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가현 오미하치만시 비화호에는 새벽부터 낚시꾼들이 몰리고 있었다. 밤낚시에 풀빠진 낚시꾼들의 눈앞에 이상한 것이 떠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바로 사람의 다리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 다른 한쪽 다리가 처음 다리를 찾은 곳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캠프장에서 발견되었다. 경찰은 곧바로 살인 사건의 가능성에 염두를 두고 수사에 착수한다. 이번에 발견된 다리 역시 발목 아래는 잘려나가 있었다. 허벅지에서 복사뼈까지 72cm의 길이. 양 다리 모두 예리한 도구로 잘려나간 듯 단면은 매우 평평했으며 감정 결과 두개의 다리는 같은 인물의 것이라는 것이 밝혀 졌다. 그리고 다리의 상태로 보아 사후 1주일에서 3주일 정도 된것으로 여겨졌다.
일본 경찰은 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사체유기 사건및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일본 최대 규모의 호수인 비와호에서 나머지 사체를 찾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경찰은 18일부터 70명의 인원을 투입해 비와호 전체의 수색에 나섰지만 사체의 나머지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5월 20일 또다시 낚시꾼에 의해 머리가 발견되었다. 죽은지 시간이 꽤 흐른 탓에 머리는 부패가 시작되어 이미 코와 입은 썩은 상태였다. 피해자는 백발의 짧은 머리를 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조사 결과 목을 예리한 칼로 잘라냈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외에도 얼굴의 일부분이 잘려나가 있었다. 피해자의 왼쪽 눈초리 밑에는 1.5cm정도의 혹이 있었고 목이 졸린 자국이 남아있어 교살된것으로 추정 되었다.
그러나 이후 사건의 미궁속으로 빠지게 된다. 5월 21일에 왼쪽 발목을 발견했지만 6월 22일과 23일 각각 발견된 왼손과 오른손 이후 다른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지금까지 찾아낸 사채를 기반으로 초상화를 만들어 피해자의 신원을 알아내려했지만 실패 했고 2009년 2월 27일에는 피해자의 신원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300만엔의 보상금을 걸었지만 현재 까지 피해자의 신원을 밝혀지지 않았다.
이노카즈라 공원 토막 살인사건
오전 11시에 마타카 경찰서로 [비닐봉투에 사람 다리가 들어있어요!] 라는 신고 전화가 들어왔다. 신고자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찾아 주려고 공원 쓰레기 봉투를 뒤지던 환경미화원이었다. 신고를 받은 미타카 경찰서는 즉시 공원 일대의 수색에 나섰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노카즈라 공원 7곳에서 27조각으로 절단된 몸과 팔 다리가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사체는 모두 비닐 봉투에 들어있었다. 작은 구멍이 나있는 탈수용 검은 봉투와 반투명한 봉투로 이중 포장 되어있엇고 어부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방법으로 봉투가 묶여 있었다.
손과 발의 지문은 대부분 지워져 있었지만 약간 남아있던 지문과 DNA검사를 통해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피해자는 공원 근처에 사는 35세의 건축사였다. 사인은 알수없었지만 늑골의 근육 섬유에는 생전에 상당한 출혈이 있었다는 흔적이 남아있었다.
절단되어 있던 피해자의 사체는 관절이나 뼈는 감안하지 않고 똑같은 길이와 굵기로 잘려나가 있었다. 약 20CM간격으로 전동 톱같은 도구를 사용해 잘라낸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공원 안의 쓰레기 통 사이즈에 맞춘것으로 범인이 이노카즈라 공원에 관해 잘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다.
사체에서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피해자의 혈액이 한방울도 남김없이 완전히 제거되었던 것이다. 그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일반 가정에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물과 의학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게다가 손발의 지문을 거의 지워 버린점, 사체의 절단 방식이 3가지 패턴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학적 지식을 지닌 복수의 범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는 가설 또한 제기되었다. 그러나 발견된 사체는 몸 전체의 1/3 정도에 불과했다.
아직까지도 피해자의 머리와 나머지 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기 시작한다.
당초 너무나 기괴한 살인 방식 때문에 매스컴에서도 많은 보도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사건 3일뒤인 4월 26일 나고야 공항에서 중화 항공 140편이 추락하며 264명의 사망자가 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당연히 매스컴의 주목은 이쪽으로 옮겨갔고 이후 이노카즈라 공원 토막 살인사건의 보도는 격감하게 된다.
제보 및 취재에 따르면 피해자는 어떠한 종교 시설에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또한 22일 새벽 피해자와 닮은 남성이 공원 근처에서 젊은 남자 2명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원한도 없었고 범인 또한 물증을 전혀 남기지 않았기에 이후 수사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사건 발생 11개월후 일본 경시청은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이노카즈라 공원 토막 살인 사건 수사 본부를 해체시키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피해자의 신원 외에는 살인동기와 범인의 신상에 관해서는 어떠한 정보도 알려진 바가 없다. 결국 2009년 4월 23일 15년의 공소시효가 지나면서 이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게 되었다.
빙산 콜라 무차별 살인 사건
1977년 1월 3일 오후 11시 반 당시 도쿄 미나토구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16세의 고등학생이 숙소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는 시나가와역 근처의 시나가와 스포츠 랜드 정면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던 도중 열리지 않은 코카콜라 병을 주웠다. 그리고 새벽 1시 고등학생은 그 콜라를 마셨다.
순간적으로 입에 넣은 콜라의 맛이 이상하다는것을 느낀 그는 바로 콜라를 토해내고 수돗물로 입을 행궜다. 하지만 잠시뒤 그는 그대로 쓰러졌고 의식을 잃었다. 같은 방을 쓰던 룸메이트에 의해 즉시 병원에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고등학생은 곧 사망하고 말았다. 사인은 청산에 의한 중독이었다.
같은 날 오전 8시 15분 고등학생이 콜라를 주운 공중전화로 부터 북쪽으로 600M 정도 떨어진 고속도로에서 당시 46세 이던 작업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 되었다. 역시 병원으로 옮겨 졌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사인은 역시 청산에 의한 중독. 작업부가 쓰러져 있던 곳 주변에는 그가 마신 것으로 보이는 콜라병이 놓여 있었고 남아있는 콜라 에서는 청산 반응 이 검출되었다.
경찰은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작업부 역시 공중 전화에서 콜라를 주웠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공중 전화에서 600M 가량 떨어진 시나가와구 상점의 공중전화에서 또다른 청산가리 콜라가 발견 되었다.
마침 그 가게의 아들이 학교에 가던중 이콜라를 발견했지만 귀가후에 마실 생각으로 놓고 갔기 때문에 천운으로 목숨을 건졌다. 경찰은 청산을 넣은 콜라를 이용한 독살 600M 간격으로 공중전화에 놓여있는 점을 바탕으로 동일범 의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을 했다.
그리하여 콜라를 많이 마시는 젊은 이들이나 청산 화합물을 입수하기 쉬운 도장업 및 가공업자들을 수색했다. 하지만 물증이 부족한데다 범인의 신원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결국 이 두개의 사건은 1992년 1월 4일 부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것이 끝이 아니였다.
도쿄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약 한달뒤인 2월 13일 오전 6시 20분 무렵 오사카 후지이데라시에 사는 39세의 회사원이 출근 도중 담배를 사기위해 들렀던 술집 공중전화에서 콜라병을 발견하고 마셨다. 그후 그는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가 마신 콜라병 역시 청산반응이 검출되었다.
남자는 목숨을 건졌지만 퇴원한 다음날 집에서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했다. 유서는 없었지만 죽기 직전 가족에게 [도쿄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내가 당하니 부끄러워서 살수가 없다] 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러나 " 아무도 그가 콜라를 마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 라던가 " 그에게는 청산 중독 특유의 증상이 보이지 않았다 " 는 보도 역시 있어 사후에도 큰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2월 14일 도쿄역 지하상가에서 43세의 어느 회사 사장이 계단에서 40개의 초콜렛이 들어있는 봉투를 발견했다.
나가오카쿄 살인사건
1979년 5월 23일 일본 교토부 나가오카쿄시
시내의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주부 2명이 퇴근후 함께 뒷산 대나무 숲에 고사리를 캐러 갔다 실종된다. 그리고 이틀후인 25일 그녀들은 산꼭대기 근처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주부A는 목을 졸려서 주부B는 칼에 찔려서 사망한 상태였다.
두사람의 배낭에는 각자의 도시락과 고사리 지갑이 들어있는 채였다. 검사결과 사망시각은 두사람 모두 정오에서 오후 2시 반 사이로 판명되었다. 두사람의 지갑을 확인해 본 결과 돈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금품을 위한 범죄는 아닌것으로 보였다. 단서라고는 주부 A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영수증 뿐이었다.
거기에는
[ 쫓기고 있다. 살려주세요 이남자는 나쁜사람 ]
이라는 글자가 연필로 날려 써져있었다. 영수증은 사건 발생 이틀전의 것이었다. 글씨를 쓴 연필은 이후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살해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부러진 연필심이 발견되었다.
주부 A는 온몸에서 최소 30곳 이상을 구타당했고 그로 인해 늑골이 부러지고 간이 파열된 상태였다.
범행 현장은 살해당한 주부들처럼 피크닉이나 나물을 캐기 위해 지역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나무가 무성한 탓에 낮이라도 깊숙한 곳에서는 강간 사건등이 자주 발생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이후 주부들이 산에 들어가고 10분후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2명이 보였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신원을 밝힐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1994년 5월 24일 공소시효가 성립되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채 남아잇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숨겨진 비화가 있다는 도시 전설이 존재한다.
사건 발생후 5년 뒤인 1984년 5월 15일 나가오카쿄시에는 주부C가 목과 등을 마구 찔린뒤 이불에 돌돌 말려 집에서 불에탄 채로 시체로 발견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언론으로부터 경찰이 5년전 사건과 이 사건의 관련성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그럴 듯한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주부C가 5년전 그날 주부A , B 와 함께 고사리를 캐러갔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먼저 하산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고 매스컴과 경찰을 보도 협정을 체결해서 그녀의 신상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5년의 세월이 흘러 주부C는 그녀를 찾아낸 진범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이 소문의 내용 이었다.
경찰은 기자회견에서 5년전 살인사건과 주부C 살해 사건 사이의 관련성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사건 역시 5년 전의 살인 사건와 더불어 미해결 사건으로 남았고 진상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와카야마 신문배달 여고생 살인사건
1988년 6월 22일 일본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새벽 5시 40분 무렵 길을 지나가던 행인이 시체를 발견한다. 피해자는 주변에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당 만 15세의 여고생 하야시 후미코였다. 그녀는 배달용으로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옆에 쓰러뜨린채 목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조사결과 피해자는 목의 여러군데를 날카로운 흉기로 찔려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동와카야마 경찰서는 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약 8만 95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학교 친구들부터 주변 사람들까지 1100여명의 관계자에게 사정 정취를 시작했다.
하지만 용의자를 찾기 위한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용의자의 수색은 좀처럼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 1400여명의 수상한 사람을 조사했지만 결과적으로 범인을 특정하는데는 실패했다.
그에 따라 경찰은 피해자의 자전거 옆에 찍혀 있던 피에 젖은 발자국에 주목하게 된다. 경찰은 이 발자국을 범인의 것이라 단정하고 발자국을 기반으로 수색에 나선다.
그리하여 발자국과 같은 종류의 신발이 팔린루트와 소유자를 추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신발은 와카야마현에서만 1685켤레가 팔려나간 물건이었다.
게다가 경찰의 오랜 추적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소유자를 확인할 수 있었던 신발은 겨우 16켤레에 불과했다. 결국 이 사건은 제대로 된 용의자를 특정짓지도 못하고 2003년 6월 22일부로 공소 시효가 만료되어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이바라키 소년 린치 살해 사건
2000년 5월 4일 일본 이바라키현 우시쿠시
새벽 12시 30분 무렵 한 소년이 여자친구와 함께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함께 이야기를 하며 쥬스를 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사람은 4명의 남자에게 습격을 당해 비상계단으로 끌려갔다.
여자는 범인 중 1명에게 묶이고 소년은 30분 동안 저항 없이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하고 가지고 있던 돈 수천엔 가량을 빼앗겼다. 이후 소년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9일 뒤인 9월 13일 새벽 1시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경찰은 4인조 폭행단의 몽타주를 그려 여러곳에 배포하고 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 4명의 범인은 현재까지도 잡히지 않았고 2012년 현재 이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있다.
나고야 임산부 살인사건
1988년 3월 18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당시 31세의 회사원은 귀가한 뒤 집안에서 출산을 앞두고 있던 27세의 아내가 살해당한 것을 발견했다. 옆에는 아기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내의 양손을 단단히 묶여 있었고 목에는 전기 코드가 감겨져 있었다.
1988년 3월 18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당시 31세의 회사원은 귀가한 뒤 집안에서 출산을 앞두고 있던 27세의 아내가 살해당한 것을 발견했다. 옆에는 아기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내의 양손은 단단히 묶여있었고 목에는 전기 코드가 감겨져 있었다.
시체는 얇고 예리한 칼날로 명치로 부터 하복부에 걸쳐 세로 38CM에 걸쳐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에서 꺼내진 아기는 탯줄이 불어 있는 채로 어머니의 발밑에서 울고 있었다. 범인은 아내를 무엇인가로 교살하고 태아를 산채로 꺼낸뒤 목에 전기코드를 감았다.
그리고 자궁 안에 전화기의 수화기와 캐릭터 인형이 붙어있는 키홀더를 넣고 아내의 지갑을 훔쳐 도주한것으로 보였다.
강제로 꺼내진 태아는 허벅지 무릎 고환까지 모두 3곳을 칼로 베인 상태였지만 병원에서 약 1시간에 걸친 대 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당초 경찰은 남편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하고 수사에 들어갔다. 남편이 귀가후 아내의 시체를 보고서도 옷부터 갈아입었고 장례식에 찾아온 기자들 앞에서 [아내는 와인을 좋아했습니다.와인을 바치고 싶어요] 라고 말하며 영전 앞에 과시하듯 와인을 올리는 등 이상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사망 추정 시각인 오후 3시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 졌기에 그 혐의는 해소되었다.
살해된 아내는 네트워크 판매 사업인 암웨이의 회원이었다. 그리고 아내를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은 그녀에게 물건을 샀던 여자였다. 그녀는 당일 오후 2시경 차를 타고 선물로 딸기를 가지고 죽은 사람의 집에 찾아갔었다.
아내는 여자를 방에 맞아 들여 함께 딸기를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물건 값을 치룬뒤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오후 3시에 집을 떠났고 죽은 아내는 지하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왔다. 즉, 임산부의 사망 시각이 오후 3시 전후인 것을 감안하면 두 사람이 집에서 나온뒤 바로 범인이 침입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경찰은 범인이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녀가 집을 비운 사이 들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래층에 사는 사람에게 [오후 3시 10분 부터 20분 사이에 의심스러운 남자가 아파트를 배회하고 있어요] 라는 증언을 얻기에 이른다.
증인의 말에 따르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뒤 벨소리가 울렸기에 나갔더니 키 165CM의 정장을 입은 30대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나카무라씨를 모르십니까?] 라는 질문을 했고 증인은 [모릅니다] 라고 대답하고 바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 남자에 대한 목격 증언은 그외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왔다. 가까운 역에서 아파트 사이에서 몇명의 사람들이 그를 목격했던 것이다.
경찰은 이러한 증언에 따라 아파트와 근처 거주자들에게 증언을 확보하는 동시에 사건 당일 아파트 부근을 지나갓던 400여명의 보행자들을 모두확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의자의 행방은 알수 없엇다.
살해된 피해자의 복부가 38CM에 걸쳐 찢어져 있었고 아기를 죽이지 않고 배를 갈랐다는 점에서 의료 종사자의 범행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이후 피해자의 남편과 아들은 메스컴의 눈을 피해 1999년 해외로 이민을 갔고 결국 이 사건은 2003년 3월 18일 공소 시효를 맞아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사카이데 대나무숲 소녀 실종 사건
2005년 4월 29일 일본 카가와연 사카이데시.
그날은 고시키다이 방문객 센터 안쪽의 대나무 숲에서 죽순 캐기 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고 있던 5살의 오오니시 유키는 어머니와 언니의 손을 잡고 이벤트에 참가했다. 유키의 가족외에도 18가족이 더 참가해 약 60여명의 시민이 참가한 꽤 규모있는 지역 이벤트였다.
대회는 별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대회 종료 시간인 오후 2시가 가까워 질 무렵이었다. 막 4번째 죽순을 찾아낸 유키는 흥에 겨워 [한개더 찾아올께!] 라고 어머니에게 말한뒤 혼자 대나무 숲 안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시간이 오후 1시 40분.
그리고 이것이 유키의 마지만 모습이었다.
오후 2시가 되어 대회가 종료 되었지만 유키는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된 어머니는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대나무숲 부근을 수색했지만 유키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후 오후 3시에는 방문객 센터 측 에서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고 오후 3시 45분 경 경창이 도착했다.
경찰은 경찰견을 투입해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 하지만 약 3000여명의 경찰 인력이 동원된 대대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유키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후 2시의 대낮에 60명의 사람들 가운데서 한명의 소녀가 홀연히 사라진것 이었다. 부근에는 연못이 있어 혹시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연못의 물을 모두 빼냈지만 유키와 관련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당일 쓰고 있던 모자나 신고 있던 신발 같은 유류품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산책로에서 조금 벗어난 죽림 한 가운데서의 공터에서 기묘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유키의 물통 냄새를 토대로 수색에 나섰던 경찰견 한마리가 공터 가운데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경찰은 다음날도 4마리의 경찰견을 투입했지만 그 4마리 역시 그 공터에서 멈춰섰다. 경찰견은 지면과 신발의 마찰로 인해 발생하는 냄새에 의지하여 수색을 한다. 만약 유괴 사건이라면 유키의 냄새가 멎어도 범인의 냄새가 남아있기 때문에 경찰견은 그것을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이 경찰견이 수색을 중단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마찰이 중단되었다는 뜻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산골이여서 자동차나 진입은 불가능한 곳이었다. 헬리콥터를 이용해 공중에서 유키를 납치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상황은 일어날수없응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현장에는 60명이 넘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중 헬리콥더를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연 유키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사건이 벌어진 고시키다이는 예로부터 요괴가 나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산이었다. 유키는 요괴에게 잡혀가기라도 한것일까? 2005년 벌어졌던 이 실종 사건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채 남아있다. 유키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악마의 시 번역자 살해사건
1991년 7월 11일 일본 츠쿠바 대학 조교수 이가라시 히토가 대학교의 엘리베이터 홀에서 살해당한뒤 이튿날인 7월 12일 발견되었다. 현장에서는 피해자의 혈액형과는 다른 o형의 혈흔과 범인이 남겨둔 것으로 보이는 중국산 쿵푸 슈즈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피해자인 이가라시 조교수는 1990년 살만 라슈디의 소설 " 악마의 시 " 를 일본어로 번역한 사람이 이었다.
그는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이란에서 유학을 하며 이란 왕립 철학 아카데미 연구원으로 일했을 정도로 이슬람과 이란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인물이었다. 악마의 시는 1988년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가 써낸 소설로 무함마드의 권위를 무시하고 이슬람교를 비하했다는 이유로 이슬람권의 엄청난 반발을 샀던 소설이었다.
당시 이란의 지도자 였던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격분하여 살만 루슈디는 물론이고 출판에 관여한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살만 루슈디는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을 영국 정부의 비호 하에 숨어 살아야만 했다.
이와 같이 당시 악마의 시에 관여하는 것은 이슬람권 전체의 공분을 사는 일이었다.
이가라시 히토는 악마의 시를 번역 출간하며 " 호메이니의 사형 선고는 실수였다 " 라던가 " 이슬람은 원래 훨씬 더 건전하고 건강한 정신의 종교였다 "라는 발언을 했다.
이런한 상황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었기에 언론은 사건 발생 직후 부터 이란정부의 암살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옿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그의 죽음을 보도한 이란의 일간지 " 사람 "이 " 이가라시 히토의 죽음은 전 이슬람 교도에게 희소식 "이라고 발언한 것이 알려지며 이러한 의견은 더욱 힘을 얻었다.
CIA의 전 직원인 케네스 폴락은 이란 군부에 의한 범행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목격되기 쉬운 엘리베이터 홀에서 범행을 저지른것은 다른 이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주간지 " 후미하루 "의 1998년 4월 30일호는 사건 당시 도쿄 출입국 관리소가 츠쿠바 대학에 단기 유학을 와 있던 방글라데시인 유학생을 용의자로 지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 학생은 이가라시의 시체가 발견된 바로 그날 오후 방글라데시로 귀국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권 국가와의 마찰을 두려워할 일본 정부는 수사를 그대로 종결했다는 것이 후미하루의 기사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일본 경찰은 목격이 쉬운 엘리베이터 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단순한 개인간의 원한 때문에 일어난 사건일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 방글라데시인 유학생에 대한 추적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수사 도중 이가라시 조교수의 책상 서랍에서는 살해 몇 주 전에 쓴 것 같은 매모가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이가라시의 글씨로 단노우라 전투에 관한 4행시가 일본어와 프랑스어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4행의 [단노우라에서 살해당한다] 라는 부분이 이상했다.
일본어로 적혀 있는 부분은 원문 그대로 였지만 프랑스어로 [계단의 뒤에서 살해당한다]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메모를 적은 시점에 이미 이가라시는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의견도 있다.
이 사건은 이후 어떠한 진전도 보이지 않았고 살인 사건의 공소 시효인 15년이 지남에 따라 지난 2006년 7월 11일 영구 미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외국인의 범행을 저지른 뒤 일본 국내를 떠났을 경우 시효를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측에서 유류품을 모두 유족에게 돌려주고 사건을 종결해 끝까지 미심쩍은 부븐을 남기고 말았다.
라바의 무서운 이야기54
안녕하세요 좋은아침입니다!
어제는 너무..일이 많아져서 들어와 보지도 못했네요
그리고 오늘 들어와서보니 악플들 다시는 분들 많네요 ㅋㅋ
저 그렇게 어리지도 않고요 반말을 하시는거 보니 좀 기분이 그렇네요ㅋㅋ
그리고 저 안갑니다 ㅋㅋ 재미없으신분들은 다른거 봐주시길 바래요
자자 말이 너무 길었군요 시작합니다~
요번편은
그전처럼 글이 아닌사진입니다
오후에 또봐요~
- 미매진 미해결 사건 전담부
- 출처 VK'sEpitaph 괴담의 중심
- 모바일 배려
비와호 토막 살인사건
일본 시가현 오미하치만시 비화호에는 새벽부터 낚시꾼들이 몰리고 있었다.
밤낚시에 풀빠진 낚시꾼들의 눈앞에 이상한 것이 떠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바로 사람의 다리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 다른 한쪽 다리가 처음 다리를 찾은 곳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캠프장에서 발견되었다. 경찰은 곧바로 살인 사건의 가능성에 염두를 두고 수사에 착수한다.
이번에 발견된 다리 역시 발목 아래는 잘려나가 있었다. 허벅지에서 복사뼈까지 72cm의 길이.
양 다리 모두 예리한 도구로 잘려나간 듯 단면은 매우 평평했으며 감정 결과 두개의 다리는
같은 인물의 것이라는 것이 밝혀 졌다. 그리고 다리의 상태로 보아 사후 1주일에서 3주일 정도
된것으로 여겨졌다.
일본 경찰은 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사체유기 사건및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일본 최대 규모의 호수인 비와호에서 나머지 사체를 찾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경찰은 18일부터 70명의 인원을 투입해 비와호 전체의 수색에 나섰지만 사체의 나머지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5월 20일 또다시 낚시꾼에 의해 머리가 발견되었다.
죽은지 시간이 꽤 흐른 탓에 머리는 부패가 시작되어 이미 코와 입은 썩은 상태였다.
피해자는 백발의 짧은 머리를 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조사 결과 목을 예리한 칼로 잘라냈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외에도 얼굴의 일부분이 잘려나가 있었다.
피해자의 왼쪽 눈초리 밑에는 1.5cm정도의 혹이 있었고 목이 졸린 자국이 남아있어 교살된것으로 추정
되었다.
그러나 이후 사건의 미궁속으로 빠지게 된다.
5월 21일에 왼쪽 발목을 발견했지만 6월 22일과 23일 각각 발견된 왼손과 오른손 이후 다른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지금까지 찾아낸 사채를 기반으로 초상화를 만들어 피해자의 신원을 알아내려했지만 실패
했고 2009년 2월 27일에는 피해자의 신원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300만엔의 보상금을 걸었지만 현재
까지 피해자의 신원을 밝혀지지 않았다.
이노카즈라 공원 토막 살인사건
오전 11시에 마타카 경찰서로 [비닐봉투에 사람 다리가 들어있어요!] 라는 신고 전화가 들어왔다.
신고자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찾아 주려고 공원 쓰레기 봉투를 뒤지던 환경미화원이었다.
신고를 받은 미타카 경찰서는 즉시 공원 일대의 수색에 나섰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노카즈라 공원 7곳에서 27조각으로 절단된 몸과 팔 다리가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사체는 모두 비닐 봉투에 들어있었다.
작은 구멍이 나있는 탈수용 검은 봉투와 반투명한 봉투로 이중 포장 되어있엇고 어부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방법으로 봉투가 묶여 있었다.
손과 발의 지문은 대부분 지워져 있었지만 약간 남아있던 지문과 DNA검사를 통해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피해자는 공원 근처에 사는 35세의 건축사였다.
사인은 알수없었지만 늑골의 근육 섬유에는 생전에 상당한 출혈이 있었다는 흔적이 남아있었다.
절단되어 있던 피해자의 사체는 관절이나 뼈는 감안하지 않고 똑같은 길이와 굵기로 잘려나가
있었다. 약 20CM간격으로 전동 톱같은 도구를 사용해 잘라낸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공원 안의 쓰레기 통 사이즈에 맞춘것으로 범인이 이노카즈라 공원에 관해 잘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다.
사체에서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피해자의 혈액이 한방울도 남김없이 완전히 제거되었던 것이다.
그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일반 가정에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물과 의학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게다가 손발의 지문을 거의 지워 버린점, 사체의 절단 방식이 3가지 패턴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학적 지식을 지닌 복수의 범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는 가설 또한 제기되었다.
그러나 발견된 사체는 몸 전체의 1/3 정도에 불과했다.
아직까지도 피해자의 머리와 나머지 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기 시작한다.
당초 너무나 기괴한 살인 방식 때문에 매스컴에서도 많은 보도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사건 3일뒤인 4월 26일 나고야 공항에서 중화 항공 140편이 추락하며 264명의 사망자가
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당연히 매스컴의 주목은 이쪽으로 옮겨갔고 이후 이노카즈라 공원 토막 살인사건의 보도는
격감하게 된다.
제보 및 취재에 따르면 피해자는 어떠한 종교 시설에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또한 22일 새벽 피해자와 닮은 남성이 공원 근처에서 젊은 남자 2명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원한도 없었고 범인 또한 물증을 전혀 남기지 않았기에
이후 수사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사건 발생 11개월후 일본 경시청은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이노카즈라 공원 토막 살인 사건 수사 본부를 해체시키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피해자의 신원 외에는 살인동기와 범인의 신상에 관해서는 어떠한 정보도 알려진 바가
없다. 결국 2009년 4월 23일 15년의 공소시효가 지나면서 이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게 되었다.
빙산 콜라 무차별 살인 사건
1977년 1월 3일 오후 11시 반
당시 도쿄 미나토구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16세의 고등학생이 숙소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는 시나가와역 근처의 시나가와 스포츠 랜드 정면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던 도중
열리지 않은 코카콜라 병을 주웠다.
그리고 새벽 1시 고등학생은 그 콜라를 마셨다.
순간적으로 입에 넣은 콜라의 맛이 이상하다는것을 느낀 그는 바로 콜라를 토해내고 수돗물로
입을 행궜다. 하지만 잠시뒤 그는 그대로 쓰러졌고 의식을 잃었다.
같은 방을 쓰던 룸메이트에 의해 즉시 병원에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고등학생은 곧 사망하고 말았다. 사인은 청산에 의한 중독이었다.
같은 날 오전 8시 15분
고등학생이 콜라를 주운 공중전화로 부터 북쪽으로 600M 정도 떨어진 고속도로에서 당시 46세 이던
작업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 되었다.
역시 병원으로 옮겨 졌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사인은 역시 청산에 의한 중독.
작업부가 쓰러져 있던 곳 주변에는 그가 마신 것으로 보이는 콜라병이 놓여 있었고 남아있는 콜라
에서는 청산 반응 이 검출되었다.
경찰은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작업부 역시 공중 전화에서 콜라를 주웠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공중 전화에서 600M 가량 떨어진 시나가와구 상점의 공중전화에서 또다른 청산가리 콜라가
발견 되었다.
마침 그 가게의 아들이 학교에 가던중 이콜라를 발견했지만 귀가후에 마실 생각으로 놓고 갔기 때문에
천운으로 목숨을 건졌다.
경찰은 청산을 넣은 콜라를 이용한 독살 600M 간격으로 공중전화에 놓여있는 점을 바탕으로 동일범
의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을 했다.
그리하여 콜라를 많이 마시는 젊은 이들이나 청산 화합물을 입수하기 쉬운 도장업 및 가공업자들을
수색했다. 하지만 물증이 부족한데다 범인의 신원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결국 이 두개의 사건은
1992년 1월 4일 부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것이 끝이 아니였다.
도쿄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약 한달뒤인 2월 13일
오전 6시 20분 무렵 오사카 후지이데라시에 사는 39세의 회사원이 출근 도중 담배를 사기위해
들렀던 술집 공중전화에서 콜라병을 발견하고 마셨다.
그후 그는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가 마신 콜라병 역시 청산반응이 검출되었다.
남자는 목숨을 건졌지만 퇴원한 다음날 집에서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했다.
유서는 없었지만 죽기 직전 가족에게 [도쿄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내가 당하니
부끄러워서 살수가 없다] 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러나 " 아무도 그가 콜라를 마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 라던가
" 그에게는 청산 중독 특유의 증상이 보이지 않았다 " 는 보도 역시 있어 사후에도 큰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2월 14일 도쿄역 지하상가에서 43세의 어느 회사 사장이 계단에서 40개의 초콜렛이
들어있는 봉투를 발견했다.
나가오카쿄 살인사건
1979년 5월 23일 일본 교토부 나가오카쿄시
시내의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주부 2명이 퇴근후 함께 뒷산 대나무 숲에 고사리를 캐러 갔다
실종된다. 그리고 이틀후인 25일 그녀들은 산꼭대기 근처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주부A는 목을 졸려서 주부B는 칼에 찔려서 사망한 상태였다.
두사람의 배낭에는 각자의 도시락과 고사리 지갑이 들어있는 채였다.
검사결과 사망시각은 두사람 모두 정오에서 오후 2시 반 사이로 판명되었다.
두사람의 지갑을 확인해 본 결과 돈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금품을 위한 범죄는 아닌것으로 보였다.
단서라고는 주부 A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영수증 뿐이었다.
거기에는
[ 쫓기고 있다. 살려주세요 이남자는 나쁜사람 ]
이라는 글자가 연필로 날려 써져있었다.
영수증은 사건 발생 이틀전의 것이었다.
글씨를 쓴 연필은 이후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살해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부러진 연필심이 발견되었다.
주부 A는 온몸에서 최소 30곳 이상을 구타당했고 그로 인해 늑골이 부러지고 간이 파열된 상태였다.
범행 현장은 살해당한 주부들처럼 피크닉이나 나물을 캐기 위해 지역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나무가 무성한 탓에 낮이라도 깊숙한 곳에서는 강간 사건등이 자주 발생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이후 주부들이 산에 들어가고 10분후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2명이 보였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신원을 밝힐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1994년 5월 24일 공소시효가 성립되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채 남아잇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숨겨진 비화가 있다는 도시 전설이 존재한다.
사건 발생후 5년 뒤인 1984년 5월 15일
나가오카쿄시에는 주부C가 목과 등을 마구 찔린뒤 이불에 돌돌 말려 집에서 불에탄 채로 시체로
발견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언론으로부터 경찰이 5년전 사건과 이 사건의 관련성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그럴 듯한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주부C가 5년전 그날 주부A , B 와 함께 고사리를 캐러갔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먼저 하산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고 매스컴과 경찰을 보도 협정을 체결해서
그녀의 신상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5년의 세월이 흘러 주부C는 그녀를 찾아낸 진범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이 소문의 내용
이었다.
경찰은 기자회견에서 5년전 살인사건과 주부C 살해 사건 사이의 관련성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사건 역시 5년 전의 살인 사건와 더불어 미해결 사건으로 남았고
진상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와카야마 신문배달 여고생 살인사건
1988년 6월 22일 일본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새벽 5시 40분 무렵 길을 지나가던 행인이 시체를 발견한다.
피해자는 주변에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당 만 15세의 여고생
하야시 후미코였다. 그녀는 배달용으로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옆에 쓰러뜨린채
목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조사결과 피해자는 목의 여러군데를 날카로운 흉기로 찔려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동와카야마 경찰서는 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약 8만 95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학교 친구들부터
주변 사람들까지 1100여명의 관계자에게 사정 정취를 시작했다.
하지만 용의자를 찾기 위한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용의자의 수색은 좀처럼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 1400여명의 수상한 사람을 조사했지만 결과적으로 범인을 특정하는데는 실패했다.
그에 따라 경찰은 피해자의 자전거 옆에 찍혀 있던 피에 젖은 발자국에 주목하게 된다.
경찰은 이 발자국을 범인의 것이라 단정하고 발자국을 기반으로 수색에 나선다.
그리하여 발자국과 같은 종류의 신발이 팔린루트와 소유자를 추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신발은 와카야마현에서만 1685켤레가 팔려나간 물건이었다.
게다가 경찰의 오랜 추적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소유자를 확인할 수 있었던 신발은 겨우 16켤레에
불과했다. 결국 이 사건은 제대로 된 용의자를 특정짓지도 못하고 2003년 6월 22일부로 공소 시효가
만료되어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이바라키 소년 린치 살해 사건
2000년 5월 4일 일본 이바라키현 우시쿠시
새벽 12시 30분 무렵 한 소년이 여자친구와 함께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함께 이야기를 하며 쥬스를 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사람은 4명의 남자에게 습격을 당해 비상계단으로 끌려갔다.
여자는 범인 중 1명에게 묶이고 소년은 30분 동안 저항 없이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하고 가지고
있던 돈 수천엔 가량을 빼앗겼다.
이후 소년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9일 뒤인 9월 13일 새벽 1시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경찰은 4인조 폭행단의 몽타주를 그려 여러곳에 배포하고 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 4명의 범인은 현재까지도 잡히지 않았고 2012년 현재 이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있다.
나고야 임산부 살인사건
1988년 3월 18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당시 31세의 회사원은 귀가한 뒤 집안에서 출산을 앞두고 있던 27세의 아내가 살해당한 것을
발견했다. 옆에는 아기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내의 양손을 단단히 묶여 있었고 목에는 전기 코드가 감겨져 있었다.
1988년 3월 18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당시 31세의 회사원은 귀가한 뒤 집안에서 출산을 앞두고 있던 27세의 아내가 살해당한 것을
발견했다. 옆에는 아기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내의 양손은 단단히 묶여있었고 목에는 전기 코드가 감겨져 있었다.
시체는 얇고 예리한 칼날로 명치로 부터 하복부에 걸쳐 세로 38CM에 걸쳐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에서 꺼내진 아기는 탯줄이 불어 있는 채로 어머니의 발밑에서 울고 있었다.
범인은 아내를 무엇인가로 교살하고 태아를 산채로 꺼낸뒤 목에 전기코드를 감았다.
그리고 자궁 안에 전화기의 수화기와 캐릭터 인형이 붙어있는 키홀더를 넣고 아내의 지갑을 훔쳐
도주한것으로 보였다.
강제로 꺼내진 태아는 허벅지 무릎 고환까지 모두 3곳을 칼로 베인 상태였지만 병원에서 약 1시간에
걸친 대 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당초 경찰은 남편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하고 수사에 들어갔다.
남편이 귀가후 아내의 시체를 보고서도 옷부터 갈아입었고 장례식에 찾아온 기자들 앞에서
[아내는 와인을 좋아했습니다.와인을 바치고 싶어요] 라고 말하며 영전 앞에 과시하듯 와인을
올리는 등 이상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사망 추정 시각인 오후 3시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 졌기에
그 혐의는 해소되었다.
살해된 아내는 네트워크 판매 사업인 암웨이의 회원이었다.
그리고 아내를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은 그녀에게 물건을 샀던 여자였다.
그녀는 당일 오후 2시경 차를 타고 선물로 딸기를 가지고 죽은 사람의 집에 찾아갔었다.
아내는 여자를 방에 맞아 들여 함께 딸기를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물건 값을 치룬뒤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오후 3시에 집을 떠났고 죽은 아내는 지하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왔다.
즉, 임산부의 사망 시각이 오후 3시 전후인 것을 감안하면 두 사람이 집에서 나온뒤 바로 범인이
침입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경찰은 범인이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녀가 집을 비운 사이 들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래층에 사는 사람에게 [오후 3시 10분 부터 20분 사이에 의심스러운
남자가 아파트를 배회하고 있어요] 라는 증언을 얻기에 이른다.
증인의 말에 따르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뒤 벨소리가 울렸기에 나갔더니 키 165CM의
정장을 입은 30대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나카무라씨를 모르십니까?] 라는 질문을 했고 증인은 [모릅니다] 라고 대답하고 바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 남자에 대한 목격 증언은 그외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왔다.
가까운 역에서 아파트 사이에서 몇명의 사람들이 그를 목격했던 것이다.
경찰은 이러한 증언에 따라 아파트와 근처 거주자들에게 증언을 확보하는 동시에 사건 당일 아파트
부근을 지나갓던 400여명의 보행자들을 모두확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의자의 행방은 알수 없엇다.
살해된 피해자의 복부가 38CM에 걸쳐 찢어져 있었고 아기를 죽이지 않고 배를 갈랐다는 점에서
의료 종사자의 범행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이후 피해자의 남편과 아들은 메스컴의 눈을 피해 1999년 해외로 이민을 갔고 결국 이 사건은
2003년 3월 18일 공소 시효를 맞아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사카이데 대나무숲 소녀 실종 사건
2005년 4월 29일 일본 카가와연 사카이데시.
그날은 고시키다이 방문객 센터 안쪽의 대나무 숲에서 죽순 캐기 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고 있던 5살의 오오니시 유키는 어머니와 언니의 손을 잡고 이벤트에 참가했다.
유키의 가족외에도 18가족이 더 참가해 약 60여명의 시민이 참가한 꽤 규모있는 지역 이벤트였다.
대회는 별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대회 종료 시간인 오후 2시가 가까워 질 무렵이었다.
막 4번째 죽순을 찾아낸 유키는 흥에 겨워 [한개더 찾아올께!] 라고 어머니에게 말한뒤 혼자 대나무
숲 안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시간이 오후 1시 40분.
그리고 이것이 유키의 마지만 모습이었다.
오후 2시가 되어 대회가 종료 되었지만 유키는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된 어머니는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대나무숲 부근을 수색했지만 유키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후 오후 3시에는 방문객 센터 측 에서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고 오후 3시 45분 경
경창이 도착했다.
경찰은 경찰견을 투입해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
하지만 약 3000여명의 경찰 인력이 동원된 대대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유키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오후 2시의 대낮에 60명의 사람들 가운데서 한명의 소녀가 홀연히 사라진것
이었다. 부근에는 연못이 있어 혹시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연못의 물을 모두 빼냈지만
유키와 관련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당일 쓰고 있던 모자나 신고 있던 신발 같은 유류품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산책로에서 조금 벗어난 죽림 한 가운데서의 공터에서 기묘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유키의 물통 냄새를 토대로 수색에 나섰던 경찰견 한마리가 공터 가운데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경찰은 다음날도 4마리의 경찰견을 투입했지만
그 4마리 역시 그 공터에서 멈춰섰다.
경찰견은 지면과 신발의 마찰로 인해 발생하는 냄새에 의지하여 수색을 한다.
만약 유괴 사건이라면 유키의 냄새가 멎어도 범인의 냄새가 남아있기 때문에 경찰견은 그것을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이 경찰견이 수색을 중단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마찰이 중단되었다는 뜻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산골이여서 자동차나 진입은 불가능한 곳이었다.
헬리콥터를 이용해 공중에서 유키를 납치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상황은 일어날수없응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현장에는 60명이 넘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중 헬리콥더를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연 유키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사건이 벌어진 고시키다이는 예로부터 요괴가 나온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산이었다.
유키는 요괴에게 잡혀가기라도 한것일까?
2005년 벌어졌던 이 실종 사건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채 남아있다.
유키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악마의 시 번역자 살해사건
1991년 7월 11일 일본 츠쿠바 대학
조교수 이가라시 히토가 대학교의 엘리베이터 홀에서 살해당한뒤 이튿날인 7월 12일 발견되었다.
현장에서는 피해자의 혈액형과는 다른 o형의 혈흔과 범인이 남겨둔 것으로 보이는 중국산 쿵푸
슈즈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피해자인 이가라시 조교수는 1990년 살만 라슈디의 소설 " 악마의 시 " 를 일본어로 번역한 사람이
이었다.
그는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이란에서 유학을 하며 이란 왕립 철학 아카데미 연구원으로 일했을
정도로 이슬람과 이란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인물이었다.
악마의 시는 1988년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가 써낸 소설로 무함마드의 권위를 무시하고 이슬람교를
비하했다는 이유로 이슬람권의 엄청난 반발을 샀던 소설이었다.
당시 이란의 지도자 였던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격분하여 살만 루슈디는 물론이고 출판에 관여한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살만 루슈디는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을 영국 정부의 비호 하에 숨어
살아야만 했다.
이와 같이 당시 악마의 시에 관여하는 것은 이슬람권 전체의 공분을 사는 일이었다.
이가라시 히토는 악마의 시를 번역 출간하며 " 호메이니의 사형 선고는 실수였다 " 라던가
" 이슬람은 원래 훨씬 더 건전하고 건강한 정신의 종교였다 "라는 발언을 했다.
이런한 상황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었기에 언론은 사건 발생 직후 부터 이란정부의 암살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옿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그의 죽음을 보도한 이란의 일간지 " 사람 "이
" 이가라시 히토의 죽음은 전 이슬람 교도에게 희소식 "이라고 발언한 것이 알려지며 이러한 의견은
더욱 힘을 얻었다.
CIA의 전 직원인 케네스 폴락은 이란 군부에 의한 범행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목격되기 쉬운 엘리베이터 홀에서 범행을 저지른것은 다른 이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주간지 " 후미하루 "의 1998년 4월 30일호는 사건 당시 도쿄 출입국 관리소가 츠쿠바 대학에
단기 유학을 와 있던 방글라데시인 유학생을 용의자로 지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 학생은 이가라시의 시체가 발견된 바로 그날 오후 방글라데시로 귀국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권 국가와의 마찰을 두려워할 일본 정부는 수사를 그대로 종결했다는 것이 후미하루의
기사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일본 경찰은 목격이 쉬운 엘리베이터 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단순한 개인간의 원한 때문에 일어난 사건일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 방글라데시인 유학생에 대한
추적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수사 도중 이가라시 조교수의 책상 서랍에서는 살해 몇 주 전에 쓴 것 같은 매모가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이가라시의 글씨로 단노우라 전투에 관한 4행시가 일본어와 프랑스어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4행의 [단노우라에서 살해당한다] 라는 부분이 이상했다.
일본어로 적혀 있는 부분은 원문 그대로 였지만 프랑스어로 [계단의 뒤에서 살해당한다]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메모를 적은 시점에 이미 이가라시는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의견도 있다.
이 사건은 이후 어떠한 진전도 보이지 않았고 살인 사건의 공소 시효인 15년이 지남에 따라 지난
2006년 7월 11일 영구 미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외국인의 범행을 저지른 뒤 일본 국내를 떠났을 경우 시효를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측에서 유류품을 모두 유족에게 돌려주고 사건을 종결해 끝까지 미심쩍은 부븐을
남기고 말았다.
가실때 ●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