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아버지의 도박, 술, 여자 였는데. 어렸을때 아버지가 사창가에 가시는 걸 본 기억이 난다. 빚이 1억이 넘어갔었고, IMF와 동시에 지방 작은 도시시청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명예퇴직금으로 빚을 갚게 된다.
친가가 지방 광역시에 있어서, 부모님 이혼 후에 나는아버지와 함께 친가로 가게 된다. 나는 죽어도 따라가기 싫었지만, 누나와나를 기를 능력이 없던 어머니는 이혼소송에서 친권을 포기하게 된다.
사실 내가 이 집안 장남이라 아버지쪽에서는 죽어도 친권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누나는 아버지의 폭력과 새어머니에 대한 반발때문에
가출을 하게 되고 대책없이 어머니께로 도피하게 된다.
친권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양육비를 주는 조건으로 어머니가키우게 된다.
웃기게도,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더 이상 모자 관계가 아닌, ‘동거인’관계였다. 슬펐다. 하지만 아버지는 양육비를 더이상 주지 않았다.
나는 명절날, 아버지께 돈을 받을 심산으로홀로 친가를 찾아갔다.
거기서 대판 싸웠고, 나는 두번다시 이 집안에발을 들이지 않겠다며,
선전포고를 하고 보란듯이 잘되어서 복수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이게 내가 중학교 2학년때 일이다.
어머니는 나와 누나를 위해 시골에서 지방 광역시까지 이사를 오셨다.
외가쪽에 13평짜리 아파트를 구해서, 그곳에서 세식구가 살았다.
외가쪽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철이 지지리도 없었던 것 같다.
큰 방황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학 온 초반에 좀 방황을해서,
공부를 많이 하진 못했다. 한창 피씨방이 열풍이었는데,게임하면서 철없이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아마 나보다 1살 많은 누나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고등학교는 인문계로 가게 되었다. 나름 지역 명문으로갔었는데, 참 행운이었다. 300명중 190등의 성적으로 들어갔다. 고등학교 1학년때 철이 간신히들었을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때는 수능 1등급을 유지했었다.한가지 특이했던 점은 고1때 수학이 ‘가’였는데, 고2때부터 ‘수’를 유지했다.
수능을 봤었고, 언어4등급, 수리 1등급, 사과탐 1등급 영어1등급이 나왔다. 언어에서 너무 긴장해서 좀 망친케이스였다. 원래는 서강대 경영학과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었다.사립대의 부담도 있고해서 지방거점 국립대의 국어교육과로 진학을 했다. 점수가 좀남긴했지만, 국립대라는 점과 한창 교사라는게 인기를 타기도 했었고, 그래서 그냥 진학했다. 언어 4등급이 국어교육과를 갔으니참 아이러니 였다.
대학교 다닐동안은 참 놀았던 것 같다. 국어공부는 정말 재미가없었고, 그냥 그렇게 놀면서 방황했던 것 같다. 연애도 해봤고.군대도 다녀왔다. 하지만 인생의 목표가 조금 사라졌을까? 사실 고등학생즈음 새아버지가 생겼다. 정말 좋으신 분이다. 지금까지 잘 길러주고 계신다. 아무튼 집안이 좀 살만해지자 긴장이 풀렸을까?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옅어지고, 그냥 시간이 흐른채 살아갔던 것 같다.
부모님 이혼 후, 내가 친아버지를 봤던 적은딱 1번이었다. 잠시 고등학교때 이야기를 꺼내자면, 고 2때 등교를 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집 앞에 친 아버지가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친 아버지는같은 버스를 타면서까지 학교 정문까지 나를 따라왔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그리고 고등학교 졸업때 집으로 편지가 날라왔다. 그 편지 안에는 나와 누나의 어렸을적사진이 있었는데, 엄마가 그 편지를 찢어서 태워버리셨다. 나도 별로읽고 싶지 않았다. 한번도 양육비를 준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양심으로…
다시 대학교 4학년으로 돌아와서.교생을 나갔는데, 참 재미있었다. 그러나 내적성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때 정신을 차렸을까? 그냥 공부를 더 하고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 임용고시는 합격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있었고, 그래서 자대 대학원에 교육학전공으로 입학을 했다. 열정적인 지도교수님 밑에서 2년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만 했다. 나의 또다른 아버지셨고, 내 인생의 멘토셨다. 나는 내지도교수님을 믿었고, 2년동안 한번도 말씀을 어겨본적이 없다. 그렇게2년이 흘렀다.
교수님은 나보고 유학을 가라고 하셨다. 나도 가고 싶었다.그래서 부모님께 (친어머니와 새아버지) 말을꺼냈다. 어머니는 반대하셨다. 그렇게 집이 썩 여유롭지 않았다.박사유학은 장학금을 받지 않는 이상 1년에 5천만원은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희미하지만 장학금을 받고 가겠다고 대책없는 선언을 해버렸다.그래서 나는 27살에 백수인채로 유학준비를 시작했다. 2월에 석사 졸업을 하고, 독서실에 들어갔다
영어시험 공부부터 시작을 했다. 수능영어1등급이긴했지만, 수능용이었고, 영어공부는 고등학교때3년한게 전부인 나다. 토익은 500점대였다.하지만 나는 토플을 먼저 시작했다. 기초부터 했다. 동시에 GRE(미국대학원입학영어시험)도 같이 했다.정말 독하게 했다. 고3때보다 열심히 했었던것 같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즈음 토플80점을 넘겼고, GRE도 대충 봤다.
미국 대학원 원서를 쓸 즈음이 되었고, 운 좋게도 다니던 대학교에연구원으로 5개월동안 계약직으로 채용이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월급’이란 것을 받아보는 기회였다. 월급은 세제하고240만원이었고. 이 중 100만원을 어머니께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썼다. 처음으로 어머니께 그 큰 돈을 드렸을때, 어머니가 참 기뻐하셨다. 그리고 내가 직장을 가지니까, 내 보험앞으로 어머니와 누나가 들어왔다. 가장이 된 느낌이었다. (새아버지와 어머니는 재혼을 하지 않으신채 15년을 함께 살아오고 계시다. 물론 나 누나와 4식구가 함께) 직장을 다니면서,참 재미있었다. 내 전공은 아니었지만, 좋으신교수님들과 회식도 하면서 이쁨받으면서 5개월동안 재밌게 했다.
계약이 끝날때즈음, 원서 결과가 나왔다.5군데를 썼었는데3군데를 붙고, 2군데가 떨어졌다.전부 주립대로만 지원했다. 학비문제때문이었는데, 1년은 자비로 다닐 최후의 각오가 있었다. 결국 입학과 동시에 장학금은 나오지 않았다.그래도 부모님께서 여기까지 온거, 1년 정도 투자해주신다고 하셨다.새아버지께 많이 감사했다. 친자식도 아닌 새끼를 이렇게 15년동안 길러주신 분은 다음세상에도 없을 것이다. 난 친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낳은 정보다 키우고 기른정이 나에겐 더 크다. 아무튼, 2012년 8월에 나는 미국으로 왔다.
행운이 따랐을까. 미국 지도교수가8월에 나에게 조교일을 주었다. 이 말인 즉슨, 학비가 면제가 된다는 뜻이다. 학비가 1학기에 약1천만원 하는데, 이 것이 전부 면제가 되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나는 정말 열심히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했다. 부모님께서는 너무나 좋아하셨다. 일단 학비가 공짜고, 소소히 생활비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기숙사비와 생활비 약간만 보태주시면 되게되었다. 2학기째에도 조교를 받게 되었으며, 지도교수로부터 신임을 받게되었다.
겹경사였을까. 다음해 1년짜리 펀딩을 Financial award형식으로 학교측으로부터 지원받게 되었고,학과에서 주는 상도 받게 되었다. 이게 미국 온지 2학기(8개월)만에 일어난 일이다. 며칠 전 어버이 날이라, 엄마 아빠랑 통화했다. 두분다건강하시고, 잘 지내고 계신다. 그리고 날 참 자랑스러워 하신다.엄마랑 한번씩 옛날 이야기하다보면, 코끝이 찡해진다. 나 중학교때, 그 절박했을때, 나와 누나 둘을 떠맡게된 엄마는 그때 어떤 심정이셨을까. 상상해보면 눈물이 난다. 그리고자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친 분이 우리 어머니다. 그리고 피 한방울 안섞인 나를 위해,15년동안 가르치고 먹이고 입혀주신분이 지금 현재 새아버지시다.
내가 박사학위를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한국에서 교수를 할 수 있고, 미국에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두분다 노후 대비는 해놓으셔서, 봉양하는 거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데,그래도 두분 모시고, 해외여행은 한번 가보고 싶다. 물론 누나도 함께. 누나한테도 항상 미안하고 고맙다. 하나 밖에 없는 누나인데, 내가 가진것이 없어서 잘해주지 못했다. 내가 일단 자리잡으면, 우리 가족 네명 행복하게 여행떠나고 싶다.
새아버지, 어머니가 수십년 짊어진 그 부담을 이제 내가 덜어드리고 싶다.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누나한테도 잘해주고 싶다. 이런 생각하다보니,나는 결혼을 할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는 연애도 해봤고,좋은 남편도 될 것이다. 하지만, 졸업 전까지는연애할 수 없는 처지같다. 일단 졸업하면 32세 정도 될 것 같은데,한국가서 선을 볼 거다. 그냥 이런 우리 집안을 이해해주고, 나와 함께 소소하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 마음씨 착한 여자를 만나고 싶다. 쓰다보니 목이 메인다.그래도 참 잘 살아온 것 같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좋은 새가족을 둬서이다.
여담으로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인데, 친할머니가 자꾸 외삼촌집에전화를 한다더라. 내 근황을 묻는다더라. 솔직한 내 생각은,나는 죽을때까지 내 친가와 연을 다시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결코 없다. 사실 내‘성’을 바꿀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 아직도 친권자가 친아버지로 되어있다는 사실이 좀 불쾌하다.15년넘게 땡전한푼 준 적이 없는 자이다. 나중에 결혼을 하면, 내 앞으로 호적을 새로 팔거다. 이런 집안 사정때문에, 우리 집은 명절을 크게 지내지 않는다. 그냥 가족끼리 조촐하게 전 몇개 부쳐먹고,가족 여행간다. 제사도 없다. 새아버지 제사는내가 모실거다.
(길어요)29세 남자의 살아온 이야기
29세 남자의 살아온 이야기
나는 지방의 아주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면사무소 다니시던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를 뒀다.
어렸을적 기억은 거의 없지만, 사진들을 보면 정말시골에서 자랐었다.
국민학교때 지방의 작은 소도시로 이사를 왔었다.
부모님 속 썩인 적 없었고, 꽤 모범생으로 초등학교를졸업했었다.
국민학교 졸업 무렵,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시게되었다.
이유는 아버지의 도박, 술, 여자 였는데. 어렸을때 아버지가 사창가에 가시는 걸 본 기억이 난다. 빚이 1억이 넘어갔었고, IMF와 동시에 지방 작은 도시시청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명예퇴직금으로 빚을 갚게 된다.
친가가 지방 광역시에 있어서, 부모님 이혼 후에 나는아버지와 함께 친가로 가게 된다. 나는 죽어도 따라가기 싫었지만, 누나와나를 기를 능력이 없던 어머니는 이혼소송에서 친권을 포기하게 된다.
사실 내가 이 집안 장남이라 아버지쪽에서는 죽어도 친권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누나는 아버지의 폭력과 새어머니에 대한 반발때문에
가출을 하게 되고 대책없이 어머니께로 도피하게 된다.
친권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양육비를 주는 조건으로 어머니가키우게 된다.
웃기게도,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더 이상 모자 관계가 아닌, ‘동거인’관계였다. 슬펐다. 하지만 아버지는 양육비를 더이상 주지 않았다.
나는 명절날, 아버지께 돈을 받을 심산으로홀로 친가를 찾아갔다.
거기서 대판 싸웠고, 나는 두번다시 이 집안에발을 들이지 않겠다며,
선전포고를 하고 보란듯이 잘되어서 복수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이게 내가 중학교 2학년때 일이다.
어머니는 나와 누나를 위해 시골에서 지방 광역시까지 이사를 오셨다.
외가쪽에 13평짜리 아파트를 구해서, 그곳에서 세식구가 살았다.
외가쪽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철이 지지리도 없었던 것 같다.
큰 방황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학 온 초반에 좀 방황을해서,
공부를 많이 하진 못했다. 한창 피씨방이 열풍이었는데,게임하면서 철없이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아마 나보다 1살 많은 누나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고등학교는 인문계로 가게 되었다. 나름 지역 명문으로갔었는데, 참 행운이었다. 300명중 190등의 성적으로 들어갔다. 고등학교 1학년때 철이 간신히들었을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때는 수능 1등급을 유지했었다.한가지 특이했던 점은 고1때 수학이 ‘가’였는데, 고2때부터 ‘수’를 유지했다.
수능을 봤었고, 언어4등급, 수리 1등급, 사과탐 1등급 영어1등급이 나왔다. 언어에서 너무 긴장해서 좀 망친케이스였다. 원래는 서강대 경영학과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었다.사립대의 부담도 있고해서 지방거점 국립대의 국어교육과로 진학을 했다. 점수가 좀남긴했지만, 국립대라는 점과 한창 교사라는게 인기를 타기도 했었고, 그래서 그냥 진학했다. 언어 4등급이 국어교육과를 갔으니참 아이러니 였다.
대학교 다닐동안은 참 놀았던 것 같다. 국어공부는 정말 재미가없었고, 그냥 그렇게 놀면서 방황했던 것 같다. 연애도 해봤고.군대도 다녀왔다. 하지만 인생의 목표가 조금 사라졌을까? 사실 고등학생즈음 새아버지가 생겼다. 정말 좋으신 분이다. 지금까지 잘 길러주고 계신다. 아무튼 집안이 좀 살만해지자 긴장이 풀렸을까?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옅어지고, 그냥 시간이 흐른채 살아갔던 것 같다.
부모님 이혼 후, 내가 친아버지를 봤던 적은딱 1번이었다. 잠시 고등학교때 이야기를 꺼내자면, 고 2때 등교를 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집 앞에 친 아버지가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친 아버지는같은 버스를 타면서까지 학교 정문까지 나를 따라왔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그리고 고등학교 졸업때 집으로 편지가 날라왔다. 그 편지 안에는 나와 누나의 어렸을적사진이 있었는데, 엄마가 그 편지를 찢어서 태워버리셨다. 나도 별로읽고 싶지 않았다. 한번도 양육비를 준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양심으로…
다시 대학교 4학년으로 돌아와서.교생을 나갔는데, 참 재미있었다. 그러나 내적성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때 정신을 차렸을까? 그냥 공부를 더 하고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 임용고시는 합격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있었고, 그래서 자대 대학원에 교육학전공으로 입학을 했다. 열정적인 지도교수님 밑에서 2년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만 했다. 나의 또다른 아버지셨고, 내 인생의 멘토셨다. 나는 내지도교수님을 믿었고, 2년동안 한번도 말씀을 어겨본적이 없다. 그렇게2년이 흘렀다.
교수님은 나보고 유학을 가라고 하셨다. 나도 가고 싶었다.그래서 부모님께 (친어머니와 새아버지) 말을꺼냈다. 어머니는 반대하셨다. 그렇게 집이 썩 여유롭지 않았다.박사유학은 장학금을 받지 않는 이상 1년에 5천만원은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희미하지만 장학금을 받고 가겠다고 대책없는 선언을 해버렸다.그래서 나는 27살에 백수인채로 유학준비를 시작했다. 2월에 석사 졸업을 하고, 독서실에 들어갔다
영어시험 공부부터 시작을 했다. 수능영어1등급이긴했지만, 수능용이었고, 영어공부는 고등학교때3년한게 전부인 나다. 토익은 500점대였다.하지만 나는 토플을 먼저 시작했다. 기초부터 했다. 동시에 GRE(미국대학원입학영어시험)도 같이 했다.정말 독하게 했다. 고3때보다 열심히 했었던것 같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즈음 토플80점을 넘겼고, GRE도 대충 봤다.
미국 대학원 원서를 쓸 즈음이 되었고, 운 좋게도 다니던 대학교에연구원으로 5개월동안 계약직으로 채용이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월급’이란 것을 받아보는 기회였다. 월급은 세제하고240만원이었고. 이 중 100만원을 어머니께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썼다. 처음으로 어머니께 그 큰 돈을 드렸을때, 어머니가 참 기뻐하셨다. 그리고 내가 직장을 가지니까, 내 보험앞으로 어머니와 누나가 들어왔다. 가장이 된 느낌이었다. (새아버지와 어머니는 재혼을 하지 않으신채 15년을 함께 살아오고 계시다. 물론 나 누나와 4식구가 함께) 직장을 다니면서,참 재미있었다. 내 전공은 아니었지만, 좋으신교수님들과 회식도 하면서 이쁨받으면서 5개월동안 재밌게 했다.
계약이 끝날때즈음, 원서 결과가 나왔다.5군데를 썼었는데3군데를 붙고, 2군데가 떨어졌다.전부 주립대로만 지원했다. 학비문제때문이었는데, 1년은 자비로 다닐 최후의 각오가 있었다. 결국 입학과 동시에 장학금은 나오지 않았다.그래도 부모님께서 여기까지 온거, 1년 정도 투자해주신다고 하셨다.새아버지께 많이 감사했다. 친자식도 아닌 새끼를 이렇게 15년동안 길러주신 분은 다음세상에도 없을 것이다. 난 친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낳은 정보다 키우고 기른정이 나에겐 더 크다. 아무튼, 2012년 8월에 나는 미국으로 왔다.
행운이 따랐을까. 미국 지도교수가8월에 나에게 조교일을 주었다. 이 말인 즉슨, 학비가 면제가 된다는 뜻이다. 학비가 1학기에 약1천만원 하는데, 이 것이 전부 면제가 되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나는 정말 열심히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했다. 부모님께서는 너무나 좋아하셨다. 일단 학비가 공짜고, 소소히 생활비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기숙사비와 생활비 약간만 보태주시면 되게되었다. 2학기째에도 조교를 받게 되었으며, 지도교수로부터 신임을 받게되었다.
겹경사였을까. 다음해 1년짜리 펀딩을 Financial award형식으로 학교측으로부터 지원받게 되었고,학과에서 주는 상도 받게 되었다. 이게 미국 온지 2학기(8개월)만에 일어난 일이다. 며칠 전 어버이 날이라, 엄마 아빠랑 통화했다. 두분다건강하시고, 잘 지내고 계신다. 그리고 날 참 자랑스러워 하신다.엄마랑 한번씩 옛날 이야기하다보면, 코끝이 찡해진다. 나 중학교때, 그 절박했을때, 나와 누나 둘을 떠맡게된 엄마는 그때 어떤 심정이셨을까. 상상해보면 눈물이 난다. 그리고자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친 분이 우리 어머니다. 그리고 피 한방울 안섞인 나를 위해,15년동안 가르치고 먹이고 입혀주신분이 지금 현재 새아버지시다.
내가 박사학위를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한국에서 교수를 할 수 있고, 미국에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두분다 노후 대비는 해놓으셔서, 봉양하는 거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데,그래도 두분 모시고, 해외여행은 한번 가보고 싶다. 물론 누나도 함께. 누나한테도 항상 미안하고 고맙다. 하나 밖에 없는 누나인데, 내가 가진것이 없어서 잘해주지 못했다. 내가 일단 자리잡으면, 우리 가족 네명 행복하게 여행떠나고 싶다.
새아버지, 어머니가 수십년 짊어진 그 부담을 이제 내가 덜어드리고 싶다.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누나한테도 잘해주고 싶다. 이런 생각하다보니,나는 결혼을 할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는 연애도 해봤고,좋은 남편도 될 것이다. 하지만, 졸업 전까지는연애할 수 없는 처지같다. 일단 졸업하면 32세 정도 될 것 같은데,한국가서 선을 볼 거다. 그냥 이런 우리 집안을 이해해주고, 나와 함께 소소하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 마음씨 착한 여자를 만나고 싶다. 쓰다보니 목이 메인다.그래도 참 잘 살아온 것 같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좋은 새가족을 둬서이다.
여담으로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인데, 친할머니가 자꾸 외삼촌집에전화를 한다더라. 내 근황을 묻는다더라. 솔직한 내 생각은,나는 죽을때까지 내 친가와 연을 다시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결코 없다. 사실 내‘성’을 바꿀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 아직도 친권자가 친아버지로 되어있다는 사실이 좀 불쾌하다.15년넘게 땡전한푼 준 적이 없는 자이다. 나중에 결혼을 하면, 내 앞으로 호적을 새로 팔거다. 이런 집안 사정때문에, 우리 집은 명절을 크게 지내지 않는다. 그냥 가족끼리 조촐하게 전 몇개 부쳐먹고,가족 여행간다. 제사도 없다. 새아버지 제사는내가 모실거다.
그냥 어디엔가 털어내고 싶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