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케치북에 담긴 이야기.7

25남2013.04.23
조회8,836

 

1.백송의 혼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그리고 싶은 게 생기면 만사를 다 재쳐두고 그림을 그리는 몹쓸 병이 있다.

 

기억력이 좋지 못한 터라, 마음을 울리는 어떤 것을 보게되면,( 가령,손을 꼬옥 잡고 길을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보다가 묘하게가슴이 벅차오른다던지)

 

-이건 사진으로도 남길 수 없는 거야, 그림으로 어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돼..!

 

하는 묘한 초조함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를 본 날로, 허겁지겁 집에 오자마자 스케치북을 펼쳐 그렸다.

 

백송의 혼..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이번에 하게 된 건축 프로젝트는 서촌의 한 지점에 '‘한국근대도시․건축센터'를 짓는 것이었다.

 

(위치를 정확히 말하자면 항상 일본인,중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국제적 맛집인 토속촌의 주차장 자리

이다.)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이 지어지는 땅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해!

 

이건 건축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룰이다.

 

그런데

 

다 함께 답사를 한번 왔음에도 불구하고,

 

서촌에 어떤 건물을 지어야 할 지 감이 잘 안 오는 것이었다.

 

-아- 큰일이다.

 

비가 내리는 날, 나는 혼자 다시 서촌을 찾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 서촌 일대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이곳 저곳에 숨어있는 서촌의 이야기를 찾아다녔다.

 

통인시장 동네 아줌마한테 예전에 이곳에 계곡이 있었다면서요? 라고 물어도 보고, 동네의 개량한옥이 어

 

떻게 생겨먹었나, 여기에 물받이를 대 놓았네, 보일러를 다 바깥에 설치해놓았구나, 역시 한옥은 아무래도 추우니까- 저기 떡볶이집에 걸린 '떡튀김'이라는 건 무슨 메뉴일까- 배화여대경비아저씨를 속이고 몰래 학교에 잠입해 옥상 꼭대기로 올라가 서촌 일대를 내려다도 보고....

 

서촌 곳곳에 새겨진 이 땅의 흔적을 찾자! 라는 목표로 돌아다니다가 알게 된 스토리중 '통의동의 백송'이 있었는데,

 

 

 

그것은 수명이 300년이었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는 백송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소나무는 오랫동안 이 근방을 지키듯이 뻗어 있었는데, 1990년에 태풍이 왔고,

 

그 거대했던 나무가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누군가는 그 나무 근처에서 건물공사를 하다가 뿌리를 잘라냈던게 원인이 되었던 거라고도 한

다.)

 

쓰러진 나무를 다시 세우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모두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나무가 조금씩 살아날 기미를 보였었는데,

 

어느날 밤,백송이 관으로 만들어 쓰면 좋다는 욕심에 누군가 제초제를 밑둥에 잔뜩 뿌려놓았다

고 한다.

 

다음날 제초제에 죽어가는 백송을 보고, 항상 백송을 봐 오면서 컸던, 그래서 그 나무를 너무 사

랑했던

 

홍기옥 할머니는 손으로 그 흙을 헤집어내다가 손이 다 타들어갔고

 

그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1993년 백송은 고사했고, 93년3월24일, 천연기념물 4호라고 지정했던 것도 해지되었다.

 

죽은 밑둥만 남아버린 백송.

 

그런데 , 백송이 살아있었을 당시 때때로 떨어져내린 솔 씨로부터 올라온 씨앗을

 

가져다가 묘목을 만들었던 사람이 있었던 거다.

 

결국 모두의 노력으로

 

저 멀리 경상도에서 자라던 백송의 아가들 중 튼실한 놈 네 그루를 가져와

 

고사한 어미백송의 주위에 심었고, 지금은 홍기옥할머니의 보살핌 아래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네 그루의 아가백송들에게는 4그루에 각기 주인이 있다. 종로구청, 서울시, 문화재청, 그리고 나

머지 한 그루는 홍기옥 할머니.

 

지금도 통의동 백송이 고사하던 날에는 제사를 올리고 막걸리를 뿌려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된 나는, 백송을 꼭 눈으로 봐야겠구나, 했는데,

 

그런데 이 백송 터가 어디있는지 도저히 못 찾겠는 거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나는 엄마가 자취방에서 쓰라고 준 뚝배기를 책가방에 넣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느라 어깨가 뽀샤질 것만 같았다.

 

그러다 발견한 건,

 

누군가가 버려놓은 것 같이, 길 모퉁에 놓여진 작은 3단 서랍에 써 놓은 글이었다.


600년 백송은 죽다.


그러나 새끼들은 잘 살고 있다.


할매막걸리 먹고


나쁜 짖 안 하고.. -나그네

 

그 서랍이 가리키고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고,

 

빗속에서 나는

 

마침내 백송을 만났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였다.

 

고동색으로 짙게 바래버린, 천천히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백송의 밑둥.

 

그리고 그 주변으로 어미가 남긴 어린 백송들이 가지를 쭉쭉 뻗으며 자라나고 있었다.

 

내리는 봄비를 받아먹으며-

 

300년동안 백송은 이 땅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사람들은 600년이라고 알고 있었다고 하나 고사 후 나이테측정을 통해 수명이 300년이었다고

 

밝혀졌다고 한다.)

 

창의궁 안에서 영조와 함께 자랐고, 추사 김정희가 그 밑에서 그림을 그린 날도 지나서,

 

일제강점기에 창의궁을 허물고 도로를 내던 날에도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해방이 되는 날 춤추던 사람들도 보고, 떨어지는 포탄과 빗발치는 총성으로 가득찬 한국전쟁 때에도

 

계속 동네를 지켰을 거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밑둥이 남아서

 

건축답사를 온 나를 만난 것이구나.

 

 


-잊혀지는 건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의동의 백송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

 

백송의 흔적은 이 동네 곳곳에 진하게 남아 있다.

 

300년이 넘도록 내려오고있는 백송의 혼(魂).

 

나는 이 혼을 닮은 건물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춤추고오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라는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을 해 보았는데,

 

사실 새우는 고래들이 싸움을 하던 운동을 하던 밥을 먹던 춤을 추던간에

 

옆에 있으면 그냥 등 터져 나가는 존재인게 아닌가...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춤을 추는 고래가 잘못인 건지, 옆에 있던 새우가 잘못인 건지는 어려운 문제이나

 

어찌되었건 새우로 살아간다는 건 많이도 피곤한 일이구나.

 

-자세하게 보면 새우로 추정되는 주황색 점들이 있다.

 

새우는 사실 먹으려고 구워야만 주황색이 된다는 건 그리고 나서야 눈치 챈 이야기.

 

먹으려고 보았을 때의 모습만 기억에 남았던 겐가?!

 

다시한번 새우한테 미안해졌다.

 

 

3.대왕오징어가 먹는 것은?
우주바다 그림을 연작하기로 결심하고,
오징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음, 우주의 암흑물질을 먹물처럼 내뱉는 그런 오징어를..



-우주와 바다속은 꽤나 잘 어울리는 소재다.
특히 심해로 들어가면 외계생물체라고 봐도 이상할 게
없는 생물체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대왕오징어.
그래도 이녀석은 수산물시장에 추욱 늘어져있는 다른
오징어들이랑 크게 다르게 생기진 않았으니, (길이가 거의 15m로 크다는 점만 빼면)
심해에 사는 생물체 치고는 참 젠틀한 녀석인거 같아.
거대 바다괴물 크라켄이 떠오르는
그 엄청난 크기와 위용에 사로잡힌 나는
(이미 그림은 뒷전이었다)
뭘 먹고 사는걸까, 대왕오징어님은.
이라는 궁금증에 도달했고.
저렇게 크면 막 새끼 고래라던지 사람도 잡아먹고 그럴 거 같은데.. 라는 추측과 함께
대왕오징어님을 알고싶다!라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논문까지 뒤져보게 되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겔 강화제를 첨가한 대왕오징어 어묵 개발 및 이의 품질에 대한 Setting의 영향- 대왕오징어의 가공방법에 따른 맛성분의 비교-미이용 원양산 대왕 오징어의 식품소재화를 위한 삼투공정법의 개발
등의 논문만이..


?!
심해대괴수로 값싸고 양많은 어묵을 제조할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니?!
역시 제일 무서운건 사람이구나...

환상의 대괴수가 어묵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나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4.사랑스런 바보들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대!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서, 도시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작은 나무 오두막 형태의 키오스크들이 쭈욱 늘어서서 달콤한 sweets를 팔던지, 수제 브라우니, 독일 소시지,

치즈,스노우 볼 등을 팔고, 길거리 에서는 악사들이 캐롤을 연주하고, 중앙에는 커다란 아이스 스케이트장과 회전목마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크리스마스 마켓의 거리는

완전, '크리스마스'스럽다!

그러나 내가 지내던 Bristol의 크리스마스마켓은 너무 작고 시시해서,

마치 성내동 골목시장을 연상케하는 규모로, 사람들도 많지 않고

구석에서는 아무도 타지 않는 회전목마만 빙글빙글...(조금, 괴기스럽다)

결국 나와 친구들은

이 근방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BATH' (동네 이름이다)

로 가기로 결정, 크리스마스 이틀 전 날에 그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와 - 동네가 그냥 크리스마스 덩어리야!

골목골목마다 가득찬 크리스마스마켓들과, 캐롤 송과,달콤한 냄새.

곳곳에 메달린 별똥별과 커다란 양말,

그리고

중앙에는 20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어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하지만 역시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고싶은 다른 잉글리쉬들로 인해

온 동네가 바글바글, 길을 걷는데 이건 마치 성수기 롯데월드 자이로스윙을 타러 줄을 선 기분이다.


-저기서 뭔가 파는 거 같은데.


-아아, 사람들 때문에 안 보여.


-sorry, sorry, excuse me--

쉴 틈 없이꾸물꾸물 흘러가는 사람들의 줄기 속에서

결국 우리는 모두 지쳐버렸고,

-우리, 조금 밖으로 나가자!

라는 의견에

크리스마스 마켓과는 동떨어진 커다란 공원에서 휴식.

그러다가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바보같은 그림자 놀이에 무척이나 열중하게 되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자, 내가 싸인을 보내면 너가 팔을 이렇게 움직여야 해.

너가 일번 눈동자야. 간다...!


-사팔뜨기!


샥.


-졸린 눈!


슈욱.


앗, 코 부분이 움직이는데?



-아~ 콧물이 흐르는걸 표현해 봤어.


-ㅋㅋㅋㅋㅋㅋㅋ 뭐야 ㅋㅋㅋㅋ

그렇게 우리는 곧 찾아올 크리스마스와

동네를 가득 메웠던 크리스마스 마켓은

까맣게 잊은 채

동네 언저리에서 실컷 그림자 놀이를 하다가 결국 귀가를 했었던,

바보같지만 기분좋은 2012년13월23일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또 와서 그림 놓고 가요~_~


http://blog.naver.com/hongly8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