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알 유희>

이봉주201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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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달빛이 그렇게 밝더니 오늘, 구름 한점 없는 하늘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이고나서 다이애나는 물놀이 시작. 함께 놀 친구를 부를까? 물어도 그저 엄마랑 같이 놀고 싶단다. 그래그래, 어떨 땐 북적대지 않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으니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서 둘이서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수도에서 나오는 물은 전율을 느낄만큼 아주 차다. 가정에 공급되는 상수원을 저장하고 있는 곳의 대부분이 꽤 서늘하다는 뜻일게다. 잠깐이라도 발을 물에 넣고 있으면 금새 발이 빨갛게 되는데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엉덩이까지 물을 채워서 신나게 논다. 물놀이를 하다가 그린벨트 경계에서 코요테를 봤다. 큰 개처럼 생긴 코요테가 우리 둘을 힐끔 쳐다보고 지나가는데 물 때문에 차가워진 몸이 순간 더욱 서늘해졌다. 얼마 전엔 우리 이웃 미셸이 곰을 봤다고 했고, 남편은 출근길에 사슴을 봤다고 했다. 다운타운에서 한시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리집이 위치해있는데 마치 인적 드문 산 중에 있는 것처럼 온갖 동물들을 본다. 사슴이나 예쁜 벌새를 보면 그래도 기분이 좋은데 코요테나 곰을 본다는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생각해서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저기 머리 위를 나는 흰머리 독수리또한 바닥에 내려앉아있을 때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생각하면 - 단 한번도 땅에 내려 온 독수리를 본 적은 없지만 - 슬쩍 몸서리가 쳐진다. 그래도 이건 호강 아니겠는가. 아무리 캐나다에 살아도 이렇게 자연과 가까이 살기는 어렵고 자동차 소리 피하기가 쉽지 않은데, 담장 너머 사슴을 보고 너구리를 보고 곰이나 코요테를 보는 것은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데 불가피한 요소가 아니겠는가. 어쨌든, 저멀리 유유히 지나가는 코요테를 보면서 나는 다이애나 곁에 더욱 바짝 붙어서 함께 물놀이를 해줬다. 아이는 최고의 놀이 친구인 엄마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환희에 가득찬 웃음을 짓고. 

 

다이애나가 물놀이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난 그네를 타며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었다. 전공을 독문학으로 했기에 내가 <유리알 유희>를 읽은 건 원본까지 합해서 꽤 되는데, 역시, 세월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예전에 깨우치지 못했던 깨달음을 곳곳에서 얻는다. 지적 영역은 한창 학문에 매진할 때에는 그 넓이가 넓어질런지는 모르겠으나 이리저리 바쁜 과제를 하느라 그 깊이를 깊게 하는덴 부족함이 있기 마련. 지금, 예전보다 완숙해진 시각으로 책을 읽으니 그 옛날 어설프게 학문을 접했던 내가 보이고, 글마다 숨어있는 보석이 보인다. 그저께 내가 사랑하는 언니로부터 아주 많은 걱정이 담긴 방명록 글을 읽고는, 정말로 아닌 게 아니라 내가 필요이상으로 지쳐있지 않은가에 대한 물음을 내 자신에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책 속에서 찾아낸 기막힌 해답이 있어서 여기에 옮겨적는다.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없나?" 하고 물었지. 나는 알 수가 없었네. 거기서 그는 내게 물었던 모든 일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되풀이하면서 피로나 우울증이나 정신적 침체의 첫 징후까지 거슬러 올라갔네. 그리고는 이런 증세는 너무나 자유롭고 무모하게 연구에 몰두하는 자에 한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르 빌어서 제어하는 힘을 되찾아야 할 때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 주었네. 나는 규칙적인 명상 연습을 멋대로 그만두어 버렸는데, 처음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으면 적어도 바로 그 나태함을 뉘우치고 개선해야 했을 것이라고 그는 지적해주었지. 바로 그의 말대로야. 나는 정말 명상을 게을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여가가 없고 언제나 불쾌하고 기분이 산만했다든지 아니면 너무 연구에만 열중한 나머지 흥분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명상을 중단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의식할 수 없게 되었던 거야. 그리고 거의 실패하고 절망하게 된 이제사 비로소 다른 사람에 의해 그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때부터 나는 자포자기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 학교에서 하는 명상의 초보 연습으로 되돌아가서 가까스로 집중과 침잠의 능력을 차차 되찾았지. [...] 그 무렵의 내 모습은 그러했지. 지금도 이야기하기가 조금 부끄러워. 그러나 그건 사실이었어. 요제프 크네히트! 자기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면 할수록, 혹은 그때그때 우리의 과제가 많은 것을 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명상이라는 힘의 원천, 정신와 영혼의 새로운 융화에 의지해야만 하지.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런 실례를 많이 알고 있지만, 우리가 어떤 과제에 몰두하게 되어 흥분하고 피로하게 되고 압박받는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는 그 명상이라는 힘의 원천을 소홀히하기 쉽지. 그것은 마치 정신적인 일에 몰두하면 육체를 돌보는 데에 소홀해지기 쉬운 것이나 똑같아. 역사상 위대한 인물은 모두 명상할 줄 알고 있었거나 명상에 의해서 이르는 길을 어느새 알고 있었지. 그렇지 못한 자는 아무리 탁월한 재능이 있고 힘이 강한 자라도 모두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네. 그런 자들은 과제나 야망의 포로가 되어 이성을 잃고, 현실적인 것에 항상 다시 거리를 둘 수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야. 아니, 자네는 이미 이런 상태를 알고 있어. 첫 연습 때 벌써 배웠으니까 말이야. 그것은 엄연한 진리야. 얼마나 엄연한 진리있가는 한 번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단 말이야.

 

마음 속에 밑줄을 그어둘 문장들이 많은 부분이었다. 마치 나에게 해주는 말같아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는 어느새, 명상에 잠긴 나를 발견하고는 아이와 함께 아주아주 느긋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조화가 깨어진다는 것은 어느 한쪽에 무리한 힘을 주고 있다는 뜻이니, 그 한쪽에 슬쩍 힘을 빼면 다시 조화로울 수 있는 법. 엄마 곁에 파고드는 아이의 유한 머리와 다정한 가슴을 쓸어안고 세상 가득 기쁨을 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