명으로 추산하기도 하였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어랑촌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이 3백명이라고 발표하였으며, 전투에 참전했던 이범석은 연대장 가납(加納) 대좌(大佐)를 비롯하여 1천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한 것으로 추산하고 독립군도 1백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회상하였다. 일제(日帝)는 패전의 사실을 숨긴 채 단지 전사자 3명, 부상자 11명이라는 허위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랑촌전투의 전황에 대해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이에 적군은 즉시 출동하여 전개진전(展開進展)할 새, 어랑촌(漁郞村) 전방 약 3리 허에 아군이 은폐 잠복한 고지에서 약 2백미터 되는 산곡에 그 본대가 도착하자 좌우고지에서 아군은 맹렬한 감제사격(瞰制射擊)을 시(始)하고 아군을 대항할 새, 적의 기병중재는 아군의 익측(翼側)을 위협하고 보병·포병은 소총·기관총으로 효과 무(無)한 사격을 아군의 정면에서 맹렬히 하여 위협적인 행동을 하나 천연적 지형이 유리함으로 아군은 조금도 피해가 무하니, 사기왕성하여 좌우 전방으로 침습(侵襲)하는 적을 대항할 새, 익측에서 무익한 동작을 하려는 적의 기병을 격퇴하며 정면에 재(在)한 다수 완강한 적을 맹렬 과감히 대항하니, 통쾌 비참한 대전투가 된다. 시(時)에 적은 지형이 불리하여 아의 감제사격을 수(受)하는 중에 피아의 거리는 불과 2백미터라. 적은 각 방면에 산재하였던 부대가 집중 증가되어 최종에는 아군 5배 이상 병력이 된지라. 연이(然而) 아의 여행대(旅行隊)는 적의 수색 기병대를 격멸한 후 우리의 본대에 집합하고 아군 제2연대도 예비의 점위(占位)한 최고의 표고(標高)로 퇴합(退合)하여 일제히 맹렬한 집중사격을 행하니, 적은 황겁한 중에 분개하여 산포·기관총으로 가치가 무한 사격을 위협적으로 맹렬히 하나 아군의 피해는 소무(少無)함으로 사기는 더욱 왕성하더라 점점 일모(日募)하던 중에 적은 지대(支隊)로, 아군도 퇴각하다.˝
어랑촌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북로군정서는 23일 아침 소부대를 편성하여 안도현 황구령(黃口嶺)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 오후 3시경에 맹개골 산림 속에서 일본군 기병 30명이 이 골짜기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 병사들은 곧 산림 속에 몸을 숨긴 후 접근해 오는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총격을 가하여 1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나머지는 패주시켰다. 이 전투에서 군마 5필, 군용지도 4장, 시계 5개, 기타 피복 장구 등을 노획하였다. 또한 북로군정서는 맹개골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만기구(萬麒溝)의 후방 산림 속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전방 약 100미터 지점에서 일본군 보병 50명이 행군해 오는 것을 발견하고 총격을 가하여 30여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패주시켰다.
쉬구에서도 한차례 교전이 있었다. 북로군정서가 10월 24일 아침에 산림 속에서 숙영을 하고 쉬구로 향하던 중 일본군 1백여명이 방심한 채 북로군정서 병사 50명이 있는 산림 쪽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공격하여 섬멸한 것이다. 또한 이때 일본군 기병 1개 소대 병력이 마을에 말을 매어두고 산개하여 산으로 올라오자 독립군은 이들을 향해 약 20분간 공격을 가하여 섬멸하였다.
⑸ 천보산전투(天寶山戰鬪)
천보산전투는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1개 중대 병력과 홍범도 부대의 일부가 10월 24일 저녁 8시와 9시경 두 차례, 25일 새벽 한 차례에 걸쳐 천보산(天寶山)의 서남쪽 부근에서 은(銀)·동광(銅鑛)을 지키고 있던 1개 중대 병력 규모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먼저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한 부대는 10월 24일 8시와 9시 두 차례에 걸쳐 천보산 부근의 일본군 1개 중대 병력을 공격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국자가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소대 병력의 증파를 요청할 정도로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또한 홍범도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독립군 1개 소대 병력도 10월 25일 새벽 식량조달을 위해 천보산 부근에 나갔다가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독립군으로부터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공격을 받고 당황한 일본군은 국자가에 있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의 증원을 요청하여 병력을 보충하였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일본군의 피해는 상당햇을 것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투보고서에는 독립군 2명이 전사했다고 하고, 자신들의 피해에 대래서는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재까지 이 전투에 대한 정확한 실상은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⑹ 고동하전투(古洞河戰鬪)
고동하전투는 청산리대첩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진 전투이다. 10월 25일 밤부터 26일 새벽 사이에 일본군이 홍범도 부대를 야습하였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한 전투였다. 고동하는 노령(老嶺)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화룡현 관내의 화룡향(和龍鄕)을 거쳐 안도현 관내로 들어가는 하천으로 송화강 수계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 전투에는 홍범도 연합부대와 대한국민회 경비대 등 약 4백명의 독립군 병력이 동정언(東正彦) 소장(少將)이 직접 거느리는 일본군 병사 150명과 총격전을 전개하여 2개 소대 1백여명을 전몰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홍범도 부대를 찾아 산림 속을 헤매던 일본군은 10월 25일 밤 10시경에 고동하 골짜기에서 홍범도 부대를 발견하고 12시 정각에 동정언 소장의 지휘를 받는 반야(飯野) 소좌(少佐) 휘하 150명의 전투병력을 앞세워 기습적인 돌격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용맹하게 반격을 가하는 독립군 연합부대와 약 45분간 치른 교전에서 일본군은 1백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전투에 대해 일본군의 전투 보고서에도 ‘동쪽 하늘이 점차 밝아오자 일본군 장졸의 얼굴마다 기쁨이 나타났다’고 회술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지대장인 동정언 소장의 직접 지휘를 받던 장교 반야 소좌는 일본군이 처음 출정했을 때는 1개 대대 병력을 통솔하는 대대장이었는데, 이들이 고작 150명 정도의 부대원만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는 것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일본군이 받았던 피해가 상당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간도지역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던 독립군 부대들도 각자의 활동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우선 백두산 산록을 향해 근거지 이동을 시작한 본대의 뒷수습을 위해 훈춘에 남아있던 독립군 병사들은 기림지대(磯林支隊)의 제1토벌대인 상판대대(上坂大隊)와 11월 4일 훈춘의 삼도구에서 일전을 벌였다. 나자구에 근거지를 둔 대의순의사회(大義旬議事會) 소속 의군대(義軍隊)인 최정국(崔正國) 중대는 기림지대의 제2토벌대인 아부대대(阿部大隊)와 교전하였다.
이밖에 11월 9일에는 김운서(金雲瑞)의 모험대(冒險隊) 30명이 훈춘 북방의 산림지대인 우두산(牛頭山) 남쪽 기슭에서 서촌(西村) 중좌(中佐)가 지휘하는 일본군 보병 2개 중대 병력과 맞서 싸웠다. 모험대원들은 한동안 총격전을 벌이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재빨리 훈춘 동북방에 있는 낙타하자(駱駝河子) 부근으로 부대를 이동하였으며, 이곳에서 다시 11월 20일 일본군 1개 소대 병력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일련의 전투과정에서 모험대장 김운서는 11월 30일에 훈춘현 판석구(板石溝)에서 일본군 보병 제75연대의 일부와 교전하던 중에 전사하였으며, 동생 김운하(金雲河) 역시 같은 부대의 일본군에게 생포된 후 독립군의 통신사무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11월 8일 훈춘 차대인구(車大人溝) 북방 골짜기에서 참수(斬首)되는 비운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훈춘지역의 독립군은 대황국·노흑산·왕팔발자(王八渤子) 등으로 진격해오는 기림지대에 대해 유인작전이나 기습공격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왕청현 십리평의 독립군 본부와 사관연성소를 지키고 본대 이동 후의 뒷수습을 위해 잔류해 있던 북로군정서 소속의 일부 독립군은 왕청현 지역에서 목촌지대(木村支隊)의 횡전(橫田)을 맞아 밀림에서 일본군의 작전을 방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한편 일본군의 독립군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되자『매일신보(每日申報)』는 일본군의 활동이나 군사작전의 성과를 왜곡하는 기사를 자주 보도함으로써 전황을 왜곡하고 있었다. 우선 1920년 10월 19일자에서는 ‘토벌대 행동 개시, 토벌대 제3대로 편성하여 15일 출발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여 일본군이 간도지역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작전에 돌입했음을 알렸다.
토벌대의 성과에 대해서도 14일부터 16일 사이에 ‘훈춘현 토벌대는 사도구(四道溝)에서 음모단의 소굴을 발견하고 몇 명은 쏘아 죽였으며, 20여명을 체포하였고, 소총 50정과 육혈포(六穴砲) 1정, 탄약 660발을 얻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대황구 부근에서는 ‘독립군으로 보이는 3명을 사살하고 총기·탄약 및 음모 관계서류를 획득하여 귀환하였다’고 하였다. 10월 10일에는 ‘명동소학교를 소각했다’고 보도하였다. ‘교장 김약연(金躍淵) 이하 직원 생도가 모두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명동학교를 수색하여 총기와 괴문서 등을 입수한 후 학교와 집을 불태우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또한 10월 28일에는 김좌진 부대와의 교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보도하기도 하였다.
˝초적단(草賊團)을 합한 1천여명의 수괴 김좌진 부하, 어로촌(漁老村)에서 서로 만나 충돌되며 일장 접전이 시작, 피차사상이 불소(不少)했다.
두도구에 있던 동지대(東支隊)의 예비대는 봉밀구(蜂密溝) 부근에 음모단의 집단이 있는 것을 탐지하고 당시 봉밀구 서북방 약 80리 되는 후차창구(後車廠溝)로부터 돌아오는 길인 21일 이른 아침 기병연대와 합하여 동지 서편 산중에서 음모단과 충돌하여 오후 7시까지 싸움을 계속한 후 드디어 그들을 뒤편 되는 밀림지대 안으로 격퇴하였다.
그 싸움에 대한 일본군의 손해는 전사자로 하사 1명, 병졸 2명 부상자로 졸병 11명, 점획(占獲)한 도적의 군수품으로 기관총 1정, 소총 11정, 총검 2자루, 탄약 1천 2백발, 면총(眠銃) 1정이었는데 음모단의 두목은 김좌진이요 부하 2~300명을 거느렸으며, 그 외에 초적단 7~800명이 그에 참가한 듯 한데 그 합계는 1000명 내외인 바, 음모단의 사상은 다대한 모양이나 아직 알 수 없다.˝
위의 내용을 통해서 보면 일본군 토벌대는 21일 오전 김좌진 부대와 ‘어로촌’에서 대규모의 접전을 치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좌진 부대는 1천여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부대였다고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는 일본군의 피해와 전과만을 언급하고 있으며, 소위 음모단의 피해에 대해 ‘다대한 모양이나 아직 알 수 없다’고 함으로써 토벌대의 패전을 은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매일신보』는 독립군에 대해 초적단이라고 하여 극히 폄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일본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사자가 3명에 불과하고 부상자는 11명에 그쳤다고 하는 등 궁극적으로 전투의 상황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월 29일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 발표를 인용한『매일신보』의 보도에서는 동지대 예비대가 어로촌에서 홍범도 부대의 노영지(露營地)를 돌격했다고 하면서 ‘아군에게는 피해가 없으며 음모단의 손해는 캄캄한 밤중이라 그 수효를 알 수는 없으나 죽은 자가 30명 가량이요, 손해가 다대한 모양’이라고 보도하였다. 더욱이 11월 6일자 기사에서는 ‘음모단 중 가장 무서운 두령’ 홍범도가 10월 25일 수비대의 맹렬한 야습을 받고 혼잡한 틈에 저격당했다는 설(說)이 있다고 하는 등 마치 토벌대가 홍범도를 사살하는데 성공한 듯한 추측성 보도를 게재하는 등 토벌대의 전황을 극단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매일신보』의 이러한 보도는 모두 어로촌, 즉 독립군과 일본군의 최대의 격전지였던 어랑촌전투의 상황에 대한 일제 측 언론의 보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어랑촌 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가 받았던 충격이 상당히 큰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밖에『매일신보』에서는 ‘소지(小池) 대위(大尉)가 지휘하는 헌병과 경찰관이 12월 4일부터 18일까지 무산 건너편 유동(游洞)과 맹하동(孟下洞)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음모조선인 1명을 사살하고 감추어 둔 총기 20여종을 확보했다’고 보도하였다. 12월 22일자 기사에서는 ‘합마당으로부터 서편으로 약 50리 되는 중국인의 집에 10여명의 조선인 음모인이 숨어 있다는 밀고를 받은 도전(島田) 소위(少慰)가 3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그 집을 포위하여 5명을 사살하고 2명을 포박하고, 총기와 탄약을 노획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병사 3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고 하였다. 1921년 12월 1일에는 ‘근등(近藤) 중위(中尉)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국자가 용정의 상삼봉(上三峰)에서 저공비행으로 부근의 조선인 음모단에게 폭탄을 투하하고 귀환했다’고 보도하였다.
『매일신보』12월 11일자 기사에서는 ‘제19사단이 간도지방에 출동한 이래 체포한 조선인 음모단의 연인원은 116명인데 간도영사관에 인도한 인원은 44명이며, 소총 356정, 소총탄약 19110발, 권총 65정, 탄약 43발, 기타 불온문서, 피복, 나팔 등을 입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에서는 또한 ‘12월 1일까지 훈춘현과 사도구에서 귀순한 인원이 605명인데, 앞으로도 귀순할 자가 더 있을 것’이라고 하여, 전체적으로 일제의 ‘간도토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도했다.
12월 18일자에서는 ‘김좌진은 이도구로, 홍범도는 안도현으로 도망하여 그림자도 없으며, 음모단체 중 한민회(韓民會)는 귀순하였고 기타 단체도 그림자도 없다’고 하였다. 12월 22일자에서는 ‘군정서 경신국장 채규오(蔡奎五)가 12월 10일 목촌(木村) 토벌대에 귀순하였으며, 광복단 총무 홍두식(洪斗植), 독립군과 국민회의 연락원이었던 박춘서(朴春瑞) 등 2명이 12월 18일에 동지대에 귀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모단의 수령이 토벌을 견디지 못하여 속속 귀순하는 모양’이라는 보도기사를 게재하였다. 한편『매일신보』1920년 12월 13일자에서는 ‘한민회의 유력인사들이 토벌대의 위력에 눌려 귀순할 의사를 표명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훈춘 부근에서 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한민회 소속인 음모조선인단은 우리 파견군의 위력에 눌리어서 유력한 자의 대부분은 모두 귀순할 뜻을 표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다시 자신의 성의를 일반 조선인에게 표할 목적으로 지난 7일에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배부하였더라.
一. 각 촌락에 잠복하여 있는 음모단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귀순시킬 일.
二. 위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회원을 각 촌락에 파견하여 경고문을 배부하고 또는 별호 방문을 하여 귀순을 권고할 일.
三. 가부의 사용하는 무기는 수색하여 그것을 일본군에게 제공할 일.
四. 훈춘현 하에 재주하는 조선인은 지금으로부터 경거망동하지 안코 안녕질서를 유지할 일.
五. 조선인 보민회를 설립하여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교육산업을 장려할 일.
六. 보민회를 설립키 위하여 그 유지법을 협의하여 우유지방법에 대하여 평의원 8명을 서명하여 오는 13일에 회합케 하여서 구체적 방침을 협의할 일.˝
위의 내용에서 보면 일제는 훈춘지역에 친일세력을 부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보민회(保民會)가 설립되었다. 이는 일제가 간도지역 독립군의 자생적 기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군사작전 뿐만 아니라 대민활동의 확대·강화라는 전략도 구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2월 16일자 보도에서는 ‘말 70두~80두를 가진 140명~150명의 조선인 음모단이 영고탑(零古塔)에 도착하였는데, 이들은 남방에서 토벌한 자들의 잔당이며, 십수명의 부상자를 데리고 있는데 적장한 가옥을 급여 받을 수 있으며, 대신 무기를 제공하고 농사일에 종사하겠다고 신청하였다’는 기사를 게재하여, 궁극적으로 독립군 부대가 전의를 상실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였다.
이러한 보도 경향에도 불구하고『매일신보』는 토벌에 참전했던 안천삼랑(安川三郞)이 ‘청산리 서대포(西大浦)에 있던 무관학교는 군대의 편성도 매우 규칙적으로 되어 있었으며,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는 모두 크나큰 수목 속과 기타 수림 사이에 숨어 있어서 토벌하기에 간단치 않았다’는 증언을 보도하는 등 독립군에 대한 토벌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매일신보』는 일본군의 간도침략이 구체화되기 이전부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보도기사를 게재했다. 그리고 전황에 대해서는 토벌계획이 성공적이었다는 보도기사를 반복적으로 게재함으로써 상황을 왜곡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매일신보』는 당시의 상황을 왜곡·보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제(日帝)의 절박한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단이 거둔 구체적인 전과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윤곽을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상해 임시정부는『독립신문(獨立新聞)』에서 ‘김좌진(金佐鎭) 씨 부하 6백명과 홍범도(洪範圖) 씨 부하 3백명은 대소전쟁 10회에서 왜병(倭兵)을 격살한 자 1천 2백명’이라고 하였는데, 군무부에서는 북로군정서의 전황보고에 근거하여 청산리대첩의 총체적인 전과를 확인하였다. 중국의 신문인『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에서는 일본군 전사자를 2천여명으로 추산하였다. 이 신문에서는 ‘일인(日人) 사망 2천여명, 단장 1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한인(韓人)은 1천여정의 소총과 기관총 몇 정을 노획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은『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를 2천여명으로 추산하였고, 청산리대첩에 참전했던 이범석의『우등불』에서는 일본군의 사상자가 약 3천 3백여명이라고 회상하였다.
이에 비해 일제의 기록에서는 백운평전투에서 병사 4명 전사에 하사 1명과 병사 2명이 부상하엿다고 하고 있을 뿐이며, 어랑촌전투에서 조차도 보병 1명과 기병 2명이 전사하고 보졸 4명과 기병 4명이 부상했을 정도라고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동하전투에서는 ‘아(我)의 피해 없으며, 적의 피해 30명’이라고 하여 전투 상황을 철저하게 왜곡하였다.
그러나 전황에 대한 이러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간도주재 계(堺) 일본총영사가 내전(內田)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긴급전문에서 보면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2개 연대의 병력으로서 2개월 동안이면 소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기대에 반해, 성적은 다소 실패로 끝났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고 보고함으로써 일본군이 패전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 이밖에 일본영사관의 비밀보고서에는 일본군이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병사 8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독립군 측도 상대적으로 경미하기는 했지만 인명의 손실이 있었다. 이범석의『우등불』에 의하면 전사자 60여명, 부상자 90여명, 실종자 2백여명으로 파악하면서 실종자는 그후 대부분 복귀한 것으로 회고하고 있다. 독립군의 피해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군무부 특파원 안정근(安定根)이 임시정부에 보고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0월 22일부터 3일간의 전투에서 3백여명에 달하는 독립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경우 21일의 백운평 전투와 25일~26일의 소규모 전투들에서 피해를 합치면 독립군의 피해는 안정근의 보고보다도 많다.
청산리대결전에서 독립군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엇던 요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북로군정서의 서일(徐一) 총재는 ‘적의 실패와 아군의 승전’으로 나누어 독립군의 승리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번 전투에 백반의 승한을 유(有)한 적은 하(何)로 인하여 반(反)히 대패를 초(招)하였으며, 백반을 준비가 부족한 아군은 능히 승전(勝戰)을 득(得)하였는지 차(此)를 약진(略陳)함.
적의 실패 이유
1. 병가에서 가장 기피하는 것은 경적(輕敵)하는 행위로 험곡장림(險谷長林)을 별로 수색도 경계도 없이 맹진(盲進)하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을 당한 것.
2. 국지전술(局地戰術)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산림과 산지 중에서 종종의 자상충돌(自相衝突)을 낳은 것.
3. 일본군인의 염전심(厭戰心)과 피사도생(避死圖生)하는 겁나심(怯懦心)은 그 도에 달하여 군기(軍紀)가 문란하여 사법(射法)이 정확하지 못하여 1발의 효과도 없는 난사를 행한 뿐인 것.
독립군의 승전 이유
1.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용결투(奮勇決鬪)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심기를 압도한 것.
2. 양호안 진지를 선점하고 완전한 준비를 하여 사격성능을 극도로 발휘한 것.
3. 임기응변의 전술과 예민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에서 벗어나서 뛰어난 것.˝
또한 청산리대결전에서 독립군의 승리 원인을 좀 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첫째, 독립군에 대한 한인사회 전반의 전폭적인 지지가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전투지역 내의 한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밀림장곡(密林長谷)의 지형에서 독립군에게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역으로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일본군의 군용 전선을 찾아내어 절단함으로써 독립군의 승전에 기여한 점,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독립군을 후원한 점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청산리대결전은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강점당한 우리 민족이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건설한 한인사회와 이를 바탕으로 민족적 역량을 통합함으로서 이룩한 빛나는 승리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