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 해체된 조선공산당에 대신하여 중국공산당원의 이름으로 동만에서 일제와 싸우고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선해방이라는 그들의 절박한 목표가 항상 중국혁명에 종속된 채 유실되어가고 있음을 느껴야 했다. 특히 1933년부터 1935년에 이르는 반민생단투쟁 기간 동안에 자신도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수백 명의 무고한 조선인 전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들은 특히 동만에서 조선인들의 위상을 놓고 중국공산당원들과 심각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조선해방을 위한 구체적인 임무를 중국공산당에 요구했을 것이다. 또한 일제가 ‘간도에서의 조선인 자치’라는 미사여구로 조선인들을 동요시키고 있었던 만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의 동만에서의 대조선민족정책의 변화를 당연히 요구했을 것이다. ‘해방된 만주에서의 조선인의 자치실현’, 그것은 단순히 재만조선인의 이해만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해방된 조선족자치구’를 건설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광범한 통일전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며, 그 힘은 곧 조선해방을 위한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선인의 조선민족을 위한 항일투쟁’이 공식적으로 모호하게나마 인정되는 것은 대황위회의와 비슷한 시기에 나와 1935년 3월 중공당중앙위에서 통과된「동북임시인민혁명정부강령」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모두 13항으로 구성된 이 강령의 제11항은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민혁명정부는 동북경내의 소수민족(몽고인·조선인·타타르인)에 호소하여 일제 및 만주국에 대한 공동작전을 진행하고, 일제 축출 후에 있어서 각개 민족의 자유권을 인정함. 단 인민혁명정부는 일제 및 그 주구의 민족자주를 구실로 하는 제국주의 병탄에는 반대한다.”
이 문건에서 중공당이 만주에서 처음으로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 활동가들을 광범하게 통일전선에 결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강령 조항은 사실상 구체적인 민족자결권의 내용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구체적인 실천의지가 담겨 있기보다는 추상적인 선언적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럴 즈음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회 대회(이 대회에 동만특위 서기인 위증민이 파견되었다)에서 식민지종속국의 광범한 반제통일전선이 제기되고 ‘반일투쟁을 위해서 통일국방정부 아래 항일연군을 결성할 것’을 호소하는 중국공산당의 8·1선언이 나오면서 소수민족 문제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위상 문제는 ‘구체화’를 향해 진일보하였다. 특히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협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8·1선언의 내용에 ‘전중국을 통일한 국방정부’의 수립을 호소하는 대상으로 “중국내에 있는 모든 억압된 민족의 형제들”을 돌고 있는 것이나 국방정부의 행정지침 제9항에 “중국 국내 각 민족의 일률평등정책을 실행하여 국내·국외의 교포 보호, 생명·재산·거주·영업의 자유를 보증한다”고 기재되어 있는 것은 중공당중앙위가 민족간 민족전선을 보다 적극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주목을 끈다. 소수민족에게 민족의 복권을 가져왔다고 평가되는 코민테른 7회 대회가 민생단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던 위증민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추측일 것이다. 특히 1935년 12월 1일자로 코민테른 기관지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게재된 중국인 양송(楊松)의 논문「만주에 있어서 반제통일전선에 관하여」는 그가 만주로 돌아올 때 하나의 지침이 되었을만큼 위증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만주성위 순시원과 길동특위 서기를 지낸 바 있는 양송이 위증민·왕명(王明) 등과 협의해서 결정된 사항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 글은 지금까지 코민테른이나 중공당중앙위가 내놓은 재만약소민족 방침보다도 훨씬 구체적이고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이 글의 내용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내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마치 복음서처럼 보일 만큼 조선 민족에 대한 획기적인 배려가 담겨 있다. 코민테른의 대만주방침을 담고 있다는 이 글에서 열세번째 항인 ‘항일단일인민전선과 재만약소민족’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원문대로 인용해보기로 한다.
˝일제는 약소민족을 사주하여 중국인 반대투쟁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간도에서아 같이 일본군은 파렴치하게도 그들이 바로 재만조선인의 보호자이며, 만주사변의 목적은 군벌 장학량의 탄압으로부터 조선인을 해방하는 데에 있었던 것처럼 선전하여 ‘간도에 조선민족 자치구 창설’ 등의 구호를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재만약소민족에 대한 우리의 정책은 어떠한가?
이미 2년 전 중공당 중앙위의 서신 속에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공동저항을 위한 재만 중·선·만·몽고 각 피억압민족의 단일전선 수립’이란 구호가 제기되어 있는데…….
이런 일반적인 구호에만 제약되어 있어서는 안 되며, 현재 우리의 정책이 더 한층 구체화될 것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의 재만당단체는 간도에 조선민족 자치구 창설을 위해 진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공산주의자는 ‘재만일본군의 지배 타도를 위해 중국·조선인의 단결 및 간도에 조선민족 자치구의 설립’이라는 구호를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구호에만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공산주의 단체는 중·선 국민의 단일전선 실현에 따라 현재의 인민혁명군 제2로군 및 기타의 반일유격대를 조선의 독립 획득을 임무로 하는 중선합동항일군으로 개조하려고 여러 정책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간도에서의 현재의 국면은 현행 중국공산당 조직을 확충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혁명적 중·선인 노동자·농민을 당내에 유입시켜서 조선항일혁명당을 수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새로운 당의 가장 중요한 임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에 반대, 조선의 민족적 독립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다. 이 새로운 당의 창립자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 한다. 이 당은 간도에서의 조선항일단일전선의 당이 될 것이다…….˝
사실 소제(小題)는 ‘항일단일인민전선과 제만약소민족’이었지만 지면은 완전히 조선민족 문제에 할애되어 있다. 이것은 반민생단투쟁 등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조선민족 문제가 당시 코민테른의 주요한 관심사였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코민테른의 동만에서의 조선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은 대황위회의와 요영구회의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이 문제를 제기할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내 조선인 지도자들의 노력과 위증민의 조선민족에 대한 우호적 입장, 그리고 코민테른의 정확한 상황판단 등이 결합되어 맺어진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코민테른의 방침이 오늘날 중국공산당사를 중심으로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기술하고 있는 중국 문헌들에서는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실로 중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논문에서 제시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의 조선독립을 위한 부대로의 전환’은 ‘조국광복회의 건설’로 약간 수정되어 구체화되었다. 항일혁명근거지 마련은 이미 기반을 잃어버려 장기적인 회복공작이 필요한 간도 대신 조선인 비율이 45.7퍼센트에 달하며 조선 국내로의 침투공작이 용이한 통화성 장백현에서 약간 다른 형태로 실천에 옮겨졌다. ‘간도에서의 조선민족 자치구 창설’ 역시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인 1952년 2월에 ‘연변 조선족 자치구’로 현실화되었다. 이렇듯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내의 조선인 전사들에게 환희와 새로운 임무를 제기한 방침을 가지고 위증민은 1936년 2월에 만주로 돌아왔다.
② 조국광복회의 창립과 장백근거지의 건설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떠났던 위증민은 앞에서 살펴본 바의 신방침을 가지고 1936년 2월 만주로 돌아와 영안현 남호두에서 주요지도동지연석회의를 열고 이 방침들을 전달하였다. 이 회의에서 위증민이 전달한 신방침은 양송의 논문에 게재된 방침들이었을 것이다. 임춘추의 회상기록에는 남호두회의의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춘추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코민테른의 반파쇼인민전선노선과 요영구회의에서 김일성이 제기한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는 코민테른의 지시 전달이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특별히 제기한 문제들이란 반민생단투쟁에 관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이 회의에서는 위증민으로부터 조선에서의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의 조직과 조선공산당 재건에 관한 코민테른의 지시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회의 직후인 1936년 3월, 안도현 미혼진에서는 남호두회의에서 전달된 코민테른과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의 방침에 따라 제2로군 병력의 재편성과 재배치를 논의하기 위해 위증민의 주재로 동만특위와 제2로군지도간부들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제2로군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단독 편성하여 중조국경일대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수시로 조선을 오가면서 해방투쟁에 임하도록 하라”는 코민테른의 방침이 구체적으로 토의되었다. 권위 있는 중국문헌인『현대동북사(現代東北史)』는 당시의 회의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36년 3월 위증민은 안도현에 이르러 중공동만특위 및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지도기관과 회합,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을 중·조반일연합군으로 개편하고 이 군(軍)에 있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단독편성하여 압록강·두만강 등지의 중·조국경지구로 나아가 근거지를 건립하고 수시로 조선을 오가면서 해방투쟁을 전개하라는 공산국제와 중공당 공산국제대표단의 동북항일연군 건립에 관한 지시와 건의사항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완전한 동의를 얻지 못하였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선혁명과 조국해방 그리고 투쟁은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이라고 하며 부대를 중조국경지대로 이동하라는 건의에는 찬동하였다. 그러나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을 조선인 부대와 중국인 부대로 나누어 편성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과거 중·조양국 공산주의자는 역량을 연합하여 공동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바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형세가 성숙되면 단독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조선을 오가면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목전의 투쟁환경과 그 조건이 구비되지 않은 채 병력 분성(分成)을 강행한다는 것은 바로 중·조인민의 항일무장역량과 항일무장투쟁을 약화시킬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당시 상황하에서 조선인 부대와 중국인 부대를 나누어 건제(建制)하여 각자 활동하도록 하지 않고 항일연군의 기치를 견제하면서 계속해서 항일무장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래야만 광대한 중·조인민의 지지와 성원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의 조선해방을 위한 군대로의 전환을 갈망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즉각적인 조선인부대의 단독편성을 반대한 것은 아마 코민테른과 코민테른주재 중공대표단의 방침으로 이미 2로군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제1의 투쟁목표가 ‘조선혁명과 조선해방’으로 공인된 상황에서 당시의 주객관적인 조건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인이 절대다수 거주하고 있는 동만을 떠나 조선인 비율이 10퍼센트도 안되는 남만에서 제2로군이 활동하게 된 것도 이러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입장표명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러한 조선인민혁명군 단독편성의 문제에 대하여 당시 김일성이 개진했던 견해를 임춘추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로 편성하여 조선혁명임무만 수행하고 중국혁명 임무수행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또 이와 반대로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로 편성하지 않는다 하여 중국혁명에 대하여서만 생각하고 조선혁명임무의 수행을 망각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생각하여서도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민들 앞에 가서는 항일연군이라고 하고 조선인민들 앞에 가서는(특히 조선내지에 가서는)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하는 것이 좋으며, 따라서 혁명군을 개편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이제와서 그리 느끼지 않게 된다.˝
결국 회의에서는 제2로군의 주요임무가 조선혁명을 위한 군대라는 것이 남호두회의에 이어 다시 한번 확인되엇으며 새로 편성될 제3사단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중·조국경지대인 장백현 일대로의 진출이 확정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단독편성은 현재의 조건에서는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미혼진 회의 결과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2로군(군장은 왕덕태, 정치위원은 위증민)으로 재편되면서 정식으로 휘하에 3개 사단을 편성하였다. 제1사단은 연길현의 제1여단과 일부 산림대를 흡수하여 제1·2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사단장에는 조선인 안봉학(후에 변절), 정치위원에는 중국인 주수동이 임명되었다. 제1여단장에는 최현이 임명되었다. 제2사단은 왕청현 제3여단, 훈춘현 제4여단 및 구국군의 사충항 부대를 흡수하여 4·5·6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사단장에는 중국인 사충항(부임 못함), 대리사단장 겸 참모장에는 중국인 진한장, 정치위원에는 중국인 왕윤성이 임명되었다. 제3사단은 화룡현 제2여단과 항일의용군 6개 중대 병력을 흡수하여 7·8·9·10여단으로 편성되엇으며 사단장에는 김일성, 정치위원에는 중국인 조아범이 임명되었다. 이 3사단에는 오증흡·박덕산(예명은 김일)·오백룡 등 많은 조선인 유격대 지도자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김일성이 사단장인 제3사단에는 조선으로의 국내진공과 공작이 용이한 백두산 일대에 근거지를 건설하는 임무와 함께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 건설의 임무도 맡겨졌다.
부대를 재정돈한 제2로군 중 1·3사단은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곧장 장백지구로 출발하였다. 장백지구로의 진군 도중인 1936년 5월 무송현(撫松縣) 동강에서 남호두회의의 결정사항을 실행하기 위한 동강회의가 개최되어 회의 도중인 5월 5일 조국광복회가 설립되었다. 발기인으로 오성륜(吳成崙)·이상준(李相俊)·엄수명(嚴洙明) 등이 참가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10대 강령이 함께 발표되었다. 조국광복회의 정식 명칭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이며, 10대 강령 제2조가 ‘……중국 영토내에 거주하는 한인(韓人)의 진정한 자치를 실현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 출발은 재만조선인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조국광복회의 발기인과 10대 강령 작성자, 회장 등을 두고 북한의 문헌들과 김일성 비판론자들 사이에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북한 사회과학원의 주장은 김일성이 조국광복회장이었으며 10대 강령을 직접 작성했다는 것이다. 발기인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애매모호하게 처리되고 있다. 발기인 문제를 언급한 백봉의 경우는 “김일성의 발기에 의해 조국광복회가 창건되었다”고 쓰고 있어 이 글만으로는 김일성이 발기인이었는지 알기 어렵게 되어 있다. 임춘추에 따르면 “많은 동지들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발기 선언을 하라고 하였으나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는 전체 조선 인민의 반일역량을 총집결하여야 할 위엄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과거부터 오늘의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명성 높고 연령도 높은 많은 동지들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회의 참가자들의 완강한 제의에 의해서 김일성이 김동명이라는 가명으로 조국광복회 창립선언을 했다고 한다. 사실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데 발기인이란 실력보다는 오랜 항일투쟁의 경험을 가진 원로가 더 어울렸을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발기인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국광복회장(회장이 반드시 발기인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과 10대 강령 작성자는 김일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회장의 경우 만주전역의 조선인 대표들이 회의에 참가 못한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회장은 뽑지 않고 김일성을 조직 책임자 겸 임시대표로 선임했다가 이것이 그대로 굳어졌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 측이 제시하는 자료 이외에 이를 증빙할 만한 뚜렷한 자료가 없고, 역으로 김일성 이외의 인물이 조국광복회장과 10대 강령 작성자였다는 증거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상황판단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이 문제의 사실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먼저,『사상휘보(思想彙報)』14호의 조국광복회선언문(초안), 규약(초안), 10대 강령(초안) 등을 작성한 주체가 ‘동만성 주비회’로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민테른 중공대표단의 지시로 남호두회의에서는 만주성위원회를 해소하고 남만·동만·길동·북방의 4개 성위를 구성한 바 있다. 조국광복회 발기인으로 되어 있는 전광(全光)·이동광(李東光) 등은 당시 제1로군(즉 남만성위) 소속이었다. 남만성과 동만성이 합쳐져서 동남만성위를 이룬 것이 1936년 7월 금천현(金川縣) 하리회의에서였음을 고려한다면 조국광복회에 관련된 제반 문건의 작성 주체가 ‘동만성 주비회’로 되어 있었다는 것은 동만을 근거지로 한 제2로군내 조선인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조국광복회를 주도한 인물은 간도지방에서 활동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지도자 중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는 필자가 앞에서 조국광복회가 결성되기까지의 배경으로 간도지방의 특수성부터 시작해서 간도지방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고뇌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설명햇으므로 더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김일성과 함께 조국광복회의 최고책임자로 상정될 수 있는 오성륜·최용건(崔庸健)·김책(金策) 등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들이 인민혁명군 제2로군 밖에 있던 조선인 지도자들로서 간도에서의 조선인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당사자가 될 수 없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일부 학자들이 전광(오성륜의 가명)이 김일성의 상관으로 조국광복회에 관련했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지금까지 전광과 김일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많은 오해가 있어왔다. 따라서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일제 관헌자료에서는 전광이 2로군 정치주임으로 조국광복회에 관련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2로군 정치주임이었던 이학충(李學充)이 1936년 8월 무송현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아 전광이 2로군 정치주임이 된 것은 1936년 8월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혜산사건 검거자들을 취조해서 얻은 정보를 싣고 있는 이 일제 관헌자료들은 당시 2로군내의 조직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자료들은 ‘제6사단 정치위원 위민생(위증민의 가명)이 제2로군 정치주임 전광의 지도 아래 제6사단의 정치지도를 행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6년 6월 항일연군 제1로군이 성립됐을 당시 위증민은 1로군을 지도하는 중국공산당 남만성위 서기 겸 제2로군 정치위원으로 선임됐었다. 즉 위증민이 오히려 전광을 지도할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조직상황을 필자 나름대로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코민테른과 코민테른 주재 중공당 대표단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조선독립을 위한 부대로서 그 성격을 갖추게 된 제3사단(후에 제6사단)은 당연히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도를 받는 남만성위 서기인 위증민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과 위증민의 관계가 위증민을 6사단 정치위원으로 보이게 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전광이 2로군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해왔을 때 조국광복회 업무에 어느 정도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광이 김일성의 조선인 직속상관이었다는 식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전임 정치부 주임 이학충의 예를 보건대 전광의 임무는 정치위원 위증민의 지도 아래 2로군의 군정학습을 꾸려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전적으로 위증민과 상의해서 6사단의 활동문제를 결정했을 것이다. 전광이 위증민의 지휘 아래 제1로군 참모부서의 요직을 맡아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김일성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군정이나 군정치위원)에 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김일성은 제1로군의 주요 지휘관(조선인 중 최고위직)이었으며 전광도 제1로군 참모부의 주요 참모였다. 일부 일제 관헌자료가 전광을 김일성의 상관인 양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1940년 4월에 일본 사법성 형사국에서 나온 한 자료는 제1로군 2방면군의 편성을 설명하면서 총지휘관에 김일성, 정치주임 전광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다. 아마 김일성·전광·위증민의 관계에 대한 일본 자료의 착각은 피검자가 조직상황을 허위 자백한 것이거나 아니면 나이 많은 오성륜(당시 36세)에 대한 김일성(당시 24세)과 위증민(당시 27세)의 예우를 상하관계로 착각했을 것으로 본다.
전광이 당시 1로군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중에 제일 높은 직위에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또 다른 반박의 증거로는 위증민이 1940년 4월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현재 살아남아 있는 주요 간부 18명의 이름을 대면서(이 중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인은 8명)당시 생존해 있던 전광의 이름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전광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중 원로인 것이 분명하나 그의 실제 위치는 김일성과 비교될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조국광복회는 결성 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사단장에 김일성)에 의해서 전적으로 운영되었다. 조국광복회 관계 자료를 싣고 있는 일제 관헌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예외 없이 김일성의 제6사단이 조국광복회 조직운영의 추진기관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일성은 그에 대한 개인숭배작업이 본격화되기 전인 1947년졍에 이미 자신이 조국광복회의 회장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를 동료이자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던 수많은 항일무장투쟁 시절의 동료들이 고난의 투쟁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그 당시 상황에서 김일성이 그의 전우들이 뻔히 다 아는 사실을 거짓말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무송현 동강에서 조국광복회 결성을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3사단은 1936년 7월 금천현 하리회의에서 보다 효과적인 항일유격전의 전개를 위해 항일연군 1·2로군이 통합함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으로 명칭을 바꾸고 그 해 8월 무송현성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무송현내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무송현의 장백산록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자 6사단의 주력부대는 1936년 가을 다시 사단장 김일성의 지휘 아래 장백현 방면으로 진출하여 백두산 주변의 삼림지역에 수많은 밀영들을 건설하였다. 여기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장백근거지가 갖고 있는 투쟁상 유리한 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장백·무송·임강·안도 일대는 울창한 밀림과 산악지대로서 이 지역 적군의 통치 중심을 포위하고 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지방은 밀림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항일연군의 병영과 후방기관을 방위병력 없이도 설치할 수 있으며 각종의 유격전술을 적용할 수 잇는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이 곳은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서 대다수 주민은 삼림노동자였다. 그들은 일제의 탄압과 지주의 잔혹한 착취 밑에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항일투쟁에 쉽게 참가할 수 있었다.
셋째, 이 지방은 동북에 있어서 일제 식민통치가 가장 약한 고리였는 바 백두산 일대는 아직 집단부락이 공고히 설립되지 못하였다. 주민의 대부분은 산곡·하천지대에 거주하였으며 교통과 통신망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이상의 조건을 갖춘 장백근거지를 건설하면서 제6사단은 장백현과 조선 국내에 대한 조국광복회 조직 확대 작업에 나섰다.
1936년 12월에 김일성은 권영벽·이재순·장중렬 등을 통해 장백현내 조국광복회 조직을 건설하는 한편 박달·박금철(함경남도 갑산군 거주) 등을 만나 국내에서의 조국광복회 건설사업을 지시하였다. 조국광복회의 조직 확대 작업은 짧은 시간내에 급속하게 이루어져 1937년 10월 조국광복회 조직에 대한 1차 검거가 있기 전에 이미 장백현은 물론이고 국내에 갑산군을 포함한 함경남북도 북부 일원과 평안북도 북부, 그리고 흥남·함흥·원산·신의주까지 이르는 광범한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비록 전국적 범위로까지 확장되지는 못햇으나 장백근거지에서의 조국광복회 확대작업은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장백현내의 조선 민족에 대한 공작은 간도에서의 광범한 통일전선체의 형성을 소규모로나마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조선 국내에 대한 공작은 지금까지 암흑기로 평가되던 1930년대 후반에 수백명의 무력을 담보한 조선인들의 반일통일전선체가 활발히 움직였음으로 해서 역사의 일부가 보다 긍정적으로 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③ 국내진공작전의 감행과 만주 상황의 악화
1936년 말부터 1937년 초까지 백두산 일대의 장백현근거지를 중심으로 국내외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확장시키는 데 성공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은 1937년 6월 조국광복회 국내 조직과 연계하여 조·중 국경선을 넘어 보천보를 습격함으로써 최초의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였다. “약탈·납치·방화에 불과한 맹동적 모험주의”, “조선 인민에게 조국해방의 서광을 비추어준 쾌거” 등 보는 시각에 따라 천차만별의 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는 김일성이 통솔하는 제6사단의 전투병력 80여명과 박달·이송운·김왈룡 등이 거느린 갑산군내 조국광복회 소속 결사대원 73명이 호응하여 이른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유격전술에 의해 최현·김일 등이 이끄는 제4사단이 5월 말에 무산 방면으로 진출하여 적군의 신경을 자극시키고 있는 가운데 수행된 작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김일성 부대는 보천면 소재지의 일제 통치기관들을 모두 파괴하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김일성 명의의 포고문을 뿌리고 1개 소대 규모의 일제 군경을 격퇴하였다. 북한의 문헌들에 따르면 김일성은 “환호하는 인민들 앞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모든 인민이 반일전선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 전투는 국내의 각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되어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보천면의 면소재지였던 보전은 조선인 284호, 일본인 26호, 중국인 2호가 살고 있었다. 비록 전투규모는 지금까지 6사단이 치러온 전투들에 비해서 크지 않았지만 그것이 조국광복회 결성 후 최초의 국내진공작전이었으며, 조국광복회의 국내 지하조직이 동원되었다는 데서 그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본다.
보천보전투에서 일격을 당한 일제는 이를 보복하기 위해서 조선주둔군 제19사단 함흥 제74연대 병력과 위만군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동원하여 추격해왔다. 이에 동북항일연군은 1937년 6월 30일에 제6사단 병력 350명과 제4사단 병력 2백여명과 제2사단 병력 60여명이 연합작전을 펼쳐 간삼봉전투(間三峰戰鬪)에서 일본군 1백여명을 살상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간삼봉전투에서 패주한 일본군 제74연대의 지휘관은 김석원(金錫源)으로 알려져왔으나 김석원은 그때 서울의 제78연대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함흥의 74연대에는 김석원과 일본육군사관학교 제27기 동기생인 김인욱(金仁旭)이 근무하고 있었다. 아마 중일전쟁 직후 김석원이 중국전선으로 전근되어 제40여단 첨병대장으로 군공(軍功)을 세운 것이 국내에 알려져 그가 유명해졌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북한 문헌에서는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있어서 최대의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제6사단이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 개가를 올린 직후인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을 계기로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했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중국 관내에서도 전국적인 대일항전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이제 만주 각지에서의 국부적인 항일유격전이라는 단독작전에서 전국적인 대일항전의 일환으로 작전의 성격을 바꾸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1로군은 일본군의 관내진입을 견제하고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서 보다 광활한 동남만지역에서의 활동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6사단의 경우 기존의 장백·무송현을 중심으로 한 유격전활동의 범위를 몽강·휘남현성으로 넓히게 되었다.
따라서 김일성은 1937년 가을 소수의 병력을 남겨둔 채 주력부대를 이끌고 장백현을 떠나 임강·몽강·휘남현 등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을 맞아 일제의 병력이 증강되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추진된 이 변화된 작전은 1937년 겨울부터 1938년 봄 사이에 유례 없는 강도로 실시되었던 일본군의 대토벌에 부딪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수많은 부대들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적군의 발악적인 대토벌을 피해 김일성이 이끄는 제6사단은 1937년 겨울 몽강현 마당거우에서 깊은 산속의 밀영으로 자취를 감추고 그곳에서 이듬해 봄까지 군정학습을 실시하였다.
적군의 대토벌 속에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주요 지도자들은 1938년 5월 11일에서 6월 1일까지 집안현 노령에서 제1로군 군정간부회의를 개최하였다.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를 비롯하여 위증민·한인화·서철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일제에 대한 유격전쟁을 견지하고 실력을 보존하여 적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분쇄한다”는 방침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관내의 중국국민혁명군(中國國民革命軍) 제8로군과 연계를 맺고 동시에 동북의 각 항일의용군과 결합하여 협동작전을 전개한다는 양정우의 서정(西征)계획이 제출되었다. 이에 따라 제1로군의 1·2사단에서 일부 병력을 뽑아 3사단을 보충하여 서정부대를 편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제1로군의 서정계획이 확정된 제1차 노령회의가 있은 지 불과 한 달만인 1938년 6월 29일 제1군단 제1사단장 정빈(程斌)이 일제에 투항하는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하였다. 정빈의 투항은 제1로군 전체에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 제1사단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빈이 알고 있던 1로군 지도부의 행적과 각 소속부대의 전략·전술, 중요 군사기밀 등이 적군에게 폭로되어 제1로군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돌발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1938년 7월 제1로군 주요 지도자들은 집안현 노령에서 재차 회의를 소집하였다. 제2차 노령회의에서는 서정계획이 취소되고 제1로군의 개편이 단행되었는데, 제1군단과 제2군단을 해체하고 대신 세 개의 방면군과 한 개의 경위여단으로 제1로군을 재편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제1방면군은 제1군단 제2사단과 제3사단의 잔여부대를 합쳐 조아범을 제1방면군 사령관으로 삼아 편성하고,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제2군단 6사단으로 편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제3방면군은 제2군단 4사단과 5사단을 합쳐서 진한장을 제2방면군 사령관으로 삼아 편성하기로 결정되었다. 당시 각 부대들이 분산되어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개편 결정이 당장 실행될 수는 없었다. 각 부대가 정식으로 개편되는 시기를 보면 경위여단이 1938년 7월에, 제1방면군이 흑할지구에서 1938년 8월에, 제2방면군이 남패자에서 1938년 12월에 각각 편성되었으며 제3방면군은 1939년 8월 안도현 양강 한양구에서 편성되었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1938년 11월 몽강현 남패자에서 열린 군정간부회의에서 제1·2군단의 조직개편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왜곡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2방면군이 정식으로 성립되는 것은 1938년 12월이며, 이때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가 남패자에 와서 제2방면군 정식 개편을 위한 간부회의를 소집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당시 제1로군은 휘하에 6개의 사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6사단이 그대로 제2방면군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본군의 대토벌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개된 유격전에서 제6사단이 전투역량을 가장 잘 보전하였으며 제1로군내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이 군사지도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사실 제2군단에서는 군단장 왕덕태가 1936년 11월 무송현 소탕하에서 전사하자 정치위원 위증민과 함께 제6사단장 김일성이 제2군단을 이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의 문헌들에 의하면 제1로군 개편시 제6사단(북한 사회과학원의 표현으로는 조선인민혁명군)은 제2방면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전투력이 취약한 다른 부대에 자기 병력을 보충·강화시켜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참고로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다수였던 제2방면군의 부대편제를 살펴보면 사령관은 김일성, 정치부주임은 여백기, 참모장은 임수산, 부관장은 필서문, 제7사단장은 오증흡, 제7사단 정치위원은 주재일, 제8사단장은 손장상, 제8사단 정치위원은 김일, 제9사단장은 마덕전, 제10사단장과 제10사단의 정치위원은 불명이며, 경위연대장은 오백룡 등이었다. 제3방면군의 부대편제를 살펴보면 사령관은 진한장, 참모장은 박득범, 제13사단장은 최현, 제13사단 정치위원은 조정철, 제14사단장은 전동규, 제14사단 정치위원은 안길, 제15사단장 겸 정치위원은 이용운 등이었다.
남패자회의가 끝난 뒤인 1938년 12월 제2방면군 사령관 김일성은 그의 부대를 이끌고 다시 압록강 연안 국경지대(장백지구)를 향해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알려진 100여일간의 행군길에 올랐다.
실로 장백지구를 떠난 지 1년여만의 귀로였으나 제2방면군이 험로를 해치고 장백지구에 도착한 1939년 봄의 장백근거지는 이미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1937년 8월부터 장백현 일대에는 일제의 치안공작의 일환으로 집단부락이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조국광복회의 압록강 연안의 중심 조직들은 1937년 10월부터 이듬해의 두 차례에 걸쳐 739명이 검거된 이른바 ‘혜산소탕사건’으로 인해 붕괴상태에 있었다. 이제 항일유격대의 엄혹한 시련기가 닥친 것이다. 일제가 백두산 서남부인 장백현 일대에 대병력을 집중시켜 토벌을 감행하고 있는 시점에서 장백근거지에서의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 부딪친 제2방면군은 1939년 4월 그간 소부대 편성으로 고난의 행군을 마친 간부들을 장백현 북대정자에 모아놓고 김일성의 주재 아래 앞으로의 진로를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무산전투계획과 백두산 동북지대로의 진출이 결정되었다. 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에 의하면 김일성이 이 회의에서 “적극적인 반격전으로 일제의 침략자들을 연속 타격하고 조국으로 진격하자”는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무산지구 전투에 대한 세부계획이 세워지자 제2방면군의 주력부대는 1939년 5월 16일 장백근거지를 떠나 무산지구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청봉·베게봉 등에서 숙영하고, 삼지연·무포를 거쳐서 5월 22일 대홍단 일대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항일유격대는 일제가 제2방면군의 대홍단 일대로의 진출을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 국내 민중을 상대로 정치군사활동을 벌이고 이튿날인 5월 23일 대홍단 벌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에 승리하고 두만강을 건너 장사령으로 철수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의 주력은 1935년 여름(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시절) 그들의 근거지였던 동만을 떠난 지 4년만에 다시 동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만주의 모든 지역이 그러했듯이 동만의 상황도 그들이 부득이 유격전근거지를 떠났던 1935년보다 더 악화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일·소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관동군은 끊임없이 증강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위기는 일제의 대토벌계획이 다시 수립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제 항일유격대가 다시 간도로 돌아왔으니 일제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토벌작전을 감행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 것이다.
북한 지도층과 1930·40년대 초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항일무장투쟁 ④
⑵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과 장백근거지의 건설
①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임무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 해체된 조선공산당에 대신하여 중국공산당원의 이름으로 동만에서 일제와 싸우고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선해방이라는 그들의 절박한 목표가 항상 중국혁명에 종속된 채 유실되어가고 있음을 느껴야 했다. 특히 1933년부터 1935년에 이르는 반민생단투쟁 기간 동안에 자신도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수백 명의 무고한 조선인 전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들은 특히 동만에서 조선인들의 위상을 놓고 중국공산당원들과 심각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조선해방을 위한 구체적인 임무를 중국공산당에 요구했을 것이다. 또한 일제가 ‘간도에서의 조선인 자치’라는 미사여구로 조선인들을 동요시키고 있었던 만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의 동만에서의 대조선민족정책의 변화를 당연히 요구했을 것이다. ‘해방된 만주에서의 조선인의 자치실현’, 그것은 단순히 재만조선인의 이해만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해방된 조선족자치구’를 건설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광범한 통일전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며, 그 힘은 곧 조선해방을 위한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선인의 조선민족을 위한 항일투쟁’이 공식적으로 모호하게나마 인정되는 것은 대황위회의와 비슷한 시기에 나와 1935년 3월 중공당중앙위에서 통과된「동북임시인민혁명정부강령」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모두 13항으로 구성된 이 강령의 제11항은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민혁명정부는 동북경내의 소수민족(몽고인·조선인·타타르인)에 호소하여 일제 및 만주국에 대한 공동작전을 진행하고, 일제 축출 후에 있어서 각개 민족의 자유권을 인정함. 단 인민혁명정부는 일제 및 그 주구의 민족자주를 구실로 하는 제국주의 병탄에는 반대한다.”
이 문건에서 중공당이 만주에서 처음으로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 활동가들을 광범하게 통일전선에 결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강령 조항은 사실상 구체적인 민족자결권의 내용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구체적인 실천의지가 담겨 있기보다는 추상적인 선언적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럴 즈음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회 대회(이 대회에 동만특위 서기인 위증민이 파견되었다)에서 식민지종속국의 광범한 반제통일전선이 제기되고 ‘반일투쟁을 위해서 통일국방정부 아래 항일연군을 결성할 것’을 호소하는 중국공산당의 8·1선언이 나오면서 소수민족 문제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위상 문제는 ‘구체화’를 향해 진일보하였다. 특히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협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8·1선언의 내용에 ‘전중국을 통일한 국방정부’의 수립을 호소하는 대상으로 “중국내에 있는 모든 억압된 민족의 형제들”을 돌고 있는 것이나 국방정부의 행정지침 제9항에 “중국 국내 각 민족의 일률평등정책을 실행하여 국내·국외의 교포 보호, 생명·재산·거주·영업의 자유를 보증한다”고 기재되어 있는 것은 중공당중앙위가 민족간 민족전선을 보다 적극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주목을 끈다. 소수민족에게 민족의 복권을 가져왔다고 평가되는 코민테른 7회 대회가 민생단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던 위증민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추측일 것이다. 특히 1935년 12월 1일자로 코민테른 기관지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게재된 중국인 양송(楊松)의 논문「만주에 있어서 반제통일전선에 관하여」는 그가 만주로 돌아올 때 하나의 지침이 되었을만큼 위증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만주성위 순시원과 길동특위 서기를 지낸 바 있는 양송이 위증민·왕명(王明) 등과 협의해서 결정된 사항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 글은 지금까지 코민테른이나 중공당중앙위가 내놓은 재만약소민족 방침보다도 훨씬 구체적이고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이 글의 내용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내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마치 복음서처럼 보일 만큼 조선 민족에 대한 획기적인 배려가 담겨 있다. 코민테른의 대만주방침을 담고 있다는 이 글에서 열세번째 항인 ‘항일단일인민전선과 재만약소민족’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원문대로 인용해보기로 한다.
˝일제는 약소민족을 사주하여 중국인 반대투쟁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간도에서아 같이 일본군은 파렴치하게도 그들이 바로 재만조선인의 보호자이며, 만주사변의 목적은 군벌 장학량의 탄압으로부터 조선인을 해방하는 데에 있었던 것처럼 선전하여 ‘간도에 조선민족 자치구 창설’ 등의 구호를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재만약소민족에 대한 우리의 정책은 어떠한가?
이미 2년 전 중공당 중앙위의 서신 속에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공동저항을 위한 재만 중·선·만·몽고 각 피억압민족의 단일전선 수립’이란 구호가 제기되어 있는데…….
이런 일반적인 구호에만 제약되어 있어서는 안 되며, 현재 우리의 정책이 더 한층 구체화될 것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의 재만당단체는 간도에 조선민족 자치구 창설을 위해 진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공산주의자는 ‘재만일본군의 지배 타도를 위해 중국·조선인의 단결 및 간도에 조선민족 자치구의 설립’이라는 구호를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구호에만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공산주의 단체는 중·선 국민의 단일전선 실현에 따라 현재의 인민혁명군 제2로군 및 기타의 반일유격대를 조선의 독립 획득을 임무로 하는 중선합동항일군으로 개조하려고 여러 정책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간도에서의 현재의 국면은 현행 중국공산당 조직을 확충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혁명적 중·선인 노동자·농민을 당내에 유입시켜서 조선항일혁명당을 수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새로운 당의 가장 중요한 임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에 반대, 조선의 민족적 독립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다. 이 새로운 당의 창립자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 한다. 이 당은 간도에서의 조선항일단일전선의 당이 될 것이다…….˝
사실 소제(小題)는 ‘항일단일인민전선과 제만약소민족’이었지만 지면은 완전히 조선민족 문제에 할애되어 있다. 이것은 반민생단투쟁 등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조선민족 문제가 당시 코민테른의 주요한 관심사였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코민테른의 동만에서의 조선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은 대황위회의와 요영구회의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이 문제를 제기할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내 조선인 지도자들의 노력과 위증민의 조선민족에 대한 우호적 입장, 그리고 코민테른의 정확한 상황판단 등이 결합되어 맺어진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코민테른의 방침이 오늘날 중국공산당사를 중심으로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기술하고 있는 중국 문헌들에서는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실로 중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논문에서 제시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의 조선독립을 위한 부대로의 전환’은 ‘조국광복회의 건설’로 약간 수정되어 구체화되었다. 항일혁명근거지 마련은 이미 기반을 잃어버려 장기적인 회복공작이 필요한 간도 대신 조선인 비율이 45.7퍼센트에 달하며 조선 국내로의 침투공작이 용이한 통화성 장백현에서 약간 다른 형태로 실천에 옮겨졌다. ‘간도에서의 조선민족 자치구 창설’ 역시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인 1952년 2월에 ‘연변 조선족 자치구’로 현실화되었다. 이렇듯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내의 조선인 전사들에게 환희와 새로운 임무를 제기한 방침을 가지고 위증민은 1936년 2월에 만주로 돌아왔다.
② 조국광복회의 창립과 장백근거지의 건설
코민테른 제7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떠났던 위증민은 앞에서 살펴본 바의 신방침을 가지고 1936년 2월 만주로 돌아와 영안현 남호두에서 주요지도동지연석회의를 열고 이 방침들을 전달하였다. 이 회의에서 위증민이 전달한 신방침은 양송의 논문에 게재된 방침들이었을 것이다. 임춘추의 회상기록에는 남호두회의의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춘추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코민테른의 반파쇼인민전선노선과 요영구회의에서 김일성이 제기한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는 코민테른의 지시 전달이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특별히 제기한 문제들이란 반민생단투쟁에 관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이 회의에서는 위증민으로부터 조선에서의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의 조직과 조선공산당 재건에 관한 코민테른의 지시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회의 직후인 1936년 3월, 안도현 미혼진에서는 남호두회의에서 전달된 코민테른과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의 방침에 따라 제2로군 병력의 재편성과 재배치를 논의하기 위해 위증민의 주재로 동만특위와 제2로군지도간부들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제2로군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단독 편성하여 중조국경일대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수시로 조선을 오가면서 해방투쟁에 임하도록 하라”는 코민테른의 방침이 구체적으로 토의되었다. 권위 있는 중국문헌인『현대동북사(現代東北史)』는 당시의 회의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36년 3월 위증민은 안도현에 이르러 중공동만특위 및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지도기관과 회합,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을 중·조반일연합군으로 개편하고 이 군(軍)에 있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단독편성하여 압록강·두만강 등지의 중·조국경지구로 나아가 근거지를 건립하고 수시로 조선을 오가면서 해방투쟁을 전개하라는 공산국제와 중공당 공산국제대표단의 동북항일연군 건립에 관한 지시와 건의사항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완전한 동의를 얻지 못하였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선혁명과 조국해방 그리고 투쟁은 조선인 공산주의자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이라고 하며 부대를 중조국경지대로 이동하라는 건의에는 찬동하였다. 그러나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을 조선인 부대와 중국인 부대로 나누어 편성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과거 중·조양국 공산주의자는 역량을 연합하여 공동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바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형세가 성숙되면 단독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조선을 오가면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목전의 투쟁환경과 그 조건이 구비되지 않은 채 병력 분성(分成)을 강행한다는 것은 바로 중·조인민의 항일무장역량과 항일무장투쟁을 약화시킬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당시 상황하에서 조선인 부대와 중국인 부대를 나누어 건제(建制)하여 각자 활동하도록 하지 않고 항일연군의 기치를 견제하면서 계속해서 항일무장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래야만 광대한 중·조인민의 지지와 성원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의 조선해방을 위한 군대로의 전환을 갈망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즉각적인 조선인부대의 단독편성을 반대한 것은 아마 코민테른과 코민테른주재 중공대표단의 방침으로 이미 2로군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제1의 투쟁목표가 ‘조선혁명과 조선해방’으로 공인된 상황에서 당시의 주객관적인 조건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인이 절대다수 거주하고 있는 동만을 떠나 조선인 비율이 10퍼센트도 안되는 남만에서 제2로군이 활동하게 된 것도 이러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입장표명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러한 조선인민혁명군 단독편성의 문제에 대하여 당시 김일성이 개진했던 견해를 임춘추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로 편성하여 조선혁명임무만 수행하고 중국혁명 임무수행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또 이와 반대로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로 편성하지 않는다 하여 중국혁명에 대하여서만 생각하고 조선혁명임무의 수행을 망각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생각하여서도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민들 앞에 가서는 항일연군이라고 하고 조선인민들 앞에 가서는(특히 조선내지에 가서는)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하는 것이 좋으며, 따라서 혁명군을 개편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이제와서 그리 느끼지 않게 된다.˝
결국 회의에서는 제2로군의 주요임무가 조선혁명을 위한 군대라는 것이 남호두회의에 이어 다시 한번 확인되엇으며 새로 편성될 제3사단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중·조국경지대인 장백현 일대로의 진출이 확정되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단독편성은 현재의 조건에서는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미혼진 회의 결과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2로군(군장은 왕덕태, 정치위원은 위증민)으로 재편되면서 정식으로 휘하에 3개 사단을 편성하였다. 제1사단은 연길현의 제1여단과 일부 산림대를 흡수하여 제1·2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사단장에는 조선인 안봉학(후에 변절), 정치위원에는 중국인 주수동이 임명되었다. 제1여단장에는 최현이 임명되었다. 제2사단은 왕청현 제3여단, 훈춘현 제4여단 및 구국군의 사충항 부대를 흡수하여 4·5·6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사단장에는 중국인 사충항(부임 못함), 대리사단장 겸 참모장에는 중국인 진한장, 정치위원에는 중국인 왕윤성이 임명되었다. 제3사단은 화룡현 제2여단과 항일의용군 6개 중대 병력을 흡수하여 7·8·9·10여단으로 편성되엇으며 사단장에는 김일성, 정치위원에는 중국인 조아범이 임명되었다. 이 3사단에는 오증흡·박덕산(예명은 김일)·오백룡 등 많은 조선인 유격대 지도자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김일성이 사단장인 제3사단에는 조선으로의 국내진공과 공작이 용이한 백두산 일대에 근거지를 건설하는 임무와 함께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 건설의 임무도 맡겨졌다.
부대를 재정돈한 제2로군 중 1·3사단은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곧장 장백지구로 출발하였다. 장백지구로의 진군 도중인 1936년 5월 무송현(撫松縣) 동강에서 남호두회의의 결정사항을 실행하기 위한 동강회의가 개최되어 회의 도중인 5월 5일 조국광복회가 설립되었다. 발기인으로 오성륜(吳成崙)·이상준(李相俊)·엄수명(嚴洙明) 등이 참가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10대 강령이 함께 발표되었다. 조국광복회의 정식 명칭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이며, 10대 강령 제2조가 ‘……중국 영토내에 거주하는 한인(韓人)의 진정한 자치를 실현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 출발은 재만조선인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조국광복회의 발기인과 10대 강령 작성자, 회장 등을 두고 북한의 문헌들과 김일성 비판론자들 사이에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북한 사회과학원의 주장은 김일성이 조국광복회장이었으며 10대 강령을 직접 작성했다는 것이다. 발기인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애매모호하게 처리되고 있다. 발기인 문제를 언급한 백봉의 경우는 “김일성의 발기에 의해 조국광복회가 창건되었다”고 쓰고 있어 이 글만으로는 김일성이 발기인이었는지 알기 어렵게 되어 있다. 임춘추에 따르면 “많은 동지들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발기 선언을 하라고 하였으나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는 전체 조선 인민의 반일역량을 총집결하여야 할 위엄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과거부터 오늘의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명성 높고 연령도 높은 많은 동지들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회의 참가자들의 완강한 제의에 의해서 김일성이 김동명이라는 가명으로 조국광복회 창립선언을 했다고 한다. 사실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는 데 발기인이란 실력보다는 오랜 항일투쟁의 경험을 가진 원로가 더 어울렸을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발기인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국광복회장(회장이 반드시 발기인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과 10대 강령 작성자는 김일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회장의 경우 만주전역의 조선인 대표들이 회의에 참가 못한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회장은 뽑지 않고 김일성을 조직 책임자 겸 임시대표로 선임했다가 이것이 그대로 굳어졌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 측이 제시하는 자료 이외에 이를 증빙할 만한 뚜렷한 자료가 없고, 역으로 김일성 이외의 인물이 조국광복회장과 10대 강령 작성자였다는 증거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상황판단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이 문제의 사실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먼저,『사상휘보(思想彙報)』14호의 조국광복회선언문(초안), 규약(초안), 10대 강령(초안) 등을 작성한 주체가 ‘동만성 주비회’로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민테른 중공대표단의 지시로 남호두회의에서는 만주성위원회를 해소하고 남만·동만·길동·북방의 4개 성위를 구성한 바 있다. 조국광복회 발기인으로 되어 있는 전광(全光)·이동광(李東光) 등은 당시 제1로군(즉 남만성위) 소속이었다. 남만성과 동만성이 합쳐져서 동남만성위를 이룬 것이 1936년 7월 금천현(金川縣) 하리회의에서였음을 고려한다면 조국광복회에 관련된 제반 문건의 작성 주체가 ‘동만성 주비회’로 되어 있었다는 것은 동만을 근거지로 한 제2로군내 조선인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조국광복회를 주도한 인물은 간도지방에서 활동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지도자 중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는 필자가 앞에서 조국광복회가 결성되기까지의 배경으로 간도지방의 특수성부터 시작해서 간도지방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고뇌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설명햇으므로 더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김일성과 함께 조국광복회의 최고책임자로 상정될 수 있는 오성륜·최용건(崔庸健)·김책(金策) 등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들이 인민혁명군 제2로군 밖에 있던 조선인 지도자들로서 간도에서의 조선인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당사자가 될 수 없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일부 학자들이 전광(오성륜의 가명)이 김일성의 상관으로 조국광복회에 관련했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지금까지 전광과 김일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많은 오해가 있어왔다. 따라서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일제 관헌자료에서는 전광이 2로군 정치주임으로 조국광복회에 관련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2로군 정치주임이었던 이학충(李學充)이 1936년 8월 무송현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아 전광이 2로군 정치주임이 된 것은 1936년 8월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혜산사건 검거자들을 취조해서 얻은 정보를 싣고 있는 이 일제 관헌자료들은 당시 2로군내의 조직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자료들은 ‘제6사단 정치위원 위민생(위증민의 가명)이 제2로군 정치주임 전광의 지도 아래 제6사단의 정치지도를 행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6년 6월 항일연군 제1로군이 성립됐을 당시 위증민은 1로군을 지도하는 중국공산당 남만성위 서기 겸 제2로군 정치위원으로 선임됐었다. 즉 위증민이 오히려 전광을 지도할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조직상황을 필자 나름대로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코민테른과 코민테른 주재 중공당 대표단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조선독립을 위한 부대로서 그 성격을 갖추게 된 제3사단(후에 제6사단)은 당연히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도를 받는 남만성위 서기인 위증민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과 위증민의 관계가 위증민을 6사단 정치위원으로 보이게 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전광이 2로군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해왔을 때 조국광복회 업무에 어느 정도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광이 김일성의 조선인 직속상관이었다는 식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전임 정치부 주임 이학충의 예를 보건대 전광의 임무는 정치위원 위증민의 지도 아래 2로군의 군정학습을 꾸려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전적으로 위증민과 상의해서 6사단의 활동문제를 결정했을 것이다. 전광이 위증민의 지휘 아래 제1로군 참모부서의 요직을 맡아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김일성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군정이나 군정치위원)에 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김일성은 제1로군의 주요 지휘관(조선인 중 최고위직)이었으며 전광도 제1로군 참모부의 주요 참모였다. 일부 일제 관헌자료가 전광을 김일성의 상관인 양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1940년 4월에 일본 사법성 형사국에서 나온 한 자료는 제1로군 2방면군의 편성을 설명하면서 총지휘관에 김일성, 정치주임 전광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다. 아마 김일성·전광·위증민의 관계에 대한 일본 자료의 착각은 피검자가 조직상황을 허위 자백한 것이거나 아니면 나이 많은 오성륜(당시 36세)에 대한 김일성(당시 24세)과 위증민(당시 27세)의 예우를 상하관계로 착각했을 것으로 본다.
전광이 당시 1로군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중에 제일 높은 직위에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또 다른 반박의 증거로는 위증민이 1940년 4월 코민테른 주재 중공대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현재 살아남아 있는 주요 간부 18명의 이름을 대면서(이 중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인은 8명)당시 생존해 있던 전광의 이름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전광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중 원로인 것이 분명하나 그의 실제 위치는 김일성과 비교될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조국광복회는 결성 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사단장에 김일성)에 의해서 전적으로 운영되었다. 조국광복회 관계 자료를 싣고 있는 일제 관헌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예외 없이 김일성의 제6사단이 조국광복회 조직운영의 추진기관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일성은 그에 대한 개인숭배작업이 본격화되기 전인 1947년졍에 이미 자신이 조국광복회의 회장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를 동료이자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던 수많은 항일무장투쟁 시절의 동료들이 고난의 투쟁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그 당시 상황에서 김일성이 그의 전우들이 뻔히 다 아는 사실을 거짓말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무송현 동강에서 조국광복회 결성을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3사단은 1936년 7월 금천현 하리회의에서 보다 효과적인 항일유격전의 전개를 위해 항일연군 1·2로군이 통합함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으로 명칭을 바꾸고 그 해 8월 무송현성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무송현내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무송현의 장백산록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자 6사단의 주력부대는 1936년 가을 다시 사단장 김일성의 지휘 아래 장백현 방면으로 진출하여 백두산 주변의 삼림지역에 수많은 밀영들을 건설하였다. 여기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장백근거지가 갖고 있는 투쟁상 유리한 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장백·무송·임강·안도 일대는 울창한 밀림과 산악지대로서 이 지역 적군의 통치 중심을 포위하고 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지방은 밀림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항일연군의 병영과 후방기관을 방위병력 없이도 설치할 수 있으며 각종의 유격전술을 적용할 수 잇는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이 곳은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서 대다수 주민은 삼림노동자였다. 그들은 일제의 탄압과 지주의 잔혹한 착취 밑에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항일투쟁에 쉽게 참가할 수 있었다.
셋째, 이 지방은 동북에 있어서 일제 식민통치가 가장 약한 고리였는 바 백두산 일대는 아직 집단부락이 공고히 설립되지 못하였다. 주민의 대부분은 산곡·하천지대에 거주하였으며 교통과 통신망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이상의 조건을 갖춘 장백근거지를 건설하면서 제6사단은 장백현과 조선 국내에 대한 조국광복회 조직 확대 작업에 나섰다.
1936년 12월에 김일성은 권영벽·이재순·장중렬 등을 통해 장백현내 조국광복회 조직을 건설하는 한편 박달·박금철(함경남도 갑산군 거주) 등을 만나 국내에서의 조국광복회 건설사업을 지시하였다. 조국광복회의 조직 확대 작업은 짧은 시간내에 급속하게 이루어져 1937년 10월 조국광복회 조직에 대한 1차 검거가 있기 전에 이미 장백현은 물론이고 국내에 갑산군을 포함한 함경남북도 북부 일원과 평안북도 북부, 그리고 흥남·함흥·원산·신의주까지 이르는 광범한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비록 전국적 범위로까지 확장되지는 못햇으나 장백근거지에서의 조국광복회 확대작업은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장백현내의 조선 민족에 대한 공작은 간도에서의 광범한 통일전선체의 형성을 소규모로나마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조선 국내에 대한 공작은 지금까지 암흑기로 평가되던 1930년대 후반에 수백명의 무력을 담보한 조선인들의 반일통일전선체가 활발히 움직였음으로 해서 역사의 일부가 보다 긍정적으로 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③ 국내진공작전의 감행과 만주 상황의 악화
1936년 말부터 1937년 초까지 백두산 일대의 장백현근거지를 중심으로 국내외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확장시키는 데 성공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단은 1937년 6월 조국광복회 국내 조직과 연계하여 조·중 국경선을 넘어 보천보를 습격함으로써 최초의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였다. “약탈·납치·방화에 불과한 맹동적 모험주의”, “조선 인민에게 조국해방의 서광을 비추어준 쾌거” 등 보는 시각에 따라 천차만별의 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는 김일성이 통솔하는 제6사단의 전투병력 80여명과 박달·이송운·김왈룡 등이 거느린 갑산군내 조국광복회 소속 결사대원 73명이 호응하여 이른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유격전술에 의해 최현·김일 등이 이끄는 제4사단이 5월 말에 무산 방면으로 진출하여 적군의 신경을 자극시키고 있는 가운데 수행된 작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김일성 부대는 보천면 소재지의 일제 통치기관들을 모두 파괴하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김일성 명의의 포고문을 뿌리고 1개 소대 규모의 일제 군경을 격퇴하였다. 북한의 문헌들에 따르면 김일성은 “환호하는 인민들 앞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모든 인민이 반일전선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 전투는 국내의 각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되어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보천면의 면소재지였던 보전은 조선인 284호, 일본인 26호, 중국인 2호가 살고 있었다. 비록 전투규모는 지금까지 6사단이 치러온 전투들에 비해서 크지 않았지만 그것이 조국광복회 결성 후 최초의 국내진공작전이었으며, 조국광복회의 국내 지하조직이 동원되었다는 데서 그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본다.
보천보전투에서 일격을 당한 일제는 이를 보복하기 위해서 조선주둔군 제19사단 함흥 제74연대 병력과 위만군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동원하여 추격해왔다. 이에 동북항일연군은 1937년 6월 30일에 제6사단 병력 350명과 제4사단 병력 2백여명과 제2사단 병력 60여명이 연합작전을 펼쳐 간삼봉전투(間三峰戰鬪)에서 일본군 1백여명을 살상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간삼봉전투에서 패주한 일본군 제74연대의 지휘관은 김석원(金錫源)으로 알려져왔으나 김석원은 그때 서울의 제78연대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함흥의 74연대에는 김석원과 일본육군사관학교 제27기 동기생인 김인욱(金仁旭)이 근무하고 있었다. 아마 중일전쟁 직후 김석원이 중국전선으로 전근되어 제40여단 첨병대장으로 군공(軍功)을 세운 것이 국내에 알려져 그가 유명해졌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북한 문헌에서는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있어서 최대의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제6사단이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 개가를 올린 직후인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을 계기로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했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중국 관내에서도 전국적인 대일항전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이제 만주 각지에서의 국부적인 항일유격전이라는 단독작전에서 전국적인 대일항전의 일환으로 작전의 성격을 바꾸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1로군은 일본군의 관내진입을 견제하고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서 보다 광활한 동남만지역에서의 활동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6사단의 경우 기존의 장백·무송현을 중심으로 한 유격전활동의 범위를 몽강·휘남현성으로 넓히게 되었다.
따라서 김일성은 1937년 가을 소수의 병력을 남겨둔 채 주력부대를 이끌고 장백현을 떠나 임강·몽강·휘남현 등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을 맞아 일제의 병력이 증강되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추진된 이 변화된 작전은 1937년 겨울부터 1938년 봄 사이에 유례 없는 강도로 실시되었던 일본군의 대토벌에 부딪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수많은 부대들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적군의 발악적인 대토벌을 피해 김일성이 이끄는 제6사단은 1937년 겨울 몽강현 마당거우에서 깊은 산속의 밀영으로 자취를 감추고 그곳에서 이듬해 봄까지 군정학습을 실시하였다.
적군의 대토벌 속에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주요 지도자들은 1938년 5월 11일에서 6월 1일까지 집안현 노령에서 제1로군 군정간부회의를 개최하였다.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를 비롯하여 위증민·한인화·서철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일제에 대한 유격전쟁을 견지하고 실력을 보존하여 적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분쇄한다”는 방침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관내의 중국국민혁명군(中國國民革命軍) 제8로군과 연계를 맺고 동시에 동북의 각 항일의용군과 결합하여 협동작전을 전개한다는 양정우의 서정(西征)계획이 제출되었다. 이에 따라 제1로군의 1·2사단에서 일부 병력을 뽑아 3사단을 보충하여 서정부대를 편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제1로군의 서정계획이 확정된 제1차 노령회의가 있은 지 불과 한 달만인 1938년 6월 29일 제1군단 제1사단장 정빈(程斌)이 일제에 투항하는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하였다. 정빈의 투항은 제1로군 전체에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 제1사단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빈이 알고 있던 1로군 지도부의 행적과 각 소속부대의 전략·전술, 중요 군사기밀 등이 적군에게 폭로되어 제1로군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돌발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 1938년 7월 제1로군 주요 지도자들은 집안현 노령에서 재차 회의를 소집하였다. 제2차 노령회의에서는 서정계획이 취소되고 제1로군의 개편이 단행되었는데, 제1군단과 제2군단을 해체하고 대신 세 개의 방면군과 한 개의 경위여단으로 제1로군을 재편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제1방면군은 제1군단 제2사단과 제3사단의 잔여부대를 합쳐 조아범을 제1방면군 사령관으로 삼아 편성하고,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제2군단 6사단으로 편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제3방면군은 제2군단 4사단과 5사단을 합쳐서 진한장을 제2방면군 사령관으로 삼아 편성하기로 결정되었다. 당시 각 부대들이 분산되어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개편 결정이 당장 실행될 수는 없었다. 각 부대가 정식으로 개편되는 시기를 보면 경위여단이 1938년 7월에, 제1방면군이 흑할지구에서 1938년 8월에, 제2방면군이 남패자에서 1938년 12월에 각각 편성되었으며 제3방면군은 1939년 8월 안도현 양강 한양구에서 편성되었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1938년 11월 몽강현 남패자에서 열린 군정간부회의에서 제1·2군단의 조직개편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왜곡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2방면군이 정식으로 성립되는 것은 1938년 12월이며, 이때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가 남패자에 와서 제2방면군 정식 개편을 위한 간부회의를 소집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당시 제1로군은 휘하에 6개의 사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6사단이 그대로 제2방면군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본군의 대토벌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개된 유격전에서 제6사단이 전투역량을 가장 잘 보전하였으며 제1로군내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이 군사지도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사실 제2군단에서는 군단장 왕덕태가 1936년 11월 무송현 소탕하에서 전사하자 정치위원 위증민과 함께 제6사단장 김일성이 제2군단을 이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의 문헌들에 의하면 제1로군 개편시 제6사단(북한 사회과학원의 표현으로는 조선인민혁명군)은 제2방면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전투력이 취약한 다른 부대에 자기 병력을 보충·강화시켜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참고로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다수였던 제2방면군의 부대편제를 살펴보면 사령관은 김일성, 정치부주임은 여백기, 참모장은 임수산, 부관장은 필서문, 제7사단장은 오증흡, 제7사단 정치위원은 주재일, 제8사단장은 손장상, 제8사단 정치위원은 김일, 제9사단장은 마덕전, 제10사단장과 제10사단의 정치위원은 불명이며, 경위연대장은 오백룡 등이었다. 제3방면군의 부대편제를 살펴보면 사령관은 진한장, 참모장은 박득범, 제13사단장은 최현, 제13사단 정치위원은 조정철, 제14사단장은 전동규, 제14사단 정치위원은 안길, 제15사단장 겸 정치위원은 이용운 등이었다.
남패자회의가 끝난 뒤인 1938년 12월 제2방면군 사령관 김일성은 그의 부대를 이끌고 다시 압록강 연안 국경지대(장백지구)를 향해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알려진 100여일간의 행군길에 올랐다.
실로 장백지구를 떠난 지 1년여만의 귀로였으나 제2방면군이 험로를 해치고 장백지구에 도착한 1939년 봄의 장백근거지는 이미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1937년 8월부터 장백현 일대에는 일제의 치안공작의 일환으로 집단부락이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조국광복회의 압록강 연안의 중심 조직들은 1937년 10월부터 이듬해의 두 차례에 걸쳐 739명이 검거된 이른바 ‘혜산소탕사건’으로 인해 붕괴상태에 있었다. 이제 항일유격대의 엄혹한 시련기가 닥친 것이다. 일제가 백두산 서남부인 장백현 일대에 대병력을 집중시켜 토벌을 감행하고 있는 시점에서 장백근거지에서의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 부딪친 제2방면군은 1939년 4월 그간 소부대 편성으로 고난의 행군을 마친 간부들을 장백현 북대정자에 모아놓고 김일성의 주재 아래 앞으로의 진로를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무산전투계획과 백두산 동북지대로의 진출이 결정되었다. 오늘날 북한의 문헌들에 의하면 김일성이 이 회의에서 “적극적인 반격전으로 일제의 침략자들을 연속 타격하고 조국으로 진격하자”는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무산지구 전투에 대한 세부계획이 세워지자 제2방면군의 주력부대는 1939년 5월 16일 장백근거지를 떠나 무산지구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청봉·베게봉 등에서 숙영하고, 삼지연·무포를 거쳐서 5월 22일 대홍단 일대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항일유격대는 일제가 제2방면군의 대홍단 일대로의 진출을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 국내 민중을 상대로 정치군사활동을 벌이고 이튿날인 5월 23일 대홍단 벌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에 승리하고 두만강을 건너 장사령으로 철수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의 주력은 1935년 여름(동북인민혁명군 제2로군 시절) 그들의 근거지였던 동만을 떠난 지 4년만에 다시 동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만주의 모든 지역이 그러했듯이 동만의 상황도 그들이 부득이 유격전근거지를 떠났던 1935년보다 더 악화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일·소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관동군은 끊임없이 증강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위기는 일제의 대토벌계획이 다시 수립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제 항일유격대가 다시 간도로 돌아왔으니 일제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토벌작전을 감행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 것이다.
☞ 이종석 전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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